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간 한국전쟁 4】
한국전쟁기 민간 사이에 커다란 충돌을 불러온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은 종교와 이념 간의 갈등이었다.
여기서 종교는 주로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였고,이념은 공산주의였다.
인민군과 토착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이라는 관점,그리고 기독교는 우익 편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도들을 숙청의 대상으로 간주했고,이것이 마을 주민들 간의 충돌을 불러온 또 하나의 요인이 돠었다.
당진 합덕면의 한 마을은 천주교 신자 마을이었다.
합덕천주교회는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서울의 천주교구로부터 위탁을 받아 합덕면 일대에 대규모 토지를 사들였다.1950년 농지개혁 당시 천주교회의 소유 토지는 195정보에 달했다.
(1정보는 3000평)
합덕성당은 성당 바로 앞 A마을에 농민들을 모아 교회의 땅을 소작시키면서 집까지 제공했다.
대신 농민들은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했다.
기존의 천주교인 혹은 가난한 농민들이 이 마을에 모여들었고,이 지역은 결국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 농민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소작권,
그리고 각박하지 않은 소작료 수취 등으로 인해 자기 땅을 사들여 자소작농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또 지역사회에서 합덕성당의 외국인 신부의 위세는 대단하여 일본인 경찰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A마을은
점차 보수화되어갔다.
해방 이후에는 일부 농민들이 우익청년단에도 참여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합덕에 진주한 인민군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신부와 신도회 회장,복사 등을 잡아갔다.
A마을 주민들도 마을 안에 인민위원회 등 협조 단체를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인근의 B마을 주민들은 A마을을 우익마을로 간주하고 있었고,결국 인민군 철수 시 A마을을 습격하여 주민 8명을 끌고 가 처형했다.
9.28 서울수복 이후 경찰이 진주하자 이번에는 A마을에서 B마을을 습격하고 주민들 대부분을 끌어내서 상당수가 경찰과 우익청년단에 넘겨져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두 마을의 충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B마을에는 해방 이후부터 좌익에서 활동해온 인물들이 있었고,
이들의 영향으로 주민들이 좌익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A마을과 B마을은 이웃한 마을로서 오랜 세월 동안 방죽의 농수 문제를 놓고 다툴 수밖에 없었고,A마을에 있는 천주교회 토지 혹은 다른 부재지주의 토지를 B마을 사람들이 소작하는 문제를 놓고도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A마을과 B마을 간의 충돌은 천주교와 공산주의자들 간의 갈등,종교와 이념의 갈등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소작농민들 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이라는 배경도 있었다.
개신교 신도들의 피해는 천주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한국전쟁기 군 단위에서 가장 많은 피해자가 난 곳은 전남 영광군이었다.
영광군의 당시 인구는 약 16만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전쟁 중에 약 2만 5천~3만 5천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산면에서는 약 3000~5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염산군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들 교회의 교인들은 인민군 점령기에 이미 소수가 희생되었다.
그리고 9.28 서울수복 이후에도 이듬해 1월까지 염산면은 인민군과 빨치산들의 점령하에 있었는데 교회 교인들은 1950년 10월과 11월에 집중적으로 학살당했다.
당시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은 주로 각 면의 자위대와 각 리의 생산유격대였다.
생산유격대는 주로 하층민들로 구성되었다.
염산군은 전쟁 이전에 기독교인들은 대표적인 친이승만 세력이었으며 또 조직과 정보망을 갖추고 있어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학살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남 무안군 청계면의 한 마을의 사례
이 마을은 일찍부터 기독교가 들어와 교회가 들어섰고 마을 주민 대부분은 교회 신자로서 공동체적 성격이 비교적 강한 마을이다.
하지만 이 마을에도 빈틈은 있었다.
머슴과 박수무당과 같은 계층이 바로 그러했다.
이들은 마을 내에서 오랜 세월 동안 차별대우를 받아온 마을 안의 타인에 불과했다.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들어오자 이들은 인민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인민군 점령기 교회의 장로와 우익청년단 관련자였던 인물과 다른 몇몇 사람들은 체포되었고 인민군 퇴각기에 처형되었다.
그린데 이 시기에 더 큰 사건이 발생했다.
9월 29일경 인민군이 마을에서 물러나자 마을 주민 몇몇이 성급하게 교회에 걸린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올린 후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아직 마을에 머물러 있던 좌익 쪽 사람 가운데 누군가 이를 발견하고 산악지대로 피신 중이던 지방 좌익들을 불러와 마을 주민들을 학살한 것이다.
이틀 동안 총살,참살,수장 등 갖가지 방법으로 학살당한 주민들이 135명에 달했다.
그리고 경찰이 들어온 뒤 이번에는 마을 주민들이 청년단을 조직하여 부역행위자들을 색출하여 학살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