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성창기업이 성창그룹으로 통했다. 반도목재와 태창목재도 모두 성창기업을 모체로 한 회사였다. 그렇게 회사가 번창할 수 있었던 기반은 모두 적기동에서 사업이 잘 되었기 때문이다. 우암동으로 명칭이 변하였지만 해동씨에게는 적기동이 더 편하게 다가온다. 회사의 옛 주소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만큼 그는 당시 회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공장 앞 바다는 원목 야적장이었다. 바다에 나왕을 띄워 놓다보니 공장까지 운반하는 것도 공이 많이 들었다. 더 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당시 공장 안에는 풀장이 있었다. 바닷물을 가득 담아둔 풀장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폭이 5~6m, 길이는 20~30m가 될 만큼 아주 컸다. 공장 길이만큼 나무가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30m가 넘었는지도 모르겠다.
바다에 띄워진 나무를 그대로 공장 안 풀장에 띄어놓았다. 공장 안에 길고 짧은 나왕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하루에 정해진 양의 나무가 풀장에 떠 있으면 풀장 옆에서 ‘도비창’이나 일본말로 ‘하까떼’라고 부르던 창으로 나무를 찔러 이동했다. 물 위에 떠 있는 나무는 한 사람이 창으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바닷물에 충분히 불은 나무는 아주 부드러워서 ‘로타리 기계’에 넣으면 잘 깎였다. 썩지도 않고 작업하기도 좋아 나왕은 당연히 바닷물 행이었다.
바다에 나무를 풀어두니 물을 먹어 바다 속에 완전히 잠긴 나무들도 꽤 많았다. 바다에 잘 떠 있는 나무가 상품이기 때문에 우선 그런 나무들을 가지고 합판을 만들었다. 그러다 원목 재고가 줄어들게 되거나 바다 속에 나무가 너무 많이 차서 배가 접근하기 힘들게 될 때면 1년에 몇 번씩 바닷물에 빠져있는 나무를 건져 올렸다. 바다 속에 있는 나무를 올리는 작업에는 ‘머구리’들을 불렀다. ‘머구리’와 예인선이 함께 움직여서 나무들을 바다 위로 끌어냈다.
“나무들 건지면은 와이어 메어 갖고 예인선 ‘낫지’라꼬 있어요. 성창 1호라 요놈 딱 끌고 밀어서 와이어 끈만 주면은 크레인 기중기로 해갖고 물 밑으로 시커먼 놈이 고래맨키로 그거는 10년 놔둬도 안상하고 숙성이 되는 거지. 큰놈은 예인선 끌어도 잘 안 온다. 작은놈은 잘 따라오고...... 문현 로타리 쪽에 ‘머구리’ 선주 영감이 있었어. 부르면 와가 싹 훑어가”
그렇게 바닷물에서 나온 나무들은 꺼내는 즉시 처리를 했다. 육상에서 바로 잘라서 공장에 넣어줬다. 끌어낸 나무를 공장 안 풀장에 넣어버리면 다시 가라앉아 버렸기 때문에 풀장에 넣을 수가 없었다. 대신 지게차로 운반을 해서 절단을 하고 그대로 ‘로타리 기계’에 넣어서 처리를 했다.
“머구리라고 있어요. 잠수해 갖고 바다 밑에 작업하는 사람들 한 번씩 부르면 그 사람들이 원목도 많이 건지지만은 피조개 이런 걸 가지고 온다꼬. 우리가 물 위에 집을 지어놓고 살았쟎아. 관리 사무소같이. 수돗물도 나오게 해갖고 난로 피우가 집이 크다꼬. 원목 관리하는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옷도 말라야 되고 목욕도 해야 되고 물에 종종 빠지거든. 물에 빠지면은 ‘독탕주’라 카는 큰 목욕탕에 혼자 목욕 했다꼬 그날 저녁에 막걸리 한말을 내야 돼. 그때 머구리가 오면 해산물이 제법 있었어. 막 건져 올린다. 안주해갖고 바로 술 한 잔 묵고. 이때가 재미있었지.”
‘독탕주’ 이야기가 나오니 그의 목소리에 흥이 넘친다. 원목 검수를 하다보면 겁 없이 먼 산을 보고 나무 위를 건너 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물에 빠지면 위험하기도 하고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업무를 마치고 술 한턱내는 핑계로 삼아 그 시절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었다.
