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천 리(길부,천동) 길천1리(길부)
<위치 및 환경>
면소재지에서 국도 5호선을 따라 4km쯤 가서 우측으로 남대천을 건너 0.5km쯤 가면 두 개반으로 나누어져 있는 아담한 농촌마을이다. 동으로는 용락산, 서로는 삼보산이 둘러 싸여있고, 남으로는 가마우재가 감싸 있으며, 옛날부터 인심이 좋고 샘물이 맑고 양이 풍부하여 샘골 혹은 천동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마을앞을 흐르는 남대천은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는 논과 밭의 주요한 수자원이 되기도 한다. 주요 농산물로서는 벼농사와 고추, 마늘, 양파를 재배하고 있으며, 산을 개간하여 사과와 자두를 심어서 주민들의 높은 소득원이 되기도 한다. 원래 농가 65호와 비농가 1호 합쳐 300여명이 살고 있었으나, 근대화 산업의 물결에 따라 도시로 이주하고, 지금은 농가 36호 비농가 10호를 합쳐 100여명만 답 500두락, 수도작 400두락, 전 150두락, 과수 100두락, 축산 한우 사육 100두로 부농의 꿈을 이루고 있다. 또한 도시로 떠난 이주민들이 IMF의 영향으로 다시 농촌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마을이름(지명)유래>
마을형성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음지부락 서편에 위치한 삼보산 부근에 대부락이 거주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고려시대 때에 군영(군부대)이 주둔하였으나 조선 태종 때에 군부대를 철하고 행정통신인 역을 설치하여, 야간에는 봉화가, 주간에는 파발군(역무원, 역수, 역촌)이 근무하였다. 그래서 이곳의 지명을 삼벌(역)이라 한다. 통신수단 통로로는 의성 성동고개에서 팔성동을 거쳐서 길붓앞, 박골고개를 통하여 천동 못안에서 삼보산 정상에서 당시 역소였던 사구마을 뒷고개(곡현고개)-도련뒤-오실앞-내랑고개를 거쳐서 서울로 가는 통로였다. 그후 조선 인조때 의성철파로 역이 이전되면서 철파-원당-구미 앞으로 통하게 되었다. 삼벌역 주변에는 대규모 마을이 형성되어 100여 호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며, 군사훈련장, 사격장, 시장, 옹기도막, 기와도막 등 여러 시설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경지정리 당시 옹기도막 3기, 기와굴 3기가 발견되었으며, 주로 의성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역이 철파로 이주한 후 역에 종사하던 사람들도 철파로 이주하여 마을이 없어지게 되었다. 1592년 음지 천동자리에 흥해배씨가 입향한 가옥이 있으며, 1600년대에는 진주 강씨가 정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천동마을은 약 400여 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샘물이 좋아서 역사(力士)가 많이 배출되어 장군수 또는 샘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길천동이라고도 하는데 일제시대때 길부라는 길자와 천동이라는 천자를 합하여 길천동이라 명칭을 정하였다고 한다.
<지명의 변천>
① 매막골 본명은 묘막골, 묘막은 원래 고려시대에 고려장을한 묘옆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고려장을 한 사람이 돌아갈 때까지 묘을 지키기 위하여 지은 집이다. 그리고, 그후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 옆에 조그마하게 지은 집도 동일하다. 거기에서 상주가 삼년을 지나는 것은 세모사(시모사)라한다. 그 말이 변천되어 지금은 매막골이라 한다.
② 만침이 지금은 구미리 천동 다리건너 양수장 뒷편에 주막이 있던 곳으로 옛날에는 홍수가 나면 그곳까지 물에 잠겨서 만침이라 하였다.
③ 덮거리 모퉁이 현재 구미리 하부지역 화전리 경계지점에 자갈무덤이 있는 곳인데, 홍수가 나면 남대천과 쌍계천이 합류하여 지금의 도로를 덮어서 덮거리 모퉁이라 한다
④ 강정 본면은 강진, 금산서원에서 탑산온천까지의 지명이다. 강으로 진을 친 듯 에워싸고 있어 강진이라 한다. 그 말이 변천되어 강정이라 하며, 또는 조선시대에 정자가 있었다하여 강정이라고도 한다.
