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리 |
행정리 |
세대수 |
인구 |
남자 |
여자 |
옥동리 |
옥동리 |
48 |
136 |
66 |
70 |
1987년 |
옥동리 |
58 |
284 |
147 |
137 |
2) 경지면적
(기준 2005.12.31, 단위: ha)
농가 |
계 |
전 |
답 |
과수 |
비고 |
39세대 |
59.1 |
30 |
27 |
2.1 |
|
3) 성씨분포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해남윤씨 |
21 |
전주이씨 |
3 |
창녕조씨 |
1 |
김해김씨 |
8 |
밀양박씨 |
3 |
진주강씨 |
1 |
광산김씨 |
4 |
동복오씨 |
2 |
기타 |
5 |
4) 마을회관
▶ 위치-옥동리 115-3, 설립일- 2000. 10. 06
2. 역사
1) 마을 입향과 형성
현재 마을에서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해남윤씨에 의하면 마을의 최초 입향조는 조선조 현종 때(1654년 무렵) 해남읍 연동에서 고산 윤선도의 증손 윤광서가 이곳에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2) 지명유래
동국여지승람(1481)의 기록에는 화반석이 나오는 매옥산(옥매산)의 기록은 나타나 있다. 그리고 1789년 호구총수에는 옥동일대를 황일면에 속한 언항리(堰項里)라고 기록으로 보아 이곳에 이미 취락이 형성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1914년 이전 구한말) 될 때 옥매산의 산 이름에서 옥(玉)을 차음하고, 해남 연동의 동(洞)을 차음해 옥동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3) 마을에 전해 오는 옛 지명
▶ 거멍바우(바위)- 삼지원은 본래 15m 정도의 구릉지대였는데, 그곳 뒤편으로 큰 바위가 있었다. 그 위의 작은 바위을 부르던 이름이다. 후일 공유수면 매립 확장 공사로 사라졌다. 바위가 사라지기 전까지 동네아이들의 놀이터로 쓰였고, 고동과 게를 잡기도 하였다.
▶ 시비골(골)-노로목산에서 옥동마을 쪽으로 펼쳐져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 아릿몰(마을)-현재 마을회관이 있는 옥동 2반으로 대산의 능성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대산 등성이에는 1940년대 공회당이 있었는데, 윗몰과 아랫몰 중간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공회당은 한글을 배우는 교육 장소와 마을 회관의 역할을 하였고, 1950년대 초반까지 운영되다 이후 폐쇄되었다.
▶ 어장골(마을)-현재 옥동~삼호마을 방향으로 가다 좌측 편의 옥동저수지 옆에 조성 된 마을로 이곳에는 현재 7가구 살고 있으며 오장골이라고도 불린다.
▶ 용샘골(골)-옥동삼거리에서 삼호 마을방향으로 약 300m 정도 가다보면 오른편 옥매산 기슭에 자리하는 골짜기이다. 이곳의 용샘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여 과거 1968년 김종필 국무총리가 진도를 가던 중 용샘의 물맛을 보고 10평 정도 크기의 집수탱크를 조성케 하였다. 조성과 동시 군용 급수차로 인근 지역에 물을 보급시켜 주었고, 현재까지 옥연 마을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 워낭리(마을)- 옥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 이곳은 간척공사 전 바닷가 해변마을을 이루고 약 6~7호가 살았다. 1789년 호구총수에 언항리(堰項里)라는 지명을 볼 수 있다. 또한 1740년 원을 막았다고 한다.
▶ 장골(마을)- 옥동~삼호 도로에서 삼호마을쪽으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이른다. 옛날에 이곳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꽤 길게 펼쳐진 들녘을 지나야했는데, 옥매광산의 공사 이후 많이 메워졌고, 한때 딱주리영감 내외가 수박재배를 하면서 기거하였다.
▶ 큰방죽(못)- 옥동마을 주변 사람들이 관춘 저수지를 부를 때 큰방죽이라고 한다.
▶ 화원농장(농)- 관춘 저수지 아래에 조성 된 들녘으로 본래 이곳은 1920년대 만들어진 농장이다. 본래는 삼덕포 농장이라 이르렀다.
▶ 구수개웅(내)- 관청기미 위에 있는 내를 구수개웅이라 불렀다.
