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한강
난처한 일이 그녀에게 생겼다. 벤치에 앉아 깜빡 잠들었다가 깨어났는데, 그녀의 몸이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징조 같은 것은 없었다. 특별한 날도, 특별한 장소도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 산책하는 천변 길을 천천히 걸어 약속 장소 근처로 왔고, 약속 시간인 오후 여섯 시까지 이십 분 가까이 남은 것을 확인하고 물가 벤치에 걸터앉았다. 영하 5도 안팎의 기온이었지만, 지난 주말 영하 20도 가까운 한파가 다녀간 탓인지 얼마간 포근하게 느껴졌다. 든든하게 입고 나와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셔츠에 터틀넥 스웨터를 껴입었고,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코트를 걸쳤다. 긴 털목도리를 여러 번 돌려 감았으며, 폴라플러스 안감을 댄 털실 벙어리장갑을 끼었다.
어쩐지 숨 막히게 느껴지는 목도리를 느슨하게 하고 어께에 메고 있던 헝겊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서 그녀는 일월 하순의 천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비교적 자연이 잘 보존된 이 신도시로 이사 온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지난 칠월과 팔월 녹음이 우거졌을 때에는 하천 일대가 마치 아열대 밀림의 일부처럼 야생적으로 느껴졌었다. 맹렬한 햇빛 때문에 낮 시간엔 이 벤치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야생 두루미와 왜가리들만은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듯 작열하는 태양을 희끗한 머리에 이고, 길고 가느다란 다리를 물에 담근 채 먹잇감이 수면 아래로 반짝이길 기다리며꼼짝 않고 서 있었다.
그 짙은 녹음도, 무자비한 열기도 사라진 풍경은 고요했다. 나무들은 벌거벗었고 갈대숲은 바싹 말라 있었다. 천변 길 건너편에 밀집되 고층 건물들의 석회색 스카이라인이 무거운 먹구름에 쌓여 마치 거대한 잔해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졸음이 쏟아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겨울날 야외에서 잠이 오다니, 그녀는 그대로 깜빡 졸면서 무맆 위로 쥐고 있던 헝겊 가방의 끈을 손에서 놓치고는 이상하다, 생각하며 다시 꽉 쥐었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되지, 생각하는데 정말로 잠들어버렸다.
퍼뜩 깨어보니 그사이 눈이 내려 있었다. 길어야 십 분, 필경 그보다 짧은 시간이 흘렀을 텐데, 소금을 곱게 갈아 흩뿌린 것 같은 눈이 벤치 주변의 시멘트 바닥과 누렇게 시든 잔디를 덮고 있었다. 아래에 있는 것들이 고스란히 비쳐 보일만큼 성근 눈이었다. 고개를 들자 헐벗은 물가 버드나무에도 소슬히 눈이 덮여 있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기 전에 그너는 헝겊 가방에 쌓인 눈을 털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때였다. 졸음이 분명 가셨는데, 잠기운 때문에 둔탁한 거라고 느꼈던 몸 전체의 감각이 여전히 둔한 채로 남아 있었다. 움직임이 너무 무디어서 거의 자신의 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잠이 덜 깼나, 생각하며 잠갑 낀 손으로 눈을 비비자 고운 눈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어어, 하고 머리를 털자 눈가루가 더 많이 떨어졌다. 눈가루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털어내려고 했는데 끝없이 자꾸만 떨어졌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털장갑 안쪽에서 느껴지는 무디디무딘 촉감이었다. 손이 둔한 것인지, 손이 만지는 이마와 머리가 둔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제대로 느끼기 위해 그녀는 오른쪽 장갑을 벗었다. 설화석고로 뜬 것처럼 정교한, 흰 눈으로 빚어진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믿기지 않아 왼쪽 장갑을 마저 벗고 나란히 펼쳤다. 분명했다. 눈으로 만들어진 손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오른손으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문질러보았다. 좀 전에 머리를 털었을 때처럼 입자가 고운 눈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약지의 손톱 부분에 시험 삼아 살짝 힘을 줬다. 조심했는데도 손가락 위쪽 마디의 절반이 부스러졌다. 무맆에 조그만 눈덩이들이 흩어졌다.
그 반짝거리는 것들을 멍하게 내려다보다가 그녀는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당장 거울 대시 쓸 만한 게 그것뿐이었다. 카메라 랜즈 방향을 바꿔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눈썹과 속눈썹, 동공과 눈시울과 눈가의 미세한 주름까지, 단단하고 갸름한 눈 덩어리에 정교한 세부가 새겨 넣어진 두상이 어둑한 액정 화면에 담겨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어디 있어요?
여섯 시에 오기로 한 현수 씨였다.
저는 조금 있으면 도착해요.
그는 차멀미를 하기 때문에 버스 타는 것을 힘들어했다. 매번 그걸 견디며 온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되도록 정류장까지 그를 마중 나가곤 했다.
저도 근처에 있어요. 정류장에서 기다릴게요.
그런데, 하고 그녀는 덧붙여 물었다.
괜찮을까요? 내가 눈사람이 되었는데요.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농담이라 생각한 것이다.
정말 눈사람이 되었어요.
알았어요, 곧 만나요.
여전히 웃으며 그가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차례롤 두 짝의 장갑을 낀 뒤 그녀는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다. 천변 길에서 마주 오던 몇몇 사람이 놀란 듯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긴 했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뒷걸음질 치지는 않았다. 관광지에서 얼굴에 흰 물감을 칠하고 석상 흉내를 내는 마임 배우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계단을 올라 대로변으로 들어서자 행인들이 많아졌지만, 적당한 거리를 두고 피해 가거나 간혹 멈춰 서서 바라볼 뿐 그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정류장에 다다라 그녀는 멈춰 섰다. 버스 번호와 노선이 표시된 반투명한 아크릴 벽에 석고상 같은 자신의 얼굴이 비쳐 있는 것을 서름서름하게 들여다보았다. 두꺼운 코트 속에 숨겨진 그녀의 몸 -눈사람- 의 감각은 사람이었던 때와 달랐다.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더 이상 영하의 날씨가 쌀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 기온이 떨어져야 한다고, 그편이 안전할 거라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전체적으로 움직임이 둔해졌지만 몸무게 자체는 가벼워졌고, 무엇보다 몹시 약해진 게 분명했다. 실수로 넘어지거나 어딘가에 부딪히는 것만으로 위험하리란 걸 분명한 직관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은 오히려 차분했다. 심신의 이런 평온은 지난해 그녀가 건강검진을 위해 수면내시경 검사를 하며 마취유도제 주사를 맞은 뒤처럼 느끼는 것이었고,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고요하고 거의 완전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아크릴 벽으로부터 돌아서서 거리를 바라보았다. 퇴근길 팔차선 도로에 저체된 차량들이 붉은 미등들을 밝힌 채 끝없이 멈춰 서 있었다. 마스크 대신 검은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린 택배 기사의 오토바이 한 대가 승용차들 사이로 곡예하듯 차선을 바꾸어 달려와, 보행 신호가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한달음에 질주해 교차로를 가로질러 갔다. 귀를 찢는 그 굉음이 삽시간에 아득해져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그녀는 문득 알아차렸다. 단단하고 고요한 눈덩어리 -그녀의 새로운 몸-에서 한 군데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왼쪽 가슴, 심장이 있던 자리였다. 예전처럼 심장이 뛰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곳이 아직 미미하게 따뜻했다. 그 언저리의 눈이 녹아 약간의 물이 왼쪽 가슴 아래께에 고여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조금씩 더 녹고 있는 건지, 반대로 심장의 중심까지 마저 얼어붙는 중인지 확실치 않았다. 어느 쪽이든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이게 혹시 마지막인가.
그녀는 문득 의문했고, 살아오는 동안 두어 차례 같은 의문을 가졌던 순간들을 기억했다. 그때마다 짐작이 비껴가곤 했는데, 기어이 오늘인가.
