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탐방은 그 어느 곳이나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고 또한 어느 크고 작은 유적이나 문화유산은 경중을 가릴 것
없이 다 소중하나 서촌은 더욱 우리나라 역사 문화의 산증인과 증거로 가득차 우리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있다.
경복궁의 서쪽 지역 서촌엔 조선시대 역관, 의관, 궁녀, 화가, 서예가들의 집과 숙소가 있었던 곳
사대부들은 해가 지는 서쪽을 선호하지 않아 중인, 예술가들이 유난히 많이 사ㅏㄴ 곳
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근대 천재시인 이상, 시인 윤동주, 화가 이중섭, 박노수 화백,
시인 노천명과 최근 타계한 화가 천경자는 서촌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서촌에는 가옥이 약 2108채 있고 이중 30%인 668채가 한옥으로 보전되어 있는데
서촌 한옥은 북촌 한옥과 달리 일제강점기에 대량으로 지어진 한옥들이라 한옥의 크기도 작고 좁은
골목길에 북촌의 고관대작의 집처럼 웅장하지도 않다.
서촌은 도심의 살아있는 박물관.
미로같은 골목길 안에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을 볼 수있고
이상 노천명의 집도 발견할 수 있으며 윤동주는 이곳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인왕산 중턱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문학관이 있다.
한국화의 거장 박노수 화백의 집은 이제 박노수 미술관이 되어있다. (인터넷의 글 펌)
답사중 몇개만 올린다.
그 중 하나는 백송나무
오밀 조밀 미로같은 골목길에 접어들자
신객님 사진 감사!
옛 창의궁터인 이곳에 몇백년 된 통의 동 백송이 있었다
이 나무는 93년동안 잘 크고 있었으나 1990년 태풍으로 잘려나가 밑둥만 남겨졌다.
하지만 홍기옥 여인께서 너무 안타까워한 나머지 솔방울에서 씨를 얻어 심고 정성을 들인끝에 4그루의
아기 백송을 자라게 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펌
책을 내신 이장희님의 스켓치
이 나무가 일제 강점기시절 36년은 자라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무성한 자식나무들을 보니 우리들의 마음도 든든하다. 우리후손이 이렇게 번성하기를 바라면서...
세월에 남아있는 것이 어디있을까 마는 여인의 갸륵한 행동에 감동!
바로 옆이 추사 김정희집터이 있던 곳이다
영국님 사진 감사합니다.
오밀조밀 1m 정도의 좁은 골목엔 북촌이상 아기자기한 검소한 소품으로 장식돼있었다.
정겨워라 벽 옆에 붙어있는 것은 옛우리나라 안방을 구들장이다
나이가 드니 짤짤 끓는 아랫목에서 몸을 데굴데굴 굴리고 싶다
검게 그실린 것도 있는 이 별것 아닌 구둘장이 오늘 이 서촌의 명물이 되다니.
바로 앞이 종로 거리인데 바로 뒷골목이 환상을 젖게 하는 동화같은 집들이 나온다.
경치도 좋은 곳은 아니고 소박하게 화분에 나무도 심고 집도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꾸며 나름대로 눈을 즐겁게.
노란색은 어린이들 색인데 마치 어린이집에서 방금 아이들이 나올 것같은 분위기다.
바로 나가자 마자 세종대와님께서 낳으신 곳이다 영국님 사진 감사!
이곳을 종로구 세종마을이라고 한다.
영국님 사진 감사!
옥인동의 재래시장
여기서 우리들은 옛날 음식인 쌀 기름떡을 사 먹는데 이곳에서 먹을 것을 사면 접시같은 것을 주어
이것 저것등 사서 이층에 가 먹는 곳이 따로 한끼 요기하기에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서울 중심 복판에 이런 재래시장이 있는 것이 무척 반가워 부디 오래 유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길가에 가다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영국님 사진 감사합니다.
필운대 인왕산을 필운산이라 했으며
이곳이 이항복의 집이 있던 곳이라한다. 신객님사진 감사합니다.
인터넷펌
예전에 배재학당
이 건물안에 궝률장군 그리고 사위 이항복의 집이 붙어 있었다고 해설사가 설명했다.
