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효원] 무림묵시록 武林默示錄(2권) 3. 여인천하

[⊙햇살⊙]

    第3章 여인천하


                                  ①



    남자들로서는 상상치 못하는 곳이 있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노예로 사는  곳. 그러한 전통이 무려 삼백 년
    에 걸쳐 계속 내려오는 장소.

    바로 적녀교(赤女敎)이다.

    적녀교는 이십 년마다 세대를 바꾼다. 교주는 태상교주(太上敎主)
    가 되고, 이제껏 소교주로  교육받던 여인 하나가 교주 자리를 이
    어받게 된다.

    섬은 두 곳으로 구분되어 있다.

    여인도(女人島),

    거세곡(去勢谷).

    여인도는 바로 백옥신궁이 있는 곳이고, 거세곡은 끌려 와 노예가 
    된 남자들이  머무는 곳을 말한다.  그들은 남노(男奴)라 불렸다. 
    남노들이 하는  일은 밭을 가꾸고,  사금(砂金)을 캐는 일이었다. 
    심지어 음식을 만드는 일도 남자들이 했다. 만약 적녀도 사람들이 
    옷을 입고 산다면, 옷을  만드는 일도 남자들이 하게 되었을 것이
    다.

    거세곡에 가기 이전에 거치는 곳이 있다.

    남옥(男獄).

    그 곳은 이십 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천 명의 사내들이 잡혀 와 
    보름 간 자질을  시험받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적녀부마가 되고, 
    나머지는 평범한 남노가 되어 일생을 노예로 살게 되는 것이다.

    가히 별세계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남옥의 구석진 곳.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가운데, 닷새를 보낸 사
    람이 하나 있었다. 

    몸이 아주 잘 발달된 미장부, 그는 쭈그리고 앉아 벌레를 눌러 죽
    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몹시 기괴했다.

    놀랍게도 그는 세 가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아름답고 뛰어난 얼굴,

    바보스럽고 멍해 보이는 표정,

    그리고 간혹 웃을 때 입가에 드리워지는 잔혹한 미소.

    그는 그림자가 세 개인 사람이었다. 

    바로 하운비였다. 그는 모든 질곡을 벗은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
    는 가장 무서운 시련 속에 있었다. 그는 간간이 괴소를 흘리며 고
    개를 갸웃거린다.

    그는 백치(白痴)가 된 것이었다.

    연경일관옥(燕京一冠玉) 하운비(河雲飛),

    견마하인(犬馬下人) 비운(悲運),

    살수마영(煞手魔影).

    그는 세 가지 그림자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그의 뒤통수에는  큰 상처가 있었다. 마마맹  사람들이 준 상처가 
    그것이다. 하나,  진짜 큰 상처는 머리에  남아 있었다. 신비영주
    (神秘令主)는 그를 잔혹히 마비시켜 버린 것이었다.

    하운비는 죽었어야 했다. 그가  산 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숨을 멈추고 심장  근육을 경직시켜 사공명과 
    혈발마모의 눈을 속여 버렸었다.  하나, 그의 의식은 아직도 깨어
    나지 못했다.

    깨어난 것은 강철보다 단단한 몸뚱아리뿐이었다. 

    옷자락 하나 걸치지 못한 몸뚱이.

    그것이 하운비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기억이 바로 하운비일까?

    있으나 없는 상태. 하운비는 정말 묘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남옥 안에는 수많은 기재들이 있었다.

    한날 한시에 잡혀 온 사람들, 그 중에는 출중한 사람들이 아주 많
    았다.

    남옥룡(藍玉龍)!

    그는 남삼미공자(藍衫美公子),  혹은 강남일미남(江南一美男)이라 
    불리는 남씨세가의 소문주였다.

    행고(行苦)!

    그는 소림사(少林)의  사미승(沙彌僧)으로 계인  찍기를 기다리며 
    불도에 전념하던 소림의 후기지수(後起之秀)였다.

    운허도인(雲虛道人),

    운정도인(雲鼎道人).

    무당쌍영(武當雙英)이라 불리던 사람들.  그들도 벌거벗겨져 있었
    다.

    대막(大漠)에서 온 사람들도 수십 명이었다. 말이 서로 달라 대화
    조차 나눌 수 없었고,  식성이 달라 여인들이 전하는 음식에 대한 
    반응도 각기 달랐다.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모두 체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 체념뿐인가?

    "이 곳은 극락(極樂)이다!"

    "현세의 천상(天上)이 바로 이 곳이다. 정말 잘 왔다. 헤헤……!"

    사내들은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 음식물에 심성을 마비시키는 독
    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이 약관 전후의  젊은이들이었다. 몇몇 특출한 사람들이 있
    기는 하나, 제아무리 빼어나다 해도 일백 년(年) 공력(功力) 이상
    은 되지 못했다. 음식에 든  독은 일백 년 공력은 되어야 떨칠 수 
    있는 독이었다. 그래서 모두  먹고 자는 돼지가 되어 가는 것이었
    다. 

