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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東鄭氏 文獻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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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모둠.펌.자료 스크랩 하동졍씨
춘하추동 추천 0 조회 134 08.06.03 15:4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氏族의 연원
하동정씨(河東鄭氏)는 본관은 같으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여러 파(派)가 있다.
밀직공(密直公) 국용파(國龍派) 파조(派祖) 정도정(鄭道正)은 신라 진성왕 때 하동(河東)지방의 호족(豪族)출신으로, 경명왕 7년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범할 때 하동호장(河東戶長)이 되어 향병(鄕兵)을 단련, 하동성(河東城)을 지켰다.
그뒤 여나(麗羅)통합 때는 향병(鄕兵)을 이끌고 경순왕을 개성(開城)까지 호위하여 내의성상시(內議省常侍)에 제수되었고 이어 광평성평장사(廣評省平章事)에 올랐다.
지부사공(知部事公) 손위파(遜位派) 정손위(鄭遜位) 고려 선종 때 태어나 상서예부(尙書禮部)의 지부사(知部事)를 지냈고 그의 아들 정세유(鄭世裕)은 명종 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정승공(鄭丞公) 응파(膺派) 정응(鄭膺) 은 고려 선종 때 출생, 등과(登科)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을 지냈으며 한때 타자궁(太子宮)의 첨사(詹事)를 맡기도 했다. 본편에서는 자료입수 등의 사정으로 부득이 정도정(정도정)계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본관지 연혁
하동(河東)은 본래 신라의 다사군(多沙郡)이다.
경덕왕 때 하동(河東)으로 고쳤고 고려조 현종 때 진주(晉州)에 예속시켰으며 명종 때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조 태종 때 남해현(南海縣)과 합하여 하동현(河東縣)이라 칭하고 현령(縣令)을 두었으나 뒤에 다시 분리하여 현감(縣監)을 두었다.
그 후 여러번 변화하다가 1895년 군(郡)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에 개양군의 서면 및 금양면(金陽面)을 병합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 정(鄭)ㆍ동(董)ㆍ조(趙)씨 등이 있다.
 
파명록
(밀직공 국룡파(密直公 國龍派))
산원공파(散員公派), 흥의공파(興義公派), 문성공파(文成公派)-익위공파(翊衛公派)ㆍ하성위공파(河城尉公派)ㆍ장정공파(莊靖公派)ㆍ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ㆍ찬성공파(贊成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ㆍ현감공파(縣監公派)ㆍ부사공파(府使公派)(북청파(北靑派)ㆍ군수공파(郡守公派), 장령공파(掌令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경열공파(景烈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국교(國僑))
주요 세거지
도정계(道正系)와 응계(膺系)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도정계(道正系)의 경우 5세이상의 상계(上系)는 실전되었음이 ‘정묘보(丁卯譜)“에 나타나 있다.
6세 큰아들 정국용(鄭國龍)은 남경 하동군(河東郡)에 터를 잡은 뒤 8세 정익(鄭翊)대에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으로 옮겨가 살았던 것 같으며, 12세중 일부인 정희중(鄭希重)의 자손들은 전북 익산군(益山郡) 여산면(礪山面)으로 이거하였음이 ‘정묘보(丁卯譜)“에 보인다.
한편 둘째아들 정국교(鄭國僑)의 자손들은 경남 진주(晉州)ㆍ함양군(咸陽郡)ㆍ김해군(金海郡)ㆍ부산(釜山) 등지에 세거지를 이룬 것 같다.
응계(膺系)의 경우는 5세까지의 상계(上系)는 실전되어 알 수 없으며, 6세 정희(鄭熙)대에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에 터를 잡았음이 ‘갑자보(甲子譜)’에 보인다.
7세 군사공 정포(郡事公 鄭抱)의 자손들은 8세 정문언(鄭文彦)이 경기도 인천(仁川)으로 옮겨가 살다가 11세 정여호(鄭如虎)대를 전후해서 경기도 여주군(驪州郡)으로 이거한 듯 하다. 또한 7세 찬성공 정제(贊成公 鄭提)가 경북 대구(大邱)에 터를 잡은 뒤, 9세 정화(鄭和)의 후손들은 13세 정신(鄭紳)이 황해도 평산군(平山郡)으로, 정흘(鄭紇)은 김천군(金川郡)으로, 정몽길(鄭夢吉)은 백천(白川)(지금의 연백군(延白郡))으로 각각 이거하였음이 ‘병인보(丙寅譜)’에 보인다.
