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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제(楊堅, 高祖 文皇帝, 541년~604년)
카롤루스 대제가 이뤄낸 통일 유럽은 그의 사후 다시금 분열되었으나
수문제가 이뤄낸 통일 중국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마이클 하트 著,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 中
남북조시대 말기 북주의 권력자이자 수나라의 초대 황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휘는 양견(楊堅).
양견은 홍농의 화음 출신으로 수국공 양충(楊忠)과 여씨(呂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홍농 양씨는 주나라 대부터 이어진 한족의 명문가로 후대의 기록에서는
양견의 집안은 양진의 후손을 자칭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선비족 탁발씨가 건국한 북위의 황제인 효문제가 지배자인
선비족들의 성씨를 한족 성씨로 바꾸는 과정이 있었고, 이 영향으로 훗날
양견의 아버지인 양충이 한족 성씨인 양씨를 하사받았다.
즉 북위가 한족 땅을 정복하면서 나타난 8주국 선비족 가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 하나의 성씨는 보륙여씨(普六茹氏)인데 양충이 서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로부터 하사받은 성이다.
아버지 양충은 독고신의 부하로 독고신과 양충은 서위의 실권자였던 우문태에게 의지하던 상태였다.
양충은 우문태의 아들인 우문각이 원씨(탁발씨)의 서위를 멸망시키고
북주를 세울 때 여러 차례 공훈을 쌓아서 북주 정권에서 공훈을 쌓은 관리 가운데
가장 높은 칭호인 '주국대장군'의 직위에 있었으며 '수국공'에 봉해졌고 재상의 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의'를 맡아 제국의 군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양견은 부친 양충을 이은 수국공으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아버지의 공훈 덕분에 다양한 관직에 앉을 수가 있었다.
한번은 권신 우문태가 어린 양견을 보고 "이 아이의 골격과 풍채는
세상 사람과 같지 않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렇게 양견은 아버지 양충 덕분에 관직이 계속 높아졌고 그런 양견에게 위협을 느낀
북주의 명제 우문육은 관상가 조소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는데
그는 양견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일부러 명제 우문육에게
양견은 대장군 감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양견에게는 "공은 천하의 황제가 될 사람이오,
하지만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천하가 안정될 것이니,
부디 내 말을 기억하시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고제 유방처럼 소위 '융준용안'의 풍모였던 것 같다.
이후 양견의 장래가 유망하다고 생각한 독고신은 양견의 나이 16세 때
자신의 딸 독고가라를 시집 보냈다.
선비족의 대귀족인 독고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양견은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젊어서부터 양씨 가문과 독고씨 가문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573년 무제 우문옹은 양견의 장녀 양여화를 자신의 아들이자 후일 북주의
선제가 되는 태자 우문윤의 비로 삼았으므로 양견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표기대장군'과 '대흥군공' 등의 벼슬도 받아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은 다른 사람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왔기에
그를 시기하고 암살하려고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양견은 그 뒤에도
군대를 이끌며 북제의 군대를 격파하여 '주국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선제가 제위에 오르자 두각을 드러내던 양견은 실권자로 부상, 사위인 선제가
순행을 나갈 때면 언제나 양견에게 도성을 지키게 했다.
선제는 엄격하고 잔혹한 법으로 백성을 다스렸지만, 양견은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기에 점차 장인인 양견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무능했으며 방탕한 생활을 하여 주변에 자신을 위하는 인재가
존재하지 않았고 때문에 양견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 시기 선제의 황후들이 서로 황제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이간질하며 싸우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양견의 딸인 양황후의 질투에
분노한 선제가 화가 나서 "내가 반드시 너의 가족들을 멸족시킬 것이다", 하며 격노했다.
그러고는 내시에게 명령하여 궁궐에 살수들을 매복시킨 뒤, 살수들에게
만약 양견이 조금이라도 무례한 모습을 보이면 내가 그를 죽이라고 명령할 테니
그때 양견을 죽여라!"라고 명령했다.
그 후 양견을 궁궐로 불러서 정사를 논의했는데, 양견은 이미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기 때문에
황제의 뜻을 알아차리고,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황제가 아무리 자극을 하고
무례하게 굴어도 표정 변화조차 없어 죽일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북주에서 봉직하며 살던 중 선제가 579년에 사망하고
양견의 외손자뻘인 어린 정제 우문천이 즉위하였다.
