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아데초이Salon de the A'de Choi [최삼용]
향기를 위하여 커피가 있고
휴식을 위하여 쉼터가 있어야 한다면 오세요
분위기는 좋지만 그대들 사이만큼 좋지 않고
커피는 뜨겁지만
그대들 사랑만큼 뜨겁지는 않을게요
파스텔 톤이지만 차가운 파랑과 정열의 빨강이
대비색이지만 묘하게 어울리고
세월이 눌러앉은 먼지 낀 음악 앞에서
갯바람 버무린 빵과 진한 커피가 익고 있어요
그러나 커피 향이 빵 냄새보다 좋고
입구를 지키는 꽃향기보다 갯내가 좋다면
샹들리에 불빛이 당돌하게 투신하는 여기
오선지에 올리지 못한 파도의 음표 몇 개쯤 걷어
1분 동안 33과 3분의 1회전 하는 턴테이블에 얹어두고
음악보다 더 음악 같은 해조음에 귀를 열게요
아! 분위기에 취하는 이 심미적 황홀!
- 그날 만난 봄 바다, 그루, 2022
파랑의 감각 [김개미]
파란색이 차갑다 생각하지 않아요
드높은 가을 하늘을 보고
차갑다 생각한 적 없어요
어려서 그렇게 배웠다고
커서도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은
내 생각이 아니죠
골목 깊은 곳의 파란 대문은
동네에서 제일 예쁜 파란색
파란 나라 파란 몸 스머프는
내가 제일 아끼는 파란색
파란색은 백 가지도 천 가지도 넘어요
어떤 파란색은 꿈속에만 있고
어떤 파란색은 어떤 사람에게만 있고
어떤 파란색은 저녁에만 있어요
아직 아무도 본 적 없는 파란색도 있어요
얼마나 많은 파란색이 발견될지
누가 발견할지 나는 너무 궁금해요
물감 뚜껑을 닫는 순간
나와 당신의 파란색은
더 이상 같은 색이 아니죠
나는 내 마음속의 파란색을
당신은 당신 마음속의 파란색을 볼 뿐이죠
화가들은 자신만의 파란색을 가지려고
일평생 색깔 속으로 떠나죠
노랑에도 빨강에서도 초록에서도
파란색을 가지고 나오죠
내게 파란색을 좋아하냐고 묻지 마세요
나는 어쩔 줄 모른답니다
- 작은 신, 문학동네, 2023
파랑 [이성미]
옷장을 열면
파란 바다, 파란 하늘, 인디고블루, 프러시안블루, 해
지기 전의 파랑, 해 진 후의 파랑, 해 뜨기 전의 파랑, 검
은 파랑, 두꺼운 파랑, 연한 파랑, 수줍은 파랑, 아 파랑,
오 파랑, 온갖 파랑이
파란 물결이 넘실거리며 방에 파란빛을 쏟아낸다. 파
랑 뒤에는 파랑의 그림자. 검은 파랑 위에는 파란 밤들.
나는 파랑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흰색과 녹
색을 좋아한다.
파랑이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어제 알았다. 옷
장에는 파랑 옷이 가득하고, 저 파랑들. 오 파랑들.
파랑 옷을 버리려면 파랑이 아닌 옷이 필요하다. 나는
파랑 옷을 증거처럼 입고 옷가게로 간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파랑. 파랑은 예쁘다. 나는 터키블
루 옷을 산다.
나는 파랑이 어울리지 않는다. 파랑을 좋아하지 않는
다. 나의 옷장에는 파랑 옷이 가득하다.
