눈동자 [정한모]
지금
아가는
먼 피리 소리를 듣고 있다
영원과 같은
그렇게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아가는 듣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푸르름도
흐르다 여기에 머무르고
어항의 금붕어
노란 꽃병
운명처럼 기울어진
슬픈 얼굴
모두 다
그대로 고운 것처럼 지니고
먼 피리 소리같은
맑음만이 엉기는
정한 우물
무서움에 부릅뜨는 눈을
아가는 모른다
저주스런 손가락은
멀리 가져가라
너였을 적의
꿈의 어느 골짜기
들국화 그늘 아래
두고 온
우물
지금껏 아득히 잊었었던
이 우물 위에서
나의 웃음은 서글프고
담겨진 얼굴은 구겨지기만 하는데
아가는
지금
맑게 서리는
먼 피리 소리만을
두 눈 모아
듣고 있는 것이다.
- 정한모 시선, 지만지, 2014
간이역 [김참]
노랑나비 날아다니는 하늘은 코발트블루. 그 위에 녹색 양떼구름 둥둥 떠가고 철도 레일 같은 검은 전선들 코발트블루 하늘을 양분한다. 하루에 한 번 오는 기차는 전선 늘어진 해변 마을을 달리며 길게 기적을 울린다. 건물들 위엔 회색 지붕 배처럼 떠 있고 지붕에 늘어선 선인장 화분에서 노란 꽃 핀다. 창문들은 벽돌과 벽돌 사이에서 오후의 바다처럼 반짝이고 창문과 벽돌을 가르며 늘어선 검은 전선을 타고 기차는 느릿느릿 지나간다. 아이들은 나비처럼 들떠서 파란 물결 넘실대는 해변의 해당화 꽃밭 따라 팔랑팔랑 뛰어다닌다.
- 그녀는 내 그림 속에서 그녀의 그림을 그려요,문학동네, 2020
노랑 [고명재]
루드베키아라는 꽃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노란 꽃인데요
노랑은 독주를 넘길 때 목젖을 치는
모든 술들의 지느러미 색입니다
흔들어둔 샴페인을 누르는 엄지죠
지문 밑에서 전갈자리가 간질거려요
들리나요 개들이 흙길을 달리는 소리
우리는 밤하늘에 탄산수를 엎지른 채로
멀리 떨어진 별들의 재채기 소리를 들어요
사과를 깎거나 귀를 파거나 참깨를 뿌릴 때
재갈거리는 모든 소리에 노랑이 있어요
당신의 개가 샛노란 털을 두르고 있죠
노랑은 힘차고 당당합니다 절정을 내딛죠
오늘은 창밖으로 이불을 터는 날
귀와 귀를 붙잡고 황소를 타듯
입술을 깨물고 힘차게 이불을 털면
섬유의 파도 끝에서
모서리가 열리는
그 순간의 정점도 노랑입니다
그러니 나랑 꽃 보러 같이 갈래요
소리 없이 성냥을 켜는 법을 알아요
머리가 무거운 꽃이 허청, 휘청거릴 때
우리의 눈동자엔 혜성의 꼬리가 밝게 스치고
손끝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랑 같이
책 보러 강에 갈래요
콩나물처럼 머리를 밝히고 사랑을 말해요
불상처럼 차분하게 눈감은 채로
왼편으론 당신, 강물, 둔덕이 있고
오른편엔 감자 같은 내가 있지요
나는 그래요 그냥 있어요
곁은 그런 것
손 내밀면 확고한 형태로 있을 거예요
수천 년을 건너온 은행나무처럼
-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문학동네, 2022
봄의 묵서 [조용미]
당신은 몸뚱이가 가지고 있는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고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지요 살가죽의 고독, 눈꺼풀의 고독, 입술 가운데 주름의 고독, 엄지와 검지 사이 살이 구겨진 듯 오래 접혀 있을 때의 고독, 무너지지 못하는 등뼈의 고독, 종아리뼈의 고독, 뭉클뭉클 흘러나오는 어두운 피의 고독을
당신도 혹 이곳에 발붙이고 있어도 늘 저곳을 향하고 있는 마음이 따로 있진 않은지요 자의식 과잉의 먹구름이 늘 폭우를 동반하고 머리 위를 떠다닌다면 그 정신과 육체는 너무 습도가 높아 목까지 찰랑거는 슬픔이 그득 차 있겠지요
어떤 마음은 슬픔의 힘으로 무럭무럭 자라 꽃과 잎을 피우고 열매 맺고 스러져 갑니다 어떤 마음은, 몸속 어딘가에 깨알 같은 혹을 만들어 놓고 키웁니다 슬픔이 불러들인 미세한 파장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혹은 몸 안에서 따뜻하고 서글프게 오래도록 머뭅니다