▶ 용샘- 용샘은 용샘골에 있는 샘이다. 이곳의 물맛은 천하일품으로 우수영 수사가 즐겨 찾는 약수터였다고 한다.
4) 구비전승
▶ 옥매산 12골
춘정~옥동 바다를 막아 조성된 앞개 들녘은 그 면적만도 10만여 평인데, 간척공사 시(인력에 의한 제방공사를 하였던 시점) 절강(강 물줄기를 끊음)을 하고 나면 터지고 또 터지기를 수십 번 하여 골머리를 앓았다. 제방을 완성한 후에도 파원이라 명명되어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다.
목포방향으로 가는 배가 썰물에 막혀 못가고 닻을 내리고 만조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곳이 터질목이고, 간만의 차가 적어 선원들이 마실 물을 실었다는 우물이 참샘골이다.
한과 설움이 가득한 메골. 12살에 시집 온 새색시가 고된 시집살이로 곯은 배 움켜쥐고 밤 세워 걷고 또 걸어 같은 곳만 빙빙 돌았다고 하는 어장골과 어장골 넘어 장골. 장골 넘어 새벽 찬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드는 바람골,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시비골, 머무른 꽃 봉우리 제대로 피워 보지도 못하고 칼골 높은 바위에 올라가 설움 한가득 안고 떨어져 죽어 갔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오는 옥매산의 골짜기, 그리고 샛골을 타고 옥매산을 오르다보면 호굴을 만나며, 더 오르면 기우제터와 불을 지폈던 불터가 있다. 불터에서는 가정마다 나무를 한 짐씩 지고 올라와서 밤 세워 불을 지피면 그 불씨가 꺼지기 전에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3.생활환경
1) 주민생활상
우리나라 대부분의 산은 산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갈라지고 멈추고를 반복하면서 이루어진 반면 옥매산은 그와 정반대로 어느 곳에서 굴러오다 멈춘 듯 돌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전부터 옥매산은 일반적인 야산이라는 개념보다 지역의 큰 자원으로써 우리의 역사와 함께 하며 늘 주민의 곁에 있었다.
일본침략기에 옥매산은 명반석 광산으로 개발되면서 수십억 톤의 납석과 명반석을 캐내 레일을 이용하여 선창(삼지원 부근)까지 운반하고, 이를 다시 일본으로 실어 보냈다. 일본인들은 이를 더욱 효과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선창 부근에서 1~2차로 가공하려고 300여평의 공장을 지었지만, 가동 직전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 건물은 6․25 전쟁 때 인민군의 벙커로 오인되어 미 해군함대의 포탄 공격을 받았다. 당시 일본인들이 얼마나 견고한 공사를 하였는지 250mm 포탄을 맞고도 건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해군 함정이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곳은 6․25 전쟁 중에는 인민군 1개 중대가 거주하면서, 마을 대산에서 호를 파고 소규모 전투를 벌어졌다. 인민군들은 주민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고 유지들을 위협하여 소를 잡아 가려는 등 마을은 하루하루를 위기 속에서 보냈다.
이후 마을은 큰 사건사고 없이 근대화를 맞았고, 주민들의 일치단결 속에 박정희 대통령 재임 당시 별 두개의 모범 마을로 표창을 받았다.
인구는 20년 전보다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지만, 효자가 난 마을답게 하나같이 예와 효를 중요시 한다. 현재 주민들은 쌀과 겨울배추를 주 소득원으로 하며, 새우양식장과 인근 해협에서 어업을 병행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2) 교육
마을 공회당과 대개 해남윤씨 선대의 집에서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훈육하였다.
4. 마을개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확장된 마을 안길은 현재까지 계속 진행 중이고, 과거 마을회관은 주민이 합심해 신축하여 사용하다 현재는 창고로 이용되고 있으며, 2000년 들어 새로이 마을회관을 신축하였다.
마을에서 자전거 윤창현, TV ·오토바이 이암, 경운기 윤남현, 트랙터 윤춘식이 최초로 사용하였다.
5. 마을조직
일본침략 말엽 옥매산 광부들은 제주도로 강제징용을 갔는데, 광복이 되자 육지로 돌아오던 중 배 안에서 원인모를 불이나 어선은 침몰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그러나 옥동사람들 10여 명은 배에 있던 솜이불을 간신히 붙잡고 10여 시간을 떠다니다 지나가던 어선에 극적으로 구조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들은 제주계를 조직하여 형제간처럼 살았다.
