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장
만락궁(萬樂宮)
협서성(陜西省)의 천부산(天浮山),
태고의 신비와 정적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다.
그것은 칼날처럼 예리한 천애(天涯)의 절봉(絶峰)으로 이루어져 인간의 침입을 거부하는 험악거산(險惡巨山)이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치솟은 기암절봉들은 마치 속세의 산이 아닌 것 같기에 사람들은 천부산이라 불렀다.
밤(夜),
대지는 숨을 멈추고 천공에 외로이 걸린 만월(滿月)은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천부산에서 가장 높은 절봉인 신령봉(神靈峰),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어 신령봉이라 불렀다.
또한,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는 만년빙설(萬年氷雪)로 뒤덮인 곳이었다. 영원히 깨지지 않을 듯한 고고한 산중의 맥박과 함께…
한데,
이 곳 신령봉 정상에 얼음으로 된 넓은 장방형의 공지(空地) 위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한 인영이 있었다.
그는 백설과 동색(同色)인 듯한 백의(白衣)에 관옥같은 소년서생이었다.
백의의 소년서생,
그는 석상(石像)처럼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쌔… 애… 앵―
몸을 얼려 버릴 듯한 매서운 한풍(寒風)이 눈보라와 함께 그 소년의 얇은 백의를 휘날렸으나 그는 미동도 않은 채 단정히 앉아 있었다.
눈부신 백설은 월색(月色)에 의해 싸늘한 은백색(銀白色)으로 빛을 발했다.
만년적설(萬年積雪)은 뿌려지는 쇄광(碎鑛)을 반사하며 신령봉을 희미하게나마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 때,
"제 시간에 와 주었군!"
백의서생은 두 귀를 쫑긋거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얼마 동안 이 태고의 정적이 지켜질 것인가…
한 시각… 두 시각…
두어 시각이 흐를 동안 묵상(默想)에 잠겨 있던 서생이 눈을 뜨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두 분, 언제까지 숨어 있을 것이요?"
찰나,
휘… 이익!―
휘익!
예리한 파공성과 함께 두 인영이 연기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황의(黃衣)와 청의(靑衣)의 중년서생이었다.
두 중년서생은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백의서생을 주시했다.
그러던 그들의 시선에 의혹의 빛이 짙게 어리기 시작했다.
머리에 유건을 쓴 단정한 오관의 중년서생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네가 음양마신을 통해 노부에게 서신을 보낸 장본인이냐?"
아… 아―!
그의 어조는 마치 만년빙굴에서 흘러나오는 듯 싸늘했다.
또한 그의 단정한 얼굴에는 한 겹 얼음이 언 듯 냉랭할 수가 없었다.
백의서생은 두 눈에 가벼운 웃음을 담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 냉면무심객!"
"으―음!"
냉면무심객이라는 황의중년서생은 침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청의중년서생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소협이 노부도 불렀소?"
그의 어조는 냉면무심객과는 정반대로 온화하고 따스했다.
백의서생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소. 광심불심객!"
"아!…"
광심불심객이라는 청의중년서생도 가벼운 탄성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잠시 묘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하나, 강호인들이 그 두 중년서생의 명호를 들었다면…
아마 오금이 저려 까무러치지 않았을까?…
무림신비이객(武林神秘二客)―
냉면무심색(冷面無心客)―
광심불심객(廣心佛心客)―
그들의 출신문파나 내력은 전혀 강호에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 둘의 가공할 무공과 각기 상반된 특성만을 전해 들었을 뿐…
냉면무심객의 잔혹한 살수와 추호의 인정도 베풀지 않는 냉심(冷心)을,
그리고 광심불심객은 온화한 성품과 불심의 자비로움으로 웬만해서는 살생을 안한다는 것―
(으… 음! 이 소년서생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그 개세의 음양마신이 서찰 심부름을 했단 말인가?)
이객(二客)은 똑같이 깊은 회의에 잠겼다.
백의서생은 이객의 의혹에도 아랑곳없이 창공의 만월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광심불심객이 헛기침과 함께 궁금증을 터뜨렸다.
"험험… 소협의 정체는 무엇이요?"
백의서생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맺혔다.
"광마수라생!"
"광… 마… 수… 라… 아앗!"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해 하던 이객은 순식간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아…
광마수라생 기영천, 그는 음혼곡에서 수천의 마두 연합 세력과 육합맹의 천라지망(天羅地網)에 걸려 비참한 종말을 고하지 않았던가?
