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제 인생의 마지막 장을 쓰기 위하여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요즘 모 방송에서 방영되는 산속 생활을 동경하기도 했었지만, 그건 나만을 위한 길이라 내가 꿈꾸는 더불어 사는 길이 아니어서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아산에서의 안일한 생활을 뒤로 하고 많은 고난이 있으리라 예상되는 길을 떠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 동안 6개월여를 근무하여 친숙해진 동료들과 사측의 직원들이 떠나지 말고 계속 일해 주면 좋겠다고 만류를 하기도 했었지만 내 인생에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에 떠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지난 10월 16일에 벼룩시장을 통하여 미리 보아 두었던 방을 보러 부산을 다녀 갔다
조금 일찍 퇴근을 하여 원룸으로 가서 머리를 감고 세수와 면도를 하고 깜돌이를 운동시키고 길을 나서 차를 몰고 신창역에 가서 전철을 타고 천안역에 도착하여 10여 분 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탔다.
대전을 지나 옥천, 영동,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갈 때 이용했던 황간역을 지나 기적도 숨이차서 목메어 울고 간다는 추풍령을 넘어 열차는 내고향 상주의 옆 동네인 김천을 지나고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을 보냈던 고아읍이 있는 구미를 지나고 내가슴에 쉬지 않고 흐르는 아버지의 강인 낙동강 왜관철교를 지나 숨가쁘게 달려 청년 시절을 보낸 대구를 지나 경산을 거쳐 고향 어른들이 6.25 때 피난을 가셨었던 청도에 도착하여 상위열차인 새마을호를 앞 세우기 위하여 잠시 정차하고 있었다.
청도역 부설 전통 생활문화관
청도를 출발한 열차는 익숙한 산하의 모습을 보여 주며 삼한시대 4대 저수지 중의 하나였던 수산제가 있는 밀양의 너른 들판을 지나 삼랑진을 향해 갔다. 들판에는 벼들이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감나무의 감들은 붉은 기운을 더해 가고 산야의 나무들은 원색으로 염색이 되어 바람에 흔들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삼랑진 부터는 오른 쪽으로 낙동강이 여행길을 따라 나섰다. 둔치의 갈대밭이 추억처럼 흔들리고 햇볕에 반짝이며 일렁이는 강물은 먼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아른거렸다.
둔치의 자전거 길을 달리며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 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담소하는 사람들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이는데 나는 언제 저런 아름다운 그림 속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왼 쪽으로는 스무살 때 대구에 나가서 처음 사귀었던 친구와 고햑생 행세를 하며 학용품을 팔며 걸어서 대구에서 부산까지 갔었던 추억이 서려있는시골길이 나란히 달려가고 있었다. 원동을 지나고 물금을 지나 구포에 가까이 갔었을 때 낙동강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을숙도가 있는 하구를 향해 가버렸다.
낙동강 둔치의 갈대 밭과 자전거 길
구포 쪽에 살고 있는 주인 할머니와의 통화를 바탕으로 자갈치역에 내려서 충무동로타리를 지나 송도윗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니 새마을금고가 보이는데 골목길을 살펴봐도 할머니가 얘기하신 교회는 보이지 않고 골목길을 조금 더 들어가니 하필이면, 대구의 자갈마당, 인천의 옐로우하우스, 청량리588, 영등포역전과 더불어 전국의 유명 사창가 중의 하나인 완월동이 아닌가?
다시 할머니와 통화를 했더니 그 골목 좌측으로 좁은 골목으로 올라가면 된다고 해서 자세히 보니 100 여 미터 위에 1층짜리 조그만 교회가 보여 제볍 경사가 있는 길을 부지런히 걸어 올라가는데 마치 등산하는 기분이었다. 부산이 산비탈이 많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별로 비탈진 곳에 살아보지 않았던터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1층의 조그만 수퍼 주인이 열어 주는 문을 열고 들어가니 2층까지의 계단은 좁아도 그런대로 본래의 계단인데, 2층에서 3층까지는 공사장 복공판으로 쓰는 철판으로 만든 사다리에다 가파르게 설치가 되어 있어 위험해 보였다.