    하운비는 별종(別種)이었다. 그는 구석진 곳에 앉아 글을 썼다 지
    웠다 할 뿐이었다.



    <하운비(河雲飛),

    비운(悲運),

    마영(魔影).>



    그는 자신의 이름을 깊게 썼다가는 지웠고, 다시 썼다.



                                  ②



    남옥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루 세 끼 식사 
    시간 외에 그 안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들 
    길들여져 가는 것이다.

    벌거벗은 남자들, 이들은  모두 체념한 상태였으며 음식물에 섞인 
    미약(媚藥)에 중독된 탓에 하나같이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누워 자는 사람, 히히덕거리며 뒹구는 사람…….

    모두 즐거운 표정들인데, 구석진  곳에 있는 한 사람만은 아주 슬
    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흑……!"

    흐느끼듯 울고 있는 젊은이, 그의 용모는 중인 중 가장 빼어났다. 
    한 마리 용(龍)이 닭 떼 속에 끼여 있다 할 수 있었다.

    하운비!

    그가 오랫만에 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끌고 다녔던 세 가지 그
    림자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워 그의 뇌가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
    다. 그는 미쳐 가고 있었다.

    "흐흑……!"

    그가 흐느끼고 있는데, 돌연  그의 고막을 때리는 전음 소리가 있
    었다.

    "며칠 간 너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 너를 선택하기로 했다!"

    선택!

    하운비는 드디어 적녀부마(赤女駙馬)가 된 것인가?

    한데, 들리는 목소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내의 목소리가 
    아닌가?

    "거세곡(去勢谷)에 오게 되면 우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거세되
    지 않은 오로(五老)가 백 년을 기다린 한(恨)을 네가 풀어 주기를 
    빌겠다!"

    "얘야, 울음을 거두고 이 구결을 외워 봐라. 다라심정대법(茶羅心
    靜大法)이라는 것인데…  너의 마성(魔性),  살성(煞性), 광성(狂
    性)을 어느 정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 그것은 수 리 밖에서 들리는데, 정말 또렷
    했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운비 한 사람뿐이었다.

    잠시 후, 하운비의 눈빛이 달라졌다. 탁할 대로 탁했던 눈빛에 가
    냘프게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하운비는 한 가지 구결을 되풀이해 듣고 있었다.



    <다라심정대법(茶羅心靜大法)>



    그것은 천축국(天竺國) 비전심법(秘傳心法)이었다. 달마조사(達磨
    祖師)의 고향인 파사국(婆娑國)에서 비전되어지는 심법이고, 오래 
    전에 절전된 것이었다.



                                  ③



    정심(靜心),

    명뇌(明腦),

    제마(除魔).

    심법을 계속 외우면 세  가지의 효과를 얻게 된다. 하운비는 무조
    건 구결을 외웠다.

    한 시진 후, 조금 지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를 볼  수 없어 유감이나, 너는  기운(氣運)이 강한 아이이다. 
    절대로 여인들에게 지지 않을 아이이다!"

    "우리 오로(五老)는 너를 느끼고  있다. 너는 우리 오로와 마찬가
    지로 당세에서 가장 뛰어난 사내일 것이다!"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얘야, 단념하면 아니 된다. 절대!"

    "쿨룩쿨룩… 수명이 다해 죽기  전, 네가 우리들을 찾기를 기다리
    겠다."

    목소리는 그렇게 맴돌다가 사라졌다. 

    하운비는 쉬지 않고 구결을 외웠다. 구결은 그의 광기(狂氣)를 조
    금씩 조금씩 가라앉혀 주었다. 

    하운비의 표정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

    그는 입 밖으로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흐
    르는 난해한 구결들, 누가 그것을 알 것인가?

    그리고 오래 전 선각자(先覺者)  하나가 창안한 구결이 장차 무림
    대세에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부를지 누가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화려한 규방(閨房).

    흐느끼고 있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사부님,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돼지보다도 더러운 사내와 이런 
    식으로 살을 합하는 줄 몰랐습니다!"

    몸의 굴곡이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인의 
    눈앞에는 책 한 권이 뒹굴고 있었다.



    <방중술보록(房中術寶錄)>



    그것은 오대산(五臺山)의 천환방사(天歡方士)란 사람이 지은 것으
    로, 오백 년 전 물건이었다.

    책은 펼쳐진 상태였다. 책의 내용은 몹시 황음(荒淫)했다. 남자와 
    여자가 괴이한 자세로 뒤엉켜 있었다.

    "제가… 제가 어찌 이렇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여인이 아이처럼 울자.

    "응향(凝香)아, 그럼 너는 아이를 옆구리로 낳는 줄 알았더냐? 썩 
    울음을 그치거라. 그것을 다 외워야 한다."

    꾸짖는 목소리가 났다. 금관을 쓴 미부인 하나가 노여워하고 있었
    다. 

    적녀교주(赤女敎主) 화선로(華仙路)!

    그녀는 십오대(十五代) 교주였다. 백응향은 그녀의 제자인 동시에 
    딸이었다. 하나, 어머니라는 말은 부르지 못할 말이었다.