수천의 마졸들을 처참히 도륙하고…
그리고…
그를 구하기 위해 산화(散華)한 삼천여 한녀의 죽음은 무림 비사(悲事)가 되어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한데,
그 광마수라생이 신령봉에 신비스럽게 앉아 있으니…
귀신(鬼神)?
이객(二客)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냉면무심객이 차가운 음성을 토했다.
"흥! 정녕 네가 광마수라생이냐?"
기영천의 두 눈에 엷은 웃음이 어렸다.
"냉면무심객, 말버릇부터 고쳐야겠소!"
"으… 으! 네놈이…"
냉면무심객이 두 눈을 길게 찢으며 차가운 얼굴에 두꺼운 얼음을 깔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등에 매달린 고검(古劍)에 손을 얹었다.
일촉즉발의 전운(戰雲)―
검신(檢神)―
강호인들은 그 단어가 냉면무심객 때문에 존재한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런 그가 검에 손을 댔으니…
하나 기영천은 여유 있게 고개를 흔들며 담담히 말했다.
"당신은 이미 심도(心道)가 흐트러졌소!"
(아… 고수로다!)
냉면무심객은 내심 탄성을 터뜨리며 손잡이를 잡은 우수가 미미하게 떨렸다.
기영천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쯧쯧… 심도가 곧 검도(劍道)라 했거늘… 심신의 동요를 억누르지 못하다니…"
"으… 윽!"
냉면무심객의 차디찬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지며 무거운 신음을 토해 냈다.
기영천은 맞은편 봉우리를 그윽히 내려다보며 역시 담담히 입을 열었다.
"냉면무심객, 저 봉우리를 검으로 벨 수 있겠소?"
냉면무심객은 그가 가리키는 맞은편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순간,
"이… 이놈이… 노부를 희롱하려 들다니…"
냉면무심객의 차디찬 냉면(冷面)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시령봉 맞은편에 교교히 서 있는 절봉,
중앙 봉우리에 뭉게구름이 걸려 운치를 자아내고 있었다.
한데,
저러한 절봉을 검으로 두 쪽을 낼 수 있겠느냐고 묻다니―!
광인(狂人)의 광오(狂惡)!―
그러나 그 말을 한 당사자인 기영천은 무심히 그 절봉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세존께서 뜻이 있으면 거기에 가 있으리라 했거늘…"
"허억! 베… 었다."
냉면무심객은 경악의 비명을 토하며 힘없이 쳐들었던 우수를 내렸다.
그의 싸늘한 안면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며 흘러내렸다.
마치 그의 차가운 냉면(冷面)을 녹이기나 하듯이…
뜻이 있으면 거기에 가 있으리라!
마음이 통하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심오한 해오(解悟)―
기영천은 그 진리를 검도에 응용했으니…
그것이 바로 세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의거(意劍)의 심도(心道)가 아니던가!
냉면무심객은 전신을 세차게 떨며 입을 실룩거렸다.
"당… 당신이… 원하… 는 것이 무엇이오?"
그는 기영천의 호칭을 바꾸어 부르고 있었다.
그는 어느덧 마음 깊숙이 굴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영천은 그를 웃음띤 얼굴로 주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를 도와주시오!"
순간,
냉면무심객의 싸늘한 두 눈에 수정처럼 맑은 눈물이 맺히는 것이 아닌가!
"주인님!"
그는 두 무릎을 떨썩 꿇으며 심장이 튀어나올 듯 커다랗게 외쳤다.
아!…
그는 지금까지 너무 외로운 고수였다.
기영천의 두 눈에 격동의 물결이 일었다.
"고맙소. 당신과 별 마찰 없이 일을 매듭지어 기쁘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멍하니 자신과 냉면무심객을 번갈아보는 광심불심객에게 멎었다.
광심불심객은 안색이 만변하여 황망히 물었다.
"본인에게도 냉면무심객에게 요구한 내용과 동일한 것을 원하시오?"
기영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광심불심객!"
"소협이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오?"
"살인(殺人)!―"
"으―음!"
광심불심객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토하며 입을 꽉 다물었다.
"왜, 싫소이까?"
기영천은 예상이나 한 듯이 되물었다.
광심불심객은 내심 굳은 결심을 하며 단호히 말했다.
"그런 일에 동참(同參) 할 수는 없소이다!"
