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의 저작은 아직도 적지 않이 남아 있고, 그에 관한 연구도 수편이 보인다. 용성의 불교운동을 살피자면 우선 그의 핵심사상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나 그는 학자나 종교 사업가라기보다 깨달은 분이었다. 그가 머물러 있는 깨달음의 경계를 다룬다는 것은 문자로서 우선 한계가 있다. 여기에서는 이 점을 전제로 하고 우선 주어진 주제에 따라 그의 불교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그러한 운동을 통하여 그가 의도한 이념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른바 신룡의 편린을 살펴보는 결과밖에 안 된다는 점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조선 철종대에서 고종을 걸쳐 일제 침략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 5백년의 매우 혼란스럽고 침체되고 경직되었던 사회가 껍질을 깨고 잠에서 깨어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밖으로 열강들에 의하여 쉴 새 없이 문이 두들겨지고 흔들어지기도 하였지만 한편 안으로 깊은 혼침에서 깨어 나오자 험한 몸부림을 친 시기이기도 하다.
수제와 흉년, 그에 더한 학정은 민란소요를 불러일켰고, 동학이나 기독교나 서구사상 등 새로운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그러한 종교를 중심으로 하여 민중은 크게 술렁대고 있었다. 그 사이에 동하군을 중심한 민중봉기나 의병활동이 있었는가 하면 우리 국토를 둘러싸고 일청(日淸), 일로(日露)전쟁이 치루어지기도 하였다. 결국 갑신, 을사조약을 거쳐 경술년에 이르러 합방의 치욕으로 이조는 문을 닫고 일제치하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불교느 기나긴 동안의 주구(誅求)와 압박의 틀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 명맥을 이어오던 끝에 내외정세의 역동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다. 그것은 밖으로 교단 통제체제의 변화와 안으로 경허(鏡虛, 1849-1912), 용성(龍城, 1864-1940), 석전(石顚, 1870-1948) 등 주로 전선장(大禪匠)들의 출현이다.
그 당시의 한국불교에 폭풍적 신풍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무래도 경허의 출현이다. 그가 교화한 시간은 1879년의 오도(悟道)에서 입적까지의 34년간이지만 그가 이름을 숨기고 자취를 감춘 최후 8년을 제한다 하더라도 28년이 된다. 용성의 오도는 경허보다 6년 뒤진다.
경허의 선법이 폭풍처럼 대지를 휩쓸고 나갔다면 용성은 그 뒤를 이어 봄비처럼 뭇 대지 생명을 감싸고 가꾸어 갔다. 경허가 강종(講宗)에서 급선회하여 경절문(徑截 門)에 뛰어들어 탕탕무애(蕩蕩無碍)로 천지를 흔드었지만 용성은 처음부터 곧바로 심종(心宗)으로 돌아가 조사 관문을 타파하고, 그 후에도 장기간을 걸쳐 수업한 후에 민족과 교단의 멍에를 짊어진 생애를 일관하였다.이들은 최근세 한국불교의 큰 산맥을 이루고 있다.
이런 중에서 한국불교는 서서히 폐쇄된 질곡에서 벗어나고 현대의 문턱에 깊이 들어서 그 본색을 발휘하게 된다.
용성의 생애를 삼분하여 본다면 제 1기는 수학(修學), 출가(出家), 오도(悟道)에 이르는 1885년까지의 22년이고, 제 2기는 오도 후 경술국치까지 오후수(悟後修)와 산중선회(山中禪會) 위주의 25년이고, 제 3기는 국망을 당하자 하산입경하여 대각불교운동을 전개한 말년의 30년이라 할 수 있다.
제 1기에서 발심 수도를 완성하였고, 제 2기에서 전통적 한국불교의 종맥을 확고하게 다졌으며, 제 3기에서 종문(宗門)을 돕고 조국의 독립과 민중을 깨우치기 위한 사회적 민중적 각성운동에 헌신하였다.
용성은 1864년 5월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백 씨, 이름은 상규, 법명은 진종(震鐘), 용성은 그의 호다. 16세에 해인사에 출가하고 22세에 송광사 삼일암에서 큰 일을 마쳤다. 그 후 18년간을 오후수행(悟後修行)과 경전을 널리 섭렵하였고, 40세에 이르러 본분종사로서 자비교화의 시기에 들어갔다.
