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한반도 남부지역 철기문화의 전개
2) 가야 문화권의 철기문화
김해(金海), 금관가야라고 하는 고대 왕국이 자리잡았던 이곳의 명칭은 곧 ‘철(金)의 바다(海)’라는 뜻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김해 지역, 그리고 가야 문화권과 철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앞서 한반도의 철기시대 개시를 기원전 8~7세기, 한반도 남부지역의 철기시대 개시는 최소한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점으로 상정한 바 있다.
물론 신석기시대부터 타 지역과 다양한 교류를 행했던 곳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는 가야 문화권인 만큼, 철기문화를 접한 시기는 이보다 훨씬 더 상한될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1). 하지만 현재 밝혀진 한반도 남부지역의 제철 유적들의 편년이 또한 기원전 2~1세기를 전후하는 시기의 것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고고학적 근거 없이는 이보다 연대를 상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흔히 제철 유적이라 하면 철과 철기의 생산과 관련한 유적의 총칭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유적을 통해서 당시 상황을 추정하는 것뿐이지, 구체적인 공정 과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불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유적지는 철기를 제작 생산하는 단야공정(鍛冶工程), 즉 제강(製鋼) 유적이지 직접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제련(製鍊) 관련 유적들은 발견된 예가 진천 석장리와 밀양 사천 유적 단 2곳뿐이다.
비록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광산(鑛山)에서 철광석(鐵鑛石)을 직접 채굴(採掘)해서 사용한 것 말고도 사철(沙鐵)이나 운철(隕鐵)을 사용하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의 제련 관련 유적들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순수한 철을 산출해 이를 가공하기 위해서는 원시적인 의미에서의 제련 시설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련 관련 유적이 없다고 해서 단야공정 관련 유적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소리는 아니다. 단야공정을 했다는 사실은 곧 철제품을 만들 수 있는 원료가 존재했다는 소리이며 그 말은 곧 어디에서든 제련 작업이 이뤄졌음을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런 복합적인 일련의 공정이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로 작업장이 분화되어 이뤄졌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단야공정 관련 유적만 나왔다 해도 그 유적 전체적인 성격을 제철 유적으로 파악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하며 단야공정 관련 유적을 통해서 그 지역의 철기문화에 대한 해석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하겠다.
이처럼 제철 유적들은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출토되는 유물의 성격상 한-중-일 동양 3국의 문화 교류 흔적을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남부지역의 제철 유적을 정리하고 나서, 가야 문화권을 따로 설정하고 그 안에 있는 제철 유적을 정리해볼 생각이다. 가야 문화권의 유적은 대부분 김해시 부근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는 김해시를 중심으로 했던 금관가야가 국초, 특히 수로왕 재위시에는 신라보다 강성했다는 문헌사적 사실과 고고학적으로 일치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먼저 제철 유적 10여개 정도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① 경주(慶州) 황성동(隍城洞) 유적2)
1989~1990년까지 2차에 걸쳐 황성동유적발굴조사단에 의해 조사된 유적으로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집자리와 함께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철기제작 유구인 용해로(溶解爐)와 단야로(鍛冶爐)등, 목관묘(木棺墓), 집자리, 제철유구가 발굴된 복합유적이다.
출토유물은 석기류, 토기류, 철기류로 나눌 수 있는데 석기류는 간돌도끼 1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숫돌이 출토되었으며 토기는 무문토기와 함께 와질계의 긴 독, 주머니호, 항아리, 손잡이 항아리 등이 있고 철기류는 철도자, 철부, 철겸 2점, 철반 2점, 철괴, 철괴편, 구슬형철괴, 단조철부 2점, 무경양이철촉 4점, 단초절부 2점, 환두도자 등 엄청난 숫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용해로 16기, 단야로 12기가 확인되었는데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철광석이나 기타 철원료를 환원시켜 철을 생산하는 공정이 이뤄지는 노(爐)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생철을 용해하여 주조철부를 주조했던 용해로와 저탄소의 환원철을 단조하여 중간소재나 철기를 생산하던 단야로 등이 발견되었으므로 1차로 얻어진 철원료를 가지고 한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철기생산이 이뤄졌던 유적인 것만은 확실하다. 특히 석장리의 것과 유사한 대구경 송풍관을 비롯하여 주조철부 제작용 용범이 출토되어 고대 철부 제작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② 경주(慶州) 월성해자지구(月城垓字地區) 계림남편(鷄林南便) 유적3)
1990년 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결과, 총 16개소의 수혈유구가 확인되었으며 이 가운데 제철 유적은 총 4개소가 확인되었다. 4호 유구 서쪽편에 단야로로 추정되는 유구 1기와 함께 북쪽에 모룻돌로 보이는 대석(臺石)이 있고 다량의 철재(Slag)가 확인되었다. 5호는 평면 부정형의 수혈로서 북쪽에 소토무지와 모룻돌로 보이는 방형석이 노출되었으며 수혈 내부에서는 철재(Slag)가 확인되었다.
조사된 단야로는 거의 원형(圓形)을 이루고 있으며 단야로 주위에는 잔자갈이 둘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로의 내부에서는 철재(Slag) 및 ?I, 토기편, 도가니, 소토(燒土) 등이 출토되어 확실한 노지임을 알 수 있었고 유구 주변에는 모룻돌로 보이는 방형석(方形石)도 출토되었다.
③ 동래(東萊) 내성(萊城) 유적4)
1989년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조사한 유구로서 유적은 복천동고분군의 구릉 아래쪽에 위치한다. 이 조사에서는 총 13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는데 무문토기 수혈집자리 2동, 삼국시대 목관묘 7기, 토광묘 2기, 옹관묘 2기가 확인되었고 특히 무문토기 수혈집자리에서 일본 야요이(彌生)시대의 수구(須玖) Ⅰ식 토기5)가 출토되어 주목된 바 있다.
철기는 무문토기시대 수혈집자리 1호에서 출토됐는데 유구의 상황은 1/3 가량 파괴되었으며 남은 부분도 2, 3호의 축조로 인해 파괴된 상태였다. 유구 내부에서 2개의 주혈(柱穴)이 확인되었고 북벽에 근접하여 노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노지 내부에서는 소토가 단단하게 남아있었고 노지 주변 1m도 채 안 되는 지점에도 역시 목탄(木炭)과 소토가 확인된 바 있다.
출토유물은 앞서 언급한 야요이시대 토기와 철기 2점 등인데 특히 이중 하나의 철기가 철편이라는 점이 주목된다6). 또 다른 철기는 철괴(鐵塊)로 보고되어 있는데7) 이 철괴와 철편이야말로 철기제작과 연관된 유물이자 집자리 북벽에서 확인한 노지와도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시기는 무문토기후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실연대는 기원전 2세기 말이다.