기영천은 두 눈에 알 수 없는 이채를 띠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 옛날 석가세존께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說法)을 펼칠 때 이런 말을 하시었소."
"…"
"너희들 중 그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느냐?"
"오오…"
광심불심객은 자신도 모르게 경이의 탄성을 토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아!
세존의 그 심오한 가르치심,
너희들 중 그 누가 지옥에 들어가랴!
그것은 바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뜨거운 희생과 봉사를 하라 이르신 뜻깊은 가르침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억겁(億劫)을 그 누가 짊어지겠냐는…
광심불심객은 오뇌(懊惱)의 눈빛으로 기영천을 주시했다.
"하나… 살인만이…"
그의 음성은 심하게 떨려나왔다.
기영천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은 내가 일을 하는 데 있어 무고하게 죽는 생명이 없게 도와달라는 것이오!"
"주인님!"
광심불심객은 공손하게 무릎 꿇고 있는 냉면무심객의 옆에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기영츤은 장방형의 얼음덩어리 위에서 그들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휘… 이… 잉!
싸늘한 고풍(孤風)이 만설(萬雪)을 휘날리며 세 사람을 스쳐 지나갔다.
쉴새없이 은광(銀光)을 뿌려내는 청공(天空)의 만월(滿月)…
기영천은 두 눈에 싸늘한 한광을 담으며 품 속에서 한 깃발을 꺼내 펼쳤다.
펄… 럭… 펄… 럭!
만월의 달빛 아래 찢길 듯 휘날리는 깃발!
아!…
바로 참혼령기였다.
"아…"
이객(二客)은 동시에 환호성을 터뜨리며 경이의 시선으로 허공에서 펄럭이는 참혼경기를 바라보았다.
기영천은 휘날리는 참혼령기를 주시하며 잔잔한 음성을 토했다.
"앞으로 본인은 이 기주의 신분으로 행동할 것이오."
이객은 길게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말했다.
"기주를 뵈옵니다."
기영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객을 응시했다.
"냉면무심객, 그대를 초혼령에 임명하겠소."
"분부 받자옵니다. 기준!"
"광심불심객, 그대는 구혼령(求魂令)에 임명하겠소!"
"분부 받자옵니다. 기주!"
휘… 이… 잉!
예리한 한풍이 그들의 의복을 휘날렸다.
만월은 무엇을 예감한 듯 구름 속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거세게 휘몰아칠 피의 전주(前奏)-
광명(光明),
시뻘겋게 타오르는 태양은 대지에 골고루 광명을 비추었다.
그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기영천은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걷고 있었다.
풍류를 즐기는 팔자좋은 기생같이…
휘… 이… 잉…
가벼운 산들바람이 오솔길 주위에 빽빽이 늘어선 수목의 잎사귀를 간지럽히며 비달결처럼 부드럽게 지나갔다.
지… 지… 배배…
이름모를 예쁜 새가 이 나무 저 나무로 날아 앉으며 청아하게 울고 있었다.
기영천은 담담히 주위의 경관을 감상하며 걷고 있었다.
그 때―
"에―잇!"
차―차―창!
컬컬한 호통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기영천의 귓전을 간지럽혔다.
(으―응? 이 목소리는 양마신의…)
그는 미세하게 들려오는 컬컬한 음성의 임자가 양마신임을 직감하고 번개같이 신형을 날렸다.
휘―익!
그는 어기비행술의 극치인 표표양극신법을 펼쳐 섬전처럼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쏘아갔다.
"크―으하하하… 이놈들, 우리 공자님만 살아계셨어도…"
크―르―르릉!
양마신의 광소와 굉음이 그의 신형을 더욱 재촉했다.
휘―이―익!
기영천은 연기처럼 한 수목에 내려앉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아!―
기영천의 정면으로 펼쳐진 십 장 방원의 공지(空地)―
거기에 수십 구의 시신이 처참히 짓뭉개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음양마신은 전신에 선혈을 뒤집어쓴 채 미친 듯이 쌍장을 쪼개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이놈들! 덤벼라, 덤벼!"
"후후후… 이놈들!"
음양마신은 대갈을 터뜨리며 미친 듯이 달려드는 백여 명의 적의인을 도륙했다.
그 처절한 도륙장을 두 남녀와 다섯 명의 괴노(怪老)가 관전하고 있었다.
두 남녀는 인간 지옥의 비명이 들리는 것도 아랑곳없이 음탕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
우―르릉―꽝꽝!
