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2월 11일에 게재한 제4차 중동전쟁 게시물이 조금 부실했던 바 보다 추가적으로 입수한 자료들을 첨부하여 재게재합니다. 단순 재탕이 아닙니다.
![수에즈 운하 대안 모래벽을 돌파한 이집트 제3군](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677_0%3F1205052766.jpg) 수에즈 운하 대안에 구축된 이스라엘군 방어선 "바레브 라인"의 육중한 모래벽에 신속하게 통로를 개척한 이집트 제3군 공병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은 피나는 훈련을 통해 이스라엘의 허를 찌르고 신속한 수에즈 운하 돌파에 성공하게 된다. 욤키푸르 전쟁, 혹은 라마단 전쟁이라 불리는 제4차 중동전쟁은 그 동안의 승리를 통해 방심하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크나큰 일침을 가한 전쟁으로서 비록 이스라엘이 승리했다고는 하나 그 피해가 막심하였던 전쟁이다.
![이스라엘](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227_1%3F1197346562.jpg)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이집트군을 공습하기 위해 이륙하는 이스라엘 공군의 F-4 "팬텀" 전투기들. 하지만 이들은 잘 배치된 이집트군의 지대공 미사일 세례를 얻어맞고 10대 이상의 기체를 격추당하게 된다.
1967년 6월 9일, 처참하게 패배한 제3차 중동전쟁, 일명 "6일 전쟁"이 종전된 지 3년 3개월 후인 1970년 9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의 급서로 부통령인 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사다트는 취임 후 나세르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친소련정책을 탈피하면서 친서방-친미의 노선을 걷게 된다. 이집트는 제3차 중동전쟁 후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 온건국들로부터 경제원조를 받게 되는데, 사다트 이후 이집트는 온건적이며 실용주의적 방향으로 정책이 변화되고 있었다. 이집트의 이러한 정책은 제3차 중동전쟁 이후 대중동정책의 추구에 있어서 소극적이었던 미국의 중동정책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다트는 과거 3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상실했던 영토 회복을 위해 서서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3차 중동전쟁의 패배는 워낙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사다트 대통령은 우선적으로 이집트군이 가지고 있는 기술, 구조, 체계 개혁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다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인력 충원, 구조 조정,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이스라엘군을 격파할 수 있는 강력한 이집트군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 첫번째 방침으로 바로 대대적인 숙군을 단행했는데 이를 통해 대령 이상급 장교 800명이 퇴역하고 능력을 갖춘 신참 장교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물론 사다트만이 단독으로 개혁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후에 정보 사령관, 전쟁성 장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게 되는 이스마일 알리 장군은 우선 자신들과 이스라엘군의 장·단점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평가했다. 특히 그간 패전의 원인이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공군력에 있다는 것을 주시한 알리 장군은 이집트군 보병들의 대전차 전투 능력 강화에 주안점을 두어 대전차 미사일과 RPG-7 로켓포의 조작 및 숙달 훈련을 강화하고 신참 장교들을 대학생 출신들로 대거 기용하는 등 군 내부의 혁신을 꾀했다. 또한 인구가 적은 이스라엘이 피해에 민감하다는 점을 감안, 일정한 지역만큼 진격한 후 방어진지를 구축해 이스라엘측의 공세를 유도해 막대한 전투 손실을 입힌다면 이스라엘이 협상을 원하게 될 것이고 결국 이집트가 요구하는 조건을 수용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편 사다트 대통령은 1973년 6월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 회동하면서 전쟁의 목적을 피점령지의 회복에 한정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등 이스라엘과의 개전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수행했다. 이집트군 최고 사령부는 소련의 조언을 참고해 소련식 돌파와 전과 확대를 통해 상실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일명 "화강암"으로 명명된 이 작전 계획의 요지는 수에즈 운하 도하, 이후 운하로부터 주요 기동로까지의 진격, 시나이 반도 전체의 탈환이라는 3단계였다. 하지만 전쟁성 장관으로 부임한 알리 장군은 제2, 3 단계 작전을 취소하고 "사원의 첨탑"이라 불린 제1 단계 계획에 모든 것을 걸었다.
