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강 "노란꽃 축제장"을 찾아
전라남도 장성에서 황룡강 노란꽃 축제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2018년 10월 24일 오전 8시 오토바이로 그곳을 가보기로 했다.
그곳을 찾은 까닭은 노란꽃 축제보다도 실은 팔뚝 하나의 무덤이 있다는 그곳을 가보고 싶어서였다.
'팔뚝 하나의 무덤'을 찾아가고 싶었던 연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수일전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아래에 있는, 한국 인도박물관을 우연한 계기로 방문했다가, 그곳 초이(初荑) 김 양식 관장을 만나는 인연을 가진 게 첫 시발이었다.
김 관장님은 방문했던 우리 <용인 시낭송 문예협회> 임원 일행들에게 “석양이 눈부시어”라는 시집 한권씩을 선물로 주셨는데, 나는 그 시집을 받아들고 서문을 펼치는 순간 “앗, 이럴 수가” 하고 깜짝 놀랐다.
갑자기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문에 나오는 제목이 “팔뚝하나의 슬픈 무덤 이야기”였다.
나의 부친은 6,25사변 때, 기막히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어,할머니께서 갖은 고생하시며 시신을 찾아 헤매시다가, 시신을 다 찾지도 못하고 겨우 팔뚝하나 찾아서, 묘지를 쓰셨던 서글픈 사연이 있다.
그런데 그와 유사하게도 팔뚝 하나의 무덤이 있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꼭 그 무덤을 찾아보고 싶었고, 무덤의 주인공을 깊이 알고도 싶었다.
그리하여 언젠가 그 무덤을 찾아보려니 했는데, 때 마침 그 무덤이 있는 장성에서 큰 축제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그래서 Dㅡday를 2018년 10월 24일로 잡았다.
계속 바쁜 일정들이 겹치기도 했지만, 이날 날씨가 쾌청하고 좋을 거라는 예보 때문이었다.
게다가 장성에서 열리는 “황룡강 노란 꽃 축제”와, 내장산 단풍까지 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니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드디어 10월 24일 아침 8시를 기해서, 장성을 향한 출발의 장도에 오른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긴장된 마음으로, 천안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길을 떠나는데, 짙은 안개로 시야가 통 보이질 않는다.
5m 넘어에 있는 물체는, 아예 분별할 수도 없으리만큼 지독한 안개였다.
그런 안개 속을 뚫고 1시간 남짓 달리니, 공주대교를 벗어나 혈흔천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오늘 황룡강을 찾아가는데, 공주를 지나치며 청룡천과 혈흔천을 만나다니....
황룡강에서 피흘리며 팔뚝을 은장도로 잘라버리고, 죽음 길을 택하였던 기씨부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황룡과 대비되는 청룡천과 혈흔천을 만나니, 기분이 사뭇 묘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다 혈흔천을 막 벗어나니, 짙은 안개가 활짝 걷힌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다가,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눈부신 햇살이 비쳐오니 참으로 기묘했다.
우선 시야가 트이니 살만 했고, 밝은 햇살까지 받으니 너무너무 좋았다.
신바람으로 1시간쯤 더 달리니,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디뎠다는 카톨릭 성지인 나 바위가 나온다.
나바위 성지는 내가 늘 즐겨 찾아, 명상과 휴식을 취하던 곳이기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돌렸다.
그리고선 곧바로 익산과 김제를 지나, 정읍 내장산 단풍 고갯길을 넘어가는 길에 다달았다.
여늬때 같으면, 익산 원불교 성지도 쉬어가고, 김제 벽골제와 인근 관광지도 돌아보았으련만, 오늘은 그럴 겨를 없이 곧장 장성으로 내달린 것이다.
정읍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는 길은 세 갈레 길이 있다.
어느 길을 타던 경관이 빼어나 아름다운 곳이지만, 그 중에도 단풍 고갯길은 내가 가장 즐겨 찾는 가장 아름다운 환상적인 코스다.
