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원시 고대사회
제1장 원시사회와 고조선
* 개관
1) 원시시대(구석기, 신석기)
2) 청동기시대: 원시공동체 사회 해체(농업생산력 발전-사유재산 발생-계급 발생-고대국가 고조선 성립)
3) 고조선: 요동, 한반도 서북부--위만조선(중계무역--B.C 108년 한 무제에 멸망)
1. 원시사회의 전개
인류의 등장과 도구의 사용(구석기시대)
1) 도구: 뗀석기(타제석기)--주먹도끼․찍개․찌르개(사냥), 긁개 밀개(다듬기 도구)
신석기시대 원시공동체 사회--현재와 같은 지리적 환경 성립, 기원전 6.000년 경 시작, 압록강․ 대동강․ 한강․ 낙동강․ 서남해안과 섬지방․ 두만강 지역 등 널리 흩어져 있었다.
1) 농경의 시작: 竪穴(움집, 화덕과 온돌--화덕이나 출입문 옆에 저장고 설치 ** 서울 강동구 암사동 움집터--4명 정도 거주, 남쪽에 출입문, 집터의 크기가 비슷--평등)--정착생활--후기에 농경의 시작(돌삽․보습․괭이-경작, 돌칼-수확, 갈돌-껍질 벗기기․가루내기, 피나 조 재배)--신석기 혁명
2) 토기 사용: 빗살무늬토기(저장)
청동기의 사용과 원시사회의 해체
1) 청동기의 출현: 거푸집(鎔范), 비파형동검(초기 고조선의 존재 증명) 세형동검(비파형 동검이 발전한 형태, B.C 4세기 전후, 한반도 전지역에서 출토)
2) 경제 생활의 발전: 돌도끼․턱자귀․괭이․반월형돌칼--개간, 움집에서 벗어나 땅 위에 기둥을 세워 집을 지음(빈부의 차이로 집터의 크기가 차이가 남, 4~8명 거주--후기에는 저습지에서 벼농사 시작(농경문 청동기--대전시 괴정동 출토, 청동기 시대 농사 짖는 모습)
3) 계급의 발생: 고인돌(족장의 무담, 순장--여대시 강상무덤에서 순장 껴묻거리로 단검 화살촉 발견), 약탈전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성립--국가의 출현(古朝鮮)
2. 고조선의 형성과 발전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성립
1) 檀君神話
* 풍백․우사․운사: 농경사회
* 천․부․인: 지배자의 권위, 계급사회
* 곰․호랑이: 토템
* 단군왕검: 제정일치 사회
* 지도: 고조선의 영역
3. 고조선사회와 지배체제
8조법금과 사회구성
1)8조법금(부여에도 존재)
첫째: 사람을 죽인자는 사형--생명존중, 노동력 중시
둘째: 남에게 상처를 입힌자 곡식으로 배상--농업중시
셋째: 도둑질한 자는 노비, 죄를 면하려면 50만전, 결혼할 수 없다--사유재산제, 노비 매매가 50만전, 신분과 계급 차별이 엄격
**강상무덤(요녕성 여대시, 16쪽, 순장): 서기전 8~7세기, 고조선 지방귀족의 돌무지 무덤, 인골은 140명 정도, 20개의 무덤 구덩이가 구조와 크기에 차이가 있음(계급 존재), 거푸집 출토, 동검, 창끝, 화살촉, 장식품인 청동기 출토
4. 한의 침략과 고조선의 멸망
고조선과 한의 전쟁
1) 한의 침략 원인
① 지배층 분열--역계경 진국 망명
② 한과 진국사이에서 중간무역
③ 흉노와 연결되는 것에 대한 불안
* 한무제의 침입--고조선의 우세--조선상 한음, 니계상 삼, 장군 왕협 등이 우거왕 살해--대신 成己분전--주민들이 성기 살해--결국 고조선의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내부 분열과 대립(B.C108)
* 낙랑고분 : 낙랑군 치소인 평양 지역은 한반도 서북부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지역의 주민과 중국 사이의 중계지로서 번영하였다
제2장 삼국
1.삼국의 성립과 발전(초기 고대국가 지도 참조)
고구려의 건국과 성장--동가강 유역(산과 계곡의 요새지--양식이 부족--정복 전쟁 주력)
*오녀산성--요녕성 환인현, 주몽이 처음 도읍으로 삼은 졸본이라고 추정--고구려 최초 도읍지
1) 3C 동천왕(중국은 삼국시대): 요동의 서안평 공격--위의 관구검의 침략을 받아 수도 국내성(집안, 통구) 함락당함
2) 고국원왕(331~371): 전연의 모용씨의 침입을 받음--환도성(국내성)이 불에 탐, 평양성 전투에서 백제 근초고왕에게 피살--고구려의 약화
3) 5C 광개토왕 (391-413):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 25쪽 광개토대왕릉비 참조
4) 장수왕: 평양천도(427, 남하정책)--통구의 5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 강화,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결성(475), 백제의 개로왕 살해--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천도
백제의 성립과 발전--부여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이 건국(비류 온조 건국신화,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식 돌무지무덤발견-건국신화가 사실이었음을 뒷받침), 농경지 확보가 쉬웠다(한강유역, 벼농사) 철생산으로 철제농기구 발달
* 몽촌토성(강동구 방이동): 백제 초기의 도읍지, 하남 위례성, 풍납토성
* 삼국의 최대 영역 지도 참조
* 6C 성왕(523~554): 사비(부여)천도, 신라와 함께 한강회복(551)--신라 진흥왕의 배반으로 진흥왕에 의하여 충북 옥천(관산성)에서 전사
신라의 성립과 발전--진한의 사로국, 고조선 멸망 후 철기문화(박혁거세)집단이 경주 토착세력 지배, 4C말부터 발전, 박 석 김, 골품제-지배층의 권위 보장, 왕족회의 인 和白회의 등
1) 6C 지증왕(500~514): 농업생산 발전--철제농기구, 우경실시, 우산국(독도) 점령
2) 진흥왕(540~576): 정복사업--진흥왕순수비(국경지역을 순행하면서 기념으로 건립): 함경도의 마운령, 황초령, 북한산, 창령비, 단양 적성비-한강유역 점령
6가야--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성립--김수로왕 설화, 연맹을 이루기는 하였으나 하나의 통합된 국가는 이루지 못하였다.
* 철제품--장신구와 마구, 환두대도--지배층의 무덤에서 발견, 칼자루의 무늬에 따라 피장자의 지배력의 정도를 추측할 수 있다.
2.삼국의 사회와 통치제도
농업의 발달과 농민생활
1) 철제 농기구 사용으로 농업발전, 우경의 출현
2) 수리시설 발전(김제 벽골제--마한 때부터 농사에 이용해 왔던 저수지 36쪽, 제천 의림지, 영천 청제-신라 법흥왕 때 축조, 약 7000 여명 동원)--벼농사 발전
* 농사의 신: 길림성 집안 오희분 5호묘, 소의 머리를 하고 오른손에 누렇게 익은 볏단을 들고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
* 삼국의 관등체제: 1관등은 대대로(고구려)-좌평(백제)-이벌찬(신라), (고구려: 형․사자, 백제: 솔․덕, 신라: 찬․마․사)
계속되는 전쟁과 농민
* 미사리 경작 유구: 4~5세기경 백제의 밭 유적, 고랑과 이랑이 일정한 폭으로 나 있다.
* 견우직녀도: 남자는 밭갈고(소) 여자는 베짜는 모습--농경사회에서 생업과 직분 권장
* 대행렬도: 고구려 지배층의 행차 모습
삼국의 신분제도-집의 크기, 옷의 색깔, 우마차 장식 등도 신분에 따라 차등
1)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잘 나타남(인물 크기에 따라 신분의 차이
*교예도(평남 강서군 수산리 고분): 교예(춤추기, 바퀴굴리기, 공던지기)하는 모습, 주인공은 크고 시녀는 작게 그려져 있다.
