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anti anti
나는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에겐 아들이 둘 더 있었지만 모두 젖먹이 때 잃었기 때문에 내게는 위로 누나 셋과 형이 둘 있었을 뿐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은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 백암리에 있는 백암(또는 백암리, 원백암) 마을이었는데 굳이 세세하게 밝히는 것은 그 동네가 좀 남다른 동네였기 때문이다.
동학은 4193년(철종11년) 경주 출신의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 불(佛)ㆍ선(仙)을 토대로 만든 것으로 서학(西學:기독교)과 대립되는 민족종교라는 뜻에서 동학(東學)이라고 한 것이다.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
포교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최제우는 혹세무민한다는 죄로 처형되었으나 교세는 줄어들지 않았고 이후 4227년 백성들의 무장투쟁으로 일어난 동학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첨단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화력 앞에 동학혁명군은 무참하게 깨졌지만,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과 만민평등을 이상으로 하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의 동학은 오히려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동학에 심취했던 사람들이 많은 종파를 창시했는데, 출가한 스님이었던 이상룡(李象龍)이 만든 수운교(水雲敎)의 한 지부가 백암리에 있었고 도통(道通)할 것을 굳게 믿었던 우리 가족도 백암리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나는 빨갱이가 꽁깽이(맹꽁이) 같은 것인 줄 알았다. 빨갱이들이 밤에 내려온다기에 구경하려고, 애기를 업고 마을 어귀로 나가 서 있다가 야단맞았다. 어머니께서는 스스로도 어처구니없었다는 듯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당시는 6.25사변 중이었는데 조용한 곳(전남 여천군 율촌면 봉전리 광암마을)에서 난장판이었던 백암리로 이사를 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내가 종교에 심취되지 못하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이들에게 서슴없이 종교가 좋다고 말하고 스님이나 목사님, 신부님 등에 대한 거부감도 전혀 없지만 ‘전 재산을 시주하고 절에 들어간다’거나 ‘교회에 가야 되니까 일요일에는 놀러가지 못한다’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들기커녕 ‘미친 것들!’이라고 욕설이나 해댈 뿐이다.
어려서 내 이름(兒名이 아니다)은 ‘배호(호는 항렬돌림자)’라고 했다는데 두어살 무렵에 바뀌었다. 배앓이가 심해 똥꼬 마를 날이 없었는데 말 그대로 백약이 무효였다. 어미가 똥꼬를 핥아주면 좋다는 소리에 어머니가 밤낮으로 아기 똥꼬를 입에 물고 살았어도 도통 효험이 없었다. 더 이상 아기 살리기를 단념해야 했을 때 동네에 한 작명가가 찾아들었다. 아기 이름이 나빠서 그런 것이라는 소리에 집으로 모셔놓고 며칠 극진히 대접하고 돈냥깨나 쥐어준 뒤에 ‘壽仁 ’이란 이름을 받았다. 이름을 바꾸자 신기하게도 아기는 배앓이를 뚝 그쳐 똥꼬도 보송보송해졌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뒷날 아버지가 성명철학을 하고 아는 소리도 곧잘 하게 된 것도 몸소 기적을 경험한 때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어머니 젖을 물고 자랐고 등에 업혀서 지냈다.
“어떠. 어떠. 동생 어떠.”
시도 때도 없이 업어달라고 포대기를 질질 끌고 나온 내가 외우는 주문(?)이었다.
