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사람들이 우리의 외양과 가장 많이 닮아있다고 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우리와 같이 우랄 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쓰는 몽골인(Mongolian)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1999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Ulan Bator, Ulaanbaatar)를 여행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많이 닮은 그들의 외양과는 달리 그곳의 자연환경과 지리여건이 우리와는 너무나도 많이 다른 때문인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방식은 크게 다르게 느껴졌다.
몽골반점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도 몽골 종족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그들의 얼굴 기본 모양이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몽골을 떠나기 전 하룻밤을 묵었던 울란바토르 근교의 가쬬르트라고 하는 지역의 몽골 전통 가옥인 겔(Gel)에서 일하던 아낙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난로에 불을 지피고 침대를 매만져 주던 그 여인의 손길이 어찌나 잽싸고 바지런한지 마치 우리 여인네의 솜씨를 보는 것만 같았다. 또 그 아낙네는 보통이 아닌 듯한 눈치가 있어서 무엇인가 우리 일행의 시중을 민첩하게 들어주는 것 같았다.
몽골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인상은 한국에 머물고 있던 한 몽골인 부부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친척분의 가계에서 일을 돕던 보야(Boya)라는 여성과 그의 남편 아무르(Amur)는 일하는 태도가 얼마나 성실하고 꼼꼼한지 그 가계의 아주 중요한 일꾼이 되었다. 학교 교사였던 보야와 회사원이었던 아무르 부부는 과거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이 외국에 나가 열심히 일하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가꿨던 것과 똑같이 그들의 장래를 설계하며 그들에게 닥치는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베트남의 하노이(Hanoi)에서 일 년 동안을 살며 이들도 우리와 닮은 점이 적지 않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생활 모습이나 사고방식이 딱히 우리와 닮았다고 하기보다는 그들이 처해있는 지정학적인 입지 조건이나 생활환경이 우리와 많이 닮아있어서 아마도 그들의 사회․문화적인 여러 모습이 우리의 것과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겨졌다.
베트남은 무엇보다도 지정학적인 면에서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 베트남은 오랜 역사 속에서 아시아와 세계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면서 크기가 작은 나라의 하나로 존재해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베트남은 우리가 오랫동안 앞서 발달한 중국 문화의 강력한 영향 아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받아들여 이를 다시 일본으로 전파하는 교량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처럼 베트남도 우리 못지않게 중국으로부터의 많은 정치․문화․사회적인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 이를 인도지나반도의 여러 나라에 연결해주는 교량 역할을 해주었다.
2세기로부터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800년에 걸치는 오랫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던 베트남은 사실상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우리보다도 더 많이 받은 나라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근세에 들어 다시 150년에 가까운 프랑스의 통치를 받은 뒤 긴 전쟁을 치렀으며, 공산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편 그 과정에서 그 영향의 산물과 흔적이 많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중국의 오랜 영향은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내려있으며 그 모습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그들의 말에서 중국의 체취를 강하게 맡을 수 있다. 한자(漢字)가 우리의 말에 큰 영향을 미친 것과 같다. 현재 베트남 사람들이 쓰고 있는 국어인 베트남어 ‘띠엥비엣(Tieng Viet)’은 프랑스 식민시대에 서양의 유라시안 알파벳을 이용하여 새롭게 만들어진 표음언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언어의 밑바탕을 보면 알파벳으로 표기되는 베트남어의 약 60%가 한자였던 베트남 말의 표기 발음만을 따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알파벳으로 만들어진 베트남어를 꽤 오랫동안 사용해오면서 베트남 사람들은 이제는 거지반 이런 그들 언어의 뿌리를 망각한 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한자 사용이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린 것과도 같다.