3.삼국의 문화(애니미즘, 토템이즘 등 자연 중심의 종교에서 일원적 통치의 필요성으로 인하여 불교 도교 등 사상적인 종교를 수용하게 됨)
불교의 수용
1) 수용 입장: 지배층--正法으로 다스린다--정복전쟁의 정당화에 이용
피지배층--윤회설로 인하여 내세에는 지배층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2) 가람--경주 황룡사, 익산 미륵사지(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 중앙에 목탑과 금당, 동쪽 서쪽에 석탑과 금당을 건립한 것으로 보아 세 개의 절이 합쳐진 듯한 형식)
* 이차돈 순교비: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 순교--왕실에서 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를 받아들이는 모습
사상과 학문--유학과 도교
1) 유교: 신분제 중심의 충성을 강조, 한자전래, 이두의 출현
* 신라--진흥왕 순수비(나라에 충성, 유교적 이상정치 지향), 임신서기석(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맹세하며 기록한다. 충성의 도리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시․상서․예기․춘추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
2) 도교: 큰 마찰 없이 받아 들여짐
* 백제--산경문전(둥글 둥글한 산과 나무 구름 등이 새겨진 전돌에서 신선경을 희구하는 백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 신라--화랑도, 풍류도, 국선도
삼국의미술--고분벽화 유물, 불교미술품
1) 고분벽화--고구려의 것이 대부분, 삼족오(장군총)가 그려진 해, 기린, 무용(무용총), 씨름(각저총), 사냥(수렵총)
* 해신과 달신: 남성 모습의 해의 신이 들고 있는 해 속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 발 달린 까마귀, 왼쪽 여성 모습의 달의 신이 들고 있는 달 속에는 달의 상징인 두꺼비가 들어 있다.--영혼 불멸을 믿음
2) 불상--금동미륵반가사유상, 서산마애삼존불(석조불상의 시원, 본존불과 좌우 보살반가상, 백제의 미소)
3) 탑--초기: 중국식 모방하여 다층 목탑(황룡사 9층탑-신라)과 전탑 건립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과도기: 익산 미륵사 9층탑(백제)
석탑양식의 기틀이 마련됨: 부여 정림사지 석탑(백제, 7세기, 구조 간결, 탑신의 체감률이 높아져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을 갖추었다.)
4. 고구려의 대외 항쟁
수의 침략과 살수대첩
수양제의 침입--을지문덕이 살수에서 30만 살해(612)--수의 멸망(48쪽 지도 참조--청천강의 위치 중요)
당의 침략과 안시성 싸움
645년 당침입--양만춘의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50쪽, 안시성․요동성 위치 중요)
제2부 중세사회
제3장 통일신라와 발해
개관: 남북국시대--통일신라: 불완전한 통일, 하나의 민족의식 발생, 불교문화의 발달
발해(698~926):해동성국, 고구려의 영토 회복
1.신라의 삼국통합과 발해의 건국(남북국시대)
고구려의 멸망과 나당전쟁
나당전쟁(676): 674년 당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고 쳐들어 왔으나 매소성과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을 격퇴--신라 대동강 원산만 이남 확보
* 지도: 백제(임존성․주류성․사비)와 고구려(한성․우봉․ 마전) 부흥운동 중심지--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 발생
* 태종 무열왕릉비:비신은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게 표현된 조각에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과 기풍을 엿볼 수 있다.
발해의 건국(698~926)
1) 건국: 고구려 유민 대조영과 父 걸걸중상이 길림성 돈화현에서 震國 건국(698)--713년 발해
* 동모산 전경(길림성 돈화): 대조영이 당나라 군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성을 쌓아 발해 건국의 기틀을 마련
2) 주민: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및 왕족 대씨, 피지배층은 말갈인이 중심
* 발해의 영역과 도읍의 이동: 동모산(돈화)-중경-상경-동경(혼춘)
2. 통일신라의 지배체제와 사회
통일체제의 정비: 유교정치이념
* 경북 월성군 감은사지3층석탑: 감은사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려고 짓기 시작하여 신문왕 2년(682)에 완성
토지제도의 성립: 신분의 차이에 따라 지배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주는 것, 지배층은 토지와 농민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보장 받음
1) 식읍: 큰 공을 세운 귀족에게 지급
2) 녹읍: 관직에 따라 등급별로 지급
3) 관료전(신문왕7년, 687): 문무관료에게 등급에 따라 지급
4) 정전(성덕왕, 722): 군역을 지는 장정 농민에게 지급
** 토지임대료는 전주가 전호에게서 수확량의 절반이상을 수취
귀족의 생활과 백성의 처지
1) 귀족: 금입택, 사절유택, 안압지, 임해전, 포석정--사치
* 안압지(경주): 문무왕 때 조성, 국왕이 관료들과 정사를 논하고 퓽류를 즐기던 곳, 1975~1976년 발굴에서 신라 귀족의 사치스런 생활과 관련되는 유물 출토
*신라장적(일본 정창원): 효율적 지배를 위하여 촌 단위로 3년마다 작성, 가호 수, 인구 수, 토지면적, 가축 수, 나무 수, 인구를 연령에 따라 6등급화 등이 내용--세, 부역 징발을 위하여 작성.
* 촌락의 구조
통일신라의 사상(불교와 유교가 지배적 사상)
1) 불교
(1) 해동종(법성종): 원효--정토신앙(아미타불)--일반 백성에게 영향
* 고선사 서당화상비: 9세기 초 애장왕 때 원효를 추모하려 건립, 서당화상은 원효
(2) 화엄종: 의상--우주 만물은 대립이 아니라 조화(一卽多 多卽一)
2) 유교
(1) 국학건립(신문왕, 682)
(2)독서삼품과(원성왕, 788): 유교 경전 이해 수준을 시험, 고려의 과거제도로 발전
3) 禪宗의 출현: 교종(귀족 중심)이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데 반하여 선종은 자기 수양 중심--수행에 대한 평가는 스승이 함-- 스승을 위한 부도와 탑이 특징이 됨, 지방호족과 백성이 받아들임
* 선종 9산문: 가지산, 실상산, 수미산 등
* 진전사지 부도: 현재 남아 있는 부도 중 가장 오래된 부도. 신라 말 도의 선사의 부도로 추정
통일신라의 문화--불교와 관련된 건축 조각 발달
1) 석탑
(1) 석가탑: 통일 직후에 성립, 단아하고 정제된 조화와 세련미--1966년 무구정광다라니경(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751년 이전으로 추정)
(2) 다보탑: 화려미
(3) 해인사 삼층석탑: 사자 4마리가 받치고 있다.
(4) 석굴암(751):재상 김대성(진골귀족 출신)이 현세와 내세의 부모를 위하여 건립, 호국정신이 보인다.