아기들은 영이 맑아서 하는 말이 곧잘 맞는다지만, 서른일곱에 나를 낳았던 어머니는 쉽게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생기면 생기는 대로 낳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인지라 나는 그때부터 어머니에게 큰 효도를 한 것이다. 나는 내 포대기를 양보할 필요가 없었고, 포대기가 필요 없어진 뒤에도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 툭하면 업어달라고 떼를 썼다. 다 큰 것이 업혀 다닌다고 나무라면 어린애가 하도 격하게 욕하는 통에 어른들도 함부로 놀리지 못했다고 한다.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할아버지의 술친구가 되었다. 다른 손자들한테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데 할아버지는 항상 막내손자(작은 아버지네 집에는 나보다 작은 아이들도 많았지만)를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밀주 단속이 심하던 때였는데 어찌된 셈인지 동네 주막에 술이 떨어지는 일도 많았다. 다른 동네로 갈 수밖에 없는데 거기서도 막걸리가 없으면 또 이웃 동네로 가야 했다. 사방 십리를 섭렵하다보니, 어린것이 어느 동네 주막인심이 어떻다는 평까지 했다고 한다. 일곱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더 이상 술친구를 구하지 못해 금주를 해야 했지만 동네사람들은 어린 술꾼을 기억해주었다. 잔칫집에 가면 아이들에게 떡이나 부침개를 쥐어주는 것이 상례였지만 나한테는 대접 가득히 술 한 잔 따라주는 것이 당연했다.
할아버지는 행세하는 집안의 막내였는데 결혼과 동시에 가문에서 쫓겨났다. 멀쩡한 자식이 술집 딸한테 장가들겠다고 목을 매니까 논밭이나 조금 떼어주고 축출해버린 것이다. 시제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신세였는데 나중에, 장사였던 힘만큼이나 목소리가 크고 입심도 좋았던 아버지가 문중에 찾아가 난리를 피워 다시 가문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우리 어머니가 남몰래 ‘술집 딸년, 천한 상것!’’이라고 할머니를 흉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만은 막지 못했다.
“먹을 것도 숭켜놨다가 주고, 니들 하나씨 땜에 내가 살았다.”
부잣집 막둥이로 귀한 것 없이 자라 한평생 술이나 마시며 유유자적했던 할아버지는 드센 할머니한테 꼼짝도 못했지만,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몰래몰래 챙겨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바다에서 나는 생선이나 어패류 등을 조금 드실 뿐 고기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쇠고기 같은 것은 누린내가 싫어서 냄새만 맡아도 밥을 먹기 힘들었는데 할머니는 육식을 좋아했고 늘 먹자판이었다. 아버지가 일본에 가서 몇 해 살면서 많은 돈을 보냈다고 한다. 논밭을 많이 사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돌아와 보니 자기가 보냈던 돈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할머니가 매일 비싼 쇠고기만 먹고 살았기 때문인데 효자노릇을 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싫은 소리(원망하는 소리)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혈액형이 B형인데 관(동사무소에서 관리하는 주민등록표던가 병역기록부(?)던가 노란색 서류)에는 A형으로 기록되어있었고 함께 생활했던 사람들은 흔히 O형으로 알고 있었다. 한의사 친구는 여러 가지 약재들까지 이용해서 이것저것 반응을 보고서도 도무지 ‘체질이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나를 모른다. 스스로 내성적인 성격으로 분류하지만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하면 말리기 어렵다. 게으르기 짝이 없고 대충대충 소리를 입에 달고 살지만 번갯불에 콩 구워 먹겠다는 핀잔도 받고 물도 빨아(세탁해서) 먹을 놈이라는 소리도 듣는다. 아는 얼굴들에게 반갑다는 인사도 건네지 못할 정도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질겁할 만큼 뻔뻔스러울 때도 많다.
직접 경험하지도 않았던 가정사지만 길게 늘어놓는 것이, 독클님들이 이 글을 읽어가면서 또는 교우 관계를 이어가면서 오락가락 뒤죽박죽인 내 습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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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 저놈이 이실직고할 때까지 매우 쳐라!‘
무서운 호령과 함께 곤장이 떨어지고
‘애고고 나 죽네’하는 비명이 뜨락 가득 울린다.
죄인한테는 이실직고할 책임만 있을 뿐
묵비권 따위를 생각하다가는 목숨으로 값을 치러야 한다.
고전 영화에 흔히 나오는 살풍경한 장면이다.