⑤ 피기 본명은 폐경. 옛날에 이곳의 농지가 전부 하천으로 되었다가 다시 복구될 당시 늪으로 변하여서 농지로 쓰지 못할 때 생겨난 이름이 지금의 이름이다.
⑥ 진둑골 본명은 진등골, 천동골, 안골, 산넘어 산등이 길게 뻗어져 있는 골이라 하여 진등골인데 그 말이 변하여 진둑골이라 한다.
⑦ 물레이 본명은 물량이. 하천에 물이 양 갈래로 흘러서 한가운데는 섬이 되어 물이 흐르고 있는 곳의 지명이다.
⑧ 소진이 본명은 솔진이이며, 양지 천동부락 뒤 소나무로 진을 친 듯이 에워 싸고 있는 곳이라 하여 솔진인데 그 말이 변천되어 소진이라 한다.
⑨ 땅말 본명은 당말이며, 천동못 뒤 산등성이가 튀어나온 끝등이라 하여 당말인데 그 말이 변하여 땅말이라 한다.
⑩ 파떼기 본명은 밭떼기, 양지 천동뒷산 밑 잔잔한 떼기 밭들이 있는 곳이라 하여 밭떼기인데 그 말이 변하여서 파떼기라 한다.
<주요 지명>
① 새장터 (사장터) 옛날 군령(군부대)이 주둔할 당시 사격훈련장(활 쏘는 장소)를 사장터라 하였는데 그 말이 변하여서 새장터라 한다.
② 돌무덤골 (돈무덤골) 옛날 난세시 도적무리가 난무하던 시절, 돈을 집에 보관하게 되면 도적에게 잃을 것을 염려하여 돈을 묻어 둔 곳이라 하여 돈무덤골이라 하였는데 음운변화로 돌무덤골이라고 한다.
③ 장군수 천수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른다. 음지마을 앞에 샘이 있었는데, 이 물을 마시면 힘이 강하여진다는 속설 때문에 이웃 주민들이 시기를 하여 백마혈을 샘물에 넣어서 물을 못먹게 하였다. 지금은 토지로 변하여 있지만 여러 군데에서 샘물이 나는 구멍이 있다.
④ 박골 (박개) 본명은 밭골, 밭골고개라 하며 밭골이 아흔아홉 고랑 밭이 있는 골 또는 고개이며 아흔아홉 밭골은 생략하고 박골이라 하고, 박개는 밭골이 있는 고개를 약칭으로 박개라 칭한 것이 오늘날의 지명이다.
⑤ 쇠죽골 (소쪽골) 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라 하여 소쪽골이라 불렀으며 지금은 쇠죽골이라 부른다.
⑥ 가마우재 (가마굴 운재) 옛날에 가마를 타고 고개를 넘던 곳인데, 고개의 경사가 심하여 가마가 자주 굴러서 붙여진 명칭이다.
⑦ 수리시설 (저수지) ⱀ 천동상지 조성연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대부락이 있었으며, 몽리면적은 100여 두락 정도라고 본다.
ⱁ 천동하지 1930년경에 강형원, 배선후가 앞장서서 축조한 저수지로, 당시 수리가 불안전하여 가뭄이 심하고 주민들이 농사짓는 데 불편이 많아서 축조하였다. 몽리면적은 200두락이 넘어서 주민들의 생계에 많은 도움이 된다.
ⱂ 천동보 조선시대 선조 때 승정원 동부승지로 계시던 신지제(오봉선생)께서 당시 의성군수 이인성에게 부탁하여 천곡신보를 완공하게 되었다. 그때 면적은 40두락이었으나 현재에는 80두락으로 늘어났다. 지금도 의성에서는 이보라 칭하고 있다.