*불국사와 석불사에 관한 설화 : 대승이 이승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불사를 세웠다(《삼국유사》효선편)
2) 종
봉덕사종(에밀레종,771): 12만근, 현재 남아 있는 종 가운데 가장 규묘가 큼, 상원사종: 가장 오래됨
3) 향가
4) 참요(신라 후기 미래에 대한 조짐을 담은 노래): 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들 모두 다 수도를 떠나 떠돌아 다니네. 나라가 장차 망하리. 나라가 장차 망하리(《삼국사기》)
3. 발해의 발전과 사회
해동성국 발해: 돌궐과 친하고 당나라와 친선
1) 9대 선왕(818~830): 해동 성국--고구려의 옛 땅 회복, 남쪽으로는 신라와 경계, 서남쪽은 요하 하류, 북쪽은 흑룡강 일대와 송화강의 중하류
* 발해의 대외교통로: 상경 중심
* 상경 제1절터의 석등: 강하고 힘찬 고구려 미술의 특징과 비슷
발해의 사회와 문화
1) 사회
(1) 지배계급: 주로 고구려 유민
(2) 피지배계급: 말갈인과 고구려의 피지배계급의 후손으로 전세, 공납, 부역, 군역 부담
2) 문화: 복합문화(고구려, 당, 말갈)--주로 당의 영향이 많았다
* 발해 상경용천부 궁성터
(1) 고분: 문왕의 딸 들인 정혜공주묘(돌방무덤-고구려식) 정효공주묘(벽돌무덤-당식)
* 정효공주묘: 당나라 양식을 따른 것이나 석실 내부의 벽에 백회를 바르고 12명의 인물을 그린 벽화는 고구려의 전통 화법
발해의 멸망--지배층의 분열이 가장 큰 원인, 피지배족인 말갈족의 이탈도 원인
거란 야율아보기(916)의 침략--926년 발해 멸망
4.신라사회의 동요: 지방호족의 성장: 해상세력, 군진세력 등이 중심이 되어 막강한 군사력 보유
농민들의 봉기
귀족의 권력다툼으로 백성의 부담 가중-- 원종 애노의 봉기: 사벌주(경북 상주), 기훤: 죽산, 양길: 북원(원주), 896년 붉은 바지 부대 농민군, 900년 평양의 검융 등
* 신라 말 농민봉기 : 농민의 봉기를 중심으로 살필 것
후삼국의 정립
1) 견훤: 무진주(전남 광주)에서 후백제 건국, 900년 완산주(전주)를 수도로 하고 왕으로 즉위
2) 궁예: 901년 송악에서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으로 즉위, 904년 마진으로 국명을 바꾸고 철원을 수도로 함, 911년 태봉으로 개명(후삼국의 3분의 2 차지)
제4장 고려의 성립과 발전
1.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합
왕건과 고려의 건국-건국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궁예에 대한 부정적 평가
1)건국: 해상세력(예성강 벽란도)인 왕건 추대(918): 국호(고려), 수도(송악-개경)
2)왕건의 정책
(1)조세: 10분의 1로 경감, 농민 신분 환원, 농민 정착으로 농민생활 안정
(2)북진정책: 평양(서경)을 중요시 함
* 개성만월대: 고려의 궁궐터
후삼국 통합
*개태사석불: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이 지역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려고 세운 절, 삼존불로 갑옷을 입은 무인의 모습
* 발해 유민 수용--민족의 재통일: 자주적 통일(청천강~영흥만)
2. 고려의 지배체제와 사회
호족억압정책
1)태조
*훈요십조: 첫째로 우리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여러 부처님의 호위하는 바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뽑아 보내어 분향하며 도를 닦게 하고 , 각각 그 업을 다스리도록 하여라.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중의 청탁을 따르게 되면, 각 업(종파)의절들이 서로 다투어 바꾸고 빼앗고 할 것이니, 마땅히 모두 금하도록 하라.(《고려사》세가)
새로운 통치체제
* 수령의 임무: 현종 9년(1018) 2월에 모든 주․부의 관원이 봉행해야 할 여섯 조목을 새로 정하였다.
첫째는 백성이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살필 것이며, 둘째는 향리의 능력 있고 없음을 살필 것이며, 셋째는 도둑놈과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살필 것이며, 넷째는 백성이 법령을 위반하는 것을 살필 것이며, 다섯째는 백성이 효성스럽고 우에 있음과 청렴하고 결백함을 살필 것이며, 여섯째는 향리가 부세와 재정을 흩뜨려 잃어버리는 것을 살필 것이다.(《고려사》선거지)
경제제도의 정비--인민과 토지 지배, 양전 실시
1)田柴科(식량생산 땔나부 생산: 文武百官으로부터 府兵(직업적 군인) 閑人(6품이하 양인자제로서 관직을 얻지 못한 관인이 수급대상)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의 관직에 복무하거나(공무원) 또는 職役(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일, 관장제 수공업자 및 鄕吏)을 부담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의 지위에 따라서 전토와 시지의 수조권 분급.
* 전시과의 변화과정
신분제도
1)지배층
귀족: 왕족, 문무 고위 관료(문반이 우세)--문벌귀족 형성(왕실과 결혼)--정치권력 독점
* 문벌귀족의 무덤 : 사방의 벽에 고려 귀족으로 추정되는 일곱 명의 인물상이 있다
3. 대외관계
고려 초의 국외 정세
1)거란--926년 발해 멸망, 947년 요, 거란 침입 대비 고려는 광군 조직
2)중국--송 건국(960), 고려와 국교를 맺고 거란 견제
* 고려 초기 동아시아의 정세지도--다음 지도는 어느 시대를 표현하고 있는가?
거란의 침략과 서희의 외교
1)원인: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 정책
(1) 1차 침입(성종, 993): 서희의 담판외교--강동 6주 획득
(2) 2차 침입(현종, 1010):강조의 정변 구실--개경 함락--양규의 항전--식량 보급이 끊기자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철군
강감찬의 귀주 싸움
3차 침입(현종, 1018): 강감참의 귀주대첩--여진족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김
* 고려와 거란의 전쟁 지도
* 귀주성(평북 귀주): 고려 초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려고 쌓은 성, 거란과 몽고 침략 때의 격전지
여진의 침략
1) 여진족의 강성: 고려는 별무반 조직, 1107년 윤관이 여진 정벌하고 동북 9성 축조
2) 금의 건국과 여진 관계의 변화: 아골타가 통일을 이루고 금 건국(1115)--요를 멸망하고 송 침입, 고려에 군신관계 요구(문벌귀족이던 이자겸이 굴복--금은 고려를 침략하지 않음)
고려의 대외무역
* 대외무역의 중심지 벽란도(예성강)
4. 고려 전기의 사상과 문화
정치이념과 유학--정치이념은 유학
불교와 대장경--불교는 국교
1) 훈요십조: 1조가 불교강조, 사원 난립 경계, 도선의 풍수도참설 중시, 서경이 북진정책기지로 중요시
* 은진미륵: 논산 관촉사, 거대한 몸체에 관을 쓰고 손에 연꽃가지를 든 보살상, 광종 때 땅 속에서 돌이 솟아오른 인연에 의하여 조성, 높이가 18m, 호족들인 주도하여 만듬
2) 천태종 성립: 의천--교종 입장에서 선종 통합(교학연구와 수행을 같이할 것 주장)
3) 대장경 조판(목판 인쇄술 발달): 호국적(거란 침입시)