서울에서 오는 푸른색 광역버스가 버스 전용차로를 따라 느린 속력으로 져류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짙게 선팅된 차창 안쪽에 서 있는 현수 씨의 호리호리한 어깨 윤곽을 그녀는 곧 알아보았다. 보도로 내려서자마자 두리번거리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반갑게 손을 마주 흔들던 그의 얼굴에서 이내 웃음이 가셨다. 심각한 얼굴로 그가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정말이네요.
난처한 듯 그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달리 설명할 말이 없어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좀 걸을 까요. 우리?
설상 걷는 것 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실내에 들어갈 수 없으니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없고, 물론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마실 수도 없다.
나란히 천변을 걸으며 그들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가 그녀의 장갑 위로 손을 잡았는데,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손을 빼냈다. 녹을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안해했다.
이제 어떡하지요?
그가 물었다. 자신에게 묻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이제는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따뜻한 데로 들어갈 수도 없고··· ···.
그가 멈춰섰다.
만질 수도 없는 거예요?
날이 저물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드문드문 오가는 행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그녀에게 짧게 입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너무 따뜻해서 그녀는 두려웠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사이로 살짝 들어왔다. 혀는 따뜻했다. 겨우 이 초 가까이 흘렀는데 그녀의 아랫입술과 혀끝이 조금 녹았다.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같아요.
그가 당황한 듯 웃었다. 실망한 것 같기도 했다. 차멀미를 견디며 이렇게 멀리 왔는데 손도 제대로 못 잡고 키스도 할 수 없다니,
이건 너무하네요.
너무하다는 말이 그의 처지에 관한 것인지, 그녀를 걱정하는 뜻인지 알 수 없어서 그녀는 잠자코 그의 올려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떡하지요,라는 물음에 우리가,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라는 물음에는 당신이,라는 말이 생략돼 있다. 그러니 이번엔 그녀가 대답해야 했다.
글쎄요, 일단 집에는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
잠시 그녀는 말을 끊었다.
오늘밤엔 노숙을 할 수밖에 없겠어요.
가방을 뒤적여 휴대폰을 꺼내며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일 날씨가 어떨지 모르겠네요. 계속 영하일지.
할 수 있는 일이 생겨 다행스러운 듯 그가 재빨리 자신의 휴대폰으로 날씨를 검색했다.
다행이에요. 영하래요. 새벽엔 눈도 조금 내린대요.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그녀는 잠자코 미소를 지었다.왼쪽 가슴 아래 고인 물에 대해 불쑥 그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았다.
배고프지 않아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죠.
그래도 저녁 먹을 시간인데, 혼자라도 먹어요.
그는 가난한 데다 장기간 실직 상태였기 때문에 대체로 그녀가 밥을 샀다. 오늘 타고 온 광역버스의 차비조차 그에게는 부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식사를 마친 뒤 그녀가 계산을 하는 것과, 혼자서 밥을 사먹으라고 그녀가 돈을 주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헝겊가방 속에 손을 넣은 채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서 있었다. 용기를 내 만 원권 한 장을 꺼냈다. 더 주고 싶기도 했지만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오히려 더 많이 주는 편이 그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덜 상하는 일일까? 그녀는 잘 판단할 수 없었다.
이 돈으로 간단히 저녁 먹을래요? 그동안 나는 혼자서 생각을 해볼게요.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그는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밥은 안 먹어도 돼요.
고집스러운 어조로 그가 말했다.
함께 이Rdj줄 수 있어요.
밤새 바깥에서요?
그녀는 놀랐다. 조금 한파가 누그러졌다고 그는 늘 입던 패딩 점퍼 대신 허름한 검은색 단벌 코트를 입고 왔다. 생활이 불규칙한 그는 언제나처럼 점심때에야 일어났을 테고, 멀미할 게 걱정되어 여태 아무것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허기진 몸이 더 추울 것이다. 그의 코끝은 더 붉어졌고, 꽉 다문 입술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가 느낄 수 없게 된 그 신체의 감각들이 얼마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녀는 침착하게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지금 윤이를 만나야 해요.
그녀는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세 살에 결혼해 이듬해 아이를 낳았고, 올해 중학교를 졸업하는 그 아들을 삼 년째 혼자 키워오고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식탁에 저녁을 차려놓고, 오늘 엄마에게 약속이 있으니 혼자 먹으라는 쪽지를 수저 옆에 남겨두었다. 지금쯤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그걸 읽었을 것이다.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방금 말했잖아요?
불만을 숨기려고 갑자기 깍득해진 말씨로 그가 물었다.
그거야 윤이에게 전화해서 나오라고 하면 되죠. 아니면 현관 앞에서 이야기해도 되고.
일단 지금은 함께 있으면 안 돼요? 우린 방금 만났잖아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해부터 키가 부쩍 자라 올해 거의 180센티미터나 된 그 아이는 그녀가 없는 이 시간을 홀가분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이즈음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유난히 갑갑해 했고 종종 반항했으며 어서 성년이 되어 혼자 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으니, 밖에서 저녁 먹는다던 엄마가 나타나면 내심 실망할 것이다. 그런 변화는 사실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어서, 가족이 둘뿐이라 지나치게 밀착된 게 아닌가 걱정해오던 그녀를 안심시켰다. 현수 씨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들은 방금 만났으니 삼십 분에서 한 시간쯤 더 걷다가 차분히 헤어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왼쪽 가슴 아래 고인 물이 마음에 걸렸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생길 수도 있었다. 기왕 아이를 만난다면 빠를수록 좋았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돌아올게요. 그동안 현수 씨는 저녁을 먹어요.
정말 섭섭해하는 표정으로 그는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 뒤편을 건너다보았다. 그래요,라고 이내 체념한 듯 말했다.
그럼 이단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짐작하고 있었다. 매번 너무하지 않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아이가 먼저라니, 대체 난 이 사람에게 무슨 존재인 거지. 그녀보다 일곱 살 어린데다 결혼한 적 없는 그는 아이에 대한 그녀의 책임감과 불분명한 죄책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달래주려고 그녀는 그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장갑을 벗겼다. 자신의 손바닥에 그녀의 손을 얹고는 가만히 손등을 쓸었다.
이런.
흠칫 놀라며 그가 말했다.
손가락 끝이 부스러졌어요.
그대로 손을 잡고 그들은 걷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따뜻한 게 그녀의 마음에 걸렸지만, 습기를 품은 저녁 바람이 꽤 차가워서 그 체온만으로 급격하게 그녀의 손이 녹을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구나 미리 걱정할 필요 없었던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이 시렸는지 그가 먼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장갑을 받아들고 조심조심 끼었다. 그는 위치를 바꾸어서 이번엔 오른손을 장갑 위로 잡았다.
둘이 만났다 헤어질 때면 그가 늘 바래다주곤 했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장갑도 끼지 않고 와서, 이렇게 차가운 손을 쥐고? 이제 그의 코트 주머니에 그녀의 손을 끌어다 넣을 수도 없는데.
마침내 더 견디지 못한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 그녀의 손이 자유로워졌을 때 그녀는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똑같아요, 특별한 일 없어요.
두 손바닥을 마주 비벼 열기를 일으키려 애쓰며 그가 대답했다. 그의 입술은 아까보다 더 푸른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딱딱해 보이는 붉은 손등에 호오 호, 연신 입김을 불었지만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끈질기게, 그러나 성과 없이 반복되는 그의 손동작을, 그의 몸속이 따뜻하다는 걸 증명하듯 입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하얗게 뿜어져 나와 흩어지는 입김의 움직임을 그녀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가 일했던 마지막 직장에서 현수 씨는 그녀의 팀에 들어와 잠시 일했던 인턴이었다. 나이나 경력으로 보면 정규직으로 뽐아야 할 사람이었지만 사장은 일단 일하는 것을 보자며 그를 인턴으로 채용했다. 그 회사의 정규직 직원은 그녀를 포함해 셋뿐이었고, 나머지 인력은 인턴사원들과 실습생들로 충원되었다. 그녀의 급여도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기에 넉넉지 않은 수준이었으니, 인턴사원들에 대한 처우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여름과 겨울 방학 때 현장실습을 나왔다가 휴학하고 한 학기나 일 년씩 더 일하는 대학생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수당은 물론 점심값도 지급받지 못했지만 잦은 야근과 주말 특근에 군말 없이 동참하는 분위기였다.