바로 이 계획이 후에 바드로 작전으로 불리는 수에즈 운하 도하 작전의 청사진이 된 셈이다. 이 '사원의 첨탑' 계획은 이스라엘군을 기만해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게 한 상태에서 병력을 집중시켜 수에즈 운하를 도하한 다음, 상실한 지역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방어작전을 전개해 이스라엘군의 공세를 유도, 이스라엘군이 보유한 모든 전력을 소모시켜 탈환한 지역을 굳건하게 장악한다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그러므로 작전술 차원으로 보자면 작전상으로는 '공격'이지만 전술적으로는 '방어'를 수행하는 셈이다. 공격작전은 매우 복잡하고도 치밀하게 구성되었는데 막대한 분량의 작전계획을 통해 진격의 구체적인 시간 계획과 탈환할 목표 및 공격 시간을 분대 단위까지 사전에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기동전의 고질적인 단점인 보병, 기갑부대, 포병의 합동작전 및 통제를 가능하게 했고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하달된 다음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계획의 수정이나 변경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알리 장군은 계획을 수립하면서도 제1 단계에는 그야말로 치밀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했지만, 제2, 3 단계에 대해서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제2 단계로 전환할 만큼 전세가 유리하게 전개될 지 미지수였고, 설사 제1 단계 작전이 예정보다 빨리 종료되어 제2 단계로 넘어가거나, 사다트 대통령의 엄명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제2 단계 작전 전환에 반대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집트군의 강도 높은 훈련은 지속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대전차 전투 훈련은 기본이었고 수에즈 운하의 교두보를 개척할 공병부대원들은 특히 혹독한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1973년 10월 6일의 개전 직전까지 무려 4년 동안 공병 부대원들은 하루 두 차례씩 완전히 분해된 소련제 부교의 부품들을 결합하고 다시 분해하는 훈련을 거듭했다. 특수부대원들과 보병들의 소련제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 사수들은 매일같이 시뮬레이터 훈련을 통해 미사일로 전차를 추적하는 것을 반복 숙달했다. 이집트군의 교육 훈련 목표는 바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상시 훈련받은 것과 같은 숙련도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스마일 알리 장군은 자신들이 보유한 소련제 T-54/55 전차로는 센츄리온이나 M48, M60 패튼 전차를 보유하고 실력이 월등한 이스라엘 전차병들을 상대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전투기 조종사들의 경우 더욱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때문에 알리 장군은 개전과 동시에 진격해 들어오는 이스라엘군 전차들은 보병의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과 RPG-7으로 구성한 화망 방어 작전으로 제압하고, 전투기들의 공습을 방어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대량의 SA-6 지대공 미사일을 도입했다. 한편으로 공습 지원 후 복귀할 전투기들이 안전하게 대기할 수 있도록 견고한 격납고들을 대거 신설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1972년 7월의 철수 이후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소련 군사 고문단이 다시 이집트에 파견되어 이집트군 병사와 장교들에게 자신들의 무기에 대한 조작 및 조종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이집트는 정보전 분야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과거 3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하급부대의 허위보고로 인해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패인을 극복하기 위해 제벨 아타카에 대규모 감청시설을 신축해 이스라엘군의 무선 통신을 감청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준비는 서서히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수에즈 운하 도하 작전의 주역이 될 공병들은 학력이 우수하고 전문 기술력을 보유하는 것이 필수였다. 