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주머니 뜬 성 났구먼”하면서 따뜻하게 데운 술 한잔 마시고서 악사들이 늘어지게 “장단 달아놓고서”시나위를 하면 말 붙이기 무섭게 다음 사설을 대니 허둥거리지 않고 “빗청” 가락에 목청을 뽑아 올린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하늘에서 내렸다던 화성군 비봉면 어천리 태생의 이갑오이다.
이갑오의 부친은 이봉운. 마치 새가 하늘에서 훨훨 난, 이름은 새 봉자 구름 운자요 안태본은 여주 땅에서 수원으로 식솔들을 이끌고 온 이씨 성이고 본디 타고 난 학습이 빼어나 생전에 학습 없다는 말은 안들은 이렸다.
이갑오는 일본제국주의가 막 이 나라를 삼킬 무렵에 벌써 부친인 봉운이 태기가 있어서 세상을 버릴까 말까 생각을 하다가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 기왕지사 원대로나 살게 해주자고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갑오가 생존해 있다면 꼭 백수가 되는 나이며 뗏장 이불 덮은 지가 삼십 육년이 된다.
본디 이 집안도 대대로 무업에 종사를 했는데 먼저 뼈 마디가 튼실하여 그 내력부터 볼 것 같으면 아까 얘기한 봉운은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협률사가 해체되고 각기 제 고향으로 가서 아직도 시골 노인들은 “헹물사”라고 기억하는 단체를 만들 시기에 “구파배우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고 집에는 옷 갈아 입으러 갈 때나 혹은 무슨 맘이 있어서 그 많던 양귀비와 서시 같은 노류장화를 물리치고서 삼신 할미가 점지를 할려는지 두꺼비 씨름을 하러 가곤 했다.
그래도 때가 되면 찬물 한 그릇이라도 떠놓을 자손을 점지하려고 솥에 요령 소리가 날 적에 나라에서 비록 광대 소리는 들을지언정 궁궐에까지 출입하던 소리 광대인 이동백과 목구성이 좋아서 “당창 걸린 년” 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았다고 입이 한 발은 나온 송만갑 같은 이와 같이 흐드러지게 판을 벌인 이봉운이 바로 이갑오의 친정 아버지이다.
이봉운의 선대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수가 없으나 전통 사회에서는 사농공상을 무척 따지던 사회이라서 중간에 여덟가지 천민 집단에 속하는 일에 뛰어든 것 같지는 않으며 꽤나 연조가 깊은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봉운의 대에서는 여주에서 살다가, 다 떨어진 통영 갓에 찬물만 먹고도 이쑤개를 들이미는 그래도 뼈마디가 타고 난 신분인 양반들의 득세에 밀려서 결국 화성 땅으로 권솔을 이끌고 솥을 걸었다.
여기서부터 봉운의 시대가 열리는데 가뭄에 단비 만난 듯 그야말로 비 온 뒤 죽순 돋 듯 담장 덩굴에 댕댕이 가지 넘어가 듯 일취월장이었다.
이는 다름 아닌 “구파배우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면서이다.
여기에 구한말 소리 명창인 이동백, 송만갑, 김창룡, 고수 한성준 등이 참가하였고 춤에는 한성준보다 십오년이나 위인 경기도 광주군 경안 태생 김인호(일명:복돌)가 있었고 이봉운은 이 단체에서 줄타기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당시에는 전통 사회의 끝 무렵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 기운이 남아 있어서 소리, 춤, 기악 등 각 분야에서 활동을 한 이들이 많았는데 이봉운은 단연코 줄타기에서는 감히 그 누구가 넘보지 못할 정도로 기가막힌 재주가 있었다.
이 줄타기는 조선조 나라에서는 큰 행사나 작은 행사이거나 으례이 들어 가는 놀음이라서 “거미줄 같은 줄에서 부채를 들고서” 임금을 욕을 하여도 곤장을 맞을 일이 없었으며 썩을대로 썩은 조선조 중기 사회에서 고을의 수령 방백들을 마음놓고 대놓고 욕을 하여도 “주리를 틀” 빌미를 아니 주었다.