ⱃ 양수장 1963년도 극심한 가뭄으로 모든 토지에 이앙을 못하고 대파를 할 지경에, 구미동에 사는 신수일, 신희락, 신영달를 비롯한 천동보작인 여러분이 모여서 보내에 양수장을 설치하기로 하고, 신수일를 추진위원장으로 공사를 추진하였으나 중도에 무산 되었다. 그러나 당시 양수장 재건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배영창과 위원에 배연관, 배만직, 강성만, 박선권, 신도호 등이 임명되어 농림부, 농협중앙회, 경북도청, 군청, 군농협 등에 협조를 포함한 전동기 100마력, 양수기 8인치 직고 40m의 우리나라 최대 높이 양수장이 건립되어, 천수답이 옥답으로 바뀌게 되고, 해마다 겪던 가뭄해소와 더불어 빈곤에서 부농의 마을로 바뀌게 되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 천동교 해마다 장마때만 되면 학생들은 등교를 하지 못하고 긴급환자가 발생하여도 병원에 이송할 길이 없어 천동교 가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교량의 필요성은 동민전체가 느끼지만 당장 공사비가 문제로 떠올라, 수십 차례의 동회의를 거친 결과 처음에는 공사비가 적게 드는 잠수교를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하천구조가 급경사라 잠수교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당시 강성만 동장이 동민들을 설득하여 출향인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여 각 지역에 출향인을 찾아 다녀서 찬조금과 정부지원금 및 자체자금으로 1971년 정부에서 시멘트 335포대를 지원받아 철주관을 박고 철근과 시멘트로 다리밭을 세우고, 그 위에 앵글 철주를 걸고 철판을 깔고 3m 철판가교를 설치하여, 2년 동안 동민들이 긴요하게 사용하다가, 1973년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철다리(출렁다리)를 철거하고 폭 4m, 길이 70m의 현대식 교량을 완공하게 되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다리는 낡아서 보잘 것 없이 되어 또다시 새로운 교량설치가 시급한 실정이나 정부예산부족으로 위험한 다리를 아직 사용하고 있다.
<마을인물>
본부락의 성씨는 흥해배씨와 진주강씨가 대중이고, 기타 성은 극소수다. 연대를 보면, -흥해배씨 입향시조 배근전, 자 치모, 서기 1952년 안동군 길안면 묵계리에서 이거하여 지금 산하에 13호가 거주, 나머지는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 각처에서 거주 하고 있음. 13세주손 배성환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교육>
마을에 학산서당이 있어 그곳에서 학문을 깨우쳤으나, 도리원 면소재지에 조양학원이 생기고는 몇 사람이 다니게 되었다. 그후 봉양보통학교가 개교하여 모두가 그곳에 다니게 되었다. 근래에 와서 초등학교는 봉양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중학교는 봉양중학교를 다녔다.
<종교>
불교 : 40가구, 신도수 60명 기독교 : 1가구, 신도수 1명 유교 : 40가구 전 동민이 거의 불교를 믿고 있었으며, 설에 의하면 고려시대 때까지 지금의 아주 신씨 재사를 사원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당시 내천동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으며 사원만 있었는데, 고려의 패망과 불교의 탄압으로 절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황정승이라는 분이 선대 묘소를 이곡내에 몇좌 드려놓고 제사도 하고, 토지와 모든 재산을 관리하여 오다가, 조선 명종시 그 후손이 명종사화에 가담하여 역적으로 몰려 멸문함에, 변성 또는 이본하여서 빈집이 되었다. 그후 아주신씨 신지세(오봉) 선생이 재산관리를 하고, 선조묘소를 드리고 하여 현재의 신씨네 재사(齋舍)가 되었다.
<민요>
┗ 모내기 노래 여기꼽고 저기꼽고 쥔내 양반 등에꼽고 서마지기 이논뱀에 반달같이 심어내세 이물고로 저물고로 다들허허 물보내고 쥔내양반 어디갔고 이빠진데 박씨꼽고 머리흰데 먹칠하고 문어전복 손에들고 첩의집에 놀고있네 첩아첩아 사랑첩아 신을 벗고, 물음이나 이묘심어 농사지어 부모봉양 다하고서 자손만대 살아가세 부귀영화 살아보세.