보통 우문천이 양견의 외손자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친 외손자가 아니다.
물론 양견이 선제의 장인인 것은 사실이나 선제는 황후가 4명이었다.
정제는 선제의 황후 중 한 명이었던 천대황후 주씨의 아들로서 양견의 딸인
천원대황후 양씨의 소생이 아니었다. 훗날 황태후 양씨는 양견이 선양을 받고
황제로 등극한 뒤 졸지에 황태후에서 공주로 신분이 변하고 말았는데, 이러한 케이스의 또 다른
인물로 신나라 가황제 왕망의 딸이자 전한 평제의 황후였던 황황실주 왕씨가 있다.
어쨌거나 정제 우문천은 나이가 고작 8살 정도에 불과하여 제대로 국정을 이끌 수가 없었고
결국 많은 신하들의 동의하에 외조부 '격'인 양견이 조정의 정치를 관장하고 어린 정제를 보좌하며
구석(九錫)을 하사받은 후, 수왕(隨王)이자 승상, 섭정으로서 제국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는 선제의 동생인 우문찬이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양견은 그에게
당신이 앞으로 황제가 되실 분이시니 당분간 나랏일에 신경 쓰실 것이 아니라
집에서 소식을 기다리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그 다음으로 양견은 지방에 있는 우문씨의 다섯 왕들을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궁궐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즉시 그들의 병권과 인신을 빼앗았다.
이에 이들은 우문씨가 세운 나라의 어린 황제가 양견에게 조종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암살하기로 하였다.
이들 중 한 명인 조왕 우문초는 양견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술을 마실 때 죽일 계획을 세웠다.
조왕의 요청에 응한 양견은 양홍, 원주 등의 측근들을 거느리고 그의 저택으로 갔다,
양견은 그가 혹시라도 술에 독을 탈까 봐 마실 술을 직접 들고 갔다.
양견이 저택에 도착하자 조왕은 아들에게 "네가 술안주로 오이를 가지고 들어와라,
내가 칼로 오이를 깎는 척 하면서 양견을 찔러 죽이겠다."라고 은밀히 말했다.
조왕은 양견을 내실로 안내할 때 두 사람만이 허심탄회하게 술을 마시고 싶다는 명분으로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다만 양견은 양홍과 원주와 같은 최측근만 내실 문 밖에서 대기하게 했다.
양견과 우문초가 술을 마시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면서
조왕은 계속 칼로 오이를 깎아서 양견에게 계속 먹였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조왕은 오이를 먹이는 틈을 타서 양견을 찔러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원주가 문을 열고 내실로 뛰어들어와서
"승상부에 급히 처리해야 할 공무가 많아서 지금 빨리 승상부로 가야 합니다."라며
양견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조왕은 원주에게 화를 내면서 "나와 승상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 놈이 감히 나서느냐? 당장 물러가라!"라며 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원주는 칼을 쥔 채 조왕을 노려보며 양견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조왕은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원주에게 술을 조금 나눠주고는
거짓으로 구토하는 척을 하면서 후원의 누각으로 갔으나 조왕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한 원주는 조왕을 따라갔고, 그를 부축하여 내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조왕은 원주를 내쫓기 위해 물을 가져오라 했지만 원주는 듣지 않았다.
때마침 등왕 우문유가 조왕의 저택에 도착했고, 양견이 그를 맞이하러 내실에서 나왔을 때
원주가 양견에게 귀엣말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만약 저들이 먼저 선수를 친다면 큰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괜찮으니 어서 떠나시지요."라며 재촉하여, 양견은 내실에 돌아온 후에
바쁜 일이 있다며 측근 양홍과 함께 떠났다.
그러자 조왕이 양견을 막기 위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원주가 몸으로 문을 가로막아서 그를 나오지 못하게 했고, 그렇게 암살 시도는 끝이 났다.