④ 삼천포(三千浦) 늑도(勒島) 유적8)
1985~1986년까지 2차에 걸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한 유적으로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철기시대에 걸친 패총, 집자리, 무덤의 복합유적임이 밝혀졌다. 조사된 집자리 중 8호 집자리에서 주조철부 1점이 출토되었는데 소편인데다가 거의 파괴된 상태라 확실하지는 않다. 한편 이곳에서는 많은 골각기들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에는 철검형능(鐵劍形熊)의 골검(骨劍), 골각기(骨角器)의 제작과정에서 철기의 사용 흔적이 있는 것들이 몇몇 유구에서 확인된 바 있어 주목된다.
또한 8호 집자리에서는 야요이토기도 출토되었는데 그 연대가 아요이시대 중기 전반으로 편년되어 그 하한은 기원전후로 잡을 수 있으나 다호리유적 출토토기와의 비교에서 와질토기가 공반되지 않은 시기로 판명났기 때문에 다호리 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2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1세기 전반으로 편년할 수 있다.
⑤ 김해시(金海市) 대성동(大成洞) 가마터(爐址)유적9)
1994년 부산수산대학교(현재 부경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곳으로서 무문토기 말기의 토기가마와 하수도(溝), 소형석곽(小形石槨) 등이 발굴되었다. 이 중 토기가마로 추정되는 유구의 상층에서 철재(Slag)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3점 출토되었고 주위에 소토가 많이 포함된 층이나 명확한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⑥ 마산(馬山) 성산패총(城山貝塚) 유적10)
퇴적층은 동쪽(C지구), 북쪽(B지구), 서남쪽(A지구)로 나뉘어져 있으며 C지구에서 민무늬토기, 반달돌칼, 돌도끼, 붉은간토기, 김해식 토기가 출토되었고 A와 B지구에서는 김해식 토기11), 신라토기, 철기류, 오수전 등이 출토되어 이곳이 청동기시대 말기부터 철기시대를 지나 삼국시대에 걸친 수백 년간의 유적임이 알려졌다. 그 위에는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성과 석축벽이 있었으며 A지구와 B지구에서 각각 야철지가 조사되었다.
먼저 서남구패총의 경우 최상층을 제외하고 4개의 층위를 이루고 있었는데 최하층이 무문토기 층이며, 3층은 흑갈색점토층, 2층은 패곡층(貝穀層)으로 오수전과 김해식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최상층은 신라토기를 공반한 층으로 구분하였다. 여기에서 소형철제품과 숫돌, 구형장(球形狀) 석기, 토기파편을 이용한 원형토제품 등이 출토되었으며 철재(Slag)가 비교적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아울러 북구패총에서는 서남구패총과 같은 패층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유구 역시 패곡 형성전 암갈색 점토층에서 철기제작관련 흔적이 확인되었다. 유구는 별다른 형태를 갖고 있지 않지만 철재(Slag)가 서남구패총과 마찬가지로 넓게 분포하고 있었으며 각종 소형철제품과 함께 숫돌, 석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이곳의 야철지는 출토된 철재(Slag)의 분석결과, 단야재로 확인되었고 각종의 숫돌, 송풍구 등으로 보아도 단야작업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2).
⑦ 고성패총(固城貝塚) 유적13)
이곳은 1969~197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철재(Slag) 1점이 보고되었다. 이후 1974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동외동패총이라는 이름으로 재조사되었고 그 과정에서 야철지가 확인되었다. 유적은 모두 2개의 문화층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1문화층은 초기철기시대, 2문화층은 청동기시대로 보고되었다. 철재(Slag)무지의 내부에는 송푸우인 토관(土管)이 다량으로 출토되었고 그밖에 토기류, 광형동모, 검파두식 한경편 등도 출토되었다. 고성이 조선시대에는 철성(鐵城)으로 불렸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에서 철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14).
⑧ 김해시(金海市) 부원동패총(府院洞貝塚) 유적15)
이곳에서는 소형도자, 철촉 3점, 단조철모, 철균, 철추(鐵錐)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소형도자는 단면형태가 삼각형, 사각형, 원형 등으로 다양하며 용수철처럼 꼬아 만든 것도 있었다. 철촉은 3점이 나왔는데 역시 촉신에 양익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삼각형인 것과 타원형인 것, 경부가 둥근 것과 모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철재(Slag)는 표면의 부식이 심해서 원상태는 알 수 없으나 철을 제련할 당시 불량질(不良質)의 철물 찌꺼기를 내버렸던 것으로 철괴와 같이 비교적 무게가 무거운 편이다.
⑨ 김해시(金海市) 봉황대(鳳凰臺) 유적16)
1993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유적으로 몇몇 집자리와 피트에서 철괴가 출토되었으며 이외 교란층에서 송풍관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철괴가 출토된 집자리는 모두 기원후 6세기 이후로 편년되고 있다.
⑩ 승주 대곡리(大谷里) 집자리 유적17)
발굴 결과, 철기의 보급은 확실하나 전면적인 사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철촉과 공반되어 나온 석촉이나 숫돌 등으로 보아 아직도 주된 생활용구는 전시대의 석기류를 계속 발전시켜 사용해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 유물을 살펴보면 부식이 심하여 형태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철편과 삼각형만입형태의, 역시 부식이 심한 철촉이 나왔으며 소형도자로 추정되는 외날의 철기 1점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연대는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백제시대에 걸친 복합유적으로서, 기원후 1~4세기로 비정되고 있다.
⑪ 해남 군곡리패총(郡谷里貝塚) 유적18)
출토된 철기유물로는 낚시바늘, 단조철부, 철편 등인데 특히 낚시바늘은 웅천패총, 성산동구패총, 조도패총, 김해 부원동패총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출토유물은 무문토기,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를 비롯하여 가락바퀴, 어망추 등의 토제품, 석촉, 숫돌, 흠돌 등의 석기류, 철부, 철도자 등 철기류와 손칼자루나 뼈화살촉과 같은 골각기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특히 중국 화폐인 화천(貨泉)도 1점 출토되었다.
이 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4~3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원후 3세기경에 해당하는 유적으로서 전남지방에 있어서 이 시기의 문화적 공백을 메워주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김해 회현리, 부원동, 수가리, 부산 조도, 삼천포 늑도 유적, 남원 세전리 유적 등과 함께 한반도 남부지역의 철기문화를 밝히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⑫ 김해시(金海市) 수가리패총(水佳里貝塚) 유적19)
이곳에서는 많은 조개류와 타제석기, 마제석기, 갈돌과 같은 석기류와 빗살무늬, 덧띠문토기 등의 토기류, 동물뼈로 만든 낚싯바늘과 같은 골각기20)와 함께 석촉, 철도자 1점, 철촉 1점, 철겸 1점, 석촉 1점 등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보고자는 초기철기시대 패총 하층은 조도패총 하층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부산의 조도패총의 경우 기원전 2세기~기원후 1세기로 편년하고 있기 때문에 이 유적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 연대편년이 가능하다.