또한 9세 정직(鄭稷)의 후손들은 14세 정지민(鄭智民)대를 전후해서 황해도 김천군(金川郡)에 살다가, 17세 정홍덕(鄭弘德)이 보녕현감(保寧縣監)을 지내면서 충남 보녕군(保寧郡)으로 이거하였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9세 정적(鄭積)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세거하면서, 12세 정인서(鄭麟瑞)의 큰아들 정유(鄭維)는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으로, 16세 이후로는 강원도 횡성군(橫城郡)ㆍ원성군(原城郡) 등지로 산거해 나간 것 같다.
또한 12세 정인손(鄭麟孫)은 경기도 연천군(漣川郡)으로 옮겨가 살았음이 ‘병인보(丙寅譜)’에 나타나 있다.
하동정씨(河東鄭氏)는 1930년대에 경기도 고양군(高陽郡)ㆍ김포군(金浦郡)ㆍ연천군(漣川郡)ㆍ파주군(坡州郡)ㆍ강화군(江華郡), 충북 청원군(淸原郡)ㆍ옥천군(沃川郡)ㆍ영동군(永同郡)ㆍ괴산군(槐山郡)ㆍ진천군(鎭川郡), 충남 부여군(扶餘郡), 전남 보성군(寶城郡)ㆍ화순군(和順郡)ㆍ영암군(靈岩郡)ㆍ신안군(新安郡), 전북 완주군(完州郡), 경남 함양군(咸陽郡)ㆍ하동군(河東郡), 황해도 안악군(安岳郡)ㆍ김천군(金川郡), 평북 의주군(義州郡)ㆍ초산군(楚山郡)ㆍ용천군(龍川郡)ㆍ철산군(鐵山郡), 함남 북청군(北靑郡)ㆍ단천군(端川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씨족史
하동정씨(河東鄭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계통이 다른 3파가 있다.
한 계통은 후삼국말에 향병(鄕兵)을 훈련, 하동호장(河東戶長)으로 있던 정도정(鄭道正)을 시조로 하는 파이다. 정도정(鄭道正)은 후에 왕건에게 귀부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한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정석숭(鄭碩崇)을 1세조(世祖)로 하여 내려오는데, 후손에서는 충렬왕조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정지연(鄭芝衍)과, 조선초기 재상인 그의 5세손 정인지(鄭麟趾), 정여창(鄭汝昌) 등이 유명하다.
다른 한 계통은 고려 덕종 때 과거에 급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ㆍ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ㆍ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 등을 지낸 정응(鄭膺)을시조로 하는데, 6세(世) 정희(鄭熙), 7세(世) 정초(鄭招)로 이어져 왔다.
세 번째 계통은 신라 6촌장(村長)의 한 사람인 지백호(智白虎)의 원손(遠孫)으로 고려 숙종~명종의 5조(朝)에 벼슬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ㆍ지예부사(知禮部事)ㆍ응양대장군(膺揚大將軍)ㆍ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진 정손위(鄭遜位)를 시조로 하는 파이다. 이 파에서는 고려조에 정세유(鄭世裕)-숙첨(叔瞻)-안(晏)으로 연결되는 3대와 고려말의 정지상(鄭之祥)이 유명하다.
정도정(鄭道正) 후손 분파는 다음과 같다.
9세 정난(鄭難)의 후손인 산원공파(散員公派), 정침(鄭■)의 후손이 흥의공파(興義公派)이고,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 정흥인(鄭興仁)의 아들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인 문성공파(文成公派)이다. 문성공파(文成公派)는 그 아들대에서 다시 익위공파(翊衛公派), 하성위공파(河城尉公派), 장정공파(莊靖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로 나누어진다.
정흥안(鄭興安)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정흥도(鄭興道)의 후손이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나누어졋고 8세 정을진(鄭乙珍)의 후손이 소윤공파(少尹公派)로 나누어졌다.