    백응향은 어머니를 어렸을 때부터 사부 내지는 교주라고 불렀다. 

    화선로는 사나운 눈빛을 흘리며.

    "오늘 낮에 천하제일남의 선발이  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회하
    에서 잡혀 온 녀석이 부마가 될 것이다!"

    "흐흑… 그 자와 제가 오늘 밤, 방을 함께 써야 합니까?"

    "그렇다!"

    "미… 미룰 수는 없나요?"

    "안 된다. 오늘은 시운(時運)이 좋은 날이다. 만월(滿月) 중의 만
    월이 되는 대월혼십오야(大月魂十五夜)이다. 이런 날을 받아야 천
    하제일녀(天下第一女)를 낳게 되는 것이다!"

    "흑흑……!"

    백응향은 서러운 듯 눈물만 흘렸다.

    적녀도에서 사내란 그 어떠한 것보다 미천한 존재이다. 하물며 그
    런 사내와 하룻밤을 같은 침상에서 뒹굴어야 한다니?

    그것은 그녀에게 죽음보다도 지독한 욕이 된다. 그래서 이렇듯 울
    고 있는 것이다.

    "너를 천하제일녀로 만들려  했으나 불행히도 실패했다. 하나, 너
    는 나보다 뛰어난  아이임에 분명하다. 네가 딸을  낳을 경우, 그 
    아이는 필경 천하제일녀가  되어 적녀지존한(赤女至尊恨)을 풀 것
    이다."

    화선로는 눈길을 위로 쳐들었다. 나녀철상(裸女鐵像)이 하나 있었
    다. 오  장(丈) 거상(巨像)인데, 너무도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
    다.



    <적녀장한(赤女長恨).

    무림혈세(武林血洗)로 그 한을 풀라!>

    적녀지존상(赤女至尊像)이라 불리는 물건이 그것이었다.

    '저 비밀을 풀어야 한다. 그래야 봉도(封島)가 풀린다. 봉도를 풀
    면, 삼백  년 기른 힘을 터뜨려  천하무가(天下武家)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화선로의 눈빛은 아주 강해졌다.



                                  ④



    아침이다.

    모두 깨어나는 시각이다. 남노(男奴)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
    다. 하운비는 자지 않았는지라 일어나지도 않았다.

    "헤헤… 저 바보의 자세가 좀 다른데?"

    "입정(入定)이라도 했는가 본데?"

    "제길, 저 놈은 왜 저리 멍청하단 말인가?"

    남노들은 하운비를 보고 한 마디씩 욕을 했다.

    하운비는 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한데 합한 자세로 길게 호
    흡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검은 기운이 토
    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빛은  아주 희었다. 하운비는 
    남들이 뭐라건 듣지 않고 조식(調息)을 계속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여인고수들이 남옥 안으로 식사를 가지고 
    왔을 때, 하운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각(大覺)의 순간(瞬間)이랄까?

    꽈르르르릉－!

    하운비의 심령(心靈)을 강타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우레 소리와 
    더불어 세 가지 그림자(影)가 동시에 강하게 일어났다.

    번쩍－!

    천령(天靈)을 끊는 번개가 몸을 강타했다.

    그의 자세는 겉보기에 아주 단정했다. 한데, 머릿속에서는 청천벽
    력(靑天霹靂)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사슬 세 개!

    하운비라는 사슬,

    비운이라는 사슬,

    살수마영이라는 사슬.

    세 가지 사슬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었다.

    "으으……!"

    그는 숨을 격하게 몰아쉬며 눈을 떴다.

    더러운 벽이 불쑥 나타났다.  모든 것이 너무도 또렷이 느껴졌다.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 그리고 긴 악몽(惡夢)으로 지워 버리
    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무수한 기억들.

    "아아악……!"

    "크으윽……!"

    "케에에엑……!"

    자신의 손에 죽어 간  사람들의 비명 소리, 주마등같이 스쳐 가는 
    여러 사람들의 얼굴들.



    － 마영(魔影), 너는 빚을 지고 있다!

    － 화혼(花魂)을 잡아라!

    － 비운(悲運), 나를 각시로 삼아 다오!



    수많은 목소리들이 쉴새없이 귓전을 때리며 사라져 간다. 

    하운비는 진땀을 흘렸다.

    "차… 차라리 긴 꿈이기를……."

    그는 중얼거리며 큰 대자로 누웠고, 근처에 있던 자들은 박장대소
    를 했다.

    "핫핫… 저 녀석이 꿈을 꾼 모양일세!"

    "바보도 꿈을 꾸는 모양이네."

    웃는 자들, 처음에 비해 모습이 한결 좋아 보이는데… 이유는, 음
    식물 안에 미약과 더불어 원기를 돋우는 약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
    었다.



    미시(未時) 초(初), 하운비는 스르르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남옥 
    안이었다.

    남옥은 문이 스무  개나 있는 거대한 장방형(長方形) 석실이었다. 
    침상이 천 개  있고 탁자가 백 개나  있는 곳이었다. 사내들의 땀 
    내음이 남옥 안에 가득했다. 중원이나 변방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
    던 기재(奇才)들이 적녀교에게  암습당해 상상하지도 못하던 처지
    가 되어 있는 것이다. 