수입한 원목을 하역하는 작업도 힘든 일 중 하나이다. 해창운수라는 하역 회사는 성창기업의 자회사였다. 그 시절 장비는 부족한데 하역양은 많아서 애를 먹기도 많이 했다. 그럴 때면 업무를 모두 마칠 시간인 저녁에 배를 끌고 들어온다. 어두운 밤까지 일을 하면서 잔업 수당에 야식으로 막걸리까지 먹어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금의 제4 부두 자리에서 원목 하역 작업을 했다. 철사를 가지고 나무 위에다가 ‘깡’을 박으면 나무들이 모두 엮어졌다. 그렇게 엮인 나무들을 예인선이 끌고 와서 물 위에 띄워둔다. 그 나무들을 우암동까지 끌고 가야했다. 원목은 배에 싣고 와서 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했고, 물에 띄운 나무를 끌고 공장까지 가야했기 때문에 너무 먼 거리는 이동하기가 어려웠다. 자연히 합판 공장은 바다를 끼고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피가 큰 나무가 주원료이다 보니 나무를 적재할 자리를 찾는 것도 큰일이었다. 공장 바로 앞에 야적장이 있었지만 그곳은 당장 처리할 양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저기 바닷물이 있는 해안가에 나무들을 보관할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 자성대 컨테이너 부두 안쪽의 제5 물량장이라는 곳에 성창기업의 야적장이 하나 더 있었다. 부두 안쪽 방파제가 있는 주변에 원목들을 많이 띄워놓았다. 회사 앞 바다의 원목 야적장은 바다가 협소해서 모두 수용할 수가 없었고, 하역 작업을 하던 부두에서도 가까웠기 때문이다. 태풍이 올 때면 작은 배들이 피항하는 자리였던 그 곳에 수입해 온 원목을 띄워 두었다. 급하게 나무가 필요하거나 볼 일이 있으면 우암동 공장에서 이곳까지 뗏목을 타고 노를 저어 왔다가고는 했다.
영도에서 조금 들어가면 지금의 한국해양대학교 자리가 예전에는 조도라는 섬이었다. 회사에서 꽤 멀었지만 이곳에 해상 저목장이 있었다. 부두 개발이 점점 진행되고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회사가 가지고 있던 원목 수용 능력이 점점 부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간 바다가 조도였다. 지금은 매립이 되었지만 그곳에 꽤 규모가 큰 저목장이 있었다.
당시에는 성창기업뿐만 아니라 태창목재와 광명목재도 함께 들어와 있었다. 동명목재는 건너편 지금의 신선대 부두 쪽 회사 땅에 따로 저목장이 있었다. 그때 동명목재는 ‘동명왕국’이라 불릴 만큼 위세가 대단했다.
해상이지만 세 회사가 분할해서 각각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원목으로 울타리도 만들었다. 원목을 길이대로 연결해서 중간에 쇠사슬을 엮으면 회사 소유의 원목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도 않고 울타리가 되었다. 바다 속에도 큰 말뚝을 박아서 원목이 많이 움직이지 못하게 했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태풍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다. 특히 1979년에 왔던 큰 태풍은 조도에 있던 해상 저목장을 싹쓸이 해버렸다. 울타리며 말뚝이며 모두 사라지고 세 회사의 나무가 정신없이 뒤엉켜서 나무의 소유가 어디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스갯소리로 당시 날아간 원목이 강원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태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해동씨는 지금도 첫 월급 액수를 기억하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본 큰 돈 3,500원. 그가 실습생으로 와서 처음 받은 월급이다. 다음 해에 정식으로 발령이 난 이후 받은 돈은 4,500원이었다. 회사 등급도 참 복잡했다. 실습생을 뜻하는 시용, 고졸 사원을 뜻하는 고원. 그 다음은 서기보, 서기, 주임......많기도 많았다. 시용으로 받은 월급 3,500원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저축이었다.