--- 당신이 하는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 변호사를 선임할 수가 있으며 등등
범인을 체포한 경찰은 범인의 권리부터 부지런히 가르쳐준다.
범인의 권한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경찰이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범인을 구타한 경찰이 벌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서구 영화에서 많이 보는 장면으로
인권이 잘 보호받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우리 조상님들은 아예 인권을 무시하고
저들은 인권을 철저히 보호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정말 아니다!
저들은 인권이란 말을 즐겨 쓰지만
한두 사람 범인의 인권 때문에 더 많은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감각하다.
애초부터 저들한테는 도덕이나 정의라는 것이 없었다.
정의는 힘있는 자의 입맛대로 정해진다.
권력과 칼의 힘만을 앞세우고 살아온 서구인들은
애초부터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것이 없었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약속과 거래뿐이었다.
서로의 욕심을 통제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바로 거래의 질서인 법이었고 약속이었다.
저들은 죄를 지은 범인에게
묵비권 같은 것이 있음을 일러주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법정은 진위를 밝히는 곳이 아니고
변호사들의 게임장일 뿐이다.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자가 정의가 되는 사회다.
허나 이 땅은 애초부터 하늘백성들이 사는 도덕의 땅이었다.
백성들은 도덕과 정의를 믿고 살기 때문에
약속이나 거래 따위는 거의 필요치 않았다.
순박한 백성들에게 법이란 이름으로 우격다짐하며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법집행에
무조건 따를 것을 요구하는 자들을 법관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며
그러한 나라를 법치국가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심한 나라
대 한 민 국 大 恨 民 國
어떤 경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부는 불의와 타협해서 안 된다.
또한, 정부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는 일도 없어야 한다.
역사를 거스르고 국민을 괴롭히는 법이 있다면 바꾸고
법을 기만하고 국민을 타고 앉아 횡포를 부리는 공무원이 있다면
반드시 마땅한 벌을 주어야 한다.
주의 : 이 소설은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법을 가지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온갖 횡포를 부리는 '한심하고 한 많은 나라 大恨民國'에서 이미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기막힌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나라는 '기본이 바로 선 나라 大韓民國'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소설 '한심한 나라 大恨民國'과 같은 황당무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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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大恨民國 4334년
천3백년이나 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천년고찰 가산사의 법당이 불타고,
주지스님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법당이 불탈 때 주지스님의 질타를 받은 신중들이 뛰쳐나오고 --- .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법당에 불을 지르고 죽어간 주지스님의 죽음을 은폐해버린다.
그 후 전국 곳곳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때로는 잔혹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엽기적 살인사건들이 전 국민을 공포에 밀어 넣는다.
범인은 살인현장마다 살해자의 붉은 피로써 印虛 라는 글씨를 남긴다.
허공에 찍는 도장 !
남해 바다의 외딴섬 백도에서 대 참살극이 벌어지며 大恨民國에 대한 선전포고가 공식 발표된다.
大恨民國의 경찰력이 모두 동원되어 범인을 잡으려고 하지만 범인은 미리 범행을 예고하고 수만 경찰이 지키는 가운데 대량살상을 저지르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범행은 갈수록 잔혹성을 띄고 -----.
범인은 정말 수십만 군사를 이끌던 고대 장군의 화신이었나?
인육을 먹는 잔인성과 총탄에 맞아도 죽지 않는 가공할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大恨民國 4334년!
모든 시간은 거기서 정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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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사는 신라 성덕왕 때(3053년)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산 속에 묻힌 암자처럼 작은 절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연곤평 전투에서 순국한 기허당 영규스님의 의승병들이 군사훈련을 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절이다. 대한민국의 오랜 고찰이 거의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인 것처럼 가산사도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며 법주사에 소속되어있다.
