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메리카의 잃어버린 식민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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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의 잃어버린 식민지들
사실, 북미에서 정착하려는 유럽인들의 모든 시도가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북미의 많은 정착촌들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혹독한 겨울에서부터, 식량 부족, 질병, 원주민과의 충돌까지,
많은 정착민들이 그들의 새로운 안시처를 버려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북아메리카의 실패한 식민지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갤러리에서 그들의 매혹적인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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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미겔 데 구알다페 (1526)
1521년, 스페인 사람들은 쿠바를 떠나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탐험을 떠났다.
그들은 그곳이 정착을 위한 완벽한 장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돌아왔다.
치안판사이자 탐험가인 루카스 바스케스 드 아일롱은 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4년 후, 600명의 식민지 주민과 함께 6척의 배로 도착한 북아메리카에
(적어도 바이킹 이후 처음으로) 최초의 유럽 식민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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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미겔 데 구알다페 (1526)
그들은 1526년 8월 위냐 만에 도착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주민 길잡이들을 잃고 많은 보급품을 실은 그들의 본함이 침몰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도시인 산 미겔 데 구알다페(오늘날 조지타운 카운티)를
건설할 때까지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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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미겔 데 구알다페 (1526)
그러나 농작물은 실패했고 질병(특히 이질)이
식민지를 강타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어떤 이들은 남기를 원했고, 다른 이들은 떠나기를 원했다.
그리고 더 많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11월이 되자 마지막 남은 병사들은 이 식민지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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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부르-로얄 (1541)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는 중국으로 가는 대체 항로를 찾고 있었고,
캐나다 해안을 찾았다. 그래서, 1541년에 카르티에와 다른 400명의 사람들은
그들이 샤를부르-로얄(오늘날의 퀘벡주 카프루즈)이라고 이름 붙인 식민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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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부르-로얄 (1541)
그 식민지는 첫 겨울에는 살아남았다.
그들은 두 구역으로 나누어 요새를 건설했는데,
하나는 강가에 배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언덕 위에 전략적으로 배치된 거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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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부르-로얄 (1541)
그러나 그 후 이로쿼이족과의 관계가 완전히 적대적이 되면서 악화되었다.
식민지의 함락을 예측한 카르티에와 그의 부하들은 1542년 6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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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부르-로얄 (1541)
이후 정착지는 장 프랑수아 드 라 로크, 로베르발에 의해 점령되었지만,
1543년 악천후, 질병, 지역 주민들과의 충돌이 너무 심하여,
식민지는 공식적으로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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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추세 (펜사콜라) (1559)
1559년, 스페인 정복자 트리스탄 데 루니 아렐라노는
멕시코 베라크루스에서 항해하여 오늘날의 플로리다에 도착했다.
그 후 그는 펜사콜라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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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추세 (펜사콜라) (1559)
그가 도착한 직후, 허리케인이 스페인 선박과 보급품을 침몰시켰다.
탐험대는 약 1,500명의 군인, 식민지 개척자,
노예 아프리카인, 아즈텍인들을 새로운 식민지로 데려왔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식량을 찾기 위해 내륙으로 행군하여
무리가 분열되었다. 1561년에 오추세는 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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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라인 요새 (1564)
1564년 6월,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은
현재의 플로리다 듀발 카운티에 있는
세인트 존스 강변에 캐롤라인 요새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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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라인 요새 (1564)
그 존재를 알게 된 페드로 메넨데스 데 아빌레스가 이끄는 스페인인들은
그곳을 정복하기 위한 임무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대신 스페인군은 더 남쪽으로 상륙하여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는 세인트 어거스틴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 곳은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인 정착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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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라인 요새 (1564)
스페인군은 결국 육로로 캐롤라인 요새를 공격해 점령했고,
여성과 아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그 요새는 나중에 불에 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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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엘레나 (1566)
페드로 메넨데스 데 아빌레스는 1566년에 산타 엘레나라는
스페인 식민지(오늘날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파리스 섬)를 세웠다.
산타 엘레나는 스페인령 플로리다의 수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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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엘레나 (1566)
1576년, 이 식민지는 원주민들에 의해 공격받고 불태워졌다.
스페인인들은 돌아와 얼마 동안 머물면서 원주민들과 몇 차례 충돌했다.
그들은 결국 중앙 아메리카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했고,
1587년에 산타 엘레나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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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안 요새 (1567)
산타 엘레나에 정착한 이후, 스페인인들은
라 플로리다를 통해 내륙으로 이동했다.