1910년 합방의 국치를 당하자 지리산에서 나와 서울에 선종교당을 짓고 본격적인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 .1독립선언 후 만 2년의 옥고를 치루고 나와서는 역경, 포교, 민중계몽에 헌신하고 조직적인 대각구국운동을 펼치다가 1940년 77세로 입적하였다.
그 사이에 역경, 저술한 경전과 책자는 40여 종에 10만 부에 달한다. 해인사 서쪽 산록에 사리탑이 있다.
용성이 오도 후 전개한 생애는 그것이 그 시대를 산 오도자의 자기실현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근원적 대도를 체득한 그로서 그가 전개한 운동은 그가 불교인이었으므로 불교적인 테두리에서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도 그가 살았던 시대에 나라를 잃고 외세에 짓밟힌 상황 아래서 진리를 깨달은 자가 행하여야 할 근원적인 차원을 실천하였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물론 불교인 특유의 운동도 없지 않으나 그가 전개한 일대의 운동은 오직 민중을 깨닫게 하여 인간의 독존과 자유와 주체적 권능성을 알게 하며 그것을 개현 실천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것이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함양하고 외세를 배척할 근원적 힘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는 종승(宗乘)의 선양이 있고, 경전의 번역이 있고, 포교방법의 개혁이 있고, 교단기초를 확고히 다지는 작업이 있고, 압박받은 민중의 구제가 있고, 조국을 구출할 애국운동이 있었다. 이하에 용성이 전개한 중요한 행적과 그의 주장을 열거해 본다.
1)대중선 운동
용성은 오도 후 동서남북 산야를 편력하며 오후(悟後) 수행에 전념하더니 18년이 되는 1903년 그의 나이 40세에 이르러 비로소 선회(禪會)를 개설하고 그 종주(宗主)가 된다. 그로부터 이르는 곳마다 선회를 창설하고 종승(宗乘)을 현양하였다. 그가 창건한 선회로는 비로암 선회(毘盧庵 禪會), 석왕사 선회(釋王寺 禪會), 상석대 선회(上石坮 禪會), 망월사 활구참선만일결사(望月寺 活句參禪萬日結社), 범어사, 삼처선원(三處禪院) 등을 꼽을 수 있다. 용성은 선을 지관타좌(只管打坐)의 생기없는 선(禪)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각성현발(覺性顯發)을 촉구하여 민중 깊이 선(禪)신앙을 심어 갔다.
2)포교의 쇄신
용성의 포교는 각행(覺行)의 실천이었다. 선, 염불, 진언 등 모든 실천수행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한 점으로 이끄는 원융한 선포교를 고취하였다. 그리고 포교방법에 있어서 음악을 도입하고 한글로 간소화된 의식문을 창설하여 온 대중이 함께 의식에 참여하게 한 사실은 오늘에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 그리고 많은 포교문을 저술하여 반포하고 일요학교를 개설하며 어린이 포교까지 망라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3)역경사업
용성이 현대 역경운동의 비조라 함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역경의 동기를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시대의 추이가 능률과 경제의 시대임을 판단하고 난해한 한문경전은 유통하기 어렵게 되었고, 들째, 현대적 서구학문과 과학을 소화하는 것이 급선무이므로 한문공부에 바칠 시간이 없다는 것이며, 셋째는 설사 한문공부에 전력하여 일대 문장가가 되었더라도 문자가 불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넷째는 '조선사람들에게는 조선 글'이 합당하고 또한 한글은 평이하여 보급에 편리하다는 데 있었다.
1921년 출옥과 동시에 역경을 시작하여 많은 진취가 있었으나 주변의 몰이해와 비방과 재정난으로 인하여 몇 차례 중단한 적은 있었어도 끝끝내 임종 직전까지 역경, 출판을 쉬지 않았다.
4)계율진흥운동
부처님의 최후 유촉에서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라"하심은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용성이 재세한 시대는 계의 정신이 크게 도전을 받던 시기였다.