우리가 하노이(Hanoi)라고 부르는 베트남의 수도는 그 이름이 ‘河內(하내)’라는 한자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사람들의 이름은 물론 대부분의 지명 또한 그 연원을 찾아보면 대부분이 한자의 이름으로부터 연원한다고 한다. 베트남의 국부로써 그들의 가장 많은 추앙을 받는 호찌민(胡志明 Ho Chi Minh)이나 그가 태어난 생가가 잘 보존되어있는 네안(Nghean) 성의 성도 빈(Vinh) 시 근교에 있는 ‘김리엔(Kimlien)’이라는 작은 마을 이름도 그것이 한자어임을 쉽게 추축할 수가 있다. 호지민은 ‘胡志明’, 킴리엔은 ‘金蓮’을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 기초 베트남어 가르쳐주었던 ‘리 히엔’이라는 젊은 여성은 ‘리’라는 성자만큼은 그녀의 이름이 한자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히엔’이라는 이름 또한 한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우연히 이름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의 지어준 이름에 어떤 특별한 뜻이 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특별한 뜻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 자기의 눈이 유난히 크고 검은 때문에 히엔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순간 아마도 그녀의 히엔이라는 이름은 한자의 玄(현) ‘검을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내 생각이 맞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도 ‘아! 그러냐?’는 놀람과 함께 매우 재미있어하기도 했다.
하노이의 시내에 여러 곳에 이른바 한문화권(漢文化圈)의 모습이 남아있지만, 그중에서도 시내의 중심에 자리한 문묘(文廟) 반미에우(Van Mieu)를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중국 한문화의 모습이 아주 짙게 배어있는 곳으로 우리의 성균관과 같이 공자를 모셔놓은 사당이 있고, 공자의 학문을 중심으로 인재를 양성하던 이 나라 최초의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국두감(國頭監, Quoc Tu Giam)이 있던 터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문묘의 정문을 들어서면 곧 중문(中門)을 지나게 되고 규문각(奎文閣)이라는 한자 현판이 붙어있는 누각을 지나면 영어의 설명으로 보아 Tien Quang Tien ‘천창정(天創井 The Well of Heavenly Creativity)’이라는 연못을 중심으로 좌우에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에 이르는 약 300년의 기간 동안 과거시험에 급제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돌 비석을 볼 수 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비석 하나에는 ‘景興九年戊辰科進士題名記(경흥구년무진과진사제명기)’라는 제목으로 일갑진사(一甲進士) 한명과 이갑진사(二甲進士) 1명, 삼갑진사(三甲進士) 2명의 이름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돌 위에 한자로 새겨진 이름들을 보면 阮, 朱, 吳, 黃, 陳, 李, 張, 鄭 등 우리들의 눈에 많이 익은 성씨가 많이 발견된다.
다시 문 하나를 들어서면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 있는데 사당의 이름은 눈에 띄지는 않지만, 목재로 깎은 것으로 보이는 공자의 상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상 좌우에는 萬世師表(만세제표), 道冠古今(도균고금), 福祈文(복기문), 集大成(집대성), 古今日月(고금일월)과 같은 한문으로 쓰인 현판이 걸려있다. 공자 사당의 뒤쪽에는 당시에는 매우 넓었을 것으로 보이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이었다고 하는 국두감 터가 남아있다. 이 문묘가 있는 곳의 길 이름은 이곳의 이름은 각각 문묘로, 국두감로로 붙여져 있다.