    하운비만은 완전히 예외였다.  그는 처음부터 주목을 받는 처지였
    다. 그는 환락무(歡樂舞)를 시전한 덕에 여기 왔다 할 수 있었다.



    <화마십팔환락무(花魔十八歡樂舞)>



    그것은 신비영주가 전한 수법 중 가장 강한 것이었다. 건곤수절을 
    죽일 때 사용한 수법이기도  했다. 하운비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
    다봤다. 모든 것이 선명하고 또렷이 기억되었다.

    "이 손이… 나의 뜻과는 달리 쓰여졌단 말인가?"

    그는 안면 근육을 꿈틀거렸다.

    다라심정대법(茶羅心靜大法)이 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던 세 가
    지 기운을 제압해 버린 것이다. 

    마성(魔性)과 살성(煞性), 그리고 광성(狂性)!

    세 가지가  모두 사라지며 완전한 하운비가  드러난 것이다. 그는 
    보국충정금기대장군 하배의 아들로 깨어났다. 

    하나, 살수마영 시절의 기억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가렸던 모든 
    깨끗하고 밝음이 드러난  동시에, 과거 무의식적으로 행했던 모든 
    것마저 완전히 기억하게 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나날들이랄까?

    '살수마영, 신비영주의 노예… 너무도… 너무도 참혹한 기억이다. 
    아아, 차라리 바보가 되어 있었으면……!'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모든 기억을 차
    근차근 정리하는 데에도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다.



                                  ⑤



    그가 이 기억 저 기억을 되살려 음미하는데, 갑자기.

    떼엥－!

    벼락이 바로 머리 위에서  떨어지듯 요란한 종성이 들려 왔다. 동
    시에 남옥 문이 열리며  적녀교주 화선로가 구대장로를 이끌고 들
    어섰다.

    화선로는 작은 종 하나를 들고 있었다.

    청옥(靑玉)으로 만든 파천마종(破天魔鐘).  바로 거기서 우레와도 
    같은 종성이 흘러 나왔다.

    화선로는 손가락을 빳빳이 세우고  있다. 희고 섬세한 손가락, 그 
    끝에서 누에실 같은 기류가 뿜어져 나와 파천마종을 휘감았다.

    다시 연거푸 터지는 두 번의 종성.

    남옥이 무너질 듯 뒤흔들렸고,  그 와중에 남노로 잡혀 온 구백여 
    명이 피를 뿜으며 혼절했다.

    "웨에엑……!"

    "크윽! 오…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으아악……!"

    구백여 명이 나뒹굴자, 화선로는 종을 구대장로 중 하나에게 전하
    며 차게 내뱉았다.

    "그래도 여든다섯은 남았으니 다행이군."

    화선로가 종을 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종소리는 하나의 관문(關門)이었다. 쓰러진 자는 관문에서 탈락하
    게 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두 번째 시험에 들게 된다.

    화선로는 남아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바라보았다. 그 중에는 하운
    비도 끼여 있었다.

    하운비는 그녀를 보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더러운 계집이다. 악(惡)에 가득  찬 세상에서도 가장 사악한 곳
    이 바로 이 곳이다!"

    하운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 놈이 전과 다른데? 흠, 제 스스로 지혜를 찾았단 말인가?'

    화선로는 그를 쏘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
    다.

    "이관을 시작하라!"

    그녀가 말하자, 아홉 장로들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호호… 잘 보거라!"

    "흐으응……!"

    띠딩－ 띵－ 띵－!

    아홉 장로는 아홉 마리  나비가 되어 훌훌 날아다녔다. 풍성한 젖
    가슴이 출렁출렁거릴 때마다 육향(肉香)이 흘렀다. 

    대환락무(大歡樂舞)!

    사내들의 욕정(欲情)을 자극하는 춤이고, 거기 빨려들면 원정지기
    (元精之氣)를 잃게 되는 아주 놀라운 최혼술(催魂術)이었다.

    너울거리는 손과 발.

    둥실 떠서 몸을 날리는 아홉 명의 불로장로(不老長老).

    풍성한 둔부가 춤을 추고, 그윽한 눈빛이 사내들의 마음을 빨아들
    인다. 

    띠잉－!

    삘리리－!

    피리 소리,  거문고 소리가 마음(魔音)이  되어 마음을 사로잡고, 
    한순간.

    "으으, 나… 나를 안아 줘요. 제발……."

    소림사에서 잡혀 온  행고승(行苦僧)이 털썩 쓰러졌다. 입에서 거
    품을 뿜으며.

    "흐으으응… 어서 다가와라."

    "인간의 모든 환락을 주겠다. 흐으응……!"

    아홉 장로들은 사내들 틈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사내들은 그 때마다 들개가 되어 날뛰었다.

    "서… 서라!"

    "헉헉… 젖가슴이 그리도 아름답다니, 한 번 만져 보아야겠다!"

    "으으, 저 희멀건 둔부… 크으으……!"