그러나 가산사 재산관리인(당시 작은 사찰에 더러 스님 대신 속인을 파견했음)이 죽자 재산관리인의 아들 전상억이란 자가 옥천군청의 공무원(당시 지적정보계장 박기정)의 비호를 받아 가산사를 개인명의로 바꾸고 , 자신의 아비가 창건한 절이라고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가산사는 법적으로 개인재산이 되어버렸고,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담당 공무원이 불법적으로 천년고찰 가산사를 개인 사찰로 둔갑시켜버린 옥천군청에서는 ‘법대로 하라’며 오히려 큰소리였다.(옥천군청에 다른 볼일을 보러 갔다가도 툭하면 개새끼소새끼개민도못한새끼들이공무원이라고 민원실이 떠들썩했는데 그 때마다 조폭처럼 딸딸뭉쳐 덤벼들던 옥천군청 공무원들 때문에 가산사 사무장놈 목깨나 아팠다.
중봉 조헌선생과 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조선 숙종임금 때 지어진 영정각을 문화재로 등록하려고 (건축물대장이 없어) 건축물대장에 등재신청을 했으나 박기정이란 자는 몇 개월이 지나도 등록해주지 않았다. 충청북도 도지사에게 탄원해서 도청직원이 가산사를 방문했을 때 옥천군청 문화공보실장이란 자가 함께 왔는데, ‘우리 직원(뒷날 감사실에서 3자 대면을 했을 때 박기정이라고 밝힘)이 그러는데, 저 건물이 없었다고 했다. 어디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문화재 등록하려다가 전통사찰에서 해제될 수 있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공보실장이 계속 협박해대자 보다 못한 도청직원이 ‘전통사찰은 사찰 이름을 이어가는 것이지 건물 하나가 있고 없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도록 건축물대장부터 해주라고 할 정도였다.
그 공보실장은 나중에 도청 감사 앞에서도 ‘그건 그렇습니다. 문화재가 훨씬 급이 높기 때문에 문화재가 등재되면 전통사찰에서 해제됩니다.’라고 했다가 가산사 사무장으로부터 ‘법주사 같은 데는 문화재가 너무 많아서 주지스님도 몇 개인 줄 모를 것입니다. 법주사뿐 아니라 오래된 사찰마다 문화재가 몇 개씩은 다 있을 것인데, 그러면 그 절들도 모두 전통사찰이 아니겠습니다. 감사님도 한 번 보십시오. 지금 자치행정과장질은 얼마나 잘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1년 이상 문화공보실장을 했다는 사람 입에서 겨우 요런 소리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는 비웃음을 당해야 했다.
대법원판결까지 5년이 넘게 소요되었다.
감사는 박기정한테 중징계 하겠다고 펄펄뛰었지만 포상을 받은 공무원은 한 번은 봐주게 되어있다는 공무원 특수의리 때문에 겨우 3개월 감봉처분에 면사무소로 전출되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당시 관할 재판소(청주지방법원 영동지원) 판사로부터 공무원이 행정처벌을 받았다고 해서 형사처벌을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공무원이 행위를 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다라며, ‘가산사 절 안에다 또 하나 가산사(유령사찰 가산사)를 등록해 준 것은 법리상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지만, 부동산등록번호까지 바꾼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공무원이 임의로 부동산번호를 바꾸어버린 것만 가지고 형사고발하십시오.’하는 조언을 듣고 박기정을 고발했지만 검사가 불기소 처분하고 말았다. 영동지청 후임자가 바뀌었을 때 박기정의 행위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전임 검사가 기소하지 않았으므로 자신도 기소하지 않겠다고 했다.
법정판결 중에도 계속 가산사에 드나들며 갖은 행패를 부리던 전상억이란 자는 ‘거짓말만 하며 법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며 실형 1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 되었으나 ‘능력 있는 놈’답게 한 달도 안 되어 바깥으로 나와 활개치고 돌아다녔다. 1심에서 법정구속 된 자를 (재량껏) 법대로 풀어주는 (2심)검사가 제대로 된 법적용을 할 까닭도 없었으므로 전상억은 2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냈다.