*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 : 11~12세기,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이 계기가 되어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 가운데 하나. 부처의 힘으로 방비
공예와 청자
1) 금속활자 발명: 상정고금예문(1234, 현존 안함), 직지심경(1377, 현존 세계 最古, 프랑스 파리 도서관)
2)고려청자: 전래의 토기를 만들던 기술에 중국의 도자기 기술을 받아들여 제작
-- 순수 청자(11c):무늬 없이 순수한 비취색, 고려 귀족문화의 전성기
-- 상감 청자(12c):상감 기법
* 원숭이모양 연적: 동물 모양의 청자
* 청자 참외모양 꽃병:순청자의 전형, 경기 장단에 있는 인종의 장릉에서 출토
제5장 고려 후기의 사회변화
개관: 귀족사회의 내분--외척 이자겸의 난, 서경세력과 개경세력의 대립인 묘청의 난
무신의 난--문벌귀족의 몰락과 무신정권의 성립
농민 노비의 반란--만적의 난, 망이․망소이의 난
몽고의 침략--고려는 부마국으로 전락, 문화재 소실, 권문세족의 전횡
1.귀족사회의 동요와 무인의 집권
귀족들의 다툼과 이자겸란(1126)--이자겸 가문의 왕실과의 혼인도
--경원 이씨의 권력 독점: 문종~인종 80년간 정권 장악(예종과 인종의 장인인 이자겸의 왕위찬탈시도)--척준경의 배반으로 실패--풍수 도참설(木子爲王)의 유행으로 묘청의 난의 원인이 됨
개경귀족과 서경귀족의 싸움--묘청의 난(1135)
: 서경파의 서경 천도 추진 주장--김부식 등 개경파의 반대--묘청의 반란(국호: 대위, 연호: 천개, 군대: 천견충의군)--김부식에 의하여 진압--서경세력 몰락, 개경귀족에 대한 농민․노비들 항쟁이 시발점
*묘청의 풍수리지설: 임원역 땅에 궁궐을 세우면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다 신하가 될 것입니다. …김안에게 명하겨 궁궐을 짓게하고 …바야흐로 날씨가 차고 얼어서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고 탄식하였다. …국왕에게 칭제건원 할 것을 권하며…(《고려사》묘청전)
무신란(1170)
1) 원인: 숭문천무 풍조(서희, 강감찬, 윤관 등은 모두 문신)
최충헌가문의 60년 집권
1) 최충헌의 독재 정치--명종 폐위, 신종 추대, 아우 최충수 제거
농민과 노비들의 봉기--지배세력에 대항하면서 몽고의 침입을 물리치는데도 공헌
1) 농민, 천민의 난--신분 해방 투쟁
(1) 서북지방 광수가 이끄는 농민군은 서경 점령
(2) 망이, 망소이의 난(1176)--공주 명학소의 천민, 충순현으로 승격 농민군과 화의
*공주명학소터--망이, 망소이가 농민봉기를 일으킨 곳
(3) 전주관노의 난(1182)--가혹한 형벌에 대한 반발, 신분 해방 주장
(4) 김사미(운문) 효심(울주)의 난(1193)--경상도 지역 농민 난
*농민봉기지도--최광수, 망이․망소이, 만적, 효심 김사미 등 중요
2) 노비의 난: 만적의 난(1198)--최충헌의 사노비, 신분해방과 정권장악(북산에 모인 수천 명의 노비들은 ‘丁’자를 쓴 누런 종이를 나누어 가지고 단결과 비밀을 유지하였다. 각자의 주인을 죽이기로 하였다. 노비문서를 태우면 자기들도 벼슬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2.몽고의 침략과 항전
몽고의 침략과 대몽항전
*몽고의 침략도: 박서, 김윤후, 삼별초의 이동 등
*절의를 지킨 문대(《동국신속삼강행실도》): 몽고 1차 침입 때 낭장 문대는 몽고병에게 붙잡혔으나 끝내 항복을 거부하다 철주성 밑에서 처형당하였다.
강화도 천도
1) 최우의 1232년 강화도 천도결정(개경과 가깝고, 남부지방의 곡식 물자 운반이 쉬웠다, 물을 이용하여 대항)--무신집권자들의 계속된 향락
2) 2차 침입(1232): 처인성(용인) 전투에서 승려 김윤후가 살리타 살해
3) 3차 침입(1235): 산성에 방호별감 파견--죽주성에서 방호별감 송문주의 항거
* 죽주산성(경기도 안성): 몽고침략에 관리와 세력가들은 도망가고 백성들이 남아서 군대와 함께 성을 끝까지 지켰다.
4) 5차 침입(1253): 충주성에서 김윤후의 항전
고려와 원의 강화
몽고 침입 결과: 국토의 황폐, 민생 도탄, 대구 부인사 초조대장경, 황룡사 9층탑 소실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 장군 배중손, 노영희의 강화도 항쟁--진도로 이전(서남해안 장악)--김방경의 토벌군 기습, 배중손 살해--김통정이 제주도로 이전하였으나 항쟁은 실패
*항파두리성(제주도 애월읍): 제주도의 삼별초 항쟁지
3. 원 간섭기의 고려사회
권문세족과 농장
1) 권문세족: 원 갑섭기에 성장
2) 경제적: 토지 겸병으로 대토지 소유(농장)
* 사패(賜牌): 특별한 공이 있는 경우 일정한 지역의 토지와 백성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신라 때의 식읍과 성격이 비슷)
* 농장: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은 물론,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하지 못하게 함, 영역은 산과 강을 경계로 하였다.
농민들의 처지
: 세금의 부담으로 인하여 농민이 권문세족의 농장으로 투탁
* 도톨밤의 노래: 고려 말기 문인 윤여형의 시이다. 권문세가들이 농장을 늘리고 하나의 토지에 여러 명이 주인이라고 행세하며 조(租)를 거두어 농민들은 도토리나 주워 먹으며 살아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 고려말의 상황: 인구가 늘고 생산량이 늘어났지만, 자기 소유의 땅에서 농사지어 조세와 부역을 바치는 백성은 계속 줄어들었다. 따라서 국가에서 거두는 세금의 양은 줄어들고 부역에 동원한 백성의 수도 줄어들었다.
반원개혁운동
1) 공민왕의 반원 정책--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
*신돈 기용: 전민변정도감 설치--왕권 강화, 신흥사대부를 등용하여 권문세족 제거하려 함
* 신돈의 개혁: 근래에 기강이 크게 무너져 탐오함이 풍속이 되어 …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가지고 있던 전민을 거의 다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집들이 강탈, 점령하였다.…이제 도감을 두어 이를 가려 정비하고,…그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묻지 않을 것이며, 기한을 지나 발각되는 자는 규찰하여…(《고려사》신돈전)
4.고려 후기의 불교와 성리학의 수용
불교결사와 고려대장경
1) 교종의 위축과 선종의 장려
조계종--지눌: 定慧雙修(선정과 지혜를 같이 닦음), 최씨정권의 후원을 입으며 수선사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2)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몽고 침입 때 최우가 강화도에 대장도감 설치, 1236년에서 16년간 8만여 판 조성--합천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
성리학 수용
: 군신의리 강조, 대의 명분 중시, 이단 배격--안향에 의해 소개--백이정, 이제현--이색,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이 발전
* 이조년 초상: 복식에서 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나타남.
