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어두운 부분 [조용미]
빛이 나뭇잎에 닿을 때 나뭇잎의 뒷면은 밝아지는 걸까 앞면이 밝아지는 만큼 더 어두워지는 걸까
깊은 어둠으로 가기까지의 그 수많은 초록의 계단들에 나는 늘 매혹당했다
초록이 뭉쳐지고 풀어지고 서늘해지고 미지근해지고 타오르고 사그라들고 번지고 야위는, 길이 휘어지는 숲가에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우리는 거기 앉았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처럼
긴 의자 앞으로 초록의 거대한 상영관이 펼쳐졌다 초록의 음영과 농도는 첼로의 음계처럼 높아지고 다시 낮아졌다
녹색의 감정에는 왜 늘 검정이 섞여 있는 걸까
저 연둣빛 어둑함과 으스름한 초록 사이 여름이 계속되는 동안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다
노랑에서 검정까지
초록의 굴진을 돕는 열기와 습도로
숲은 팽창하고
긴 장마로 초록의 색상표는 완벽한 서사를 갖게 되었다
검은 초록과 연두가 섞여 있는 숲의 감정은 우레와 폭우에 숲의 나무들이 한 덩어리로 보이는 것처럼 흐릿하고 모호하다
- 초록의 어두운 부분, 문학과지성사, 2024
초록 물결 사이 드문드문 비치는 보라빛 오동꽃 보며 [이규리]
라고 그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 왔다
상행선 기차, 검진 하러 가는 길,
미친 복사꽃 지나
오동꽃 문드러지는 한나절 타고
짓 이긴 꽃물 구성지게 번진 한 판 세월
본 떠 놓은 肝, 울긋불긋 한 肝
한 달에 한 번
꽃잎 같은 년, 다녀간 뒷자리 어지러이
그거 판독하러 가는 길
판판이 기죽는 일
내 다 안다
별유천지에 모다 아프다 아프다 하는 것들
저리 붉고 어여쁜 입술들
꽃불에 닿은 자리라는 걸
- 웹진<시인광장>.2007년 겨울호
연두의 회유 [조용미]
당신과 함께 연두를 편애하고 해석하고 평정하고 회유
하고 연민하는 봄이다
물에 비친 왕버들 새순의 연둣빛과 가지를 드리운 새초록의 찰나
당신은 연두의 반란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찬란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유혹이라 하고 나는 연두의 확장이라 했다
당신은 연두의 경제라 하고 나는 연두의 해법이라 했다
여러 봄을 통과하며 내가 천천히 쓰다듬었던 서러운
빛들은 옅어지고 깊어지고 어른어른 흩어졌는데
내가 아는 연두의 습관
연두의 경계
연두의 찬란을 목도한 순간, 연두는 물이라는 목책을
둘렀다
저수지는 연두의 결계지였구나 당신과 함께 초록을 논
하는 이 생이 당신과 나의 전생이 아닌지도 모른다
- 당신의 아름다움, 문학과지성사, 2020
풀밭나라에서 안부를 [이기철]
그대 한 복판에 닿고 싶어서 내 발은 오늘도 그대 그늘 백 리 밖을 혼자 서
성이네
내 몸 어딘가에 숨겨둔 마음은 저 혼자 두근거려 제 무게를 간신히 견디네
우리가 풀밭이라고 말하는 초록나라의 자디잔 이야기는 사람의 귀로는 듣
지 못하네
햇살 아래 햇살 아래 흐르는 냇물, 오라는 당부 없어도 내일이 온다고
혼자 나선 십리 펄, 내게 온 오늘이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고
걸어가는 등뒤엔 한때 그리움이라고 말했던 사람의 이름이 쌓이네
흔들려 땅의 중심인 풀밭 나라에 오늘도 햇볕은 단품 식탁을 차리네
반짝임이 언어인 초록 위에 노는 햇볕을 잡으려다 두 손만 데네
- 시와 세계 2024 봄호
풀은 별이에요 [이진명]
하늘에만 별이 있을까요
새파랗게 풀 돋아오릅니다
처음엔 어린 풀
총총 검은 땅에 박힙니다
마른 땅에 쏟아집니다
떨립니다 열립니다 일어섭니다
하늘에만 별이 흔들릴까요
새파랗게 풀 흔들립니다
크 별 작은 별 물결칩니다
빛 부서집니다 흘러갑니다
하늘에만 별이 영원할까요
풀은 발 아래 영원한 별
죽어도 다시 사는 초록의 별입니다
초록의 반지, 약속의 노래입니다
풀 하나 나 하나
풀 둘 나 둘
- 단 한 사람, 열림원, 2004
봄 회의 [문정희]
이유도 없이 가슴 미어지는
이 슬픔을 들어다가
오는 봄 곁에나 가벼이 앉히고 싶다
암소가 보리밭 너머 먼 산을 향해 일어서고
추위를 견딘 소나무가
청년의 어깨처럼 듬직해지는
봄날, 나의 슬픔은
초록의 블라우스를 입고
새로 핀 꽃들 속에 앉아