“처음에 내가 독한 맘 묵고 1,500원을 저축을 했어. 저축을 어디서 했나 카면은 범일동 조방 앞에 부산진 시장 고 보면 한일은행이 있었어. 그기 우리 회사 거래 은행이라. 그 가가 1,500원 저축한 게 기억이 나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알뜰하게 돈을 모았다. 그 당시 현장에는 휴일이 없었다. 토요일까지는 공장을 정상 가동하고 일요일은 공장 기계 정비 같은 일을 했다. 일요일에 일을 하면 잔업을 모두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직원들도 일을 시켜주기를 바랐다. 어려운 시절, 그나마 일요일에 회사를 나오면 점심밥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직원 식당 밥도 그때는 거의 공짜나 마찬가지였다.
“안 놀라 그랬다. 그게 다 돈이니까. 그리고 현장에 그때 돈이 워낙 짜치기 때문에 5일 날이 봉급날이고 20일이 가불날. 이게 고정적으로 딱 되가 현장직에 한해서......그때는 다 못살았으니까. 또 그때는 합판 산업이 워낙 잘됐거든.”
해동씨는 원목관리계에 있어서 일요일에 출근을 해도 현장직처럼 잔업 수당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휴일을 기숙사에 혼자 있어봤자 별 재미가 없어서, 늦잠 좀 자고 놀기 삼아 회사에 나갔다. 사람들과 어울려 회사 업무를 같이 보다 마치면 술도 한잔씩 하는 재미가 있었다.
당시에는 회사 정문 앞에 성창기업 직원들을 보고 생긴 술집들이 쫙 깔려 있었다. 밥집이며 술집이며 모든 것을 회사 문 앞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술집이라고 해봤자 안주는 공짜로 주는 시락국에 막걸리 한잔 하는 대포집이었다. 비싼 안주는 먹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처음 취업할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들과 많이 어울렸다. 다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혼자 먹을 생각은 못했고, 한잔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먼저 한잔 하러 가자고 말을 꺼내면 줄줄이 따라왔다.
술집에 가면 술 먹고 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둔 노트가 있었다. 대학 노트에 잘 어울리는 사람들 이름이 30명이면 30면 모두 적혀 있는 리스트였다. 함께 모여 한잔 하는 날에는 그 날짜에 누가 참석했는지 자기 이름 옆에 선만 하나 그으면 됐다. 제일 아래에는 총금액을 적어두고 참석 인원만큼 나누어서 외상을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월 통계를 내어 월급날이 되면 월급봉투를 들고 외상값을 갚으러 갔다.
성창기업 월급날이면 회사 앞 가게들도 월급날이었다. 사람들의 외상값을 대표로 들고 가는 날이 많아서 월급날이면 해동씨의 인기가 가장 좋았다고 한다. 현금으로 바로 외상값을 치르면 주인이 동냥걸이라며 빚을 갚은 턱을 냈다. 서비스라고 해봤자 매번 같은 시락국이지만 그렇게 얻어먹는 맛이 참 좋았다. 그렇게 기분이 좋다고 한잔씩 마시다 보면 외상값 갚는 자리에서 또 다시 대학 노트에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경리들이 직접 세어 담아주던 누런색 시멘트 포대 같은 월급봉투의 재미가 쏠쏠했다. 같이 돈을 세어주며 보내는 월급날은 원 없이 돈을 만져보는 날이기도 했다. 휴일도 없이 하루하루 살았지만 힘든 줄 모르고 지내왔다. 다 같이 없는 형편에 막걸리 한잔 나눠 먹으면 또 그렇게 살아갈 힘이 생겼다.
일본에서 발전한 합판 산업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에 한국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일본 기계들이 많이 들어왔었다. 인건비도 워낙 저렴했기 때문에 합판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합판을 수출한 회사 중에는 성창기업이 가장 빨랐다. 아마 1968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동명목재와 태창목재, 성창목재가 합판으로 수출 역군 몫을 톡톡히 해냈다. 국내에서는 아직 산업이 크게 일어나지 않던 시기라 합판을 쓸 형편이 못되었다. 당연히 생산해 내는 즉시 해외 수출을 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98%가 수출이었다. 합판 산업은 유류 파동을 거치면서 점차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1979년 2차 유류 파동은 타격이 심각했다.
“내가 기억나는기 1978년도 인도네시아 갔는데 큰 골짜기에 임자 못 만난 원목을 1㎤에 25불. 그기 1981년도까지 한 번도 안 내리고 계속 올라가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이 260불까지 계속 올랐어. 10배 넘게 올랐어, 3년 동안에. 보통 원목 가격이 원유처럼 들쭉날쭉한데 이기 3년 넘게 계속 올라가니까 그때 동명목재, 태창목재, 광명목재, 대명목재 다......”
