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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南樓
보물 제147호 호 소유자는 나라이며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소재합니다. 그 규모로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의 누각건물의 좌우익 부속건물 및 사주문(四柱門). 시대로는 조선 헌종 10년 1844년으로 추정.
영남루는 조선조 후기에 밀양 군의 객사인 밀주관(密州館)에 부속되어 정면이 5칸이요, 측면이 4칸으로서 간격을 넓게 잡은 높다란 기둥을 사용하였으므로 누각마루가 매우 높으며 그 규모가 웅장하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있어서 층계로 된 월랑(月廊)으로 연결한 침류당(枕流堂)이 서편에 있고 능파당(凌波堂)이 동편에 이어져 있는데 건물 전체의 배치에 변화와 특징이 있으며 계단으로 이루어진 복도를 통하여 양쪽 부속건물 사이를 왕래하게 되어 있다.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돌리고 기둥 사이를 모두 개방하여 사방을 바라보며 좋은 경치를 완상(玩賞)할 수 있게 하였으며, 유연(遊宴)하는 장소로서 알맞은 넓적한 공간을 마련하였다. 안 둘레의 높은 기둥 위에 이중의 들보(樑)를 가설하고 주위의 외 둘레 기둥들과는 퇴량(뒷보=退樑)과 충량(衝樑 = 집채의 좌우 쪽에서 마룻대와 같은 줄로 짜이는 들보)으로 연결 하였는데,그 가운데서 충량은 용신(龍身)을 조각하였고,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서까래가 그대로 들어난 천장)이다
이러한 누각은 객사 이외에도 전망이 좋고 경치 좋은 곳에는 대개 지방마다 있다. 지방관이나 문인들의 유연의 장소가 되어 왔으나 영남루와 같이 좌우 양편에 날개와 같은 부속건물이 딸린 누각은 그리 흔하지 않고 그 웅대한 규모로 보아 지금 북한 땅에 있는 평양 부벽루(浮碧樓)와 6.25동란 때 불타버린 진주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한국의 3대 명루(名樓)로 일컬어왔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365년(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14년, 乙巳)에 그 전부터 있었던 작은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하여 개창하였다 하며, 현재의 건물은 1834년(순종(純宗) 34, 甲午)에 실화로 불타버린 것을 1844년(憲宗 10,甲辰)에 재건한 것이며 조선조 후기에 속하는 대표적 건물의 하나로 특징 있고 웅장한 누각건물이다.(영남누연혁조 참조)
★ 영남루와 그 부속건물의 연혁 1.침류각
1844년(헌종 10, 甲辰)에 현재와 같은 누각의 모습으로 완전 개창하였다. 이인재의 복원공사는 옛 제도를 다소 바꾸어 본루의 규모를 크게 하는 한편 능파당과 침류당을 각각 동서의 익루(翼樓)로 삼아 복도와 층층계단의 낭하를 설치하여 본루와 연결 통래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경내를 크게 넓혀 비장청(裨將廳=裨將(비장이란 감사, 유수, 병사, 수사 등의 지방장관 및 중국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던 관직이다). 동해(東廨=동쪽에 있는 관청 건물). 서해(西廨). 공주(公廚=음식을 차리는 방). 대문 등 수백 칸에 이르는 유숙시키는 객관으로서 도, 응용하였다. 이때 [영남루중건상량문]은 당시 병조판서로 있던 유관(遊觀) 김흥근(金興根)(1796~1870)이 지어 편액 하여 걸었으며 향사(鄕士)인 추남(推南) 이장한(李章漢)이 지은 상량문도 따로 전해온다.
침류딩에서 본루로 연결되는 층층계단
본루 정면(正面)에는 영남루(嶺南樓)라는 편액과 우측으로 강서웅부(江西雄府) 조측으로 교남웅루 (橋南雄樓)란 顯版이 걸려 있다. 강서웅부 = 낙동강 서쪽에 있는 웅대한 고을이란 뜻 교남웅루 = 교남(영남)지방의 웅대한 루각이란 뜻 동쪽에 있는 익루(翼樓)로 호수(凝川江水)와 가깝다고 하여 능파당(凌波堂)이라 이름하였고 본루와 낭하(廊下)로 통한다.