삼감청자와 그림
1) 상감청자
상감운학문매병: 청자로 가장 많이 만들어진 매병 가운데 대표적 명품
* 청자진사연꽃무늬주전자: 꽃잎의 선을 붉은색의 진사로 그려 강조하였다. 무신 집권자인 최항의 무덤에서 출토
2) 회화의 발전: 사실적인 고려의 풍경화는 실지 사생에 기초--이영의 ‘예성강도’
제6장 조선사회의 성립과 발전
개관 1) 건국세력: 신흥사대부+신흥무장세력
2) 통치제도의 완비:《경국대전》
3) 중앙통치: 양반, 국가재정부담: 농민,
4) 지방통치: 전국의 모든 군현에 수령 임명
1.조선의 건국과 국가운영
조선 건국
1) 세력: 신흥사대부(정도전 조준 등) 와 신흥 무장 세력(이성계)의 결집
2) 사전개혁--과전법 실시(1391): 권문세족의 경제권 박탈, 신흥세력의 경제권 강화
조선초기 체제정비와 정치동향
*《경국대전》: 세조 때부터 편찬 시작 성종 때 완성,
* 삼공신회맹문: 태종 5년 개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을 불러모아 충성을 서약한 문서
중앙관제--고려의 귀족 중심제에서 관료제로 변화(과거 중시),
1) 도평의사사 혁파, 의정부 설치(1400, 정종)--6조 직계제(태종)--의정부 강화(세종)--6조 직계제(세조)
* 광화문 앞 6조거리(141쪽):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앞을 6조 거리라고 이름 붙였듯이 6조는 조선시대 최고의 정책기구
2) 삼사: 사헌부(감찰권), 사간원(간쟁권), 홍문관(옥당, 왕의 고문기관, 학술기관)-권력 견제
지방제도
1) 중앙집권강화: 모든 군현에 지방관 파견, 향․소․부곡 소멸(8도제)
군사제도
* 중앙군(5위 체제)의 구성
(1) 일종의 특전으로 편제된 특권층 자제로 구성된 부대
(2) 양인이 의무군역으로 지는 정병가운데 번상한 군졸
* 지방군(진관체제)
** 진관체제: 거진(巨鎭)을 중심으로 주변의 진을 소속시켜 이를 하나의 지휘 단위, 군사동원 단위로 만든 방어체제
2. 경제생활과 수취제도
경제발전
1) 농업
(1) 농사직설(1429, 정초): 삼남지역의 농법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려는 의도,(시비법, 제초기술)
(2) 논농사 발전: 일부 지방에서 이앙법 시행(직파법은 일반적), 수리시설 확충(제언, 보)
2) 수공업
(1) 관영수공업: 조선 초기의 대표적 수공업
3) 상업--국가의 抑末政策으로 미발달
(1) 서울: 시전 상인이 운종가(종로) 중심--독점권
(2) 지방: 보상(봇짐) 부상(등짐)등이 소금․빗․바늘․베․무명․종이 등 유통
과전법과 전세제도
1) 과전법(1391)의 실시: 고려 지배층의 경제기반 몰수, 사대부 층의 물적 기반 확보, 전현직 관리를 18과로 나누어 경기도에 한하여 등급에 따라 수조권 분급(양전이 배경)
* 과전법에 대한 평가: 전하께서 즉위하시기 전에 친히 그 폐단을 보시고는 개탄하여, 사전을 혁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셨으니, 이는 대개 국내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식구를 헤아려 토지를 나누어주어서…서울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자이거나, 과부로서 수절하는 자, 역이나 나루터의 관리, 또는 서민과 공장으로서 공역(公役)을 맡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토지를 분배해 주었다.(정도전《조선경국전》)
2) 전세제도
(1) 초기: 수확의 10분의 1을 징수(1결당 30두),
(2) 세종: 공법--전분 6등(토지의 비옥도, 1결마다 20두), 연분 9등(풍흉의 정도, 20두에서 4두까지)
*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에 의한 1결당 전세액
역역(力役)과 공물제도
1) 역역
(1) 신역(身役): 사회 신분에 따라 특정한 역을 지는 것, 예를 들면 16세에서 60세 양인의 신역은 군역
(2) 요역--토지 8결마다 1인, 1년에 6일 이내 복무--지켜지지 않았다
2) 공납(지방 특산물): 생산이 안되어도 부과(방납의 폐단 발생), 권세가는 물지 않고 농민들만이 부담, 호구의 토지소유나 인정(人丁)의 수에 따라 부담이 달라져야 하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토지세보다 더 큰 부담)
3. 신분제도
신분구성: 양천제
* 호적의 시행: 호구대장을 작성한 뒤 멋대로 옮겨 다니는 자가 있으면 가장은 장형 100대에 처하고 이웃에 사는 것을 허락한 자도 처벌한다.…(《태조실록》)--조세 부과, 반란 세력 억제 등이 이유
1) 양인
(1) 양반: 지주계급, 노비소유, 과거나 음서로 관직 진출(양반)
(2) 중인: 기술관(천문, 지리, 의학, 통역) 아전과 향리(지방행정실무)
(3) 평민(상민): 농업, 수공업, 상업 담당, 조세 공물 군역 요역 납부, 출세에 법적 제한은 없었다.
* 양반과 상민(김득신의 노상알현, 150쪽); 신분의 차이
2) 천인
(1) 노비: 공노비--납공노비(국가에 대하여 납공, 노-무명 한필과 저화 20장, 비-무명 한필 저화 10장)
선상노비(일정기간 관청에서 무보수 노동)
사노비--공노비보다 생활이 어려웠다
납공노비(몸값만 바침)
입역노비(주인 집에 가서 노동, 독립적 호가 많았다)
(2) 천인: 백정, 광대, 무당, 창기, 무격, 악공 등
4.문화와 기술의 발전
성리학의 보급--지배층의 정치 이념
국가차원의 보급: 집현전(고려사, 고려사절요 편찬), 국조오례의 편찬, 향교 성균관 활성화(지배층), 삼강행실도(백성)
* 삼강행실도: 1434년, 직제학 설순 등이 충신, 효자, 열녀의 사례를 중국과 우리나라의 책에서 모아 만듬, 일반민에게 보급
한글창제
1) 창제 배경: 한자의 불편, 이두의 표현력 부족
과학기술의 발전--농업과 관련된 천문기상학 발전
1) 천체 관측시설: 간의대.
2) 천체운행측정: 혼천의
3) 시간 측정기구: 해시계(앙부일구, 장영실) 물시계(자격루)
4) 강우량 측정기구: 측우기(세계 최초)--유럽보다 200년 앞섰다.
5) 역법: 칠정산(내외편)--중국과 아라비아 역법 참고
6) 의학: 향약집성방(우리 풍토에 맞는 의학서, 1443년 노중래) 의방유취(1445년 김순의, 세계최초 의학백과사전)
예술
1) 회화: 수묵산수화 유행
* 안견의 몽유도원도: 좌측의 현실세계와 우측의 환상적이 도원의 세계가 대조를 이룬다.
3) 공예: 분청사기--신흥사대부, 회청색, 곡선과 문양이 자유 분방함과 활달함
백자--절제된 형식미, 단아 소박, 순백자(조선 초기) 청화백자(15세기)
나전공예품--실용성과 생활미 강조
* 분청사기철화당문초문대접, 백자반합, 청화백자매조문항아리(조선)
--고려시대 공예품 청자와 비교(순수청자-상감청자-분청사기-순백자-청화백자)
제7장 조선 전기 사회변화와 외세침략
개관: 1)수취제도의 모순: 방납의 폐단, 군역의 폐단
2)성리학의 확립: 붕당의 발생
3)사화의 발생
4)임진왜란, 병자호란의 발발
1.경제생활과 수취제도의 변동
농업과 상공업의 변화-財富의 훈척집중화
1) 농업의 발달: 의학발달-인구증가-농업의 발달
(1)수리시설 발전: 제언(댐), 보(천방, 저수지, 지방사족 중심)--직파법이 일반적이나 일부지방에서는
이앙법 시행
(2)간석지 개간(언전): 중앙의 궁가나 권세가에 의하여 개간
2) 상업의 발달: 농업의 발달로 잉여생산물 출현--지방 장시의 발달--전국적 유통망 성립
* 조선시대의 저울추: 조선전기 상업의 발전
지주지의 확대와 경영
1) 훈척의 토지 집적과 지주의 농장 직영(家作경영--지주가 근처의 토지를 직영)
* 농장의 구조: 지배층의 토지 집적
수취제도의 변동--농민의 몰락
1) 원인
(1) 공납의 폐단--방납의 유행(서리나 상인으로 미리 바치게 함)--농민층의 부담 가중(호적과 토지대장을 기준으로 각 군현에 일정량 부과)
**공물의 폐해: 사다새(물새의 일종)를 …비록 1년에 진상하는 것이 한 마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 지방의 산물이 아니므로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진상할 차례가 돌아오면 백성들에게 그 값을 징수하여 평안도 산지에 가서 사옵니다. 또는 서울 상인이 가지고 있으면 먼저 바치고 그 고을에서 값을 받기도 합니다.(《명종실록》명종 원년 12월 임진)
(2) 군역의 폐단