마치 옛날 《초한지》의 홍문연처럼 원주는 기지를 발휘하여 적진 한가운데에서
목숨이 위험했던 양견을 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양견은 조왕 우문초와 등왕 우문유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웠고, 나머지 우문씨의
세 왕도 차례로 제거해 북주의 우문씨 황족과 지방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사실 양견은 자신의 손자뻘이었던 정제를 폐위시키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내 독고가라가 양견에게 "당신은 이미 하루에 1,000리를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처지이니 이제는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는 밀서를 보내서
황제가 되는 것을 결심하게 했고, 이에 양견은 마음을 정하여 정제를 압박했다.
결국 이듬해 옥좌를 지킬 힘이 없었던 정제는 제위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옛날에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한나라 헌제와 위나라 원제가 황위를 선양했듯이
짐도 천하의 안정을 위해 선양하노라."
양견은 많은 찬탈자들이 그랬듯이 정제의 선양을 예의상
세 번 정도 거절하고 난 후 황제의 옥좌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 양충 때부터 수(隨) 지방을 봉토로 받았고
자신이 수왕(隨王)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수(隨)로 정했다.
그러나 양견은 수(隨) 자의 책받침(辶) 변을 싫어했는데 갑자기 가다가 멈춘다는
불안하고 불길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래서 양견은 책받침 변을 빼고 수(隋) 자를 새로 만들어 국호로 정했고
연호를 개황(開皇)이라고 했다.
황제가 된 양견은 앞서 관상가 조소가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천하가 안정될 것"이라 말했듯, 자기에게 양위한 정제는 물론이고
그의 일족을 다 죽여버리며 잔혹한 면모를 보였다.
2.2. 중국의 분열기를 종결짓다
양견은 수나라를 건국한 이후 장안으로 도읍을 정했다.
원래 문제는 낙양을 수도를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적인 군벌들과 북주 근왕 세력의 저항을 받았으나
문제는 이들을 진압하면서 정제를 비롯한 우문씨 황족을 모두 주살했다.
북방의 돌궐이 자주 침입하자 장성을 세운 뒤에 성 수십 곳을 쌓아서
장성 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고, 이후 화친을 맺어 북방을 안정시켰다.
이후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들의 저항과 반감을 극복하고자 남벌을 진행하여
개황 7년(587년)에 소씨의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589년에는 진을 공격하였다.
당시 진나라의 황제인 진숙보는 사치와 방종에 빠졌고 간신들의 이야기에만
귀기울여서 나라가 크게 피폐해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는데 양견은 차남 양광에게
군사를 주어 진나라를 쳐서 없애고 마침내 오래도록 분열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2.3. 후대 왕조에 길이 영향을 끼친 정치 능력
수문제가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을 억누르고 저마다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늘리며 삼장제와 균전제를 확립시킨 것은
지대한 업적으로,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 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진 통일 왕조들의 토지 정책의 기본적인 틀로 작용했다.
또한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감면시켜 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걷지도 않는 행보도 보였다.
현실 국가에서 이렇게 하려면 석유나 천연 가스 같은 자원들이 왕창 나와야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수나라 재정이 좋았고 경기도 활성화됐다는 뜻이다.
지방에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으로, 100가를 리로 조직하여
통치 체계를 한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 어느 정도 제국의 기틀이 잡히자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들과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관료들의 부패를 끔찍히 싫어했던 탓에 관료들의 뇌물수수를 엄격히 밝히는 한편
뇌물과 관련이 있는 관료는 모두 참수했다.
심지어는 자기가 뇌물을 보내놓고 받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을 정도니
다른건 몰라도 뇌물과 사치에 한정해선 굉장히 엄격했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당시 관리들의 일상복은 귀한 비단으로는 만들 수가 없었고
허리띠의 장식도 금옥이 아닌 쇠붙이나 뿔로 만들어야 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 제도를 개혁하여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를 금지했으며, 과거제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다.
물론 강력한 귀족 세력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후 당나라 시대까지
관롱귀족의 견제 세력인 과거 출신자들을 기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사유화되어가던 관직의 공공성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마디로 수문제가 선거제를 병행하면서 황제는 귀족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선거제를 통해 등용된 관료들은 착실한 친황파가 되었다.
