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2章 죽어도 죽지 않는 자
①
취영장원(醉影莊園).
하운비가 커다란 포대를 둘러메고 나타난 시각은 황혼이 붉게 타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어깨에 둘러멘 포대, 그 안에는 혼절한 사마화혼이 들어 있다.
장원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일대를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하
운비가 모습을 드러내자, 화급히 허리를 숙였다.
살수마영!
그는 이제 공포의 대상이기 이전에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완벽
한 살업에 무사들은 공포를 넘어선 경이를 느끼는 것이다.
살수마영, 그는 완벽한 살수였으며 또한 하나의 완전한 무사였다.
정서가 담겨 있지 않은 흐릿한 눈빛, 얼음장보다 차갑게 굳어진
얼굴에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오연함마저 느껴진다.
그는 날이 잘 갈린 비수였다. 누구든 그 앞에 서면 영혼이 갈라지
는 충격을 맛보게 된다.
그는 느릿하게 걸어 나갔다.
하운비와 눈길이 마주치는 자, 저도 모르게 허리가 굽어진다. 하
운비는 예의 냉막한 표정을 지으며 앞을 스쳐 지나갔다.
청석판이 깔린 길 위, 푸른 베옷을 입은 노인 하나가 서 있다.
머리에 삼만육천 가지의 묘책을 언제나 담고 있다는 자, 천하제일
의 모사, 바로 마마맹의 오늘을 있게 한 장본인 사공명이었다.
늘상 미소를 지었던 그가 아니던가?
지금 사공명의 입가엔 미소 대신 고뇌의 찌푸림이 있을 뿐이다.
'혈영천마제라 하더라도 이역오강이 지키고 있는 화혼을 이처럼
생포해 올 수 없는 일인데… 아니, 성공했다 하더라도 팔다리 하
나쯤은 두고 왔어야 하거늘…….'
사공명은 석상이 된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처럼 어려운 난해사를 너무도
쉽게 해결했다는 게…….'
사공명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거린다.
그가 어찌 알겠는가?
사마화혼이 스스로 살수마영에게 제 몸을 던졌다는 걸.
그리고 그의 눈길은 하운비를 대하는 무사들의 태도에 접하면서
더욱 격렬하게 요동을 쳤다.
왜일까? 그가 이처럼 동요하는 까닭은?
'놈은 단지 살수일 뿐이다. 절대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사공명이 번뇌에 휩싸여 있을 때, 하운비가 다가섰다.
"영주가 명한 대로 계집을 잡아 왔다!"
그는 차게 내뱉으며 포대를 청석판 위로 내던졌다.
쿵-!
청석판 위에 둔중한 소리를 내며 나뒹구는 포대. 그러나 사공명의
시선은 여전히 하운비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야릇한 눈길이다. 하나, 하운비는 여전히 냉막한 표정으로 서 있
을 뿐이었다.
묘한 대치의 순간이 지나고.
"흠, 수고했다. 이것은 영주께서 네게 내리시는 상이다."
사공명이 품안에서 한 알의 단약을 꺼내 놓았다.
잿빛이 감도는 단약.
하운비는 힐끗 그것을 바라보았으며, 주저 없이 받아 들고는 그대
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단약은 침에 녹으며 물이 되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순간, 비
릿한 내음이 느껴졌다.
하운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내… 내게 먹인 약이 무엇……?"
"천마무혼단(天魔無魂丹)이라는 거다."
"그… 그게 대체… 어떤 약이길래……?"
하운비는 휘청거렸다. 순간.
핑- 핑-!
사공명의 손가락이 연이어 퉁겨졌다. 가공할 강기( 氣) 다섯 줄
기가 뇌전으로 뻗어 나오며 하운비의 혈도 다섯 군데를 동시에 점
해 버렸다.
하운비는 썩은 짚단이 되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지독한 놈! 천마무혼단에 황소 백 마리를 혼절시킬 미혼약을 넣
었는데도 쉽게 쓰러지지 않다니……."
사공명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하운비를 들쳐업었다. 그리고 접인수를 발휘해 포대를 끌어
올린 다음, 빠르게 신형을 움직였다.
슥-!
한 줄기 청색 선이 그려지는 듯하더니,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너른 방 안, 마마대공은 황금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섭선을
흔들고 있었는데, 입가에는 한 줄기 곤혹스런 미소를 매달고 있었
다.
"내기에 질 줄은 정말 몰랐소!"
"아아, 저도 제가 내기에서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사공명은 태사의 앞에 시립해 있었다.
"훗훗… 그는 나의 마음에 든 유일한 자였는데… 훗훗, 죽이고는
싶지 않은 자인데… 죽여야겠군! 나의 신위(神威)를 발휘해 군사
와의 내기를 깨어 버리고 마영을 살리라 명하고 싶지만, 마영을
죽일 수밖에!"
그가 말을 마치자.
"마영을 죽이면 아니 됩니다!"
사공명이 고개를 들었다.
"죽이면 안 된다니? 군사는 마영을 꼭 죽이려 하는 사람이 아니
오?"
마마대공이 어처구니없어 하자.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죽이고 싶습니다만, 대세를 위해 마영을 살
려야만 합니다!"
"왜 그렇소?"