서익루 침류당(枕流堂)을 남천강쪽에서 촬영한 것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 ) 글씨
고종 2년(1865) 거제면 동상리 진양인 하지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하동주는 영남의 서예대가로 진주에 나가서 명성을 떨치니 호를 성파(星坡)라 하였으며 1943년 세상 을 떠날 때까지 한결 같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체를 써왔다. 성파 하동주는 영남지역을 순방하면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양산의 통도사, 고성의 옥천사, 부산의 범어사, 통영의 안정사, 용화사 그리고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에 영남루란 글씨를 남겼으며 정순랑 아랑사의 현판도 성파의 글씨이다.
당대의 명필가에 의한 강좌웅부(낙동강서 쪽에 있는 큰 고을이란뜻)의 현판판 교남(경상도지방을 이르는 옛말) 에 있는 유명한 누각이란 뜻 교(嶠 = 산뾰족할 교字)남 이란 영남을 이르는 옛말 1957년(丁酉)가을 당대 명필이 쓴 동쪽 부속건물의 현판 이증서 십세서라 협서(夾書)한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는 당시 이인재 부사의 아들이 열 살날 때 쓴 글씨로 문화적인 가치가 높다 강성여화 (江城如畵)
응천강과 읍성이 마치 그림과 같이 아픔답다라고 당대 명사가 쓴 글 이현석 칠세서라 협서한 연남루도 이인재 부사의 아들의 글임 글씨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그 필법이 너무 많이 닮아 있노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위 현판의 작자(1846) 문익점(文益漸) 자(字) 일신(日新) 호(號) : 삼우당(三優堂) 시호는 충선 남평인(南平人)(시구는 한글로 풀었습니다)
개인 내의 우거진 풀에는 산들 바람 일고 외로운 따오기 지는 노을은 석양가에 있네
넒은 들에 말과 소는 나그네의 길을 분간하고 먼 마을 닭과 개 짓는 소리가 이어 졌네
특별한 곳 풍경을 말로 다하기 어려워 그림으로 그려다가 임금님께 바치려네.
석화(석화(石花)) 라는 이름의 들꽃 무늬는 영남루만이 지닌 이채로운 자랑이라 할 만하다.
아동신의 읍성을 설명하는 입갑판입니다.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동문과 연결 될 것입니다.
망루입니다. 시민들의 후식처로 관광지가 되어 있습니다.
무봉대(舞鳳臺)란 현판이 보이시죠 밀양의 문화원장을 지내신바 있는 손기현 씨의 글씨입니다. 병술년 여름날에 쓰셨다고 하셨지요 . 가까이 가보시면 낙관까지 확인이 가능하십니다.
읍성의 축성 연대등에 관하여 참고문헌을 찾아서 이 난에 올려 드릴 예정으로 있습니다. 타자하기가 너무 힘이 들면 복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때 부사 박진이 삼랑진의 작원관(까치베리(벼랑))에에서 패주한 이래 이를 막을 만한 마땅한 곳이 없어서 산내면 원서리 석골사 부근에서 의병장 들과 함께 밀양 고을을 지키려고 노렦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고 계시겠죠.
