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단지 다른 사람이 꿈을 이룩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을 뿐입니
다. 다른 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게 정
치라면 난 정치가가 맞습니다.”
대한민국 예비역 병장 & 국회의원 오세한
제 1장 운명은 나만의 길(1)
(1)
사건 발생 30분 전
201X년 3월 초순 대한민국 대전, 대덕연구단지 인근 야산
(국방부 예하 델타 벙커)
3월이고 따뜻한 대전 근방이라 해도 아직 밤공기는 차가웠다. 박현
미는 코트 자락을 연신 여미며 하얀 입김을 흘렸다. 오세한은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
은 그 ‘어르신’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미
녀고 몸매도 멋지고 머리까지 똑똑한들 세한에게는 단지 ‘어르신’의
보좌관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다시 말해 만나기 싫은 사람
이었다.
세상 두려운 게 없다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국회 제2야당
대표인 세한은 무서운 것이 참 많았다. 썩어빠진 정치인이라 말을
들어도 한 마디 변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번이나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그런 세한의 옆에 서서 현미를 바라보던 김정문 중령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의 말씀대로 정말 찾아왔군요. 이렇게 동원예비군 훈련까지
찾아오는 걸 보니 선배님이 치셨다는 ‘그 사고’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선생님한테 혼나기 전 그런 기분이야. 내 나이 벌써 37살인데
아직도 이렇게 살아.”
푸념하듯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던 세한의 어깨를 김정문은 툭툭
쳐줬다.
“그런 말씀이야 나중에 하시고 빨리 가서 만나보세요. 설마 잡아먹
기야 하겠어요?”
“몰라, 정말 잡아먹을지도.”
벌써 5년 전에 입던 전투복이라 무척 갑갑했다. 세한은 야전상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려다가 포기하고 슬금슬금 걸어갔다. 김정문은
피식거리며 대학 선배 오세한의 뒤를 바라봤다. 이내 고개를 돌린
김정문은 대대 CP(지휘소) 천막으로 다시 걸었다.
“충성!”
“야전에서는… 응, 그래. 수고해라.”
야전이긴 했지만 상황이 걸린 것은 아니었다. 김정문은 소리내어
경례하는 병사들에게 잔소리를 할까 하다가 그냥 천막 안으로 들어
섰다. 문을 대신하는 위장천을 들추자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작계 훈련도 아니고 동원예비군 훈련을 겸한 그저 일시적인 경계
근무이기에 지휘소 천막은 단출했다. 조립식 책걸상이 열 개 정도
40평 규모의 천막 안에 있었고 그 중간에는 기름 난로가 따뜻하게
타올랐다. 대대 참모부 소속 장교와 부사관, 병사 20여 명이 옹기종
기 모여 앉아 지루한 밤을 버티고 있었다. 그 중 조용히 커피를 마
시고 있던 대대 작전장교 이형석 소령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김정문
에게 물었다.
“대대장님. 오세한 의원님은 그 아리따운 보좌관님을 만났습니까?”
“응. 것 참 나도 군생활 오래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
이야. 세상에, 동원예비군으로 온 사람이 내 대학 선배고 또 국회의
원이라니….”
김정문은 간이 철제 의자에 털썩 앉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은 이내 담배를 찾아들었다. 대대 참모들은 다 비슷하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중위 계급장을 붙인 사내는 실핏 웃음을 흘리며 말
했다.
“민간인인 나도 잘 몰랐는데 정문이가 금방 알아볼 수 있었겠나. 대
단한건지 아니면 일부러 쇼를 하는 건지.”
중위가 중령에게 반말을 했지만 그 안의 그 누구도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중위치고는 나이도 많아보였고 군인 특유의 분위기가 아니
었다. 예비역 중위 박전규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정치 평론
이 제 2의 직업이자 가장 즐거운 취미생활인 대한민국 국민인 박전
규는 이어 입을 열었다.
“물론 저 의원은 일부러 쇼할 사람은 아니지. 내가 보기엔 도망 온
사람이야. 여당에서 난리가 났잖아. 시민개혁당이야 원래 여당의 2
중대란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아마 저번 주에 있었던 연금법 개정안
의 통과 때문에 저러는 거겠지.”