    남옥의 사내들은 모두 욕정의 들개가 되어 뛰어다녔다.

    대환락무는 점점 도를 더해  갔다. 육향이 달콤하게 뿌려졌고, 모
    든 사내들은 숨가쁜 소리를 내다가는 기력이 딸려 푹푹 쓰러졌다.

    정욕을 이겨 내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하운비!

    그는 끌리는 눈빛이 아니라,  증오하는 눈빛을 짓고 있었다. 한순
    간.

    "관문을 더 이상 계속할 필요 없다!"

    화선로의 사자후(獅子喉)가 모든 것을 마무리지었다.

    "호호… 처음 생각했던 대로 저 녀석이 적녀부마(赤女駙馬)다!"

    화선로의 망막에는 구역질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하운비의 모습
    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운비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내공이 남아 있었다면, 벌써 
    장력이 쏟아져 나갔을  것이다. 살수마영의 대살혼이 아직 있었다
    면, 최소한 가래침 정도는 뱉았을 것이고.

    '악녀들! 세상을 거역하는 무리들! 두고 봐라. 어떻게든 살아남아 
    너희 사악한 무리들을 처단할 테니까!'



                                  ⑥



    하운비는 주먹을 억지로 폈다. 그는 그와 함께 화영기루의 견마하
    인 비운(悲運)으로 화했다.

    "헤헤… 뭐가 되었다고요?"

    그는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흠, 그것도 아니로군. 지혜를 되찾은 줄 알았더니!"

    화선로는 크게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운비는 구대장로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벌거벗은 몸뚱이를 태연
    스럽게 내보이는 여인들. 그녀들은 십구 세도 안 되어 보이나, 모
    두 사십 이상 되는 여인들이다. 그 중 몇은 하운비의 뛰어난 외모
    에 은근히 끌리는 표정이었으나,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여기서는 
    금기사항이었다. 

    "적녀부마! 따라와라!"

    "몸을 씻고 나서 향유(香油)를  발라야 한다. 그 다음, 옥녀궁(玉
    女宮)에 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시(子時)까지 할 일이 많다!"

    구대장로는 하운비를 구궁진(九宮陣)으로  포위해 문 쪽으로 인도
    했다. 하운비는 히죽히죽거리면서 그녀들을 따라갔다.

    화선로는 그가 사라지는 것을 쭈욱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응향이도 저 정도 사내라면, 그리 역겨워하지 않을 것이다. 상상
    을 초월하는 데가 많은 놈이니까!"

    화선로는 차분히 말하며 밖으로 나갔다.



    자시(子時), 백응향(白凝香)은  옥녀궁(玉女宮)에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단정히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 날따라 얇은 옷을 
    걸쳐야 한다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불행을 주는 일이었다.

    탁자 위에는 합환주(合歡酒)가 있고, 향기 나는 음식이 그득했다.

    "흐흑… 합고(合苦)해야 하다니,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사내에
    게 나의 수궁사와 처녀성을 잃어야 하다니……."

    백응향의 눈물방울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간간이 몸을 움찔움찔
    거렸다.

    '사내가 나의 살을 만지면… 으으, 소름이 오싹 끼치리라.'

    그녀는 문을 바라봤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설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짓을 할 것이고, 자신은 법
    에 따라 모든 괴로움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흐흑… 분합니다, 교주(敎主)!"

    그녀는 더럭더럭 흐느끼다가.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숨을 딱 멈췄다.

    '드… 드디어 왔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땀방울이 갑자기 아침 이슬처럼 차가
    워졌다. 뱀 떼를 보는 듯 처참해지고 공포스러워지는 얼굴.

    한데 문이 스르륵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서는 순간, 백응향의 얼
    굴이 아주 이상하게 뒤바뀌었다. 

    대체 무엇일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홍조가 드리워지는 것인
    가?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신랑(新郞)의 옷을 걸친 사
    내인데, 얼굴이 아주 희었다. 그는 조금 묘한 표정을 하고 들어섰
    다. 

    체념하는 표정과는 완전히 다른 냉소적인 표정.

    백응향은 그런 표정을 보며 눈썹 끝을 파르르 떨었다.

    '저런 사내가  있다니… 세상에서  제일 지저분한  것이 사내들인
    데!'

    백응향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사내들을 무시하며 살았었다.



    － 사내들은 씨내리 돼지들이다.



    적녀도에 있는 여인들은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었다.

    한데, 방금 신방으로 들어선  청년의 눈빛 두 줄기가 백응향의 그
    러한 마음을 모조리 베어  버린 것이다. 사내는 방 가운데로 들어
    섰다.

    백응향은 그제야 어느 정도 혼란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네… 네가 천하제일남(天下第一男)이냐?"

    그녀의 목소리는 떨릴 대로 떨렸다. 평소의 얼음 조각보다 냉정한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들은 말투가 그녀답
    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소!"

    청년이 입술을 벌리자, 청아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내의 눈빛에 사로잡힌 백응향은 그의 목소리에 접하는 순간, 비
    할 수 없이 야릇한 황홀감에 휘어 감기고 말았다.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또한 같은 여인들에게서는 맛볼 수 
    없는 흥분과 안도감이 느껴졌다.