송석원인 백수산장 있던곳을 가 보기로
오! 푸르고 청청한 서울의 산 인왕산 인터넷펌
해맑아 더욱 예쁜 인왕산 봉우리
열번 천번 보아도 아름다운 우리강산 볼 수록 가슴설레이는 산
기린교 영국님사진
효령대군 집터가 있던 곳인데
이 너럭바위 밑으로 철철철 흐르는 물소리가 듣고 싶다
여름에 다시 와 봐야할 것 같다.
서울 중심에 이렇게 좋은 산과 바위가 있으니 우린 얼마나 행복한가 감회가 새롭다.
그 햇살을 그 푸름을 그 맑음을 그 기상을 잠깐이 나마 가린 자가 있었으니
바로 친일파인 매국노 윤덕영
인터넷펌
친일파인 순정황후의 큰아버지이며 벽수산장을 지은 사람
인터넷펌
이완용의 집도 5000 평이라고 했는데 윤덕영은
친일행각을 벌인 댓가로 받은 돈으로 옥인동 땅 절반인 20000평을 사들여 지은 집이며
죄측 아래에 있는 집이 딸의 집이다.
엎드려있는듯 작은 초가집의 비해 유럽 르네상스시대의 어느 성같지 않은가
결국은 살아보지도 못하고 나라집이 되고
화마로 인해 사라진 집.
보면 볼수록 일제시대의 친일파가 어느정도 (세상을 휘두르고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 집은 올라가는 길조차 넓었고 인터넷펌
벽돌하나 유리한장 귀한 것들로 지은 것으로 호화롭기 짝이 없다 한다.
이 집이 햇살을 받을때 얼마나 눈이 부셨을까
불란서? 설계도를 보고 뿅가서 지은 집이니 중국의 아방궁이 아니라 조선의 아방궁이라 불렀다한다.
영화가 이 집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인터넷펌
인터넷 펌
송석원터
인터넷펌
이 석물운 우리나라 문학사중 시사하는 바가 커서 올렸다.
송석원은 송석원시사(詩社), 사진 설명 인터넷펌
(우리나라 문학중 중요하기에 올린 것이다
인왕산 아래 옥류동 송석원(중심인물, 천수경의 집)에서 결성된 중인 중심의 문학단체로 옥계시사,
송석원시사라고 불리웠다 하고 '백전'이라는 전국적인 시회가 매년 한 번씩 열렸다 합니다.
이걸 위항(委巷=閭巷: 조선중인마을)문학이라 하는데 정조(1786)부터 순조(1818)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합니다.
* 위항 ; 위항인은 글자 그대로 위항(委巷)에 사는 사람이다.
즉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 작은 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말하며
이러한 인구조밀 지역은 도시의 주거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며, 서울의 비양반층의 생활공간인 것이다.
위항시인의 구성은 . 중인(中人)에는 의(醫), 역(譯), 율(律), 산(算), 역(歷) 등의 분야에 종사하는 기술관,
기술관보다 지위가 낮은 하급 관원, 지방 향리가 속하며 중간 신분을 뜻한다. 하지만 하층민인 노비(奴婢)
작가도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위항인은 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외에 하층민까지 포함( 글 인터넷펌)
윤덕영 첩이 집으로 현재 남아있으나 재발로 인해 사라지게 될 운명이다 인터넷펌
돌 계단도 통채로 된 것임
남산골한옥마을에 복원된 서울의 유명 한옥 5개 중 윤씨 가옥하나만 현재 남아있다고 한다.
왼쪽에 서있던 기둥역시 벽수산장 들어가는 입구다
ㅁ아있는 역사의 현장 어찌 돌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으리
벽수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서있는 석물 인터넷펌
이곳의 도로는 마치 대로를 연상하게 넓다
당시로는 상상도 못할 거리이나 아마도 승용차가 올라가기위한 길이었던 곳이다
우측에 개나리꽃이 피었다
얼마나 양지 바른 곳이었으니
난 처음본 꽃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꽃꽃꽃 그렇게 바라던 봄이 와 내 앞에 하늘거리는 꽃잎을 보여주니
다만 날씨가 너무 차 안타까운 심정으로 올려다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대중이 즐겨야지 혼자 독차지하는 심뽀로 즐기고자 했으니..쯧쯧
ㅅㅏ직 공원이라 부르지 말고 사직단이라 불러라
사직(社稷), 정확히 말하면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신 '사(社)'와 곡식신 '직(稷)'을 위한 제단입니다.