민주적으로 봄 회의나 했으면 좋겠다
오늘 회의 주제는
뜬구름 같은 사랑! 그런 주제 말고
푸른 눈썹을 달고 흔들리는 저 나무들처럼
말보다 몸으로 실천하자는 주제로 정하리
봄과 슬픔을 투시하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온몸으로 발언하리
- 작가의 사랑, 민음사, 2018
마른 우체통 [오민석]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름들을 허공에 불렀던가 이제 내가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대가 꽃이 되지 않는다 사기 치지
마라 쓰레기 같은 씨니피앙들만 온 세상에 너절하구나 꼭꼭
숨은 당신들 때문에 내 눈만 직경 10센티는 앞으로 더 튀어
나왔다 푸른 구름이 전단지처럼 둥둥 떠가는 오후 나는 오
직 불안을 완성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처럼, 커피를 반쯤
마시다가, 책을 읽다가, 전화를 하다가, 드뷔시를 듣다가,
좌불안석이다 보르헤스가 걸어간다 열기가 그를 감싼다 그
는 성스러운 고독에 떨며 시를 썼다 비애의 신열도 그는 고
독하게 앓았다 내일 또 하나의 이름이 내 구강을 떠나 허공
을 울릴 것이다 꼭꼭 숨은 당신을 나는 더 이상 찾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름뿐인 당신이 봄비 속에서 조용히 초록 혓
바닥을 내밀기를 마른 우체통처럼 우두커니 기다릴 것이다
- 굿모닝, 에브리원, 천년의시작, 2019
밤의 크루아상과 토끼 [이은규]
밤 산책을 합니다
하늘엔 노란 크루아상이 걸려 있어요
초승달이라는 이름의 빵을 좋아했던 한 사람
문득 인간은 포유류
따뜻하게 데운 흰 우유와 설탕 알갱이
울고 싶지만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고요
나는 오지 않는 잠을 기다리다
마중 나오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가끔은 산책길에 빨래를 하기도 하지요
코인을 넣으면 싱싱 돌아가는 빨래들
아무리 노크를 해도 이제는 열리지 않는
한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떠올려봅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안다는 건 어른의 일입니까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않겠습니다
그날의 소풍
우리가 페달을 밟지 않아도
신나게 돌아가던 자전거 바퀴
옷에는 주인의 정령이 스민다고 하는데
한 사람이 즐겨 쓰던 수건이 빙빙 돌아가고 있네요
초록 수건 위로 토끼 한 마리 뛰어놀고 있습니다
오른쪽 귀는 무언가 쫑긋거리는 중이고요
왼쪽 귀는 무심히 접혀 있습니다
저만치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내 눈에만 보이는 검은 얼룩, 얼룩들
토끼가 해맑게 웃으면 웃고
찡그리면 찡그리는 동안
토끼도 나도 점점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어가네요
애써 기억을 표백하지 않아도
한 사람의 이목구비는 최선을 다해 지워지는 중입니다
띵, 종료음이 울리자
봄날의 자전거 페달도 함께 멈춥니다
안녕
그림자 하나
새벽을 향해 스며들며
- 무해한 복숭아,아침달, 2023
단 하나의 방 [김상미]
나는 듣고 있네 단 하나의 방
뜨거운 피 뜨거운 가슴 뜨거운 몸
제발 꽉 안아주세요 말하는 사람 하나 없는
바다 밑 외로운 해초 같은 단 하나의 방
문을 열면 조롱의 칼잡이 세상의 문화가 그대로 보이고
9월의 늦은 저녁 강에 닿지 못한 죽은 연어들의 착한 비린내 진동하고
언덕 끝 보리수나무에 새긴 너와 나의 맹세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에 지겹도록 으깨지고 참담하게 으깨지고
나는 듣고 있네 단 하나의 방
구석구석 쌓이는 먼지는 우아한 우주의 또다른 파편인가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는 자의 열광인가
햇볕에 그을린 두 발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세상의 온갖 나쁜 공허 미친 접착제처럼 찰싹 들러붙는 단 하나의 방