"카―아―악!"
"으―헉!"
처절무비한 단말마의 비명을 감상이나 하듯 바라보며 두 남녀는 노골적으로 상대편을 애무하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의 음침한 청년은 자신의 품에 찰싹 안긴 풍만한 삼십대 미부의 젖가슴을 마구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삼십대 미부는 색기(色氣)어린 요기스런 눈길로 처참한 인간 도살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자세로 청년에게 완전히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었다.
청년은 그녀의 사타구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미부는 허리를 비틀며 청년의 귀에 속삭였다.
"좀더…"
청년은 그녀의 계곡 속에 있는 두 개의 문을 손으로 마구 열고 범했다.
미부는 경련하듯 둔부를 요동하며 단내나는 신음을 토했다.
여차하면 장소 불문하고 교미를 붙을 태세였다.
그 뒤로 무표정한 다섯 명의 괴노가 쭉 나열해 있었다.
(으―음! 어찌 음양마신이 저 정도의 무리에 쩔쩔맨단 말인가?)
기영천은 탕남탕녀의 음란한 행위에 살기가 끓어오르는 것을 참으며 치열한 격전장을 예의 주시했다.
슈―우―웅―
꽈―르―릉…
"카―아―악!"
음양마신의 극음극염장은 허공을 산산이 부수며 적의인들을 도륙했다.
하나, 그것은 그들이 펼치는 무공에 비해 극히 적은 숫자였다.
(으―음… 광오기절진! 그럼 그렇지…)
격전장을 자세히 살피던 기영천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음양마신에게 전음을 펼쳤다.
"음양마신!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천방(天方)을 밟으면서 우측 곤(坤)을 때리시오. 그리고…"
미친 듯이 쌍장을 날리던 음양마신은 돌연 들려오는 전음에 어리둥절하여 외쳤다.
"누구요?"
음양마신이 갑자기 커다란 외침을 터뜨리자 미친 듯이 달려들던 적의인들이 신형을 멈추었다.
음탕한 행위를 자행하던 탕남탕녀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이놈들아! 뭘 그리 멍청히 서 있느냐?"
자시 멍하니 음양마신을 주시하던 백여 명의 적의인들이 재차 흉맹하게 음양마신을 덮쳤다.
하나, 자의인들은 불규칙적으로 덮쳐드는 듯했으나 그 속에는 무한한 기(氣)가 내포되어 있었다.
음양마신은 전신을 짓쳐오는 흉맹한 적의인들의 공격에 쌍장을 쪼개 냈다.
슈―우―웅
꽝! 꽝!
"커―억!"
또다시 처절한 비명과 허공에 꽃피는 혈화.
그 때,
"뭣들 하시오? 어서 천을 밟고 곤을 때리고 천룡승천(天龍昇天)의 신법을 펼치시오!"
음양마신의 귀에 익은 음성이 답답하다는 듯 들려왔다.
음양마신은 무의식중에 위맹한 쌍장을 쪼개며 전음이 일러주는 대로 신형을 날렸다.
순간,
휘―이―잉―
꽈르르―릉!
"카―아악―악!"
"크―악!"
추풍(秋風)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적의인들은 시꺼먼 핏덩이를 토하며 허공에 날렸다.
아!―
그토록 악착같이 달려들던 백여 명의 적의인들은 심장이 터져 처참하게 땅바닥에 나뒹굴어져 있었다.
음양마신은 멍청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럴 수가…
자신의 쌍장에 미친 듯이 날뛰던 적의인들이 이리도 무참히 쓰러지다니…
그 때,
"음양마신, 오랜만이요!"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한 백의서생이 연기처럼 나타났다.
중인들은 홀연히 나타난 백의서생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찰나,
"아… 공자님!"
"흑흑흑… 공… 자님!"
음양마신이 노안(老眼)에 뜨거운 눈물을 담으며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공자… 라니?"
음란한 행위를 자행하던 탕남탕녀와 그 뒤에 늘어서 있던 다섯의 괴노(怪老)가 의문이 가득한 눈길로 그들을 주시했다.
백의서생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두 분, 일어나시오!"
"흑흑흑… 공자님!"
음양마신은 나직이 흐느끼며 천천히 일어났다.