내장산 단풍 고갯길과 백양사를 지나, 얼마쯤 더 달리니 황룡강이 보인다.
황룡이란 지명은 본래 중국 사람들만 쓸 수 있는 건데, 어찌하여 이곳에 황룡이란 지명이 생겨 낳는지도 자못 궁금하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네가 천자 국이라 자칭하여, 누런 금 색깔은 황제의 상징이고, 황룡은 곧바로 황제를 뜻하기도 했다.
황룡강에 이르니, 강태공 하나가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고 있었다.
장성읍으로 곧바로 가질 않고, 나는 이 노란 카펫 길을 달리고 싶어졌다.
사실 이 꽃길은 자전거 전용도로이며, 산책로로 조성된 길이었다.
카펫 길을 달리는 기분은 내가 마치 천자라도 된 그런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온통 꽃길로 조성된 황룡강을 타고 들어가니, 바로 꽃 축제장으로 연결되어 들어간다.
노란 꽃 축제장에는 테마별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햇빛, 달빛, 별빛, 꽃빛이란 4개의 정원인데, 그 중 메인은 꽃빛 정원이란다.
이름이야 어찌했건 꽃들의 향연,꽃들의 천국이었다.
백일홍, 황화 코스모스, 해바라기, 핑크 뮬리, 아스타, 송엽 국 등 종류도 다양하다.
해바라기 정원에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던 여인들, 맛있다고 날더러도 먹어보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우리 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 이걸로 우리 점심 대신할까”하면서 깔깔거리는 여인들이 퍽 재미있었다.
10억 송이 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꽃들로 황화 강을 휘덮었다.
들리는 말로는, “평생 볼 꽃 다 본다”는 입소문 듣고,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었단다.
과연 황룡강 꽃 잔치는 진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저기 꽃밭에 뛰어들어, 추억의 사진들 찍어대느라 여념이 없었고.....
황룡강 꽃 축제는 뒤로 자세히 돌아보기로 하고, 우선 급한 게 기씨부인 묘를 찾는 길이다.
기씨부인 묘는, 황룡면 맥동마을 원당 산 뒷동산에 있다고 詩集에서 보아 두었다.
길을 물으니 읍내로 들어가, 홍길동 마을로 가는 길을 찾으란다.
가다가 이정표를 바라보니, 축령산 편백나무 숲길도 나오고, 홍길동 테마파크와 기씨부인의 시할아버지인 하서 김인후의 필암서원도 나타난다.
기실 이곳들은 내가 일찍이 모두 한 두 차례 답사한 곳들이었다.
맥동마을은 필암서원 못 미쳐, 왼쪽으로 접어드는 길로 가라고 일러준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니, 맥동마을 표지석과 필암이라 쓰여진 '붓 바위'가 보였다.
마을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혼자 찾으려니 막막하게 느껴졌다.
기씨부인 정려비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노인 한분을 만났더니, 묘소 있는 곳을 가르쳐 준다.
신도비 있는 곳에 가면 선산이 있고, 그곳에 기씨부인 묘소도 있단다.
하서 김인후선생의 묘소
선산에는 여러 기(基)의 묘소들이 있었는데, 아무리 이 곳 저곳 헤매며 돌아보아도, 정작 찾으려는 묘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산을 벗어나 안쪽마을까지 들어가 보았으나, 기씨부인 묘소는 안 보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맥동 마을로 들어갔다.
마침 일 하시는 한분을 만나 물었더니, 제대로 안내를 해 주신다.
그제서야 간신히 묘소를 찾았다.
기씨부인의 묘소 바로 옆에는 임진왜란 시 순절하셨다는, 시아버님 김 종호선생의 묘소가 있었고, 자신의 팔 무덤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군이신 김 남중선생과 함께 묻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디에도 팔뚝하나의 무덤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도 않았다.