주목할 만한 철기관련 유물, 유적들이 나온 곳은 대개 이와 같다. 이 밖에도 부산 조도, 양산, 진해 웅천, 창원 성산동, 동래 낙민동, 마산현동 등에서도 소수의 철기유물이 출토되었지만 비중 있는 지역의 유적만 다루고 나머지는 생략했음을 미리 알리는 바이다. 한반도 남부지역의 제철 유적을 정리한 지금, 가야 문화권을 설정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 먼저 가야 문화권을 설정하기 전에 경상도의 자연지리와 금관가야의 중심부였던 김해의 자연지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경상도에는 황지(潢池)가 있어 그곳에서 나온 물이 경상도를 굽이굽이 흘러 남쪽으로 굽어지면서 낙동강이 되는데 낙동(洛東)이란 상주(尙州) 동쪽이라는 뜻이고 그 강은 김해로 들어간다고 한다1). 즉, 김해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경상도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낙동강이 최종적으로 모이는 곳이다. 경상도에는 태백산 왼쪽과 오른쪽에서 뻗어 내려오는 지맥(地脈)이 2개 흐르는데 그 지맥이 크게 합쳐지는 곳이 김해요, 70개 고을의 물이 하나의 수구(水口)로 빠져나가면서 큰 형국을 이루는 곳도 김해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 문화를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처럼, 가야 문화를 낙동강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야 문화권에 속한 여러 소국들이 점유하고 있던 지역이 늘 일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중심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낙동강 중, 하류의 서쪽 지역 일대로서 낙동강의 서쪽 지류인 황강과 남강 유역 및 경남 해안 일대의 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경상우도(慶尙右道)라고 불렸으며 이중환 또한『택리지(擇里志)』에서 같은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전기가야대에는 이보다 조금 넓어 낙동강 동쪽 지역의 일부를 차지하기도 하였으며 그 경계는 크게 보아 서쪽으로는 소백산맥의 덕유산과 지리산으로 둘러싸이고, 동쪽으로는 가지산과 비슬산으로 둘러싸였으며 남쪽으로는 남해에 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영남 지역 전체에서 서남쪽 절반을 차지한 형세인 셈이다.
또한 후기가야대에는 소백산맥을 서쪽으로 넘어 금강 상류 지역과 노령산맥 이남의 섬진강 유역 및 광양만, 순천만 일대의 호남 동부 지역을 포함하기도 하였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전라좌도(全羅左道)로 불리던 곳이다. 즉, 전기가야의 영역과 비교해봤을때 동쪽의 영토는 상실된 반면, 서쪽으로 전라도 내륙까지 영역을 확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가야 문화권을 대체로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로 잡고자 한다. 가야 문화권이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영남 지역이기 때문에 그 북계(北界)는 추풍령과 덕유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소백산맥으로, 동계(東界)는 부산과 밀양을 포함하는 곳까지, 서계(西界)는 섬진강을 넘어 만덕산, 오봉산, 내장산, 무등산, 두봉산 등으로 이어지고 순천만에서 끝나는 지점까지 정하도록 하겠다. 이렇게 가야 문화권을 설정한 이유는 전기, 후기가야연맹22)이 각각 최대 판도까지 차지했던 영역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위의 가야 문화권은 고구려에 비한다면 작다고 할 수 있지만 백제와 신라에 비한다면 결코 모자람이 없는 것으로서 한반도 남부지역에서의 가야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앞서 살펴봤던 한반도 남부지역의 제철 유적 중에서 가야 문화권에 포함된 유적들을 따로 분류해 분석하도록 하겠다. 먼저 경상남도 좌측부터 우측으로 사천의 삼천포 늑도 유적, 고성패총 유적, 마산 성산패총 유적, 김해시의 대성동 노지 유적, 부원동패총 유적, 봉황대 유적, 수가리 유적, 그리고 부산의 동래 내성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 제철 유적들은 한반도 남부지역 제철 유적들 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그만큼 전라도를 위시한 한반도 서남부 지역과 경상도 일대의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철기문화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자료라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각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가야 문화권의 철기문화를 3시기로 구분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Ⅰ기를 보면, 부산 동래 내성 주거 유적에서와 같이 철괴, 철편을 이용한 간단한 철제품을 생산하는 단련단야(鍛鍊鍛冶)가 집자리내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시기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공반된 일본 야요이토기를 근거로 기원전 2세기 말경으로 편년된다. 이와 동시대의 유적으로는 단야유구의 검출은 없었으나 주조철부 파편이 출토된 늑도 유적과 철재(Slag)가 출토된 김해 대성동 노지 유적을 들 수 있다.
늑도 유적에서는 정식으로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주조철부편 외 판상철부편(板狀鐵斧片), 철검봉부편(鐵劍棒部片)이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파편을 이용한 간단한 단야작업의 가능성이 있다. 골각기 가공에 단조철기인 도자와 같은 철기흔(鐵器痕)이 있는 것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이 시기부터 간단한 공구가 제작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셈이다. 늑도 유적에서 철기가 출토된 시기는 공반된 후기무문토기의 편년과 와질토기가 전혀 출토되지 않는 점으로 미뤄봤을때 창원 다호리 1호분23)보다 약간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기원전 2세기 이후의 목관묘 단계에서 철기가 다량으로 출토된 곳인데 무기류를 비롯해서 공구류, 농구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기유물과 함께 청동검, 청동투겁창, 청동거울, 청동종방울 등 다양한 청동기유물도 출토된 곳이다. 철검, 철촉, 철모, 철과 등의 철제무기는 그 형태와 종류가 서북부지역의 세형동검 문화기와 유사하며 특히 철검은 손잡이와 손잡이장식끝을 청동으로 만들어 이전의 전통을 계승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철모(鐵?-철제투겁창)는 형태상으로 봤을 때 대동강 유역의 위만조선시대 단조철기문화와의 연관성이 인정되고 있다24).
농구류와 공구류를 보면 역시 중국 것과 다른 독특한 형태들이 보이는데 나무자루가 달린 도끼나 끝부분을 말아 자루 끼우는 부분을 마련한 따비25)는 청동기시대 이래로 계속 사용된 전통적인 이 지역 농구류로 보인다26). 이는 이 당시 한나라에서는 이미 삽, 괭이, 쟁기가 보편적인 기경구(起耕具)로 이용되고 있었는데 반해 기원전 1세기 무렵까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따비류와 괭이가 기본적인 굴지구(堀地具)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27).