- 다른 시간, 다른 배열, 문학과지성사, 2020
파랑 [신은숙]
살아가는 건 파랑을 마주하는 일
파랑주의보로도 어쩔 수 없는 파랑이 여울져 밀려들 때
파랑 속 많은 파랑들 저마다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파
랑은 본래 없는 색이라고 투명 위에 덧댄 투명은 불투명
이라고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소리친다
ㅍ은 엎어치기 좋아서 ㄹ은 마음속 구절양장이어서
ㅇ은 출구가 없어서 ㅏ ㅏ 나는 강시처럼 팔을 앞으로 나
란히 걸어가며 파랑을 생각한다 좋은 건 이유 없음 하늘
이 그냥 파랑이듯 파란 월요일 낭랑한 달빛이 휘파람 분다
파랑은 신호등이고 우울의 명랑 버전에 호미고 삽자루다
파다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이 생을 다녀가는 주문 파
랑, 파랑의 얼굴을 깨닫는 순간 파랑주의보는 흩어지고 허
무가 노래하고 서늘한 표정의 그림자, 어스름 한 여자 우
두커니 물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 모란이 가면 작약이 온다, 파란, 2020
파랑의 형식 [한이나]
파랑은 바닷가에 두고 온 사랑의 형식이다
울트라마린에 0.1프로의 기쁨을 섞으면
가장 밝은 파랑이 되고
99.9프로의 우울을 섞으면
가장 어둔 파랑이 되었다
나는 해변의 길 잃은 구름
진한 슬픔 청색시대였다가
파랑을 찾아 꿈속까지 뒤지는 일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마음이다
세상이 온통 파랗게 보였다
산토리니의 둥근 지붕, 론강의 밤하늘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가 기도하는 모습의
저 파란 망토까지,
파랑의 기쁨과 우울을 딱 절반씩 섞어
하루의 파도에 실어 보냈다
형식을 걷어내면 파랑 안의 흰색, 순결무구만 남는다
-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서정시학, 2024
Earlymorning Blues [김 혜순]
누가 칠흑 같은 검정에서 파랑을 빼내고 있다
줄에 걸려 펄떡거리던 광목 한 필이 점점 더 푸르러졌다
(당연히 빨간 피도 한 줌 쏟아졌다)
나는 밤새도록 검정 속을 날아 이곳에 도착했다
푸른 광목게 묶인 할머니의 시신이 이곳으로 하관 중이었다
내 몸도 맘도 파랗게 절여졌다
갓 태어난 낙태아가 새파랗게 울었다 생생한 청색아였다
엄마는 흰 구름처럼 돌아누워 훌쩍이고 있었다
검정 속에다 밤새도록 눈물깨나 뿌린 모양이었다
아빠, 아빠 내 머리 속엔 파란 남자가 살아요
검정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남자가 살아요
나는 소리없이 울부짖었다
빨강 메니큐어를 칠한 해가 검정 실크햇을 쓴 앞산머리를 긁어댔다
앞산이 턱받이 냅킨 위로 빨강 피를 줄줄 흘렸다
그러자 머리 위에 원반처럼 떠 있던 동그란 하늘이 점점 더 새파래졌다
인생이란 이쪽 파랑에서 저쪽 파랑으로 건너가는 것
누가 던진 부메랑인지 희뿌연 하현달이 저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또 안팎이 파란 아기를 밴 모양이었다
들숨 날숨 내 몸 안팎에서 파랑이 커다랗게 파도쳤다
여름 키코 [주하림]
테이블 위 케이크
케이크가 난방에 녹고 있다
동그란 어깨뼈를 드러낸 사촌 여자애들이 모여서 케이크를 먹는다
긴 흑발의 언니와 동생들
그만 먹자 키코, 크림은 몸에서 녹지 않아
왜 크림은 입에서 녹잖아 의자에 앉아서 먹자
여름에는 남자가 도망간다 멀쩡하게 같이 살던 남자가
그후로 의자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점점 좋은 의자를 모았고
언니는 의자를 쌓아놓고 의자 꼭대기에서 창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다
그녀 표정은
빈방을 고통으로 채색하려는 듯
더운 곳에 가고 싶다
그리스, 덥고 인간의 환대로 가득한
언니의 의자 모으는 취미는 여름에도 가을에도 끝나질 않는다
남자가 또 도망간 뒤 이제는 취미 대신 아나키스트 땅 거래 집문서 공부를 시작했지
마지막 꿈꾸기와 더 나은 꿈 기억의 두 가지 빛이 섞인다
누군가 포크로 케이크 바닥을 긁는다
동그란 어깨뼈에 맺히는 땀
중학교는 다니지 말걸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와 오토바이를 타다 종아리 화상을 입던 애들뿐이었거든
잠들기 전까지 괴기한 생각
이제는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는 사촌들 그중 하나가 길바닥에서 발작하며 피거품을 뿜는다 간질이래 얘기 들었어?