유교국가를 지향한 조선은 궁궐 좌우에 각각 종묘와 사직단을 설치하였는데요. 종묘대제와 사직대제
나라에서 제일 중요한 행사인 대례(大禮)로 분류되었지만
사직은 특히 민생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형식상 종묘보다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합니다.
따라서 국상이 일어날 경우 종묘대제를 포함한 모든 행사가 중단되었지만,
사직제는 계속 이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인터넷펌
담위에 얹은 기와가 너무 아름다워 이곳에 올려본다.
사직단의 신실 인터넷 복사
2015년 1월 5일 사직신알례 신실에 100여년 만에 복원된 모습.
신실에는 토지신인 사신(社神)의 위판과 오곡신인 직신(稷神)의 위판가 있다.,
사와 직은 자연신으로 토지신의 배위는 후토 오곡신의 배위는 후직이라고 하는데 모두 고대 중국의
농사잘 짓는 인물 두명을 신위로 받드는 것이다.
토지신의 신위의 이름은 조선 시대 내내 국사(國社)였고 오곡신의 신위이름은 국직(國稷)이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에 그 신위이름이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바꾸었고, 현재의 위판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ㅇㅣ 글은 참고 삼아 올린다 (인터넷펌한 글이나 우리나라 서촌 역사에 대한 글중하나이기에)
그 외에도 김종서는 조선 단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서울 종로구 계동의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1886~1947) 사택 역시 칼국수 가게로 이용되다 불타 없어져
버렸다. 지금은 표지석만 남았다.
1970~80년대 개발 바람이 일면서 서울의 문화재는 하나둘씩 사라졌다.
한옥마을로 들어간 도편수 이승업 가옥이 있던 중구 삼각동 터에는 건물 전면 전체가 글라스월(유리벽)
방식으로 건축된 미래에셋 빌딩 등이 높게 서 있다.
이창현 국민대 교수(전 서울연구원장)는 “성장 패러다임을 넘어 지속가능한 도시정책을 구현하려는 지금,
역사와 문화를 회복하느냐 아니면 기억의 요소를 파괴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느냐의 기로에 섰다”고
말했다.
그는 “도시는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도시 공간에 기억의 요소를 남겨야 하고,
다시 그것을 통해 시민들이 도시의 역사적 전통을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경진 연세대 교수(국문학)는 “근거가 남아 있으면 역사를 다시 만들 수 있지만, 근거마저 없으면 역사
복원이 불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옥인동 47번지의 송석원 터에는 추사 김정희가 써준 바위글씨 하나만 땅속에 파묻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바위글씨 하나를 가지고 18세기 후반 중인들의 문학 모임인 송석원 시사(松石園 詩社)와
그 이전부터 이 일대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조선의 역사를 이끌었던 안동 김씨, 여흥 민씨, 해평 윤씨
외척들의 200년 세도정치와 그 문화를 재현할 수 있었다.”
회장님 총무님 사진 빌려주신 분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낭만 씀 2016 3월13일 씀
첫댓글 존경하는 낭만 선배님 덕분에
다시 한번 서촌을 다녀와 봅니다
함께 보낸 하루 즐거웠답니다
즐거운 오후 되세요
낭만님 글을기다리다. 드디어 접하게되엇네요. 일일이찿아세밀하게 사진과내요을 올려주셔서 다시금. 모른미쳐듣지못한. ~세밀하게 알게되엇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히 성실한 후기 입니다,
그날 설렁설렁 다녔던 역사의 흔적들,,,
덕분에 의미를 되새깁니다
감사합니다^^
낭만친구 함께해서 즐거웠어요
하나 하나를 사진과 함께 능숙한 글로기록을 해서 후기로 남기니
다시한번 역사를 기억 하게되100점짜리 공부를 한것같아 즐겁습니다
친구 덕분에 기분 좋은 역사탐방이 되였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많은 공부가 됬습니다 감사합니다
못 갔지만 낭만님의 설명 재밋게 읽었습니다
자세한 설명과 보충 사진까지..애 많이 쓰셨읍니다. 감사합니다.
역사의 순화기를 다시 공부 한 듯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사의 발자취 자세한 자료 설명 고맙습니다.
사직단 토지의 신과 곡식의신 제사를 올리던곳 !
무심코 지나쳤던 70 년간의 막연한 상식?을 정립할 수 있게 해 주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낭만님의 후기로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되어 감회가 생깁니다. 가지는 못했지만 유익하고 보람있는 역사탐방 에 박수를 보냅니다. 잘 읽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