앞서 늑도 유적에서는 타문화권과의 활발한 교류를 증명하는 다양한 유물들과 함께 철기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곳에서는 낙랑군 계통의 중국식 철기보다는 한반도 서북부지역에서 전래된 철기문화 양상이 확인되고 있다. 즉, 낙동강 하류의 가야 문화권에서는 북부지역으로부터 남하한 제철집단에 의해 철 생산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집단의 성격은 중국 계통이 아니라 한반도 서북부의 청동기 제작 집단이 철 생산 기술과 단조 기술을 수용, 발전시켜 철기를 제작했음을 반증하는 것임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야 문화권의 철기문화는 앞서 살펴봤던 한반도 남부지역의 철기문화와 같이 북동으로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 북서로는 우리나라 고유의 금속가공 기술과 중국계 철기문화를, 남으로는 중국 화남지방의 철기문화까지 골고루 받아들였던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위만조선 계통의 금속가공 기술과 경상도 지역 토착적인 금속가공 기술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타문화를 받아들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다양한 철제품이 중국 것과는 다르고 한반도 서북부 지역의 것과 보다 가까우면서도 또 특이한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또한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는 훗날 철정(鐵鋌-덩이쇠)으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판상철부가 다량 출토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쇠를 다루는 단야도구의 경우, 다호리 17호분의 쇠망치가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의 김해 양동리 유적과 구지로 유적은 철기의 종류도 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량도 매우 적어서, 다호리 유적과 크게 대비가 된다. 다호리 유적에서 다량의 철기가 생산된 것은 창원 외동 성산패총의 야철 유적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당시 목관묘 단계에서의 철 생산 및 철기 제작은 창원 지방이 가장 선진적이었고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8).
이들은 한군현 설치 이후 낙랑군과의 교역을 통해, 혹은 가야 문화권으로 이주하는 유이민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중국의 철기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며 이를 중국 화남지방과 일본열도의 왜 사이에서 매개체로 이용해 해상교역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전 1세기 고구려의 한 지파가 내려와 백제를 건국하기 이전, 한반도 중부의 한강 유역과 한반도 서남부의 금강, 영산강 유역에는 마한(馬韓)이라고 불리는 소국연맹체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동쪽의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에 훗날 가야 건국과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울 창원 다호리 제철집단이 수준 높은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국제 교역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29). 아직까지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서남부에도 가야 문화권과 대등한 제철 유적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역에도 역시 해상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철기문화를 갖춘 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30).
이처럼 자체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타문화권의 다양한 철기문화를 섭렵해서 독자적인 철기문화를 이루며 발전하던 가야 문화권의 Ⅱ기를 보도록 하겠다. 경주 황성동 유적을 비롯해서 그와 동시대의 유적을 꼽으라면 김해 양동리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등이 있을 것이며 이 시기의 연대는 기원후 2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창원 지역의 철기문화가 급속하게 쇠퇴하고 기원후로 넘어오면서 김해와 부산 등 낙동강 연안으로 고도의 철기문화가 등장하는 것은 곧 창원 지방에서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 철기문화의 중심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는 북방에서 남하한 일단의 집단이 토착세력을 정복하고 기원후 1세기 중반, 낙동강 연안에 가야(加耶)라는 왕국을 건국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31). 또한 보다 집중된 권력을 가진 정치체가 등장함과 동시에 중국 한나라의 선진문물이 추가로 유입되면서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교역이 더욱 활발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이르면 전체적으로 철제품의 부장량이 급증하면서 철과가 사라지고 대신 장검과 환두대도(環頭大刀)가 나타나며, 보습이나 쇠스랑 등의 농구류와 철제재갈 등의 마구류가 새로이 등장하고 철제도끼도 다양하게 발전한다. 그리고 2세기 후반에 이르면 창원 상동동 3호 석관묘, 김해 양동리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등에서 판상철부형 철정이 대량으로 출토된다. 이들은 1,000℃ 이상에서 열을 가하여 성형된 후에 자연 냉각되어 탄소 함량이 거의 없는 순도 높은 강(鋼)이면서도 철기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미리 만든 중간 소재이면서, 화폐의 기능을 가진 철정이었음을 짐작케 하나 4세기 후반 이후의 전형적인 철정과는 달리 판상철부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창원 다호리 1호분에서는 두 종류의 목제병(木製柄)이 장착된 채로 출토되어 철부(鐵斧)로서의 기능이 확인되었으나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235호 목곽묘 30매, 162호 목곽묘 40매, 280호 목곽묘 10매 등 10매 단위로 묶여서 출토되어32) 이 시기에 이르면 도끼로서의 실용성이 거의 없는 판상철부가 다른 목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삼국지』에 기록된 3세기대 변진 지역에서 화폐처럼 사용했고 또 각지로 수출했다는 철의 형태가 바로 이와 같았을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로서는 기원후 2세기 후반의 김해 양동리 162호 목곽묘에서 출토된 판상철부형 철정이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1세기부터 이미 단야구와 각종 철제품이 출토되는 것으로 봐서 창원 다호리 제철집단은 그 시점부터 철을 각지로 수출하고 또 화폐로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형태는 역시 판상철부형 철정이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형태로 가야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철정은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물품이었을 것이며 4세기 후반 본격적인 형태의 철정이 대량생산됨으로써 오늘날의 달러화, 유로화처럼 당시 가야 문화권의 철정은 국제 화폐였을지도 모른다.
이후 Ⅲ기에 이르게 되면 단야유구가 지역적으로 넓게 분포하게 되는데 시기적으로도 거의 동일한 시기에 공시성(公示性)을 가지고 출현하게 된다. 특히 제련에서 단야에 이르는 일련의 공정이 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전문집단(專門集團)이 등장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33). 이 시기는 후기와질토기의 마지막 단계와 도질토기의 발생단계로 보이는 기원후 3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며 이후 4세기 전반까지를 중심연대로 보고자 한다. 이 시기의 단야유적은 거의 집자리 유적에 집중되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집자리 조사가 이 시기에 집중된 까닭도 있지만 단야 공방이 이처럼 소규모 집단까지 보급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34). 즉, 그 이전부터 제철집단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으며 이 시기에 중앙의 거대한 제철집단을 중심으로 각지에 소규모적으로 제철집단이 독립적으로 생겨났음을 추정할 수 있는 셈이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기원후 1세기 가야가 건국되면서 기원후 2세기까지 철기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에 수반된 사회 발전에 따라 3세기 후반에는 장식성이 강한 쇠투겁창이나 미늘쇠 같은 비실용적인 의기와 무력의 상징인 철제 갑주 등이 부장되고 쇠화살촉이 다양해진다. 4세기 이후에는 쇠못으로 철판들을 결합시킨 판갑옷(板甲)같은 철제 갑주류가 부장되며, 북방계의 미늘갑옷(刹甲)과 마구류 같은 새로운 출토품들이 출토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가야 판갑과 함께 단야구가 집중적으로 김해 대성동, 부산 복천동, 김해 퇴래리 등지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당시 철 생산과 철기 제작의 주체가 바로 낙동강 하류 지역에 세력을 점하고 있던 그들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원후 3세기에 이르는 갑작스런 변화를 김성호는 비류백제35)의 가야제국 정복이라는 사건으로 설명한다. 그는 당시까지 학계의 상식으로 통하던 마한, 진한, 변한 삼한(三韓)이 백제, 신라, 가야 삼국(三國)이 되었다는 논리를 과감히 폐지하고 3세기대 기록인『삼국지』의 삼한은 비류백제가 재편한 통치체제라는 주장을 편다36). 그는『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년을 새롭게 해석해 칠지도(七支刀)가 백제에서 일본 신공황후에게 건네진 때는 230년이라고 하였다. 즉, 종래에 칠지도에 적힌 그 연호를 동진의 태화 4년(360)으로 보는 견해를 뒤집고 위의 태화 4년(230)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신공 49년 3월조37)의 가야 침공을 비류백제가 주도로 하는 비류백제 ? 왜 연합군의 가야 제국(諸國) 침공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의 견해는 상당히 참신하다고 할 수 있는데 변한과 가야의 선후관계를 새롭게 규명했다는 데에서 주목할만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227년, 비류백제에 의해 가야 제국이 멸망하고 3세기 후반에서 4세기에 걸쳐 가야 문화권의 철기문화가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급속하게 발전하는 것에 어느 정도 문헌사적인 고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기존 학계의 견해처럼 전기가야가 4세기대까지 지속되었다면 3~4세기에 일어나는 고고학적인 변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의 변화에 대해서 다른 견해도 있다. 3~4세기 무렵, 낙동강 하류에는 유물의 대격변이 발생하는데 북방 문화적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비(非) 고구려계, 오히려 북방 유목민의 문화요소를 갖는 유물이 급작스럽게 등장하게 된다. 신경철은 이를 두고 ‘북방의 습속이 한반도 북부와 중부를 생략한채 북방과 거리상 가장 떨어진 한반도 동남단인 낙동강 하류 지역에 마치 날아온 듯이 등장하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38).