방은 그런대로 괜찮아 보여서 계단이 좀 찜찜하긴 해도 다시 올 시간도 없고 경비도 그렇고 해서 결정을 하려고 수펴 주인에게 주차에 대해 물으니 세울데가 없고 설사 세운다하더라도 단속이 자주 나오니 안된다고 하며 몇 백 미터 거리에 있는 산복도로의 공영주차장을 이용해야 된다고 하여 주차장에 가서 주차에 대해 알아보고 결정하기로 했는데, 주민 한 분과 앞으로 할일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니 노숙인 무료급식을 해 보려고 한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주차장에 가서 주차에 대해 결정을 해 놓고 택시를 타고 부산역으로 갔지만 간발의 차이로 무궁화호는 놓쳐버리고 할 수 없이 KTX를 타고 천안아산역으로 가는 중에 할머니께 전화를 해서 계약금을 얼마나 드리면 될까 여쭈었더니 한 삼십 만 원 넣으라고 하셔서 모바일 뱅킹으로 넣어 드렸다.
이튿날 토요일에 출근을 하여 근무를 하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전화를 해 오셔서, 2층에 세를 살고 있는 사람이 아들을 장가를 보내서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 되니 아저씨가 양보를 좀 해 주면 안되겠느냐고 하시면서 계좌번호를 불러달라고 하시기에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서 그러면 법대로 계약금의 배액을 배상하라고 했더니, 아무 관계도 없는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느니 사업한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아저씨는 사업하는 사람이니 양보 좀 하이소. 근방에 방이 많으니 양보하이소." 하며 막무가내로 방을 못 주겠다며 버티시길래 멀리서 시간과 돈을 들여 갔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변해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다른데를 알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23일에 싣고 내려가겠다고 엄포를 놓으니 무조건 방을 못 주겠다며 전화를 끊으셨다. 오래 전 부터 보아 비어있던 방이었는데 계약을 하고 바로 다음 날 방을 못 주겠다고 하다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수펴 주인이 문제였다. 노숙인 무료급식을 한다고 했더니 그 집에서 한다고 생각을 하고, 할머니께 방을 주면 노숙자와 부랑인이 골목에 드나들게 되면 동네가 문제가 된다고 꼬드겼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일요일엔 서울에 살고 있는 고향의 일가들과 친구의 초대로 서울에 갔다 와서 마지막 날인 19일 근무를 마치고 20일 날 다시 부산을 내려 가서 미리 보아 두었던 송도해수욕장 부근의 방을 계약했다.
역시 3층이었는데 방도 좁고 부엌이나 화장실도 좁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23일에 이사를 하기로 예정이 되어 용달차도 예약을 해 놓은터라 시간의 여유가 없어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계약을 해 놓고 아산으로 돌아갔었다.
할머니는 며칠 째 아무런 연락이 없어 그냥 기다려 보기로 했는데, 다음 날 밤에 전화를 해 오셔서 "신경을 써서 혈압과 당뇨가 도져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나왔다."고 변명을 하며 이해를 하라고 하셨다.
사실은 그 전에 건배형님께 부탁을 드려 수퍼 주인과의 통화에서 구미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 놀러 가셨다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체 하며, 이해를 하겠다며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더니 아들을 시켜서 바로 계약금을 되돌려 주었다.
한 번 더 부산을 다녀 오는 바람에 불필요한 경비를 7,8 만 원 더 쓰게 되었지만 다시 얻은 집은 평지에 가깝고 주변 환경이 훨씬 더 좋아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도시에 가면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 달 쯤 전 부터 해 오던 객사한 동물들의 사체를 구조하는 일은 고라니를 시작으로 비둘기와 고양이를 구조했었고 그 뒤에 고양이 한 마리를 더 했었는데 이사 오기 이틀 전에 자전거를 타고 저수지 주차장에 들러 출발할 때 길 가장자리에 차에 치어 죽어 있는, 꼬리모양으로 보아 청설모 같기도 하고 쪽제비 같기도 한 사체를 가드레일 밑의 푹신한 땅을 파고 묻어 주었다.