처음부터 그녀는 현수 씨가 오래 버틸 거라고 예상하지 않앗다. 다른 인턴들이 그 회사에 붙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직 그들이 이십 대였고, 친근하게 굴지만 실은 권위적인 사장이 이따금씩 정규직 전환에 가능성을 암시하곤 했으며, 어쨌거나 최소한 일 년이라도 버텨야 어디든 지원할 때 이력서에 한 줄을 넣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이 대가 없이 그곳에서 일을 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했다. 불황이 길어지면서 대부분의 회사들이 신입 사원보다 소수의 경력 사원을 뽑고 싶어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보다 두 살 많을 뿐인 젊은 사장은 작원들의 그런 불안과 기대감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덕분에 작은 사무실의 분위기는 대체로 밝고 정치적이었다. 그 매끈한 수면 아래로 보이지 않는 불신과 질투, 경쟁과 용렬함과 환멸이 밑물결처럼 일렁거렸는데, 현수 씨는 그 분위기에 좀처럼 융화되지 못했다. 결국 그가 한 달 만에 그만 두었을 때에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퇴사하기 전까지 존재감이 강하지 않았던 그가 바로 회사에서 잊히지 않은 것은, 오직 그의 한 달 치 월급이 즉시 지급되자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려운 사정을 내세우며 사장은 차일피일 임금을 미루었다. 그녀의 자리와 가까운 사장의 방에서 알았어, 알았어요, 미안해, 이달 말까지 부친다니까? 하고 무례와 공허한 사과가 자신만만하게 뒤섞인 말들이 들려오면 현수 씨와의 통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현수 씨가 회사로 찾아온 것은 그렇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간 삼월 초순이었다. 그날따라 사장은 출근이 늦었다. 현수 씨는 자신이 일하던 자리에 앉아 있는 신입 인턴사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거기 걸터앉았다. 그녀의 책상에서 고개를 들면 그의 옆얼굴이 바로 보였다. 그는 무릎 위에 책 한 권과 휴데폰을 올려놓았지만 한 차례도 그것들을 펼쳐 읽거나 만지지 않았다. 마치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침 다음 날이 프레젠테이션이어서 그날 점심은 각자 얼른 먹고 돌아와 일하는 분위기였다. 식사하러 나가는 직원들이 그의 앞을 지나며 인사할 때마다 그는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그녀는 막내인턴에게 만 원권 두 장을 주며 자신과 현수 씨까지 세 사람분의 김밥과 먼두를 부탁했는데, 동아와 김밥을 건네는 인턴의 손이 무안할 만큼 그는 단호하고 정중하게 사양했다.
오후 두 시경, 사장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복도로 나가서 받고 온 직원이 현수 씨에게 말했다. 저, 사장님 오늘 사무실 안 나오신다는데요. 외근 중인데 바로 퇴근하신답니다. 현수 씨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야근 전에 헐한 저녁을 먹기 위해 직원들과 학생들이 무리 지어 사무실을 나설 때까지도, 그는 화장실에 한 차례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같은 자세로 자리를 지켰다.
마침내 사무실에 둘만 남았을 때 그녀는 그의 앞으로 걸어가 섰다. 그의 이름을 부른 뒤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칼국수 잘하는 데가 새로 생겼어요. 같이 가요.
그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표정은 예상과 달리 침울하지도, 고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가보셔야 하지 않아요?
그가 담담하게 물었다.
항상 정시에 퇴근하시잖아요.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 회사에서 유일하게 야근을 하지 않는 직원이었다.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야근은 하지 못한다고, 회사 일이 급한 경우 주말 낮 시간에는 출근할 수 있다고 처음부터 그녀는 사장과의 면접에서 말했었다. 이미 이야기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장이 내심 못마땅해 한다는 것을 -다른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다만 그녀와 경력과 실력이 비슷한 사람을 같은 월급으로는 쓸 수 없기 때문에 내버려두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 그녀는 칼국수 두 그릇과 만두 한 접시를 시켰다. 현수 씨는 한마디 말도 없이 식사에 몰두했다. 너무 빨리 상대의 그릇이 비어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얼른 그걸 다시 채워줘야 할 것 같은 초조한 책임감을 느꼈다. 오래전 그녀는 독자들이 엽서를 읽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여고 시절의 스승과 결혼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노총각이었던 문예반 선생님과 어쩌다보니 단둘이 우동을 먹었는데, 이 여학생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님이 자신의 국수 그릇을 밀어 상대의 그릇과 맞닿게 한 뒤 국수를 덜어주었다는 것이었다. 저편에서 이편으로 한없이 넘어오던 국수가락의 끝이 마침내 두 개의 그릇을 연결하며 가만히 걸쳐져 있는 것을 보고, 문득 그들의 인생이 연결되었음을 알았다고 그 왕년의 여학생은 엽서에 썼다. 그의 그릇에 칼국수를 덜어주다 그녀는 문득 그이야기를 떠올렸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다니.
집이 여기하고 가까워서요.
자신의 그릇으로 끝없이 넘어오는 국수 가락들을 바라보던 현수 씨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이십 분이면 걸어올 수 있어서, 순전히 그것 때문에 지원했던 거예요.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버텨볼 생각이었어요. 한두 달 월급이라도 받을 때까지.
고단해 보이지도,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은 예의 담담한 얼굴로 그는 덧붙여 말했다.
어쨌던 그럼 조금 더 생존할 수 있을 테니까요.
세 차례 더 구렇게 회사로 찾아온 끝에 그는 자신의 월급을 받아냈다. 마치 낯익은 정물이 된 것처럼 사장의 방 앞에 앉아 있는 그의 침착한 옆모습을 지켜보던 오후, 그녀는 언젠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보았던 나무늘보의 발톱을 떠올렸다. 그 긴 발톱들은 매우 날카롭게 휘어 있지만, 누군가를 공격하는 대신 나뭇가지에 매달려 버티는 데에만 사용된다.
그 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그녀도 퇴사했다.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그즈음 사장은 본보기 삼아 인턴 직원 하나를 택해 정직원으로 채용한 뒤 그녀의 팀의 부팀장으로 임명했는데, 몇 주 뒤 밤 열 시경에 그녀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가끔 사장이 직원들에게 비슷한 길이의 단체 문자를 보내곤 했기 때문에 그녀는 처음에 읽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는 사장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 회사, 한식구, 한솥밥 먹는다는 표현을 그는 즐겨 썼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려움을 견뎌주면 우리 회사가 고비를 넘길 수 있습니다. 다 같이 조금만 힘을 냅시다. 이번에 그녀에게 따로 보낸 문자의 어조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공허하고 형식적인 문자들의 끝에 사장은 썼다. 아쉽습니다. 정말 내 마음도 안타까워요. 앞으로 더 좋은 기회로 다시 함께 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즉시 사직하길 바란다는 이야기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치 문자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다음 급여일까지 출근했다. 잠시 일을 쉴 때면 그녀의 자?에서 내다보이는 플라타너스의 반짝이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사물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때로 그녀와 나무 중에 나무만 살아 있다고, 자신의 딱딱한 침묵을 주저없이 앞질러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느꼈다. 어쨌든 조금 더 생존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감광지에 착색되다 만 얼룩 같은 문장이 그 창유리 위로 어른거렸다.
퇴근 무렵이면 언제나처럼 어깨가 아팠고, 특히 머리와 목을 연결하는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직장인들로 빽빽하게 들어차 몸의 방향을 바꾸기도 어려운 지하철에서, 언제나처럼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의 몸에 속해 있지 않다고, 그 주변의 어떤 사물이라고 상상했다. 자신이 손목을 끼우고 매달려 있는 끈끈한 플라스틱 손잡이, 캄캄한 지하 터널을 향해 뚫린 검은 차창, 어깨에 매달려 있는 낡은 가방, 그 속에 소리 없이 담겨 있는 지갑이나 필통이라고 상상했다.