먼저 고구려나 백제 등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는 도질토기, 중국 월주요의 영향을 받은 화북지방의 양이부호(兩耳附壺)와 신라, 야토기로 불리는 토착문화의 토기가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도질토기가 등장하고 있다. 또한 거의 동시에 순장(殉葬)이 유행하는데 이 역시 삼국시대 영남의 전역에 파급되어 이곳에서만 한정적으로 행해진 특이한 습속이었다는 것이다39). 즉,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에 있어서 무의미한 노동력의 상실, 즉 갑작스런 순장의 등장은 당황스러운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 밖에 철제마갑과 승마용 마구를 비롯한 소위 오르도스형 청동솥도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3세기 말, 위와 같은 문화 양상을 갖추고 있는 목곽묘가 일찍이 그 지역에 있던 선행분묘들을 파괴하면서 자리잡는다는 사실이다40). 분묘는 제사(祭祀)의 장으로, 이는 자신들 선조(先祖)와의 계승관계를 확인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분묘 파괴 행위는 기존의 계승 관계를 단절시키는 새로운 집단의 유입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41).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문화의 묘제가 목곽묘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부여와 연결시켜 부여의 일부 기마민족이 한반도 동남부로 남하해 정착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고42), 최근에 요령성에서 조사된 일련의 무덤들을 부여족의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43).
물론 이에 대해서 비판하는 입장도 있다. 남하한 집단은 부여가 아니라 고구려를 침입했던 위나라 관구검의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오환-선비족이라고 보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44). 그들이 관구검군에 소속되어 고구려로 침입했다가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면서 고구려군에게 쫓겨 동해안 루트를 따라 신라 지역으로 들어갔고, 이후 가야 지역에까지 침입했다는 것이다. 즉, 부여가 남하하기에는 아무런 문헌사학, 고고학적 근거가 없지만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은『삼국사기』가 전하고 있으며45) 중국측 사서에도 등장46)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북방문화가 갑작스럽게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단순한 문화교류로 끝날 문제가 아니며 부여에 북방 문화 요소가 일부 나타난다고 해서 바로 부여를 연결시키는 것 또한 모순이 많다는 것이다47). 한편, 한반도 동남부에 나타난 북방 문화의 흔적을 부여의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해당 지역 사이의 전반적인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고 일부 유물이나 유구에서 보이는 단편적인 특징이나 역사 기록의 간략한 언급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48).
또한 김용만은 그 존재는 부여도, 북방 유목민도 아닌 바로 고구려였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복천동이나 함안, 고령 지산동, 경주 황남동 등지에서 나온 각종 북방 문화양상과 철제마구류들은 관구검군을 추격하여 이후 신라 지역까지 진출한 고구려군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광개토태왕비에 나온 종발성(從拔城)을 김해 또는 부산 지역으로 추정하면서 고구려군이 이곳을 차지한 이후에 그냥 철수하지 않았으리라고 한다. 즉, 고구려군이 그 곳에서 주둔하였고 당연히 고구려를 통해서 북방 문화가 그 지역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49).
기원후 4세기의 가야사는 특히나 밝혀진 것이 없어서 여러 이론(異論)들이 많은데 일단은 이 시기 가야 문화권이 타문화권과의 접촉 과정 속에서 외부 세력이 유입되는 등의 격변기를 거쳤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Ⅲ기에 속하는 시기에 가야의 철기문화 자체가 근본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전기가야연맹 시기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문화양상을 보이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4세기 후반이 되면 철정이 규격화되고 대량생산화되는데 이는 곧 독자적인 제철집단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다. 특히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철정을 보면 화폐처럼 길이와 무게의 비율이 일정하게 정형화되어 있어 값이 싼 소형철정으로는 쇠화살촉이나 손칼과 같은 작은 철기를 만들고 값이 비싼 대형 철정으로는 쇠투겁창이나 괭이, 쇠스랑과 같은 큰 철기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가야의 철정이 규격별로 정형화되었다는 것은 곧 당시의 화폐, 도량형 통일여부도 알려주며 한편으로는 가야 철정이 국제화된 규격으로 활용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50).
동시대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나온 단면 사다리꼴 주조철부의 용범과 실물들을 보면 일부는 화폐 기능을 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지만 만약 이를 가지고 철기를 제작한다면 재용융(再熔融)을 통한 탈탄(脫炭)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불편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만큼 가야 문화권의 제철기술이 신라 지역보다 선진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기원후 5세기에 접어들게 되면 이전의 목곽묘가 점점 사라지고 수혈식 석곽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 시기의 특징적인 현상이라면 낙동강 하류 지역의 철기문화가 가야 문화권 전역으로 확산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지역마다 독창적인 철기가 출토되고 있어 철기에 따른 지방색을 찾을 수도 있게 된다. 이러한 철 생산 기술의 발달과 전파는 낙동강 하류 김해 지방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전기가야연맹, 혹은 3세기에 외부로부터 이주해온 북방 외부세력의 제철집단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면서 김해 지역의 제철집단이 가야 각지로 흩어졌음을 시사해준다.