생강나무에 물이 올라 노란 꽃이 맺혔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꿰뚫어 보면 그 실체가 물질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노랑에서 분홍으로 봄이 자리를 조금씩 옮겨 가고 있습니다 아아, 몸이 달라지고 있는 봄입니다
늘 걷던 길이 햇빛 때문에 달라 보이는 시간, 봄볕에 발을 헛디딥니다 햇빛 때문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가 달라지다니요 꽃과 나무와 마음을 변화시키는 봄볕에 하릴없이 연편누독만 더 합니다 부디, 마음 때문에 몸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 2016
옛날 옛적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송찬호]
마당가 분꽃들은 노랑 다홍 빨강 색색의 전기가 들어온다고 좋아하였다
울타리 오이 넝쿨은 5촉짜리 노란 오이꽃이나 많이 피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닭장 밑 두꺼비는 찌르르르 푸른 전류가 흐르는 여치나 넙죽넙죽 받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한 우리 식구들, 늦은 저녁 날벌레 달려드는 전구 아래 둘러앉아 양푼 가득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 드디어 장독대 옆 백일홍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이제 꽃이 바람에 꺾이거나 시들거나 하는 걱정은 겨우 덜게 되었다
궂은 날에도 꽃대궁에 스위치를 달아 백일홍을 껐다 켰다 할 수 있게 되었다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문학과지성사, 2009
잡초송(雜草頌) [구상]
희랍신화(希臘神話)의 혀 안 돌아가는
남녀신(男女神)의 이름을
죽죽 따로 외는 이들이
백결(百結)선생이나 수로부인(水路夫人),
서산대사(西山大師)나 사임당(師任堂)을 모르듯이
클레오파트라, 로미오와 줄리에트,
마릴린 몬로, BB의 사랑이나
브로드웨이, 할리우드의 치정(痴情)엔
횡한 아가씨들이
저의 집 식모살이
고달픈 사정도 모르듯이
튜울립, 칸나, 글라디올러스,
시크라멘, 히아신스는
낯색을 고쳐 반기면서
우리는 넘보아도
삼생(三生)에 무관(無關)한 듯
이름마저도 모른다.
그 왜, 시골 그대들의 어버이들이
전해가지고 붙여오던
바우, 돌쇠, 똘만이,
개똥이, 쇠똥이, 억쇠,
칠성이, 곰, 만수,
이쁜이, 곱단이, 떡발이,
삐뚤이, 순이, 달,
서분이, 꽃분이,
이런 정답고 구수한 이름들 함께
우리 이름도 한번 들어보겠는가.
민들레, 냉이, 달래, 비듬,
떡쑥, 토끼풀, 할미꽃,
범부채, 초롱꽃, 쐐기풀,
이런 것이야 누구나 알지만
홀아비꽃대, 염주괴불주머니, 광대수염,
개부랄풀, 벼룩이자리, 개구리밥,
도깨비쇠고삐, 퉁퉁마디, 무아재비,
며느리배꼽, 개미탑, 큰달맞이꽃,
처녀이끼, 도둑놈갈구리, 도깨비바늘,
거지덩풀, 애기똥풀, 미치광이,
이렇듯 재미있고 천연(天然)스런
이름들을 들어보기나 했는가?
땅속 줄기에다
홀아비 사추리의 무성한 것 같은
꽃수술을 달았으니
홀아비꽃대요,
퉁겨운 줄기에
꽃주머니가 양쪽으로 달렸으니
염주괴불주머니요,
홍자색(紅紫色) 입술 꽃부리로
아래턱이 세 갈라진 데다
두 장의 수염 같은 수술꽃이 달렸기에
광대수염이요,
온몸에 짧은 털이 나고
잎은 뭉툭한 톱니를 가진데다
불그레한 두 장의 꽃이
마치 덜렁덜렁 달린 무엇 같기에
개불알이요,
잎은 둥근알 꼴
온몸엔 가는 털이 끼어서
벼룩이가 붙은 꽃 같기에
벼룩이자리요,
겨울 연못에도
눈을 맞으며 떠 있기에
개구리밥이요,
덩이 줄기에다
길이 1미터나 되는 큰 잎이
광택을 내고 있어 `그로테스크'하기에
도깨비쇠고삐요,
바닷가에
큰 마디가 줄기마다 달린
퉁퉁마디,
역시 바닷가에 살지만
굵은 무 같은데
거기다 수염이 달려
무아재비,
고운 여인 알몸의
꽃 속이 피어서
며느리배꼽,
이삭꽃이
불개미떼가 붙은 것같이
황갈색(黃褐色)으로 피기 때문에
개미탑,
큰달맞이꽃은
온몸에 부드러운 융털이 있고
여름밤에 노랑꽃이
크게 피어 어울리며
처녀이끼는
제주도(濟州道) 나무와 바위에
실꼴[絲形]로 흐느적거리고
잎과 홀씨주머니가 알을 품은 것 같다.