정여창(鄭汝昌), 정여관(鄭汝寬)의 후손이 각각 문헌공파(文獻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이고 10세 정희주(鄭希周)의 후손이 장령공파(掌令公派), 정계주(鄭繼周)의 후손이 현감공파(縣監公派)이다. 좌윤 정난연(左尹 鄭蘭衍)의 후손은 증손 정지(鄭地), 정전의 대에 경열공파(景烈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정국교(鄭國僑)의 후손은 진사공파(進士公派)로 분파되었다.
정응(鄭膺) 의 후손은 6세 정희(鄭熙)까지 단계(單系)로 내려오고, 그의 증손을 파조로 하여 분파된다. 정서생(鄭瑞生)의 후손인 한림공파(翰林公派), 정형(鄭衡)의 후손인 별제공파(別提公派), 정맹손(鄭孟孫)의 후손이 주부공파(主簿公派), 정운(鄭耘)의 후손이 현령공파(縣令公派), 정송(鄭松)의 후손이 의주공파(義州公派), 정직(鄭稷)의 후손이 판관공파(判官公派), 정온(鄭■)의 후손이 직장공파(直長公派), 정목(鄭穆)의 후손이 유수공파(留守公派), 정적(鄭積)의 후손이 장령공파(掌令公派), 정육의 후손이 사직공파(司直公派), 정조(鄭稠)의 아들이 선무랑공파(宣務郞公派), 정세(鄭稅)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로 나누어진다.
정세유(鄭世裕)는 명종 때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그 뒤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뇌물을 받고 관리를 임명하기도 하고, 또 죄인이 바치는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형벌량을 정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고, 이어 섬으로 귀양갔다.
아들 정숙첨(鄭叔瞻)은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거쳐 고종초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어 금산왕자(金山王子) 등의 군사가 침략했을 때 중군원수(中軍元帥)로 출전하였다. 당시의 권신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怡)를 사위로 삼았고, 뒤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정안(鄭晏)은 정숙첨(鄭叔瞻)의 아들로 총명했으며 어려서 과거에 올랐고 음양(陰陽)ㆍ산술(算術)ㆍ의약(醫藥)ㆍ음율(音律)에 깨우치지 않은 바가 없다는 평을 들었다. 최이(崔怡)가 그의 재주를 아껴서 국자제주(國子祭酒)에 임명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최이(崔怡)가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남해로 피해가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뒤에 최항(崔沆)집권 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는데, 최항(崔沆)이 인명을 살상하는 것을 비난했다가 살해당했다.
정지상(鄭之祥)은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강릉대군(江陵大君) 기(祺)(뒤에 공민왕이 됨)를 시종하게 되어 공민왕 3년 감찰지평(監察持平)에 등용되었다. 그 뒤 순군제공(巡軍提控), 호부시랑(戶部侍郞),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역임하고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정혼(鄭渾)(종(從))은 그의 아들인데 전이좌랑(典理佐郞)으로 있을 때 어머니가 왜구에 살해되었다. 이에 스스로 복수책을 상소하고 소모별감(召募別監)이 되고, 창왕1년 박위를 따라 대마도(對馬島)의 왜구정벌에 참여하였다.
정지연(鄭芝衍)은 밀직부사(密直副使)였던 정국용(鄭國龍)의 아들로 중국어에 능했다. 충렬왕조에 중랑장(中郞將), 좌상시(左常侍)를 지내고 충선왕 때 동지밀직부사(同知密直副使)를 거쳐 도첨의찬성사판선부사(都僉議贊成事判選部事)에 이르렀다. 동생인 정난연(鄭蘭衍)은 충렬왕 때 과거에 올라 좌사간(좌사諫)을 지내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정희(鄭熙)는 정몽주의 문인으로 우왕 2년에 과거에 급제, 집의(執義)가 되고 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에 올랐다.
아들 문경공 정초(文景公 鄭招)는 태종 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2년뒤 다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1430년 공조판서(工曹判書)ㆍ이조판서(吏曹判書)로서 ‘농사직설(農事直設)’을 찬(撰) 했으며, 이어 진현관(進賢館)ㆍ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역법(曆法)을 개정했다.
