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첫달 간룡 답사기 ( 2007년 1월 28일 )
2007년 첫달도 후다닥 지나 간다 오늘이 새해 첫 간룡의 날이다. 여느 때와 같이 간룡을 겸한 향토사 자료를 밤새워 챙기느라 피곤은 했지만 답사 자료를 하나하나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복사를 마치고 나올 채비를 하였다.
늘 간룡 도중에 즐거운 점심준비를 위해 특별히 한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재철에 나는 과메기는 한두릅 가지고 가자 싶어서 아침 일찍 마하눌에게 시장을 좀 보랬다. 그러나 흔한 겨울철 과메기도 가까이에는 없었다. 시내를 한바퀴 돌아 겨우 사는 바람에 1차 집결지에 조금 늦게 도착될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학풍 간룡을 마치면 필히 뒷풀이에 술 한잔을 할 것인데 차를 가지고 가야하나 대중버스를 이용하여야 하나 고민하다가 마하눌을 꼬드겨 서창까지 바래다 주기로 했다.
차는 7번국도를 따라 발진했다. 일요일이라 한적한 남부순환 도로를 따라 문수산하를 굽어보며 무거를 벗어났다. 벗어난 차는 문수산을 돌아 선다. 문수산은 울산의 진산으로 지난해 학풍에서도 납회 간룡을 가졌던 곳이었다. 무거는 예로부터 전설이 하나 전해 온다. 때는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부지하기 어려워 영축산의 문수보살을 만나러 삼호까지 오니 한 동자가 왕의 일행 앞에 나타나서 길을 인도하였는데 무거에 당도하니 갑짜기 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내심 왕은 문수보살이 나를 버렸구나 탄식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자가 사라진 곳을 일러 무거동이라 하였으며, 세번 탄식하였던 곳을 훗날 사람들은 일러서 삼호라고 전하여 온다. 또한 다르게 삼탄교라 부른다. 차는 영축산을 뒤로 한체 웅촌을 다가선다.
웅촌은 옛 울산이란 지명을 낳은 우시산국의 치소로 신라 초기까지 독립적인 문화를 꽃피워 오다가 탈해왕때 신라에 흡수되었으나, 연방체제를 유지하면서 독창적인 세력을 유지해 왔다고 여겨진다. 이는 삼국사기 열전 居道條를 인용하거나 대대리 고분군을 비롯하여 면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고분의 출토물들이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웅촌은 백두대간에서 강원도 태백 준령을 따라 소백산맥을 달려 지리산 천황봉으로 가고, 한 맥이 낙동 정맥을 따라 경주 단석산을 뻗고 그 한 룡이 두서면 백운산을 타고 고헌산, 가지산, 천황산, 간월산, 신불산, 영취산을 따라 영남의 알프스를 거쳐 양산의 협곡을 내려와 노상산을 타고 정족산정에 이르렀다.
저멀리 정족산을 바라다 보며 차는 한가롭게 웅촌을 벗어난다. 정족산은 주맥이 취서산 남쪽 기슭에서 왔으며, 래용은 다시 오르막길을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다. 이 룡을 따라 북진하면 보골산을 지나 산티재로 동진하면서 한 맥이 운암산이 된다. 다시 산티재에서 계속 서북진하면 영치지 만디를 지나 작동재에 머물면서, 계속 북진하면 남암산이고 다시 남암산에서 북진하면 울산의 진산인 문수산에 이른다.
차는 국도를 따라 내리 달리다 점점 발 아래로 아담한 운암산이 다가선다. 운암산은 웅촌면의 진산이며 주산으로 정족산 맥이 북동진하다가 산현현을 지나면서 한 능선이 동진하여 곡천, 검단, 은현, 대복리 4개리의 중앙에 우뚝 솟아 래룡의 경계가 되며 산 모양이 곰을 닮아 예로부터 웅촌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차는 이윽고 1차 집결장소인 용당마을 인디안 매장 주차장에 하차했다. 바래다 준 마하눌과 빠빠이를 하고서 일행들과 수인사를 나눈다. 새로운 회원을 맞았고 특별회원님들도 간룡의 재미를 더해 매회 참석하시고 계셨다. 이는 학풍의 풍수지리를 겸한 향토문화를 사랑하는 영남 지역민들의 모임이라 더욱더 회를 거듭할수록 돈독한 만남으로 자리매김 하는 듯 하였다. 항상 그러하듯 지각생들도 나오고 굼뜨는 회원님들도 나온다. 지난 몇회는 차로 분승하여 움직였지만 오늘은 도성 회원님 차량으로 한방에 다같이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간룡을 겸한 향토사학 답사는 어느때 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첫 간룡지인 박윤웅 유허비로 떠났다.