백의서생은 천천히 뒤돌아선 후 자신을 주시하는 탕남탕녀와 다섯 명의 괴노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음침한 눈빛을 빛내던 이십대의 청년이 궁금한 듯 물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백의서생은 묵묵히 허공을 주시하며 귀찮다는 듯 내뱉았다.
"기영천!"
"허―억!"
"광… 마수… 라생!"
탕남탕녀와 다섯 괴노는 헛바람을 토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광마수라생 기영천!
바로 지옥(地獄)의 사신(死神)이 아닌가?
그들의 시선에는 짙은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기영천은 담담히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작하시오!"
순간,
휘―익!
퍽!
하나의 깃발이 땅 속 깊숙이 꽂히며 바람에 휘날렸다.
―참혼령기―
"참… 혼령… 기!"
탕녀, 탕남, 그리고 괴노들은 멍하니 깃발을 바라보았다.
그 때,
휘―이익!
경쾌한 파공성이 들리며 두 황의, 청의, 중년서생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 두 명의 중년서생은 공지에 나타나자마자 기영천의 좌우에 공손히 시립했다.
"이객! 시작하시오. 단, 죽이지는 마시오!"
기영천이 무심히 내뱉자 이객은 소리없이 신형을 날렸다.
"네… 네놈들은 누구냐? 이 혈신옥랑에게 감히…"
음산한 청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급히 외쳤다.
"혈신옥랑? 그 자는 절대 죽이지 마시오!"
기영천은 생각을 굴리며 나직이 외쳤다.
"알겠소이다. 기주!"
이객은 대답을 함과 동시에 귀신처럼 그들의 좌우를 공격했다.
슈슈슈슈슈슈―
파파파파팍!
"허―억!"
"으욱!"
혈신옥랑과 탕부, 그리고 괴노들은 손 한 번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마혈을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객은 그들을 무더기로 잡아 끌고 기영천의 앞에 무릎을 꿇리었다.
기영천은 자신 앞에 비통한 표정으로 꿇어앉아 있는 그들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집행하시오!"
냉면무심객은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들고 겉장을 넘겼다.
바로 참혼록이다.
냉면무심객은 냉혹한 눈빛으로 다섯의 괴노를 주시하며 싸늘히 물었다.
"네놈들의 명호는?"
다섯의 괴노는 흰자위가 더 많은 두 눈을 깜박이며 더듬거렸다.
"네… 놈은 대체 누구냐?"
"냉면무심객!"
"허―억!"
괴노들과 혈신옥랑 그리고 탕부는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기영천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지체 마시오!"
"예, 기주!"
냉면무심객은 황망히 대답하며 냉소를 터뜨렸다.
"흥! 네놈들의 명호는?"
"추… 혼오객!"
"으―음! 추혼오객이라…"
냉면무심객은 책장을 뒤적이다 어느 장에 가서 멈추었다.
"추혼오객, 이놈들은 살인, 강간을 수없이 저질러 무림인의 통분을 샀으며…"
추혼오객은 냉면무심객이 자신들의 죄상을 줄줄이 이어가자 사색이 된 얼굴로 두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 해서 이 다섯 놈은 참혼령 일조인 분시에 해당하는 줄 아뢰오!"
"부… 분시라니?"
추혼오객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기영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광심불심에게 물었다.
"구혼령은 어찌 생각하시오?"
"저들은 죽어 마땅하나 시체만큼은 온전하게 처리하는 것이…"
광심불심객의 말에 기영천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분시로 하시오!"
"예, 기주!"
냉면무심객은 간단히 대답한 후 고검에 손을 얹었다.
순간,
번―쩍!
"카―악!"
"아―아―악!"
전광석화처럼 그의 고검이 허공을 누비자 추혼오객이 일제히 처절무비한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 냈다.
살점과 뼈가 갈가리 찢겨져 형태도 찾을 수 없는 추혼오객의 시신,
하나, 기영천이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추혼령, 분시의 뜻을 자세히 모르는 모양인데… 저런 분시가 아니오!"
"하오면 어떤…"
냉면무심객이 의아한 듯 물었다.
기영천은 두 눈에 엷은 웃음을 담으며 말했다.
"분시라 함은… 살점이 토막토막 부서질 때까지 목숨이 붙어 있어야 하오!"
아…
목숨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분시(分屍)를 하라니!
냉면무심객조차 멍하니 기영천을 바라볼 뿐 말을 잊었다.
하나, 기영천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한 번은 경험삼아 한 일이고… 저 혈신옥랑이라 하는 놈은 볼 것도 없소. 분시로 하시오!"