    느낌으로만 스쳐 가는 여러 가지 정서들…….

    백응향 자신은 그런 느낌을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내의 얼굴을 힐끗 봤다.

    관옥(冠玉) 같은 얼굴!

    백응향이 천시했던 사내의 얼굴인데, 왜 이리도 아름다운가?

    '마음이 끌리다니, 다만 겉모습뿐이거늘… 마음을 모질게 먹자!'

    백응향은 소교주로서의 권위를 기억했다. 그녀는 애써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더러운 사내 놈!"

    그녀가 습관적으로 내뱉자.

    "나… 나는 명을 받고 들어왔소!"

    사내는 말을  더듬었다. 그는 하운비였다.  하운비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옷을 풀기 시작했다.



                                  ⑦



    백응향은 그가 허리띠를 풀려 하자, 눈을 부릅떴다.

    "네가 감히 무슨 추잡한 짓을?"

    휘익－!

    그녀의 옥수(玉手)가 허공을 갈랐다. 

    짜작－!

    소리와 함께  하운비의 왼쪽 뺨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하운비는 
    뺨을 맞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인(忍)은 그가 가장 잘하는 것이니까!

    스르륵……!

    하운비는 허리띠를 풀고 겉옷을 벗었다. 

    백응향은 얼굴이 새빨개져 후두둑 일어나며 손을 번쩍 쳐들었다.

    "내 몸에 손을 대려고? 더 이상 추잡한 짓을 하면, 너의 머리통은 
    산산이 박살날 줄 알아라!"

    그녀가 악을 쓸 때, 돌연.

    "응향! 죽을 사람은 그가 아니라 너인 듯하다. 감히 교법(敎法)을 
    무시하려 들다니……."

    방 밖에서 사자후가 들려  왔다. 백응향은 찔끔 하며 손을 내리뜨
    렸다. 목소리는 화선로의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차가워졌
    고, 더 커졌다.

    "합환주(合歡酒)를 먹어라. 술 안에 너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약이 
    들어 있으니, 일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흐흑……!"

    백응향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내일 아침, 홍건(紅巾)을 보이지 않으면 함께 죽을 줄 알라!"

    화선로는 아주 매정히 말을 맺었다. 

    홍건(紅巾)!

    붉은 수건이란 뜻이 아닌가?

    "흐흑… 야속하십니다!"

    백응향은 눈물만 뚝뚝 떨궜다. 

    하운비는 그냥 서 있었다.  그는 백응향이 순진히 우는 것을 보고 
    조금 미묘한 기분이었다.

    '생각과는 다른 계집이다.  독화(毒花)가 아니라 뜻밖에도 수선화
    (水仙花) 같은 계집이다.'

    하운비는 무뚝뚝히  서 있었다. 백응향은 소리  없이 울다가 문득 
    하운비를 바라봤다.

    "나를 비웃겠지?"

    "그럴 리가요!"

    하운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빠드득! 나는 성결하게 평생을  살려 했다. 한데, 소교주가 되어 
    이런 수모를 겪게 된 것이다."

    백응향은 남자와 함께 있어  본 일이 없는 여인이었다. 남자와 이
    렇게 마주 보게 될 줄은 얼마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처지인 것
    이다.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탁자 가로 다가섰다. 얇은 옷자락은 
    그녀의 풍만한 몸뚱이를 감추지 못했다.

    적녀교 여인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적녀경전(赤女經典)의 무공을 익혀 몸매가 잘 발달되었다.

    둘째, 적녀도의  해저(海底)에 있는  자패(紫貝)를 장복해 피부가 
    희고 나이가 들어도 주름살이 나지 않았다.

    셋째, 미녀가 아니면 죽는다는 괴이한 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백응향의 미모는 그 중에서도 유별난 것이었다. 그녀는 적녀도 초
    유의 절대미인(絶對美人)이라 평가받고 있었다. 

    미(美)라는 것!

    그것은 보통 이성(異性) 간에 영향 주는 바를 뜻한다. 여인천하에
    서 미추를 지독히 가린다는 것은 벌써 뿌리에 무엇인가 흠이 있음
    을 뜻하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백응향은 붉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녀의 젖가슴이 아주 팽팽해
    졌다. 백응향은 흰 손을 내밀어 술잔을 잡았다. 술잔 안에는 술이 
    가득 부어져 있었다. 

    합환주(合歡酒).

    한 모금이면 다 마셔 버릴 수 있는 술 안에는 열 사람을 흥분시키
    고도 남음이 있는 최음제가 타여 있었다.

    백응향은 눈물을 억지로 씹어삼키며 술잔을 입가에 가지고 갔다.

    한순간.

    "으으음……!"

    백응향은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 술잔을 내팽개쳤다.

    팟팟－!