이름마저 흉측한 도둑놈갈구리는
부스스한 열매가 한번 옷에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고
도깨비바늘도 역시
바늘 같은 열매가 달라붙으며
거지덩굴은
더러운 손자국, 발자국처럼 지저분하고
애기똥풀은
노란 진물이 나오고
미치광이는
흙탕 같은 온몸에 잎과 꽃이
어둡고 어지럽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며느리미씨개, 참소리쟁이,
갓버섯, 벌레잡기, 오랑캐, 끈끈이주걱,
팔손이나무 등
우리 친구들 이름과 그들의 특징을
주워 섬기자면 한이 없다.
옛부터 일러오기를
하늘이 녹(祿)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없는 풀을 싹트지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길섶이나 밭두렁이나 산비탈에
어느 누구의 신세도 안 빌고
자연으로 싹터서 자연의 구실을 하다
자연히 스러지는 우리들의 본명(本命)!
그대 시인(詩人)이란 것들마저
함부로 잡초(雜草)라 부르고
소외(疎外)하는가!
- 구상연작시집, 시문학사, 1985
그 집에서는 사랑이 펑펑 터진다 [주경림]
불청객이라고 전신주에서 쫓겨난 노랑때까치
우리 동네 가장 높은 곳
5층 건물 옥상에 심어진
이동통신 기지국 안테나에 둥지를 튼다
안테나 파이프를 석가래 삼아 기초공사를 다진다
도심지에서는 원자재 품귀 현상이라
휘어진 못, 철근 조각, 옷걸이까지 물어들여
그 집은 오각형 칠각형으로 삐죽삐죽하게 발전한다
강풍에도 끄떡없을 석가래
바로 피뢰침 밑이라 안전지대이다
두꺼운 장애물도 팍팍 뚫는 800MHZ 전파를 타고
숫놈의 사랑도 펑펑 터진다
머리에서 등까지 검은 털이 반지르하고
뱃살이 노란 노랑때까치 한 마리
헝겊 조각을 물고 둥지에 든다
암컷이 알을 낳으려나보다
이제, 휴대폰 통화에도 간간이 까치 지저귐이 끼어들어
너와 나의 교신에 방해받지나 않을런지
날마다 조금씩 부풀어오르는 그 집
그 집에서는 사랑도 날개를 달고 있다.
- 무너짐,혹은 어울림, 시선사, 2021
붉은 사각형 [조용미]
그 사각형 안에는 수십 가지 뉘앙스의 미묘한 색들이 있다 붉은색만 보려 한다면 붉은색만 보인다 당신이 그 안에 갇힌 얼음 같은 붉은 색은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는다
위아래로 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사각형, 어떤 사각형도 그렇게 명상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주홍색이거나 검은색이거나 짙은 초록색이거나 퍼져 나가는 노랑이거나 자주색이거나 군청색이다 때로 서너 개의 사각형이 앞뒤로 겹쳐 있거나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붉은 사각형은 우기의 저수지처럼 여러 가지 색들을 다 빨아들였다 그 붉음 안에 동일한 양의 다른 색들이 웅크리고 있다 붉은색 사각형 안에 어른거리는 것들은,
모든 색들의 진정한 기원은 무엇인가
깊은 색을 천천히 뚫고 나오는 나른하고 고요한 밝은 색의 소리들을 다 걷어 내고 나면, 그것은 고요하거나 소란하거나 적대적이거나 온순하거나 신성한 그저 하나의 둥그스름한 붉은 사각형
-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 2016
튤립 [김혜영]
공원은 기하학이다
두 손은 다정하고
공사장 인부의 안전모가 빛나고
먼 네덜란드를 떠나온 튤립 구근은
부산 시민공원 입구에 피어나
나비 떼처럼 흔들린다
카메라 렌즈에 비친
노란 튤립 사이로
수녀의 검정 치마가 흔들린다
은은히 불어오는 예감에
입술은 공기처럼 부풀어 오르고
튤립 봉오리는 미풍에 고개를 흔든다
벤치에 앉은 노인은
아내의 손을 쓰다듬는다
감미로운 속삭임이 번지는 저녁
곁에 가만히 다가온 몸짓
누구일까,
계절을 기억하는 나선형 우주는 음악을 켜고
우리가 사랑한 붉은 튤립이
흔들린다, 기하학적으로
- 다정한 사물들, 여우난골, 2021
즐거운 일기 [최승자]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 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 많이 사랑해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1984
프로페셔널 [권현지]