아침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시던 부처님까지 도끼로 찍어버린 주지스님은 입버릇처럼 놈들도 잡아다가 도끼로 찍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옥천군청을 폭파시켜버려야 한다며 자기 같은 중 하나쯤 죽어야 이 나라의 썩은 법이 바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주지스님은 내 형님이다. 나쁜 놈들은 도끼질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고 옥천군청 따위 없어져버리는 것이 나으며 이 나라 법도 제대로 바뀌어야 하지만 그리 된다고 해도 죄 없는 내 형님만 범죄자가 될 뿐이다. 죄 없는 내 형님이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간다면 그 동생인 내가 지금처럼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육을 먹으며 스스로 악마가 되어서라도 이 썩은 나라 이 썩은 세상에 복수해야 하는 것이다.
大恨民國은 안티밥 홈페이지에 연재하다 그만 둔 소설이다. 소설을 쓰면서 악랄한 범죄만 구상하다보니 정말 내 스스로 악마가 될 것 같아서 그만 둔 것이다. 식은 재의 온기마저 없어졌을 때 소설을 완성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미완으로 남을 것 닽다.(물론 이미 발표했던 부분도 더 이상 이곳에 선보이지 않을 것이다.ㅋㅋㅋ)
첫댓글 폭풍전야라고 한다.
내일이 가산사에서 가장 행사인 큰 단군제인데
일할 사람들이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코골이 인허보다 더 코를 골지도 모르고
오던 도중 차 안에서 자다가 새벽에 도착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어쨌거나 누군가 도착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인터넷을 즐길 것이다.
지금까지 소설일기를 읽으면서 님의 소설 오국지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일 먼저 답글을 달았는데... 여기도 가끔 지우개도깨비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고맙습니다.
일기는 심기가 불편해도 소설은 편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허님은 이야기꾼입니다^^
거침없이 걸림없이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 그것은 일곱살 때부터 닦아 온 술 넘기기까지 더해져
술술~ 잘 넘어가나 봅니다. ㅎ
그랑께 오국지는 대박날껴유
오늘 가산사에서 하는 '단군제'에 관심있는분들은 손 걷어부치고 많이 오리라 믿습니다.
저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태풍이 남쪽지방은 바람과 비를 한바탕 뿌릴 모양이던데,
가산사는 낼 정도 올라오라 했으니 비는 안 내릴것이란 것도 알려드립니다~ㅎ
폭풍전야!
하늘의 구름도 인파도 크게 움직이니 그야말로 가산사는
폭풍전야입니다^^
일기 잘 봤습니다
가산사 단군제 역사상 아직 비는 없습니다. 가장 빠른 것이 다음날 오전 10시였으니
갈 사람 가고 치울 것은 대충 치우고 난 뒤였습니다.
태풍영향인지 이번에는 전날 아침부터 바람이 사나웠고
궁리 끝에 마당에 구덩이(마침 공사장에 굴삭기가 있어서)를 파고
시멘트 블럭을 사다가 대충 담을 쌓았습니다.
생긴 모양이 꼭 뭐를 닮은데다가
공사장에서 나온 잡동사니 나뭇조각을 집어넣었으니
더도 덜도 아니고 꼭 쓰레기장 그대로였습니다.
아무튼 쓰레기장 화덕(?) 덕에 안심하고 밤새 불을 피웠고
더러 멋진 작품??이라는 평도 받았습니다.
어제 오늘 야근이라...가까운 옥천에 못가고 서울에 있습니다
못가뵈서 송구합니다 대한민국... !! 슬픈 현실이네요
저는 신이 없는 이유를 바로 그 현실에서 찾았습니다
신이 육의 세계를 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쓸쓸한 가을날...투쟁하신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에구에구, 송구할 것까지는 없고
다음 기회에 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10월에는 단군제를 지내는 곳이 많으니
여기저기 검색해보고 형편닿는대로 참석해도 될 것입니다.