이는 당나라 중기부터 귀족을 견제할 사대부 계층의 형성을 이루어 냈고,
송나라 시기까지 가면 귀족 대신 사대부가 국정의 중심이 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구당서》, 《정관정요》에서 당태종이 신하들과 회의하다 수문제의 정치는 어떠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신하들은 위사전찬(衛士傳餐)이라고 하였는데, 자신이 혼자
모든 일을 밤늦도록 처결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어서 시위하는 군사들을 시켜
회의하는 곳으로 식사를 날라오게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문제는
정치와 국가운영을 신하의 도움을 받기보다 자기 혼자서 다 해먹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선 《정관정요》에서 당태종이 신하들에게 수문제에 대해 물으니
신하는 혼자서 늦게까지 일을 하는 수문제를 뛰어나고 근면하다고 평가했는데
당태종은 그 말을 부정하고 그건 그가 근면하다기보다는 의심이 많아서 중요한 일은
남에게 맡기지 못하고 자기 혼자서 다 맡은 것일 뿐이며 그래서 국가 운영이 늦어진다고 깠다.
다만 여기서 알 것은 수문제가 중요한 국정 운영과 일은 혼자서 다 맡아서
처리했다는 것을 신하들과 당태종 모두 동의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근면성실했다는 것. 여담으로 전술한 수문제의 위사전찬(衛士傳餐)이라는
고사를 똑같이 실행한 이가 후대의 당문종이었다.
수문제 시절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다. 제주 참군 왕가라는 사람이
70여 명의 죄수를 장안으로 압송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죄수들이 너무
힘들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죄수들의 몸에 걸친
칼과 쇠사슬을 풀도록 명령하고, 아울러 압송을 담당한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언제까지 장안에 도착하라고 이야기했다.
만약 죄수들이 도착하지 않으면 자신이 사형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죄수들은 모두 약속한 날짜에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고 전부 장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러자 수문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죄수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 그들에게
주안상을 하사하고 죄를 사면했다. 물론 왕가에 대해서는 벼슬을 높여주고 상을 내렸다.
한번은 관중 지방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수문제는 측근을 보내
백성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어떤 사람이 콩껍질과 쌀겨를 섞어 만든 떡을 수문제에게 진상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자책하고
수라의 반찬을 줄이고 오랫동안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수문제가 이질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어의가 궁궐에서
이질약을 조제하는 데 필요한 호분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황제에게 처방할 약조차도 제대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궁궐 안에서 근검 절약했던 것이다.
그는 태자 양용에게 "자고로 사치한 제왕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태자는 근검 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라는 훈계도 했다.
조세를 낮추고 하사물을 성대히 내렸음에도 국고가 모두 차 넣어둘 곳이 없어 곁채에 쌓았을 정도였으며
수문제가 선양을 받은 초기에 집계된 민호가 채 400만 호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말년에는
890만 호로 늘어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측천무후-당현종 시절의 전성기에 가야 겨우 복구가 된다.
인구 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져서 훗날 당나라는 수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당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따라잡는다.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장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 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문제 양견이었다.
다만 양견은 대운하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대운하 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말 때문에 곧바로 건설을 중단한다.
이처럼 수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 드문 성군이라 할 수 있었고,
이에 "고조가 통일하고 문경치세를 거쳐 무제 시절에야 이룩한 한나라의 번영을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정치능력을 선보였다.
물론 이런 수문제도 결점은 있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고,
601년에는 군현의 모든 교육 기관들을 폐지한 후 중앙에 국자감만을 두어
귀족 자제들만 공부하게 했다.
나이가 들수록 관리들에 대한 의심이 깊어져 법의 함정을 파놓고 관리들이 걸려들면
가차없이 처단했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툭하면 매질하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또한 말년에 감정 기복이 심해져서 자신의 기분에 따라 신하에게 벌을 주거나 상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점은 있었지만 그가 이룩한 정치 제도는 후에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어 이후 중국 국가들과 주변 동아시아 국가
정치 제도의 뼈대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수문제의 이러한 정책으로 자신들이 무시당한다고 여긴
권문세족들은 수많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게 소규모라고 보긴 절대 어려운 것이, 수문제와 인척 관계로 연결된
관롱집단의 집단적 반발에 더해 반란, 특히 대규모 지주가 경제 정책의 중심이었던
장강 이남의 옛 남조 지역에서의 반발이 극심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대규모 운집만 안 했지,
반란 세력이 들끓었다는 사실을 유념해 볼 수 있다.