ㄱ. 세조: 보법의 실시(정병(직접 군역)과 보인(정병의 물품 조달)--모든 장정이 군역 부담자가 됨--군역의 노역화--영농에 타격
ㄴ.15세기 말: 대립제(대립가의 부담으로 군역부담자 몰락)
ㄷ.16세기: 방군수포제(정병에게 부과, 포를 수취하고 군역 면제)--상비군 해체
(3) 요역의 폐단: 토지 소유기준으로 부과하나 권세가와 결탁한 자는 면제를 받아 힘없는 농민층의 부담이 가중 됨
2. 성리학의 발전과 문화
성리학의 발달
1)사림파의 형성--성종대 중앙정계 등용
사림문화
1) 사대부 문학: 정철의 성산별곡(담양의 식영정을 대상), 관동별곡(금강산을 비롯한 관동 8경), 사미인곡(국왕에 대한 충성)
2) 정자문화: 담양지방 송순의 면앙정(*전남 담양), 송강정, 식영정
**方外人(사대부이면서 사대부 체제에 안주하지 않았던 지식인)문학: 김시습--체제 비판적인 시나 소설 기록
3. 사림․훈척세력의 대립과 농민항쟁
사림세력의 성장--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성종대 등용, 삼사 등 언관직에 주로 등용
사림과 훈척세력간의 갈등
1) 4대 사화
(1) 무오사화(1498): 김종직의 弔義帝文이 발단, 훈구가 사림 제거
(2) 갑자사화(1504): 폐비 윤씨사사사건이 원인, 훈척과 사림 제거
** 중종반정(1506):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등이 연산군 축출, 중종 즉위
(3) 기묘사화(1519): 조광조의 개혁정치(현량과, 향약실시, 경연 강화, 방납폐단 시정)에 대한 훈구의 반발--서원 활성화
(4) 을사사화(1545): 대윤과 소윤의 외척간의 대립
--선조즉위와 함께 사림이 정계의 두도권 장악
사림의 재지기반-향약과 서원
1) 향약(상부상조, 향촌 교화, 과실상규, 덕업상권, 예속상교, 환난상휼)
2) 서원: 선현에 대한 제사, 유생 교육 담당
(1) 백운동 서원(최초의 서원,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건립, 이황이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사림세력의 기반
** 소수서원: 최초의 사액서원(면세 면역의 특전, 국왕이 토지, 노비, 서적 하사)
농민의 동요와 저항-= 훈척의 농장 확대, 수취체제의 문란이 원인
* 임꺽정: 버들고리를 만들던 고리 백정, 황해도 구월산이 본거지, 노비 상민들도 참여, 농민의 호응, 신분질서에 대항하는 성격이 강함
4. 왜란과 호란
나라 안팎의 정세와 왜의 침략
**교역상의 문제점을 군사력으로 타개하려 조선 침략(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경상도, 의령), 조헌(충청도, 금산), 고경명(전라도), 서산대사(묘향산), 사명당(금강산)
* 수군의 전력: 이순신의 거북선
청의 침략과 난후 대책
1)정묘호란(1627) 인조반정(1623) 후 친명정책으로 후금침입--강화를 맺고 형제지국이 됨
2) 병자호란(1636) --후금의 군신관계 요구--1636년 침입--남한산성에서 인조 항복
* 정묘․병자호란 지도
* 삼전도비: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한 내용
* 만동묘(충북 괴산):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 권상하가 명 황제를 위하여 지은 사당--모화사상
8장 조선 후기 경제발전과 사회동향
개관
* 경제: 상품화폐경제 발달--생산력 발전--자본주의의 징후
* 사회: 신분제 해체
* 조세: 대동법, 균역법, 환곡제 시행
* 학문: 실학의 대두
* 정치: 탕평책 시행
1.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여러 생산활동의 발전
1) 농업
(1) 논농사: 수리시설의 발전--이앙법 전국적으로 확대
(2) 밭농사: 견종법(이랑을 높이 만들고 고랑에 씨를 뿌림)--추위, 가뭄, 바람을 덜 탐
2) 상업
: 농사 필요 물품 구입으로 수공업 발전--전문 수공업자 등장
3) 광업(수공업의 원료)
예: 동전의 쓰임에 따라 구리 수요 증가--은광 개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농민층의 몰락
1) 상업적 농업 등장: 곡류작물(쌀, 콩, 보리)․의류작물(목화, 모시)․특용작물(인삼, 담배)
* 상업적 농업: 담배, 삼, 모시, 인삼, 생강밭 등에서의 수입
2) 전국적 상인 등장
(1) 경강상인: 한양의 쌀 조달
(2) 개성상인(송상): 송방 중심 인산 재배와 판매
(3) 의주상인(만상): 청과 교역ꠏꠏꠏꠏꠈ---대외무역
(4) 동래상인(내상): 일본과 교역 ꠏꠎ
* 조선후기 지방장시:진주 일대의 장시들이 날짜를 달리하여 서로 연결
* 조선후기 상업활동(경원개시, 회령개시, 책문후시, 중강개시 후시, 왜관개시)
지주제의 발전과 농민층 분해
1) 농업생산력 발전--상품화폐경제 발전--부의 축적--토지 매입--지주제 확대--농민층 몰락으로 농민의 유민화․임노동화
* 토지매매문서: 토지의 상품화
* 농민들이 자기의 토지를 부호들에게 파는 현상을 비판(박지원의『과농소초』)
자본임노동 관계의 발생-소작을 얻지 못한 농민의 유망, 도망 노비 등이 임노동자화(광업, 금속가공업)
1) 상인들은 적극적으로 광업에 투자: 수익성이 높았고, 싼값에 노동자 고용
2) 금속가공업 발전--공장제 수공업 단계
* 금광의 활발한 모습-광산 노동자가 수천 명
2. 신분제도와 조세제도의 변동
신분제도의 변동(하층 신분에서 상층 신분으로 이동)
1) 평민과 노비 층이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으로 부자가 되고 납속첩․공명첩을 사들여 신분 상승, 호족과 족보 매입을 통한 신분위조로 상승 등
2) 노비는 주로 도망을 통해 신분에서 탈피(1801년 공노비 일부 해방)
* 조선후기 신분변동: 양반 증가, 평민과 노비층 감소, 특히 노비 층의 감소가 많았다
* 몰락 양반의 처지: 망건을 쓰고 왕골자리를 엮는 모습
조세제도의 변화
1) 대동법(1608~1707)
(1) 원인: 공납의 폐단으로 인하여 방납 시행--농민층의 부담이 가중되자 공물을 쌀로 납부하는(1결당 12두) 대동법 시행(베나 돈으로도 납부)-선혜청에서 담당
(2) 경과: 1608년 이원익의 주장으로 경기도에서 최초 실시, 1708년 함경도․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실시
(3) 결과: 공인 출현(어용상인)--상업자본 발전--수공업 발전
공납의 토지세화로 농민 부담 감소
2) 균역법(1750)
(1) 원인: 군역의 부담 가중--인징, 족징,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 폐단 발생--1년 2필 납부하던 포를 1필로 경감해 주는 균역법 시행
(2) 경과: 부족분 충당--결작(토지 1결당 2두 징수), 어염선세, 은결, 선무군관포 등으로 충당
3) 환곡: 빈농 구휼책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고리대업화--농민의 가장 큰 부담이 되었다
** 대동세, 결작 등으로 수취제도의 토지세화--신분적 체제를 벗어나는 과정
** 삼정의 발생(전정, 군정, 환정)
3. 실학과 민중문화의 발전
실학사상의 대두(주자학에 대한 비판으로 대두)
1) 경세치용학파(토지제도, 행정 기구 등 제도개혁에 치중--농업 중심의 개혁)
(1) 유형원:《반계수록》에서 균전제 주장
(2) 이 익: 실학을 학문으로 체계화, 《곽우록》에서 한전론 주장, 《성호사설》
(3) 정약용: 실학을 집대성, 여전제 주장--후에 정전제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저술
--양반지주의 정권장악 하에서는 실현될 수 없었다.
* 정약용의 여전제:산과 강을 지세 기준으로 구역을 확정하여 경계를 삼고, 그 경계선안에 포괄되어 있는 지역을 1여(閭)로 한다.....무릇 1여의 토지는 1여의 인민이 공동으로 경작하도록 하고, 내 땅 네 땅의 구별을 없이하며 오직 여장의 명령에만 따른다. 여민들이 농경하는 경우 여장은 매일 개개인의 노동량을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오곡의 수확물을 모두 여장의 집으로 가져온 다음 분배한다.
