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모든 빛과 색 [조용미]
우리가 보는 모든 색이 모두 幻은 아닐 것이다
저 물과 구름과 나무의 색이 모두 환이라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럼 지구의 밖에 있는 것들은, 빛나는 감마선이 철사
줄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 이 우주는
거대한 별의 뿌리가 내뿜는 뜨거운 에너지와 그 빛은 또
뭐란 말인가
여기 내가 편애했던 색과 빛이 있다
인디고 프러시안블루 코발트블루 세룰리언블루 피콕블
루 울트라마린 그리고 적외선 자외선 감마선
붉음의 바깥에 있다는 것 보라의 바깥에 있다는 것
바다의 저 너머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슨 빛과 색
이 별처럼 많단 말인가
큰 접시안테나로 우리가 저 너머에 있는 어떤 우주의 파
장을
그 미세한 빛과 색의 기미를 한 올 한 올 잡아낸다면 감
각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환일까
이 세상의 바깥에는, 푸른 밤의 공기가 숨기고 있는 수
많은 빛들은
우리가 보는 빛과 색은, 어둠을 만날 때마다 새벽
이 올때마다 변형되는 이 세계는
- 나의 다른 이름들,민음사, 2016
두륜산 소기 [조용미]
빗소리가 작아지고 있다 밤새 높았다 낮았다 하던 빗방울의 음계가 머리맡을 오래 어지럽혔다 문을 여니 수련이 한 송이 피어 있는 연못 저쪽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금방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리들은 다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뿌옇게 비안개가 내려오고 있다 비안개는 대숲의 한쪽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기다 바람이 몰아치면 소리를 퍼뜨리며 아무렇게나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진박새가 보라빛 꽃송이가 둥그렇게 피어 있는 수국 속을 포동포동 들락거리고 있다
몸을 가다듬는 것이 마음을 깨침만 하겠는가, 하겠는가…… 간밤의 글을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섞여버리는 산속, 계곡의 급류는 온갖 소리를 내며 흐른다 그날 절벽 구멍 난 바위틈에서 들은 목탁 소리는 내가 보지 못한 물거품이 세운 절,
흰 거품을 일으키며 쏟아지는 물소리에서 나는 여러 날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이냐 개안을 하듯 세상이 새로워지는 일은, 한 우주와 한 세계를 다시 얻는 일은 저 물소리에서 목탁소리를 듣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물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고요하다
-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문학과지성사, 2009
장미차를 마시며 [정끝별]
시 쓰는 후배가 인도에서 사왔다며 건넨 장미차
보랏빛 마른 장미들이 오글오글 도사리고 있다
잔뜩 오므린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건 연두 꽃판이다
아홉번을 다녀갔어도 후배의 연애는 봉오리째
차마 열리지 못했는데, 그게 늘 쓴맛이었는데
찻물에 마른 장미 아홉 송이를 띄운다
여름 직전 첫 봉오리가 품었던 목마름은
오랜 물에도 좀체 녹아들지 못하고
보라 꽃잎에서 우러나온 첫물은 연둣빛이다
피어보지 못한 것들의 무연한 숨결
첫물은 그 향기만을 마신다
아홉에 한 송이쯤은 어쩌다 활짝
따뜻한 물에서 꽃피기도 하는데
인도밖에 갈 곳이 없었던 후배의 안간힘도
그렇게 무연히 피어났으면 싶었는데
붉게 피려던 순간 봉오리째 봉인해버린
보랏빛까지 다 우려내고도 결코 열리지 않는
물 먹은 숱한 꽃봉오리들
적막히 입에 넣고 씹어본다
보랏빛 멍을 향기로 남기는 제 몸 맛처럼
안으로 말린 모든 꽃이 쓰리라
채 피우지도 못한 꽃일수록 그리 떫으리라
- 와락, 창비, 2008
연어 [이하석]
돌아온다. 부끄럼 많은 언덕이 엎드려 지키는 여울의 길목으로,
온다. 온다. 떼지어 달리는 마라톤경기처럼,
붉고 노란 유니폼 입은 선수들이 몰려온다.
유도선이 없어도 제 생애의 무늬 속에 잘 각인된 길이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 에돌아, 돌아, 곧 바로, 상류에 이른다
언어의 헤엄은 서사적이다.
그 시작과 끝이 예정된 길로 이어져 굽이치기 때문이다.