한 번의 정복 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했음에도, 대규모 지주들을 척결해버리기 위해
2차 통일전쟁을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수나라를 무너트린 것도 대규모 지주 출신인 관롱집단의 이연이 건국한 당이었다.
애초에 수나라의 황족 양씨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의 이씨 가문이 모조리
한 고을(무천진)에 모여살던 세력이었다.
이는 양견이 관롱집단이라는 장안 주변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왕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권력에서의 역학 관계로, 그들 덕에 제왕이 될 수 있었던 탓에
그들의 세력과 의견을 무시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어서 발생한 문제다.
따라서 문제는 말년에 점차 노골적으로 관롱집단과 대립하며 숙청과 비리 척결,
외정이라는 강경책을 단행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양견이 계속해서 관롱 세력들에게 지속적인 강경책을 썼으면
결국에는 관롱집단의 소멸로 이어졌겠지만 양견이 아들과의 정쟁에 휘말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수양제가 탈법적인 수단으로 제위에 오르면서
기존 귀족 세력에게 좋은 명분거리 하나를 던져주게 된 것.
결국 수양제는 최소 귀족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대규모로 궁전을 증축하는 한편,
대운하를 건설하고 대규모 정벌 사업을 벌이는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애당초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제위에 오른지라 귀족 집단의 지지를 받거나
최소 반발을 막기 위해 귀족들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결국에는 수양제의 자업자득이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
지금의 시각으로는 골때리는 짓이지만 그 당시에 권문세족들은 이러한
대운하 공사와 정복 사업에 대해 모두 환영하고 찬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이후 수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귀족 집단은 계속 존속했으며 관롱집단,
특히 6진 중에서도 무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무천진 군벌은 당나라까지 영향을 미쳤다.
물론 당태종 치세기에는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당고종대에 다시 활개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 다만 측천무후가 날려버린 것은 아니고
측천무후를 핑계로 당고종이 손을 봤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이다.
숙종이 장희빈을 핑계로 환국정치를 해서 왕권을 강화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수문제는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친필을 보냈는데, 그 내용인즉 고구려는 수나라에
조공을 해 제후국으로 인정받으라는 것과 만약 조공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에 거역할 경우
자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양씨 황족 중 한 명을 고구려의 왕으로 옹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당시 고구려를 제외한 다른 여러 나라들은 이미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위세에 밀려
제후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있는 모양새였기에, 수문제 입장에선 고구려가 배 째라고
나오면서 버틸 경우 다른 제후국들도 같은 태도를 취할까 염려했고, 이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라 압력을 넣고 만약 고구려가 거절할 시 30만의 수륙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고구려가 역으로 선빵을 날린다. 고구려는 말갈 기병을 동원해
요서에 자리하고 있던 수나라의 거점인 영주 일대를 공격하는 한편 거란을 동원하여
발해 연안에 위치한 수나라군을 공격했다.
이런 예상 밖의 고구려의 선제 공격으로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수문제는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얼마 안가 수륙군 30만 명으로 고구려 침공을 전격 단행한다.
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영양왕이 수문제에게 사과 사신을 보내면서 표문에
"요동 분토(糞土)에 있는 신(臣) 고원"이라 칭하는 사과문을 바쳐
교전 없이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했다는 정황을 암시하는 듯한 기록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 은폐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채호는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오늘날 진주 강씨의 시조로 전승되는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이 전쟁을 이끈 주역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자세한 얘기는 강이식 문서 참조.
한편, 요동 분토의 신 운운하는 사과문의 신빙성과 의도를 떠나
고구려내에서는 역대급 대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에 사기가 고취됐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 《신집》을 편찬하여 역사를 정리하였고, 수나라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는 별로 바뀌지 않은 듯하며, 수양제의 조서를 보면
제후국의 예를 따르지 않았으며, 조서를 직접 받지도 않는다고까지 표현한다.
고구려 공격을 부추긴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응징하는 한편 돌궐과는
합종을 시도하여 수나라에 대해 선제적인 대응을 계속했다.