1443년 이천과 더불어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했으며 ‘삼강실록도발(三綱實錄圖跋)’을 편찬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역산(曆算), 복서(卜筮)에도 통달했다.
정수충(鄭守忠)은 세종 21년 경창부승(慶昌府丞)을 지내고, 문종 즉위 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이 되어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지고, 이해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자 3년간 수묘관(守墓官)을 지냈다. 1463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조선전기의 인물로 잘 알려진 이는 문성공 정인지(文成公 鄭麟趾)다. 태종 1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7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세종 9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다시 장원했다. 1431년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역(大統歷)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개정했으며, 1442년 대제학(大提學)으로 ‘사윤요집(絲綸要集)’을 편찬했다. 그후 좌참찬(左參贊), 예조(禮曹)ㆍ이조(吏曹)ㆍ공조(工曹)ㆍ병조(兵曹)의 판서(判書)등을 지냈다.
계유정난에 세조를 도와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이 되었다. 성종 1년 원상(院相)으로서 서정(庶政)을 총괄했으며, 다음해 좌이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천문(天文), 역법(曆法), 아악(雅樂)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했고,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제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 저서로 ‘학이재집(學易齋集)’ ‘자치강목(資治剛目)’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이 전해온다.
그의 아들 정숭조(鄭崇祖)는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정현조(鄭顯祖)는 세조의 딸과 결혼, 하성위(河城尉)가 되고, 예종조에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 성종조에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어 부원군(府院君)에 올랐다. 정경조(鄭敬祖)는 관찰사를 지냈다.
정여창(鄭汝昌)은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3년 동안 오경(五經)과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했다. 성종 1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成均館 儒生)이 되고,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소격서 참봉(昭格署 參奉)이 되었다. 이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검열(檢閱),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 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종성(鐘城)에 유배, 죽은 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副棺斬屍)되었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으며, 당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로써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主客問答設)’, ‘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모두 소각되었고, 지금은 정구(鄭逑)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그 유집(遺集)이 전할 뿐이다.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운(鄭運)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거산도찰방(居山道察訪), 태천현감(態川縣監), 제주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좌수영(左水營) 앞바다의 싸움에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선봉이 되어 큰 전과를 올리고 다시 추격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외에 임진란 때 공을 세운 인물로는 정광적(鄭光績), 정홍수(鄭弘壽), 정홍영(정홍齡), 정열(鄭悅), 정득열(鄭得悅), 정기린(鄭麒麟) 등이 있다. 정기수(鄭麒壽), 정경운(鄭景雲), 정경문(鄭景雯)등은 정묘호란 때 용골성(龍骨城)에서 적을 맞아 싸운 관군, 또는 의병장이다.
정봉수(鄭鳳壽)는 정기수(鄭麒壽)의 형이다. 선조 25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宣傳官)으로 왕(王)을 호종(扈從)한 뒤 사복사주부(司僕寺主簿), 감찰(監察), 영산현감(靈山縣監)등을 역임했다. 인조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철산(鐵山)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용골산성(龍骨山城)에서 후금(後金)의 군사 반수 이상을 살해하고 포로가 된 백성 수천명을 구출했다. 그 공으로 철산부사(鐵山府使)에 특진되고, 이어 용천부사(龍川府使)로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겸직했으며, 그후 부총관(副摠管)ㆍ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경상도(慶尙道)ㆍ전라도(全羅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육오당 정경흠(六五堂 鄭慶欽)과 이호 정충엽(梨湖 鄭忠燁)은 그림을 잘 그려 이름이 있었다.
정덕명(鄭德鳴)은 숙종 45년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 위원군수(渭原郡守), 하동부사(河東府使)를 역임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어영청파총(御營廳把摠)으로 전공을 세워 충청도우후(忠淸道虞侯)가 되고, 뒤에 황해도수군절도사(黃海道水軍節度使)에 올랐다. 정덕재(鄭德載)는 영조 1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길주목사(吉州牧使),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 등을 역임했다.