투쟁이라기보다는 너무 억울해서 소리 좀 지른 거지요. 애먼 사람 귀청 아프게.
그냥...사는 사람은 없구만요....다 내밀한 역사가 있고 아픔과 즐거움들이 섞여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그러니 304명의 숫자가 죽은게 아니라 304개의 역사가 허망하게 사라진 것이구요....
여러모로 별고 없으시죠~?
우연히도 최근에 님이 서식하는 인천 지역에서...
하늘의 별달고 여사관 희롱하다 단군이래 개망신한 인사의 성함이...
님의 존엄하신 본명과 너무나 흡사하여....
아닌걸로...
그냥 무사 하신걸로...
별 단 일 없었던 걸로...^^^
@해리슨로드 별이야 달았지만 종류가 전혀 다르지요...ㅋ
정읍칠보에 그런 인물이 살았었군요 ㅎ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가을 밤에 정읍칠보를 찾아간 적이 있지요
칠보댐인지 무슨 댐을 옆에두고 돌아돌아가는 길이 깊고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님의 유년시절 그림과함께 그 밤이 생각납니다
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옥정호 곁에는 풍광 좋은 찻집도 많았을 터인데.... 밤이라서 못봤나봅니다.
가산사 단군제는 잘 치루셨는지요?
일곱살에 술을 배우셨다는 말씀에 깜짝 놀랬지만
구구절절 엮어 내시는 글에 흠뻑 빠져 오늘로 두번을 읽었습니다.
이젠 인허님 그러니까 정수인 작가의 독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쓰시고 계시는 소설의 제목처럼~
"한심한 나라 대한민국"이 아닌 자랑스런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은데
어쩌지요? 비가 그친 날씨가 제법 춥습니다.
그곳 산속에는 더 추울테니 인허님 건강 잘 챙기시길요.
누가 들으면 잡혀갈 소리를!
아, 일곱 살에 술 끊었다니께요, 딱!!
(일곱 살이 되어서도 철들지 않고 술 처먹는 초뺑이 밨슈?)
오늘 아침에 시래기 무우 모종을 옮겨 심는데 한참 추웠습니다.
엄살 많은 놈인지라 미리 두둑히 껴입은 통에 장갑 낀 손만 시린 정도로.....
대청호로 둘러싸인 곳이라 가을에는 거의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합니다.
다음주 초쯤에 울진 가는 길에 부석사에도 영주에도 꼭 들르고 싶은데
어째 멤버 소집이 원활하지가 않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혼자 쓸쓸히 가을 나그네 폼잡게 되는 것이나 아닌지.....
大恨民國 이 단어에 모든게 함축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저도 앞으로 자주 써먹을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부디 제 예감이 틀렸으면 좋겠네요. 일기와 소설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현실이 어렵다고 꿈마저 궁색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大恨民國은 그냥 소설 속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오늘은 어렵더라도
내일은 반드시 밝은나라 하늘백성들의 나라로 바르게 돌아갈 것입니다.
허구인지 실제인지 마구 헷갈리면서 읽었어요. ㅎㅎㅎ
인허라는 이름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담겨 있는지 몰랐네요.
글이 너무 길어서 이틀에 걸쳐 읽었음을 고백합니다. ^^
모두가 정말 일어났던 사실이거나, 까딱 빗나갔으면 반드시 일어나고 말았을 악몽이 되었을 것입니다.
인허는 가산사 주지스님인 맏형이 '니가 허는 짓이 항상 허공에 도장찍는 것잉게!'하면서
지어준 호입니다.
// 근디 그것 말고도 솔직히 고해성사헐 꺼시 마능거 가튼디....
우리나라 이름이 大恨民國 이 될수 있음을 알고 갑니다.
인허님의 머릿속 세상이 궁금해지는
한 사람으로써
그 발상에 박수와 존경을 보냅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