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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묵상글 ( 부활 제7주간 목요일. - 모두가 하나 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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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부활 제7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모두가 하나 되는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대사제의 기도 끝부분입니다.
제자들을 두고 아버지께로 가시며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께서
이제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데
제가 보기에 삼중도로 치면 최고의 경지에 이들이 도달케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먼저 삼중도의 2단계라고 할 수 있는 조명의 단계에 도달케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의 조명을 받아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단계라고 할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
나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임마누엘 주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참으로 신앙의 높은 단계이고 이렇게 될 때 참으로 행복이 시작됩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내가 지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것도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을 안다는 것은 더 큰 행복이겠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 이것은 아직 관념적입니다.
햇빛으로 치면 이것은 해가 떠 있다는 것을 아는 수준입니다.
아직 그 햇빛을 받고 그 햇볕을 쬐는 수준은 아닙니다.
삼중도의 최고 단계는 일치의 단계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가고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단계입니다.
하늘에 떠 있던 하느님의 사랑이 해의 빛과 볕이 내려오듯
임마누엘 주님을 통해 이 땅에까지 내려와 머무시는데
우리도 그 사랑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비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은 당신도 미워하고 그 제자들도 미워하는데
제자들의 말을 듣고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도 이제
삼위일체의 하느님 사랑 안으로 같이 들어와 머물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됨으로써 하느님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고 모두 하나 되는 겁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 안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 하나 되게 해달라는 부분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 말씀은 끼리끼리만 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사람끼리 또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나 되는 것,
하느님 사랑 안에서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하나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하느님 사랑 안에서 하나 되더라도
자기들만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와 하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열 명이 밖에 있었는데 그중 두 명만 손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 하나의 가정을 꾸리는 것과 같습니다.
둘은 하나가 되지만 결국 여덟은 배제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부러 왕따를 시키지 않아도 이렇게 배제를 하고,
그래서 결국 공동체가 하나 되지 못합니다.
누구하고는 하나 되고 싶지만
누구하고는 하나 되기 싫은 사람이 있다는 얘깁니다.
쉬운 예로 누구하고는 단짝이 되고 싶지만,
누구하고는 짝도 되기 싫은 겁니다.
그런데 누구를 배제하지 않는 사랑일 때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같이 가자고 초대하는데도 상대가 거절해 혼자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내가 배제하여 혼자 들어가면 하느님 사랑 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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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최후만찬 후에 아버지께 드린 “대사제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으로,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과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렇다면, “하나”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어울려 친하게 지내라는 것을 말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격 좋고 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하나”를 이루기에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란 “우리” 곧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아들 됨’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가 부자관계로 “하나”를 이루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2베드 1,4)하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그 ‘하나 됨’이란 곧 ‘사랑 안’에서의 이루는 ‘믿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를 이룬 이에게서는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그분 안에서 함께 세워져서 영 안에서 하느님의 거처가 됩니다.”(에페 2,22).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됩니다. 곧 우리도 당신 ‘안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받게 됩니다.’(요한 17,22 참조). 그리하여 세상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요한 17,21),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7,23). 이처럼,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알게 하는 것이 ‘대사제 기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사실 당신께서는 <마태오복음>에서, “나와 함께 있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마태 12,30)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므로 누구나 당신이 계신 곳에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당신 ‘사랑 안’에, 당신의 진리 안에 ‘함께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과 진리를 행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현존 안’에 머물게 되고 ‘우리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보게 될 것’(요한 17,24 참조)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과 ‘하나’를 이룰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분이 ‘있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일치하여 있으면, 우리도 주님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주님!
당신과 함께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서로가 손을 맞잡고,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가 똑같아 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 오직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길 바라오니, 제 자신을 건네주게 하소서.