"마영은 너무도 유명해졌습니다. 보십시오! 마영은 저와 대공이
몇 년 걸려야 할 일을 간단히 해 버린 것입니다!"
사공명은 품안에서 종이 다섯 장을 꺼냈다. 그것은 모두 배첩지
(拜帖紙)였다.
<몽고대목장주(蒙古大牧場主)가 마마대공에게…….>
<성숙해(星宿海) 천잔문주(天殘門主)가…….>
<천축홍의교주(天竺紅衣敎主)가…….>
<해남검파장문인(海南劍派掌門人)이…….>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달뢰라마(達賴喇 )가 마마맹주(魔魔盟主)
에게…….>
②
마마대공은 배첩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다 무엇이오? 이들은 본문(本門)이 끌어들이려 했으나 아직
연수(連手)할 때가 아니라며 합파(合派)를 거절한 자들인데?"
"방금 전에 일제히 전해진 것들입니다!"
사공명은 얼굴을 시꺼멓게 물들였다. 그는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하운비를 가리켰다.
"바로… 저 놈 때문입니다!"
"마영 때문에?"
"예!"
"왜?"
"살수마영이 바로 마마맹 사람이라는 것이 천하에 암중으로 소문
이 났습니다!"
"으으음……!"
"살수마영은 대공이 가장 신임하는 살수(煞手)라고 정평이 났으
며, 그는 바로 마마문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널리 알려졌습니다!"
"……!"
"사람들은 건곤오절 중 넷을 죽여 버린 살수마영을 끌어들여 하수
인으로 만든 대공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수마영
이 대공 밑에 들어와 더욱 강해졌음을 알고, 대공을 신인(神人)처
럼 공경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사공명은 배첩지를 폈다.
<연수(連手) 연합(聯合)하여 구파일방(九派一 )을 무너뜨리는데
동참하고 싶소. 살수마영이 귀맹(貴盟)의 밀사(密使)라는 것을 확
인할 수 있다면, 본파는 즉시 귀맹과 연수할 것이오.>
<살수마영같이 훌륭한 무사를 거느리고 있는 문파와의 연수를 어
찌 배척하겠소? 몇 차례의 제의를 거절한 것은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이었으니, 아량으로 이해하여 주시오.>
마마대공이 보기에도 기가 막힌 내용뿐이었다.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살수마영! 그를 죽인다면 정말 놀라운 일
들이 벌어질 것이다.
사공명은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영을 죽이면, 우선 맹도(盟徒)들이 대공과 저를 불신할 것입니
다."
"……."
"이용할 대로 이용했다가 제거했다고!"
"흠……!"
"살수마영을 잡았다는 것을 아랫사람들이 알게 한 것이 화근이었
습니다. 사실 그 일은 섭혼교(攝魂敎)의 취봉(醉鳳) 덕에 여러 사
람에게 소문났지요. 하여간 마영은 대공의 최고 호법으로 알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자고로 계집들은 입이 가볍지."
마마대공의 눈빛이 아주 차가워졌다. 사공명은 이마를 돌바닥에
대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마영은 마마맹(魔魔盟)의 최고 고수로 소문났습니다. 사
람들은 그가 무엇이든 다 해낼 것이라 믿습니다. 즉 그가 대공 곁
에 머무는 이상, 모든 일을 귀신같이 해치운다고 믿는 것이지요.
심지어……."
사공명은 목소리를 잠시 중단시켰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대공과 마도세력이 천하일통(天下一統)하는 일도… 마영이 있어
야 가능한 일로 소문이 났을 정도입니다."
"으으음, 내가 호랑이를 길렀단 말인가? 나의 이름마저 잡아먹을
아주 무서운 호랑이를?"
꽝-!
마마대공은 발을 굴렀고, 돌바닥에 한 자 깊이 족인(足印)이 패였
다.
'나는 마영을 좋아한다. 그는 가장 완벽한 살수이고, 가장 완전한
무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곁에 둔 것인데…….'
마마대공은 주먹을 거머쥐었다.
'그에게 무엇이든 다 줄 수 있으나, 나의 지위마저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는 흥분을 억제시키며 차분히 말했
다.
"어찌하면 현명하겠소?"
"그를 높은 지위에 올려야 합니다!"
"어떤 지위?"
"부맹주(副盟主)요."
"으으음……!"
"그러면 한 달 안에 천 개 문파의 장문인이 마마맹에 항복한다는
것을 제 입으로 떠벌릴 것입니다!"
"……!"
"감히 살수마영의 적이 되고자 하는 자는 없습니다. 살수마영에게
죽기 싫어서라도 모두 굴복할 것입니다. 살수마영을 부맹주로 앉
힌다면, 저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삼 년 앞당겨 달성될 것입니
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그를 죽이고 싶으나, 대세를 위해서
그를 죽여서는 안 됩니다!"
"……!"
마마대공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꽤 오
랜 침묵이 지났다. 그의 입술이 오랫만에 벌어졌다.
"그것은 임시변통일 뿐… 근원적인 해결은 아니오."
"그럼 어찌해야 해야 하는지요?"
"그의 진정한 충성을 받아 낸 다음, 그를 부맹주로 삼는 길이 첫
째요."
"그것은 불가(不可)합니다."
"왜?"
"그의 힘은 대살혼(大煞魂)에서 나옵니다!"
"하긴……."