박윤웅은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신을 하였다고 전해온다. 慶尙道地理志 1425년 세종 7년 울산군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 郡人朴允雄佐太祖 興高麗國以基功 合東津縣 一名失浦縣 河曲縣 一名屈火縣洞安縣 一名西生郞縣 虞豊縣 一名于火縣 臨關郡 一名毛火郡” 이라 적고 있다. 풀어 쓰면 “군 사람 박윤웅이 고려를 세우는데 공이 많아 동진현, 하곡현, 우풍현을 합하여 흥려부를 설치했다” 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유허비의 격을 봐서는 그리 큰 유업은 아니였으리라 보아지며 비문의 내용은 좀더 연구해야 하나 비석의 재질이나 글씨의 서체는 정교하지도, 세련되지도 않았으며, 서체는 꼭 말하자면 중국의 구양순체를 모양내었으며 서자의 필치도 그리 좋아 보지 않았다. 비석을 둘러보고 뒤 서재에서 서재의 양택을 옥전님이 설명하신다. 장시간 설명에 이어 서재의 뒷 편인 용당 저수지로 향했다.
도착한 회원들은 이상한 묘터를 하나 발견했다. 다름아닌 용당 못가 10미터쯤에 음택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음택 좌우에는 한 300여년되어 보이는 도래솔이 좌우를 버티고 섰는데 음택은 도로가 잘린 혈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봉분에는 청태가 끼고 설명하는 묘역주위에는 찬기운이 엄습해 오래 머물수 없을 정도로 냉기운이 감돌았다. 이는 혈자리도 도로로 잘렸고 봉분에 청태가 끼인것으로 보아 필히 수렴일 가능이 많다고 부연 설명을 한다. 그리고 용당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몇장을 찍고 다음 답사지인 우불산을 향한다.
그러나 도중에 노거수를 보고 가자고 갑자기 차를 세운다. 내리고 보니 하늘을 덮을 듯한 은행나무가 나를 제압한다. 은행나무하면 전국에서 수령이 제일 많은 성균관대학 대성전 뜨락에도 볼 수 있고, 언양 구량리에 가면 저희 선조이신 한성 판윤 이지대 어른이 낙향하면서 손수 심은 은행나무가 그 다음인데, 이곳 용당마을의 은행나무도 수령이 4~500년은 족히 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수령을 더했는지 나무 피부에 성인의 남근 같은 돌기가 여러 개 드러나 보였다. 그것도 잠시 년년세세 수령을 더한 고목에 대한 일동 묵념으로 예를 더하고 우불산을 향했다.
먼저 우불산 아래 신사를 찾았다. 차내에서는 미리 다음 답사지인 우불산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곳 우불산은 옛 신라가 소사(小祀)로 받들던 곳으로 영남 4대 명산 중의 한 산이다. 그런데 이 우불산(于弗山)의 지명은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우불산(于佛山)이 아닌 우불산(于弗山)이라 적고 있는데, 이 역시 부처 불(佛)자를 음차(音借)로 써 왔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신사묘가 있는 산이다.
우불산의 祠廟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 22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于佛山神祠 祠典載小祠 每春秋降香祝以 在天旱禱雨 報應” 이라 했다. 풀어 쓰면 “우불산 신사는 소사인데 매년 봄 가을로 나라에서 향과 축이 내려오며 고을 원님이 제사를 지내며 날씨가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는데 효험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더하여 于弗山壇의 기록에는 “新羅 祀典 于火在生西郞郡之 于火縣以名山 載小祀 高麗及 李朝國之” 라 하고 있다. 풀면 우불산단은 신라 생서랑군 우화현에 있고 신라 때부터 명산으로 작은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 및 조선조까지 계속 나라에서 제사를 지낸다. 현재의 건물은 1918년에 다시 지었으며 1974년에 고쳐 세운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맛배지붕의 건물로서 지금은 우불단 보존위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1864년 김정호의 大東地志古邑條에는 “在于弗山下 本新羅于火縣 景德王十六年改虞風爲 東安郡領縣 高麗太祖時 末屬” 이라 했다. 풀어 쓰면 우불산 아래 신라 우화현이 있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 우화현을 우풍현으로 개칭하고 동안군에 속했으며 고려 태조때 흥려부로 합해졌다.
부연 설명을 하고 난 일행들은 주린 배를 참아가며 다음 답사지인 검단 유적지를 따라 검단 고인돌을 찾아 나섰다. 이 고인돌은 학성고 풍수지리학에서 울산시 문화재국에 보고한 고인돌로 다시 우리 회원들과 동행하는 답사를 맛 보았다. 남방식 고인돌의 형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마치고<학성고 동문 풍수지리학 동호회 까페 메뉴판 사라진 상고사 찾기 12번 참조> 다시 회원들은 검단길을 거꾸로 은현 적석총을 향했다.