영남루와 그 부속건물의 연혁
영남루에 대하여는 가장 확실한 문헌이라 여겨지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김주(金湊)가 밀양의 군수(郡守)로 와서 본래 있던 작고 초라한 누각을 철거하고 진주 촉석루(矗石樓)의 제도를 본떠서 개창(改創) 하여 영남사(嶺南寺)란 절 이름에 따라 영남루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규모가 크고 독립된 누각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일 것이나 그 이전에도 영남사에 부속된 소누(小樓)로서 영남루가 존재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김주의 개창보다 21 년이나 앞선 1344(충숙왕 1,甲申) 봄에 찰방(察訪)의 명을 받고 순행(巡行)길에서 밀양을 지나다가 당시 군수 유공의 초대로 영남루에 올라 원운(原韻)과 시서(詩序)를 남긴 성원도의 글에서도 그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는 “내가 사방에 놀아 좋은 루관을 본 것이 많은데 전망이 확 트이고 끝이 없기로는 이만한 데가 없었다.” 하였고, 당시에 이름 있는 누각으로 손꼽혔던 복주(安東)의 영호루(映湖樓), 울주의 대화루(大和樓), 금주(현김해)의 연자루(燕子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합주(陜州)의 함벽루(涵璧樓)보다는 영남루(嶺南樓)의 경치가 우수하다 하였으며, 려강(麗江)의 청심루(淸心樓) 평해의 망양루(望樣樓), 단양의 봉소루(鳳韶樓)와는 우열(優劣)을 가리기 어렵다고 격찬한 것을 보면 당시에도 영남루는 엄연히 존재해 있었음은 물론 그 루관(樓觀)도 매우 훌륭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성원도(成元度)보다는 약 10년 늦게 공민왕대 초기에 이곳을 찾은 초은(迢隱) 이인복(李仁復=1308~1374)도 영남루에 대한 칠언율시(七言律詩)를 남긴 것을 보면 김주(金湊)의 중건 이전에도 영남루가 존재했음을 더욱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보다 약 200년이나 시대가 앞선 고려(高麗) 목종(穆宗=1147~1170) 때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문명(文名)이 높았던 西河 임춘(林椿)이 경계(庚癸)의 무신란(武臣亂)을 피하여 1174년(明宗 4. 甲午) 여름에 尙州. 密陽 등 江南땅을 찾아 유랑(流浪)의 길을 떠났는데, 그 이듬해인 1175년 봄에 이곳 영남루의 전신인 영남사에 몸을 의탁한 일이 있었다. 그 무렵에 남긴 여러 편의 시문 가운데는 [영남사죽루(嶺南寺竹樓)]라는 1편이 전해지고 있는바 그것은 당시 영남사 경내에 죽루라는 누각건물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누각이 비록 사찰의 부속건물이었다 하더라도 고을을 찾아오는 외래객들의 유연과 음영(吟詠)의 장소로서 활용되었음은 물론 영남사 경내에 있는 누각이라는 점에서 영남루로 통칭되었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실지로 임춘(林椿)의 [서하집( 西河集)]가운데는 [이월십오야대월병서(二月十五夜對月幷序)]라는 칠언고시(七言古詩)가 실려 있고 그 서문에 영남사에 놀면서 저녁에 누각에 올라 망월을 하면서 시를 지었다는 언급이 있으며, 시구 중에도 “금춘이월십오야 아향영남루상적(今春二月十五夜 我向嶺南樓上適)”이라 하여 자연스럽게 영남루를 표현한 실례를 남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밀주구지]와 여지승람] 등에는 영남루에 대한 임춘(林椿)의 제영(題詠)이 실려 있는바 40행의 장시로 된 그 작품은 비록 [제영남사(題嶺南寺)]라는 제목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시의 내용은 실상 사찰을 주제로 했다 기보다는 경내의 누상에 올라가 사방의 승경을 아름답게 읊었다는 점에서 영남루의 제영(題詠)으로 삼은 듯하다. 바꾸어 말하면 영남루란 명칭은 죽루 또는 소루 등 그 때 그 때 고유한 편액은 있었을 것이지만 대체로는 영남사 창건(신라시대) 이래 경내에 부속된 누각으로서 자연스럽게 통칭된 것이며, 그 입지적 환경으로 보아 사찰 전각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오히려 이 고을을 찾아오는 빈객들의 유연과 시인묵객들의 소영 (嘯詠)하는 누대로서 영남루로 불리어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53년에 밀양고적보존회에서 발간한 [향토문화]란 책에는 영남루의 연혁을 설명하면서 “신라 법흥왕 때 절을 지어 구층 부도(九層浮屠)를 세웠다가 고려 현종 때에 절을 없애고 종각인 금벽루만 남아 있던 것을 그 뒤 예종 때에는 영남루로 고쳐 지어 고려 공민왕 때 김주가 중수했다” 하는 기록이 있다. 무엇에 근거한 것인지 그 전거를 알 수는 없으나 1175년(명종 5)에 임춘이 영남사에서 놀았다는 기록이 확실한데 그보다 약 150년이나 앞선 현종 연간 (1010~1031)에 절이 없어졌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며, 따라서 금벽루만 남아 있었다는 것은 황당한 일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혹 고려 말기의 인물인 도원흥(都元洪)이라고도 하나 인물 미상)가 차운(次韻)한 영남루 시에 “금벽루명압수천”(아름답게 단청한 누각이 밝아 물과 하늘을 압도하네)란 1순에서 ‘금벽)’이란 단어를 잘못 인용 해석한 데서 온 것은 아닌지 자못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이제 김l주가 개창 이후에 규모가 크고 새로운 누각으로서 인구에 증영(贈염 영남루의 연혁을 정리해 본다.. 조선 개국 초기에 밀양부사 안질이 맨 처음 본루를 크게 중수하는 한편 서편 구지에 따로 작은 누각을 하나 더 세워 읍민들이 소루라 불러 온 것을 1442년(세종 24)에 당시 경상도사 권지가 소부(召父)와 소백(召伯)이 선치한 뜻을 취하여 소루라는 이름을 짓고 기문을 썼으며, 그 후 이칭길이 부사로 와서 소루를 중수 개조하여 임경당(臨鏡堂)이라 이름을 고쳤으니 뒷날의 침류당(枕流堂)이 곧 이 건물이다.