“아아, 난 정치는 몰라. 넘어가자고.”
처음에야 알 수가 없었다. 어딘지 눈에 익은 사람이다 싶었던 대대
장 김정문 중령이 직접 불러다놓을 때야 지금 눈앞의 사람이 현재
국회 의석수 24석의 시민개혁당 대표 오세한 국회의원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기겁을 했지만 세한은 김정문이 잘 아는 사이는 아니
지만 같은 과 후배인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래서 이 부대로 훈련을
왔다. 빌어먹을 선배는 협박을 했다. 모르는 척 해달라고….
“헤고, 국회의원 나리를 소총수로 둔 난 정말 위대한 대대장이야.
내일이면 이 어색한 상황도 끝난다.”
“저 국회의원님은 아직은 이미지가 좋은 것 같던데요? 아직 미혼이
라서 스캔들 일어날 일도 없고 돈문제도 깨끗한 편이고. 저번 주에
시민개혁당에서 발의한 국민연금법 개정안도 의원님이 만드신 거라
던데요.”
역시 군인 같지 않은 군인인 여군 예비역 대위 양은경은 한 쪽에서
무언가 일기를 쓰고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훈련 내내 얌전히 자신
의 임무만 수행하고 별 다른 대화도 하지 않은 양은경은 대대 거의
모든 장병들에게 호감을 얻고 있었다. 키도 작고 몸집도 아담한 은
경은 30대의 나이에도 무척 귀여운 인상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여군은 동원예비군 훈련 같은 것은 받지 않았다. 몇
년 전 여군이 최초 사단장 보직을 받아 진급했을 때부터 권리 신장
은 의무 이행부터 이루어 저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시작된 예비군
훈련이었다. 전역 후 처음 받는 훈련이라는 양은경은 왠지 어색한
표정을 자꾸 지었다. 김정문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저 선배, 참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지만 존경할만한 구석이
있죠. 그건 그렇고 주임원사님, 예비군들 아직 별 문제 안 일으켰
죠?
한 쪽에서 경계작전 명령서를 살펴보고 있던 노신사 풍의 원사 노
민후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예, 대대장님. 예전에야 술도 마시고 그랬지만 요즘엔 규율을 잘
지키는 편입니다. 아직 별 문제 없습니다.”
“저도 한 15분 있다가 순찰 돌 테니까 중대장들한테 연락해놓으세
요.”
“예. 대대장님.”
“하여간 이 이상한 작전은 곧 끝나니까.”
동원예비군 훈련은 전술훈련이다. 특히 동원사단에선 병기본 훈련
과 더불어 전투준비태세에 연동된 작전계획에 따른 훈련을 실시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번엔 유별났다. 동원사단 예하 3개 보병연대
가 전부 이 근방에 겹겹이 경계 작전으로 배치된 것이다. 작전 계획
을 유심히 살펴보다 더욱 놀란 것은 지금 그의 대대를 중심으로 병
력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였다.
“도대체 저 안에 뭐가 있지?”
약 8천의 병력이 물샐틈없이 지키고(!) 있는 동심원의 중심에는 급
조한 야전 탄약고와 물자창고가 있었다. 산비탈을 굴삭기로 깎아서
평지 비슷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구색을 맞춘다고 원형 철조망을 한
겹 치고 급히 현역병사들을 동원해 배수로 같은 것을 파놓긴 했지만
역시 어색했다. 제대로 제초작업도 하지 못했다.
군사령부 정도의 기지창에서 가져온 듯한 컨테이너는 국방색으로
도색되어 있었고 야전 규범에 따라 30미터 간격으로 놓여져 있었다.
총 5개였다. 표면상으로는 비상시 동원 사단 물자 보급에 따른 경계
작전 훈련이라지만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사단급이라면 훨
씬 더 규모가 커야 했다. 저 정도는 기껏해야 1개 대대급 정도일까.