마마대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진정한 충성을 받으려면 살혼을 제거하고 그의 신지를 회복
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살수마영은 사라지는 것이지요. 살수마영
은 사라지고 본시 협골(俠骨)인 연경일관옥(燕京一冠玉)이 나타날
것입니다!"
"흠……!"
마마대공의 숨소리는 점점 침중해졌다. 그는 사공명이 말을 맺기
를 기다렸다가.
"그럼, 죽이시오!"
"예?"
"훗훗… 그를 내가 죽였다고 널리 소문내시오. 그럼 사람들은 나
를 더 무서워할 것이 아니겠소? 본시 내가 하려 한 대로, 피로 세
상을 씻는 것이오. 핫핫……!"
그가 앙천대소를 터뜨리자.
"아니 됩니다. 그를 죽이면 당장 세력이 반으로 줍니다. 그를 죽
이면, 대공은 당장 고금제일고수(古今第一高手)로 소문이 나실 것
이나… 맹주(盟主)가 되지는 못하십니다. 마영이 죽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도망갈 것입니다. 그리고 맹주는 힘은 얻어도 충성을 얻
지는 못하게 됩니다."
"……."
마마대공은 사공명이 그렇게 말할 것을 알고 있었던 듯 놀라워하
지도 않았다. 그는 사공명이 말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럼 마지막 길을 택할 수밖에 없소!"
"마지막 길이오?"
사공명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매달려 있
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젊은 주인과 늙은 종은 말을 나누기 이전, 이미 뜻을 나누고 있었
다.
"살수마영은 잘 대접받을 것이오. 그리고 마마대공의 자리를 위협
하는 존재는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이고!"
"역시 대공이십니다. 그런 길을 말씀하시리라 짐작하고 있었습니
다!"
사공명의 얼굴 전체로 웃음이 번져 나갔다.
그 날 저녁, 마마맹에 비밀리에 투신한 수십 명의 거마(巨魔)들에
게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은 정말 때맞춰 나온 소식이었다.
③
<살수마영을 마마맹의 태상호법(太上護法)으로 봉한다! 그의 지위
는 지존(至尊)과 삼봉공(三奉公) 이하이고, 모든 당주(堂主)들의
위이다!>
그것은 놀라움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살수마영은 이름 하나만으로도 마마대공을 능가하는 상태였다. 그
가 태상호법이 된 것은 정말 당연한 일이었다.
삼경(三更), 하운비는 침상에 누워 정신을 차렸다. 그는 뒤통수에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으으음……!"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뜨자.
"역시 대단한 근골이다!"
사공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사공명과 혈영천마제, 그리고 하운비의 머리맡에 있는 혈발마모!
하운비에게 통증을 주는 것은 하운비의 뇌호혈(腦戶穴) 깊숙이 파
고드는 독침(毒針) 하나였다.
"이… 이게 뭐냐?"
하운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순간 살을 에일 듯한 냉기와 함께
극심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본능적으로 공력을 끌어올리려는데.
"마영! 신비영주가 하시는 일이다!"
혈발마모는 냉혹하게 말하며 침을 더욱 깊이 찔렀다.
"으으, 영… 영주가?"
하운비는 영주라는 말에 공력을 무산시켰고, 그 순간 푸른빛 도는
독침은 뇌호혈 속으로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어 버렸다.
하운비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한순간, 벼락에 관통당한 듯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우두둑- 우둑-!
근골이 수축되고, 살이 끊어지고, 피가 타는 고통, 그리고 영혼이
으스러지는 아픔 가운데 잔혹한 음성이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축하한다, 마영! 너는 모든 빚을 다 갚고 자유를 찾은 것이다."
"마영, 넌 이제 자유다. 넌 목숨의 빚을 다 갚은 것이다."
돌연 하운비의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래졌으며, 한 차례 경련이 부
르르 일어나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됐소! 심장이 멎었소!"
혈발마모는 그의 맥(脈)이 멎었음을 확인했다.
"금강불괴(金剛不壞)에다 만독불침지신(萬毒不侵之身)이나, 파뇌
독침(破腦毒針)을 맞고 살 수는 없지!"
"삼봉지교(三鳳之交)에 의해 만들어진 위대한 대살수(大煞手), 하
운비다운 최후다!"
세 사람은 품자형으로 모였다. 모두 조금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하운비는 뒤통수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있는
데, 눈에는 빛이 없었다.
"관에 담아 묻어 버립시다. 훗훗, 이 놈이 세운 공로도 있고 하니
… 아주 튼튼한 철관(鐵棺)을 저승 가는 예물로 하사합시다. 훗훗
……!"
사공명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혈발마모와 혈영천마제는 그 뒤
를 따라 나갔다.
그 직후, 꿈틀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운비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이 조금 떨린 것인데, 그것을 알아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밤, 금릉 남쪽 구룡사(九龍寺) 뒤쪽에 있는 묘지(墓地)에서 쓸쓸
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아주 거대한 철관 하나가 불경 외우는 소리와 더불어 땅 속으로
들어갔다.
죽은 사람은 고관의 부인이라고 했다. 그녀는 돌림병에 걸려 죽었
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소 부처를 신봉했기에, 죽은 후 절 뒤에
묻힌다는 것인데… 아녀자의 죽음답게 슬퍼하는 사람도 없는 가운
데 쓸쓸히 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④
사경 즈음.