이집트군 최고 사령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전까지 군복무를 면제해 주었던 대학생과 대학 졸업생들을 신규 징집하여 상당부분 해결에 성공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당시 80만의 이집트군 병력 중 약 11만명이 대학 졸업자들로 채워지는 성공을 거뒀다. 이들 공병부대의 활약으로 이집트군은 이스라엘이 구축한 바레브 라인의 거대한 모래벽을 붕괴시켰고 이후 실시된 부교 부대의 수에즈 운하 도하 작전에서도 신속하게 부교를 결합, 배치시켜 전차대를 통과시킴으로써 그 진가를 발휘했다. 이집트군 최고 사령부는 거의 모든 전쟁준비가 완료되어 가기 시작하자 이제 공세 개시일자를 선정하는데 고심을 기울였다. 그 동안의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이 선제 공격을 통한 주도권 장악에 성공했던 사례를 참고해 이번에는 자신들이 먼저 기습공격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해야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자면 자연히 이스리엘군의 방어 태세가 가장 취약해지는 시기가 적합했고 그리하여 결정된 것이 바로 유대교인들의 성일인 "욤 키푸르", 즉 "안식일"이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군이 대부분 외출이나 휴가를 실시할 것으로 예측한 이집트군 최고 사령부는 베트남전 당시 "테트 대공세"를 떠올리며 욤 키푸르를 개전일로 확정했다. 1973년 1월이 되자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의 이집트쪽 대안인 서안에서 예비군을 동원한 도하 훈련을 그 해 10월까지 무려 22회나 실시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군을 기만하기 위한 조치였고 실제 개전이 되고 이집트군 공병부대의 수에즈 운하 도하를 목격한 이스라엘군 병사들은 특별하게 의심하지 않는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또한 이집트군 정보부는 자신들의 소련제 병기들이 대부분 1960년대 이전에 생산된 노후화된 장비들이며 이 중 상당수가 실전에서 운용할 수도 없는 폐품이라는 허위정보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것을 이스라엘측이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이집트군은 정보전을 통해 자신들의 공세 의도를 은폐하는데 성공했고 이스라엘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마침내 1973년 10월 6일 이전까지 이집트군은 전차 1,000대, 야포 1,850문의 대규모 중장비들을 이동시키기 시작했고 시리아군 역시 전차와 병력을 골란 고원 근교로 이동시키는데 성공했다. 다음 날인 10월 6일, '욤 키푸르'이자 토요일 14시, 수에즈 운하 대안의 바레브 라인에 포진한 이스라엘군 진지에 포탄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이 수에즈 전선과 골란고원의 양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철저하게 수립된 작전 계획 하에 일체의 재량권이 부여되지 않은 상황 하에 약 53분에 걸쳐 실시된 이집트 포병대의 공격준비 포격에 소요된 포탄만 10,500발에 달했다. 동시에 약 250대에 달하는 이집트군의 전투기들이 이륙해 시나이 반도에 위치한 이스라엘 공군 기지와 지휘소를 공습했고 여기에 소련에서 도입한 프로그 지대지 로켓들이 가세해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와 정비요원들은 2중으로 공격을 받았다.
최초 공격은 이처럼 성공적이었다. 그 동안 이스라엘군에게 속된 말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이집트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포병대와 공군의 공습이 끝나자 숨죽이며 대기하고 있던 이집트 지상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2·제3군 예하 5개 보병사단과 3개 기계화 보병사단, 2개 기갑사단 및 다양한 독립여단으로 구성된 약 200,000명의 병력과 1,600대의 T-54/55 전차, 2,000문에 달하는 야포와 방사포들이 진격을 시작했으니 이는 이스라엘 건국 이래 맞이하는 최대의 위기였다. 이에 맞서는 시나이 반도의 이스라엘군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300대의 전차와 18,000명의 병력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골란 고원에서도 600문의 야포를 동원한 맹렬한 공격 준비 포격과 함께 1,400대의 전차를 앞세운 60,000명의 시리아군이 진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규모 병력만이 아닌 그 동안의 오합지졸 이미지가 강했던 이집트군에 대한 선입견을 깨버릴 대규모 도하 작전이 실시되었다. 