이와 관련지어 400년에 이뤄진 광개토태왕의 낙동강 유역으로의 원정이 주목되는데 북방에서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갖추고 있던 고구려의 보기(步騎) 5만이라는 대군이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밀려오자51) 가야 문화권의 철기문화가 순식간에 와해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가야 문화권은 고구려의 위세를 입은 신라에 의해 재편되고 후기가야연맹이 5세기에 성립되지만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 속에 치여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그라지고 마는 것이다. 가야 문화권의 철기문화에 대해서는 일단, 후기가야연맹이 성립되기 이전까지만 논하고 후기가야연맹, 즉 대가야 시대의 철기문화나 국가발전상에 대해서는 3장 3절, 가야의 철기문화와 국가발전에서 따로 논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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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태식 블로그-역사문화라이브러리(http://blog.yonhapnews.co.kr/ts1406). 2005.9.6일자 연합뉴스 기사를 보면 무려 8천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는 한반도 최고(最古)의 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국립김해박물관(관장 김정완)은 경남 창녕군 비봉리 신석기시대 유적 최하층에서 통나무를 이용해 만든 선박을 확인했다고 5일 발표했으며 이 선박은 비봉리 유적 중에서도 제2피트(조사구덩이) 제5패층 아래서 출토됐다. 고로 배가 확인된 지점은 해수면보다 2m 가량 낮은 곳이며 비봉리 유적 중에서도 신석기시대 초창기 문화층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지금까지의 신석기시대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뒤엎은 사건으로서 상당히 오래전부터 해상교역이 일반화된 현상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2) 慶州隍城洞遺蹟發掘調査團, 1990,『慶州隍城洞遺蹟 第1次 發掘調査 槪報』, 國立慶州博物館, 大韓住宅公社.
慶州隍城洞遺蹟發掘調査團, 1990,『慶州隍城洞遺蹟 第2次 發掘調査 現場說明會 資料』, 國立慶州博物館, 大韓住宅公社.
3) 경주문화재연구소, 1991,「계림남편 발굴조사」,『연보』2. 보고내용에는 유구조사 내용만 있고 유물에 대한 보고는 없다.
4) 宋柱鉉, 河仁秀, 1990,『東萊福泉洞萊城遺蹟』, 釜山市立博物館 遺蹟調査報告書 5.
5) 鄭漢德, 2002,『일본의 고고학』, 學硏文化史, p.165~171. 야요이시대 중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에 이르면 기면을 마연하여 주(朱)를 입힌 항아리, 호, 고배 등이 만들어지는데 하나같이 대단히 우아하고 또한 묘지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제사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되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북부 큐슈에서 성행한 스구(須玖)식 토기다. 스구식 토기는 늑도유적 등 한반도 남해안 지방에서도 출토되는 만큼 양 지역 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하겠다.
6) 孫明助, 1996,「韓半島 中-南部地域 古代鐵器生産技術과 發展過程의 硏究를 위한 試論」, 동의대학교 대학원(석사), p.14. 발굴보고서에는 이 철기를 철촉이라 하였지만 저자는 두부의 하단부를 이루는 부분이 단면 장방형인 점으로 보아 철촉보다는 철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7) 김태식, 2002,『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2, 푸른역사, p77. 저자는 이것을 철괴가 아닌 쇠화살촉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철편 유물 또한 형태를 제대로 할 수 없으며 금속학적 분석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철기의 성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8) 釜山大學校博物館, 1989,『勒島住居址』, 釜山大學校博物館 遺蹟調査報告書 13.
9) 釜山水産大學敎博物館, 1995,『김해 동상, 대성토지구획정리지구내 유적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
10) 李浩官, 趙由典, 1976,「城郭 및 北歐貝塚 發掘調査報告」,『馬山外洞城山貝塚發掘調査報告書』,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崔夢龍, 1976,「西南區貝塚發掘調査報告」,『馬山外洞城山貝塚發掘調査報告書』, 文化公報部 文化財管理局.
11) 國立文化財硏究所, 2003,『韓國考古學事典』, 학연문화사, p.162~163. 주로 한강 이남에 분포되어 있는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이다. 적갈색 및 회청색의 경질타날문토기로서 김해 회현리 조개무지를 표지유적으로 하는 데에서 김해식 토기 또는 김해토기라고 불리게 되었다. 저화도의 민무늬토기와 달리 보통 900~1,00℃의 고온으로 구웠으며 이러한 고온은 야철 기술의 발달과 관련되는 지붕을 가진 가마의 사용으로써 이루어졌다.
12) 김정배, 1977,「한국의 철기문화」,『한국사연구』16, 한국사연구회.
13) 金鐘澈, 徐五善, 申大坤, 1992,『고성패총』, 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24, 국립중앙박물관.
金東鎬, 1984,「固城東外洞貝塚」,『上老大島』, 東亞大學校博物館 古蹟調査報告 8.
14) 尹鐘均, 1998,「古代 鐵生産에 대한 一考察-中南部地域의 考古學的 成果를 中心으로」, 전남대학교 대학원(석사), p.8.
15) 沈奉謹, 1981,『金海府院洞遺蹟』, 東亞大學校博物館 古蹟調査報告 5.
16) 釜山大學校博物館, 1994,『김해봉황대유적 발굴조사 현장설명회자료』.
17) 최몽룡 외, 1989,『住岩댐 水沒地域文化遺蹟 發掘調査報告書Ⅵ』, 全南大學校博物館.
18) 崔盛洛, 1987~1989,『海南 郡谷里貝塚Ⅰ,Ⅱ,Ⅲ』, 木浦大學校博物館.
19) 부산대학교박물관, 1981,『김해 수가리패총』.
20) 이영식, 2000,「문헌으로 본 가락국사」,『가야각국사의 재조명』,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가야사 정책연구위원회, p.8. 그는 최초의 김해인은 기원전 25세기경에 살았으며 그 흔적이 수가리 패총에 남아있다고 한다. 여기서 농경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수렵과 어로로 경제생활을 영위하던 단계가 기원전 10세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인접한 동삼동패총이나 통영의 연대도, 욕지도패총의 흑요석제 화살촉에서 확인되듯이 대한해협을 통한 교류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구간사회가 구지가를 부르며 어로에서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祭儀)를 벌이고 있던 점을 감안하여 이들의 생활 풍습이 구간사회에까지 계승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기도 하였다.
21)『택리지(擇里志)』,「팔도총론(八道總論)」,<경상도조(慶尙道條).
22) 김태식, 2002,『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1, 푸른역사. 저자는 가야사를 전기가야사(기원전 1세기~기원후 4세기말)와 후기가야사(5세기 초~562년)로 구분해 이해하고 있다.『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를 보면 질지왕을 기점으로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눠지는데 전기가야의 왕력이 비정상적으로 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곧 전기가야사가 기원후 4세기가 아닌 그 이전에 어떤 이유로 단절되었다가 질지왕 등장을 기점으로 다시 복권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고로 저자의 시대편년에 적극 동조할 수는 없지만 시대명칭만은 똑같이 사용하기로 하겠다.
23) 國立文化財硏究所, 2003,『韓國考古學事典』, 학연문화사, p.247. 한편 이곳에서는 각종 청동기, 철기, 칠기 등 수많은 부장품이 통나무널과 함께 완벽한 형태로 출토되어 주목되었는데 특히 부장품 중에는 다섯 자루의 붓이 포함되어 있어 한국에서의 고대문자 사용에 대한 고고학적 물증이 될 수 있으며 원삼국 초기 대외교역의 서사용구(書寫用具)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24) 이희준, 1995,「토기로 본 대가야의 권역과 변천」,『가야사 연구』, 경상북도, p.422~426.