결론적으로 자세한 전황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전쟁은 수나라가 고구려와 싸워
개고생했고 이후 재차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큰 부담을 느낀 계기가 된 사건인 것은
분명해 보이며, 이는 문제의 아들 양제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문제는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국사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는데
문헌황후 독고씨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를 끊임없이 설득하여서
그나마 국가를 그럭저럭 끌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문헌황후가 602년 8월에 영안궁에서 한질로 사망하자 양견은
큰 충격을 받아서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말년에 다시 양용을 태자로 만들고, 양광을 폐위시키려고 했으나,
양광의 심복이자 자신의 근위장이었던 장형에게 암살당했다.
또는 양광의 쿠데타에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고도 한다.
양용 역시 양광의 근위장인 우문지급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604년 7월 수문제가 중병에 걸려 장안의 인수궁 대보전에
누워있었는데 문제가 중병으로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 되자,
태자 양광과 월국공 양소, 병부상서 유술 등이 대보전을 지켰고
선화부인과 용화부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문제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수문제는 그녀들이 자기를 시중드느라 휴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녀들에게 얼마간이라도 휴식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 선화부인이 문제의 침궁을 떠나 거처로 가는 도중에 태자 양광을 만났다.
양광은 남조의 황녀로 수문제의 후궁이 되었던 진씨의 미모에 반해
대담하게도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 이에 진씨가 울면서 수문제에게
"태자가 무례하였습니다" 하고 하소연하자, 수문제는 그제서야
양광의 진모를 알고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내가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큰 실책이었구나!"라고 한탄하며
다시 양용을 복위시키기 위해 유술과 원암을 시켜서 양용을 호출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양광이 선수를 쳐서 유술과 원암을 체포하여 대리옥에 가두고
자신의 군사와 우문술, 곽연을 시켜 황궁을 포위했다.
양광이 황궁에서 반란을 일으켜 인수궁을 포위했을 때 수문제는 "만약 황후가 살아있다면
짐이 이런 처지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 후 수문제의 처소에서 병 시중을 들던 후궁들이 모두 쫓겨나고 대신
태자궁 신하인 장형이 들어왔는데, 얼마 뒤인 604년 음력 7월 13일(정미일)에
수문제가 향년 64세에 사망했다.
사망 직전의 양광의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살해설이 나돌았고 《자치통감》에서도
"안밖에서는 자못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며 살해설을 암시하고 있다.
사후 문제는 태릉에 안장되었으며, 도굴꾼들과 중화민국때 군벌들과 비적들이
도굴하려고 번번히 시도했으나, 현지 주민들이 별거 없으니 그만두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도굴을 시도했으나 정말로 별거 없어서 그만뒀다고 한다.
무려 360여년이나 지속된 유례없는 대혼란기였던 위진남북조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황위에 올라 현대 중국의 기틀까지 다진 중국사 최고의 명군이자 성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일부 사람들은 통일 군주라는 점에서 진시황, 서진 무제와 함께 거론하지만
수문제는 후대에 폭군 취급받는 두 사람과 달리 이들과 비교되는 것이 모욕일 정도다.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암군이자 폭군으로 평가받는 아들이 훗날
모든 것을 말아먹기 전까지 수나라는 수문제의 치세에서 매우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국토를 넓히고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거 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통해
수나라를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시켰다. 문제 때 연호가 개황(開皇)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태평성대를 개황성세(開皇盛世)라고 한다.
중국이나 동아시아권보다는 서구권에서 비교적 더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다.
유럽은 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통일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나뉜 반면, 중국은 수문제가
재통합하여 오늘날의 거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기에 서양에서는
세계사의 중요 인물을 뽑으면 100위 안, 그것도 제왕들 가운데서 10위 안에 꼽는다.
일명 위대한 중국 황제 "성인가한(聖人可汗)"이라 하여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수나라가 워낙 빠르고도 성대하게 멸망해서 수나라에 관련된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기에 수문제 또한 오랫동안 폄하당하거나 무시당했지만
서양 학자들이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평가가 뒤바뀐다.
특히 후한말 황건적의 난 이래 400여년이나 분열했던 중국을 재통일한 점을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다.