연산군 때인 홍치연간(1488~1505)에는 부사 김영수가 본루의 동북 편 한 모서리에 망호당(望湖堂)이란 아름다운 부속건물을 세워 빈객들의 숙소로 삼았는데 뒷날 이것을 본루의 남쪽에 옮겨서 능파당(凌波堂)이라 이름을 붙였으니, 영남루가 좌익건물과 우익건물을 양쪽에 거느린 웅장한 규모의 누각으로 알려진 것은 이때부터인 듯하다. 1640년 세조6)에 부사 강숙경(姜淑卿)=?~1481)이 옛날의 규모를 더욱 확장하는 한편 새로이 기둥을 갈고 단청(丹靑)을 함으로써 장려 무비한 누각으로 단장하였는데 이때의 기문을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보한제(保閒齊)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지었다. 1542년(중종 37)에 부사 박세희(朴世熙=1493~1550)가 중수후 80여년 만에 기울어지고 퇴색한 본루를 전면 해체 복원하였으며, 이 때 이름 있는 문사 구유온(仇有溫)으로 하여금 상소문을 짓게 하고 낙성이 된 후 경상감사(慶尙監司) 임백령(林百齡=?~1546)의 요청에 따라 당시 대제학(大提學)인 기제(企齊) 신광한(申光漢=1484~1555)이 루기를 지었다. 또 본루 서편에 있었던 임경당(소루)도 함께 중수하여 침류당(枕流堂)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본루 동북쪽에 있었던 망호당(望湖堂)을 본루 곁으로 옮겨 터를 돋우고 1칸을 쯩축하여 빈객들이 오르내리는 데 편리하게 하는 한편 남쪽이 강류(江流)에 임했다하여 집 이름을 이때부터 능파당(凌派堂)이라 고쳤는데 그 기문은 박세후(朴世喣) 부사가 직접 지었다. 1592년(宣祖 25)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밀양은 전략(戰略)상의 요충지(要衝地)로 작원관(鵲院關) 방어선이 삽시간에 무너지고 가장 처참한 피해를 당하여 온 성중이 불바다가 되었고 그 와중에서 본루 와 부속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599년(宣祖 32 己亥)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다음해에 부사 이영(李英=?~1616)이 도임하여 폐허가 된 경내 능파당 자리에 임시로 초옥을 세우고 객사로 삼았는데 당시 감사 (監査)한준겸(韓俊慊=(1557~1627)은 억석덩(億昔堂)아라는 당호룰 걸어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겼으며 당대 고을의 명사였던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1572~1652)은 초옥객사(草屋客舍) 에 초청을 받아 당시의 쓸쓸한 관경을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1608년(선조 41)에 부사 기효복(奇孝福)이 부임하여 전쟁 후 10년 만에 복구공사의 계획을 세우고 우선 침류당과 능파당을 먼저 복원하였으나 1642년(인조 20 壬午)에 새로 지은 능파당 에 또 불이 나서 타버리자 당시 부사 심기성(沈器成)이 그것을 게기로 임진왜란 후 50년이 지나도록 뜻을 이루지 모한 본루를 웅장하게 제건 하고 능파당도 새로 지어 전면 보수를 하였다. 이때에 [능파당중건상량문(凌派堂重建上樑文)]은 죽파(竹派) 이이정(李而楨)이 지었다.