김정문은 그 컨테이너보다 대대 진지 밑자락에 위치한 곳에 더 관
심이 갔다. 대대진지는 해발 300미터 정도 되는 이 무명고지를 원
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 무명고지는 대부분의 산이 그렇듯 계곡
처럼 움푹 들어간 곳이 있었는데 그 곳엔 도로가 나 있었다. 그 도
로변엔 동원예비군들이 배치되지 않았다. 전형적인 비포장인 야전
도로가 들어가는 계곡 부분은 어디에서 왔는지 일개 중대 규모의 전
차와 장갑차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것도 이상했다. 도로의 끝엔 문
득문득 보이는 트럭이나 지프, 각종 차량이 사라지는 터널 비슷한
곳이 있었다. 차량만 있고 나오는 차량이 없는 터널은 흡사 벙커와
비슷했다.
“에라, 모르겠다.”
일개 중령이 알 수 없는 사항일 것이다. 연대장도 잘 모르는 것 같
으니 그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김정문은 이내 편하게 뒤로 눕다
시피 등을 기댔다. 3일째 밤을 새웠던 그의 눈까풀은 꽤나 무거워
금방 감겨버렸다.
(2)
사건 발생 15분 전
“이건 정말 어리석인 짓이야.”
“아이고, 형씨는 군대에서 뺑이치지 않았어요? 원래 군대가 그렇지
뭐. 이제 정말 지겹네. 졸리니까 그만 말 걸어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다시 꾸물꾸물 잠을 자려는 예비역 병장 박민
호를 보며 송종혁은 혀를 찼다. 그러나 그는 민호의 말에 동감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는 게 힘들었다. 그는 군대를 제대로 갔다 오질
않았다. 물론 병역 의무는 다하긴 했다. 단지 송종혁은 병역 특례자
였다. 카이스트에서 박사 과정을 다닐 때 4주 훈련 받은 것이 전부
였다. 따라서 그는 동원예비군훈련을 받지 않는다. 설사 받더라도
이런 식으로 야전에서 뛰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가 33살의 노구(?)
를 이끌고 여기에 와 있는 것은 그 망할 연구소장 때문이었다.
“제기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실험에서 날 빼버려?”
이 일의 발단은 이번 핵융합로 실험에서 원자로 설계 방정식 상수
와 계수를 산출한 데이터마이닝 기법의 계산에 사소한 문제가 있음
을 알아낸 그 직후였다. 송종혁 박사는 자신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던
원자력연구소장의 위대한 가설과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다가 연구
실에서 쫓겨날 뻔했다. 거기서 멈췄으면 그래도 실험에 참가할 수
있었을 텐데 보다 높은 곳에 투서를 보낸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치사하게 나올 줄은 몰랐지.”
종혁은 씁쓸히 웃었다. 정말 어색한 포즈로 이렇게 자동소총을 붙
잡고 일개 소총수로 벙커 외곽을 지키라고 할 줄은 몰랐다. 동원예
비군 통지서가 나온 후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대체 소장
이 무슨 손을 썼는지 병무청에서도, 연구소 직장예비군 중대에서도
서류 처리가 안 되었다. 연기가 불가능할 경우 잘못하면 구속이었
다. 송종혁은 눈물을 머금고 실험에서 빠져 지금 여기에서 정말 무
의미해 보이는 경계 근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이론물리학의
박사가 말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진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송종혁은 외로웠다. 지금 인류 역사상 얼마나 위대한 실험이 이루
어지고 있는지 아는 이가 그의 주변에 없었다. 그가 실험의 오류를
지적하긴 했지만 원자로의 견고함은 최악의 경우에도 충분히 고온과
압력을 견딜 수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송종혁의 지적은 학자들끼리
의 지극히 미시적인 문제점이었지 실제 실험상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사소한 문제 제기 때문에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 이렇게 야산에
서 총 잡고 앉은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곧 시작하겠군.”
시간을 보니 새벽 1시에 가까웠다. 1000 테라와트 급 핵융합 실험
이 곧 시작될 것이다. 종혁은 언뜻 보기엔 야산일 뿐인 ‘델타 원자
력 연구 벙커’를 살펴봤다. 역시 아무 변화가 없었다. 종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박민호 마냥 참호 벽에 기댔다. 사람 손으로
판 참호는 무척 축축했다.