    술잔은 던져져 천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찌나 세게 집어 던졌는
    지, 무려 일 장이나 벽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공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하운비는 술잔이 벽을 파고드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녀도는 단일 방파로  우내최강(宇內最强)이었다. 현재의 세력은 
    숭산 소림사 이상이었다.  그것은 하운비도 부정하지 못할 일이었
    다.

    "으으음……!"

    백응향은 강한  취기(醉氣)를 느꼈다.  그녀의 살결이 분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덥… 덥다……!"

    백응향은 몸을 뒤틀다가 하운비를 봤다.

    한순간, 그녀는 하운비의 입꼬리에 아주 냉혹한 웃음이 매달려 있
    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조롱하던 사내, 그  사내가 바로 자신을 비웃고 있을 줄이
    야!

    "나… 나를 비웃지 마라. 너… 너희 개보다 더러운 사내와는 다른 
    여인이니까!"

    백응향은 중얼거리다가 침상 위에 쓰러졌다.

    "헉헉……!"

    그녀는 가쁜  숨소리를 내다가 옷고름에 손을  댔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옷을 찢어 댔다.

    부욱－ 북－!



                                  ⑧



    나삼이 거칠게 찢어졌다. 투실투실한 두 개의 젖가슴이 불쑥 비어
    져 나왔다.

    "으으음, 더워!"

    백응향은 또 한 번 옷자락을 찢어 냈다. 

    옷자락이 흰  나비같이 날아오르며  그녀의 전라지신(全裸之身)이 
    보였다. 흰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조각!

    젖가슴의 골짜기로  옥류(玉流)가 흐르고,  움푹한 배꼽에 우주가 
    숨어 있는 듯.

    비소(秘所)의 울울창창함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진수!

    보검으로 깎은 듯 희디흰  다리의 선(線)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
    다. 넓적다리는 조금 풍성한 편이었다.

    "흐으윽……!"

    백응향은 완전히  취해 사지를 뒤틀었다. 그녀는  제 손으로 젖을 
    쥐어 뭉그러뜨리기 시작했다. 입술이 가볍게 벌어지고 있었다. 

    떨리며 열리는 꽃잎  두 장, 그 사이에서  나오는 하나의 붉은 꽃
    술.

    "어… 어서 나를… 나를 어떻게 해 다오!"

    백응향은 하운비에게 하소연했다.

    하운비도 나체가  되어 있었다. 하나,  묘하게도 색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백응향의 몸은 너무도 완벽했다.

    극미(極美), 색(色)의 단계를 뛰어넘은 완전한 형용!

    하운비는 처음으로 여체(女體)의 완벽성을 느꼈다. 

    '허물어뜨리고 싶지 않다!'

    하운비는 욕정을 느끼지 못했다.

    "허헉헉……!"

    백응향이 참다 못해  침상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섰다. 젖가슴이 
    덜렁거리고 두 다리 사이는 땀이 질퍽하다.

    '아쉽다. 미가 흐려지는 것이…….'

    하운비는 두 손을  늘어뜨린 상태였다. 백응향이 색녀가 되었다는 
    것은 못내 섭섭한 일이었다. 한순간.

    "으으음, 네가 너무 좋아. 나는 나의 마음을 숨길 수 없어!"

    백응향이 두 팔을 하운비의 목에 걸었다. 입술이 하운비의 입술을 
    찾았다. 하운비는 입술을 마주치기는  했으나, 더 이상 어떤 것을 
    하지는 않았다.

    백응향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녀는 하운비가 어떻게 하지 않는 것
    이 야속한 듯 몸을 비비꼬았다.

    "제… 제발… 흐흑……!"

    백응향은 눈물을 다시  떨어뜨렸다. 이번의 눈물은 고통의 눈물이
    었다. 열기가 혈맥을 팽창시키기 때문에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
    이었다.

    '이상하게도 취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하운비는 돌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성(性)은 그를 자극시킬 수 없
    었다. 하운비는 성에  마음을 허물어뜨리기에는 너무도 강하고 차
    가운 존재로 자라났던 것이다.

    "으으음……!"

    백응향은 은어(銀魚)같이 파닥거렸다.  하운비는 거목(巨木)이 되
    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반시진 정도 그렇게 흘러갔다. 

    갑자기 화선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너 하나로 인해 사내들에 대한 나의 마음이 달라졌다. 그러나 도
    법(島法)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슥－!

    문 틈에서 너무도 지독한 최음제 가루가 흘러 나와 순간적으로 방 
    안에 가득 찼다. 

    "으으음……!"

    하운비는 그 내음을 맡는 순간, 몸을 뜨겁게 달궜다.

    화선로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속을 스친다.

    "사내, 정말 묘한 존재다!"

    목소리의 여운이 사라질 때.

    "으으윽……!"

    백응향은 하운비의 팔이 조이는 아픔에 입을 벌려야 했다.

    가슴이 터져 버릴 듯한, 혼이  끊어져 버릴 듯한 아픔. 그것은 점
    차 하복부로 향해졌다. 불기둥이 몸을 태워 버리는 듯했다. 

    한순간, 그녀는 개문(開門)의 순간을 맛봤다. 너무도 갑작스레 다
    가온 상실(喪失)의 순간.