1651년(효종 2, 신묘)에는 부사로 도임한 학사 김응조(金應祖)1587!1667)가 본루 서북편에 전패(殿牌)를 봉안하는 객사를 창건하여 공진관이라 헌판 했으며, 1661년(현종2, 신축)에 새로 지은 능파당에 또 화마가 닥쳐 능파당이 불타버렸으므로 부사 이지 (이지 )이 즉시 보수하는 한편 그동안에 재정난으로 미루어오던 본루 및 능파당. 침류당. 공진관(객사)의 단청공사를 마침으로써 화려하고 웅대한 영남제일루의 참 몸습을 되살리고 기문도 아울러 지어서 걸었다.
1722년(경종 2. 암인)에 또 우연한 화재를 만나 본루와 능파당. 침류당 등 부속건물이 일조에 회진된 것을 이 해 가을 부사 이희주(李熙疇)가 도임하여 먼저 공잔관 건물을 이건, 능파당을 복원한 후 객사로 사용하였으며 다시 재력을 가다듬고 장인을 모집하여 1724년(경종 4 갑진)에 2차로 본루와 침류당을 재건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는데 이때의 공사 전말을 이희주 부사가 지은 기문에 자세하다. 그 뒤 70년 만인 1793년(정조 17, 계축)에 부사 조휘진(曺翬振)에 의하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함으로써 면모를 일신하였고 당시의 문인 김광묵이 조부사의 부탁으로 중수기를 지었다.
1806년(순조 6, 병인)에 부사 김재화(?~1807)가 누각 동편의 대들보를 해체 보수하였는데 재정이 모자라 국고인 조전(漕轉 = 국가에 수납하는 전세(田稅)또는 대동미)에서 2천민(緡)을 빌어 섰으며, 용재 290개, 공장 1,139명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김 부사의 중수기문에 실려 있다. 825년(순조 25, 을유) 가을에는 부사 이화연이 능파당의 수리를 하고 그 기문을 남겼으며 1832년(순조32, 임진)에는 부사 조기복이 번와(기와를 갈아 잇는 일)와 동량의 교체 등 전면 해체 복원공사를 실시하여 단장을 새롭게 하였는데 이때 상량문은 중수 상량기(上樑記)는 조부사가 지었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인 1834년(순조34, 갑오에 소위 정재라는 큰 화재를 만나 경내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린 것을 부사 이인재가 도임한 뒤에 고적이 인멸된 것을 개탄하여 1843년(헌종 9)에 착공 이듬해인 1844년(헌종 10, 甲辰)에 현재와 같은 누각의 모습으로 완전 개창하였다. 이인재의 복원공사는 옛 제도를 다소 바꾸어 본루의 규모를 크게 하는 한편 능파당과 침류당을 각각 동서의 익루(翼樓)로 삼아 복도와 층층계단의 낭하를 설치하여 본루와 연결 통래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경내를 크게 넓혀 비장청(裨將廳=裨將(비장이란 감사, 유수, 병사, 수사 등의 지방장관 및 중국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던 관직이다). 동해(東廨=동쪽에 있는 관청 건물). 서해(西廨). 공주(公廚=음식을 차리는 방). 대문 등 수백 칸에 이르는 유숙시키는 객관으로서 도, 응용하였다. 이때 [영남루중건상량문]은 당시 병조판서로 있던 유관(遊觀) 김흥근(金興根)(1796~1870)이 지어 편액 하여 걸었으며 향사(鄕士)인 추남(推南) 이장한(李章漢)이 지은 상량문도 따로 전해온다. 이 밖에도 당대 명필가가 동원되어 ‘강좌웅부(江左雄府)’‘교남명루(嶠南名樓)’ ‘운금루(運金樓)’ ‘강성여화(江城如畵)’ 현청관(縣廠觀)‘ 등 유명한 글씨를 많이 남겼지만 그 가운데서도 “癸卯初夏 이증석십세서(癸卯初夏 李憎石十歲書)”라고 협서(夾書)한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라는 편액과, 같은 협서로 “아현석팔세소(李玄石七歲書)”라고 한 ’영남루(嶺南樓)‘ 편액이 특히 눈길을 끄는데, 이는 이인재 부사의 아들 형제라 하며 그것이 10세와 7세에 고종 때에 다시 대화가 발생되어 비장청(裨將廳). 공주(公廚). 그리고 서주(서주) 건물이 회진되고 본루와 능파당. 침류당 의 주 건물 및 류선관. 동주. 사주문. 일주문 등이 일부 손상만 입은 채 소진을 면한 것은 그래도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다. 그 뒤 군수 이도재(1848~1909)가 도임하여 화재로 황폐된 영남루의 경내를 정비하고 손상을 입은 누각건물을 보수하였다.