2) 이용후생학파(상공업의 유통이나 기술발전에 치중)
홍대용(의산문답), 박지원(열하일기), 박제가(북학의), 유득공(발해고)--청의 문물을 수용하자는 북학파
국학의 발전
1) 역사학: 중국중심의 역사관 비판, 민족사의 독자적 정통론 제기
2) 천문학: 지전설 등장--중국 중심의 세계관 붕괴
서민문화와 민간신앙--봉건사회에 대한 비판의식
1) 서민문화(17~18)
(1) 한글소설--춘향전(신분), 토끼전, 심청전(효행), 장화홍련전(봉건적 가족관계 비판) *홍길동전(최초의 한글소설)
(2) 판소리: 춘향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심청가. 배비장타령, 옹고집타령, 토끼타령 등
* 봉산탈춤
(3) 회화: 진경산수화--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 김홍도의 총석정도
풍속화(양반사회에 대한 비판)--김홍도(농촌서민의 일상생활), 신윤복(양반의 풍류와 부녀자의 풍습을 풍자)
*주유청강(신윤복의 그림)--풍속화
2) 민간신앙: 후천개벽사상, 정감록의 예언사상, 미륵신앙
** 천주교는 박해를 받았으나 널리 전파
4. 붕당의 확대와 당쟁
붕당정치의 전개
선조(1575): 동인(신진사림 김효원)과 서인(기성사림 심의겸)--이조전랑 관직 다툼
동인에서 북인과 남인 분파(송강 정철의 건저의 사건이 원인)
북인에서 대북과 소북 분열(왕세자 책봉문제)--광해군 즉위로 대북 집권
인조반정(1623): 서인 집권, 남인과 대립
기해예송(1659, 제1차 예송): 효종의 서거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문제로 발발
갑인예송(1674, 제2차 예송): 효종 비 인선왕후 사거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발발--남인 집권
경신환국(1680): 남인의 역모로 서인 집권, 서인이 노론(송시열)과 소론(윤증)으로 분열
기사환국(1689): 경종의 세자 책봉과 관련하여 서인 축출 남인 집권
갑술환국(1694): 폐비 민씨 복위와 서인(노론) 집권, 이후 노론 중심의 벌열정치
영정조의 왕권강화
1) 영조의 즉위: 탕평책 실시, 균역법(1750) 시행
**이인좌의 난(1728)
3) 정조의 즉위
(1) 정치운영을 비변사에서 의정부로 옮김, 장용영(군권 장악), 규장각(정책 연구 기관, 인재 발탁)
* 규장각(창덕궁 내) 왕실도서관이자 학문연구기관
(2) 수원에 화성 축조--서양식 공법
제9장 사회모순의 심화와 농민항쟁
개관
: 세도정권의 민중에 대한 과중한 조세 수탈--농민항쟁
1.사회모순의 심화와 농민생활
토지문제와 농민
1) 19세기의 양상: 농민층 분해(임노동자, 상인), 지주의 토지 집중(권세가, 부호)
2) 지대수취: 병작반수(타조법)--벼농사, 수확의 50%를 현물로 납부
도조법--밭농사, 풍흉에 관계없이 정해진 지대 납부하는 정액세제
*병작반수에서 도조제로 변화: 지주입장(안정된 지대 확보), 농민(농업경영의 독립성과 채산성 확보)--지대가 높았기 때문에 농민의 항조 투쟁(탈곡 허술, 볏단 빼돌리기), 지대거부 운동(양반지주의 수탈은 신분제 하에서, 그러나 납속책 등의 신분제 해체로 양반지주에 대한 거부 운동)
* 자매문기: 1822년, 흉년이 들어서 자신을 스스로 노비로 판 문서
삼정을 둘러싼 사회모순
1) 전정(전세): 대동세, 결작, 삼수미
* 결가(結價): 1결당 수취 총액을 화폐로 환산하여 징수(농민에 대한 징수 때의 가격과 중앙정부에 상납 때의 시세 차익을 수령이나 서리가 차지)
* 도결: 토지세를 일괄(삼정이나 잡역세를 토지세로 전환)하여 부과
* 타작도: 김홍도, 지주전호제의 실상을 보여준다
2) 군정: 신분 상승으로 군역 양인 농민 감소--첩역 현상 발생(백골징포, 황구첨정, 인징, 족징)
3) 환곡: 진휼이 목적--고리대업으로 조세화(폐단이 가장 심하였다)--농민의 정소(呈訴)운동 발생
*민장초개책(농민들이 올린 소장, 삼정의 실태를 알 수 있다)
*백징의 실태: 시골 백성이 곡식섬을 받아 지고 지나가는 자를 일찍이 본 일이 없다. 한 톨의 곡식도 일찍이 받아온 일이 없는데도 겨울이 되면 가호마다 곡식5-7석을 내어 관청에 바치는데, 그러고서도 다시 환자라고 부르는 것은 부끄럽지 않은가?
2. 세도정권
세도정권하의 중앙정치: 19세기 권력은 벌열가문(외척인 중앙 노론)에게 집중--비변사 장악
* 중요성관의 권력집중실태: 권력의 핵심으로 갈수록 유력가문에서 차지
3. 평안도 농민항쟁(1811년, 홍경래의 난)
항쟁의 배경
1) 평안도
ㄱ. 농업생산 열악하였으나 상업이 발달(청과의 무역 통로
ㄴ. 광산․금속가공업 발달: 청과의 무역에 필요한 은 채취(은광, 금광 개발)--대부분 임노동자 고용(조세부담과 노비신분을 탈피하기 위해 도망한 사람들)
ㄷ. 서북민에 대한 차별 대우--중앙권력과 수령에 대한 불만 고조
* 평안감사 선유도: 평안감사는 매관매직과 수탈이 가장 심한 자리
전개과정
ㄱ. 주도세력: 홍경래(풍수꾼), 우군칙(지사출신), 이희저(역노출신으로 양반신분 매매), 김사용(빈농), 김창시(진사) 등이 10여 년 준비(홍경래 격문 참조)
ㄴ. 지지세력: 몰락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ㄷ. 과정: 1811년 가산군 다복동에서 1천명 봉기--선천․정주 점령--1812년 관군의 정주성 점령으로 실패(주도세력은 대부분 처형됨) * 홍경래: 평서대원수
*홍경래의 격문: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북 땅을 버림이 더러운 흙과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쪽 땅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서쪽 땅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해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존하고 또한 과거시험에 당해서는 서쪽 땅의 글을 빌었으니 4백년 이래 서쪽 사람이 조정을 저버린 일이 있는가?