계율이 깨어질 때 불법수행도, 교단도, 불법도, 망하게 됨을 확신한 용성은 계율운동을 크게 진작하여 계단(戒壇)을 설하고 적극적으로 계법을 선양하였다. 당시 계에 대한 도전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가해져 왔다. 하나는 "음주 식욕이 반야에 방해되지 않으며 도둑질과 음행이 깨달음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하여 부처님 계법을 송두리째 내버리고 막행(莫行)을 감행하면서 지계자를 향하여는 상에 집착하는 작은 근기라 비방 질시하고 승려의 취첩 금지는 국가와 불교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개화의 이름으로 가취(嫁娶)의 자유를 주장하기도 하고, 한편 일본불교와 접하게 되자 저들의 풍습이 우리 교단 내에 감염되어 승풍(僧風)이 크게 문란하고 1911년 사찰령 취임의 요건 중에서 '비구계의 수지'까지도 삭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사이에서 계율을 호지하고 교단의 청풍을 일으키고자 하는 용성의 주장은 극진한 바가 있다.
1924년 대각교당(大覺敎堂)에 계단(戒壇)을 설립하고 1931년 12월에는 각설 범망경(覺設 梵網經)을 번역하였으며, 또한 기회 있을 적마다 당시의 파계행을 극력 경고하였다. 또한 주목할 것은 그 계맥은 이른바 칠불계맥으로, 이는 지리산 칠불산 대은 율사가 개창한 서상수계(瑞相受戒) 계맥인 바 그는 계맥을 한국고유의 계맥이라 하여 크게 중히 여겨 왔다.
5) 자주적 통일종단
그는 종단을 절대 자주적 종단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종교는 독립적이어야 하며 결코 정치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되며 또한 본산 단위의 분권종단을 개혁하여 단결종단을 촉구한다. 그리고 정치에 부촉되거나 간섭을 받는 것이 불교인 자신의 죄과라고 하여 분발을 촉구한다.
6) 경제적 자립추구
용성은 생산종교를 강력히 역설한다. 옛 조사의 유풍을 따라 수행인 스스로 생산에 종사하여 사회변천에 애웅하고 안일한 생활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한다.
"한 손에 호비를 들고 참선하라"는 주장을 실천하기 위하여 만주 또는 국내에 농장을 시설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선사는 또 광산을 경영하여 독립운동에 뒷받침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사실 종단이 공장을 경영하고 가득성 있는 임산을 장려하며 북청에 있는 금, 은 , 동광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공장을 시설하고 포교사를 두며 농촌에 순회 포교사를 두어 포교하되 상층보다 하층대중을 위주로 포교하고 구제운동을 펴라고 주장한다. 종단이 공장이나 농장 등 생산에 관여하며 포교할 것을 주장한 선사의 의도한 바가 무엇인가는 좀더 연구할 과제라 생각된다.
7) 농민의 자립 조직화 추구
용성이 농촌의 생산소비조합운동이 필경 농민의 경제적 자주성과 조직적 협동성을 배양한다고 한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8) 자주독립운동
조국을 잃은 상황하에 오도자(悟道者)는 무엇을 할 것인가? 홀로 안빈낙도에 떨어질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각자(覺者)는 원래 각(覺)도 없어서 조국과 민중과 인간이 그며 역사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용성은 오도 후 초기에는 앞서 일별한 바와 같이 오후(悟後) 수행과 종문진작에만 몰두하였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첫째의 애국형이었으며,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되자 감연히 서울 복판에 뛰어나와 포교, 역경운동 등 민중계몽예 뛰어들었고 민력 배양에 헌신하였다. 일체 치하에서 호적 없이 일생을 지냈으며, 기미년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로서 앞장선 것은 너무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오도 후 전 생애는 "불자는 어떻게 호국하는가"를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용성은 자신의 새 불교운동의 근거로서 대각교를 설립하고 대각운동으로 그의 모든 활동을 총괄하였다. 그가 자신의 불교운동을 대각이라 한 데에 대하여 그 이유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교조인 석가모니불을 법신불로 파악하였다. 그 법신불이 대자재의 위신력과 무연대비의 발휘로서 처처에 자비시설을 성취하고 영원히 무애위력을 발휘하며 우리의 역사 속에 석가모니불로 나투기도 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부처님의 법성은 인인개개(人人個個)의 진성으로서 일체중생은 법성을 본성으로 하고 거기서 혹은 절대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 영각성(靈覺性)을 나툰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인간의 청정본연각성을 깨닫는 것을 인간의 본분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인개개 본분을 대원각성의 구현으로 보고 이것을 개척하여 무가보주(無價寶珠)를 마음대로 희롱하고 일진대광명체(一眞大光明體)를 마음대로 수용함을 자신의 불교운동의 구극 목표로 삼았다.