이곳 검단은 검단리에는 검단과 암곡이 있다. 운암산 정상 외말산에서 북쪽은 대복리이고 동쪽은 곡천리이다. 정상에서 서로 180미터 서진하면 신암 본 비알이 된다. 검단리는 정조 년간이래 줄곧 검단리라 불러 왔으며 골각단 -> 宮闕각단-> 闕각단-> 檢丹으로 마을 이름이 변천 옴을 유추해 볼 수 있지만, 저의 견해는 檢壇으로 보아 왕이 모시고 신성시하던 祭壇으로 봄이 옳을 듯 하다. 일설에는 검단사란 절이 있어 검단리라 불렀다고도 한다.
검단리 마을에는 검단사 5층 석탑이 있었는데, 도난 당한 후 지금은 3층 석탑을 세워 둔 곳이 바로 탑거리이다. 검단 마을에는 四派溝가 있어 네 곳에다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즉 북쪽의 멸암 고개로부터 동쪽, 서쪽, 북쪽에는 북녁바람을 막기 위해 서나무를 심었고, 동쪽은 넘바우 쪽의 허함을 막으려 나무를 심고, 사기장골 아래에 서쪽은 솔정자쪽이 허해서 서나무를 심었고, 동내입구인 남쪽에는 탑거리에 검단탑을 세워 풍수지리의 비보했다고 전한다.
차는 검단유적지 감사넋골을 따라 은현리를 향했다. 감사넋골에는 전설이 내려온다. 우불산이 내려다 보이는 길에는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해도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해야만 했는데 어쩌다 말을 탄채 지나 가다가는 화를 피하지 못했다. 하루는 경상감사 양씨가 이러한 소문을 들어 알면서도 이를 의심하여 교만하게도 승마한 채 지나는데 홀연히 한 점 붉은 구름이 산꼭대기에 뜨더니 맹호로 돌변해 그를 물어 죽이니 그 무덤이 바로 길옆 산자락에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에 조정에서도 이를 듣고 영험이 크다 하여 인조 갑신년(1644)에 제사(齊舍) 3간을 세우고, 임야 및 전답 5두락을 단의 재물로 하여 해마다 신사에는 “于佛山神之位” 라는 위폐를 봉안하고 웅촌양면 유림들이 2월과 8월 하정일(下丁日)에 울산부사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 한다. 또 일제 때에는 강제로 사람들을 동원하여 신사를 헐게 하였는데 누구도 두려워하여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런데 윤씨라는 사람이 나서 큰 소리 치며 나서면서 건물을 헐었는데 불과 며칠 후에 갑자기 병을 얻어 피를 토하고 죽었다 한다.
이런 전설을 뒤로하고 은현리 적석총을 재촉했다. 은현리에는 북방식 돌무덤이 있다. 이곳은 옛 신라에 속하는 변방으로 북방식 무덤인 돌무덤을 있음을 곰곰히 생각해 보자고 차내에서 운을 띄운다. 도착하자 말자 회원들은 곧 대오를 이루어 송림이 우거진 적석총을 향해 올랐다. 우리는 은현리 적석총을 통하여 그 당시 울산의 정치적 세력관계를 추정해보고자 한다면 왕릉에 버금가는 거대한 적석총이 한반도 아래까지 존재하는 것은 4, 5세기까지도 옛 울산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우시산국(于尸山國)이 반독립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곳 검단의 옛 우시산국의 터전이었던 이곳 정족산 보골봉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은현리 적석총은 어른 아름드리만한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삼국시대 초기의 돌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적석총은 1997년 10월 9일, 울산광역시 승격과 더불어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돌무덤은 무덤 지름이 20m, 높이가 6~7m에 이를 정도로 남한에 있는 적석총으로는 묘역이 상당히 큰 편이며, 무너진 돌무덤의 위를 올라가 아래로 보면 일종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띤 적석총으로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무덤 일부가 무너져 정확한 구조는 잘 알 수 없으나 이 마을 촌로들은 이 돌무덤 옆에 자그마한 저수지가 있는데 그 저수지 보를 쌓을 때 일부 적석총의 돌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우리의 고대 역사는 시민들의 무관심과 방관속에서 소리없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겟습니까? 늦으나마 우리 학풍에서나마 역사에 대한 인식과 문화재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워 울산의 산 역사를 고증하고 복원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만 끝을 맺을까 합니다.
글쓴이 --土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