이봉운이 어느 정도로 명성이 있었느냐 하면 전해 오는 말이 있는데 노들에서 절두산까지 줄을 매고 한강을 건너 오는데 줄을 워낙 잘 타니까 이를 본 일본 순사가 줄 끄트머리 쯤에 다다랐을 즈음 줄을 끊어버리자 이 때 장단이 긴염불 장단에 뛰어 내렸느냐 아니면 굿거리 장단에 뛰어 내렸느냐로 항간에 입질에 올려서 지금까지도 수원의 국악인들은 얘기를 하고 있다.
물 한사발을 머리 위에 이고서 줄을 걸어 간다든지, 줄 위에서 승무 춤을 춘다든지 서양식으로 마루 운동 같은 “수세미 트림” 같은 것이라든지 공중에서 한바퀴 돈 다음 다시 줄 위로 앉는 것 하며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이런 재주를 지닌 이의 후손인 갑오는 전래대로 댕기머리 땋고 다닐 적에, 아니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듣고 자란 탓에 시키지 아니하여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자로 태어난 게 “죄”는 아니지만 삼신 할미가 점지한대로 남의 집에 가서 살라는 팔자로 태어나 역시 무업에 종사했던 용인군 기흥면 영통리에 산 김봉열의 집으로 귀 밑머리 파 뿌리될 때까지 시집을 갔다.
김씨 집으로 갔어도 친정 동네 까막 까치만 울어도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질 즈음에 “인왕산 호랭이” 같은 시어미한테“ 너는 늬이 부모가 죽었니 맨날 울기만 하느냐”고 지청구를 들으면서 군불 떼는 애꿎은 부젓 가락만 분질러놓아 아궁이에 쳐넣고 어금니를 앙 다물고 무릎을 꿇고서 학습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돈 집 오이 깎아 먹는 풍습도 다르다”는 말이 있듯 친정에서 배운 재주와 시집 와서 배운 재주가 그다지 다르지는 않으나, 또 용인의 굿 하는 방식과 수원의 굿 하는 방식이 닯아서 석유 등잔을 앞에 두고서 사설을 외느라고 온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이 잔주릅이 들고 제법 말 귀도 알아듣고 걸어 다닐 무렵 까막 까치가 게 발 물어서 던져놓고 가듯 어느 때는 일을 하다가도 젖 줄 시각이 되어서 젖이 불면 폭 잠들여 놓은 아이가 포대기에서 일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배도 고프고 엄마를 찾다가 없으니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얼굴에 뒤발을 했을 것 같은 아이 생각에 가슴이 미어져 “뒤”를 본다고 하고서 측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운 적도 있었다 한다. 또한 새벽 서리 찬 밤에 기러기가 여덟 팔자로 날아갈 제 조상굿을 할 적에 섧디 서러운 “시나위” 가락에 이어서 구수한 “가래조” 장단이 나오면 이내 팔자가 왜 이리 사나워서 부채 방울을 들게 되었는지 이녁의 신세를 한탄해 보기도 하면서 실컷 울기도 하였다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주팔자가 그러하면 다 무슨 곡절이 있겠지만 이 조상굿을 하면 이녁이 부채 방울을 든 신세가 기가막혀서 울기도 하고 재가집의 못먹고 못입고 간 조상들의 넋이 들어와서 그러하기도 하고 송곳 끝에 올라 탄 “까장 까장한” 성미를 지닌 이갑오도 사람인지라 울고 싶은 데 뺨 때린다고 제 설움에 제가 겨워서 우는 수가 있어서 호랑이가 인간의 기척에 놀라 깊은 산중으로 갈 즈음에야 조상굿이 끝났다고 한다.
