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진출 이후 꾸준히 성장하는 다국적 기업이 있는 반면 해외에서와 같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기업도 많다. 이들 기업들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통해 글로벌 전략에 대한 시사점을 살펴본다.
글로벌 전략은 이제 특수한 경영 전략이 아니다. 매출 확대, 선진 역량 흡수, 자원 확보, 생산 원가 절감, 규모의 경제 달성 등의 이유로 경쟁적으로 기업들이 해외로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세계 어느 곳에서도 로컬 기업들만이 경쟁하는 시장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다. 갈수록 심화되는 글로벌 경쟁 체제는 해외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출국 안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더욱 어렵게 한다. 비슷한 역량, 혹은 좋은 역량을 가진 글로벌 기업들이 진출 지역에서 같이 경쟁하고, 이들에게서 선진 경영 기법을 흡수한 로컬 업체들의 공세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동시에 치열한 글로벌 경쟁 체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기업의 지식 흡수와 공유 역량을 강조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은 세계 각 지역의 뛰어난 지식을 흡수하고 이를 자신의 역량으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국적 기업의 한국 시장 진출
세계 10위(2004년 기준)의 국내총생산(GDP)이 보여주는 시장 규모와 휴대폰 등 첨단 제품의 테스트마켓으로 각광 받고 있는 한국 시장은 글로벌 기업들의 진출로 인해 날로 경쟁이 가속화 되고 있다.
지난달 6일 대한상공회의소 발표 자료는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보고서에 따르면 포춘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2004년 기준) 중 52.6%가 한국에 진출했으며, 주력 제품의 한국 시장 점유율이 1~3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 상위 250개 회사 중 무려 55.2%인 138개 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이들 한국 진출 외국계 기업의 63.2%가 한국 시장에 대한 투자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 진출한 모든 다국적 기업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시장에 안착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수익을 달성하는 회사가 있는 반면, 글로벌 기업으로서 처음에는 화려하게 진출했지만 용두사미가 되어 시장에서 퇴출 당하는 다국적 기업들도 있다. 한국내 다국적 기업의 경영 성과도 양극화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내 다국적 기업의 양극화
한국의 모든 산업에서 다국적 기업의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요구로 시장을 개방한 수입 자동차의 경우 시장 개방 초기 포드 자동차의 위상은 높았다. 한국 시장 데뷔 1년 만인 97년 수입차 시장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했고, 98년에는 28.83%라는 높은 시장 점유율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한국 수입차 시장에 적응한 경쟁 다국적 기업들의 공세로 점유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했고 현재는 9%대에 머물고 있다. (2005년 말 기준)
반면, 비슷한 시기 한국에 진출한 BMW는 꾸준히 시장 점유율을 확대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확고 부동한 수입차 업계의 선두 그룹에 이름을 올렸다.
할인점으로 대표되는 소매 업종에서도 다국적 기업의 양극화가 뚜렷이 보이고 있다. 98년 네덜란드계 할인점인 마크로를 인수하면서 화려하게 한국 시장에 진출한 월마트는 시장의 두려움 자체였다. 하지만 7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월마트는 업계 5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계 테스코의 부상은 월마트와 크게 대비된다. 할인점 시장의 경쟁이 가속화되던 1999년 한국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테스코는 시장의 예상과 달리 불과 3년 만에 업계 5위에서 2위로 뛰어 올랐고 2005년 말 현재에도 여전히 2위 그룹을 유지하고 있다.
외식업도 비슷하다. 헐리우드 스타들이 직접 매장에 와서 프로모션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한 플래닛 할리우드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시장에서 퇴출 당한 반면, 외국보다 더 비싼 가격에 팔리는 스타벅스 커피는 한국에서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다.
세계적 인터넷 업체인 이베이와 야후 역시 양극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베이는 M&A를 통해 진출했고, 야후는 선진 포털 업체라는 장점을 가지고 한국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현재 야후는 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당황하고 있다.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서도 올림푸스와 소니는 나름의 경영성과를 내고 있는가 반면 니콘은 초기의 성공 경험이 서서히 추억이 되고 있다.
지식 역량 흡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국내의 강력한 경쟁자들로 인해 내수 시장에서 철수한 노키아는 한국의 CDMA 역량을 흡수하고 응용한 모토로라와 비교해서 지식 역량 개발에서도 실패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산업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양극화는 각 기업들이 추구하는 글로벌 전략의 성패에서 기인한다.
특히 초우량 기업으로 일컬어지는 기업들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되지 못하는 경영 성과의 양극화는 이제는 글로벌 경영이 아니면 생존할 수 없는 많은 한국 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한국 시장에서 보여준 다국적 기업의 활동을 비교해 봄으로써 한국 기업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글로벌 전략의 시사점을 찾아보자.