한문화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던 모습이 너무도 잘 나타나 있는 곳은 베트남의 중부지역에 자리한 후에(Hue)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는 드물게 맑은 물이 흐르는 Song Huong ‘향강(香江)’을 끼고 있는 이 도시는 원왕조(阮王朝)의 황궁(皇宮)이 남아있는 곳으로 당시의 베트남 사람들이 얼마나 중국의 문화를 흠모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영화를 누리던 원(Nguyen)왕조가 완벽하리만치 중국의 모습을 본따서 건설한 이 도시는 불행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패망한 왕조의 무덤이 되어버린 데다가 월남전쟁 기간 중 최대 격전지의 하나가 되었던 비운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프랑스 건축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다는 이 황도(皇都)의 모습은 사라진 역사 속에 남아있는 생생한 문화의 현장으로 남아있다. 중국 황궁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여 건설된 황궁(Imperial Palace)은 Dai Noi 대내(大內)라는 큰 구역 안에 태화전(太和殿)이라는 궁궐과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을 본따서 만든, 이름마저 똑같이 자금성(Forbidden Purple City)이라고 명명된 왕족들의 거처 등을 보면 그 규모만이 작다뿐이지 그 모습이 중국의 황궁을 그대로 축소해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안타깝게도 월남전쟁의 포화로 이 고풍스러운 황궁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거나 소실되어 그 터만이 남아있는 곳도 있다. 1994년 이 황궁 지역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적의 하나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으며 이 황궁 주변에는 폭넓은 지역에 걸쳐 왕의 무덤, 사찰, 정원, 박물관 따위의 문화 유적이 여럿 산재해 있다.
1992년 개혁과 개방을 시작한 베트남은 새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모습의 나라로 그 모습을 변화시켜가고 있지만, 그들의 잠재의식 속에 깊게 뿌리내려있는 중국 문화의 모습과 그 영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누구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친근감 또는 연대감과도 같은 느낌을 쉽게 나눌 수 있는 듯했다. 특히 그들이 당했던 중국의 침입과 지배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또 한 가지 베트남 사람들과 우리와의 닮은 점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쌀 재배를 중심으로 하는 도작(稻作) 문화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로 쌀농사를 짓는 베트남의 농촌은 지연 부락이 만들어진 모습도 그들의 생활문화도 우리와 많이 닮아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사람들과의 공동 협업을 통해 농사를 짓는다든지, 소를 이용하여 논을 갈고 써레질을 한다든지 하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그들의 음식문화 또한 우리와 닮아있다. 쌀밥에 채소를 즐겨 먹는 것도 그렇지만, 느억맘(Nuoc Mam)이라고 하는 물고기로 만든 젓갈이 우리의 멸치액젓과도 비슷하다. 넵 모이(Nep Moi)라고 하는 찹쌀 술은 우리의 독한 소주 맛과 비슷하다.
더구나 쌀농사 중심의 농경문화 때문인지 그들의 가족제도와 가정문화도 우리와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과거 우리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는 물론 가족과 친척 간의 두터운 관계와 정을 나누는 것도 그러하다. 논 농사일을 바탕으로 매우 결속된 농촌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도 과거 우리의 모습과 유사하다.
물론 이제까지 내가 느껴왔던 몇몇 가지의 막연한 유사성을 들어 그들이 우리와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 느껴온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닮은 점이라고 하는 것도 이를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트남의 더 많은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내가 경험했던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이 서로를 닮은 여러 자취나 모습들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내가 여행을 하는 중에 다른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의 것과 닮아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2003. 9.)
첫댓글 몽고와 언어 종족적 동질성, 베트남과 문화 환경 역사적 동질성에 대한 관찰기 잘 읽었습니다. 연원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지만 통시적으로 어떻게 관리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는가가 중요한 것 같군요.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인 조선조는 그것을 중국보다 더 철저히 실천하엿고, 우리로부터 유교와 도예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은 일정 부분 우리를 뛰어넘었지요. 전통의 계승 변용 발전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승만과 호치민의 공통점은 독립운동가
였는데 이승만은 자유민주ㆍ반공주의자
였고 호치민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지
요
호치민은 베트남 영웅으로 모셔있고
이승만은 자유민주와 시장경제로
오늘날 부국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업적을 훼손한 안타까운 현실이
지요.
작년 베트남여행은 매우 유익했지요
좋은글 잘 읽었어요
폴란드와 헝가리에 몽고인이 많이 들어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몇 명 데리고 일을 시켰는데 빠른 두뇌와 행동이 흡사 우리 같아 보였어요. 50대 중반 부부였는데 아들과 딸들도 한국과 호주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참 부지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사람처럼 일하고 싶다고 늘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