학창 시절부터 그녀는 경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 사람, 특별히 뛰어나진 않으나 실수를 하지 않으며 성실한 사람이었다. 일복이 많은 편이어서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도 출산휴가로 얻었던 두 달 말고는 길게 쉬어본 적이 없었다. 이젠 나이가 있으니 예전처럼 다음 직장으로 바로 환승하는 일이 쉽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초조해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알았다.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해도, 처음 몇 달은 실업급여가 들어올 것이다. 만지가 아직 남긴 했지만 꾸준히 불입해온 적금과 정기예금도 있다. 그것들을 당장 깨지 않는다 해도, 서울을 벗어나 수도권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면 전세금의 차액만큼 꽤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삶에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을 지 궁금했다. 이십대부터 그녀에게는 수첩에 연도를 적어가며 앞날을 계획하는 습관이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십 년, 이십 년, 가끔은 낙관적으로 사십 년 뒤까지 수첩에 연도를 적어내려갔다. 실직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했다.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할 경우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복지 시스템이 잘 갖춰진 나라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니, 오직 그녀 스스로 최악의 가능성들에 대비해야 했다. 상세하게 세웠던 계획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의외의 상황들로 인해 틀어지거나 폐기되기 일쑤였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오뚝이 인형처럼 현재의 시점으로 되돌아와 침착하게 장단기 계획을 다시 세웠다. 실손보험을 불입하고 최소한의 한 달 치 식비와 생활비를 제외한 가외 비용을 절약하고, 예금 잔고와 적금 만기를 계산하고, 아이의 대학 자금을 차질 없이 준비하기 위한 한 해 한 해의 예산을 미리 짜고 연말마다 결산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미결로 남는 오직 하나의 문제는 그녀 자신의 노후였다. 언제가 끝인지만 알 수 있다면, 잠이 오지 않는 밤 식탁 앞에 앉아 수첩을 펼쳐놓고 어깨와 목 사이 딱딱한 근육을 주무르며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그것만 안다면 미래를 준비하는 이 모든 일이 쉬워질 텐데, 착오 없이 분명해질 텐데. 깨끗해질 텐데.
마지막으로 회사에 출근한 날에도 그녀는 하루를 거의 채워 일했다. 늘 피곤하던 여섯 시를 한 시간 남겨두고 짐을 챙겼으며, 직원들에게 간결한 인사를 건넸다. 마침 방에 있던 사장과 짧고 형식적인 악수를 했다. 양어깨에 가방을 메고 한 손에 묵직한 쇼핑백을 든 채 지하철 역사까지 걸어가,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예.
굴 속에 사는 짐승처럼 현수 씨는 조용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삼십 분 쯤 뒤에 나타난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짐들을 유심히 살핀 뒤, 가타부타 말없이 가장 무거운 것들을 받아 들었다.
밥은 먹었어요?
그녀가 묻자 그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앞장서 걸으며 그는 선선히 말했다.
집까지 들어드릴게요. 지하철이 더 혼잡해지기 전에.
시작이 언제였는지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마치 몇 달 만에 굴 밖으로 나온 초식 짐승처럼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불쑥 그가 그녀의 짐을 받아 들었을 때인지, 시간을 거슬러 그녀가 그의 국수 그릇에 국수를 덜어주었던 저녁부터인지 분명치 않았다. 어느 쪽이든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전까지 없었던 무언인가가 두 사람의 사이에 생겨난 이유를, 보이지 않는 길고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그들을 연결하는 실체로서 존재하게 되고, 그 실의 진동이 출발하고 도착하는 투명한 접지가 몸 어딘가에 더듬이처럼 생겨난 까닭을.
지난가을 그 실에 대해 그녀가 처음으로 말했을 때 그는 대답했다.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사랑이란 것은 감정인데, 강렬하게 생겼다가 사라지고 뜨거워졌는가 싶으면 환멸 속에서 식는 무엇인데, 이 실과 접지의 느낌은 무색무취인 데다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이어서 거의 인간적이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가 오히려 더 진지한 고백으로 받아들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처음부터 그는 그녀가 앞날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해결책도, 해결 의지도 없는 가난에 수인처럼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에게 조언하거나 의지처가 될 처지도 아니었다. 함께할 어떤 미래의 기약도 없이,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지난 시간 동안 그녀는 다만 그 실의 감각만을 매 순간 실체로서 느꼈다. 밤에도 낮에도, 함께 있거나 떨어져 있거나, 그 실은 변함없이 진동하며 두 사람 사이에 고요히 걸쳐져 있었다. 그것의 존재감이 너무나 분명해서, 때로는 그가 있는 서울과 그녀가 옮겨 간 신도시 사이의 분명한 물리적 거리가 마치 부채처럼 접혔다가 활짝 펼쳐지는, 반쯤 생명을 가진 유동하는 덩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어디로 갔지, 퍼뜩 놀라며 그녀는 자신에게 물었다.
더 이상 그 실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되어서인지 그 투명한 접지의 감각도, 고요한 진동도 사라졌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처럼 그가 우뚝 멈춰 섰다.
너무 추워요.
냇가의 어두운 나목들에게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그가 말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조금도 춥지 않아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그는 바짝 그녀에게 다가서서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기분이 이상해요. 눈동자에 내가 비치지 않으니까.
이제 천변길을 벗어나 계단을 오르면 차량 통행이 뜸한 이차선 도로가 나오고, 그 길을 건너면 그녀가 사는 아파트 단지였다. 그녀는 가방 속 지갑을 더듬었다. 만 원귄 지폐 두 장을 꺼냈다.
이걸로 저녁을 사 먹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이따가 다시 통화해요.
이번에는 바로 거절하는 대신 그가 망설였다.
괜찮아요. 받아요. 이다음에 현수 씨가 돈 벌어서 맛있는 거 사주면 되죠.
다음에, 언제요?
갑자기 이렇게 눈사람이 되었으니까, 또 갑자기 사람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때 사줘요.
그녀는 짐짓 밝게 미소 지으며 팔을 흔들었다.
팔 아파요, 받아요.
그는 지폐 두 장 중에 한 장만 받았다.
근처에 있을 게요.
고마워요. 그녀는 대답했다. 그가 돈을 받아주어서 정말 고마웠다.하지만 그의 얼굴은 좀 전보다 어두워 보였다. 돈을 받아야 하느 s자신의 상황 때문인지, 그녀가 아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동안 혼자 있어야 하기 때문인지, 실이 사라진 것을 그 역시 느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서 가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요.
평소 같으면 그녀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설 때까지 그가 멀리서 지켜보며 서 있었을 테고, 그런 그를 향해 그녀는 서너 차례 뒤돌아서서 손을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잠정적인 작별이라서 그녀는 그저 가볍게 한번 손을 흔들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허공에 유리를 닦듯 천천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3층 복도 끝에 있는 집 앞에 이르러 그녀는 초인종을 눌렀다.
윤아.
복도 쪽으로 난 부엌의 쪽창에서 분명히 불빛이 새어 나오는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좀더 소리를 높혀 불렀다. 윤아. 문 열아.그녀는 다시 초인종을 눌럿다. 엄마야, 문 좀 열어봐. 마침내 포기하고 그녀는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비틀어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
윤아.
막 나오려는 참이었는지 아이가 스웨터에 트레이닝복 바지 차림으로 현관에 서 있었다. 엄마, 부르려다 말고 반쯤 벌린 입으로 그녀를 건너다봤다. 집 안으로부터 따스하게 번져오는 훈기를 피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그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 엄마가 눈사람이 되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나도 몰라, 잠깐 사이에 그렇게 됐어. 아까 잠깐 눈이 올 때 벤치에 앉아 있다가.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그녀는 일부러 밝게 말했다.
미리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하룻밤 지나면 괜찮을지도 모르니까.
정말? 하룻밤 지나면?