공격 준비 포격이 진행된 지 15분이 지날 무렵 8,000명에 달하는 이집트 특수부대원들이 보트를 타고 수에즈 운하를 도하하기 시작했다. 포격 시작 22분이 경과할 무렵에는 이들 특수부대원 전원이 도하에 성공했고 자신들의 앞에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바레브 라인의 모래벽을 넘기 위해 대나무로 제작한 사다리들이 일제히 걸쳐졌다. 마치 고대 공성전을 방불케하는 이 장관 속에 8,000명의 특수부대원들은 수비대가 없는 모래벽을 넘는데 성공했고 이스라엘군의 방어진지를 우회해 후방으로 진출해 평소에 훈련해온대로 휴대해온 RPG-7 로켓포와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을 거치해 곧 몰려올 이스라엘 전차대를 사냥할 준비를 갖추었다. 특수부대에 이어 도착한 이집트군 공병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이들은 사전에 미리 구축해 놓은 통로를 통해 운하를 도하하는데 성공했다. 포격이 종료되는대로 몰려올 후속부대의 신속한 도하를 위해 이들은 고압 펌프를 이용해 물을 분사하여 모래벽을 붕괴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스라엘군은 자신들이 구축한 모래벽을 불도저를 이용해 철거하는데 1일 반에서 2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측했지만 이집트군 공병들은 불과 2시간 만에 이 작업을 완료해 이스라엘군의 허를 찔렀다. 모래벽이 붕괴되고 통로가 개척되자 이집트군의 PT-76 수륙양용 경전차들이 수에즈 운하를 도하했고 T-54/55 전차 500대가 우선적으로 도하해 교두보 구축을 시작했다. 공병과 특수부대의 완벽한 호흡 및 포병대의 정확한 지원포격을 통해 500대의T-54/55 전차들을 도하시키는 성공을 거두자 소련제 부교들이 실려오기 시작했다. 이 작업 역시 비교적 신속하게 이뤄져 북부의 제2군은 이 날 자정까지 약 12개의 부교를 결합해 가설하여 전차와 기계화 보병들을 도하시켰고 남쪽의 제3군은 통로 개척이 약간 지연되어 8개의 부교를 가설하는데 그쳤지만 작전은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최초의 공격 준비 포격이 시작된 지 6시간 만인 10월 6일 20시를 기해 이집트군 8만명이 수에즈 운하를 도하했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집트군의 전사자가 단 208명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이스마일 알리 장군은 제3군의 교두보 개척 작업 지연 소식을 보고 받자마자 고위급 장교를 파견해 새로운 지점을 선정하도록 지시했다. 바레브 라인에 배치된 이스라엘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점차적으로 도하하는 이집트군 전차와 기계화 보병부대에 포위되어 섬멸되었다. 이에 수에즈 운하의 교두보를 공습하기 위해 투입된 이스라엘 항공기들은 사전에 잘 배치되어 있던 이집트군의 SA-2, SA-6를 위시한 지대공 미사일 세례를 받고 여지없이 격추되어 갔다.
![이스라엘](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227_2%3F1197346562.jpg)
![이스라엘군 M48 패튼 전차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677_10%3F1205052766.jpg) "이집트군이 쳐들어왔다!" 보병의 지원없이 긴급 출동하는 이스라엘 기갑부대. 하지만 이들은 미리 매복하고 있던 이집트 보병과 특수부대원들의 대전차 화망에 걸려들어 대규모의 피해를 입고 만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하게 전개되자 이스라엘은 적지 않이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예상 외로 빠른 시간 내에 수에즈 운하를 도하한 이집트군의 작전에 이스라엘군은 우선 시나이 반도에 배치된 기갑부대를 급하게 출동시켰다. 하지만 시나이 반도에 배치된 기갑부대는 고작 아브라함 맨들러 소장의 사단 뿐이었고 그나마 이 사단 예하 3개 기갑여단 중 당장 투입할 수 있는 것은 단 1개 뿐이었다. 3차례의 중동전쟁에서 그야말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이번에도 간단하게 쓸어버리자는 생각에 보병 부대와의 연계없이 단독으로 질주했지만 그들을 상대한 것은 이집트군의 소련제 전차들이 아닌 빗발치게 날아드는 대전차 미사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기갑부대를 방불케하는 이스라엘의 기갑부대 운용 및 놀라운 전과로 인해 이스라엘은 전차 만능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는 무리가 아니었다. 당시 아랍측은 최신예 소련제 전차들을 대거 공여받은 상태에서도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패주를 지난 3차례의 중동전쟁에서 보여줬고 이는 독·소전 초반 스탈린의 지시를 받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소련군보다 더욱 절망적이었다.