스슥- 슥-!
세 사람이 구룡사 뒤쪽으로 들이닥쳤다.
"헤헤… 내가 숨어 봤는데 관의 크기가 무려 일 장(丈) 오 척(尺)
이었다네, 형제들!"
"부장품이 꽤 많겠구려?"
"흐흐… 우리 묘중삼투(墓中三偸)가 노릴 만한 일이 생긴 거외
다!"
세 사람 모두 두건을 쓰고 있었다.
도굴꾼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무덤을 터는 자들.
묘중신투는 그들 세계에서 실로 이름난 자들이었다. 녹림맹에서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향주 자리 세 개를 비워 두었으나, 그들
은 녹림의 향주가 실속이 없다 하여 자유롭게 떠돌아다니기를 택
했다.
스슥-!
셋 다 뛰어난 신법을 갖고 있었다.
지행서(地行鼠),
지행룡(地行龍),
지행귀(地行鬼).
셋은 결의형제(結義兄弟)이고, 비슷한 술법을 사용했다.
달이 훤하게 떠올랐다. 지키는 사람만 없다면 도굴하기에는 정말
좋은 때이다. 달빛이 주위를 훤히 밝혀 줄 테니까!
셋은 큰 무덤 근처에 품자형으로 섰다.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정경대부인(貞敬大夫人) 이매지영소(李梅之永所)>
모든 격식을 다 차린 큰 무덤.
도굴꾼들이 노리기에 부족한 데가 하나도 없는 무덤이었다.
"일을 시작하세!"
"조심조심 파 들어가세. 값비싼 도자기가 깨어지면 아니 되니까!"
"흐흐… 괜히 가슴이 뛰는데?"
셋은 톱니같이 생긴 지행차를 꺼내 들고 넙죽 엎드렸다. 땅을 파
기 시작할 때, 갑자기.
쿵-!
땅 속에서 큰 소리가 났다.
"이… 이게 무슨 소리지?"
"쇠가 깨어지는 소리 같은데?"
"으… 으시시한데?"
묘중삼투는 지행차 놀리기를 멈췄다. 바로 그 때.
꽈꽝- 꽝-!
무덤이 허물어지며 한 사람이 불쑥 일어났다. 검은 옷을 걸친 사
람인데, 눈빛이 아주 이상했다.
죽어 버린 눈, 하나 동공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소름이 끼칠 정
도로 차갑고 강렬했다.
"귀… 귀신!"
"으으악……!"
"어이구우!"
묘중삼투는 너무나 놀라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며 정신을 잃었다.
무덤 속에서 뛰쳐나온 사람, 그는 무엇인가를 더듬더듬 말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 보면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인… 인자(忍者)는 죽지 않는다. 어… 어떠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참고… 하나뿐인 목숨을 보존한다."
그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쓰러질 듯 휘청휘청…….
그의 뒤통수에는 침이 하나 박혀 있었다. 뇌를 뚫고 목젖 부위에
서 튀어나온 대침(大針)에는 열 가지 절독(絶毒)이 발라져 있었
다.
그것은 그가 걷는 동안에 빠져 땅에 떨어졌고…….
츠측- 측-!
돌을 태우며 돌 속으로 푹 파고 들어갔다. 그는 숲 속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얼마 후, 묘중삼투는 부시시 정신을 차리고 서로 얼굴을 바라봤
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것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헛깨비였을 것이다!"
"하… 하여간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아. 그 섬칫한 도깨비가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 어… 어서 가세. 술이나 실컷 마시세!"
"제길!"
셋은 투덜거리며 무너져 내린 무덤을 제 모습대로 복구시켰다. 도
굴꾼들에게는 그러한 관행이 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달(月), 바람(風).
어느 하늘 아래에서건 보고 느낄 수 있으니, 세상은 공평한 것이
라고나 할까?
⑤
회하(淮河) 가, 언제부터인가 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거지 하
나가 있었다.
진흙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얼굴, 찢어지고 구겨져 걸레보다도 더
러운 옷차림.
그는 진회하(秦淮河)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진회하는 사
내들의 고을이다.
색향(色香) 중의 색향!
미녀를 안고 싶다면 진회하로 가라!
천하의 풍류남아(風流男兒)치고 천금(千金)을 지고서 진회하에 가
서 환락에 취해 보려 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거지는 흰 손가락을 세우고 있었다.
"……."
그는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모래에 글을 썼다가 지우곤 했
다.
<인자(忍者)는 어떤 악조건(惡條件)에서도 살아남는다. 죽음의 위
기가 닥치면 구식(龜息)하고 지맥(止脈)한다. 벌레들은 건드릴 경
우, 죽은 듯 멈춘다. 그것은 바로 생존하는 비결인 것이다.>
그는 그런 글을 썼다가 지워 버렸다.
<폐맥빙혈대법(廢脈氷血大法)의 구결은 이러하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글을 적었다. 귀찮은 듯 지웠고, 다
시 썼다. 벌써 세 시진째였다.
<너는 빚을 갚은 것이다!>
그는 그런 글을 써 놓고 히죽 웃었다.
"비… 비운(悲運)이 누구이지? 그리고 마영(魔影)은 누구이고…
으으음, 나를 운비(雲飛)라 하는 사람은……?"