1980년 이전에는 여러 개의 상포계가 운영되었으나, 1983년 모든 상포계가 주민결의에 의해 해체되고 현재 애사는 주민장으로 실시하고 있다.
▶ 마을임원
이장 |
개발위원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부녀회장 |
청년회장 |
어촌계장 |
윤춘식 |
박양동 |
윤채현 |
윤영중 |
이명순 |
윤종식 |
전화남 |
6. 역대이장
1960년대 |
윤원택 |
윤영창 |
윤영문 |
윤영권 |
윤영택 |
1970년대 |
윤영무 |
윤승웅 |
박양동 |
|
|
1980년대 |
윤영무 |
윤영숙 |
김용이 |
박양동 |
|
1990년대 |
윤승웅 |
김영민 |
|
|
|
2000년 |
윤영숙 |
윤영중 |
윤춘식 |
|
|
이장 선출은 주민의 복수추천을 받아 기명투표를 하는데,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을 이장으로 추대하고, 때에 따라서는 주민이 전형 위원을 선출하면 전형위원들이 이장을 추천하여 연말총회에서 주민의 인준을 받는다.
이정세는 각호마다 상반기 보리 1말, 하반기 쌀 1말로 해오다 요즘은 상반기 1만 원, 하반기 1만 원을 추렴하고 있다.
▣ 자료제공
▶ 구전- 윤춘식
▶ 감수- 박양동, 윤채현, 윤영중, 이명순 ▶ 담당공무원- 윤공주
◇ 옥연(玉燕)마을
1. 개관
옥연마을은 면소재지에서 18번 국도를 따라 정서쪽으로 약 6km에 이르면 도로 양쪽으로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는 부곡마을과 경계하고 옥연제, 신옥뫼산, 남쪽으로는 옥동마을과 접하며 농장제가 자리한다. 서쪽으로는 문내면 이목리와 이웃하고 옥매산, 용샘골, 북쪽으로는 성만마을과 인접하고 옥동들이 있다.
마을은 옥동초교가 소재하고 18번 국도가 지나가며, 본래 간척사업으로 넓은 농토가 생겨나 농장(農場)이라 불리었다.
1952년에는 시장이 설 만큼 유동인구가 많았으며, 당시 2,000여 명의 인구와 145호가 사는 대촌이었다. 마을의 명물로는 해남의 특산물로 각광받던 정교한 옥돌공예와 전국 유일의 유하식 상수도이다.
1) 기본현황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명)
법정리 |
행정리 |
세대수 |
인구 |
남자 |
여자 |
옥동리 |
옥연리 |
90 |
211 |
96 |
115 |
1987년 |
옥연리 |
105 |
466 |
233 |
233 |
2) 경지면적
(기준 2005.12.31, 단위: ha)
농가 |
계 |
전 |
답 |
과수 |
비고 |
43세대 |
51.9 |
34 |
17.9 |
|
|
3) 성씨분포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김해김씨 |
25 |
고령신씨 |
1 |
나주임씨 |
1 |
해남윤씨 |
12 |
남원윤씨 |
1 |
제주양씨 |
1 |
밀양박씨 |
9 |
순흥안씨 |
1 |
문화유씨 |
1 |
원주이씨 |
7 |
능성구씨 |
1 |
진주최씨 |
1 |
경주정씨 |
5 |
이천서씨 |
1 |
기타 |
17 |
남평문씨 |
2 |
안동장씨 |
1 |
|
|
청주한씨 |
2 |
현동곽씨 |
1 |
|
|
4) 마을회관
▶ 옥동리 29-19, 설립일-1974. 06.20
2. 역사
1) 마을 입향과 형성
1884년 유인방(1852-1914)이 옥동리 27번지에 주막을 시작하였고, 1915년경 유흥선이 입주하였다고 전한다.
1920년경 일본인이 삼덕포 제방을 막아 농장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1940년경 일본 한전화학회사가 들어와 옥매산을 개발하면서 각지에서 일거리를 찾아온 사람들에 의해서 마을은 더욱 번성하였다.