그러나 1894년(고종31,갑오)에 동학혁명을 게기로 이 고을에도 주둔한 일본헌병대에서 영남루를 강점하고 객사에다 무고한 백성을 잡아 고문하는 옥사를 만들어 귀중한 우리문화재를 함부로 유린하는ㅇ 만행을 저질렀다. 더구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후에 국권회복운동의 혼란한 와중에서 오랫동안 누각의 관리가 허술하고 일본 관원에서 함부로 사용하여 건물에는 비가 새고 바람이 쳐서 누각은 몇 차례나 도괴의 위험의 직면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밀양 박씨의 시조인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의 묘가 영남루 경내에 있었다는 일설에 따라 박씨 문중에서 객사 좌전에 자리를 정하여 돌로 된 우람한 제단을 설치하였으며 1930년(경오)에 일제 군수 최두연(崔斗淵)이 고을 백성들로부터 수만금을 거두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현존하는 본루. 능파당. 침류당. 동주 건물은 물론 층층간. 사주문. 객사(유선관). 일주문 등은 모두 이때에 제모습을 갖추었으며, 이듬해인 1931년 일제 총독부 주관으로 한국의 팔경과 십륙경을 선정할 때는 영남루가 십륙경의 하나로 들어가게 되었다. 1933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朝鮮寶物古跡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의 공포 시행(施行)에 다라 영남루는 ‘보물(寶物)’로 지정되어 당시 화폐 4千圓을 들여 크게 補修하였다. 1940년 을 전후한 일제 말기에는 그들의 소위 황국신민화운동(皇國臣民化運動) 강행의 일환으로 密陽의 이마라 할 수 있는 무봉산(衙東山)에다 일본의 國祖神을 받들기 위한 신사(紳士)를 건립하였다. 그리하여 영남루 앞뜰은 자연 신사의 참배통로가 되었고 경내의 상하에는 높다란 양회계단(洋灰階段)을 구축함으로써 마치 신사에 딸린 부속물루처럼 되어버렸으나 민족 감정상으로도 한없이 가슴 아픈 일이었기니와 고적(古跡)으로서의 환경도 말이 아니었다.
