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년 풍수지리동호회 안전기원제
□ 일 시 : 2010. 03. 13(토) 07:00 본부마당
□ 가는 곳 : 태조 이성계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포천의 진산 왕방산
□ 참 석 : 아리수풍수지리(아리수 산 ․ 들 ․ 바람)동호회 회원
□ 회 비 : 15,000원
(계좌번호 : 1002-281-090317, 우리은행, 아리수풍수지리동호회 장종욱)
□ 준 비 물 : 취사도구 및 1끼분 주 ․ 부식
□ 내 용 : 아리수풍수지리동호회원들의 안전기원과 친목도모
□ 행 사
- 07:00 : 아리수 광장 출발(임차 버스 이용)
- 09:30 ~ 12:30 : 왕방사(現 보덕사)를 거쳐 왕방산 정상에서 남릉 행사장으로 이동
- 12:30 ~ 15:30 : 안전기원제 행사 및 오찬
- 15:30 ~ 18:00 : 서울 도착
□ 예 산 : 동호회비 잔액 185만원 중 임차비 및 부대비용으로 일부 사용
□ 기 타 : 행사 후 카드 및 현금영수증 등으로 행사 후 정산
【왕 방 산 소 개】
한북정맥이 훤하게 조망되고 태조 이성계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포천의 진산 왕방산(737.2m)은 덩치 크고 품이 넉넉해 보이는 인자한 시골 아낙네 같은 산이다. 포천시를 품에 안고 남북으로 길게 누운, 바위가 그리 많지 않은 육산이다.
신라 말(872년) 헌강왕이 지금의 보덕사(도선국사 창건설)를 친히 방문했다 하여 산이름을 왕방산이라 하고 절이름을 왕방사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포천군읍지와 견성록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 산에서 무예를 익히고 사냥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단오와 추석에 강무(임금이 참관하는 무예시범)를 했다하여 왕방산이라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다.
또는 이성계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심기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함흥 본궁에 칩거하던 중, 태종 이방원이 보낸 사신들이 죽음을 당해 구환하지 못한 사건인 함흥차사까지 겹쳐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태종은 최후의 수단으로 태조와 신분이 깊은 무학대사를 보내 태조를 설득하여 당시 수도였던 송도로 귀환하게 된다. 이때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여행길에 이 산에 들러 수일간 유숙했다 하여 왕방산, 또는 왕방사라는 이름들이 생겼다는 유래도 전해진다.
이때 태조가 국수를 자셨다는 산을 국수봉이라 부른 것이 지금의 국사봉이라는 설도 있다. 국사봉은 대동여지도에 심곡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방산 주변에 이와 연관된 지명으로 왕숙천, 팔야리(이성계가 한양땅에 들어가기 전에 여덟 밤을 지낸 마을) 등이 남아 있다. 이러한 유래를 갖고 있는 왕방산의 표기를 일제시대부터 왕자에 날일(日)자를 붙여 旺자로 바꿔 표기했으나 최근에는 다시 王자로 바꿔 놓았다. 서울의 인왕산(仁王山)과 같은 경우다.
경기도 동두천시와 포천시 경계에 놓인 왕방산은 서쪽은 동두천시, 동쪽은 포천시로 나뉜다.
산을 중심으로 동두천 방면에 탑동계곡, 쇠목계곡, 왕방이계곡, 장림계곡, 그리고 포천 지역에 가마골, 길이울계곡 등이 형성되어 있어 여름철 납량장소로 인기 있다.
이외에 포천 방면 산자락 어룡동 절터에 있는 고려시대 때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입상, 선단동 전계대원군 묘와 신도비(향토유적 제1호), 왕방이 마을이 있는 토정이 지었다는 암각문(향토유적 제11호) 등 문화유적지도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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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전 기원제는 꼭 가야지요(짱가, 홍봉환(2), 오태명, 박철웅, 오의환)계 6명입니다 ~~~
저~~~~기 밑에 다신분들은 않다셔도 됩니다.
필수 준비물들은 각자 메일로 보냈습니다. 연락을 받지 않으신 분들은 몸과 마음만 깨끗이 하시고 오세요. 막걸리, 이슬이는 각 1박스씩 준비했고요. 그리고 꼭 뭔가를 하시고 싶으시면 부침게 등 한가지씩만 준비해 오세요.
오태명이 씨는 못가게 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