블러드 문blood moon에 고백을 받았대
나는 너의 어느 쪽을 밀어도 만지고 싶은 미래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하지만 천국에도 지옥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지
블러드 문이 뜬
바닷가
바닷가
천국이 지나간 자리
언니의 남자들은 언니 마음이 투사된 그림이야
키코, 그를 잠깐 사람으로 왔던 신이 쓴 글이라고 생각해
종아리 화상 때문에 졸업식 사진은 상반신뿐
잘려나간 하반신들이 걷고 있을
바닷가
끈적거리는 피의 해변
머리카락에 크림 닿는 것이 싫어 단발이 되었다 졸업식에 올 수 없는 부모와 누군가에게 일일이 실망할 기운도 없다 120페이지 종아리 화상이 벚꽃 잎처럼 보인다 비가 오기 시작
- 여름 키코, 문학동네, 2022
연두가 되는 고통 [김소연]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 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멍,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벌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든 네게서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산에서 온 새 [정지용]
새삼나무 싹이 튼 담 우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모자 쓰고.
눈에 아름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이 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아침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 향수, 미래사, 1991
방범창 [박길숙]
작은 창에는 창살이 있네
우리 대화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
언덕 위 허물어지는 해바라기가 있네
언니야 나 저 꽃이 갖고 싶어
언니는 언덕을 붙잡고 시든 해를 꺾어 오네
언니가 만든 빨래집게가 양은 밥상 위 시간을 붙잡고 있네
돈 많이 벌면 예쁜 엄마와 친절한 학교를 사 줄 테야
은색 고리로 은귀걸이를 만들고 빨간 집게로 비행기를 만들지
파란 집게를 연결하면 기차처럼 시간은 늘어지네
얼룩, 얼룩, 울 언니는 자주색 가죽가방
언니가 새로 생긴 무늬를 보여 주며 스케치북을 내미네
괜찮아, 아프지 않아
나는 창에 기대어 침을 뱉지
나보다 먼저 무럭무럭 자라는 창살
파스텔 색깔이 곱게 퍼진 눈 위로 찢어지지 않기 위해 물이 드네
언니의 낮달이 눈썹처럼 걸렸네
나는 까만 크레파스로 검은 달을 만드네
판다가 된 언니, 웃네 울 언니가 웃네
해를 꺾어 시든 밤
언니는 지퍼를 열고 나를 담네
- 아무렇게나, 쥐똥나무, 시인의 일요일, 2024
독거노인이 사는 집 [이명윤]
그날 복지사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노인이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렸을 때 조용히 툇마루 구석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단출한 밥상 위에 내려놓은 놋숟가락의 눈빛이 일순 그렁해지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복지사가 아유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하며 자세를 고쳐 앉고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흐느낌은 오뉴월 빗소리처럼 그치지 않았고 휑하던 집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과 벽시계와 웃옷 한 벌과 난간에 기대어 있던 호미와 마당가 비스듬히 앉은 장독과 동백나무와 파란 양철 대문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걷는사람, 2024
흑백 무지개 [강나무]
요구르트, 그 다디단 것은 한 줄짜리 만화처럼
금방 바닥이 났다 언니는 아침마다 사라지고
엄마는 밥때가 아니면 미싱을 멈추지 않았다
창고 속에서 여자들이 실밥을 머리에 가득 얹고
노루발을 밀어 면장갑을 만들었다
흰 손바닥들이 언덕을 이루면 미끄럼을 타고 싶었다
심심하면 불을 질러야 했지만
성냥불 불꽃마저 희어서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일부러 길을 잃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누군가 나를 안아 들고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의자처럼 마당에 앉아 있다가 문득 방으로 가
손거울을 놓고 들여다본 아랫도리는
종일 입에 물고 있어 늘어진 검은 고무 꽈리 같았다
아무나 쓰러지기를 바랐다 아니면 죽거나