서양 학계에서 분열된 유럽에 대응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피상적으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높게 평가했다는 의견도 있는데, 후한 말 분열된
중국을 280년부터 300년까지 20여 년 정도 서진이 통일하기도 했고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진이 중국 대륙을 통일하려는 움직임도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열된 중국을 재통합한 업적은 인정할지 몰라도 서양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비교 대상인 카롤루스 대제의 서로마 제국은 애당초 봉건제라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관료제가 정착해 중앙 집권 통제가 용이했던
중국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도 무리이기도 하다.
다만 서구 사학계의 평가를 과대평가로 단정하는 것 역시 적절치 못한 면이 있는데,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것은 수문제가 아닌 한고제와 통일
중국 한나라라고 한다면, 이런 식으로 따지거든 유럽사에서 한나라에 대응하는
국가는 카롤루스 대제의 프랑크 왕국이 아니라 로마 제국이다.
로마 제국이든 한나라든 고대사 말기에 나타나 하나의 세계를 통합했고
이 제국의 영역에서 현대에 이르는 유럽 문명권과 중화 문명권의 정체성이 나타난 것이다.
이 두 제국은 내부의 모순 축적과, 제국의 전성기 시절 비문명화된 야만족으로 여겼던
이민족의 위협으로 몰락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덤으로 몰락으로 인해 제국의 중심부를 상실한 이후에도 남은 제국의 세력은
명맥을 이어가면서 결과적으로 통일 제국 시대의 문화 유산을 보존하여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제국이 붕괴하고 그 고토는 통일 제국의 영역에서 벗어나 분열기를 겪으며
혼란의 도가니탕을 끓이게 되었고, 이 상황에서 등장하여 분열된 영역의
재통합을 지향했다는 것이 카롤루스 대제와 수문제의 공통점이며, 결국 중국의
재통합으로 이어질 길을 여는데 성공한 수문제와 달리 카롤루스 대제의 시도는
서유럽의 재통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를 두고 수문제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까지는 아니라고 말한다면,
카롤루스 대제 역시 '보편 제국 로마'라는 정체성을 심어준 인물도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다.
카롤루스 대제를 '서유럽의 아버지'라고 보는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수문제 역시 한나라 멸망 이후 360여년에 이르는 기나긴 분열과 혼란기 동안
기존 제국의 정치 구조가 완전히 해체된 상황에서 당나라와 이후의 통일 왕조들로
이어질 정치 구조를 구축한 인물이기는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나라 통일 이전 위진남북조시대에도 부견의 비수대전과 같이 중국을 재통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로마도 마찬가지였으며, 하다 못해 신성 로마 제국도
통합된 국가로 발전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프랑크 왕국은 처음부터 봉건제라는 한계가 있었다고는 하나 수나라 역시 처음부터
관롱집단의 군벌들과 문벌귀족의 폐쇄적인 귀족 세력을 끌어안고 있었다.
물론 중국이 이른 시기부터 중앙 집권적 관료제의 전통을 형성해 왔고,
재통합에 유리한 영향력을 끼쳤음은 분명하지만 중국의 관료제라 한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아니었으며, 중국이든 유럽이든 강력한 통일 국가를 지향하는
군주들은 휘하 군벌들이나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흡수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서구 학계의 고평가를 '분열된 유럽'에 대응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피상적으로만 평가한 결과물이라는 의견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총평하자면 수문제가 분열된 중국을 재통합한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수문제는 젊었을 적에 북주 선비족의 권문세가인 주국대장군 독고신의
14살 된 딸 독고가라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가 바로 문헌황후 독고씨(文獻皇后 獨孤氏)다. 황후는 어질고 근검절약하며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존경받는 황후였다고 전한다. 양견이 일을 마친 뒤에는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금슬이 좋았는지 밤이 깊으면 서로 안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또한 새벽에 일어나서 직접 황제가 세수할 물과 의복을 챙겨준 후 함께 가마를 타고
조정으로 갔으며, 정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조정으로 들어갈 때면
황후도 남편과 함께 대전 밖까지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
당시의 법도로는 아무리 황후라 할지라도 황제와 함께 나란히 걷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조정에서 국사를 논의할 때 문헌황후는 대전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황후는 수시로 환관을 보내 황제의 언행을 살폈고 통치 시에도 수문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무슨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시정하도록 했다.