강가에서 낚시질하거나 그물질하는 우리들이 잡아올리는
장편 서사의, 쉬 끌어올려지지 않는, 퍼덕이는
긴 노정.
기실 낚시질과 그물질로도 연어의 길은 헝클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연어들은 혼인색으로 노랗게 붉게 보라로 장엄한 채
상류로 내처, 막무가내로, 치달아선 제가 아는 길의 꿈을 새로 낳는다.
그게 서사의 후렴이 아니라 서사의 서두임을 우리는 안다.
죽음으로 복제한 길. 그 어린 여행자들은
이내 떠난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오래전부터 당연히 감당해온 처음의 제 길을 열며,
풀어놓는다. 그냥 그대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멀리 나가는 강의 길이 길게 바다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 고추잠자리, 문학과지성사, 1977
절반의 입술 [이화은]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한 번도 키스를 하지 않았다는 그녀
그녀의 남편
토끼는 아무도 보지 않을 떄
입으로 새끼를 토해 낸다는 말을 믿은 적이 있다
그래서 토끼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데
그 말을 아직도 믿고 있는
어린 토끼띠 남자일까
사랑하지않는 남편에게
한쪽 젖가슴만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어떤 소설 속 주인공이나
뒤를 닦을 때 꼭 왼손만 사용한다는 인도 사람이나
한 가지 용도로만 쓰는 몸
한 가지 용도로는 절대 쓰지 않는 몸
병아리는 오른쪽 눈으로 먹이를 구하고
왼쪽 눈으로 천적을 살핀다고 한다
남자에게 여자는, 여자에게 남자는 먹이일까
천적일까
여자가 웃고 있다
고층 빌딩 광고판
입술의 절반을 세로로 갈라
다른 색깔의 루주를 칠한
분홍과 보라가 따로따로 웃고 있다
- 절반의 입술, 파란,2021
부레옥잠 [허형만]
부레옥잠 보라빛 꽃이
그토록 고혹적인 건
인례 호수에서 처음이다
보라, 보라, 보라
물 위로 기다란 목만 내놓고
날 기다렸다는 듯
눈 흘기는 저 은근한 속살
잘못 빨려들었다간 영영
떠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보랏빛 부레옥잠
- 황홀, 민음사, 2018
수도원 앞 라벤다 밭 [한이나]
보라색 라벤다 밭
외로움을 보라의 지평선으로 펼쳐 놓고
수도원의 침묵은 깊디깊다
넘치는 기도로 키운 꽃,
한세상 사무침을 모아 가꾸는 중.
도망치듯 보라색에서 뒷걸음쳐 빠져 나왔다
빗줄기가 우산 속으로 자꾸 들이쳤다
옷이면 마음이 슬픈 듯 보랏빛으로 담뿍 젖었다
소매 끝동에 지워지지 않는
라벤다 꽃수 하나
- 유리 자화상, 시와표현, 2016
엉겅퀴 [이서화]
엉겅퀴는 자꾸
숨으려는 색깔 같다
매 맞은 일을 자꾸
잊어버리려는 색깔 같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아득한 가랑이 속 운세를 떼던 여자의 눈두덩 색깔 같다
삼거리 지나 세 번째 파란 슬레이트 집 여자, 엉겅퀴 한입 가득 물었다 아무도 모르게 뱉고 작은 시멘트 다리 건너기 전 기역자 집 남자, 욕설 반 푸념 반 섞어 보란 듯이 뱉어내던 그 엉겅퀴
마을 사람 중엔
보라색으로 물든 이빨들이 많았다
엉겅퀴는 자신을 몰라서 모르고
집집들은 짓이겨진 보라색 속으로 숨고
입안에 가시들이 자라고
엉겅퀴는 마을의 집을 빠져나와
흔들리는 풀숲,
바람을 옮겨 다니며 욕설처럼 핀다
-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 시작, 2019
산수유나무 아래서 [곽재구]
-연화리 시편. 8
꽃뱀 한 마리가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바람이 보라색과 흰색의 도라지 꽃망울을 차례로 흔드는 동안
꼭 그만큼의 설레임으로 당신의 머리칼에 입맞춤했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 안에 얼마나 넓은 평원이 펼쳐지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는지......