떠나 오기 이틀 전에는 한성PC건설 아산공장에서 같이 근무했던 오씨를 만나 점심식사를 했고, 전 날에는 2공장에 같은 날 근무를 하던 윤형이 아쉬워 하며 저녁이나 하자고 해서 만났고 돌아가는 길에 2공장에 근무하고 있는 정형을 만나 아쉬운 작별을 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친지들에게 이사간다는 소식들을 전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같이 동고동락하던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마음에 작은 생채기를 남기는 일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휴일을 제외하고는 주간에는 항상 같이 근무하시던 친절한 시인 건배형님과 헤어지는 일도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나이가 떠나기로 마음을 먹고 공포를 한 이상 설령 마음 속으로는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가 없는 일이고 내 자신의 길을 가야만 하는 일이었다.
드디어 23일 아침 한전에 전화를 해서 전기요금을 정산하고, 미리 싸 놓았던 짐들을 마당에 내어 놓았다.
제일 큰 짐이었던 침대와 중고 TV는 윗층에 사시는 할머니(장로교회 목사님의 장모님)께서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대로 남겨 두기로 했다. 부산의 방에 침대와 TV가 있기 때문이다.
용달차를 먼저 보내고 깜돌이를 데리고 고물 마티즈로 부산을 향해 길을 나섰다.
왜관까지는 고속도로로 가서 낙동강변에 가서 아버지께 부산으로 이사를 가는 것과 앞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 저세상에서나마 아들을 도와 주십사하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하직인사를 올렸다.
왜관에서는 무료도로로 검색하여 지방도로를 따라 성주를 지나 위천에서 창녕 쪽으로 내려가서 창원을 지나 진해 용원 쪽으로 해서 녹산공단을 지나 을숙도 하구둑을 건너 하단과 괴정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감천을 지나 송도에 도착했다.
용달차 기사님은 약간 먼저 도착하여 네비가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는지 근방에 와서 길을 헤매고 있다고 전화를 해 왔는데 파출소 앞에서 세워 놓고 전화를 걸고 있기에 경적을 울려 따라 오라고 했다. 우회전 해서 100 여 미터 내러가서 밀면집 식당 앞 약간의 빈 공간에다 차를 세우고 주인아저씨께 전화를 하였더니 잠시 뒤에 아저씨가 오셔서 짐을 보시더니 "짐이 많아 3층은 안되겠고, 2층에 방이 크고 화장실도 넓은 방이 있는데 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일단 짐을 내리고 용달차기사님은 부산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거들 마음이 없어 보여 계약했던 차비만 드리고 보내 드렸다.
2층의 방은 3층의 방보다 크고 욕실도 널찍한 것이 마음에 쏙 드는 편이었다. 다만 아산에서 살던 현대식으로 리모델링 된 방에 비해 오래 된 연립이라 낡아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주인아저씨가 책보따리 등 몇 개의 짐을 거들어 주셨고, 컴퓨터 책상과 장식장 두개, 옷,이불이나 그릇등 상자 몇개를 옮기고 나니 땀이 제법 나고 힘이 들었다.
대충 옮겨 놓고 나중에 차근차근 정리를 하기로 하고 깜돌이를 데리고 골목길을 50 여 미터 걸어 해수욕장으로 나갔다.
방을 얻으러 왔을 때는 유심히 보지 않았었는데, 오! 굳-! 일부러 얻으려고 해도 이렇게 좋은 곳을 얻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난 번 할머니네 방이 그렇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던 것처럼 고마운 일이 되었다.
해수욕장 주변으로 송림공원, 거북섬과, 바다위로 몇 십 미터 놓여진 구름산책로가 있고 분수대와 각종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해상산책로라는 것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밤이면 상가들의 네온싸인이나 조형물들의 조명이 켜지면 야경이 제법 볼만하고, 송림공원 입구의 분수에서 음악분수쇼가 공연되기도 한다.
유람선을 타는 선착장도 있고 수상택시인지 택시라는 싸인이 있는 등이 달려 있는 조그만 보트도 있었다.
교통도 약 2 킬로미터 걸어 가면 PIFF(부산국제영화제)광장이 있는 남포동과 자갈치시장이 있고. 바다위로 영도와 연결되고 부산대교와도 연결되어 신선대부두와 남구의 각 동네와 금방 닿을 수 있는 남항대교(통행료가 700원 들긴 하지만)도 바로 앞에 있어 교통도 좋은 편이다. 지하철은 자갈치역이나 남포동역으로 나가야만 탈 수 있지만, 버스로 환승을 하면 시내 곳곳과 잘 연결된다.