오로지 당신을 받아들여 하나 되길 바라오니, 제 안에 당신을 실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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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기도를 받고 또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 상관없이 삶 안에 젖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해 달라는 기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그분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바람만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깊이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되고 그에 응답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머물러 사시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17,24).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 누리는 영광을 믿는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예수님과 제자,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일치를 이루려면 사랑 없이 불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도 정성어린 기도를 봉헌하되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사랑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유의하시는 것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들을 생활 실천으로 옮겨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기도는 하늘의 열쇠며, 세상의 기둥이고 영혼의 힘이며 하늘의 삶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받으려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만히 베푸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기도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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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늘 ‘인원점검’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출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순례단과 떨어지게 되면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계속 움직이면 오히려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단체로 이동할 때는 함께 다니는 것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여행을 많이 다니셔서 혼자서 이탈하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모임 시간도 대부분 잘 지키고 있습니다. 함께 해야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말도 자주 들었습니다.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는 팬데믹을 살아가는 ‘상식’처럼 되었습니다.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거리두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박해시대에도 멈추지 않았던 미사까지 멈추었습니다. 뭉쳐야 할 때가 있고, 흩어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대한 식별입니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바구니가 부딪치면 계란이 모두 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식 투자를 할 때도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한 곳에 모두 투자하면 이익도 클 수 있지만 손실도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국가의 무역도 비슷합니다. 어느 특정국가에만 의존하면 편할 수는 있지만 위기의 상황이 다가오면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무역은 다각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보에는 이념이 있지만 경제에는 이념이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개혁과 개방을 시작하면서 ‘흰 토끼든 검은 토끼든 쥐만 잡으면 된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중국은 자본주의라는 토끼를 받아들였고 가난이라는 ‘쥐’를 잡았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대한민국은 중국과 가까이 있습니다. 안보라는 계란은 미국이라는 동맹과 굳건히 담아야 합니다. 그러나 경제라는 계란은 중국이라는 바구니에 담아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안보와 경제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냉엄한 국제질서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이끌었습니다. 기원전 500년쯤에 그리스, 인도, 중국에는 인류의 여명을 밝혀주었던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학자들은 이 당시에 풍성했던 학문과 지식의 시대를 ‘현의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힘을 합쳐서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천사와 부활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파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바오로 사도를 변호하였습니다. 결국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서로 대립하였고, 바오로 사도는 박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지혜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서로의 입장, 서로의 이익만 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혼탁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지, 어느 것이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제자,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럴 때 서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학연, 지연, 혈연, 사상, 이념, 종교라는 틀로 차별하지 않게 됩니다. 바리사이파는 자신들이 지키는 율법을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방인들, 죄인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그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사두가이파는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중심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 로마라는 힘에 저항하는 이들, 죽은 이들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이들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그들을 단죄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기득권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이들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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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엄마가 자녀를 위해 자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왜 음식을 만들까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녀에게 사랑받기 위한 것일까요? 남편이 아내에게 쉬라고 하면서 혼자 청소기를 돌려 청소하고, 밀린 설거지도 모두 깨끗하게 합니다. 이 행동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내에게 사랑받기 위한 것일까요? 당연히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즉, 사랑받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본래의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사랑으로 상대방이 기뻐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받는 것에 집중하는 순간, 집착을 하게 되면서 입으로는 ‘사랑’을 말해도 사랑 같지 않은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사랑을 줬는데, 내게 사랑을 주지 않느냐면서 화를 내게 됩니다. 자기 기준으로 받는 사랑의 양을 평가하면, 상대방의 사랑은 늘 작게만 보일 것입니다. 타인의 모습에 실망하고 자기 기대에 못 미친다면서 또 왜 노력하지 않냐면서 사랑과 정반대인 미움이 등장하게 됩니다.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이것은 사랑이 아니구나.’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나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욕심일 뿐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고자 하는데서 환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해’는 행복 옆에 있지만, ‘사랑해줘’는 행복에서 멀다.”
주님의 사랑은 당연히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 우리가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는 생명까지도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을 본받기는커녕 가짜 사랑인 받는 사랑만 강조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
당신을 믿는 우리 신자 공동체가 ‘하나’ 되길 기도하십니다. 그 ‘하나 됨’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를 이룰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몽땅 예수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랑 안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받는 사랑만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주는 사랑에서 주님과 하나 됨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주는 사랑인 진짜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간절하게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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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욕심을 내 보자. 나에게 관심을 갖고, 나를 공부하고, 내 욕심에 솔직해져 보자. 내 삶을 내 식대로 만들어 가자(최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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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교회 공동체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
제가 거의 10여년 동안 면담고백성사중 가장 많이 휴대폰에 붙여 드리는 것이 요셉수도원의 영성을 상징하는 “하늘과 산”의 로고일 것입니다. 하늘과 산의 구도가 너무 뚜렷하고 선명해 한눈에 들어오며 그대로 “기도하고 일하라” 수도원의 모토와도 일치합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느님보고 사람보고, 하늘보고 땅보고, 관상하고 활동하고 영성생활의 기본리듬입니다. 저는 이를 일컬어 목운동의 영성이라고 합니다. 이래야 균형잡힌 영성에 균형잡힌 삶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 은총이 개인은 물로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말씀드리곤 합니다. 하늘과 산과 더불어 시간되면 ‘하늘과 산’이란 자작시도 나누며 하느님과 우리가 얼마나 깊은 상호관계에 있는지 묵상하도록 합니다. 참 많이도 나눴던 ‘하늘과 산’이란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이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평생관계를 압축, 상징하는 시입니다. 날로 주님과의 깊어가는 우정관계의 더불어 그리스도 중심의 삶도 견고해질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면담고백성사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보속의 말씀처방전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이 성구를 잘 들여다 보면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서 샘솟는 기도요 기쁨이요 감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을 확고히 해주는 다음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묵상기도시 네 단락을 호흡에 맞춰 기도하도록 권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오늘 우리는 7-8세기 영국에 살았던 성 베다 베네라빌리스 사제 학자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공경받을 만한(venerabilis)’이라는 경의의 표현을 붙여 ‘베다베네라빌리스’라고 부르며 한국천주교회는 가경자 베다라 부르며, 영국의 작가와 역사가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시성詩聖 단테의 신곡의 천국편에 등장하는 유일한 영국성인으로, 보니파시오 성인이 ‘성령의 빛이며 교회의 빛’, ‘우리 스승이신 베다 존자’라고 극찬했던 베다 성인입니다. 성인은 몇 번의 짧은 여행과 이웃 수도원들을 방문하는 시간외에는 생애의 대부분을 재로(Jarrow)의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보냈습니다. 거기서 그는 성경 연구에 온 힘을 쏟고, 교회사를 비롯한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수도자들의 교육에 헌신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735년 5월26일, 마지막 숨을 거두기 까지, 시편을 외우고 묵상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하며 그의 제자이자 후일 아빠스가 된 커드베르트는 그의 마지막 감동적인 순간과 유언을 전해 줍니다.