♠ 사장터
고려시대에 군령이 주둔 사격 훈련장인 사장터라는 지명이 전해 오고 조선조 태종 때에 군부대를 철수하고 역제도로서 삼별역이 존재하면서, 야간에는 봉화와 주간에는 파발군(역무원, 역수, 역존)이 근무하였다고 하여 고려시대를 짐작하게 한다. 사장터의 위치는 길천 2리 청룡 등 서쪽에 자리하며 지금은 경작지로 변해 있다.(길천2리 강성만 자료제공)
♠ 금석리 자기소 세종실록지리지에 의성현의 서쪽 금석리에 자기소와 도기소가 있었는데 제품은 모두 하품에 속한다 하였다. 금석리는 봉양면 길천리로 보인다.
<응임선생비명, 길천2리 못안(천동)>
* 비명 국역
슬프다! 이곳은 응암선생 신공께서 순효하신 유허이다. 어떻게 순효를 하였는가 하면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은 어머님을 모시고 암혈간에서 피난을 하시다가 창졸간에 적을 만나 몸으로 적의 칼날을 받아서 그 어머님을 위화의 경지에서 생명을 보전해 드렸으니 참으로 지극하신 효가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같이 하였겠는고?
그뿐만 아니라 공이 적의 칼날을 받았을 적에 반체가 떨어지는 큰 상처를 입으셨고 피는 흘러 내를 이루었으니 그 참독이 어떻겠는가? 그리하여도 공은 정신을 잃지 않으시고 기분을 진정하여, 주위가 조용하자 이미 씹고 있던 칡으로 붓을 만들고 또 적삼을 찢어 피를 적셔가며 글을 써서 선성 성주에게 보내니, 선성 성주는 곧 중제 오봉선생 자제이시더라,
그 혈서에 ‘장신불밀위적소해 또 족장서선성이자’라고 만하여 수미 총 십오자만 겨우 알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어, 전문의 뜻은 제대로 자세히는 모르되 수구팔자 즉 장신불밀위적소해는 자기의 불밀을 말하여 늠연히 순효의 뜻을 나타냈음을 엿볼 수가 있다 하겠고, 말구칠자 즉 ‘족장서선성이자’는 계씨에게 순국할 것을 종용한 것이며, 발바닥에 두자로 쓰라고 한 것은 순국에 따른 유골을 찾기 위하여 갖춘 바이니, 자기에 처하여서는 순효로서 스스로 결정한 것이고 아우로 하여금은 순충할 것을 권하였으니, 난공자가 이른바 인생의 삼사중에 여일한 소재는 즉 치사자라 하였음은 사람이 있는바를 한결같이 다 하다가 옳게 죽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공과 같은 분은 참으로 충효를 다 갖춘 분이라 이를 수 있고, 조포의 무리들과는 어지심의 거리가 멀다 하겠도다. 공의 휘는 지효요 자는 달부이시며, 그 선조는 아주인이시다. 증조의 휘는 한 이시며, 판결사에 증직 되셨고, 조(祖)는 휘는 응규이시며 참봉이시고 참판에 증직되셨고, 선고의 휘는 몽득이시며 좌승지에 증직되셨다. 선비는 월성박씨 증참의 미수의 따님이요, 선비는 고창오씨 참봉 사익의 따님이니, 공은 박씨의 소생이였다.
가정신유(서기 1561년)에 태어나시어 만력임진(서기 1592년)에 돌아가시니 그때의 나이가 32세였다. 본현(지금의 군위읍) 광현동 판반산진태원에 장사하다. 공은 기질이 영석하고 재성이 뛰어나더니, 자라서 아우 오봉과 더불어 유일제 김언기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음에 학업이 일취월장하여, 김공은 매양 원대한 기대를 공에게 가지게 되었다.
공이 약관에 교장이 되어 종일 단정히 앉아 예절로서 몸 가짐을 하니 제생들이 경복하여 감히 태만하게 예의를 잃은 자가 없었고,향시에 응시하면 반드시 장원을 하니 승지공이 기뻐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가 능히 우리 가문을 부흥시키리라 하셨도다.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여 사자제경을 베껴쓰고 암송하고 또 성려격언을 초하여서 실천하는 바탕으로 삼으니, 오봉이 일찍이 그 말미에 추서하여 이르기를, 우리 형님은 평일에는 공부에 힘쓰기를 크게 조리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족히 공의 학문함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하겠도다. 이러하므로 사생위박함에 당하여도 태연하고 여유가 있어 보임은 스스로 그렇게 하자고 하여도 그렇게 되어 나가도록 하였으니, 그 자질의 미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학문의 역량이 우월함을 또 어찌 거짓이라 하리오.