원로들에게는 예를 갖추어서 대했으며, 딸들에게는 몸가짐을 신경쓰도록 하였고,
공과 사를 구분해서 형제들을 비롯한 친척을 엄격하게 단속하였다.
한 예로 황후와 가까운 친척이 죄를 짓자 황후와 가까운 친척이니 살려주려고 했지만
황후는 이런 일을 사사로운 정으로 처리할 수 없다며 처벌받게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의욕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였던지라 황후의 개입이 좋은 결과만 부르지는 않았지만
수문제는 이런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아마 자신을 받쳐주는 아내가 있다는 점이 지지 세력하고도 싸워야 했던 고독한
제왕의 마음에 크나큰 위안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당장 문헌황후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 관롱집단임에도 양견의 정치에 지지를 표했다.
그래서 궁궐에서 수나라에는 두 명의 황제가 있다라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사실 수문제는 공처가이기도 했는데, 부인 덕에 황제가 된 것은 물론이요
부인 또한 행실이 올바르고 근검절약했기에 부인에 대한 어떤 트집도 잡을 수가 없었으며
이들은 서로 상대방을 공경하는 부부 관계를 이어갔다.
황후는 그야말로 여걸이었는데, 결혼 시 ‘자기 이외에 어떤 여자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으며, '자신 이외의 여인에게서 자식을 보지 않는다.'라는
약속을 받아낼 정도였기에 남편의 여자 문제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또한 첩을 총애하는 대신들에게 벌을 내리거나 파직시킬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황제가 절세의 미인을 인수궁에서 우연히 보고 한 눈에 반해 총애했는데
문헌황후가 문제가 조정으로 들어간 틈을 타서 몰래 그녀를 죽였고,
그녀의 잘린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보여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에 문제가 분노했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화가 난 나머지
혼자 말을 타고 산 속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는데 재상 고경과 양소 등을 비롯한
신하들이 급히 뒤를 쫓아가 진정시켰다.
이때 문제가 깊이 한숨을 쉬며 “짐은 지존의 천자인데도 자유가 없구려!”라며
한탄했다는데 고경이 일개 부인의 일로 천하의 정치를 버려둘 수 있겠냐며
설득하여 하는 수 없이 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실 이 일화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있으므로 일종의 야사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이때 문헌황후가 자신을 일개 부인으로 표현한 고경을 처형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이것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대표적으로 여러 명의 아내를 둔 점
등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수문제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헌황후의 소생이었다.
그녀의 투기가 하늘을 찔렀으니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양용과 양광을 비롯한 다섯 아들 모두가 정실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겉으로만 봐선
큰 문제가 없었고 문제는 신하들에게 '짐의 아들들은 모두 한 어미의 소생이라
자식들 간에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양견의 아들들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서 치열하게 다투었다.
수문제는 국법에 따라 큰아들 양용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로 결정했다가 양광으로
태자를 바꾸었는데 이는 문헌황후의 입김 때문이었다.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양용은
첩실을 둔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간교한 양광은 첩실을 숨겼다.
게다가 양용은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별로 슬퍼하지도 않았는데 평소에 양용을 싫어했던
문헌황후는 자신이 추천한 태자비 원씨의 급사 원인을 양용에 의한 독살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더더욱 양광을 믿고 태자로 삼으려고 했던 것.
수문제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독실한 불자였기에 그의 치세에 불교가 매우 흥성하였다.
양견은 황제가 되고 자기 아버지만을 황제로 추존하고 그 윗세대 즉,
자기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는 황제로 추존하지 않았다.
수나라 이전의 중국 왕조들이 보통 창업군주가 황제로 즉위하면 자기 4대조까지
추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수나라 이후의 중국 왕조들도 자기 4대조는 물론이고
그 이상의 까마득한 조상을 황제로 추존하는 경우도 있었음을 생각하면
자기 아버지만 황제로 추존한 양견의 행동은 굉장히 의아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수나라 다음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한 당나라는
창업군주 당고조의 5대조로도 부족하여 춘추시대, 동주시대 심지어
순임금 때의 인물까지 황제로 추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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