‘팔도도(八道圖)’를 제작한 정상기(鄭尙驥)는 실학파의 지리학자이다. 오랫동안 전국을 답사하고, 과학적인 백리척(百里尺)을 이용하여 ‘팔도도(八道圖)’를 제작, 역대의 국경 변천의 역사, 군현(郡縣)의 연혁(沿革), 산천도리(山川道里), 관방(關防)의 성곽(城郭), 해로(海路)ㆍ궁실(宮室) 등에 대한 변천을 기술했다. 이익(李瀷)을 종조(宗祖)로 하는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가 이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어려서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연구에 일생을 보냈다. 저서로 ‘인자비감(人子備鑑)’, ‘농포문답(農圃問答)’, ‘심의설(深衣設)’, ‘도령편(韜■篇)’이 전한다.
정항영(鄭恒齡)은 영조 1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정언(正言),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1762년 장연부사(長淵府使)가 되었는데, 그 역시 실학자로서 지리학(地理學)을 깊이 연구했다. 백리척(百里尺) 지도인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를 제작하였는데, 대단히 상세하다.
역대 주요 인물
▲고려조
정도정(鄭道正)(평장사(平章事))
정석숭(鄭石崇)(현리(縣吏))
정세유(鄭世裕)(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정국용(鄭國龍)(밀직부사(密直副使))
정지연(鄭芝衍)(찬성사(贊成事))
정견(鄭堅)
정숙첨(鄭叔瞻)(평장사(平章事))
정혼(鄭渾)(전리좌랑(典理佐郞))
정안(鄭安)(참지정사(參知政事))
정승경(鄭承慶)(찬성사(贊成事))
정유(鄭宥)(추밀원사(樞密院使))
정을귀(鄭乙貴)(찬성사(贊成事))
정지상(鄭之祥)(판관(判官))
정희(鄭熙)(호:묵은ㆍ직제학) ▲조선조
정현(鄭賢)(응교(應敎))
정리(鄭履)(첨의(僉議))
정현우(鄭賢佑)(전객령(典客令))
정부주(鄭復周)(판전농사사(判典農寺事))
정희주(鄭希周)(장령(掌令))
정초(鄭招)(자(字):열지(悅之)ㆍ시호(謚號):문경(文景)ㆍ대제학(大提學))
정제(鄭提)(현감(縣監))
정인지(鄭麟趾)(자(字):백휴ㆍ호(號):학역재(學易齋)ㆍ시호(謚號):문성(文成)ㆍ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ㆍ영의정(領議政))
정문언(鄭文彦)(현령(縣令))
정수충(鄭守忠)(자(字):경부(敬夫)ㆍ시호(謚號):문절(文節)ㆍ하원군(河原君)ㆍ좌찬성(左贊成))
정운(鄭耘)(현령(縣令))
정송(鄭松)(목사(牧使))
정화(鄭和)(군수(郡守))
정직(鄭稷)(군수(郡守))
정검(鄭儉)(군자감정(軍資監正))
정적(鄭積)(부사(府使))
정임(鄭霖)(한림(翰林))
정숭조(鄭崇祖)(자(字):효숙(孝叔)ㆍ호(號):삼성재(三省齋)ㆍ시호(謚號):장정(莊靖)ㆍ하남부원군(河南府院君)ㆍ호조판서(戶曹判書))
정적(鄭積)(첨정(僉正))
정경조(鄭敬祖)(관찰사(觀察使))
정여창(鄭汝昌)(자(字):백욱ㆍ호(號):일두ㆍ시호(謚號):대헌(大獻)ㆍ학자(學者))
정소종(鄭紹宗)(자(字):중적(仲籍)ㆍ대교(待敎))
정사종(鄭嗣宗)(자(字):맹적(孟籍)ㆍ군수(郡守))
정세호(鄭世虎)(자(字):자인(子仁)ㆍ호(虎):서계(西溪)ㆍ시호(謚號):효간(孝簡)ㆍ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희안(鄭希顔)(도사(都事))
정욱(鄭彧)(군수(郡守))
정희적(鄭熙績)(승지(承旨))
정광적(鄭光績)(판중추(判中樞))