그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는 소년으로 있었다. 그는 글을 읽고 있는데, 위풍당당하게 생
긴 노인 하나가 슬며시 서재 안으로 들어서며 미소지었다.
- 헛헛… 운비야, 글공부를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고 권장할
일이거늘… 헛헛, 네게는 만류해야 할 일인 듯하구나. 허구한 날
글만 읽으니…….
그는 보국충정금기대장군(補國忠貞金旗大將軍) 하배(河拜)라는 사
람이었다.
그가 웃자, 소년의 얼굴이 붉어진다.
- 아버님, 약관(弱冠)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글
만 읽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소년의 얼굴은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끄르르륵-!
수레가 굴러 가고 있고, 소년은 수레 안에 갇혀 있었다. 그는 흐
느끼며 저주했다. 눈바람이 모질게 다가서고 있었다.
따그닥- 딱-!
요란한 말발굽 소리, 그리고 갑자기 환상이 깨어지고 사람들의 목
소리가 들렸다.
"이봐, 귀머거리냐?"
기마인들이 뒤쪽에 다가서 있었다. 수는 다섯인데, 모두 초조한
기색들이었다.
진중일가(秦中一家) 남씨세가(藍氏勢家)!
그들은 잠산(潛山) 기슭에 성만한 장원을 짓고 근처 천 리 안을
주름잡고 있는 남씨세가 사람들이었다.
"남옥룡(藍玉龍) 소장주를 못 봤느냐고 묻지 않았느냐?"
"그분이 혼례식 직전에 사라지셨다. 혹, 그분을 아느냐?"
남씨세가 사람들은 거지를 보고 묻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거지가
뒤돌아서는데, 그 용모가 가관이기 때문이었다.
"오라질 놈!"
"재수없다. 네놈은 사람도 아니다!"
누군가 욕을 하며 채찍을 흔들었다.
파팟-!
채찍은 청년거지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한순간, 거지의 손이 슬
쩍 흔들렸다. 느리나 신비한 위력을 지닌 손속이었다. 순간.
파팟-!
철편(鐵鞭)이 반으로 끊어지며 철편을 흔들던 자의 목이 댕강 잘
라졌다. 거의 순간적인 일이었다.
"이… 이 살인마!"
"쳐라!"
차창- 창-!
말 위에 있던 자들이 일제히 날아올랐고.
"피… 피는 싫어. 으아악……!"
돌연, 거지청년은 머리를 두 손으로 휘감으며 몸을 뒤틀어 댔다.
그는 발광을 하며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그는 도도한 진회하 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 이럴 수가?"
"저 놈이 누구란 말인가?"
"휴우, 흉사에 흉사만 겹친다. 강남제일미남자(江南第一美男子)이
신 소장주가 실종된데 이어, 거지에게 무사 하나를 잃다니……."
남씨세가 사람들은 탄식을 하며 검을 회수했다.
⑥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회남에서 열 명이 사라진 것이다. 사
라진 사람은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 무림인(武林人)이라는 것,
둘째 남자(男子)라는 것,
셋째 미남자(美男子)라 불렸다는 것.
실종 사건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될 때, 그러한 일이 천하 도
처에서 있었다는 것이 소문났다.
장안성(長安城)에서도 열 명이 사라졌고, 그 날 개봉부(開封府)에
서도 열 명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큰 도시 백 군데에서 각 열 명
씩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정말 놀라운 일인데, 역사책을 뒤져 보면 그런 일이 이십 년 전에
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디 이십 년 전 뿐이랴?
사십 년 전에도, 육십 년 전에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혹자(或者)는 이렇게 말했다.
- 적녀교(赤女敎)가 씨받이 남자를 잡아간 것이다. 이제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적녀교라니?
적녀교는 이름조차 신비스러운 문파였다. 하나, 그 역사는 오래
되었고 그 전통은 신비하기 짝이 없었다.
삼백 년 전, 적녀지존(赤女至尊)이란 나녀(裸女) 하나가 중원을
피로 씻은 바 있었다. 그녀는 백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중원에 왔
는데, 제자들은 모두 나체이고 미녀였다.
적녀지존은 백 일 간 천하를 주유했는데… 해남(海南)에서 시작해
숭산 소실봉, 기련산을 거치는 동안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녀
는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는데도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는 전리품
을 갖고 떠났는데, 전리품은 물건이 아니라 잘생긴 사내 일천 명
(名)이었다.
그 일 이후, 이런 소문이 남게 되었다.
<동해(東海) 어딘가에 여인왕국(女人王國)이 있다.
그 곳은 여인천하(女人天下)이다.
사내는 씨받이 노릇을 하고 양근(陽根)을 잘린 다음, 노예가 된
다.
그녀들은 적녀교(赤女敎)라 스스로를 칭한다.
적녀교도가 아이를 낳아 교통(敎統)을 전수하는 일이 계속되는
한, 남자들은 그녀들을 조심해야 한다.>
알쏭달쏭한 소문들.
하여간, 천하는 넓다 할 수 있었다.
⑦
밤하늘 아래.
쏴아아……!
쾌속선 한 척이 빠른 속도로 가고 있었다. 사공은 다섯인데 모두
여인이었다. 신기한 것은 모두 벌거숭이라는 것이었다. 네 명은
배를 저었고, 하나는 뱃머리에 서 있었다.