푸드덕푸드덕 몸속에서 날갯짓하는 새의 부리에
날마다 영혼 찢기면서도
예술의 이름으로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루비처럼 붉은 사념의 폭포수에
남은 인생 몽땅 빠뜨리고 빠뜨리는 단 하나의 방
비바람 밀려올 때마다 땅을 울리고 물을 울리고 구름을 울리는
광활한 초록 들판을 가진 사람과 사귀고 싶어
우두커니 창가에 서서 바라보는
아직은 너무나 젊고 너무나 적막한 단 하나의 방
숲에서 길을 잃고 대도시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무거운 머릿속에서 길을 잃고도 그 깊은 강을 헤엄쳐온 생일 케이크의 반가운 손
그 손을 잡고 아, 한 번은 꼭 살아야 하는, 꼭 살고 싶은 단 하나의 방
노란 은행나무들이 새 삶을 위해 잎과 열매를 떨어뜨리는 기분좋은 가을,
그 길목에서 나는 아직도 듣고 있네
아주 어린 소녀였을 때 읽었던 너의 시
언어가 처음 내게 입맞춤하며 들려주었던 아름다운의 끝 집,
나와 너무나 가까워 마치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단 하나의 방
-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문학동네, 2022
앉아서 달팽이를 생각하는 밤 [김은지]
명절에 만난 언니가 등을 밟아 달라고 한다
왜 아프냐고 묻는데
자신이 왜 아픈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다섯 살 조카가 한복 치마를 꼭 쥐고
아장아장 계단을 내려가는
매일의 성장도 눈부시지만
어른의 몸에 일어나는 일들 역시
놀랍도록 다양하다
난 오늘 앉아서 잔다
이석증이란
달팽이관에서 석회 가루가 떨어진 거라고 한다
미세한 가루가 제자리로 돌아가길 기다리며
앉아서 달팽이를 생각한다
이 낯선 어지러움이 잦아들 때까지
숲으로 가는 달팽이는
느리고
자꾸만 멈춰서 풍경을 둘러 본다
땅에 떨어진 잎은
나뭇가지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을까
잎을 흙으로 만드는 계절
새싹이 초록을 트는 계절
같은 계절이다
- 고구마와 고마워는 두 글자나 같네, 걷는사람, 2019
휘파람새 [장혜령]
휘파람새는
레몬 태양을 물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이 잎사귀에서 저 잎사귀로
휘파람새는
빛을 튕기며 바느질하고
노랑에서 파랑으로
붉음에서 울음으로
휘파람새는
빛 속에 참여하고
수런거리는 물의 소용돌이로
우글거리는 꽃의 한복판으로
휘파람새는
반복의 반복
반복의 반복을 반복
허공은 고요
구멍 뚫려 빛나는 고요
잎사귀들은
창문처럼 열려 있고
거울처럼 비추고 있고
한 걸음 들어서면
한 걸음 짙어지는 녹음처럼
휘파람새는
수국 안개를 향해
뱀의 혀처럼
작은 불 날름거리는
어린잎들을 지나
휘파람새는
숲의 혈관
초록 풀씨를 물고
세계를 건너고 있다
영원히 영원히 건너고 있다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문학동네, 2021
the Days* [고주희]
비는 힘을 가졌지
늙은 소철나무의 잎을 부드럽게 하는 힘
초록을 더 짙은 초록으로 끌어올리는 힘
그럴 때 손을 내밀면 베이거나 찔리지 않고 그냥 흐르지
가까이서 보면 작고 나약하고
역겹게 보이는 것들
뿌리 밖으로 긴 발가락을 움직여
기척을 보내오는 제 안의 모든 벌레를 지켜내지
뭐든 가까이 있으면 흠집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는
너로부터 두어 발짝 뒤로
나무 아래 더 작은 나무
더 작은 나무 아래 들꽃, 넝쿨지어 기어오르는 새순
높이를 쪼개며 낮아지는 빗방울
개미가 두 배로 커지는 투명 볼록 거울
또 그 아래 장식용 코끼리처럼 춤추는 구름
내가 서 있는 이 한 줌의 평온
비좁은 풀의 간격을 재는 일처럼 소용없고
간절히 바라던 일의 결말과는 먼
비 갠 뒤 어둠은
어디선가 회색빛 자두를 키우고
해변을 입양해서 돌보는 노인들이
밤새 알을 부려놓고 사라진
거북이들의 미래가 된다
하루에 일곱 번 물빛이 바뀌는 바다
바다의 물빛이 전시된 미술관
푸른 현판이 되어 내걸린 사철나무들
한차례 소나기를 만난 전생이
대책 없이 또 붉게 젖는다
* 김보희 ‘the Days’ (2014년 作)
- 웹진 시인광장,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