본래 옥동과 한 마을을 이루다가 1952년 행정구역상 분리되었으며, 현재는 김해김씨가 가장 많이 거주한 가운데 여러 성씨가 모여 혼성마을을 이루고 있다.
2) 지명유래
한때 ‘농장’이라 불리던 이곳은 광복을 맞이하여 일본식 이름을 없앤다 하여 ‘옥연’이라고 개칭되었다.
옥매산의 ‘옥(玉)’과 마을이 제비형국이라 ‘연(燕)’자를 병합하여 옥연이라 칭하였는데, 본래 제비 연(鷰)은 연(燕)자에 불화(火)를 없애고 그곳에 새 조(鳥)가 더해져야 하는데, 제비연의 한자음이 쓰기 어렵고 상용한자로 등록 되어있지 않은 관계로 1952년경 연나라 연(燕)자를 쓰게 되었다. 이때 옥연이라는 이름은 박정규에 의해 작명되었다.
3) 마을에 전해 오는 옛 지명
▶ 농장(지명)-삼덕포와 옥동 간척지를 조성하면서 많은 농토가 생겼다고 하여 일본인들은 옥연마을 일대를 농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후 농장은 1952년 옥연으로 개칭되었다.
▶ 작은당거리(거리)-과거 소정마을과 경계하는 곳에 성황당이 있어 주민들은 이곳을 ‘작은당거리’라고 불렀다. 한편 노인정이 자리하고 있는 곳을 동산이라고 한다.
▶ 큰당거리-평덕저수지로 들어가는 입구 쪽에 형성된 마을로 1980년대 7호 정도가 기거하였는데, 집단가옥 분산화 사업이 실시되면서 모두 본 마을로 들어오게 되었다. 큰당거리와 작은당거리 사이에는 성황당이 자리하고 있어, 사람들은 성황당을 기준으로 위쪽을 작은당거리, 아래쪽은 큰당거리와 아랫당거리라 불렀다.
4) 풍수지리설
마을의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을지세는 중앙부분이 제비집의 형태라고 하는 연소형(燕巢形)이다. 연소형은 대개 낮은 구릉에 혈을 맺는 관계로 묘자리로 쓰이기 보다는 마을이 들어설 수 있는 땅이라 알려져 있다.
3. 생활환경
1) 주민생활상
1920년대 삼덕포 간척지와 옥동 간척지가 조성되고 이후 옥매광산이 개발되기 전 주민들의 주업은 농업과 어업을 병행하는 형태였다.
마을에는 6․25 전쟁 때 군인과 경찰가족 3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별다른 피해 없이 지나갔다. 본격적으로 옥매광산이 개발되고부터 주민들의 일반적인 생활상은 농업과 광업으로 바뀌었다. 일본침략기에는 한때 양잠이 성행하였으나 광복 후로 사라졌고, 정미소 또한 그 무렵 세워졌으나, 이후 폐쇄되었다.
1952년 마을 뒤편에 개설된 옥연장은 1960년대에 지금의 도로변으로 옮겨져 1981년까지 2, 7일로 시장이 형성 되었다가 폐쇄되었고, 상권이 발달해 마을이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1백20여 호가 살았으며, 현재는 85호로 농가가 65호에 비농가 20호이다.
농가에서 경작하는 농지는 논 18ha, 밭 34ha로 쌀과 겨울배추가 주된 작물이고, 비농가는 옥돌공예품을 생산하고 있다.
마을의 특산품은 토속 수공예품인 옥돌공예로써, 옥공예품은 한때 해남군 최고의 특산물로 각광을 받았다. 현재까지도 옥돌 공예장인들이 소규모 생산 공장을 갖춰 옥공예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원료는 옥매광산에서 채취해 쓰고 있다.
이제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값싼 수입 옥공예품으로 예전 같은 호황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옥돌 명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는 이어가고 있다.
2) 교육
1945년 이전에는 공회당(현 김상득 집터 자리)에서 한글야학이 이루어졌는데 광복 후에도 한동안 지속 되다 소멸되었다.