나는 준비해간 막걸리를 잔에 따라 올리며, 잠시 기도를 한 후, 잔에 따른 막걸리를 묘지위에 뿌려 드렸다.
그리고 시 한수 읊어본다.
팔뚝 하나 무덤 앞에서
황룡강 푸른 물은
말없이 유유히 흘러가는데
여기 잠든 님의 넋은
잊을 수 없는 슬픔 간직한 체
통곡의 세월을 무심히 흘려 왔구료
뉘라서 당신의 죽음을
헛 되다 말 하리요
비록 값없이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 길을 가셨지만
님이 가신 그 길은
나는 결코 헛될 수 없다
널리 증언하고 싶소이다
세상에 남부럽지 아니하고
친정도 시댁도
당대에 최고를 자랑하던
명문가 사대부 집안 며느리로
만민이 부러워하고 추앙하던
그리도 존귀한 몸이었건만
시국 잘못 만난 탓으로
남편은 의병으로 출동하고
친정 오라버니들도
의병으로 자진하여 출동하니
양가 모두 쑥대집안 된 터에
어린 두 아들 거느리고
친정 갔다 돌아오는 길에
황룡강에서 마추친 왜놈들에
팔목을 붙잡혀
가슴에 숨긴 은장도 뽑아들어
더럽혀진 팔뚝이라며 잘라버리고
원수 놈들 간담을 서늘케하였으나
견딜수 없는 치욕의 중압감에
스스로 육신 강물에 던져
장렬한 죽음 길 택하였다니
오, 장 하도다
님의 고결한 절개의 죽음
님은 비록
비참한 죽음 길 가셨지만
님이 남긴 그 숭고한 정신
후세인 가슴을 울리고 후벼 파니
님은 결코 죽지 아니 하였소이다
그 언젠가 님이 남긴 발자취
길이 추앙 받는 그날이
기필코 오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묘소를 돌아 나오니, 기씨부인의 절개를 상징하듯 푸른 대나무 숲이 있었고,거기에 처음보는 하얀 꽃 한송이가 피어 있었다.
마치 기씨부인을 만난 듯 싶은,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묘소가 있는 맥동 마을을 벗어나, 하서 김인후 선생을 모신 필암서원을 찾았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선생은 장성군 황룔면 맥동리 출신으로 기씨부인의 시할아버지되시는 분이며, 호남의 문인중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써,수많은 승려들의 시축 말미에 제발(題跋)을 썼던 출중한 문인이다.
그의 본관은 울산, 자는 후지(厚之)이며, 하서(河西), 담재(湛齋)라는 호를 썼다.
어린 시절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후 이황(李滉)과 깊이 교유하였다고 한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기도 하였고,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는 정치적으로 혼란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장성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성균관에서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으며, 노수신(盧守愼)·기대승(奇大升)·정지운(鄭之雲)·이항(李恒) 등과 사귀었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다.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올랐다.
이듬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에 이르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였고. 그뒤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기씨부인의 친정 아버지는 고봉 기대승이라는 분이셨다.
고봉의 자는 명언(明彦),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에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에서 태어났다.
고봉은 7세 때부터 가정에서 수학(受學)하였고. 9세에 《효경(孝經)》을 읽고 손수 베꼈다고 한다.
10세 때는 선친을 따라 산사에 가서 글을 익혔는가 하면. 13세에 이르러서는 《대학(大學)》을 비롯하여 사서를 익히고, 《고문진보(古文眞寶)》와 《사략(史略)》, 《한서(漢書)》를 읽었다.