"천하에 인재가 이리도 없을 줄이야. 흠, 도(島)를 떠나 보름 안
에 회도(廻島)해야 한다는 법만 없다면 조금 더 유명한 자들을 납
치할 수 있었을 텐데……."
여인의 나이는 서른 정도였다. 젖가슴이 아주 큰데, 하나가 싹둑
잘려 보기 흉했다. 그러나 상처 자리는 전혀 없었다. 태어난 직
후, 젖가슴이 부풀지 않는 약을 바른 탓에 젖가슴이 아예 크게 부
풀어오르지 않은 것이었다.
배에는 포대 열 개가 있었다. 포대가 찌그러진 모습이 몹시 기괴
했다. 그 안에 사람이 들어 있는 듯하지 않은가?
쏴아아……!
배는 동쪽을 향해 강물을 가르고 움직였다.
얼마를 갔을까?
뱃머리에 서 있던 여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체 한 구가 강물 위
로 둥둥 떠 가고 있지 않은가?
"시체가 떠돌아다니다니… 흠, 중원 인심이 흉흉하기는 이십 년
전 마맹(魔盟)이 창궐한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구나!"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내들에게 세상을 맡기면 세상은 피에 젖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욕을 하듯 뇌까리다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얼굴 쪽을 하늘로 돌리고 둥둥 떠 가는 시신.
한데, 그 얼굴이 정말로 아름답지 않는가.
강물은 그의 몸을 잘 떠받쳐 주고 있었다. 감히 그의 몸을 범할
수 없다는 듯.
"세… 세상에, 설마 송옥(宋玉)의 시체가 홍수에 떠내려온 것이
아닐까?"
여인이 크게 외칠 때.
"……!"
물 위를 누워 다니는 자의 눈이 한 번 깜빡거렸다.
무심한 눈빛, 그는 죽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놀라운 수
공을 발휘해 누워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저… 저 자야말로 진짜 사내다."
나체여인은 크게 손을 휘저었다. 섭물진기가 일어나 둥둥 떠돌아
다니던 사람의 몸이 배 위로 끌려 왔다.
쿵-!
사내는 큰 소리를 내며 배 위로 떨어졌다. 그는 아픈 표정도 짓지
않았다. 분명 살아 있는데,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실혼인(失魂人)이군?"
나체여인은 대뜸 청년의 완맥을 잡았다.
직후, 그녀는 손목이 짜르르함을 느끼며 얼른 손을 떼었다. 손바
닥이 불에 데인 듯 부풀어올랐다.
"놀… 놀랍다. 자전진기(紫電眞氣)보다도 십 배 강한 호신진기(護
身眞氣)가 내장과 혈맥을 보호하고 있다니……."
나체여인은 손을 훌훌 털다가 사내를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사내
는 넋을 잃고 달을 보고 있었다.
바보스러운 얼굴 표정. 하지만 그에게는 감히 항거하지 못할 어떤
기도가 담겨 있었다.
'이상한 자다. 분명 내가고수인데, 어이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나체여인은 손을 다시 내밀었다. 손은 청년의 눈앞까지 다가갔다.
청년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한순간.
"찻-!"
나체여인은 기합과 함께 손을 빠르게 내쳤다. 그녀의 손이 청년의
뺨을 때리려 하는데.
슥-!
시체가 되어 누워 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났다. 어느 새 칼날처럼
빳빳이 세워진 흰 손, 그 손이 단선을 긋듯 허공을 빠르게 그어
나갔다.
파팍-!
"으으윽! 팔… 팔이……!"
나체여인의 오른팔이 보검에 베인 듯 싹둑 베어졌다.
모든 것은 너무도 찰나적인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 찢어 죽일 놈!"
팔 하나가 잘린 나체여인은 이를 갈며 왼손을 마저 내쳤다.
꽈르르릉-!
벼락치는 소리가 날 때, 청년의 우권이 또 한 번 흔들렸다. 그의
손은 아주 정확히 나체여인의 목젖을 후려갈겼다.
꽝-!
"케에에엑……!"
나체여인의 몸뚱이는 피떡이 되어 훌훌 날아올랐다. 순간.
차창- 창-!
"에잇! 총관(總官)을 죽이다니!"
"더러운 사내 놈! 죽어라! 적녀검(赤女劍)으로 네놈을 찢어 죽이
겠다!"
네 명의 여사공 중 두 명이 검을 쥐고 날아올랐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청년을 향해 독랄한 검초를 펼쳐 댔다.
현란하게 뿌려지는 검기, 뱃전은 한순간 검광의 도가니로 화해 버
렸다.
⑧
청년은 검기가 다가설 때만 몸을 움직였다. 그의 몸은 한 줄기 연
기로 화해 그리 넓지 않은 배 위를 돌아다녔다. 청년의 몸뚱이는
미세한 검기를 타고 움직였다.
매서운 검초는 애꿎은 갑판 위를 휘저었다.
파팟-!
둔탁한 소리가 나며 포대가 마구 베어졌다. 포대가 베어질 때마다
붉은 핏물이 흘러 나왔다. 간혹 팔다리가 포대 찢어진 곳에서 튀
어나왔다. 포대 안에는 사람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차창-!