심상소학교로 불렸던 옥동초등학교는 일본침략기에 세워진 학교로, 그 당시 황산지역에 농장을 경영하는 일본인 지주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1945년 전까지는 일본인 학생과 몇몇 지역유지의 자녀들이 통학하다 광복이 되면서 황산초등학교를 다니던 24회의 옥동부근 학생들이 이곳으로 전학을 오면서 옥동초등학교의 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45년 옥동초등학교의 기성회가 조직될 무렵 초대회장에는 이병호가 선출되었다. 학교건립과 관계하여 지역주민들은 외입리(법정리)와 부곡리(법정리)의 학생들의 통학을 고려해 본래 학교를 소정마을에 설립할 것을 요구했으나 결국 예산부족을 들어 기존 건물에 증축하였다.
3) 민속
정월 대보름 날 마을 전 주민이 동제를 지내고, 지신밟기를 통해 우의와 친목을 다지고 있다.
4. 마을개발
대체적으로 각 마을의 개발은 새마을 사업과 함께 본격화 되었는데, 옥연마을은 새마을 운동이 있기 전부터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마을의 수리시설은 1930년대 삼덕포 간척지와 서주지가 동시에 조성되었고, 1935년 옥동간척지에 수리시설이 들어와 비교적 농업용수는 넉넉한 편이었다.
일본침략기 때 관춘저수지의 풍부한 물을 옥동 농장으로 보내기 위해 지하관수 통로를 설치하였는데, 지금도 평덕마을 버스 승강장 도로 아래로 시설물이 보존되어 있다.
이후 경지정리가 이루어지면서 삼덕포 간척지는 300평과 150평 단위로, 옥동간척지는 600평 단위로 경지정리가 되었다.
전기는 일본침략기에 처음 들어왔고, 옥매 광산 위주로 사용되다 일반가정의 전기는 1955년경에 가설되었다. 그런데 전기공급량이 풍족하지 않아 낮에는 특선이라 하여 도정공장용으로만 쓰였고, 일반가정에는 밤에만 전기가 공급되었다.
근대화에 들어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곳은 농협창고와 지서, 의용소방대 등 주요기관들이 들어섰고, 새마을운동 당시엔 마을 안길과 농로, 하수도가 정비되었다. 또한 간이상수도를 설치하고 지붕이 개량되었다.
마을 농로는 1975년 새마을 공동사업으로 개설 확장하였고, 2001년경부터 콘크리트 포장으로 탈바꿈 되었다.
문화생활로는 TV 윤신현·정봉균, 오토바이 정봉균, 경운기 박장효, 트랙터 윤우식이 마을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5. 마을 조직
1967년 42명의 주민들이 마을의 화합과 전통을 지키는 모임으로 농악계를 창립하여 지역내 각종공연과 활동을 펼쳤으나, 현재는 소멸된 상태이다. 하지만 동네 청년과 부녀자를 중심으로 농악놀이는 활발하게 펼쳐져 왔다. 주민 중에는 현재 해남 국악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으며, 명절 때는 한자리에 모여 신명을 돋우고 있다.
▶ 마을임원
이장 |
개발위원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부녀회장 |
청년회장 |
윤길호 |
김화용 |
김명규 |
박복술 |
박공순 |
장육환 |
6. 역대이장
1960년 이전 |
윤백현 |
김복례 |
박정규 |
김문기 |
박기봉 |
한효현 |
김성길 |
윤양호 | |
1960년대 |
김귀동 |
윤신현 |
김용옥 |
|
1970년대 |
김정율 |
윤신현 |
박인구 |
김용선 |
1980년대 |
김화용 |
윤신현 |
윤영승 |
오승남 |
1990년대 |
윤영승 |
박창순 |
박상순 |
윤상문 |
2000년 |
윤상문 |
박석군 |
윤광식 |
윤길호 |
1980년 중반까지는 호당 보리 한 말, 나락 한말을 추렴하여 이장의 1년 급여를 주었는데, 현재는 각 호당 상·하반기 각각 1만 원씩을 추렴해 이장의 급여를 지급한다.
2005년 마을총회에서는 이장의 임기를 3년 단임으로 결정하여, 이장이 마을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이장선출안을 내놓았다.
▣ 자료제공
▶ 구전- 윤신현, 김화용
▶ 감수- 윤길호, 김명규, 박복술, 박공순 ▶ 담당공무원- 윤공주
1. 개관
18번 국도를 따라 옥동초교에 이르면 옥동삼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좌측 편으로 들어서 옥동마을을 지나 약 50m 쯤에 삼호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있다.