지금은 굿을 해가 솟아 오를 즈음부터 준비하고 굿을 하지만 이갑오가 한창 발에 불이 나게 일을 다닐 적에는 반드시 해가 토끼 꼬리 만큼 남았을 즈음부터 거리부정 치고 대문 밖에서 선부정 치고 이윽고 집으로 들어가서 ‘주당“을 물리고 하였지 눈꼽도 안뗄 때부터 굿을 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이런 풍습이 많이 남아있지만 도회지에서는 시골과는 풍습이 영판 닯아서 그저 재수굿이나 진오귀굿이나 아무 굿이나 하는 것을 보면 세월이 여류하여 공자 같은 성현도 시속에 좇으라는 말이 있듯 무상할 따름이다.
그러하면 이갑오의 예술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경기도의 세습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굿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는 점을 먼저 잠시 언급해 두기로 한다.
이런 현상은 전국 어느 지방에나 같은 이치이다. 첫째로 사설은 어느 정도 비슷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경우는 전혀 다르며 둘째로 춤사위나 음악적 구성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고 무의식의 성격이나 상징성이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경기도만 보더라도 마을 굿에서나 집에서 하는 굿일 경우도 강신무의 굿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경기도는 동북부 지역과 인천, 부평 지역인 서북부 지역과 한수 이남의 시흥, 안산, 수원, 화성, 남양, 평택, 이천, 여주 등은 비슷한 데가 있으며 서북부 지방이지만 김포, 통진은 조금 다르며 인천이라도 경서동이나 십정동 가좌동 등지는 한수 이남의 무의식과 조금 다르다.
경서동, 십정동, 영종도, 용유도, 장봉도, 떼무리섬, 엇섬, 살섬, 여단포, 윗거짐이, 아랫거짐이(지금 무의도의 옛 지명) 등은 뱃고사가 많은 동네이며 충청도와 가까운 동네인 안성, 평택 등지는 같은 경기도 남부 지역이지만 그 의식이 조금씩 차이가 있고 “징 사위”가 발달되어 있고 광주나 이천 등지는 사설을 주워 섬길 적에도 불사거리에서 “동두칠성 남두칠성”이라고 대는데 다른 지방은 다르다.
또한 같은 경기도 땅이라도 화성이나 수원은 초저녁에 성주를 풀지만 남양이나 평택 등지에서는 성주를 새벽에 하며 안성, 평택 등지는 성주를 앉아서 외장고만 두드리면서 푼다는 점이 다르며 고양, 일산 등지는 마을 굿이나 집 굿에서나 “본향산”을 모시고 나서는 바로 “서낭”을 모신다는 점이 지역적으로 다른데 이 지역은 “서낭”을 조종으로 받들기 때문이다.
과천은 “불사”가 조종이며 수락산을 중심으로 금암산, 봉우뜰, 공덕골, 담터, 납때울, 가재울, 갓바위, 먹골,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 궐터, 사로리 등지에는 “군웅”이 조종이며 부평의 만의골, 시흥 새오개 등지는 군웅을 높이 쳐들며 안성 반재리는 성주와 군웅을 제일로 쳐든다.
인천 지역의 서북부 간방인 지역은 같은 강신 계열의 굿일지라도 창부 타령조가 그 음악적 선율이 다른 지방과 조금 다르며 “시나위”도 김포, 통진, 경서동, 고잔동, 부평, 소사 등은 수원, 광주, 이천, 여주, 용인, 안산과 조금씩 다르다.
김포 등지는 그 유명한 평택 태생 오강산(1876-1952)과 증명환(?-?)과 조만봉( ?-?), 조인옥(?-?) 등 작고한 조한춘(1919-1995)의 일가와 양씨 일가들이 단골판을 지니고 있었다.
이갑오는 착실히 익히고 배워서 제자를 두었는데 그 제자가 바로 현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된 수원에 사는 용인군 김양장리 태생의 오수복(1925-)인데 만 칠년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은 전수소다 학원이다 해서 집안에서 가르쳐 주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호롱불을 켜고 아주까리 기름을 내 먹던 시절이라서 이런 것은 언감생심이었으며 굿을 하러 갈 적에 칠흑 같은 밤에 논두렁 밭두렁 건너고 마루 마루 재 넘어 서낭을 넘어서 갈 제 솔가지 꺾어서 양손에 갈라 쥐고서 “발림”을 하면 한치 앞 버선발도 안뵈는 밤을 밝혀 가면서 눈 짐작으로 춤사위를 익혔다.
