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에게] "세상에!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다니"
변론(辯論)이 별곡(別曲)이 되어 어지러운 가락으로 연주되는 세상이다. '부모를 고소 못하게 막는 건 위헌'이라는 시비가 불거졌고, 그 시비에 편승한 논리도 있는 모양이다.(10일자 A13면) '부모는 자식을 고소할 수 있고, 자식은 부모를 고소할 수 없도록' 규정한 현행법은 그 독법을 달리할 때 의미가 분명해진다.
법의 잣대를 들이댈 때, 우선순위 중의 하나는 절차법이다. 즉 형법과 형사소송법이 충돌 또는 상치(相値)할 때, 절차법인 소송법을 우선 적용한다. 그래서 소송법은 대개 위처럼 대등절로 규정되지 않고, 종속절을 안은 문장으로 서술되어 그 의미를 명확히 한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고소할 수 있고'가 아니라 '부모는 자식을 고소할 수 있지만'으로 읽어야 취지가 분명해진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궁(躬)이라는 정직한 사람이 있는데, 자식인데도 자기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증언했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들이 말하는 정직함이란 이것과는 다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숨기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줍니다. 정직함이란 바로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논어 자로편) 공자보다 더 성정이 득달같은 맹자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을 책(責)하는 것은 벗들 사이에 할 도리지, 아버지와 아들이 선을 책하는 것은 은의(恩義)를 해치는 일 중에도 큰일이다." 이것은 제나라 사람 광장(匡章)이, 자신의 아내를 죽여 마판 밑에 파묻은, 비정한 패륜(悖倫)을 저지른 아버지를 끝끝내 어쩌지 못했다는 일화에 대한 맹자의 소회이다. 지나친 면이 없지 않지만, 부자지간의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맹자의 역설이 아닌가 싶다.
요즘 세간의 화두는 공정과 정의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필자가 주목한 것은, 충직이 보편적 도덕 원칙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도처에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인간으로서의 자식과 아버지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본다.
용서의 다른 이름은 관용이다. 그것은 꾸짖음에 대한 유예나 포기이기에 그 향방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하는 법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이 부모를 꾸짖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모를 고소하는 일은 용서 못할 행위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헤살이 지나치다면,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는 방법이 아니라, 주변에서 고발하는 방법으로 에둘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