그녀는 현수 씨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갑자기 눈사람이 된 거니까. 갑자기 다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여전히 아이는 반쯤 입을 벌리고 있었다. 현수 씨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말을 믿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집에 못 들어와?
녹을 테니까.
어떻게 계속 밖에만 있어?
요 앞에, 천변에 있을 거야. 휴대폰 켜놓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혼란스러운 듯 아이가 물었다.
경찰에 신고할까?
경찰이 뭘 할수 있겠어.
병원에 가면 어때?
의사들이 뭘 할 수 있겠어.내일이라도 날이 풀리면 어떻게 해? 언제라도 따뜻해질 수 있는 거잖아.
내일까지는 영하래, 하지만 만약 계속 원래대로 안 돌아오고 이 상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
아이의 눈이 진지하게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냉동고 같은 곳에 들어가면 되지 않을 까?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수막혀 죽을 텐데.
아주 커다란 냉동고 있잖아, 대형 마트에 있는 그런 거.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말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곳으로는 가고 싶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면 뭐, 사설로 운영하는 지하 냉동 창고 같은 곳도 있겠지.
어둡고 갑갑할 텐데.
돈을 많이 주면 문을 열어 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전기세를 많이 내면 되는 거니까··· ··· 거기 책상을 가져다 놓고 책도 읽고.
문득 그녀는 아이가 다섯 살 무렵 처음으로 만들었던 눈사람을 떠올렸다. 조그만 눈덩이 두 개를 이어 붙이고 솔가지와 나뭇잎으로 눈, 코, 입을 표시한 그것을 냉동실에 넣어두고 싶어 했다. 아이의 소원대로 그녀는 하얀 사기 접시에 그걸 옮긴 다음 냉동실 위 칸에 넣었다. 아이가 만든 첫 눈사람과 다음 겨울까지 함께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 몇 시간 만에 눈사람의 표면에 구멍이 숭숭 뚫리며 거무스름해졌다. 하루가 지나자 크기가 3분의 2로 줄었으며, 마침내는 푸석푸석 주저앉아 원래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얼음과 달리 눈은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을, 낙하하는 눈송이들을 날개처럼 가볍게 만들어주는 공기의 입자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때문이라는 걸 그때 그녀는 배웠다.
하지만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 못하는 듯 아이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게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한 여름에 문을 열어놓기 힘들텐데.
그 전에 추운 나라로 가면 되지, 남극이나 북극으로.
어떻게 가, 거기까지?
배를 타고 가면 되지 않을까? 원양어선 같은 거?
그녀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기보다 아이를 좀 안고 싶었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조숙한 인상 탓에 종종 대학생으로 오해 받곤 하는 이 예비 고등학생이 그녀에게는 아직 어린애로 생각되었다. 갓 태어났을 때 보았던 조그맣고 섬세한 이목구비가 아직 아이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열감기에 걸려 그녀의 앞섶에 젖을 토하며 경기를 하던 돌 전의 모습, 목소리가 바뀌기 전 여리고 높은 목소리로 동요를 따라 부르던 오후가 며칠 전의 일들처럼 선명했다. 아이가 어렸을 때 그녀는 줄곧 고단했고, 함께 놀아줄 시간과 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건 그녀의 삶에서 가장 무겁게 지속된 결핍과 죄책감이었다. 하지만 막상 지난봄 그녀가 직장을 그만 두고 집에 있게 되자 아이는 불편해 했다. 엄마, 다시 회사가면 안 돼, 나에겐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신도시로 이사 온 뒤 처음으로 맞은 토요일 오전 햇빛이 드는 베란다를 바라보며 빨래를 개키던 그녀에게 아이는 말했다. 마치 고독한 어른을 흉내 내듯 뒤이어 고백했다. 엄마가 집에 오래 있으니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사실 엄마는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잖아, 아무래도 나는 혼자 있어야 강해지는 성격인 것 같아.
이리 좀 와봐, 윤아.
아이는 내키지 않은 듯했지만, 이내 순순히 운동화를 꿰어 신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아이를 안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마주 안았다. 순간 그녀의 왼쪽 가슴이 더워졌다. 얼어붙은 줄만 알았던 눈두덩 안쪽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새어나오려 하는 것을 느꼈을 때 그녀는 아이를 안 은 팔을 풀며 말했다.
현관문 닫아야겠다. 공기가 너무 따뜻해.
아이가 돌아서서 현관문을 닫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열여덟 평 아파트의 내부를 일별했다. 그녀가 소유해온 모든 사물들이 그 안에 있었다. 이사할 때마다 골칫거리였던, 평생 동안 사 모은 책들이 있었다. 그녀가 침대를 사기 전까지 불편한 대로 사용했던 삼인용 천 소파, 이케아에서 주문해 직접 조립한 이인용 자작나무 식탁이 있었다. 반쯤 열린 안방 문 사이로 보이는, 그녀가 종종 악몽을 꾸었던 삼나무 싱글 침대가 있었다.
텔레비전이 없는 데다 뉴스 검색을 오래 하는 편이 아닌데도 그녀는 뉴스와 관련된 꿈을 자주 꾸었다. 노동절 시위 중에 경찰의 과인진압으로 숨진 노동자의 시신을 경찰이 유족 동의 없이 부검하겠다고 발표한 날 밤에는, 어째서인지 살아 있는 그녀를 부검하겠다며 방역마스크를 쓴 의료진이 들것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오는 악몽을 꾸었다. 특히 지난 삼 년 동안은 죽은 아이들의 꿈을 되풀이해 꾸었다. 겹겹이 흰 천으로 감싼 수백 명의 아기들의 시신을 차례로 종이 상자에 담으며 그녀는 벌벌 떨었다. 빗소리인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몰라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습자지처럼 얇고 반투명한 몸을 가진 아이들이 비를 피해 끝없이 복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보다 해석하기 어려운 개인적인 악몽들도 있었다. 얼음 위를 걷는 꿈을 자주 꾸었는데, 마치 꿈들을 연결하는 시간이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듯 또렷하고 익숙한 감각으로 반복해서 그녀를 찾아왔다. 얇은 살얼음으로 덮인 호수 위를 그녀는 두려워하며 걸었다. 그녀만이 터득한 특별한 방법으로 종아리에 힘을 주면 가까스로 얼음이 깨지지 않았다. 몸무게를 극도로 가볍게 만들려면 호흡과 무게중심을 완벽하게 조절해야 했다. 실수하는 한순간 몸이 무거워졌다. 얼음이 깨지면 그 길로 끝이었다. 그녀는 수영을 배운 적이 없다. 그러나 미세한 방심과 실수가 반복되었다. 발밑에서 빠르게 부스러지는 얼음 위를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공포에 휩싸인 채 걸었다. 어딘가 비슷하지만 다른, 집에 관한 꿈도 꾸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복도가 사라지고 없었다. 깎아지른 아찔한 허공으로 한 발 내디뎠다가 그녀는 소스라치며 뒷걸음질 쳤다. 무사히 땅으로 내려가려면 수직의 벽을 두 손과 두 발로 힘껏 눌러 짚어야 했다. 얼굴과 배와 가슴과 허벅지를 빈틈없이 벽에 밀착해, 뺨의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흐르는 걸 견디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야 했다.
철컥, 소리를 내며 마침내 현관문이 닫혔다. 어둠이 그녀와 아이를 에워쌌다. 육중한 철문 뒤편의 따뜻하고 밝은 실내에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 밀봉되었다. 차갑고 깨끗한 수돗물이 흐르는 개수대도, 유리 물병과 머그잔이 놓인 식탁도, 그 위 전등갓 아래 빛나는 백열전구도, 그녀의 삼나무 침대와 끈질긴 악몽도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춥지 않아?
그녀가 아이에게 물었다.
괜찮아 스웨터 입었잖아.
오랜만에 끝말잇기 할까?
좋아.
그녀는 아이와 나란히 난간에 기대섰다.
네가 먼저 해, 윤아.
그래.