정운(鄭運)(자(字):창진(昌辰)ㆍ시호(謚號):충장(忠壯)ㆍ만호(萬戶))
정운용(鄭雲龍)(자(字):경우(慶遇)ㆍ호(號):하곡(霞谷)ㆍ고창현감)
정응두(鄭應斗)(정언(正言))
정립(참판(參判))
정기남(鄭奇男)(부사(府使))
정사온(鄭思溫)(자(字):직이(直而)ㆍ호조좌랑(戶曹佐郞))
정희운(鄭熙運)(자(字):태석(泰石)ㆍ호(號):동봉(東峰)ㆍ의병(義兵))
정봉수(鄭鳳壽)(자(字):상수ㆍ시호(謚號):양무(襄武)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택뢰(鄭澤雷)(자(字):휴길(休吉)ㆍ호(號):화강(花岡)ㆍ시호(謚號):충결(忠潔)ㆍ지사(志士))
정기수(鄭麒壽)(자(字):영수ㆍ판관(判官))
정시창(鄭始昌)(판관(判官))
정경운(鄭景雲)(자(字):소성(昭聖)ㆍ의병장(義兵將))
정경문(鄭景雯)(자(字):시성(時聖)ㆍ의병장(義兵將))
정경방(鄭景방) (자(字):휴성(休聖)ㆍ판관(判官))
정부길(鄭復吉)(장령(掌令))
정세보(鄭世輔)(봉상사정(奉常寺正))
정경흠(鄭慶欽)(자(字):선숙(善叔)ㆍ호(號):육오당(六吾堂)ㆍ서화가(書畵家))
정충엽(鄭忠燁)(자(字):일장(日章)ㆍ호(號):이호(梨湖)ㆍ서화가(書畵家))
정유점(鄭惟漸)(자(字):사홍(士鴻)ㆍ호(號):곡구(谷口)ㆍ승지(承旨))
정유승(鄭惟升)(자(字):취은(醉隱)ㆍ현감(縣監))
정윤(鄭贇)(전적(典籍))
정동리(鄭東里)(현감(縣監))
정시숙(鄭時淑)(찰방(察訪))
정동윤(鄭東潤)(예조좌랑(禮曹佐郞))
정종주(鄭宗周)(현감(縣監))
정오도(鄭吾道)(자(字):일관(一貫)ㆍ호(號):약포(藥圃)ㆍ점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덕명(鄭德鳴)(자((字):윤보(潤甫)ㆍ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정덕재(鄭德載)(자(字):중집(仲楫)ㆍ길주목사(吉州牧使))
정후교(鄭後僑)(자(字):혜경(惠卿)ㆍ호(號):국당(菊塘)ㆍ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상기(鄭尙驥)(자(字):여일(汝逸)ㆍ호(號):농포자(農圃子)ㆍ실학자(實學者))
정성곡(鄭聖鵠)(부사(府使))
정징세(鄭徵世)(현감(縣監))
정동혁(鄭東赫)(찰방(察訪))
정언필(鄭彦弼)(찰방(察訪))
정현도(鄭顯道)(찰방(察訪))
정항령(鄭恒齡)(자(字):현로(玄老)ㆍ장연부사(長淵府使))
정충언(鄭忠彦)(군수(郡守))
정기환(鄭基煥)(예조좌랑(禮曹佐郞))
정수덕(鄭粹德)(현감(縣監))
정전(鄭篆)(장령(掌令))
정경한(鄭敬翰)(도사(都事))
정현박(鄭顯璞)(부사(府使))
정의명(鄭義命)(부사(府使))
정이해(鄭利海)(도사(都事))
정의각(鄭義恪)(장령(掌令))
정하경(鄭廈慶)(찰방(察訪))
정래홍(鄭來鴻)(현감(縣監))
정항진(鄭恒鎭)(지평(持平))
정익주(鄭益周)(장령(掌令))
정사박(鄭思璞)(자(字):직제(直制)ㆍ의병(義兵))
정의림(鄭義林)(호(號):일신재(日新齋)ㆍ학자(學者))
정홍서(鄭弘緖)(자(字):극승(克承)ㆍ호(號):송탄(松灘)ㆍ학정(學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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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7.20 06:12

    첫댓글 춘하추동님 올린글 이쪽으로 옴겼네요 이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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