"으―윽! 네놈을 우리 아버님이 그냥 둘 줄 아느냐?"
혈신옥랑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하나,
냉면무심객의 고검은 망나니가 칼춤을 추듯 허공을 수놓았다.
그러자,
"카―악!"
혈신옥랑은 피를 토하는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까뒤집었다.
아…
그의 온 몸은 냉면무심객의 고검에 의해 조각조각 떼어지고 있었다.
"아―아―악!"
혈신옥랑은 악귀의 울음을 터뜨리며 혼절하고 말았다.
드디어 그의 전신은 뼈만 남긴 채 조각조각 떨어져 나갔다.
다만 가슴에 묻은 심장만이 미미한 움직임이 있을 뿐…
기영천은 만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소. 하나 앞으로 분시를 할 때는 천령혈에 옥침(玉針)을 박아 형이 끝날 때까지 정신을 잃지 않게 하시오!"
"예, 예!"
냉면무심객은 황망히 대답하며 전신을 파르르 떨었다.
광심불심객은 미간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나직이 물었다.
"기주! 저 자는 심판도 안하고…"
돌연,
기영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침중하게 말했다.
"혈신옥랑, 저 자 때문에 한 귀재가 덧없이 사라졌소?"
"…"
"한 마디로 미꾸라지가 용(龍)을 잡아 먹은 격이요. 죽어 마땅하오!"
그의 어조는 끝에 이르러 강렬한 한기를 담았다.
"아… 천형!"
기영천은 내심 천하제일도의 영상을 그리며 나직이 불러보았다.
그러던 기영천은 다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초혼령, 시작하시오!"
"예, 기주! 네년의 이름은?"
냉면무심객은 기영천에게 포권을 취한 후 탕부에게 싸늘히 물었다.
탕부는 백납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멍청히 기영천을 바라보았다.
찰나,
"오호호호호… 죽여라! 이 새끼야, 나는 만락궁 궁주다!"
그녀는 옆에서 벌어지던 처참무비한 광경에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어찌 인간이 정신을 차린 채 분시(分屍)를 당한단 말인가?
"오호호호호… 어서 죽여라, 죽여!"
만락궁 궁주는 미친 듯이 소리치며 두 눈을 까뒤지었다.
냉면무심객은 얼굴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참혼록을 뒤적였다.
"이 만락궁 궁주는 일대 요녀로써 보음술로 숱한…"
"그람! 초론령, 잠시 멈추시오!"
옆에 있던 기영천이 갑자기 소리치며 만락궁 궁주를 세세히 살폈다.
"산화선녀를 찾는 길이 이렇게 쉽게 올 줄이야…"
기영천은 무엇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희미한 산,
바로 기영천이 향하던 몽산(夢山)이었다.
만락궁이 있는…
잠시 후,
기영천은 본래의 신색을 되찾으며 미친 듯이 떠들어 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호호호호호… 어서, 어… 서!"
그녀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지게 울부짖었다.
거의 정신이 돌기 일보직전이었다.
휘―이―잉!
한줄기 스산한 바람이 역겨운 피냄새를 풍기며 더욱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호호… 흑흑흑… 깨끗이 죽여다오. 제발…"
만락궁 궁주의 흐느낌은 갈가리 찢겨진 시신들의 역겨운 피냄새와 더불어 괴기(傀奇), 공포스러웠다.
냉면무심객은 기영천의 눈치를 살피며 결론을 내렸다.
"… 하여 이 계집의 죄상은 분시로 하심이 마땅…"
"알겠소!"
짧은 대답과 함께 기영천은 두 눈에 기이한 빛을 담았다.
"내 특별히 깨끗이 죽을 기회를 주겠다!"
"흑흑흑… 저… 정말이냐?"
만락궁 궁주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기영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물었다.
"단 한 번의 기회다. 혈천교의 총단은?"
"그… 그건…"
만락궁 궁주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말을 더듬었다.
기영천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소곤거리듯 말했다.
"다시 이야기 하겠다. 혈천교의 총단은?"
"어차피 죽음은 동일한 것이오. 고통을 수반한 죽음을 빼고는…"
만락궁 궁주는 급기야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렇지… 혈천교의 총단은 한천봉에 위치하고 있다. 약속대로 편한 죽음을…"
기영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냉면무심객에게 시선을 던졌다.