(3)
사건 발생 10분 전
세한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현미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
를 자기 ‘어르신’만큼이나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평소 때라면 자신
앞에서 이죽거리며 조롱하는 사람이라면 설사 그가 제 1 야당 대표
라 해도 박살내고 말았을 텐데 현미는 몇 번이나 참았다. 그런 그녀
의 갸륵한 마음을 몰라주는 세한은 다시 한 번 현미를 자극했다.
“그러니까 나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잘 모르겠다니깐. 박보좌관이
말하는 그 ‘문제의 실마리’를 왜 나한테 와서 찾는 거죠?”
현미는 조용히 말했다.
“결국 이번 정기 국회의 주도권을 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아, 그거야 야당인 민주평화당 대표거나 여당인 한국통일당의 당신
보스겠지요.”
세한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고등학생도 알 수 있는 질문을 했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현미를 바라봤다. 현미는 저 능구렁이에게 속으
로 이를 갈았다.
“의석수 120석의 여당도 아니고 의석수 87석의 야당도 아닙니다.
지금 현재 국민 지지도가 가장 높은 정치가는 바로 대표님 아니세
요?”
“하! 언제부터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국민 지지도에 그렇게 신경을
썼을까요.”
“제 ‘어르신’은 이제는 오대표님이 책임을 지셔야 한다고 생각하십
니다.”
“오호? 무슨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까요? 지금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 혐오감에 대해? 아니면 연금법 개정안으로 고통 받을 부
자들에 대해? 아니면 나 같은 초선 의원이 당대표를 맡고 있는 상황
에 대해?”
굉장히 함축적인 말이었다. 다시 말해 정치적인 발언이었다. 분명
세한은 현미가 녹음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국회의원이자
당대표인 세한이 직접 이런 위험천만한 대치를 한다는 것은 어찌 보
면 의외였지만 그동안 현미가 관찰한 세한은 보좌관이나 비서들을
위험에 빠뜨릴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책임을 남에게 회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존경할 순 있었다. 하지만 현미에겐 세한은 제대로 된 정치가는 아
니었다. 그런 사소한 양심적 가치에 때문에 많은 것을 잃고 있었다.
어떤 위대한 정치가라 해도 자신의 권력은 소중히 지키는 법이었다.
국민의 총의? 합의? 그런 대의명분은 제쳐두더라도 합법적으로 부여
된 권력은 그를 지키고 유지해야할 책무도 따랐다. 한국뿐이 아니었
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잘 나가던 정치가나 관료,
군인, 권력자들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권력욕이 없다는 식으로 도
망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또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 자체를 칭송했
다. 하지만 현미는 일이 잘 못 되면 책임진다는 허울 좋은 변명을
하며 도망가는 사람을 욕심 없다 칭찬하는 그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책임질 사람이 그렇게 제멋대로 도망가면 남아서 수습해야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미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전투복 차림의 세한을 바라봤다. 정장
차림이야 많이 봤지만 이런 전투복은 무척 낯설었다. 그렇지만 어설
프게 보이진 않았다. 옷이 좀 작아서 이리저리 꽉 졸라맨 느낌은 났
지만 단정했다. 방탄헬멧을 쓰고 단독군장에 소총을 어깨에 둘러맨
세한은 한숨을 푹 쉬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담배라도 꺼내는
줄 알았는데 그가 현미에게 내민 손엔 검은 색 녹음기가 잡혀 있었
다.
“이건?”
현미가 놀라 그 녹음기를 엉겁결에 받아들자 세한은 방탄헬멧을 벗
어 손에 들었다.
“그래요. 이렇게 된 바에는 솔직히 말하고 맙시다.”
더 이상 조롱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세한은 나직하게 말했다.