경기도의 세습무들이 굿을 할 적에는 모두 남자가 징도 치고 굿도 하기 때문에 그러나 남자는 신이 내린 이들은 아니며 남자가 먼저 앉아서 청배를 하면 여자가 비로소 일어나서 부채 방울을 들고 춤을 추고 긴 무가를 “시나위” 반주에 맞추어 소리를 하는데 “겹굿”이라고 하며 마을 굿에서 “손님굿”이나 “군웅굿” “뒷전” “별상” 등은 남자가 부채 하나만 들고서 “판패개” 소리라고 해서 판소리처럼 소리를 하는데 이들을 가리켜 “선학습꾼” 또는 “선어정꾼”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 굿에서도 새 성주굿을 할 적에는 남자가 긴 서사 무가를 판패개 소리로 하며 “서낭” 역시 “들어온다, 들어온다, 서낭님이 들어온다-” 하며 소리를 하는데 성미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몇날 며칠 밤을 새우고 나서 동지 섣달 분합문도 없는 어느 집에서 굿을 할 적에 재티만 날리는 화로불에 앉으면 이 원수놈의 잠이 쏟아져 눈꺼풀에다 돌덩이를 단 마냥 무거워서 깜박 졸아 징을 치다가도 헛 손질을 하여서 방바닥만 두드리고 있으면 “네 이년 늬이 어머니는 굿 허는데 너는 조느냐?” 하며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부채로 이마를 내리칠 정도로 성미가 괄괄하기도 하였다 한다. 악사들이 술 한잔 마시고서 “오니 섭채” 장단을 재게 치면 장단이 조금 “삐어도” 나는 간다 하며 당신대로 길게 소리목을 뽑아 올렸다 한다.
지금은 상을 차릴 적에 제 각기 차라는 것이 아니지만 이갑오가 굿을 할 때인 1960년경만 하여도 한 거리가 끝나면 상을 철상하고 다음 거리 할 상을 진설하는데 매 거리마다 이런 상을 준비할려니 재가집에서는 허리가 휠 정도인데 거리가 끝낼 적마다 주안상이 들어와서 한잔씩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서 그 기가막힌 “시나위” 가락을 연주하면 이갑오는 신이 저절로 나서 개미 허리만한 허리에 홍천립을 입고서 오른손에 칠성 일곱 쇠 방울을 들고 왼손에는 부채를 들고서 불사거리나 군웅굿 춤사위를 놀리면 그 자태 거동이 보름달 두둥실 뜬 것 마냥 학이 너울너울 춤을 추듯 봉황이 넘노난듯 용이 죽실을 입에 문듯 기가막혔다 한다.
이런 춤사위를 이갑오는 오수복한테 착실하게 다동다동 다져서 물려주었는데 오는 세월 막지 못하고 가는 세월 잡지 못하여 기흥면 영통리 인계동 산자락 “멋내”라는 곳에 살다가 “인저 내가 늙고 너도 이만큼 잘허니 저승에 가더라도 편히 눈을 감겠다. 남자 춤사위가 또 좋은 게 있으니 오산 샌님(경기도의 선학습꾼이었던 이십세기 마지막 명인명창인 지금은 세상을 뜬 이용우를 일컬음)헌테 가서 깨껴라” 하면서 이용우를 소개시켜 주었다 한다.
그리하여 현재 추고 있는 오수복의 춤사위는 이리하여서 뿌려도 유궁하고 신에도 가득하게 오롯하게 전승되고 있다.(끝)
* 이 글은 이자균 님께서 국악기록보존연구소의 인터넷 홈페이지 '히어코리아닷컴'(사이버 국악음반박물관)의 원고 청탁을 받고 기고해 주신 것입니다. 이 원고는 2000.6.10 디스켓으로 받아 편집하였습니다. 귀한 옥고 주신 이자균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