아이가 첫 단어를 생각하는 사이 그녀는 장갑을 벗고 자신의 눈시울 아래를 만져보았다. 좀 전에 아이를 안으며 눈물이 고였던 자리가 움푹 패어 있었다. 왼쪽 가슴아래 고였던 더운 물은 늑골 아래까지 흥건하게 흘렀다. 자신의 몸이 반으로 꺾인다면 그 자리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왼쪽 늑골 바로 아래에서 절반으로 꺾이며 부서질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을 수도 있다고 그녀는 고쳐 생각했다. 그 자리가 바깥에서부터 다시 얼어붙어준다면, 어쩌면 이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작한다, 행복.
복덩이.
이야기꾼.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이런 너무 빨리 끝났네.
엄마가 졌으니까 이번엔 먼저 해.
심장.
장사꾼. 너무 시시해.
알았어, 다시 하자. 네가 먼저 해.
겨울.
울보.
보름달.
달걀.
아, 달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이가 어둠 속에서 투덜거리다 말고 그녀를 불렀다.
엄마.
아이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울지 마, 이렇게 녹잖아.
그녀의 눈시울 아래 파인 자국을 아이가 집게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웠다.
이제 괜찮아 엄마, 감쪽같아.
고마워.
그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 냉장고에 엄마가 붙여놓은 종이 알지.
아이가 정색을 하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런 이야기 나한테 하지 마.
지난봄 그녀는 간단한 유언장을 백지에 쓴 뒤 뒤집어서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여놓았다. 십 년 넘게 연락이 끊겼던 대학 동창의 갑작스런 부고를 받은 다음 날이었다. 이른 새벽 빗길의 다중 추돌 사고였다고 했다. 그녀 자신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다행히 몇 년간은 아이가 빠듯이 생존할 수 있을 은핸 잔고가 있지만, 문제는 아이가 미성년이라 친권자가 관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드문드문 연락이 되었을 뿐이며 경제관념이 희박한 아이의 친부를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하나뿐인 남동생에게 아이의 양육을 부탁한다고 그녀는 백에 썼다. 통장들과 전세계약서, 인감도장의 위치를 적고, 동생에게 감사의 말을 쓰고, 마지막으로 어아에게 짧게 인사했다. 언제나 어둠보다 빛을 택하는 사람으로 사라아가야 해, 윤아. 그 아래 연도와 날짜,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이름을 적고 사인하며 그녀는 자신이 방금 쓴 다소 상투적이고 연극적인 문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 문장을 따르자면 그녀의 시간은 어느 쪽이었을까? 아마도 사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희지도 검지도,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사이. 밝은 방과 어두운 방을 가르는 딱딱하고 불투명한 격벽 같은 것.
하지만 어떤 불순물도 없이 밝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 순간을 택한다면, 갓 돌이 된 아이와 나란히 누워 맞았던 오래 전 여름의 새벽일 거라고 그녀는 그때 생각했다. 아침 빛에 저절로 떠진 그녀의 눈이, 미리 깨어 있던 아기의 검은 눈과 마주쳤었다. 왜 그랬는지 그날따라 아기는 보채지 않은 채 그녀가 눈을 뜨길 기다리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아기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이 담긴 웃음을 그녀는 그날 처음 보았다. 흔히 말하는 절대적인 사랑은 모성애가 아니라 아기가 엄마에게 품은 사랑일지 모른다고, 신의 사랑이란 게 있다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정망 안 추워?
그녀의 물음에 아이가 머리를 흔들었다.
계속 서 있으면 추워질 텐데. 이제 들어가.
언제 다시 얼 건데?
아이가 물었다.
금방.
몇 시에?
벤치에서 한숨 눈 붙였더니 원래대로 돌아오거나 하면 얼른 올게 물론 그렇지 않터라도 내일 아침엔 널 보러 올 거야.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들어가.
응.
들어가라고 하면서 그녀는 무심결에 아이의 손을 쥐고 있었다.
차가워, 엄마.
그녀는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
현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아이는 그녀를 향해 잠시 고래를 돌렸다. 역광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야가 흐릿해서인지도 몰랐다.
다시 완강하게 닫힌 철문 앞에 혼자 서서 그녀는 아파트 뒤뜰 너머 어둠에 잠겨 있는 초등학교의 교정을 돌아보았다. 담장 저편에 심긴 키 큰 나무들의 헐벗은 그림자가 그녀가 서 있는 복도 난간까지 검게 드리워져 있었다. 낮은 구두 소리를 울리며 그녀는 걷기 시작했다. 꼭대기 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도록 버튼을 누른 뒤 조금 기다리다가,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아 비상계단으로 들어섰다. 더운 물이 고인 왼쪽 옆구리가 조금씩, 서서히 무너져 앉고 있다고 느꼈다. 서둘러야 했다. 더 차가운 공기가 필요했다. 왼쪽허리를 두 손으로 짚어 버티며 그녀는 층계를 밟아 내려갔다. 초로의 경비원이 졸고 있는 현관을 빠져나갔다. 행인이 없는 아파트 경내를 절름절름 걸어 정문을 통과했다. 이차선 횡단보도를 무단으로 건너, 마침내 하천이 내려다보이는 계단에 이르렀다. 더 이상 늑골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첫 계단에 걸터앉았다.
하지만 무서울 게 뭐야. 문득 소리 내어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늑골이 무너지고 옆구리가 부스러지면 어때, 뒤이어 생각했다. 이렇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좀 전보다 또렷하게 목소리를 내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고통이 없다면 두려움도 없지.
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머니에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부모는 은퇴 후 버스로 다섯 시간이 걸리는 바닷가 소도시에 살고 있었다.
엄마, 어떻게 지내세요?
우리야 늘 구렇지. 괜찮다, 너는 어떠냐?
언제나처럼 가라앉은 음성으로 어머니가 대답했다. 불현듯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수 초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전화가 끊겼어요. 그럼요,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는 좀 어떠세요? 아직도요? 아무래도 다음 주에 서울 올라오셔서 큰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겠어요. 아버지 바꿔주실래요? 아버지 많이 안 좋으세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불안해하시면 더 안 나아요. 오래 사실 거예요. 아버지는, 할머니도 아흔까지 정정하셨잖아요. 그럼요. 아버지는 외가 쪽을 닮으셨잖아요. 엄마 다시 바꿔주실래요? 엄마, 어깨하고 무릎은 어때요? 물리치료 꾸준히 받으셔야 해요. 아버지 간호하는 틈틈이 일부러 짬을 내서 산책을 해야 해요. 산책하기 어려우면 마당에서라도 걸으세요. 당장 효과가 없더라도 기분 전환이라 되게요.
길지 않은 통화가 끝난 뒤, 이어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그녀는 망설였다. 어떤 말을 할 것인지 미리 생각하고 싶었다. 누나야, 오랜 만이야. 내가 네 신세를 많이 졌지. 재작년까지, 제대로 말은 못했지만 많이 고마웠어. 막 사춘기가 된 윤이가 너를 지나치게 의지했어,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만나자고 하는 바람에 네가 힘들었던 거 알아. 그즈음 네 인생도 잘 풀리지 않아 민감했을 때인데, 결혼 약속도 깨지고, 다음 직장 얻을 때까지 불면증도 있었잖아, 내 나름으론 윤이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삼촌에게 너무 자주 전화하지 않도록 당부했지만, 내가 집에 없거나 잠들어 있을 때 그 아이가 연락하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어. 정말 미안했어, 우리가 어렸을 땐, 고작 이런 문제로 사이가 멀어지게 될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전화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지난 봄 유언장에 적었던 간결한 감사의 말이 이런 식의 고백보다 나을 것이다.
회전목마 사진이 나에게 있는데, 너도 가지고 있니, 목마 하나를 셋이서 타던 사진 말이야, 아홉 살 오빠가 앞에서 목마 머리를 안고, 여섯 살 나는 뒤에서 꼬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지, 가운데 태운 세 살배기 네가 떨어지지 않도록 난 두 팔을 뻗어 오빠의 허리를 안았지. 네 포동포동한 뺨하고 입술은 오빠의 등과 내 품 사이에 꽉 끼어서, 무슨 물고기같이 우스꽝스럽게 튀어나와 있어.