원자재 가격은 정신없이 오르는데 수출 판매 가격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서 합판 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내로라하는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다행스런 일이었다. 우암동에서 지금 회사가 있는 다대포로 공장을 이전한 것은 1986년이었다. 여전히 회사의 규모는 컸다. 현장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통근차가 각 지역마다 움직였다. 영도, 수영, 부산진, 우암동, 용호동. 아침이면 통근 버스가 공장 안으로 들어오느라 분주했다.
명절이면 통근 버스가 귀성 버스로 변신을 했다. 귀성 버스에 오르는 직원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가용을 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통근 버스 운행도 많이 줄었다. 일흔이 가까운 그도 자가 운전으로 출퇴근을 한다. 공장의 풍경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남양재가 없기 때문에 화장지 말듯이 그게 없쟎아. 그기 있을 때는 자동으로 로타리 타고 올라가 드라이까지는 다 연결이 됐는데. 지금은 소나무니까 그 과정도 없고 전부다 책 맨치로 재단을 해가 쌓이면은 말루는 기계 드라이에다가 지게차로 옮겨주는 거. 고론 차이지. 그 다음에 말루고 나오면 또 조판하는 데로 옮겨주고 조판에서 스프레드로 옮겨주고. 남양재와 침엽수의 차이점이 침엽수는 딱딱 끊겨가지고 밴드를 타고 가는 거에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양재 나무가 더 이상 나지 않게 되었다. 필리핀 쪽은 풍부했던 자원을 너무 많이 반출하는 바람에 자원이 고갈되었다. 동남아시아 전반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자 1980년 초부터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서 자국의 환경보호를 위해 금수조치를 내리게 되었다. 더 이상 외국으로 목재 수출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원산국인 이들 나라에서 직접 합판을 만들어 팔게 되면서 합판 산업의 주도권도 넘어가게 되었다.
“그쪽 원목이 비싸니까 잡동사니 사러 파푸아뉴기니까지 솔로몬 군도 하고......지금도 포항제철이라든지 이런데 들어가는 포장재는 남양재 써야 됩니다. 침엽수가 힘이 없어가 감당을 못헌다꼬.”
1986년에 다대포로 오면서 더 이상 바다 위에 떠다니는 나무는 볼 수 없게 되었다. 바닷물에 가라앉는 나무들이 많았기 때문에 육상에 적재를 한 채 합판을 만들었다. 그렇게 10여 년이 지나자 소나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소나무를 사용한 것은 1996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나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태평양 곳곳을 돌아다녔다. 지금은 뉴질랜드에서 소나무 공급을 많이 받고 있다.
침엽수는 나왕 등에 비해 가공하기가 훨씬 힘들었다. 활엽수에 비해 직경이 작아서 ‘로타리 기계’로 깎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왕을 구입하기 어려워지면서 대체재를 찾아야 했고, 1990년대 초부터 침엽수를 합판 원료로 사용하게 되었다.
바닷물에 나무를 띄워놓을 때는 나무가 썩지도 않고 관리하기가 좋았다. 하지만 주종이 소나무로 바뀌면서 소나무는 바닷물에 가라앉기 때문에 육지에 적재하게 되자 상하거나 썩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지금도 감천 부두 근처에 야적장이 있지만 이제 더 이상 바닷물에 띄운 나무는 없다. 합판 생산량이 줄어들게 되면서 이때부터 회사에 작업 인원이 축소되었다. 인원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기계로 생산을 하다 보니 한 사람당 생산하는 양은 예전에 비해 5~6배까지 늘어나게 되었다.
요즘 공장에서 생산하는 합판의 양은 많을 때는 원목 1,300㎤까지 투입한다. 원목을 투입해서 나무 조각 등 여러 부산물을 버리고 정제품으로 생산되는 비율은 약 60% 남짓이다. 대략 합판으로 800㎤ 정도가 하루에 생산된다. 이 비율을 높이는 것이 효율적이기 때문에 최대한 62~63%까지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를 판가름 하는 것이 바로 원목 원재료의 질이다. 원목의 품질이 나쁘면 생산 비율이 떨어지고 좋으면 잘 나오는 것이 확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원목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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