동쪽으로는 옥동마을과 경계하고 통샘골, 남·서쪽으로는 만호바다를 바라보며 조봉산, 당산, 삼지원, 떡봉산, 감투골, 장도가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문내면 용암리와 옥연마을이 인접하고 참샘, 옥매산이 있다.
마을은 원삼호마을 주위로 감투골, 삼지원, 뒷골, 장골 5개의 동네가 촌락을 구성하여 왔으며, 현재 뒷골과 장골은 인가가 없는 상태이다.
마을 뒤편으로는 옥매산이 주산으로 자리하고, 앞 쪽에는 고요한 호수 같은 바다가 말없이 펼쳐져 있지만, 고려시대에는 삼별초 의병의 항쟁지로 조선시대에는 명량대첩의 전승지로 선현의 충혼이 깃든 곳이다.
삼지원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리들의 유숙기관으로 해남 3원의 하나이며, 이곳은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해남~진도의 가교역할을 해왔다. 마을의 명물로는 물맛 좋은 참샘이 있다.
1) 기본현황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명)
법정리 |
행정리 |
세대수 |
인구 |
남자 |
여자 |
옥동리 |
삼호리 |
39 |
99 |
48 |
51 |
1987년 |
삼호리 |
44 |
235 |
108 |
127 |
2) 경지면적
(기준 2005.12.31, 단위: ha)
농가 |
계 |
전 |
답 |
과수 |
비고 |
28세대 |
44.6 |
28 |
16.6 |
|
|
3) 성씨분포
(기준 2005.12.31, 단위: 세대)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성씨 |
세대수 |
김해김씨 |
7 |
밀양손씨 |
1 |
제주고씨 |
1 |
밀양박씨 |
4 |
진주강씨 |
1 |
함양여씨 |
1 |
제주양씨 |
3 |
전주이씨 |
1 |
광산김씨 |
1 |
원주이씨 |
3 |
현풍곽씨 |
1 |
기타 |
8 |
함양조씨 |
3 |
해남윤씨 |
1 |
|
|
담양전씨 |
2 |
인동장씨 |
1 |
|
|
4) 마을회관
▶ 위치- 옥동리 206-4, 설립일-2000. 06. 22
2. 역사
1) 마을 입향과 형성
마을의 입향조는 1690년 경 해남군 옥천면에서 이거한 제주양씨와 이 시기에 입향하였던 해남윤씨라고 하며, 현재는 여러 성씨가 거주한 가운데 혼성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형성시기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옥매산 부근을 중심으로 고인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선사시대부터 부족사회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은 동국여지승람(1486) 해남현조(海南縣條)에 해남 삼원의 하나였던 삼기원(三岐院 삼지원)이 현의 서쪽 60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마을이 형성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은 고려시대 여·몽연합군과 삼별초군에게는 서로 빼앗길 수 없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2) 지명유래
삼호마을은 바닷가 쪽으로 보면 3개의 고요한 호수가 보인다(현재는 매립하여 2개만 보임)하여 삼호라 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삼호(三湖)에서 삼(三)의 어원은 고대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옥매산을 중심으로 아래에 위치하여 촌락을 이루고 살아왔던 마을은 지금의 삼호와 삼지원 그리고 옥동이었다. 옥동의 지명(1914년 이전)은 동국여지승람에 옥매산에서 명반석을 채취하면서부터 생겨난 이름이라는 기록을 따른다면, 옥동지역 또한 고대어의 해석과정으로 보면 삼지(三支)와 함께 본시는 삼호(삼지)였다.
이후 마을은 1916년 삼주(三州)로 동리 명을 변경한 후 광복과 함께 삼호마을이라 칭하였다.
3) 풍수지리설
마을의 주산은 옥매산으로, 삼호마을에서 볼 때 마을 초입부근의 옥매산 자락은 독수리가 먹이를 잡기 위해 앉아 있는 형국이다.
또한 옥매산의 중턱을 보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는데, 이곳에는 산신령이 살고 있다고 믿어 주민들은 마을 제사를 지냈으며, 자손이 없는 여인들이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4) 마을에 전해 오는 옛 지명
▶ 삼호-마을 북서쪽 100m 지점에 마을 구(舊)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앞바다를 보면 성산 마을 쪽으로 바닷물이 보이고, 마을 앞산과 옥선창 사이로 바닷물이 보이며, 혈도 쪽으로 바닷물이 보여 3곳에서 바닷물이 보인다고 하여 삼호라고 부른다고 한다.