“처음 이른바 시민단체에 가입했을 땐 정치가가 될 생각은 별로 없
었소. 하지만 정부기관에 진정서를 내고 집회를 준비하고 실력행사
를 하면서 난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재미를 느꼈는지 알게 되
었죠. 문제 탐색 및 문제 해결. 정치란 것은 결국 다양한 분야의 지
식을 참고해 지혜롭게 갈등을 이겨내는 거였지. 난 국회의원이 되기
로 했어. 그렇지만 그 때 알았지.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욕을 먹는
것의 50% 책임은 국민이 가지고 있음을.”
어느 순간부터 반말을 했지만 현미는 조용히 경청했다. 세한은 잠
시 숨을 멈췄다. 총선 때 악몽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돈은 무한정
필요했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신인들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
정치가를 거의 무조건 비난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지금 당장 돈
을 바라던지 아니면 선거가 끝난 후 보답을 요구했다. 일반 시민들
은 관심 없었다. 한 표, 한 표, 그렇게 소중하게 말하면서 인터넷 게
시판에서 인신공격까지 하며 가장 시끄럽게 세한을 비난하던 한 20
대 청년은 결국 투표조차 하지 않았다. 한숨을 쉰 세한은 계속해 말
했다.
“내가 당신 보스한테 돈을 받은 건 분명 부끄러운 일이요. 그건 변
명의 여지가 없어. 결국 그 돈으로 시민개혁당을 결성하고 지역감정
에 기댄 야당의 표를 갉아먹어 지금 여당이 원내 다수당이 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으니.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야. 솔직히 말해서
난 지금껏 선배들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한 거요. 나도 어느 순간 빌
어먹을 국회의원이 되어버린 거지. 그리고 지난 1년 동안 난 당신
보스와 참 무던히도 싸웠소. 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정
치가가 되었지, 권력을 가지고 싶어서 정치가가 된 게 아니었소. 그
렇지만 이렇게 결국 어이없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쫓겨 가겠군.
국민들의 정치혐오감을 더욱 부추기면서 말이야.”
말을 마친 세한은 담배를 피며 빙그레 웃었다. 현미는 녹음기를 잠
시 내려다봤다. 정치가를 낙마시키는 것은 여러 방법이 있었다. 가
장 좋은 돈 문제, 여자 문제, 가정 문제. 여기에 한국적 특수성이 존
재하는 친일파 논란. 언제나 국민들을 흥분시키고 ‘저 놈도 역시….’
라는 반응을 이끌어내는 좋은 소재들이었다. 과거 대통령들이 의회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기 위해 펼친 정치 공작 때문이라고 음모론을
떠들 필요도 없었다.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들이 뽑은 국회의
원을 증오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현미는 지금 이 순간 유력언론의 기자들과 같이 마주하고 있을 보
스의 또 다른 보좌관이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봤다. 적당한 거래.
적당한 선에서 자료 공개. 세한은 그래서 아예 녹음기를 건넨 것이
다. 그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런 진실 게임은 먼저 터뜨리는 쪽
이 유리했다. 그리고 세한은 처음부터 먼저 터뜨릴 수가 없었다. 모
범생이 어쩌다 지각했을 때 항상 지각하는 학생보다 더 혼나는 이유
와 같았다. 이미 욕을 먹을 대로 먹은 ‘어르신’과 달리 세한은 이런
일이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이제 곧 전직 국회의원이 될 사내는
조용히 물었다.
“내일 아침인가? 아니면 다음주인가?”
세한의 목소리에선 권력을 잃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 것
같았다. 현미는 왠지 안도감이 들었다. 말을 어떻게 하든 사람의 마
음은 간사한 법이었다. 세한의 속마음이 어떻듯 겉으로나마 태연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태연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만났던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대한민국 정치가들을 욕했
지만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의외로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세
계 경제규모 11위, 군사력 8위의 대국인 한국에서 국민대표로 내세
운 사람들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다른 나라에 비해 어
리석거나 능력이 부족할 리가 없었다.