![격파된 패튼](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227_7%3F1197346562.jpg)
![이집트군](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227_8%3F1197346562.jpg)
![패튼](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677_11%3F1205052766.jpg) 방심의 대가! 보병 지원없이 전차대 단독으로 돌입한 이스라엘 전차들은 결국 이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특히 덩치가 큰 미국제 M60 패튼은 새거 대전차 미사일 사수와 RPG-7 사수의 좋은 이동 표적이 되고 말았다.
![파괴된 센츄리온 전차](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677_8%3F1205052766.jpg)
![센츄리온](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227_6%3F1197346562.jpg) 이스라엘이 맷집이 좋은 전차라고 애용했던 센츄리온 역시 잘 배치된 대전차 화망에서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사전에 수에즈 운하를 도하해 완벽하게 대전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이집트 특수부대원들과 보병들의 소련/중국제 AT-3 "새거" 대전차 미사일과 RPG-7 로켓포 탄두들이 작렬할 때마다 센츄리온, M48, M60 패튼 전차 및 Ti-67 "티란"을 장비하고 있던 이스라엘 전차들은 여지없이 불타올랐고 특히 라시프 대령이 지휘하는 제14 기갑여단의 경우 10월 6일, 단 30분 간의 교전 끝에 110대의 전차 중 85대가 격파되어 여단 자체가 궤멸되는 치욕을 겪었다. 10월 6일 이후 2일 동안 시나이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700여대의 이스라엘 전차 중 200대가 대전차 미사일과 RPG-7 세례에 불타버렸고 이에 따라 이미 수에즈 운하를 도하한 이집트 2개 기갑사단의 전차들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쾌조의 진격을 감행할 수 있었다. 10월 8일 이스라엘은 아단 장군의 제162 기갑사단과 샤론 장군의 제143 기갑사단을 추가로 투입했지만 철저하게 방어준비를 갖춘 이집트군의 화망에 걸려들어 수십대의 전차를 손실하는 피해만 입었다.
![격추되는 이집트군 미그 21](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227_0%3F1197346562.jpg) 하지만 여기까지가 이집트의 무운이 다한 순간이었다. 개전 6일이 경과한 10월 12일, 마침내 전열을 가다듬은 이스라엘군은 예비군을 총동원하고 예비 기갑전력을 투입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반격을 시작해 초기 열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집트군의 측면을 공격해 그들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여기에 이스마일 알리 장군이 우려한 이집트군의 제2 단계 작전 전환 결정이 치명적인 부메랑이 되어 이집트군에게 되돌아갔다. 한편 이스라엘군은 골란 고원 전선에서 T-62 전차 등을 앞세운 시리아 기갑부대와 치열한 전차전을 치른 끝에 수도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이집트군이 수에즈 동안 지역을 확보하여 더 이상 진격하지 않고 있었다. 문제는 인접 아랍국들 즉 요르단,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기갑부대와 항공대 등을 시리아에 파견하는 적극성을 보임에 따라 사다트가 다시 공세로 나섰다는 점이다. 이미 골란 고원에서의 이스라엘의 승리가 결정적이었고 이에 따라 신속하게 주병력을 시나이 전선에 투입하여 이집트 전차대를 압박함으로써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서안에 예비부대로 남겨뒀던 2개 기갑사단의 전차들까지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스라엘](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227_4%3F1197346562.jpg) "침공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 반격하는 이스라엘군의 M107 175mm 자주포와 야전에서 정비 중인 센츄리온 전차. 아래 사진은 시나이 반도에서 잠시 진격을 멈추고 휴식 중인 이스라엘군의 센츄리온 전차와 전차병들
![이스라엘군 센츄리온 전차](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677_1%3F1205052766.jpg)
![진격하는 이스라엘군 패튼 전차](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677_12%3F1205052766.jpg)
![아랍측](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227_3%3F1197346562.jpg) 초반의 승세를 뒤로한 채 격파된 이집트와 시리아의 T-54/55 전차의 잔해
![골란 고원의 시리아군 전차 잔해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677_2%3F1205052766.jpg)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골란 고원 일대를 가득 메운 시리아군 제7 기갑여단의 T-54/55 전차와 장갑차, 기타 차량들의 잔해들. 시리아군은 대량의 소련제 전차와 장갑차, 차량들을 도입해 중동전쟁에 참전했으나 이스라엘군에게 참패만을 거듭했다.
