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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의 조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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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한국(韓國) 성씨(姓氏) 탄생(誕生)의 비밀(秘密)
문 무 추천 0 조회 399 15.09.04 20:33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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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9.04 20:36

    첫댓글 글쓴 분(당시)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님께서, 이의가 있으시다면, 즉시 글을 삭제하겠습니다. 다만 조선사 공부와 연구를 하는 공간에서 회원님들게 성씨에 관한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여 게재한 것일 뿐, 상업적인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카페지기 문무 배상

  • 15.09.05 11:15

    세월이 지나면 내용이 바뀌게 됩니다.
    1,김 2,이 3,박 4,정 5,최 한국 5대 성씨입니다. 4위랑 5위가 역전이 되었네요.
    저는 성씨를 연구하시는 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까운 점들이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신분을 규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서 그 기준으로 성씨를 연구 했다고 합니다. 이는 성씨의 연구 자체에 대한 기본 개념도 없는 연구기준이죠.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의 기준은 몰락했어도 농업으로 끼니를 자급하는 경우는 양반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벼슬을 해야 양반이 아니며, 재산이 많아야 양반이 아니라는 거죠.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 상공업을 하게 되면 양반에서 제외 됩니

  • 15.09.04 23:46

    예로 봅시다. 영의정의 아들 3명이 3대 후에 큰아들은 몰락해서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을 하고 작은 아들은 죄를 지어서 좌천 되어서 관아에 노비가 되었고, 막네 아들의 자녀들은 먹거 살기 힘들어서 상공업을 했다고 한다면 이들 중 양반은 큰아들입니다. 그렇다고 성씨가 없어집니까? 10대를 흘러서 보면 3재 아들은 영원히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영원히 쌍놈이 되어 있을 것이고 좋게는 양인이 되어 있겠지요. 그러나 큰아들의 후손들은 과거를 봐서 급제를 하게 되어 벼슬을 하게 된다면 이들 3명의 후손들 족보에 영의정이었던 중간시조의 후손이라고 하는 게 잘 못 된 겁니까? 이런 것들이 비일 비제한 경우인데도

  • 15.09.04 23:51

    @마포대사 속칭 족보를 연구한다는 사람치고 정확한 개념 파악하고 연구하는 사람들 아직 못 봤네요. 이게 사칭인가요? 있지도 않은 양반 가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거냐고요? 답답합니다. 저는 제일 답답했던 기억이 어느 저명한 사학하시는 교수님이 조선시대 양반은 5%였다. 그런데 오늘날 다들 양반이다. 라고 비아냥 거리는 분을 보았습니다. 참 한심해 보이더군요. 조선시대 벼슬아치가 5%였을 겁니다. 그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아치로 내려옵니다. 그건 생각 못 하는 것 같더군요. 조선 이전에 벼슬아치들의 후손들은 쌍놈의 후손이 되는 겁니까? 지금 신분은 노비일 망정 과거에는 양반이었던 경우가 허다합니다. 조금만 족보 보면 답 나옵니다.

  • 15.09.04 23:59

    @마포대사 조선시대 특정 시기의 5%의 벼슬아치가 문반 무반 양반의 후손들이 계속 그 비율로 양반을 한다고 하면 새로운 벼슬아치가 또 3-4% 늘어납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죽은 후에 대타가 필요하죠. 벼슬아치가 대대로 물려 받는 경우는 조선 중엽에 사라졌습니다. 그 후로는 과거를 통해서 올라옵니다. 그럼 또 비율이 늘어나죠? 이 비율이 늘어나는 것을 왜 생각 못하고 그리 멍청한 소리나 하는지 모르겠어요. 벼슬아치가 봉작받은 곳으로 낙향하면 대대로 향반이 됩니다. 역모 한번 뒤집어 쓰면 졸지에 노비가 되죠. 그럼 과거에 조상이 벼슬한 게 사라지나요?

  • 15.09.05 00:47

    @마포대사 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외에도 대륙조선 같은 개념으로 볼 때 조선 양반들이 반도로 넘어와 한국이 되었다면 지금처럼 양반 성씨가 많은게 오히려 말이 됩니다

  • 15.09.05 11:11

    @Chosen People 맞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야 이주했다는 증거가 되지 조선 후기에 다 개명했다고 하면 이곳에서 계속 조선이 있었다라는 반증이 되어 버리는 거죠. 제가 20년 전에 신라후손들이 지금쯤 어느정도 규모가 되나 궁금하여 족보책을 보게 되었는데요. 황당한 결론이 나와버리더군요. 제일 많은 것은 당근 김씨와 가장 작은 어쩌면 없어진 경주설씨 엄청난 차이를 보이더군요. 이 경주 설씨는 위그르 계열의 설씨도 포함이 되어 있어서 순수 경주 설씨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게 이주하지 않고 어떻게 가능합니까? 경주설씨들만 다 죽였다고 쳐도 그렇죠. 역사에 안 나옵니다. 그러니 이런 씨족상의 비정상적인 비율이 가능한 것이죠.

  • 15.09.05 11:12

    @마포대사 당시 20년 전만 해도 삼국은 대륙에 있었다라는 식의 사서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할 무렵입니다. 그때 더 공부를 해서 고려, 조선시대 때 성씨 규모를 알아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드네요.

  • 작성자 15.09.06 11:49

    이 글을 게재한 목적도 바로 위와 같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었죠. 똑같은 성씨를 가지고도 대륙조선과 반도조선일 경우를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위의 논문저자께서 말씀하신 내용중에서도 상당부분은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대륙조선이었으나? 반도조선이냐? 하는 것의 차이에서 오는 오류라고 봅니다. 제가 지금 기억하기로 50년-60년의 농촌풍경을 보면, 많은 당시의 사람들이 "성씨"를 주변의 도움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 분들은 바로 고향 친구들의 아버지들이었습니다. 다만 쉬쉬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인정에 끌려 등의 여러가지 이유로 그렇게 했습니다.

  • 작성자 15.09.06 11:54

    이렇게 조그만 농촌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볼 때, 당시 반도 전체를 생각한다면 상당수의 국민들이 성씨를 만들고, 본관을 취득했다고 보면 됩니다. 성씨만 있어 가지고는 행세를 할 수 없가든요. 본관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족보에 기재가 되어야 어디가서 말 빨이 서게끔 되어있었거든요. 지금이야 누가 이것 가지고 왈가불가할 것은 없을 테지만 당시만 해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씨를 대륙조선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많은 부분이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특히 반도에만 있다고 하던 성씨들이 이미 대륙에는 상당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는 것, 이게 바로 대륙조선과 반도조선의 차이가 아닐까합니다.

  • 15.09.06 21:57

    저희 종친회에 1920년대 제작한 족보가 있습니다...이정도면 대한민국에서 꽤 오래된 것이라 하더군요..
    거기엔 생전 듣도보지못한 동네 이름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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