글로벌 전략에 대한 시사점
● 과거의 성공 방식에 대한 집착: 기존 성공 법칙을 수정하라
“Why Do Good Companies Fail?”이라는 글을 쓴 에모리대 경영대학원 제그디쉬 쉐스 교수는 초우량 기업들이 실패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등 기업들에게 과거 엄청난 성과를 안겨 주었던 요인들이 역설적으로 현재의 패배 요인이 될 수 있다. 환경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통했던 방법이 앞으로도 계속 효력을 발휘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은 현지화 전략을 수행하는 기업들에게도 큰 시사점을 준다. 해외 진출 자체가 경영 환경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한국에서 실패하는 이유 중의 하나 역시 경영 환경의 변화를 무시하고, 기존의 성공 공식을 무리하게 도입하려 했다는 점이다.
반면 한국 시장에 안착한 다국적 기업들은 자신의 핵심 역량과 성공 공식을 뚜렷하게 구분했다. 기존의 성공 공식을 버리고 현지에 맞게 수정했다. 여기에 자신의 핵심 역량을 결합하여 성과를 높였다.
한국에 진출한 세계 1위의 월마트와 영국계 다국적 기업 테스코를 비교해 보자.
월마트의 패인은 기존의 성공 공식을 철저히 적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월마트의 저가 전략을 이끌어낸 성공 공식인 도시 외곽 입점, 창고형 매장, 최소 인원 배치 등과 같은 활동은 근접성과 쾌적한 쇼핑 문화, 고객화된 서비스를 원하는 국내 고객의 니즈와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마트는 기존의 성공 공식을 수정하지 않았고 시장은 월마트와 멀어져 갔다.
반면 테스코는 달랐다. 테스코는 현지 상황과 밀착성이 높은 소매 시장의 특성상 시장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 제휴의 형태로 한국에 진출했다.
창고형 매장은 애초부터 지양했다. 한국 고객의 니즈를 반영한 백화점 같은 쇼핑 환경을 제공하는 성공 공식을 개발한 것이다. 세련된 점포 외관과 밝고 넓은 쇼핑 동선을 만들었고, 할인점 최초로 문화센터를 설치해 교육 문화 혜택을 제공하는 등 기존에 그들이 수행하지 않았던 전술을 개발했다. 여기에 자사의 핵심 역량인 선진화된 구매 및 물류 시스템을 통해 할인점 본래의 가격 경쟁력을 높여 나갔다.
외식업의 성공 기업인 아웃백과 스타벅스, 실패 기업인 플래닛 헐리우드 등도 마찬가지다. 아웃백은 한국의 현지 사정에 따라 메뉴를 조금씩 바꾸었고 현지 고객의 눈높이에 맞는 가격 조정을 했다. 스타벅스 역시 한국의 고급 커피 시장의 니즈에 주목하여 프리미엄 커피 전략을 개발했다.
반면 플래닛 할리우드는 개점 초기 하루 2천 만원이 넘는 매상을 올리는 등 성공적인 런칭을 했지만, 국내 실정에 맞지 않는 메뉴 구성으로 실패를 맛보았다.
● 로컬 역량의 과소 평가: 현지 역량을 이용하라
한국 시장이 비록 서구 선진 시장에 비해 여러 산업에서 기술과 역량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분야에서 그들에게 뒤쳐진 시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다국적 기업들은 이러한 한국 시장과, 한국 기업의 역량을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는 기업들은 한국 기업의 역량을 존중하고 현지 시장의 역량을 이용해서 자신의 경영성과를 높였다. 뿐만 아니라 현지의 앞선 기술 혹은 앞선 시장 상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공유하여 글로벌 경쟁 역량을 강화했다.