25) 박호성, 안승모, 2001,『한국의 농기구』, 어문각. 그들은 이 다호리 지역에서 발견된 따비가 경주 조양동, 울주 하대 등지의 출토훔과 비교했을 때 그 시원형(始原形)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26) 김태식, 2000,「가야연맹체의 성격 재론」,『한국고대사논총』10,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p.181~190.
27) 이현혜, 1990,「三韓社會의 농업 생산과 철제 농기구」,『歷史學報』126, 歷史學會, p.54~55. 그녀는 이런 종류의 따비가 날이 짧고 폭도 좁아 흙을 깊이 하고 아래위로 뒤집어엎기에는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파종하는 부분만 일부 갈거나 자갈 많은 굳은 토양에서는 농경문 청동기에 새겨진 것과 같은 끝이 둘로 갈라진 나무 따비가 더 편리할 수도 있다고 한다. 즉, 한반도 남부에서 철제 기경구를 늦게 받아들인 부분은 이런 지역적인 특성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28) 이병도, 1937,「삼한문제의 신고찰(6)」,『진단학보』7, 진단학회.
이종욱, 1980,「신라상고시대의 육촌과 육부」,『진단학보』49, 진단학회.
29) 李健茂 외, 1991,「義昌 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Ⅱ」,『考古學志』3, 韓國考古美術史硏究所. 이곳에서 출토된 성운경, 오수전, 대구, 칠초철검, 환두대도 등은 중국적 요소인 한식유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와 비슷한 유물이 경주 조양동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 이것은 철기시대 초기에 한반도 남부지역과 한(漢), 낙랑(樂浪)과의 교섭이 활발하였음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30) 李健茂, 1990,「扶餘合松里遺蹟出土 一括遺物」,『考古學志』2, 韓國考古美術史硏究.
池健吉, 1989,「長水 南陽里 出土 靑銅器, 鐵器 一括遺物」,『제13회 韓國考古學全國大會發表要旨』, 韓國考古學會.
비록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가장 빠른 시기의 철기가 서해안에서 출토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 지역이 서북부 지역과 가깝기 때문에 이런 결과는 당연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서북부 지역에서 출토되지 않는 독특한 형태의 철착(鐵鑿)과 철부(鐵斧)는 서북부 지역에서 철기문화가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남부지역 독자적인 철기문화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해안에서 이후 백제가 건국되면서 해상활동을 통한 타문화권과의 교류도 활발해지지만 기본적으로 기원전 2~1세기 무렵에 활발한 철 생산이 이뤄진 곳은 한반도 동남부, 낙동강 유역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철 생산의 우세는 백제가 국가 체제를 확실하게 정비하는 3세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31)『삼국유사』권2,「기이(紀異)」,<가락국기조(駕洛國記條)>,“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戶,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중략) 又有賊徒, 謂廟中多有金玉, 將來盜焉. 初之來*<者,也>, 有躬?甲?, 張弓挾矢, 猛士一人從廟中出, 四面*<兩{雨}>射, 中殺七八人, 賊徒奔走. 數日再來, 有大?長三十餘尺, 眼光如電, 自廟旁出, 咬殺八九人, 粗得完免者, 皆??而散. 故知陵園表*<裏,裡>, 必有神物護之.”
32) 철의 왕국 가야(http://www.gayasa.net/gaya/index.html)
33) 孫明助, 1996,「韓半島 中-南部地域 古代鐵器生産技術과 發展過程의 硏究를 위한 試論」, 동의대학교 대학원(석사), p.36. 저자는 이러한 철기생산전문집단의 발생은 우선적으로 원료가 되는 철광산의 발견과 대량 생산이 가능한 노의 기술개발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이는 자체적인 기술발달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의 철기 생산기술이 당대의 최첨단 문화인 점을 감안한다면 타 지역으로의 강력한 문화적 접촉에 의해서 변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철기생산 집단이 전문화되고, 집단화되어 분류되었다고 보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이미 이전부터 철을 다루는 집단의 사회 내에서의 위치는 독립적이고도 상위계열에 속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들이 철 생산이 대량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때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났다는 것은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34) 孫明助, 1998,「韓半島 中南部地方 鐵器生産遺蹟의 現狀」,『嶺南考古學報』22, 嶺南考古學會.
35) 김상, 2001,『네티즌과 함께 풀어보는 한국고대사의 수수께끼』, 주류성. 저자는 김성호의 비류백제라는 호칭 대신에, 오래전부터 한반도 세력이 삼한(三韓)으로 불린 점을 근거로 삼한백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두 명칭 모두 같은 대상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며 본고에서는 온조백제와 구분하는 의미에서 비류백제로 표기하겠다.
36) 金聖昊, 1982,『沸流百濟와 日本의 國家起源』, 知文社.
김성호, 1996,『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1~2, 맑은소리.
김태식, 2001,『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비류백제의 통치체제는 담로제(擔魯制)였는데 이는 곧 중국에서 말하는 봉건제(封建制)와 같은 것이라는 소리다. 그 결과, 기원전 1세기 금강 유역에 터를 잡은 비류백제는 한강 유역에 터를 잡은 온조백제와 달리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해서 영역을 확장했고 마한이 멸망한 이후에는 그 지역을 병합하고 3세기에는 전남 지방과 경남 지방의 가야 제국까지 병합하여 담로국 70여국 체제로 정비한 이후에 진수가『삼국지』에 그 사실을 적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은 김태식의 견해와도 비슷한데 김태식은 비류백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지만『삼국지』의 70여개 소국 기록은 백제왕이 봉한 지방 통치 국가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힌 바 있다.
『삼국사기』권46,「열전」제6,〈최치원전〉,“故其文集有上大師{太師}侍中狀云: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김성호의 견해라면 어째서 최치원이 변한은 곧 백제다, 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간다. 가야 문화권을 정복한 백제가 그 지역을 변한이라는 체제로 개편했기 때문이다. 즉, 가야와 변한과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는 셈이다.
37)『일본서기(日本書紀)』권9,「신공황후(神功皇后)」,<49년 3월조>,“四十九年春三月. 以荒田別. 鹿我別爲將軍. 則與久??等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奉上沙白. 盖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沙沙奴?.〈是二人不知其姓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領精兵與沙白. 盖盧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平定比自??. 南加羅. 喙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七國. 仍移兵西廻至古爰津. 屠南蠻. 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 及王子貴須. 亦領軍來會. 時比利. ?中. 布彌支. 半古四邑自然降服. 是以百濟王父子. 及荒田別. 木羅斤資等. 共會意流村.〈今云州流須祇〉相見欣感. 厚禮送遣之. 唯千熊長彦與百濟王. 至于百濟國登?支山盟之. 復登古沙山. 共居磐石上. 時百濟王盟之曰. 若敷草爲坐. 恐見火燒. 且取木爲坐. 恐爲水流故居磐石而盟者. 示長遠之不朽者也. 是以自今以後. 千秋萬歲. 無絶無窮. 常稱西蕃. 春秋朝貢. 則將千熊長彦. 至都下厚加禮遇. 亦副久??等. 而送” 백제군이 주축이 되어 왜의 지원군과 함께 남가라, 훼국, 안라, 다라, 탁순 등 가라 칠국을 공격해서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38) 신경철, 1992,「김해예안리 160호분에 대하여」,『가야고고학논집』1, 가야고고학회.