“어르신께선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오대표님께서 편히 쉬시는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단지 그 말 때문에 여기에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아! 약속이 필요
한 것인가? 난 당신네 보스를 공격할 생각 따윈 없소. 어차피 내 죄
는 내 죄이니까. 하지만 이건 확실히 합시다. 구속되어서 의원직을
상실할 때까지 국회의원직을 놓을 생각도 없소. 당장 내일부터 국정
감사를 준비해야 하오. 내 보좌관들이 이미 서류를 3층 높이로 쌓아
올렸을 겁니다.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그 사람들 허탈하겠지. 난 힘
들다고 징징거리며 도망가 혼자 잘 살 수 있는 놈은 못 되니까. 자,
일이 다 끝났으니까 이만 가요. 난 마지막 동원훈련을 즐기고 싶으
니까.”
말을 마친 세한은 뒤돌아섰다. 잠시 입술을 깨물었던 현미는 서둘
러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세한은 놀라 멈춰섰다.
“왜 그러죠? 아직 할 말이 남았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왜 하필 지금 여기에 계신 거죠?”
“예?”
“전투복을 왜 입고 계시냐고요.”
세한은 피식 웃었다.
“난 동원예비군이니까. 자, 이만 갑니다.”
현미는 세한의 팔을 잡았다.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왜 지금 여기에 계신 거죠?”
“그걸 내가 말해야 하오? 박보좌관은 무척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
이 드는데.”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한숨을 내쉰 세한은 현미에게 말했다.
“기본적인 게임이오. 내가 여기에 있는 이상 개혁당은 정치적 판단
을 내릴 수 없어. 지난주에 결정된 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소. 그
리고 내일은 내가 동원예비군 훈련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정기 국회
도 끝나지. 당신이 예상하는 대로 아마 국민연금 개정안은 내일 통
과될 거요. 이제 되돌릴 수 있는 기회란 없소. 아마 지금 당신네 보
스는 모종의 정치 거래를 하고 싶었을 거요. 하지만 할 수 없었지.
난 지금 군인이거든. 어르신이 드러나지 않고 날 만날 수 있는 거래
가 불가능해. 이건 굉장히 좋은 핑계지. 난 곧 구속되겠지만 다른
시민개혁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더욱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거요.
당의 비밀은 나와 함께 사라지는 거니까. 우리는 앞으로 확실하게
여당과는 다른 정치 노선을 걸을 수 있어.”
두 팔을 들어올린 세한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이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텐데. 자, 다른 예비군 아저씨들한테 미
안해서라도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 밤이 늦었으니까 조심해서 가
시오. 당신의 보스한테 안부도 전해주고.”
그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 등에 대고 현미는 조용히 말했다.
“왜 멋진 휴양지나 조용한 절 같은 곳에 가 있지 않은 거죠? 이렇게
군복을 입으러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해서 그래요.”
또 다시 멈춰선 세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현미에게 고개를
돌린 그는 웃었다.
“예비군을 보통 야비군이라고 해요. 군바리도 아니고 민간인도 아닌
틈바귀에 끼어버린 이상한 존재들이요. 훈련이 끝나면 다시 집에 돌
아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맛볼
수 있어요. 동시에 누구에게나 뻐길 수 있지요. 애국자라고 말입니
다. 난 그저 이런 흙에서 오랜만에 뒹굴고 싶었을 따름이오.”
현미는 빙긋 웃었다.
“난 미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 남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요.”
“마초라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지. 하지만 남자들에겐 때로 남자들
만의 문화가 필요…. 뭐? 뭐야~!”
현미는 순간 세한의 얼굴이 빛나는 것처럼 느꼈다. 잠시 눈을 감았
다 뜬 다음 순간 세상이 온통 하얗게 빛나는 것을 알고 놀랐다. 비
명조차 지르지 못한 그녀는 순간 세한이 달려와 엎어뜨리는 것을 멍
하게 바라봤다.
“까아악!”
비명 소리를 내질렀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인간의 가청 범위
를 넘어선 음파로 귀가 아파왔다.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세한이
그녀의 몸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었지만 피부전체가 바늘로 쑤시는
듯이 아려왔다. 눈앞에 보이던 낙엽과 풀, 검은 흙들이 하얀 빛으로
안 보일 때쯤 현미는 정신을 잃었다.
첫댓글 마초......쿨럭.....(모든 예비군은 잠재적 마초인가....)
새로운 시작 반갑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