'천지가 나와 더불어 한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동체'일 뿐만 아니라 '천지가 나의 일진심광명체(一眞心光明體)'임을 깨달아 그 여지없는 수용을 추구하였떤 것이다. 이러한 도리의 수용은 오직 '각'이 있을 뿐이요, 그밖에 다시 첨가하거나 얻을 것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조국독립은 물론 도덕, 정치, 사회, 문화, 과학 일체에 이르기까지 이 한 물건의 자각이 기초가 되고 필경 성취가 있는 것을 보고 대각운동을 전개하였다.
용성이 그의 종교를 대각이라고 한 데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각(覺)이라 하는 것은 능히 깨칠 바가 없는 것을 말한 것이니 대각의 본성은 분명하되 일체 명상이 없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불(佛)도, 법(法)도, 승(僧)도 아니로되 천지인의 주인공이 되고 만법의 왕이다. 대원각체성은 일체 명상이 없되 하늘이 되고 땅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능히 사람이 된다. 이 근본심성을 깨치고 타인을 깨치게 하여 자각타각이 둘이 없어 원만하므로 구경각이라 하나니 이를 다 깨치면 대각이다."
"심성본성은 대각도, 묘각도, 허공도 아니니 언어도가 끊어지고 심행처가 끊어졌으니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억지로 말하여 대각이라 한다." 그런 고로 불을 '각'이라 하고 석가모니불을 석가대각(悟道는 覺) 능인적묵각(能忍寂默覺, 覺海日輪) 또는 대각성도(大覺聖導, 釋迦史)라 하였는데, 각이라는 뜻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는 '무변허공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 하시고, 또 "허공이 대각 가운데 나타남이 바다에서 거품 하나 일어난 것과 같으니 이것이 내가 도를 깨달음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의 다양한 불교운동이 전개된다.
그 첫째는 각의 성취자로서의 자신의 피력이며, 또 하나는 일체중으로 하여금 본래 깨달아 있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한 종교적 시설이며, 또 하나는 원만각성이 구현되는 사회적 요건의 실현 추구였다.
첫째의 표현으로 청정하고 고고한 수행을 견지하는 것과 차별없는 대비를 항상 베푸는 것과 어떠한 일에도 걸림없는 원만성의 실현이었다.
둘째의 것으로는 선원의 설립, 교당창설, 역경포교 등 사업이 그것이고, 셋째의 것으로는 조국을 잃은 상황하의 민중의 마음에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자주역량을 배양하며 필경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사업이다. 이를 돌이켜 살필 대 용성의 새 불교운동의 목표는 총체적으로 '대각'이라고 하는 것을 개아적 사회적 민족적으로 유감없이 발휘함에 있다 하겠으니 이를 이하에 약간 정리해 본다.
1)자각추구
모든 인간의 절대권능의 자각추구는 용성이 추구한 제일목표였다. 자신이 오도해서 성취한 것이 이것이었으며 대각교 개설의 목표가 이에 있었으며, 모든 저술의 근본목적이 이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도리의 설파는 어떠한 일부층에 한한 것이 아니고 이를 향한 방편시설은 실로 무궁하여 어떤 특정한 문이 없었다. 수행에 있어서도 한갓 공안에 그치지 않고 혹은 염불, 혹은 지주(持呪), 혹은 관법 기타 일체수행문을 들어 오로지 이 자각에 통하는 길로 개척하였다.
2)민족 자주역량의 계발
용성이 산업사회의 포교를 주장하고 한갓 산업사회포교뿐만 아니라 불교교단이 직접 농업 공업에 관여하고 한편 생산 소비조합 등 협동조직을 통하여 우월한 경제세력에 대응할 자위력을 배양할 것을 주장한 점은 앞에서 본 바이다. 이것이 종교를 한갓 정신적 평화와 자유를 충전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의 중심에 서서 인간옹호와 국토의 성취를 추구하는 구체적 표현이라 할 것이다.
정신적 자주성과 경제적 자주역량의 계발 축적이 없이 민족의 자유독립은 바라볼 수 없는 것이며,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지 못하는 종교는 그것이 대각원리에서 용납될 수 없음을 용성은 몸소 실천해 보였던 것이라 하겠다.