39)『삼국사기』권17,「고구려본기」제5,<동천왕조(東川王條)>,“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 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 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동천왕이 죽자 시원에 장례를 지냈는데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근신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고 장례일에 왕의 무덤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백성들이 섶을 베어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곳을 시원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다. 또한 안악3호분에 같이 묻힌 동수라고 하는 신하의 존재와, 배총(陪?)이라고 하는 묘제를 살펴봤을때 고구려에도 순장이 있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순장의 의미가 흔히 아는 노예나 시종을 억지로 죽여 묻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성스러운 제례 행위였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지』권30,「위서동이전」제30,<부여조>,“其死, 夏月皆用. 殺人殉葬, 多者百數. 厚葬, 有槨無棺.” 다만 부여의 경우는 순장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는 북방 문화의 영향으로 봐야할 것이며 이 기록을 통해서 신경철은 김해 지방의 순장 흔적을 부여의 일파가 남긴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였다.
브라이언 페이건/ 이희준, 2004,『고고학 세계로의 초대』, 사회평론, p.358~359. 이미 이런 순장의 흔적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그들에게 있어 순장 의식은 신성한 제례의식으로 진행되었지, 죽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밀어넣는 식의 아수라장이 아니었다고 한다.
40) 김태식, 2002,『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2, 푸른역사. 김태식은 김해 대성동 고분같은 왕릉급 고분에서 쇠집게가 출토된다는 것은 전기가야연맹의 맹주가 쇠를 다루는 야장(冶匠) 집단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신경철의 견해대로라면 이 시기 기존 분묘를 파괴하고 등장한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나온 쇠집게는 외지에서 온 세력이 우수한 철기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집단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하겠다.
41) 權鶴洙, 1993,「加耶古墳의 綜合編年」,『嶺南考古學』12, 嶺南考古學會. 가야 고분을 부장된 토기와 여러 출토유물을 갖고 원삼국시대의 마지막으로 비정하는 기원후 300년부터 가야 멸망 이후인 기원후 550년 이후까지 50년 단위로 편년하여 참고할만 하다.
42) 신경철, 1990,「伽倻史를 구체화시켜주는 大成洞고분 발굴」,『한국논단』6월호. 그는 여기서 가야에 갑자기 나타났던 집단의 흔적이 또 갑자기 사라지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아마 외부 집단이 이곳에 들어와 정착했다면 그들은 오랜 시간을 거쳐 그 지역, 그 문화권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43) 신경철, 2000,「금관가야의 성립과 연맹의 형성」,『가야각국사의 재구성』, 부산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44) 장한식, 1999,『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 풀빛.
45)『삼국사기』권17,「고구려본기」제5,〈동천왕조〉“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原>.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 追王. 王奔<南??沮{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沮{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梁書』:“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毋丘儉>來侵.”『通鑑』:“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46)『삼국지』권30,「위서동이전」제30,<부여조>,“<正始>中, <幽州>刺史< 丘儉>討<句麗>, 遣<玄 >太守<王 >詣<夫餘>, <位居>遣大加郊迎, 供軍糧.” 이 기록은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시 부여가 치중부대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다.
『삼국지』권28,「위서」제28,<관구검전(?丘儉傳)>.“靑龍中, 帝圖討遼東, 以儉有幹策, 徙爲幽州刺史, 加度遼將軍, 使持節, 護烏丸校尉. 率幽州諸軍至襄平, 屯遼隧. 右北平烏丸單於寇婁敦、遼西烏丸都督率衆王護留等, 昔隨袁尙奔遼東者, 率衆五千餘人降. 寇婁敦遣弟阿羅槃等詣闕朝貢, 封其渠率二十餘人爲侯、王, 賜輿馬繒綵各有差. 公孫淵逆與儉戰, 不利, 引還. 明年, 帝遣太尉司馬宣王統中軍及儉等衆數萬討淵, 定遼東. 儉以功進封安邑侯, 食邑三千九百戶.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梁音渴.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宮不從其言. 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 擧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宮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太守王?追之, 過沃沮千有餘裏,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論功受賞, 侯者百餘人. 穿山漑灌, 民賴其利.” 이 기록을 보면 관구검은 청룡 연간(233~236) 유주자사로서 우북평과 요서의 오환족을 정벌했으며 이듬해 사마위의 부장으로 공손연을 평정, 정시 연간(240~248)에 고구려를 공격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 그가 이끈 군대는 각 부대에서 차출한 보기 1만 명이었는데 그 안에 전(前) 오환족선우 구루돈, 구루돈의 동생 아라반, 오환족 도독솔중왕이었던 호류가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관구검의 군대는 보기 1만이 아니라 위, 오환, 부여 3국 연합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7) 김상, 2004,『삼국사기 사서비교를 통한 삼한사의 재조명-前期辰王時代硏究』, (주)북스힐. 저자는 더 나아가『삼국사기』「고구려본기」<동천왕 19년조>와 <동천왕 20년조>의 기록이 뒤바뀌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동천왕 19년(245) 10월의 신라 북변 침범 기사는 20년(246) 10월의 관구검군을 남옥저에서 격파한 이후의 기록이어야 고구려가 관구검군을 추격해 신라 북변까지 침입했다가 되돌아오는 식의 논지 전개가 합당하다는 것이다. 일견 참신한 주장이지만『삼국사기』판본상의 잘못이라면 활자의 오류에서 찾아야하고 대량으로 책이 만들어진 것으로 봐서 뭔가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48) 박양진, 2005,「考古學에서 본 夫餘」,『한국고대사연구』37, 한국고대사학회, p.76~77. 그는 이런 주장을 두고 직 ? 간접적인 문화 교류와 장거리 교역의 가능성은 배제하고 대규모 집단의 이주를 고고학적인 해석의 틀로 사용하는 데는 보다 신중한 자세가 요망된다며 신중한 입장의 필요성을 밝혔다.
49) 김용만, 1998,『고구려의 발견-새로 쓰는 고구려 문명사』, 바다출판사, p.239~240.
50) 김태식, 2002,『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2, 푸른역사, p.83.
51) 李亨求, 朴魯姬, 1996,『廣開土大王陵碑新硏究』, 同和出版社, p.215~239.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3方至, 倭賊退. □來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滿倭潰城” 고구려가 보기 5만이라는 대군을 보내 가야 문화권에 가득찬 왜를 물리치고 그곳에 신라 수비군을 배치하는 등 가야 문화권이 고구려군의 등장으로 크게 혼란을 겪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