그들의 시간이 그 시점에서 멈췄던 것도 아닌데, 그 후 십대가 된 오빠의 얼굴을 어째서인지 그녀는 잘 기억할 수 없었다. 완전히 지워지지도, 그렇다고 또렷하지도 않은 호리호리한 이미지만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그녀는 자신과 남동생이 같은 짐을 지고 걷는 나귀나 가리개로 눈 옆을 가린 말들, 혹은 일종의 노예들과 같은 존재라고 느껴왔다. 설아 있는 자식들을 사랑하는 대신 죽은 첫아이만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삶을 그녀는 분명하게 이해하며 지켜보았다. 유년기의 오빠가 실은 조그만 폭군이었다는 사실은 그녀 자신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는 종종 동생들의 뺨을 때렸다. 꼬마 병정들처럼 꼼짝 않고 서 있도록 하며 군기 잡는 것도 좋아했다. 전쟁영화를 흉내 내 그녀와 남동생의 정강이를 걷어차고, 엎드려뻗쳐를 시킨 뒤 허리띠로 엉덩이와 허벅지를 때렸다. 그가 문제 삼는 그녀와 남동생의 잘못은 대부분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는 사소한 실수들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말한 남동생에게, 한 달만이라도 피아노학원에 다니고 싶어해 아버지가 집안의 빚의 규모를 설명하며 사과하도록 만든 그녀에게 오빠는 격분했다. 도대체 상황을 몰라서들 그러는 거야? 적어도 우리 때문에 부모님이 마음고생 하진 않게 해드려야 할 거 아냐.
그녀가 기억하는 한 오빠는 여린 성정을 타고난 아이가 아니었다. 고등학생이 된 그가 학급에서 괴롭힘을 당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을 그녀는 믿기 어려웠다. 더 믿기 어려웠던 것은 그녀 부모가 가해 학생들의 부모로부터 대단찮은 합의금 받고 사건을 매듭지었다는 사실이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야. 그렇지 않아? 이 상투적인 말을 그녀는 살아오는 동안 여러 상황에서 자신의 가족사를 알 리 없는 타인들에게서 들었고, 마치 그녀 자신이 의도적으로 공격받은 것 같은 분노와 굴욕감을 그때마다 느꼈다.
그녀는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습기 찬 밤공기가 충분히 차갑지 않다고 느꼈다. 더 단호하게 몸속으로 파고들 냉기가 필요했다. 늑골과 심장의 중심까지 단단히 얼려 어떤 것도 더 부스러지지 않게 할 냉기가 필요했다.
내가 널 원망할 거라고 생각해왔을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네가 윤이와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매 순간을 난 명백히 이해했어. 자신을 건설하기 위해 가깝고 어두운 이들에게서 등을 돌리는 사람의 용기를, 정말이야,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어. 같은 방식으로 윤이가 나를 떠났다 해도 난 서슴없이 이해했을 거야. 다만 분명히 알 수 없는 건 이것뿐이야. 먼지투성이 창을 내다보는 것처럼, 아니 얼음 낀 더러운 물 아랠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가 인간인 건지.
그녀는 어두운 냇물을 내려다보았다. 벌거벗은 버드나무들이 희끗한 눈발을 머리에 인 채 캄캄한 수면을 향해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저 검은 물 속 어딘가에 여름의 잉어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은회색 비늘을 빛내며 수면으로 올라올 아열대의 여름으로 그녀는 들어서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인지 그녀 자신 역시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피와 살과 내장과 근육이 있는 몸을 다시 갖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어느 사이 다가온 현수 씨가 그녀 옆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그는 아까보다 확연히 상태가 좋아 보였다. 더 이상 입술이 푸르게 질려 있지 않았고 어깨가 떨리지 않았다. 실내에 들어가 따뜻한 것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벌써 저녁을 먹었어요?
국수가 빨리 나왔어요.
지하철역 앞에 그 국숫집이요?
예, 지난번에 같이 먹었던 두부국수를 시켰어요.
그가 거스름돈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안 줘도 되요.
그녀는 받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 맛있는 걸 사주기로 했잖아요?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 지폐 두어 장과 오백 원짜리 동전을 넣었다. 그녀는 내버려두었다. 아무려나 더 이상 고등학생들처럼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안 내려가고 여기 있어요?
그제야 근심스런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가까이 가로등이 밝혀져 있어서, 그의 얼굴에 당혹과 놀라움이 스쳐가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역시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보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뺨과 눈과 콧날의 윤곽이 조금씩 녹아, 돌이킬 수 없이 변형되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렇게 서로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던 지난여름의 저녁을 그녀는 기억했다. 어두워져 가는 그의 방 침대에 마주 모로 누워, 과거도 미래도 사라진 이상한 곳에 그들이 고립되었다고, 거의 인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절대적인 신뢰만이 둘 사이에 존재한다고 느꼈었다. 그런 감정을 아이 왜의 타인에게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거 알아요? 고양이는 호감을 표시로 눈을 감아요.
박명 속에서 그가 물었을 때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대답했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곧 보여줄게요.
과연 그날 저녁 여덟 시경, 완전히 어둥워 졌을 때 길고양이 한 마리가 그의 방 창문 앞 담장으로 왔다. 그는 간장 종지에 깨끗한 수돗물을, 작은 접시에 마른 멸치 한 줌을 담아 담 위에 올려주었다. 짙은 갈색 얼룩무늬가 있던 고양이는 우아한 동작으로 천천히 담장 위를 걸어 그것들로부터 멀어졌다가, 잠시 후 간장 종지 옆으로 무심한 듯 돌아와 앉았다.
자, 보세요.
그가 고양이를 향해 길게 눈을 감았다 뜨자, 고양이가 답례하듯 이 초 가까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가 다시 좀더 길게 눈을 감았다 뜨자, 마치 따라 하듯 조금 더 길게 고양이가 눈을 감았다.
어떻게 알게 됐어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라고 그녀가 놀라며 묻자 그는 대답했다.
뭐, 믿는다는 거죠.
관찰당하지 않으며 혼자서 먹을 시간을 고양이에게 주려는 듯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닫았다.
내가 눈을 감는 동안 네가 날 헤치지 않는다는 걸 믿어, 너도 눈을 감아도 돼, 뭐 그런 거죠.
그 캄캄한 창문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가 말없이 그녀를 손을 뻗어왔다. 그녀의 손에서 장갑을 벗긴 순간 흠칫 놀라며 말했다.
너무 녹았어요.
반쯤 표면이 녹았다가 얼어붙기를 반복해 지문과 손금이 사라진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포개어놓았다. 표정을 좀체 읽을 수 없는 그의 옆얼굴을 그녀는 잠자코 건너다보았다.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그는 표현하기보다 침묵하는 편이었다. 실상 대부분의 시간을 그가 그런 침묵 속에서 보낸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는 대학 입학금부터 박사과정을 중단하기까지 모든 학비를 학자금 대출로 충당했고, 이후 육 년 동안 그 막대한 빚을 갚는 대신 계속해서 채용에서 떨어지거나, 계약직으로 채용된 뒤 계약이 갱신되지 않거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는 일을 반복해오고 있었다. 버티는 요령이 있어요, 라고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정이 좋지 않을 때엔 하루에 한 끼씩 맨밥만 먹는다고,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가족에게도 전화하지 않는다고, 낮 시간은 줄곧 방에서 보내며 짧은 산책은 이른 새벽에만 한다고 했다. 길에서 파는 음식 냄새를 견딜 수 없거든요. 그런 시기엔 한 달에 십 킬로씩 몸무게가 줄기도 해요.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장기적으로, 라고 이따금 그녀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그 조심스러운 침묵 덕분에 둘의 관계가 지탱되어왔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다니던 회사에서 아직 그가 일하던 무렵, 사장은 어느 오후 그녀를 방으로 불러 인턴사원들을 함께 품평하고 싶어 했다. 반말과 존댓말을 자신만만하게 섞어 쓰는 습관대로 그는 장황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 친구는 일 시켜보니 어때요? 좀 감각이 있는 것 같던데, 이 애는 욕심은 있는데, 능력이 안 되는 것 같아. 그렇죠? 그런데 정말 악착같기는 해. 그러나 미안해서 내가 여태 못 자르고 있다니까. 현수 씨의 서류를 가리키며 그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이 친구는 어떤가? 흠잡을 데가 없어요, 라고 그녀가 대답하자 사장은 낮게 소리 내어 혀를 찼다. 하지만 나이가 많잖아, 공부도 너무 많이 했어, 부담스럽게.