사랑하는 이여, 나 가만히 노 저어
그대에게 가는 시간의 강물 위에 내 마음 띄웁니다
바로 곁에 앉아 있지만
너무나 멀어서 먹먹한 그리움 같은
언제나 함께 있지만 언제나 함께 없는
사랑하는 이여,
꽃뱀 한 마리 우리들의 시간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 돌아오지 않습니다
-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1999
유월 [이상국]
내가 아는 유월은 오월과 칠월 사이에 숨어 지내
는데 사람들은 잘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유월에
는 보라색 칡꽃이 손톱만 하게 피고 은어들도 강
물에 집을 짓는다. 허공은 하늘로 가득해서 더 올
라가 구름은 치자꽃보다 희다. 물소리가 종일 심
심해서 제 이름을 부르며 산을 내려오고 세상이
새 둥지인 양 오목하고 조용하니까 나는 또 빈집
처럼 살고 싶어서……
-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창비, 2016
슬픔의 바깥 [신철규]
보라색 보자기를 든 여인이 사거리에 서 있다 꼼꼼히 싸맨 보자기 안에는 쟁반에 담긴 커피포트와 찻잔 두 개가 있을 것이다 보자기 위 매듭이 토끼 귀처럼 쫑긋 솟아 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고 바닥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것인지 자신을 힐끔거리며 지나치는 행인들을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귀밑머리를 가만히 쓸어 올려 귀 뒤로 넘긴다 오래 전 소중한 사람을 배웅하고 난 뒤 한참을 돌아서지 못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쪽 뺨이 패인 낮달이 허공에 떠 있다 그녀 앞 횡단보도가 한없이 펼쳐진 계단처럼 누워 있다 멀리서 불법 유턴을 하고 쏜살같이 달려온 배달차가 멈춘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차에 올라탄다 그녀가 떠나고 다방 안 낡은 어항 속의 금붕어는 숨이 가쁜지 수면 밖으로 입을 내밀고 있다 흐린 유리창에 붙은, 다방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셀로판지의 좌우가 뒤집어져 있다 반쯤 남은 커피는 식었고 가라앉아 있던 프림이 떠올라 달무리가 진다
- 심장보다 높이, 창비, 2022
데칼코마니 ―관계에 대한 고집
이 민 하
물이 뛰쳐나온다 꽃병을 엎지른다
여자 몸을 뛰쳐나온 아이가 물방울 눈을 뜨고 두리번거린다
아이가 기르던 프리지아 한 마리가 바닥에서 꿈틀,
여자를 기르던 앞치마가 싱크대에서 달려와 바닥을 훔친다
오후를 잘게 다지는 도마 위 칼질 소리
텔레비전 채널이 아이의 손가락을 돌리고
아이가 은하철도를 타고 티비 속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브라운관에 머리가 낀 아이를 끌어내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자장가를 부른다
아이는 쿠션처럼 쌕쌕거리며 잠이 든다
여자는 눈이 내리는 마을로 가는 책 속의 마차를 탄다
책 속에서 담배를 태우러 보라색 입술만 나온다
가끔은 담배가 입술을 태우고 책이 담배를 문다
글자들이 연기를 뿜고 연기가 가구들을 태워 버리고
탄내 가득한 천장에서 밀랍 같은 숯덩이가 뚝뚝 떨어진다
맞닿아 있던 여자와 아이의 피부가 까맣게 들러붙는다
수십만 킬로를 날아온 흰쥐들이 숯무덤을 파헤치자
아이의 무릎 위에 여자가 잠들어 있다
흐물거리던 살 껍데기가 옷걸이에 걸려 있다
- 환상수족, 문학과지성사, 2005
낡은 서랍 속에서 1 -옷 [정재학]
나 그때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모두들 파란색이라 했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네 내가 파란색 옷을 훔쳤다고 하네 모두들 녹색 옷을 입고
있었네 그들은 침을 뱉고 내 심장을 조각하네 피할 수 없었네 보라색이란
없는 거라 하네 내 옷을 벗기고 불을 지피기 시작했네 나 발가벗겨져 서
있었지만 부끄러움조차 힘겨웠네 옷을 찢어 태우기 시작하네 파란 연기가
피어오르네 그들의 눈과 머리도 검은색이었지만 내 눈이 검은색이라 욕하
네 내 머리가 검은색이라 욕하네 나 서 있을 자리가 없었네 몹쓸 말들은
땅만 지키고 있네 거꾸로 박힌 수많은 못이 나를 향하고 있네 사람들의 시
선에 숨이 막혔네 그들은 나에게 파란색 칠을 마구 해댔네 난 내 몸에 불
을 지폈네 보라 연기가 피어오르네 그들은 여전히 파란색이라 하네
-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민음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