![골란고원의 시리아군 전차 잔해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677_3%3F1205052766.jpg) 골란 고원은 시리아군 전차들의 무덤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치밀한 대전차 화망에 걸려 대량의 전차를 손실했으나 이 전쟁을 통해 손실한 수 이상의 이집트와 시리아군 전차들을 노획하거나 파괴하였다. 손실된 전차들 역시 미국이 유럽 주둔군의 전차들을 빼내 보충해 주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만회가 가능했지만 그 대가로 3차례의 중동전쟁을 통해 단련된 역전의 전차병들을 상당수 손실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골란고원](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0227_5%3F1197346562.jpg) 골란 고원에서 노획된 시리아군의 T-62 전차와 수에즈 - 카이로의 국도를 따라 행군 중인 이스라엘 공수부대원들
결국 이스라엘의 용의주도한 작전에 따라 시나이 반도에 전개한 이집트 제3군 등의 주력부대가 포위됨으로써 또다시 패배하게 되었다. 10월 25일 UN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UN군의 긴급 파견을 결정하고 28일 UN 1진이 수에즈운하에 도착함으로써 제4차 중동전쟁은 마무리를 지었으며, 11월 11일 이집트-이스라엘은 휴전협정에 조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제4차 중동전쟁을 통해 이집트와 시리아가 상당수의 이스라엘 기갑전력을 파괴시킴으로써( 비록 미국이 유럽 주둔군의 전차들까지 빼내 보충해 줬다지만 ) 3차례의 중동전쟁을 통해 실전경험을 풍부하게 쌓았던 고참 전차병들을 상당수( 이스라엘 전사자 2,250명 중 1,500명이 전차병이다 ) 손실하는 등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결코 완전한 승리라 보기 어려웠다. 사다트 대통령은 비록 전쟁에는 패했지만 초반의 승전으로 인해 탈환한 수에즈 운하 동안에 병력을 배치시킬 수 있었고 이 욤키푸르 전쟁을 통해 실추되었던 이집트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살려놓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6년 후 캠프 - 데이비드 협정에도 자신있게 나서는 기반을 마련했고 이 협정을 통해 제4차 중동전쟁으로 탈환하지 못했던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는 성과까지 덤으로 거두게 된 것이다. |
첫댓글 완전흥미진진한데요..감사해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런거 완전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넘 흥미진진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잼나고 간결하게 적어 놓으셧네요 ㄳ
새겨들어야할 교훈중 하나는 완벽한 방어선이란건 없다입니다 2차대전직전 프랑스가 자랑하는 철벽요새라는 마지노선이 독일군전차의 전격전에 뚫렸듯이 이스라엘도 첫번째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운하를 따라 쭉 펼쳐진 거대한 모래방벽을 철벽이라 믿었습니다 모래는 포탄의 폭발 에너지를 아주 잘 흡수하기에 모래방벽뒤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으면 절대 뚫일일이 없다라고 생각했는데 이집투군이 허를 찔러 간단히 뚫어버렸습니다 바로 고압펌프로 운하의 물을 퍼부어 간단이 모래를 쓿어버린거죠 참 재밋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