몇 달 뒤 사장이 선택한 인턴은 입사하던 날부터 일을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고, 오히려 속마음을 알 수 없다고 느껴질 만큼 완벽한 호의를 조직의 구성원 모두에게 베푸는 성격이었다. 전날 야근이 늦어져 다들 늦게 출근하기로 했다는 문자를 받고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그녀가 출근했을 때, 그 인턴이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도 있었다. 오전에 마무리는 내가 할 텐데,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요? 그녀의 물음에 인턴은 웃으며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몇 시간 편하게 자면 뭐하겠어요? 이젠 여기가 집 같아요, 저는. 활짝 미소 짓는 인턴의 얼굴은 창백했고, 어떤 야심이나 오기보다는 무서운 피로를 충혈된 눈 뒤편으로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인수인계를 위해 마주 앉아 일하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말없이 마주칠 때면 어떤 전류도 스파크도 없는 감정의 무딘 덩어리가 단단한 침묵의 표면 아래, 마치 생명 없는 사물처럼 무연히 가로놓여 있었다.
이제 내려갈까요?
마침내 침묵을 깨며 그가 물었다.
노숙하기 좋은 벤치를 같이 찾아봐요.
아니요, 그녀는 대답했다.
못 내려가요.
그녀의 자세가 왼쪽을 향해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을 그는 그제야 유심히 살폈다.
어디가 아파요?
아니요, 그냥 왼쪽 옆구리가.
옆구리가 어떤데요?
많이 녹아서 그래요.
그가 길게 팔을 뻗어 코트 위로 그녀의 등을 안았다. 손끝으로 그녀의 왼쪽 옆구리를 짚었다.
여기가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만지지 말아요.
그가 놀라며 얼른 손을 떼었다.
만지면 더 녹아요.
굳은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소리칠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소리쳤나,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면 안 되나. 이런 순간에도, 그러나 그렇게 묻는 대신 힘껏 참을성 있게 말했다.
오늘따라 오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냥 여기 계속 앉아 있어도 상관없겠어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상하네요.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게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물었다. 저녁부터 공기가 안 좋다는 예보가 있었던 거 아닐까요? 요즘은 한파가 밀려갔다 싶으면 바로 중국에서 나쁜 공기가 건너오니까··· ···.
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갔다. 청색광이 반사된 그의 옆얼굴이 더 해쓱해 보였다. 세 자리 수자의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곤 반복해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두 손을 자신의 눈앞에 펼쳤다. 끝이 뭉툭해지고 손톱의 윤곽이 지워진 손가락들 하나하나를 곰곰이 들여다봤다.
그건 나쁜 소식이었다. 따뜻한 서풍이 지금이 북동풍을 밀어내고 있다면, 새벽부터 내린다고 예보했던 눈은 도중에 진눈깨비나 겨울비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윤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정말 냉동 창고를 찾아야 하나,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그렇게 어디까지 버틸 수 있나.
현수 씨.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그는 대답했다.
이제 가세요.
이렇게 두고는 못 가요.
그것이 진심인지 의무감인지 그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책임을 느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어떤 약속도 그에게 하지 않았다. 끝까지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갈색 얼룩 고양이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두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끈질긴 두려움과 고독 속에서, 떨리는 실의 한쪽 끝을 붙든 채 그녀는 언제까지나 망설이고 있었다.
부탁이에요, 이제 가요. 혼자서 생각하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다. 그녀 자신의 삶이라고 불렸던 몇십 년의 시간에 대해, 잠시라도 제대로 생각하고 싶었다. 정말로 집중할 수 있다면, 평소라면 떠오르지 않았을 기억들을 좀 더 되찾게 될지도 모른다. 삼 남매가 회전목마를 타며 서로의 작은 몸들을 껴안았던 순간, 젖먹이 윤이가 깨어나 스물네 살 난 엄마를 고요히 바라보던 여름 아침 같은 순간들을 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불현듯 자신을 향해 물었다. 비록 눈으로 이루어져 잇지만 아직 그녀다 사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일까. 그녀는 다시 스스로에게 물었다. 눈과 귀와 입술이 녹으면 어떻게 될까. 정수리부터 녹은 머리가, 눈 녹은 물이 되어 가슴으로 흘러내리면? 심장부터 발끝까지 형상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이 층계참에 흥건한 물웅덩이만 남으면.
그냥 끝이야.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여 자신을 향해 말했다. 홀가분했다. 미치도록 후련했다. 아니, 억울했다. 이가 갈리게 분했다. 아니, 아무것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제발 더 생각을 해야 했다. 가능한 시간만큼, 조금만 더.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여보세요, 라고 그녀가 답하기 전에 아이의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엄마, 원래대로 돌아왔어?
아니.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 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순간에 하고 싶어 하는 말, 모든 군더더기를 덜어낸 뒤 남는 한마디 말을 그녀는 했다. 날카로운 것에 움푹 찔린 것 같은 말투로 아이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어디 있어?
아이가 물었다.
가까워, 아파트 앞 횡단보도야.
그리 갈게, 라고 말한 뒤 아이가 전화를 끊는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허공에서 흩어져 내려오는 것, 말할 수 없이 친근하고 아름다운 것, 수천 올의 속눈썹처럼 작고 가벼운 것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눈은 새벽에 내린다고 했는데·· ·· .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낮게 불평하는 목소리를 그녀는 들었다.
도대체 요즘 일기예보가 맞는 걸 못 봤어요.
물기 많은 눈이 그녀의 이마와 눈썹과 뺨을 스친 뒤 코트 깃에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 눈송이들로, 그녀의 얼굴과 몸에서 녹아 사라지고 손상된 곳들을 세심히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 지문이 사라진 두 손을 허공에 펼쳐 켜켜이 눈이 쌓이게 한 다음.
하지만 너무 따뜻해.
고개를 저으며 그녀는 탄식했다. 고운 속눈썹 같던 눈송이들이, 일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진눈깨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제 다 틀렸어.
나직이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가 얼굴을 돌려 그녀를 멍하게 마주 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만났다. 그가 차가움을 견디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입술과 혀가 녹는 것을 견뎠다. 그것이 서로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정수리부터 그녀는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곡 꺾여 무너질 것 같은 왼쪽 옆구리를 두 손으로 받치며 그녀는 주춤주춤 일어섰다. 코트가 너무 무거워 더 빨리 무너질 것 같았다. 서둘러 코트 단추를 푸는 동안 손가락들이 차례로 부스러졌다. 팔을 뒤로 하고 어깨를 흔들어 코트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옆구리에서부터 흘러내린 물로 청바지 윗부분이 빳빳하게 젖어 있었다. 스웨터 바깥에서부터 두 주먹으로 단단히 눌러 옆구리를 받친 채 그녀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따라 내려오는 것 같지 않았다. 이마와 눈썹이 쉬지 않고 녹아내려, 그녀는 어느 시점부터 제대로 사물들을 볼 수 없었다. 더듬더듬 천변의 잔디에 이르러 그녀는 멈춰 섰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쏟아지는 진눈깨비의 정적 때문인지,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젖은 구두를 벗자, 이미 발가락의 경계가 사라진 두 개의 둔중한 눈 덩어리들이 진흙탕을 디디며 뭉개어졌다. 무엇을 돌아보는지 알지 못한 채 사력을 다해, 그녀는 가까스로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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