탐험가 후안 파르도와 125명의 남자들은
멕시코로 가는 육로를 찾기 위해 탐험대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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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안 요새 (1567)
파르도와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주장하고
쿠엔카(오늘날의 노스캐롤라이나 버크 카운티)로 이름을 바꾼
조아라(사진 속의 Xuala)라는 원주민 마을을 발견했다.
그들은 마을을 통제하기 위해 산후안으로 알려진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르도는 멕시코에 가지 못했다. 원주민들은 결국 산후안 요새를 포함해
캐롤라이나를 가로지르는 모든 스페인 요새를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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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칸 (1570년)
1570년 9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체사피크 만에 아자칸 식민지를 세웠다.
그들은 파키키네오(스페인인들이 수년 전에 납치하여 돈 루이스라고 명명한)라는
지역 포우하탄 부족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원주민들이 개종하도록 설득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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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칸 (1570년)
어느 날, 파키키네오는 선교사들을 숲으로 안내하고,
먹을 것을 찾았지만, 결국 사라졌다.
그는 탈출하여 포우하탄과 함께 스페인 사절단을 파괴하고
모두를 죽이기 위해 가까스로 돌아왔다.
그것이 아자칸 임무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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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노크 (1585)
1584년 월터 롤리는 영국 왕실로부터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설립하는 헌장을 승인받았다.
1585년 롤리와 약 100명의 사람들이 로아노크에
상륙하여 식민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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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노크 (1585)
1586년 탐험가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정착민들은 영국으로 돌아갔다.
식량 부족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은
북미에서의 첫 번째 영국인 정착지의 종말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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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노크 (1585)
1년 후, 식민지 개척자 존 화이트는 100명의
새로운 정착민들을 로아노크로 데려왔지만,
그는 보급품을 얻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고,
스페인 함대의 공격으로 여행이 지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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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노크 (1585)
화이트가 1년 후 로아노크로 돌아왔을 때, 식민지가 버려진 것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울타리와 나무에 새겨진 "크로아토안"이라는 단어뿐이었다.
정착민들이 인근 크로아토안 섬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구조 임무는 결코 수행되지 않았다.
정착민들의 생사는 오늘날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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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블 섬 (1589/1599)
1589년 또는 1599년경 프랑스 귀족 드 라 로슈 후작이 세이블 섬에 정착했다.
노바스코샤 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섬에는 약 70명의 죄수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사형 선고를 면하고 대신 정착민이 될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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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블 섬 (1589/1599)
수많은 난파선들로 "대서양의 묘지"로도 알려진 세이블 섬은
곧 통제 불능이 되었고 범죄에 시달리게 되었다.
드 라 로슈는 섬에 상품을 공급하는 것을 중단했고,
1603년까지 10명이 조금 넘는 정착민들이 살아남았다.
그 섬에는 아직도 유럽 정착민들이 도입한 동물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야생마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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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크로아 섬 (1604년)
1604년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 피에르 뒤구아 드 몽스와
지도 제작자 사무엘 샹플랭이 처음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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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크로아 섬 (1604년)
혹독한 겨울, 식량 부족, 질병(대부분 괴혈병)으로 인해
첫 겨울 동안 거의 절반의 정착민이 사망했다.
8월에 드 몽스와 그의 정착민들은 섬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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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로얄(1605)
피에르 뒤구아 드 몽스와 세인트크로아 섬의 생존자들은
포트 로얄이라 불리는 노바스코샤의 새로운 정착지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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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트 로얄(1605)
1607년 피에르 뒤구아 드 몽스의 모피 무역 면허가 취소되면서
식민지의 주요 수입원이 상실되었다. 거기서부터 내리막길이었다.
이 식민지는 결국 영국군에 의해 불타버렸다.
사진은 포트 로얄 국가 사적지에 있는 복제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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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팜 식민지 (1607)
포팜 식민지(메인주 케네벡 강 어귀)는 1607년 버지니아 회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정착지는 신세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영국 선박이 건설된 곳이다.
"버지니아" 혹은 "사가다호크의 버지니아"는 성공적으로 대서양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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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팜 식민지 (1607)
1607년, 약 절반의 정착민들이 식량 부족으로 인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608년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잉글랜드의 첫 뉴잉글랜드 정착지를 버렸다.
출처: (History) (Listverse)
참조: Expeditions that changed the course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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