1945년에는해방이 되자 군민들의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일본신사는 철거 되었지만 사회적. 정치적인 혼란 가운데서 보존관리 상태가 허술하여 건물은 황폐해지고 고적으로서의 환경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그러나 읍내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우리 문화에 대한 보존 운동이 일어나고 자치적인 관리를 해오다가 1948년 정부 수립과 함쎄 일제의 구 법령에 따라 영남루를 국보 제 245호로 지정되었다. 1952년에는 향중의 유지가 주동이 되어 ‘단군봉안회(檀君奉安會)를 조직하여 경내 침류당에 그 본부를 두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본루 북쪽에 있는 객사(구 유선관) 건물과 일주삼문을 전면보수 단장하고 담장을 구획한 다음 그곳을 단군봉안 전으로 삼았다. 처음 ‘대덕전’이라 편액한 사당 안에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수좌(首座)로 하여 중앙에 봉안하구 역대 개국시조 8위를 동·서벽에 각각 배향하였으며 일주삼문에는 ‘만덕문’ 이라 현판 했는데, 그 이후 대덕전을 다시‘천진궁(天眞宮)’으로 바꾸어 편액 했다. 이와 같이 객사 건물이 별도로 구분되어 관리를 하게 되자 본루의 유지 관리를 위하여 1957년에 밀양교육구청의 주동으로 밀양고적보존회가 조직되어 1차 사업으로 영남루 보수공사를 추진하였는데 이에 [향토문화]란 책을 간행하여 군내 고적을 소개하는 한편 책을 팔아 자금 조달의 방편을 삼았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57년 이러한 향토 고적보존에 대한 지방민의 관심과 열성을 대변하여 당시 국회의원조만종의 활동으로 국고보조와 지방비 및 유지들의 성금 등 1,200만圜 의 예산을 확보하여 건물 지붕의 전면 번와, 단청(丹靑) 등 대대적인 중수공사를 실시하고 착공 6개월만인 이 해 11월에 준공을 보아 이를 기념하여 ‘밀양문화제’가 창시되기도 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국비 또는 지방비를 조달하여 본루의 사주문. 일주문 등 부속건물의 보수를 해오다가 1960년 을 전후하여 민가를 철거한 사주문 밖에는 ‘충혼탑’을 세워 공원을 만들어 능파당 전면에는 이 고을 독립의열사(獨立義烈士)를 추모(追慕)하는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문화재 현상변경을 우려한 학자와 전문가들의 반대의견도 있었다. 1967년에는 본루와 침류 당 사이의 층층각 계단마루와 기둥. 지붕을 보수하였고 그 뒤 경내의 조경과 아자(亞字)울타리의 설치, 조명시설, 죽림의 보호설비 등 거의 해마다 지정문화재의 보존관리를 위하여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현재 보존 대상이 되는 문화재는 본루 이외에도 능피당. 침류 당. 층층각. 사주문. 그리고 토담으로 구분되어 있는 객사((지금의 천진궁) 건물과 일주삼문(만덕문)이 있으며 구한말의 명필 성파(星坡) 하동주가(河東州)가 쓴‘ 영남루‘ 3대자의 편액을 위시하여 고려시대 이후 각각 당대를 대표하는 명유들의 기문과 재시 등 예술적 향기와 사료로서 가치가 높은 유물이 현판으로 남아 전해오고 있다. 또 경내 전면에 깔려 있는 석화(석화(石花)) 라는 이름의 들꽃 무늬는 영남루만이 지닌 이채로운 자랑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창건 이래 7,8백 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이 경치 좋은 누 다락에 올라 풍류와 정서를 읊은 문인과 학자들이 수없이 많은데 문헌상으로 吟詠(음영)를 남긴 대표적인 명가들을 그 시대에 따라 소개 해 올리겠습니다.
한글 번안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모되어 소개된 원본 자의 자료를 그대로 복사하여 올렸음을 사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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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방대한 자료 수집에 수고하신 민석님 감사합니다.
영남루의 사고(史考) 도 대단합니다, 이 많은 자료 수집 하실려면 많은 노력과 정성을 솓았셨겠습니다, 문익점이 지은 시가 소개되었습니다만 개인내는 남천강의 주변을 의미 하는것인지 아름답습니다, 문익점 하면 좁은 상식으로 목화를 보급시킨 사람으로 재배는 장인인 정천익씨가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석님 다읽지는 못하고 대충 보았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석님 이 많은 자료 수집하셔서 카페에 올리시느라 큰 수고하셨습니다.타자치시는 솜씨가 대단합니다.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영남루 직접 가서 둘러보는 것보다 더많은 것을 보고 갑니다.감사드립니다.
앉자서 봐서 죄송 합니다.건강 하시고 좋은 자료 부탁 드리겠습니다..
우리고장 영남루에데한 역사를 빠짐없이 설명과함께 올여주셨어 감사합니다
민석님 주신 우리고장의 많은 자료 저도공부하고 우리 손자 손녀 에게도 많은 공부의 자료가 되겠습니다.감사합니다.건강 하세요.
저도 영남루 공부를 해보았지만 자로 수집과 동시에 상세한 설명과 많이 알리려 하시는 그마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