"초혼령, 이 여자는 내가 처리하겠소!"
"예, 기주!"
냉면무심객은 공손히 대답하고는 한쪽으로 비켜섰다.
만락궁 궁주는 허탈한 듯 두 눈을 내리감고 전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스―르―륵
기영천은 비검을 풀며 천천히 쳐들었다.
허공에 쳐들린 비검은 햇살에 더욱 영롱한 서기를 발산했다.
기영천은 비검을 쳐든 채 묵묵히 그녀를 주시했다.
무릎이 꿇린 채 가련히 떨고 있는 삼십대의 풍만한 여인,
밤마다 사내를 황홀하게 만들었을 풍요로운 육봉(肉峰),
그리고 치마가 걷쳐 올라가 은은히 드러난 그녀의 하반신,
하나, 지금 이 순간은 보잘것없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기영천의 뇌리에 한녀들의 죽음이 떠올랐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수천여 여인이 초개같이 목숨을 던졌다.
그는 뇌리에 떠오르는 처절한 광경을 지워 버리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찰나,
쌔―애액!
허공에 고정되어 있던 비검이 서기를 뿌리며 쾌속한 일섬(一閃)을 그었다.
"…"
중인들은 의아한 듯 기영천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만락궁 궁주의 전신은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녀의 고운 이마에 실날처럼 가느다란 혈선이 미세하게 그어져 있을 뿐…
죽음을 기다리던 만락궁 궁주는 초조한 듯 눈을 떴다.
"왜… 빨리 안 죽이죠?"
"당신은 사면(赦免)이요! 갑시다!"
기영천은 비검을 갈무리하고 돌아서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 예예!"
뜻밖의 사태에 어리둥절하던 이객, 그리고 희열과 알 수 없는 영문으로 사태를 주시하던 음양마신은 황급히 대답하며 기영천의 뒤를 따랐다.
"잠깐! 왜… 안 죽이죠?"
만락궁 궁주는 두 눈을 크게 뜨려 물었다.
그녀는 진정 죽고 싶은 것일까?
아니었다.
그녀는 도저히 상상도 못했던 사태에 넋을 잃은 것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기영천이 자리에 멈추며 나직이 뇌까렸다.
"당신은 음혼곡 한녀들의 죽음을 아시오?"
"그것과 무슨 상관이…"
만락궁 궁주가 의아한 듯 물었다.
기영천은 예의 뇌까리듯 중얼거렸다.
"그녀들은 진정 한많은 여인이었소. 그리고 당신도 여인이요. 한많은…"
"아…"
만락궁 궁주는 멍하니 기영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뇌리에 갖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열 살 때부터 마두에게 양육되며 길들여졌던 자신,
그리고 밤마다 육욕(肉慾)의 광란에 몸을 떨던 자신,
아!―
이제는…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며 삶의 뜻은 무엇인가?
만락궁 궁주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많은 생각을 짧은 시각에 했다.
그녀는 다시 기영천을 찾았다.
기영천은 일행과 함께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공자님… 잠깐!"
멀어지던 기영천은 뒤돌아 서며 맑은 두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요?"
만락궁 궁주는 무릎 꿇은 자세를 바로 고치며 나직이 물었다.
"공자님… 이 계집이 할 일이 없을까요?"
그녀의 두 눈과 어조는 촉촉히 젖어 있었다.
기영천은 그녀의 물음을 예상하지 못한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것을 묻는 까닭이 무엇이요?"
"이 계집도 한많은 여인이기 때문이지요."
"으―음!"
기영천은 나직한 침음을 토하며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그녀의 물음,
그것은 자신의 재생의 길을 묻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며 나직이 물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요?"
그녀는 회상에 젖는 듯 두 눈을 깜박였다.
"어릴 때 부모님은 저를 소설이라 불렀었지요."
깜박이는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설(昭雪)… 좋은 이름이요. 소설, 이 세상에는 아직도 한녀들이 많소이다!"
기영천이 나직이 중얼거리며 다시 돌아서서 걸어갔다.
이객과 음양마신은 숙연히 고개를 숙이고 공손히 그의 뒤를 따랐다.
만락궁 궁주, 아니 소설은 눈물어린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공자님, 알겠어요. 제가 할 일을…"
그녀의 어조에는 꺾일 수 없는 어떤 강한 결의가 숨어 있었다.
<제4권에 계속>
첫댓글 잼 납니다
즐감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