배는 함창김씨 습독 강의 따님으로서 이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명희로 의금부도사이었고, 차남은 명기이며, 명희 자 맹감은 주부이고, 다음은 중감계감이며, 명기의 자 구형은 도사이며, 맹감의 자는 수이며, 구형의 자는 면, 진, 증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고, 등과한 자에 현손에 천걸 생원, 천달 생원, 생원 오세손, 한운진사이다.
슬프다! 공이 돌아가신지가 거금 삼백여 년이라, 실적은 이미 책으로 출판되었고 묘갈도 세워졌으나 오직 응동의 산록만이 횡폐하여 당시의 아롱진 선혈의 흔적은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겨져 열열한 휘사의 자취가 연기같이 살아지고 구름처럼 멸해 졌음인즉, 천고의 뜻있는 선비들의 눈시울을 어찌 적시지 아니하였으리고.
이것은 후손들이 당연히 진작 행하여야 할 것이라, 이에 우러러 바라보며 이를 마음 쓰라리게 슬퍼하여 울부짖을 바이로다. 이에 후손 정원, 학원, 응기, 경기 등은 단을 쌓고 빈터를 두호하고 돌을 세워 그 단을 표하고, 일년에 한번씩 제행을 베풀어서 계셨을 때와 같이 지성을 다하고자 할세, 족질 상호를 시켜 나에게 그 사적의 기록을 촉탁하거늘, 내 비록 늙어서 감당키는 어려우나 선대부 구와선생께서 쓰신 발문이 실적에 실려 있으니 신군의 청함이 어찌 용문의 계가 아니겠는고. 감히 사양치 못하고, 드디어 외람되게 그 전말을 써서 이를 천하후세에 남의 신하되고 자식된 자들에게 권면하노라.
명왈
구암산같이 높은 우리공이시여 전부가 빼어났도다.
오봉의 어진 형님이요 유일제선생의 수제자로다.
일찍이 능어를 판단하여 이에 스스로 정조하였도다.
나라에 구난이 있어 어머니를 바위틈에 모셨도다.
흉한 칼날이 번개 같으니 어찌 내 몸을 아끼리오.
칡을 씹어 적삼에 글을쓰니 자자이 피가 맺히었도다.
백리길 선성을 형제가 한몸되어 서로 도왔도다.
슬프다 이 응동에 오직 바위가 없어지지 않으리다.
점점이 이끼 흔적이오 검푸른 신색이로다.
오르고 내릴제 계시는 것 같아 바람도 슬퍼하고 비도 구슬퍼 하도다.
이에 단을 쌓고 이에 비석을 세웠도다.
특선 이자 충효는 쇠해가는 이 시대를 항상 깨우쳐 주도다.
무릇 본심이 있는 사람 그 누가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오.<의금부도사 문소 김도화 찬>
<천동재(泉洞齋)>
천동재에서 그 내력을 알 수 있는 표시는 오직 본재중건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천동재는 ꁁ자형으로 좁은 편이고 지금은 낡아 허물어져 있다. 시급히 수리를 하든지 허물든지 조치가 시급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데 어느 역사가가 이 숨은 빛을 들어내서 밝히리오.
강와 임필대는 응암공 묘갈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름도 효의 길이요 죽음도 순효하고, 그 순효제단 아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한때 들어나지는 않았으니, 봉양면지 편집과정에서 그의 행장은 또다른 시각으로 비추어진다. 신지효 자는 달부, 호는 응암, 관향 아주. 1561(명종165년) 3월 18일 봉양면 상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몽득, 어머니는 월성박씨와 고창오씨. 9세에 어머니 상을 당해 성인 못지않은 집상이 있었고, 유일재 김언기 문하에서 한 살 아래인 오봉 신지제와 같이 글을 익혀 학업이 크게 성취하였고, 일찍이 손수 성리대전의 요절한 말을 초해(간략하게 옮김), 자기행실의 근본되는 자료로 삼았다.