    극심한 아픔과 함께 모든 것이 혼돈되었다.

    "아아악……!"

    백응향은 자지러지는 비명 소리를 냈다. 

    그 순간의 표정, 그것은  고통스러운 표정만이 아닌 또 다른 어떤 
    표정이었다. 너무나도 큰 희열을 못 이기는 표정이랄까?

    그녀는 하운비의 목을 휘감은 손을 여전히 풀지 못했다. 

    그녀의 하체 아래 수건 한 장이 있는데…….

    뚝－ 뚝－!

    그것이 점점 홍건(紅巾)으로  물들고 있었다. 처녀를 잃었다는 표
    식, 그것이 바로 홍건이다. 그리고 백응향은 이 순간으로 인해 소
    교주에서 교주가 되는 것이었다. 

    하운비는 백응향의 몸을 부둥켜안고 있다가 정신을 잃었다.

    사람들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⑨



    화선로와 구대장로!

    열 사람은 바로 적녀교의 기둥들이었다.

    "대단한 놈입니다!"

    "최음제를 써야 정사(情事)에 응할 정도로 지독한 놈인 줄은 몰랐
    습니다."

    "사내 중 이런 사내가 있을 줄이야!"

    여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화선로는 몹시 고집스럽게 외쳤다. 

    "그래도 사내는 사내이지. 이 녀석을 거세곡(去勢谷) 부마전(駙馬
    殿)에다 내팽개치게!"

    "예!"

    한 사람이 하운비를 부둥켜안았다.

    "응향이 딸을 낳으면, 이  놈은 양근(陽根)을 잃을 것이네. 하나, 
    만에 하나  불행히도 아들을 낳을 수  있으니… 남아(男兒), 여아
    (女兒)가 구분될 때까지는 거세하지  말고 놓아 두게. 다시 한 번 
    이런 일을 겪어야 할지 모르니까. 이 지옥(地獄) 같은 일을!"

    화선로는 애써 매정히 말했다.

    백응향, 그녀는 아직도 환락경을 헤매고 있었다.

    "으으……!"

    그녀는 손으로 허공을 휘저어  댔다. 자신을 안을 사내의 품을 고
    대하며.

    '불쌍한 아이!'

    화선로는 처음으로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는 눈치였다.



    적녀도의 북쪽.

    다른 곳에 비해 황량한 골짜기가 있다. 

    사내답지 못한  사내들이 모여 사는 곳.  목소리가 곱고 몸동작이 
    여려, 세상에  나가면 고자라고 놀림받을 사람들이  천여 명 살고 
    있는 곳.

    거세지곡(去勢之谷).

    그 곳은 밖에서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도, 안에서는 허락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금역(禁域)이었다. 거세곡에는 중성(中性)만 
    있다. 한때는 사내였으나, 끌려  와 사내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농
    사 짓고 고기 잡으며 살고 있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토굴을 거처로 삼는다. 한데, 단 한 군데에 석
    옥(石屋)이 있었다. 

    방이 세 개 달린 석옥 안.

    곱상한 사내 열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을 보고 있었
    다. 벌거벗은 사내인데, 그는  거세곡 내에서 유일한 진짜 사내였
    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노을이 석옥 안을 붉게 비출 때.

    "으으음……!"

    진짜 사내가 눈을 번쩍 떴다. 순간.

    "부마! 헤헤, 깨어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저희 부마십위는 부마의 종복입니다요!"

    "부마는 교주가 아가씨를 낳으실 때까지 이 곳에서 기거하실 것입
    니다!"

    사내들은 일제히 절을 했다.  모두 짧은 치마 하나씩을 허리에 두
    르고 있었다. 깨어난 사람은 얼떨떨해 하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이 곳이 거세곡 안이오?"

    그가 자신에게 묻는 듯 말하자.

    "예, 그리고 부마는 이 곳의 지존이십니다. 물론 아가씨가 탄생하
    는 순간, 이 곳을 떠나야 하시지만……."

    "아가씨가 탄생할 때까지는 정성껏 받들어질 곳입니다."

    사내들은 남노(男奴)인데, 혼(魂)이 없었다. 모두 작고 기질이 약
    해 보였다. 적녀도란 곳은  본시 음기(陰氣)가 강한 곳이다. 사내
    들은 오래 머물 수  없는 곳이었다. 물도 그러했고 공기도 그러했
    다. 

    특히 극음지령(極陰地靈)!

    지하(地下)에서 스며 나오는 음기(陰氣)는 사내들의 몸을 작고 추
    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하운비만은 예외였다. 그는 금강불괴지신인지라, 극음지령에는 장
    애를 받지 않는 것이었다.

    하운비가 상체를 일으키자, 한 사람이 다가와 허름한 베옷을 갖다 
    주었다. 거세곡 안에는 옷(衣)이 있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랄지…….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픈 일이랄지…….

[슈퍼맨]

잼 납니다

[덕산]

즐감입니다.

[얼음골]

즐감했습니다.

[여여풍]

즐감했습니다.

[영영조아]

감사합니다

[신두]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