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인터넷에 "조소앙"을 쳐서 알게 된 내용을 요약한 것인데,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 실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조소앙(趙素昻, 1887.4.10 고종24년-1958) 선생은 경기도 파주에서 조정규(趙禎奎)의 6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본관은 함안이고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다. 호를 이름 대신 사용하여 조소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16세) 성균관 경학과에서 공부했으나 일본의 국권침탈과정을 보면서 관료의 꿈을 접었다.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선발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귀국 후 경신‧양정‧대동법률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메이지대학에서는 도쿄대학의 국권주의에 비교되는 민권주의 법률교육을 받았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한인유학생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독서토론회, 학보편집, 제국주의 비판, 한일합방 반대운동을 추진하여 감시대상이 되었다.
-동서양의 광범한 독서와 사색으로 기독교에 입교하여 조국과 민중을 구제하는 것이 천명임을 확신했다.
(2)1913년(27세) 상하이로 망명,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의 박달학원에서 교포자제교육을 하다가, 1917년에는 신규식,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와 함께 온 국민이 단합하여 한일합방 무효와 황제주권 포기에 의한 국민주권주의의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한 「대동단결선언」을 하였다.
-1918년에는 만주 간도지방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 부령(副領)이 되고, 김좌진 장군 등 39명의 동의를 얻어 사해동포주의, 평등주의, 육탄혈전의 독립운동 방안을 제시한「대한독립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생은 대한독립의군부 대표로 2000원을 갖고 상하이로 와서 임시정부 수립 작업에 참여해, 「대한민국임시헌장」에 민주공화제를 표방하도록 했다.
-1914년에는 단군‧예수‧석가‧마호메트‧공자‧소크라테스의 6성(六聖)을 모두 일신(一神)의 아들로 보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한 분씩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면 세계의 평화통일이 가능하다는 사해동포주의의 <일신교령(一神敎領)>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국제사회의 폭력적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3)1919년(33세)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을 돕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회의 참석이 좌절되었으나 대신 8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귀로에 영국의 노동당과 소련의 공산당대회를 참관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호소하고 1921년 상하이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적자보(赤子報)를 간행‧배포하기도 했다.
-1922년(36세)에는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정당인 “한살림”을 조직, 정강정책을 체계화하고, 「발해경」을 저술하여 조국을 되찾은 발해인들의 용기를 본받게 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경기도 출신의원으로 선출되어 외무총장직(외무부장관)을 맡아 이승만 대통령 탄핵문제와 이념갈등으로 침체상태에 빠진 임시정부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7년(41세)에는 한국유일당운동에 참여했으나 좌우이념갈등으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4)1930년(44세) 안창호, 이동녕, 김구 등의 우익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삼균주의에 의한 독립운동 이념을 제시했다.
-삼균주의(三均主義)는 모든 국민의 정치, 경제, 교육에 대한 평등을 주장한 것으로, ①정치참여 기회의 균등화 ②경제적 조건의 균등화 ③교육기회의 균등화를 말한다.
-「한국독립당의 근황」을 저술하여 일당정치에 의한 인민민주공화국을 지향함을 밝히고, 무산계급의 일당독재인 공산당과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1932년 선현들의 글을 모은 「유방집(遺芳集)」과 「소앙집(素昻集)」및 한국독립당의 「진광(眞光)」을 간행하여 선전활동을 주도했다.
-1934년 단일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삼균주의에 의한 독립운동 노선을 채택했으나, 곧 탈퇴하면서 유물론과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1939년(53세) 임시의정원 국무위원 겸 외무장(외무부장관)을 맡아 “독립운동방략”을 기초하고 임시의정원을 통과시켜 공포했다. 이로 인해 당, 정, 군의 삼각협력체제에 의한 독립운동의 실행방안이 구체화될 수 있었다.
(5)1939.10월부터 1945.8월 해방까지 임시정부 외무부장(외무부장관)으로 독립외교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미국과 중국에 서한을 보내고 주미외교위원부를 편성하며, 한중문화협회를 창립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장개석)를 통해 1943.12.1일 「카이로선언」에 적당한 시기에 한국독립의 약속이 공표되도록 노력했다.
-1941년(55세) 한국독립당에서 삼균주의에 의한 광복 후 신국가건설 계획을 체계화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을 기초하여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 승인을 받기 위한 조치로 대일선전포고를 하였다. 2차 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연합국의 한국공동관리방안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하는 외교‧언론활동을 전개했다.
(6)1945.12월(59세) 홍진, 조성환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귀국하여 임시정부 중심의 건국 작업을 진행하려 했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한국독립당 명의로 활동하면서 반탁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47년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국민의회”에 참여, 그 의장이 되어 미군정 주도의 과도입법의원에 반대하고 자주적인 국가건설운동을 전개했다.
-1946.12월 삼균주의 청년동맹을 결성하고, 1948.3월 삼균주의 학생동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에 의한 국가 건설을 추진하려 했다.
-1948.4월(62세)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운동에 참여하여 평양에 갔으나 실패했다. 5.10선거에는 불참했으나, 민주적 선거에 의한 대한민국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한국독립당을 탈당, 12월 사회당을 결성하여 의회활동을 통한 삼균사회 건설을 추진코자 했다.
-1950.6월(64세)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북구에서 출마하여 훗날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 박사와 겨뤄 전국최다득표로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으나, 6.25전쟁으로 납북되어 1958.9.10.일(72세) 평양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소는 평양 교외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첫댓글 조소앙 선생에 대해 잘 정리된 글을 볼 수 있도록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소앙 선생은 함안조가 중 어계 조려(趙旅) 할아버지 이후 최고의 인물이죠. 우리 함안조가를 가장 자랑스럽게 만들어주시는 분, 조소앙 선생입니다. 인물 중에 인물 조소앙=조용은(趙鏞殷)
함안조씨 조소앙 선생은 어느 파에 속할까? : 확실하지는 않지만 파계도를 보고 추정해봅니다. 함안조씨 75지파 중 경기도에 본거지를 둔 선조가 누구인지 조사해보니, 참판공파로 추정됩니다.
-참판공파는 조열(전서공 10세)-안(시정공 11세)-어계 조여(12세)-동호(진산공 13세)-순(참판공 14세)-정견(건의 차남 양자)-감(옥천공 16세)-의도(17세)로 이어졌는데, 함안에 정착한 전서공 할아버지의 직계손으로 파계도에 본거지가 경기도 일원으로 나와 있습니다. 조소앙 선생의 선영은 경기도 양주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도 참판공파가 틀림이 없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17세 의도 할아버지의 4촌과 6촌들도 모두 참판공파로 부르면서 개성, 서울, 시흥이 본거지로 나와 있습니다.
윗 글에서 조소앙 선생의 참판공파는 전서공(조열)할아버지의 직계손이 아니고, 시정공(조안)할아버지의 직계손입니다. 전서공 할아버지에게는 이(산원공파-협천), 영(참지공파-안동), 환(자손 없음), 안의 4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