▶ 갈섬(섬)-삼지원 남쪽에 있는 섬으로 추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고려 때 삼별초군이 나루선을 타고 군량미와 세금을 삼지원에서 가지고 갈 때 울둘목의 물살이 거세어 배가 진도 벽파로 가지 못하고 갈섬으로 밀려갔다고 한다. 이때 삼별초군이 갈섬을 보고 원망하며, 섬이 배를 따라오라는 뜻에서 추도라고 하며 따라가다의 뜻인 ‘갈’을 붙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 송도-삼지원 앞 남쪽 섬으로 솔섬이라 하는데, 예전에 소나무가 많아 불리게 되었다
▶ 석도(섬)-추도와 송도사이의 돌섬을 석도라고 하며, 물이 빠질 때는 송도와 석도가 연결되어 걸어 갈수 있다고 한다.
▶ 개구배미(논)-장구배미 위에 있는 논을 개구배미라 불렀다.
▶ 고눈물(골)-마을 앞 골짜기를 가리키는 곳으로 고노물이라고 하는데 비가 많이 오는지 적게 오는지를 가늠하는 골이다. 비가 100mm이상이 올 때는 골에 물이 흘러 홍수가 날것을 알려 주민들은 사전에 대비를 하였다.
▶ 맹매기굴(바위)-장싯고부 아래에 있는 바위 동굴로 예전에 송영감이라고 하는 노인이 기거하였다.
▶ 불당골(골)-이삭나무골이라고 하는데 마을 앞에 있는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예전에는 이삭나무가 울창하였는데 언젠가 산불이나 다 죽어버렸다는데서 불리게 되었다.
▶ 삼지원(나루터)-삼호 남쪽에 있는 나루터, 원래 삼지원은 삼기원이라고도 하며 삼기는 삼(三)과 기생 기(妓)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고려 삼별초군이 삼지원에서 군량미와 세금을 가지고 진도로 건너갈 때 태풍과 호우로 건너가지 못하여 삼지원에 머무를 때 기생들의 접대를 받으며 쉬어갔다는 말이 전해져온다.(주민 구전)
▶ 소당도(섬)-석도 남쪽에 있는 섬으로 이곳은 혈도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혈도는 임진왜란 시 왜병의 피가 모여 이룬 섬이다.
▶ 장구배미(논)-마을 남쪽에 있는 논으로 그 형세가 장구처럼 생겼다
▶ 장싯고부(모롱이)-마을 동남쪽에 위치한 고갯마루인데, 장승을 세워 두었던 곳으로 현재는 포강(늪)과 논으로 되어있다.
▶ 조금나리(개)-마을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 새우양식장이 들어서 있고 예전에 주민이 둑을 쌓아 간척을 하려고 하였다. 조금날에는 물이 빠져 둑을 쌓았고 사리발에는 둑방이 터졌다고 하여 터진목이라고도 한다.
▶ 참샛골(골)- 마을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이곳에 참샘이 있다.
▶ 소당께섬-삼호 동남쪽에 있는 섬으로 서당께섬이라고도 불리며, 가마솥 뚜껑같이 생겼다.
▶ 감태동-현재 옥선창 부근으로 이곳 골짜기에 묘를 쓰면 후손들이 발복한다는 말이 전해오는데, 어느 해에 창녕조씨가 묘를 써 진사를 하였다.
3. 생활환경
1) 주민생활상
마을은 현재 전형적인 농촌마을이 되었지만, 일본침략기에 옥매광산이 개발되면서 주민들 대부분은 광산에서 일을 하였다. 당시 일본의 강제징용으로 제주도에 갔다 광복을 맞아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120여 명의 슬픈 이야기가 현재까지 전해온다.
6·25 전쟁 때는 인민군이 마을에 들어 왔지만, 부녀자들의 슬기로움으로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
지금도 삼호감투는 그 맛이 담백하고 시원하기로 유명하지만, 1960년대 혈도간척지(현 남해산업)가 생기기전에는 많은 감투(감태)가 생산되어 마을 사람들이 감투메기에 전념하였다.