반면 현지 시장을 얕본 기업들은 시장의 역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글로벌 경쟁 우위를 확보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 LG전자, 삼성전자, 팬택 등의 국내 기업과의 경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모토로라와 노키아가 보여준 차이점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모토로라는 한국에 셀룰러 시스템과 휴대폰을 소개한 기업으로 초기 이동통신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생소했던 CDMA 방식이 표준으로 선정된 이후 한국 토종 업체에게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모토로라는 이 시점에서 한국 시장을 CDMA 전진기지로서 재인식했다. 한국 기업의 역량을 인정하고, 자체 개발을 허용하는 ODM 방식으로 어필텔레콤의 지분을 인수했다. 자사의 글로벌 히트 모델을 CDMA로 전환 시키거나,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CDMA 핸드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글로벌 시장에 내놓았다. 이러한 노력으로 세계 최고의 휴대폰 강국 중 하나인 한국에서 모토로라는 5% 내외의 시장 점유율을 꾸준히 유지했고, 글로벌 CDMA 시장의 점유율을 계속 높여나갔다. 최근에는 어필텔레콤을 완전히 합병하고 세계적으로 성공한 레이저 모델의 CDMA 버전을 북미보다 한국에서 먼저 출시 하는 등 국내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노키아는 이런 점에서 모토로라와 대비된다. CDMA 시장에 역시 늦게 뛰어든 노키아는 정형화된 노키아식 제품이 한국 시장에도 통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한국 합작사의 개발 역량을 억제했다. 한국 시장의 급변하는 트렌드 변화와 전혀 동떨어진 노키아의 제품은 시장에서 외면 받았고 결국 노키아는 한국 내수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내수 시장에서의 실패뿐만 아니라, 현지의 CDMA 역량을 활용하지도 못했다. 한국을 생산 기지로 규정하고 한국 기업의 기술과 노동력 등을 활용하여 생산기지로만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요인이 세계 휴대폰의 절대 강자 노키아가 CDMA 방식의 핸드폰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적자 기업인 삼성중공업을 인수한 후 성공적으로 부활한 볼보건설기계의 성공 요인 중 하나도 현지 시장의 존중이다. 볼보건설기계는 부품의 80%를 한국에서 생산 조달 받고 있는 등 한국의 협력 업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 느린 의사 결정: 현지에 권한을 부여하라
의사 결정의 신속성, 정합성 등이 중요한 현재 경영 환경에서 본사만의 지시로 현지에서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은 쉽지 않다. 또한 현지에 전권을 위임하면 본사 차원의 글로벌 자원, 역량 배분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원과 역량을 조달, 배분하는 본사의 역할은 다국적 기업의 기본 역량으로 여겨지고 있다.
글로벌 경쟁이 격화 되고, 제품 출시의 스피드, 신속한 고객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에서 현지 자회사의 빠른 의사결정이 성공 포인트가 되고 있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양극화 사례에서도 본사의 권한보다는 현지 자회사의 권한을 늘리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옥션과 야후를 보자. 이베이가 인수한 옥션은 처음의 성공 가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베이는 옥션 인수 이후에 그대로 경영진을 유임시켰다. 세계 26 개국의 다른 이베이 사이트와 달리 ‘옥션’ 브랜드를 그대로 사용하게 했으며, 이베이가 자신하는 중고품 거래를 강요하기 보다는 옥션이 새롭게 추구했던 신상품 경매를 지원했다. 이는 옥션의 수익성을 크게 높였다. 반면 야후는 본사와의 조율 문제로 시장을 잃어가고 있다. 국내의 경쟁 기업들이 발빠르게 네티즌들의 성향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신상품을 개발하고 프로모션을 하는 동안에 야후는 본사와의 조율로 실기를 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세계 시장을 장악한 MP3 아이팟을 보유하고 있는 애플이 한국 시장에서 부진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본사 중심의 의사결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004년 애플은 유통망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지사 판단으로 한국 내 제품의 파격적인 가격 인하를 단행했다가 불과 며칠 만에 이를 백지화했다. 하지만 원상 복귀 시킨 후 불과 열흘도 안돼 가격을 다시 내렸다. 애플 본사가 제품 출시와 함께 글로벌 판매가격을 내렸기 때문이다. 의욕적인 매출 신장 전략이 본사의 높은 벽에 부딪혀 큰 낭패를 본 것이다.
반면 유한킴벌리로 잘 알려진 킴벌리 클라크의 한국 진출은 철저한 현지 권한 위임으로 성공한 케이스다. 킴벌리는 현지 권한 위임 단계를 넘어서서 한국 시장을 성공적으로 개척한 한국 경영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아시아 태평양 사업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기회까지 주고 있다.
2000년 이후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서 꾸준히 업계 상위를 유지해온 올림푸스 역시 한국 지사에 많은 자율권을 주었다. 권한을 부여 받은 한국 지사의 경영진은 기존의 화소 경쟁보다는 ‘인물 사진’의 강조와 ‘나만의 디지털 저장 장치’를 강조했다. 이는 미니홈피 등 한국 시장이 가지고 있는 인터넷 역량을 눈 여겨 보았기 때문이다.
겸손함과 유연함이 필요하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기업들은 치열하게 활동하고 있다. 해외 진출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시기를 넘어서 이제는 진출 지역에서 지속적인 성과를 내고, 각 진출 지역의 우수한 지식을 흡수하여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는 다국적 기업들과 그렇지 못한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치열한 기업 활동 이면에 두 가지 자세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겸손함과 유연함이다. 현지 시장의 역량을 존중하는 겸손함과 필요에 따라서는 자신의 성공 공식을 수정하고, 의사 결정 권한도 넘겨 줄 수 있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글로벌 전략을 수행하려고 있는 기업들은 이 말을 깊이 새겨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