‘예수 승천 대축일 전, 화요일이 되자 베다 형제의 병세는 악화되어 숨결이 거칠었고 발은 약간 부어올랐다. 그러나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온종일 우리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이 저술하려는 것을 받아쓰게 하였다. 수요일 아침이 밝아오자 슬퍼하던 제자들은 성인의 다음 유언을 듣고 기뻐하였다.
“나는 오래 살았고 자비로우신 심판관께서는 내 일생을 당신 섭리로써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다가왔으니 내 육신이 모두 사라져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갈망합니다. 내 영혼은 영광의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갈망합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손으로 머리를 받쳐주시오. 내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도록, 내가 즐겨 기도했던 성당을 향해 기대어 앉고 싶습니다”
말한후 성인은 방바닥에 누워 영광송을 외우기 시작했고, ‘성령께’하고 말하는 순간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뛰어난 지혜와 학문으로 교회에 봉사한 베다성인의 공덕을 높이 기려 853년 아헨 교회회의에서 ‘존자(尊者;베네라빌리스)’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 그후 그의 고유 이름처럼 되었고, 1899년 교황 레오 13세가 그를 교회학자로 선언함으로써 영국의 유일한 최초의 교회학자가 됩니다.
평생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던 성인의 평생 삶이나 마지막 떠남의 죽음은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그대로 그의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갈망과 열정의 사랑이 평생 성인 삶의 원동력(原動力)이자 마르지 않는 원천(源泉)이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기전 계속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고별기도의 마지막 장면으로, 오늘 또한 세상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사랑안에서 하나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뤄달라는 기도입니다. 감동적인 기도문 일부를 소개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대로 세세영원토록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으로 하나된 사랑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마지막 떠남의 죽음에 앞선 예수님의 고별기도가 참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처럼 베다 성인도 영광송 기도를 바치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정말 이런 기도로 평화로이 선종할 수 있다면 남은 후손이나 후배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희망과 기쁨의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오늘 복음의 주님의 마지막 고별기도가 우리에겐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의 바오로의 삶도 참 파란만장해 보입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참위태한 상황중에도 침착하고 지혜로운 처신이 빛납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에서 기인한 내적평화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늘 함께 계신 삶의 중심이신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희망과 기쁨을 둔 바오로의 한결같이 평화로운 내적 삶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선교의 발길을 돌리는 바오로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중심의 사랑의 교회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한결같이, 주님을 증언하는 복음 선포의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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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5. 부활 제7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람이 밥이 없으면 살 수 있습니까? 사람은 밥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밥을 먹습니다. 밥을 씹어서 삼키면 그 밥에 들어있는 영양들을 인체의 모든 부분이 흡수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밥이 배에 들어가면 우리는 더 이상 밥과 내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먹은 밥을 다시 나와 분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벌써 내 몸에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밥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어야지만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릇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고운 흙이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죽을 잘해야 하고 또 뜨거운 불이 필요합니다. 반죽을 잘하고 그릇 모양을 잘 만들어서 불에 구워내야 그릇은 그릇의 기능을 하게 됩니다. 그릇에서 흙과 물을 따로 분리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들은 벌써 서로 흡수되고 뒤엉켜서 그릇이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일치입니다.
일치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치는 서로 다른 것이 만나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되는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또한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깎아 내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때, 모난 부분과 부분의 하나의 그림처럼 완성될 것입니다. 물론 한 번에 쉽게 맞을 수 없습니다. 여기 조금, 저기 조금 깎아내며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인내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주님께서 일치를 이루시고 계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과 인내로 일치를 이루어 가기를 희망합니다.
지혜로움이란
어떤 농부가 무뎌진 낫으로 일하는 아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들아! 낫의 날이 무뎌졌는데 불편하지 않니?
왜 갈지 않고 계속 무뎌진 날을 쓰는거지?
아들이 말했습니다.
할 일도 많은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무뎌진 연장을 가는 것은
절대 시간 낭비가 아니란다.
-월터 엘.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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