나머지 두 명의 여사공도 날아올랐다.
"사상합벽검(四象合劈劍)-!"
"만천성라광(滿天星羅光)-!"
검기가 악랄한 기세로 뿌려질 때, 청년의 몸동작이 갑자기 느려졌
다.
"크으으……!"
그는 머리가 몹시 아픈 듯 두 손으로 머리를 쥐고 비틀거렸다. 순
간.
파팍팍-!
네 자루 청강장검이 그의 옷자락을 길게 찢었다. 순간, 요란한 쇳
소리가 나며 검이 편(片)으로 부서졌다.
"금강불괴지신!"
"세… 세상에 이런 자가 있다니!"
"독침으로 죽이자!"
네 여인은 다시 위로 날아올랐다. 네 마리 호접이 나는 듯. 모든
것은 거의 찰나지간에 이루어졌다.
청년은 완전히 포위당했고, 싸울 의사조차 없는 듯 두 손으로 머
리를 붙잡고 몸을 마구 뒤틀었다.
"나… 나는 하운비다. 악… 악마들! 더 이상… 더 이상 괴롭히지
마라!"
그는 악을 쓰며 위로 떠올랐다.
팟팟팟-!
"적녀수호침(赤女守護針)-!"
"떨어져라!"
네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암기를 쳐냈다. 암기가 소낙비처럼 쏟아
져 나갈 때.
"마… 마영(魔影)! 나는 마영이다!"
청년의 눈에서 광기(狂氣)가 떠오르며 그의 팔다리가 멋대로 흔들
렸다.
휘휘휙-!
쌍수(雙手)가 천수(千手)로, 쌍각(雙脚)이 천퇴(千腿)로 화하자…
네 여인이 기절초풍 놀라 까마득히 높이 날아올랐다.
청년은 그 순간, 춤사위를 멈추고 나뒹굴었다. 손발을 놀리기에는
상처가 너무 심했다.
쿵-!
소리를 내며 그가 벌렁 나뒹굴 때, 허공에서 자지러지는 외침 소
리가 났다.
"환… 환락무(歡樂舞)다!"
"아아, 백 년 전 반도(叛徒)가 훔쳐 간 환락무 비결이 세상 어딘
가에 나타났다는 말은 들었는데… 이 자가 그 주인공이란 말인
가?"
네 여인은 거의 동시에 피로 물든 배 위로 떨어져 내렸다.
청년은 길게 누워 사지(四肢)를 버들버들 떨고 있었다. 그는 무엇
인가를 외치고 있는데…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쏴아아… 쏴아아……!
배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뭍에서 천 리 떨어진 섬이 하나 있다.
섬은 항상 운무(雲霧)에 잠겨 있고, 해풍(海風)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안개는 흩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섬은 항상 사람이나 새의
눈길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섬 둘레에는 십 리 폭의 소용돌이가 있다. 소용돌이는 아
주 괴이해 모든 것을 섬 쪽으로 끌어들인다.
꽈르르릉- 꽝-!
운무에 잠긴 섬 쪽으로 몰려 가는 만장노도(萬丈怒濤). 그 흰 거
품은 마치 악마의 이빨 같았다.
꽈꽝- 꽝-!
소용돌이치는 소리가 모든 소리를 삼켜 버리고 있을 때.
섬 깊은 곳, 인간의 능력으로는 세울 수 없다고 여겨지는 옥궁(玉
宮) 한 채가 종성(鐘聲)에 흔들리고 있었다.
백옥신궁(白玉神宮)은 아주 거대했다.
땅- 땅-!
맑은 종소리는 쾌속선이 돌아옴을 알리는 신호였다.
소용돌이는 이십 년을 주기로 보름 정도 세력을 잃는다. 그 때를
맞춰 특수한 형태로 만들어진 쾌속선 백 척(隻)이 섬을 떠나 보름
정도 외부에 머물다가 일제히 돌아오는 것이다.
땅- 땅- 땅-!
옥종성은 점점 급박해졌다.
백옥신궁 안, 아주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서 있었다. 여인은 실오
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여인은 섬에 살고
있는 다른 여인들과는 달리 젖가슴 두 개가 모두 탐스럽다는 것이
었다.
⑨
백응향(白凝香)!
전라의 여인은 향기가 뭉쳤다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보름 후, 나는 수치스럽게도 정조를 깨야 한다!"
백응향은 손을 쳐들었다. 팔뚝 가운데 붉은 점 하나가 박혀 있었
다.
수궁사(守宮砂)!
그것은 그녀가 처녀임을 나타내는 증표였다.
"아아, 어이해 나는 소교주(少敎主)가 되어… 흐흑… 세상에서 제
일 지저분한 남자(男子)와 배를 맞대야 하는가?"
백응향이 몸을 떨 때.
"소교주, 천 명 미남자 중 하나를 고르면 가히 세상에서 가장 뛰
어난 사내일 것입니다. 살을 섞는 것이 그리 수치스러운 것은 아
닙니다!"
뒤에서 한 노파가 말했다. 노파는 짧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가죽으로 만든 짧은 옷.
옷이란 본시 품격을 뜻한다. 하나, 이 곳에서의 옷은 단 두 가지
의 의미일 뿐이다.