1592년(선조25년) 임진 4월 13일 소서행장을 선두로 왜군 15만 대병이 부산에 상륙 동래를 함락한 뒤 세길로 나누어 올라옴에, 이곳까지 올라올 즈음 편모 고창오씨를 받들어 지금의 촌동인 응동으로 피나왔다. 그는 동생이 예안현감으로 재임중이므로 형으로서는 효도의 책임을 다하려했던 것이다. 바위사이에 숨어있던 중, 왜졸이 산아래 배회함으로는 활로서 두명을 쏘아죽였다. 적군은 사람은 있으나 흔적이 없어, 혈안이 되어 찾던 중, 어느날 어린아이가 암혈에서 울어 그치지 않으니, 응암은 왜졸이 알면 화가 어머니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아이를 안고 다른 숲으로 숨으니 왜졸은 드디어 따라 들어왔다. 응암의 풍채와 위용에 눌려 차마 목숨을 해치지 못하고 어賁를 칼로 치고 달아나니 피가 줄줄 흘러 아이를 싼 포대를 풀어 상처를 싸매고 암혈에 나아갔으나, 스스로 일어나지 못함을 알고, 동생 지제에게 결별의 글을 써서 보내려 하였으나 지필이 없어 근방에 칡을 뜯어 씹어 흐르는 피에 칡으로 붓을 삼아 적삼에 동생에게 부탁하는 글을 썼다.
그 대강은 내가 해를 당한 것은 명이라 할 것이다. 노모는 다른 동생이 있으니 군은 오직 충성을 다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이 옳을 것이다. 난리가 나 어수선하니 혹 죽을 곳을 얻어 죽더라도 그 유골을 찾지 못할까 염려되니, 군은 발바닥에 선성 두자를 써서 표적이 되게 하라 하고, 응암은 32세로 이곳 천동에서 아까운 청춘을 불사르며 순효하였다. 이러한 혈서는 문중의 화재로 없어졌으나, 회병 신체인의 혈서습록을 지음으로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척암 김도화의 상향문과 응암실기가 있다. 혈서는 곡현으로 이주한 후손이 실화로 없어졌다.
혈서습록
회병 신체인의 지소로서 혈서를 찾아 모은 사실을 기록한 책으로 혈서습록식과 혈서습록전후발문은 회병문집에서 발췌하였고 그 대강을 간추려 본다. 슬프다. 오봉부군이 일찍이 이 혈서를 상자에 보관하였더니, 그후 우리 증조부가 집안의 오래된 서적과 문자를 찾아봄에 이 혈서를 얻어 감탄하여 마지않았고, 그것을 응암공의 5세손 해운에게 전하니, 세월이 오래되어 혈자가 모호하고 명주적삼이 썩어 떨어져 손을 대면 분가루와 같이 날아 없어지나 두 소매는 온전하여 글줄이 완연하더니, 중년에 실화로 지금의 곡현동에서 혈서도 함께 재가되어 없어지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 화재를 비록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나, 혈서의 첫머리와 끝의 몇구는 말과 뜻이 명확하여 어른들이 서로 전하더니, 공의 7세손 정보가 현서가 전말을 설명하고 슬피울며, 나에게 혈서를 수습하고 고증하라 하였다. 지난날 공의 후손 누구가 정성들여 겨우 한 기록을 이루니, 사람들이 봄에 이 기록을 근거로 하면 그 전서를 족히 믿을만하다 하였다. 구와 김굉의 사문에 왜졸이 이 나라에 꽉 찼던 날에 흉한 칼날에 해를 입은 자가 공 혼자만 아니련만, 유혈이 줄줄 흐르고 생사가 경각에 있는데, 백리밖의 동생에게 마치 마루위에서 대하듯 결별의 글을 써서 순국에 힘쓰게 하라 하니, 형제간 우의 정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함은 곧은 일이라 하겠다. 죽애공 진귀가 유사를 기록하고, 회병이 습록을 편성하였으나, 적삼은 재가 되어 없어지고, 남은 것을 모았으니 임금에게 알릴 길 없어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수습하여 서제와 기문으로 원편으로 하고, 유사, 뇌사와 문자와 비문으로 하여 책을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