삼호 감투는 그 향기 너무나 좋아 지역의 대표적인 먹거리로 지역민들은 현재까지 그 맛과 향기를 잊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남리시장에서 생활용품을 구입하였고, 식수는 마을 공동우물을 사용하다, 후일 새마을 사업으로 상수도가 설치되었다.
마을에 최초의 전화는 유유복의 집에 설치되어 한동안 마을 공동전화로 쓰였고, 한때 주민 천홍섭이 보리소주를 내어 잠시 주막을 열었으며, 삼지원에서 윤수현이 잡화를 파는 가게를 열었다.
삼지원은 지역의 주요포구로 진도대교가 개통하기 전까지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주요 거점의 하나였다. 하지만 아직도 모래와 각종 화물의 집하장으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 주민들은 고추와 배추, 쌀을 주작목으로 하고, 낙지와 화랑게, 감투(감태) 등 풍부한 해산물을 부소득원으로 하여 생활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간다.
2) 교육
이곳에는 서당이 없어 문내면 이목리에 박정범이 훈장으로 있는 서당을 다녔다. 이후 마을에서 박형순이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아동들에게 마을 회관에서 국문과 수학 등 기초적인 초등교육을 담당하였다.
3) 민속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삼호마을 입구의 작은 동산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로 각광을 받았다. 명절이 다가오면 그네, 술래잡기, 널뛰기, 수건 놀리기 등으로 여느 마을과 같이 민속놀이가 펼쳐졌으며 현재는 점점 인구의 감소로 인해 소멸되어 가고 있다.
4) 공동우물
▶ 참샘
예부터 참샘의 물은 만병통치약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곳 샘물은 어찌나 시원하고 효험이 있었던지 아픈 부위에 물을 맞으면 금세 나아 마을사람들 뿐만 아니라 해남 서남부지역 사람들이 자주 찾던 곳이었다. 참샘의 물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았다.
참샘은 신경통이 있는 부녀자들이 많이 찾았으며, 1968년 한해 때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방문하여 물 공사를 했지만, 문내면으로 물길을 내서 주민들이 아쉬워했다.
그러나 1980년대 주변목장 측의 폐쇄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4. 마을개발
마을은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는 1970년대 마을 안길이 넓혀지고 지붕개량이 실시되었다. 이때 양홍두, 박형순, 유유복, 김남규가 주축이 되어 마을일을 보게 되었다. 당시 마을에서는 가구당 한 사람씩 나와 공동 작업을 하였는데, 새마을 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통하여 마을운영을 해 나갔다.
마을길은 장골에서 마을 회관에 이르기까지 1차적으로 시행되었고, 점점 내려와 마을 전 도로를 확장하였다.
마을에서 자전거 유유복, TV 유유복, 오토바이 박형옥, 경운기 김대장, 트랙터 김원식이 각각 최초로 사용하였다.
5. 마을 조직
1979년 26명의 회원들이 영농협력을 위한 영농계를 조직하여 운영하다 현재는 소멸된 상태이며, 과거에는 마을 애사 시에 호당 쌀 1되씩을 거출하고, 돼지 1마리를 지원하였다.
현재 유지되고 있는 마을 대동계는 당해년도 유사 3명을 정해 마을 전 주민의 식사를 제공하며 마을의 화합을 다지고 있다.
▶ 마을임원
이장 |
개발위원장 |
노인회장 |
새마을지도자 |
부녀회장 |
양회천 |
박형순 |
양홍두 |
전화남 |
김금자 |
6. 역대이장
1960년대 |
김남규 |
이순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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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
양홍두 |
김재홍 |
김영현 |
김유근 |
양홍일 |
박형순 |
1980년대 |
박형순 |
김재홍 |
김영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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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
김원식 |
강봉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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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강봉관 |
양회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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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의 선출은 원칙적으로 연말 총회에서 전주민이 참석한 가운데 주민추천에 의한 경선을 통해 선출된다. 그러나 마을화합을 위해 두 명 이상의 경선자가 나오면, 마을 임원들이 나서서 한 사람의 양보를 받는다.
▣ 자료제공
▶ 구전- 양홍두
▶ 감수- 양회천, 박형순, 전화남, 김금자 ▶ 담당공무원- 윤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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