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하고 슬퍼한 내용은 어떠한 종교의 경전에도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과 우리가 살 복지(福地)에 대해서는 면밀히 소개해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방편을 취해 나온 것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방편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것도 그렇지만 기쁨은 한 날에 대번에 찾아지지 않습니다. 슬픔의 길을 지나고 난 후에야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천국을 바라는 자가 땅 위에 있다 할진대,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6천년 동안 흘린 슬픔의 눈물을 나도 흘리게 해주시옵소서' 하고 손을 들어 기도하고 통곡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을 걸고 외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하고, 아름답고, 귀하고,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입장에 계신 아버지가 아니라 슬픈 입장에 계신 아버지라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선의 주인공,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흘렸다면 이 땅 위의 어떠한 호수나 대하의 물보다도 더 많이 흘렸을 것이요. 하늘과 땅에 채울 곳이 없을 만큼 눈물 흘리며 슬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슬픔을 체휼할 줄 아는 사람은 산을 바라보더라도 그 산을 하나님의 수고와 고통으로 느끼고, 바다를 보면 그 바다를 하나님의 눈물로 느끼고, 초목을 바라보면 그것을 하나님의 걱정으로 느낄 것입니다. 광대무변한 온 천체를 바라볼 때, 그 모든 현상이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한 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에게는 슬픔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느낄 줄 알고, 그러한 감정으로 아버지를 부를 줄 아는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고 하나님은 찾을 것입니다.
참된 효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더불어 기뻐하고 아버지와 더불어 즐거워하는 데에서만 나타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효자 효녀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기쁨보다도 아버지의 슬픔, 아버지의 어려움을 대신할 수 있는 자녀가 되어야만 효자 효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정을 연하여 흐르는 인연이 기쁨으로 맺어질 수 없는 타락한 세계이기 때문에, 슬픔과 곡절의 노정을 거쳐가야 하므로 우리는 이 손이 부르트고 이 몸이 피곤해지고 찢어지더라도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겠다는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어떠한 인간을 분들고도 사정할 수 없을 만큼 슬픔에 잠기어서 '아버님! 하고 부르는 한 시간이 곧 잃어버린 천정과 인연 맺을 수 있는 시간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 일생에서 이러한 시간을 회복해야 하고, 자기 일생에 있어서 하늘을 대하여 머리 숙여 눈물지을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음에서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과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이 찾아오는 순간이요, 하나님이 웃을 수 있는 순간이요, 하나님이 기쁨으로 손을 들어 내 아들딸이라고 축복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오늘날까지 걸어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새로운 슬픔의 길을 가야 합니다. 6천년 동안 인간을 지켜주기 위하여 슬픔의 길을 걸은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들, 자기를 놓고 자탄해야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가정과 국가와 세계를 걸어놓고 자탄해야 합니다.
죽음의 골고다를 넘으면서도 하나님의 슬픔을 생각하면서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빌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 한 하나님의 수고의 심정과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에 사무친 슬픔을 풀지 못하면 하나님 속에 있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선과 영원한 행복은 땅 위에 있는 인간과 영원히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릴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어디로 갔습니까? 다시 한 번 반성해 보십시오. 이 손은 누구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이 발걸음은 누구를 위하여 허덕이고 있는가, 이 몸과 마음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그리며 찾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슬픔에 처해 있는 자신임을 명심하고, 소망의 한 날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느끼고, 새로이 각성하고 과거의 생활을 비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 라는 내가 못 된 것을 탄식하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지 못한 자체를 탄식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 선 나는 가정 앞에도 면목이 없고, 국가 앞에도 면목이 없고, 세계 앞에도 면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이 우러난다면 가정을 봐도 눈물이요. 나를 봐도 눈물이요, 세계를 봐도 눈물이요. 하늘을 봐도 눈물일 것입니다. 생애에서 이런 일이 없다면 하 나님의 심정이 있는 검은 장막을 헤치고 깊이 숨어 있는, 지극한 경지 밑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위해 사는가 아닌가를 분석하여, 나를 지켜주는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내가 몰라도 지켜주고 알아도 지켜주는 한 분. 내가 어떠한 곤란한 입장에 있어도 지켜주는 그 한 분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5-356, 5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