하나는 주안술(駐顔術)이 깨어졌다는 것, 하나는 몸매가 남에게
보이지 못할 정도로 추하다는 것.
노파는 섬의 대총관(大總官)이었다.
"그러니, 심려 마십시오!"
대총관이 허리 숙이자.
"아아, 일천 명 중 하나를 골라 내지 않을 길은 없을까요? 모두
다 거세(去勢)시켜 거세곡(去勢谷)으로 보낼 수 없을까요? 내 몸
에다가 씨를 남길 부마(駙馬)를 택하지 않을 수 없을까요?"
백응향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세상 사람이 들으면 정말 믿지 못할 일이었다. 하나, 이 곳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대화였다.
노파는 소교주를 가볍게 껴안았다.
"두려워 마십시오. 처녀성을 파괴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장차 소생(所生) 하나를 얻는다 생각하면 꾹 참을 수도 있
지 않습니까?"
"한 번이면 그래도 참겠지만… 만에 하나,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태어나면 어찌하지요?"
"운명에 맡겨야지요. 하여간, 부마가 된 자는 소교주가 딸을 낳기
전에는 거세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 아들을 낳을 때를 대비해
거세곡의 가장 좋은 곳에 세워진 전각에서 무거세남(無去勢男)으
로 살게 되지요. 거세곡에 가 보지 않아 모르시겠지만, 그 곳도
그리 나쁜 곳은 아니랍니다!"
"흐흑… 어이해 색(色)이 있어야 아이를 만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제가 답변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여간 저희 적녀교도(赤
女敎徒)들은 색(色)이어야 소생을 만드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어리석다 여겨, 적녀지존(赤女至尊)이라는 성결녀를 신으로 모시
지 않습니까?"
대총관은 백응향을 다독거려 가며 백옥신궁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천하(女人天下)!
이 곳이 바로 강호이금지(江湖二禁地) 중 하나인 적녀교(赤女敎)
란 말인가?
이런 노래가 있다.
해중이금지(海中二禁地).
마금지(魔禁地) 용형마도(龍形魔島) 마마대총(魔魔大塚),
남금지(男禁地) 적녀도(赤女島).
마금지에는 마도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남금지에는 비밀이 있을 뿐이다.
떠도는 소문은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남녀 화합이 당연한 하늘 아래, 남녀가 살을 섞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아주 괴이한 사교집단(邪敎集團)이 숨어 살고 있는 것이었
다.
하운비는 극심한 아픔을 느끼며 정신을 되찾았다.
채찍이 그의 몸을 후려치고 있었다.
"으으음……!"
하운비는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뒤틀려 했다. 하나, 사지(四肢)가
쇠사슬로 결박당한 상태인지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눈을 뜰 때.
"호호… 과연 철골(鐵骨)이다. 이제 시험을 끝내라!"
꽤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리며 채찍질이 멈춰졌다.
하운비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 있었다. 그는 발가벗겨진 상태였
고,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
다. 열한 명인데… 열 명은 은관(銀冠)을, 한 사람의 중년미부(中
年美婦)는 금관(金冠)을 쓰고 있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금관을 쓴 여인이었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신체를 지니고 있다. 너를 깨우기 위
해 채찍질을 천 번 했는데, 너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남지 않았다.
그리고 너의 혈(血)을 시험하기 위해 너를 열 가지 독액(毒液)에
담구었는데, 너의 흰 살결은 변하지 않았다."
여인의 눈빛은 아주 황홀했다. 한 번 보면 영원히 빨려들 것 같은
눈빛이었다. 반면, 하운비의 눈은 아주 멍했다.
"……."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듯했다. 금관
쓴 여인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남은 시험은 하나, 너의 재주이다. 너의 지혜가 지극히 뛰어난
것이라면, 너는 천 명 중 가장 뛰어난 자로 평가되어 부마(駙馬)
가 될 것이다."
"……."
"호호… 너는 환락무를 익히고 있을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종류
의 절기를 알고 있다. 게다가 내공이 삼백 년 수위이다. 비록 내
상이 크고 독상이 뇌를 마비시키기는 했으나… 호호! 그렇다고 사
내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
"……."
"너의 과거가 무엇이건 알 필요는 없다. 내가 필요한 것은 나의
제자와 살을 섞을 만한 자격을 지닌 한 명의 남자일 뿐이니까."
하운비는 말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듣기만 할 뿐 아무것도 생각
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사람 하나를 죽였다는 것이다. 너희 더
러운 사내가 아니라 본도의 여인 하나를! 그 죄는 사형에 처해질
죄이나, 너는 너무 뛰어난 자이라 부마 후보에 든 것이다. 호호!
일단 너를 남노(男奴)들의 우리에 처박겠다. 너의 자질이 뛰어나
다면 천하제일남(天下第一男)이 되어 적녀부마(赤女駙馬)가 될 것
이고, 생각보다 못하다면 한 번 합환(合歡)한 다음 거세될 것이
다."
여인은 차갑게 말하다가 손을 휘저었다.
꽝-!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하운비는 의식을 잃었다. 여인의 손속은 아
주 매서웠다. 도검으로 베어도 상처가 나지 않는 하운비의 몸에
장인(掌印) 하나가 찍혔으니까.
첫댓글 잼 납니다
즐감.
고맙습니다.
즐감했습니다.
벼락치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