송도 해변의 비탈에는 예전에 없던 고층 아파트나 상업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마치 LA의 베버리힐즈 같아 보이고, 해변을 걸으면 마치 산타모니카나 말리부해변을 걷는 느낌이 나서 마치 내가 로스엔젤리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고신대 복음병원이 걸어서 가도 10분 이내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어 의료에 대한 걱정도 없다.
전설의 용녀(인룡)와 어부 상
구름산책로
바닷물이 보이는 구름산책로의 유리판과 철망
외로운 등대
송림공원의 전경
남항대교
구름산책로의 난간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깜돌이
http://tvpot.daum.net/v/v4075SpmjxoV4prxwmo248t
음악분수쇼 동영상
http://tvpot.daum.net/v/v873e5uwqWuwuK4GI6gI6Tq
음악분수쇼 슬라이드쇼, 배경음악은 떵리쥔의 샨차화<山茶花>
내가 준비도 없이 서둘러 부산으로 온 것은 백년을 기다려도 맑아지지 않는 백년하청 같은 인생에다 어느 정도 차면은 넘치고 마는 계영배 처럼 가득 차지지 않고 나갈 일만 생기는 내 인생의 금고인 계영고(戒盈庫) 때문이기도 하다.
구멍 난 양말이나 속옷을 기워 입고, 어디 가서도 밥도 마음 놓고 사 먹지 않을 정도로 알뜰히 살았지만 자꾸만 재채기가 나고 써야할 곳이 생겨 약간의 빚만 남아 있으니 재물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니 돈을 많이 모아서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이라 우선 몸으로 부딪혀 볼 생각에서다.
젊은 시절 공무원 생활만 했고 운전이나 경비원 등을 하면서 겨우 호구지책만을 했을 뿐 이렇다 할 돈을 벌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돈 버는 장사도 할 줄 모른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다면 돈을 쓰는 장사, 점점 더 가난해 지는 장사에는 하늘도 내게 재능을 내려 주시리라 믿기때문이다.
우선 경비원이나 야간 주차관리를 하면서 힘 닿는대로 도시락을 싸서 부산역으로 배달을 나가기로 방침을 정했다.
민들레 국수집의 서영남씨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약간의 현금과 자신의 교도소 사목활동을 후원해 주던 베로니카라는 지금의 부인이 많은 도움을 주었었고,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도 안양에 사시는 작은 아버님 말씀으로는 결코 좋지 않게 평하시며 시흥동 산비탈의 판자촌에 살 때, 조그만 상자를 곳곳에 설치하여 1000원 씩만 도와 달라고 써 놓았다고 하고 교단이나 교인들의 지원을 많이 받아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 설 수 있었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힘이 되어 줄 아내도 없고, 지금의 선글래스 시대에 최일도 목사처럼 그런 방식을 쓴다고 선듯 후원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물론 나의 친지들이나 같이 근무하던 경비원 동료분들은 이미 한 달에 얼마 씩이라도 후원을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아 놓기도 했지만, 많은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도 막상 일이 닥쳐오니까 연락이 뜸해지고 있어 기대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비록 초라한 규모라도 내가 몸으로 뛰어 해 나가는 것이 더 보람된 일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그럴 일도 없겠지만 나 역시 서영남씨나 최일도 목사처럼 홍보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후원이나 관리감독과 간섭을 하는 관의 후원은 받지 않을 생각이다.
최초로 성립된 불교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말 처럼 고난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어 앞을 가로막는 장애를 피해 갈 생각이다.
만약에 도움을 주시는 분이 계시면 액수에 관계 없이 십원 하나라도 고귀하게 생각하고 사욕을 위해서는 절대 쓰지 않고 회계상태를 공개할 것이고, 한가지 분명하게 밝혀 두고 싶은 것은 앞으로 일이 궤도에 오르게 되어 설거지나 음식준비 등 봉사를 하러 오시는 분이 계시면, 절대로 신분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고 비록 대통령이라 해도 똑 같이 대할 것이고, 음식도 똑 같이 대접할 것이다. 후원을 해 주시는 물품이나 금전의 과다에 따라 차별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며, 모든 후원이나 봉사자의 고귀한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할 것이다.