14세 때부터는 《논어(論語)》와 《서전(書傳)》을 모두 외웠고, 《시전(詩傳)》과 《주역(周易)》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0대 말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10여 년의 이 시기에 고봉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 과거공부보다는 성리학이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도 특히 《주자대전》에 관심을 가졌을 터인데, 고봉의 나이 31세에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했다는 것을 보면, 20대의 고봉이 주자학에 얼마만큼 심취하였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30대의 고봉은 본격적으로 도학 선배들과 교류하였으며,그 가운데서도 특히 퇴계(退溪)와는 사칠이기(四七理氣)에 관한 논변을 통해 조선 주자학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심화하는 데 획기적인 공로를 이룩했다.
먼저 고봉은 32세인 1558년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를 배알하였다.
이렇듯 고봉 기대승은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와 같은 당대의 최고 문인들과 교류하였는데,자신의 딸과 김인후선생의 손자와 혼인을 하게된 것도, 모두 이런 연유에서 기인했던 때문인 것이다.
맥동마을과 필암서원을 돌아보고, 황룡강 꽃 축제장으로 다시 달려갔다.
마음 같에선 청렴의 표상이신 ,박수량 백비 묘소를 한번 찾아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치 않았다.
황룡강 노란꽃 축제는 10월 12일부터 10월 28일까지라니,축제가 장장 16일간이나 전개된다고 한다.
"가고 싶은 옐로우 시티,걷고 싶은 황룡강!"이란 주제로 열린 황룡강 노란꽃 축제장 메인 무대
황룡강의 상징인 황룡의 조형물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가지 가지 먹고 싶은 음식들이,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먹거리 장터가 질펀하게 펼쳐 있었으나, 차분히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었다.
그러기에 아예 길 떠날 때에, 약간의 먹거리를 준비하고 떠났기에 짬짬히 쉬는 시간 허기를 해소했다.
황룡강의 꽃 구경도 대충 한 다음, 서둘러 귀가길에 올랐다.
백양사 입구까지만 갔다가 그냥 되돌아 나오고....
이곳은 여러차례 찾았던 곳이긴 해도,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가려니 아쉬운 발걸음이었다.
구절초가 질펀하게 피어있었다.
이곳에서도 축제 한마당이 펼쳐지고 있었고.....
대충 눈요기로 구경하고서, 내장산 단풍고개를 다시 넘어 부지런히 발길을 재촉했다.
김제, 익산을 거쳐 논산에 이르니, 해는 이미 서산에 떨어지고, 어둠이 짙어오기 시작했다.
보름달이 비쳐오긴 했지만,구름낀 하늘이라 이따금 환하였을 뿐이었고....
가던 길도 안개로 길이 어두워 고생했는데,벌써 어둠이라니 가는 길이 아찔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무사히 천안 인근까지 잘 오다가, 천안 입구에 이르러 아차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정표를 보니 아산으로 가는 표시가 뜨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조금 가다보면 천안가는 길이 나오겠지 했는데,아니었다,고속도로로 올라타 있었던것이다.
일반 국도에서 고속도로로 올라탄 것이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이걸 어쩌나 하고 조금 더 가다 보니, 남천안으로 빠지는 톨게이트가 나타났다.
그래 다행이다 하고 톨게이트를 벗어나, 두 갈레 길이 보여 큰 길로 들어서 가는데 그 길이 다시 고속도로였다.
한참을 달리다가 졸음 쉼터에서, 유턴을 시켜 역주행을 시도했다.
역주행으로 나가려고 한참 달리는데, 순찰차 2대가 요란스레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온다.
우선 운전면허 여부를 물어보더니, 음주측정까지 하지않는가!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서는, 순찰차가 에스코트를 해주는 가운데 무사히 톨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집에 도착하니 정확히 8시 20분전이다.
그러고 보니, 이날 오토바이를 탄 시간이 장장 11시간 40분이 소요된 셈이다.
카메라도 이상이 와서, 병원에 가야할 입장이 되어, 글을 곧바로 올릴수도 없게 되고 말았었다.
장성 황룡강 꽃 축제장과, 기씨부인 묘소를 찾았던 이날의 여행은, 참 멀고도 힘든 그러면서도 값진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