그때 내게 옜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도 누가 던져 주었다면
맴돌던 좁은 마당에서 노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면
그것도 아니면 파란 혀를 가진 개에게 물려
팔뚝에서 보라색 피를 펑펑 흘렸다면 미싱은 멈추었을까
백지에 검고 흰 무지개를 그리면 먹구름이 들어왔다
찾는 사람도 없는데 이불에 숨어 숫자를 백까지 세었다
눈을 떠 보니 흰 머리카락이 무성했다
-긴 문장을 읽고 나니 아흔 살이 됐어요, 걷는사람, 2023
들어오세요 [김소연]
너는 들어오지 마―
그 안으로 들어간 누군가가 외쳤고
나는 잠에서 깨었다
이불을 걷고 거실로 나와
찬물 한 컵과 마주하여 앉았다
창 밖에는 사다리차가
누군가의 세간살이를 분주하게 나르고 있었다
찬물이 식어가는 동안에
찬물을 마시지 않았다
파란 박스가 네 개씩 포개어져 누군가의 거실로
차곡차곡 운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곧 이웃 사람이 될 것이다
너는 들어오지 말라던
그 안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 나에게 남긴 한마디를
나는 모두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찬물이 식어가고 있다
세수를 했다
흰 비누 거품으로 칠해진 얼굴을
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다
이 얼굴은 한 번도 진심으로 미워해본 적이 없다
악몽이 보호하고 싶어 하는
나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사 왔어요―
인터넷 화면 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채워져 있다
현관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안으로 쏟아졌다
- 촉진하는 밤, 문학과지성사, 2023
가장 아름다운 혼 [백은선]
1
엄마 나는 봐요. 세계가 비틀린 육각형으로 기우뚱 회전
하는 것을. 그게 엄마 눈에도 보이는지 궁금해요.
사람은 언어로 생각을 한다는데 한 번도 말을 배운 적 없
는 나는
그전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치만
사람은 언어로 생각한다는 말은 틀렸어요.
나는 냄새로 공기로 빛으로 생각을 했거든요.
결핍은 존재를 알아야 발생하는 거예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그리워할 수는 없으니까요.
*
엄마가 여니야 하고 부르는 순간
내 뺨을 만지고 등을 토닥이는 순간
세계는 천천히 돌기 시작했고
나는
절망을 배웠어요.
*
엄마
우리가 건넌 다리 아래로
파란 물이 넘실거리던 거
나무들 사이에 비죽 솟은 작은 버섯이
너무 깨끗해서 웃었던 거
참 이상해요, 그치?
*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차가운 쇠를 핥을 때의 피맛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
아주 천천히 움직이던
한 조각 빛을 만지며 놀던 오후
밤이면 참을 수 없이 가려워서
팔을 긁고 깨물던 일
2
내가 자라 처음 교복을 입고 등교하던 날 엄마는 아침으
로 소시지 야채볶음, 감자볶음, 미역국을 차려줬잖아. 난
미역국이 너무 싫었어. 미끌거리는 걸 입속에 넣을 때마다
억지로 삼켰어. 매번 그랬잖아. 피가 맑아진다고. 피가, 맑
아지는 게 뭔데?
학교는 너무 시끄러웠어. 나는 그때마다 마음속의 작은
문을 열고 하얀 방으로 걸어들어가는 상상을 했어. 거기서
사각거리는 이불을 덮고 고요하게 침잠하는 상상. 그게 나
를 구했어. 그런데 내 방은 너무 약해서 누가 툭 치고 지나
가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져버렸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맑
게 웃고 있는 애들의 입을 다 찢어버리고 싶었어.
*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된 날부터 엄마는 점점
말이 없어졌잖아. 그게 나는 좋았어. 좋은데 엄마가 슬퍼 보
여서 미안했어. 나를 미안하게 만드는 엄마가 미웠어.
불가능한 것이 너무 많아서
믿음이 생겨나듯
세상에는 처음부터 잘못된 자리에 놓인 것도 있어.제자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그냥 거기 있어야 되는 것도 있어.
그걸 엄마는 모르는 거 같았어. 나는 가만히 누워서 생각
했어. 가만히 누워 있는 거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빈집의 정적 속에서 가만히 떠오르는 것들
비틀린 채 돌고 있는
기울어진 풍경
닫힌 유리병 속 순환하는 생태계
*
난 절대 엄마가 되지 않을 거야
-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문학동네,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