3)불교종단의 책임추구
용성은 불교종단의 위치를 중요시하였다. 불교교단이 사부중제도로 구성되고 그러한 구성원이 제각기 책임을 다할 때 정법은 영원하고 국토는 성취된다는 것을 신봉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교단이 부패하거나 자체적 또는 사회적 기능이 위축되는 것을 심히 우려하였다. 그래서 교단의 부패 타락을 크게 개탄하고 그 시정에 적극 앞장섰으며, "음주 살육 무방반야'라는 일부 파계분자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과 각성의 힘이 미치는 한 촉구하였다. 이것은 교단이 지니는 사회적 국가적 책임의 중대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또 총림과 종단이 직접 생산에 참여하라고 한 점은 교단의 방대한 재산의 활용화 총림과 종단의 경제적 자립의 중요성을 인정한 데서 온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여 종단이 스스로 정법에 의하여 청정결속하고 경제적 자립을 통하여 그 기능을 발휘하며 그로써 나아가 사회적 국가적 책임의 완수를 불교종단에 부여한 것이라 하겠다.
4)민중불교의 개척
용성은 그의 교화의 초점을 민중에 두었다. 민중이야말로 대각운동의 모체요, 조국의 토대를 지킬 기반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민중을 외면한 종교도 사상활동도 포교도 무의미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많은 비방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문에 갇힌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교학 속의 불교를 평이한 비유와 말로 풀이한 포교와 저술에 힘썼다.
'중앙행정에 대한 희망'에서 그는 "농촌이나 도시에 공장을 건설하되 소비사업이 아니라 생산사업을 하라. 이 일은 너무 늦었으나 늦더라도 착수하라"고 강조하고, "보급발전은 상등계급에 있지 않고 하등계급에 있는 것이다"라 하였으며, "지금의 시대는 대중적이요, 영웅적인 것이 아니다." "영웅 대표적 인물이 많은 것보다 수평적 기관이 완전한 것이 좋다"하여 불교운동을 철저하게 민중위주로 뿌리내리고 조직화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조국을 잃자 산에서 내려와 홍진만장 지정(市井)의 복판에 뛰어들어 사가(私家)에서 시작하여 선종교당을 지은 일이나, 망국에 한을 품고 고향산천을 등지고 이국의 땅을 유리(流離)하는 동포들을 위해 북간도 연길과 길림에 농장을 시설하고 교당을 설립하여 저들을 위로 격려하고 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민중불교의 개척이 필경 허물어뜨릴 수 없는 가장 공고한 민족의 자주토대의 형성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용성은 망국시대를 산 불교적 선각자였다. 그런 만큼 그의 전 생애는 망국의 민족 속에 펼쳐진 '각'이라고 하는 한 글자의 광휘(光輝)로 시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불교운동이 조직력을 통하여 사회적 힘으로 작용될 수 있음을 안 까닭에 대각교라는 독립된 교단을 세워 각성의 조직적 발휘를 기인하였다. 그러나 그의 교단의 조직화 내지 발전은 큰 성과를 거두려는 직전 그의 오도 후 55년, 대각교 창립 후 19년 만에 입적하였다. 그의 대각운동이 교단적 조직으로 몇 가지 이유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어도 그가 지향한 불교운동의 방향은 길이 불교교단의 한 표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하나 용성의 새 불교운동의 역사를 향도할 불교의 책임과 위치를 뚜렷히 보여 주었으니 인간이 개아와 사회와 역사와 관계에서 그가 마땅히 취할 실존적 당위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용성의 불교운동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의 교단에 대한 이념과 구상은 오늘의 한국불교 교단의 큰 주류로서 맥맥히 이어지고 있다. 일정치하 종교시책에서 대처승이 용납되고 파계승이 종단을 점거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용성의 그칠 줄 모르는 도전은 해방 후 불교정화운동으로 다시 불붙어 허다한 우여곡절 끝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법에 대처승은 없다. 종단은 청정정법 종단이어야 하며, 사회와 조국과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불교정화의 기치는 용서이 시종 역설하여 온 주장이며, 한국불교에 흐른 불멸의 맥박인 것이다.
《출처 : http://www.bulkwang.or.kr/snim/kd6-8.html (광덕스님 소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