요즘 재벌들이나 사기꾼들의 행태가 분통을 터지게 하는데,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수 조원의 재산을 가지고 부모형제끼리 싸우고 서민들의 등을 쳐서 수조원을 챙겨 외국으로 달아나 죽었느니 살았느니 하고 조카가 죽고 하는 다단계 조직을 보면 그들의 인생을 결산하면 과연 행복이라는 답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 하나 북한을 찬양 동조하는 집단이나 정치인들이 왜 그런 재벌들의 재산을 강제로 환수를 하여 사회상규에 따라 적정하게 분배해 주는 북한식 독재정책을 입안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라지만, 그런 무책임하고 못돼 먹은 재벌들은 강제로라도 사람을 만들어 못 가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검소하고 밝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가입하여 있는 카페의 살림꾼인 관조라는 분의 글 "전생을 알고자 한다면"이란 글에
욕지전생사 欲知前生事
금생수자시 今生受者是
욕지내생사 欲知來生事
금생작자시 今生作者是
만약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한다면
금생에 받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요
만일 다음 생의 일을 알고자 한다면
금생에 행한 일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라는 글이 있는데,
아마 그런 재별들이나 사기꾼들은 전생은 제법 잘 살아 그런 부를 누리고 살진 몰라도 다음 생에는 분명 거지나 가난뱅이로 태어나 고생고생하며 살 것이리라.
그토록 많은 환란을 겪으며 살아 왔지만 이런 일이라도 꿈 꾸게 된 것은 아마도 이백의 "장진주사"의 한 구절 처럼
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란 재목을 내고 반드시 쓸모있어 했으리니
이 일이 하늘이 나를 재목으로 쓸 일이라고 생각하고 내려 준 사명이라 여기고 신명을 다 바쳐 최선을 다해 볼 것이다.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만약 하늘이 나를 써 주지 않는다면, 설탕 살 돈이 없으면 감기가 걸릴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바로 앞의 송도 바다에 들어가 소금물을 많이 마시고 한 많은 이세상을 떠나면 될 것이다.
26일 부터 몇 군데에 이력서를 접수시켜 놓았지만 쉽게 연락이 오지 않는다. 물론 소개비를 주면 쉽게 취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워크넷이나 고용센터의 알선으로 하려니 좀 힘이 들고 경비용역업체나 직영이 대부분인 서울이나 천안 아산 지역에 비해 대부분이 유료직업소개소가 차지하는 벼룩시장을 보니 쉽지 않을 전망이지만, 수 많은 일자리 중에 내 가 일할 곳이 분명 있을 것이다.
조항조씨가 신곡을 냈는데. 제목이 "사랑이 밥이더냐?"라고 하는데, 사랑이 밥 먹여 주나라는 말 처럼 사랑이 밥을 먹여 주지는 않아도 이 팍팍한 세상을 잘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는 될것이다.
나도 사랑이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족으로 만들어 사랑을 나누며 살아 갈 것이다.
염치없지만, 저의 뜻을 이해 하시고 후원을 해 주실 분은
농협 : 055-12-241176 예금주:이철훈
후원 물품은
부산시 서구 충무대로 82번길 27-3 206호(암남동 동춘연립)으로 보내 주시면 정말 소중하고 고맙게 쓰겠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후원을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원문은 "연안인의 일상의 이야기"
http://blog.daum.net/ironface1888 로 방문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마지막장이 언제가 될련가는 몰라도,
많은 도움,감사합니다.건강하시고
복 짓는 행복한 나날되세요.
주목님 안녕하세요?
항상 관심과 사랑으로 보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늘 평안하시고 많은 복 지으시고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부산생활이 시작되었군요.
계획하신대로 모든일이 잘 풀려나가길
간절히 바래 봅니다.
언제나 마음속에서는 부산엘 다녀 오고싶었는데
내려가는 날이 있겠지요.
쌀쌀해지는 날씨에 건강유념하시고
늘 평안하세요.
네, 언제 한 번 오십시오.
이 번 정모에서도 수고가 많으셨지요? 깊어가는 가을 밤,
지난 봄 정모 때의 기억을 모닥불 삼아 마음의 산책을 합니다.
매일 송도 바다의 구름산책로에서 바다를 바라모며,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특히 관조님의 평안과 건강을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