겁 많은 빨간 목도리 안으로
한쪽 눈만 보여주는 표범 무리가 있다
의심스럽게 반짝이는 숲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물 위로 떠다니는 구멍 난 치즈처럼
맨다리의 촉감을 생각하며 준비운동을 한다
호루라기를 문 오리들의 삐, 신호음이 들려와
나는 연못 안으로 뛰어든다
움직이면 조금 더 커지는 바다를, 떠올리며
바닥 위로 자라나는 가시들은 온통
촉감 인형처럼 간지럽다
양동이를 뒤집어쓴 마을은 내게 걸어온다
온통 머리는 하얗고 들판처럼 투명하다
나는 두 다리를 가슴 쪽으로 모으고
조금씩 작아지려는 태아처럼,
피리들의 아지트 안에서
빈 병을 바라본다
너는 이제 울어야 해,
물 위로 둥둥 떠오르는 식빵의 마음으로
트리 위에 양말을 걸고 싶다
저 멀리, 검은 표범을 타고 파란 수염의 여자가
달려온다 돋보기로 나를 확대한다
나는 인중을 최대한 오므린다, 눈을 가운데로 모은다
그러나 웃을 때 치아가 보이지 않는 콤플렉스는
가장 높은 빨간 에나멜 구두가 되고 싶다
조금씩 방향을 다투어 회전하는 숲들
진열장은 휘청거리고, 병들은 바닥 위로 굴러떨어진다
유리 파편 사이로 집게를 버린 전갈들
유심히 나를 바라본다
- 우리는 어제 만난 사이라서, 천년의 시작, 2018
색맹 [송경동]
어려서부터 도무지
색 구분을 하지 못했다
빨강 노랑 파랑은 알겠는데
군청과 코발트의 경계는 알 수 없는 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때로 색맹이 되거나
꿀벙어리가 되었다
얘기해야 할 때 주저하고
확고해야 할 때 두루뭉술했다
하지만 생각커니
내가 왜 색맹이어야 하는가
나는 안다. 그의 서늘해진 눈빛이 무얼 말했는지
그의 붉어진 볼에 어떤 진실이 서렸는지
지금도 빨강은 노랑은 파랑은
내게 아무것도 연상시키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무슨 무슨 주의도
내겐 아무것도 떠올려 주지 않는다
그가 한때 흘렸던 눈물에는
프롤레타리아도 전위도 하위도 아닌
구획되지 않은 한 영혼의
고귀한 빛의 울림이 있었다
- 꿀잠, 삶이보이는창, 2011
비가역 [조용미]
창밖으로 자동차 소음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낯선 곳에서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잘 읽히지 않는 이 책의 한 페이지에서 여러 번 책장을 덮었다 다시 펼칠 때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들길을 걷다 노랑꽃창포와 골풀이 피어 있는 습지를 만나고 거기서 고라니가 뛰어나오는데 당신을 떠올릴 겨를이 없다
어떤 깊고 얕은 풍경 앞에서도 나는 당신을 떠올리지 않는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온전히 다 나의 것이었다니
이제 나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으니 당신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한가함이 더해진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자 새로운 일이 일어난다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일과는 또 다른 새로움이 생겨난다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노랑 / 오봉옥
시작은 늘 노랑이다. 물오른 산수유나무 가지를 보라. 겨울잠 자는 세상을 깨우고 싶어 노랑별 쏟아낸다. 말하고 싶어 노랑이다. 천개의 입을 가진 개나리가 봄이 왔다고 재잘재잘, 봄날 병아리 떼 마냥 종알종알, 유치원 아이들 마냥 조잘조잘, 노랑은 노랑으로 끝나니 노랑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잠든 아이를 내려놓듯이 노랑꽃들을 내려놓는다. 노랑을 받아든 흙덩이는 그제야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초록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노랑이 저를 죽여 초록 세상을 만든 것.
= 노랑, 천년의 시작,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