역사적 성격
ㄱ. 반봉건 무장투쟁: 전과는 달리 뚜렷한 정치적 목적과, 치밀한 계획, 장시간의 준비 등
ㄴ. 일차적 목적: 수탈을 막는데 있었다--평안도에 한정, 농민층을 끌어들일 개혁안 부재
ㄷ. 농민항쟁으로서의 성격: 정주성 전투 때 농민의 적극적 참여--중세체제 붕괴 촉진
4. 1862년 농민항쟁(19세기는 민란의 빈도가 늘고, 무장 투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
항쟁의 배경
1) 농민의 소극적 저항
ㄱ. 농촌 이탈--조세 회피의 목적, 경제적 수탈에서 탈피
ㄴ. 와언(訛言)--수령과 이서를 비판하는 내용--농민의 공감(정약용 목민심서 지문 참조)
ㄷ. 괘서(掛書)--여론 선동, 한문으로 쓰여졌으나 농민 욕구 반영, 장시 중심
* 와언의 실태: 요망스러운 말들이 동쪽에서 부르짖고 서쪽에서 화답하니 이들을 법률에 따라 죽인다면, 백성으로서 살아남을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난리를 일으키려고 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유언비어를 퍼뜨려 백성들의 뜻을 어지럽힐 것이다
2) 농민의 적극적 저항
ㄱ. 격쟁--왕의 행차 때 꽹가리를 쳐서 호소, 햇불시위
ㄴ. 정소-군현이나 감영 비변사에 대한 소장 작성
항쟁의 전개 과정
ㄱ. 1862년 경상도 단성현에서 발발
ㄴ. 진주 농민의 처지: 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토호의 수탈로 진주에서 발생(진주 민란)--유계춘․이계연 등 농민과 사족 이명윤이 주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 확대
ㄷ. 국가의 대응: 회유책(고을 수령 파면, 삼정이정청 설치), 강경책(농민 탄압)--농민군의 봉기가 일시적으로 가라앉았으나 뚜렷한 개혁이 없자 제주도․함경도 등에서 재봉기
* 유계춘의 묘: 진주 농민 항쟁을 지도한 인물
역사적 성격
ㄱ. 소농민 중심의 반봉건 항쟁
ㄴ. 반봉건적인 정치의식: 봉건적 통치제체 부정
ㄷ. 봉기를 통해 얻어낸 구체적 성과: 삼정이정청의 설치
제 3부 근대사회
제10장 개항과 근대 변혁운동
개관
* 척사운동: 개항이전, 이항로․기정진, 개항 반대상소 운동, 1895년 을미의병으로 계승, 봉건체제 유지 목적, 제국주의 반대
* 개화운동: 개항 인정, 봉건체제개혁의 사회개혁운동--갑신개혁, 갑오개혁에 영향--광무개혁, 독립협회운동, 문화계몽 운동으로 계승, 초기에는 중인층이 참여하여 개화파 형성, 점차 양반 관료 급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근대화 운동
* 농민항쟁: 1894년 농민전쟁--영학당 운동, 활빈당 운동--한말의 의병전쟁, 농민층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사회변혁운동, 민중 중심의 반침략운동
1.구미열강의 침략과 대원군의 내정개혁
서구열강의 군사침략과 쇄국정책
○ 서구열강의 침략
1). 병인양요(1866)
(1) 원인: 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프랑스선교사 처형
(2) 경과: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장군이 격퇴--문화재, 보물 소실
* 이양선 출몰상황: 셔먼호사건--평양, 병인․신미양요--강화
*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 외규장각 문서 약탈
2). 신미양요(1871)
(1) 원인: 제네럴 셔어먼호가 대동강을 올라와 통상 요구 --평양민에 의해 소각
(2) 경과: 미국의 강화도 침입--어재연 등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퇴각
*광성보 전투: 신미양요시 조선군 전멸
(3) 결과: 대원군의 척화비 건립
** 미국인 젠킨스와 독일인 오페르트 프랑스 선교사 페론의 남연군(대원군의 아버지) 묘 도굴사건(1868)
왕권강화와 내정개혁
○대원군의 정책--왕권중심의 봉건체제 안정 목적
1) 왕권강화책: 경복궁 중건(원납전, 통행세, 당백전--백성의 원성)
*원납전 영수증: 권필성이라는 자가 원납전 납부했다는 영수증
2) 내정개혁: 호포법실시(군포를 양반에게 부과--양반의 반발), 사창제(환정개혁), 청․일 상품에 관세징수, 상인의 매점행위금지
3) 서원철폐: 청주의 화양동 서원 철폐--양반 반발--대원군의 실각(1673)
* 이필제의 난(1869~1871): 대원군의 봉건체제 강화에 대한 반발, 몰락 양반 출신인 이필제가 주도
2. 개항과 사회경제 변화
민씨정권의 등장과 강화도조약의 체결
1. 강화도조약의 체결
1) 원인: 운양호사건(1875)으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최초의 근대적 조약, 불평등 조약, 부산․원산․인천 개항(치외법권, 무관세)
* 1876년 조일수호조규(중요조항)
제1관: 조선국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청의 간섭 배제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에 재류중 만약 죄를 범하거나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의한다.--치외법권
개항정국과 임오군인 봉기
(1) 임오군인봉기(1882)
ㄱ 원인)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 대우--13개월 만에 받은 월급에 돌과 겨가 섞여있었다
ㄴ 과정) 구식군대의 민씨 일당 공격-- 일본공사관 습격(반일투쟁화)-- 경복궁 점거, 대원군 집정--청의 개입으로 실패(명성황후의 요청)
*임오군인봉기의 전개
서양문물의 유입과 무역구조의 변화
1)무역구조의 변화
ㄱ. 수입품: 70%가 면제품( 청․일본은 영국의 면제품을 들여오고 조선의 곡물과 금을 파는 중계무역--국내 면포수공업자, 면포생산자 몰락)--미면교환체제
ㄴ. 수출품: 쌀․콩․금․소가죽(곡물이 70% 차지--주로 일본으로 수출--국내 쌀값 폭등--방곡령--일본의 항의로 실패)
3. 개화파의 개혁운동
개화사상의 형성과 초기 개화운동
1. 개화사상의 형성
1) 중심인물: 역관 오경석․유홍기 등이 세도가문 출신인 김옥균․박영효․박영교․홍영식․서광범․김윤식 등에게 서구 문물 소개--개화파 형성
2) 성격: 북학파의 중상주의적 사상 적극 수용(**토지문제는 무관심)
2. 개화파의 정치세력 성장--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참여
3. 개화파의 분기
ㄱ. 온건개화파: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동도서기론 고수, 청에대한 사대관계 유지, 청의 양무운동을 모방하여 점진적 부국강병 주장
ㄴ. 급진개화파: 김옥균․서광범․박영효․홍영식--청의 내정간섭 배제, 민씨일파 타도,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아 급진적 개혁 주장
갑신정변(1884)
1. 배경: 김옥균 등이 일본과 연결하여 민씨정권 타도 계획
2. 전개: 우정국 낙성식 이용 민씨일파 축출 정권장악--14개조 정강 발표
* 개화파정권의 14개조 정강: 청에 대한 사대외교 폐지, 입헌군주제 채택, 地租法 개정, 재정기관 호조로 일원화, 惠商公國 폐지,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3. 결과: 청의 공격으로 3일 천하(홍영식 死, 김옥균․박영효․서재필 일본으로 망명)
* 갑신정변의 전개--정변의 발생지 우정국
갑오개혁(1894)--군국기무처 중심 개혁 추진
1. 전개: 1894년 농민전쟁으로 청과 일본군 주둔(텐진조약)--일본이 6월 21일 쿠데타 민씨일파 축출, 청․일전쟁--김홍집의 갑오정권 수립
(1) 제1차 개혁내용: 갑신정변의 정강과 농민군의 폐정개혁안 수용
-- 토지제도 개혁이 없고 농민층보다는 지주의 입장 옹호
(2) 제2차 개혁) 청일전쟁 승리 후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 구성, 군국기무처 폐지--일본인 고문관이 개혁에 간여--홍범 14조 발표
2 결과
(1) 을미사변(1895): 일본이 명성황후 시해,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시행--을미의병 봉기
(2) 아관파천(1896):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갑오정권은 무너지고 개혁 중단
3 성격: 부르조아적 개혁, 자주성 상실,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 군국기무처 그림: 친일 개화파 정권이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기구로서 만듬
4.1894년 농민전쟁-농민전쟁이 전국적으로 확대
농민전쟁의 배경: 정치 부패, 물가 상승, 지역적 산발적인 농민 항쟁이 계속됨
*고종조 농민항쟁: 문경의 이필제의 난
1. 동학의 발생: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도, ‘인내천’사상
**교조신원운동: 공주집회(1892. 10)--삼례집회(1892. 11)--서울집회(1893, 척왜척양)--보은집회--금구집회(전봉준․황하일 등이 주도, 정치적 성격의 집회가 됨)
* 사발통문: 주모자를 알 수 없도록 사발로 그린 원 주위에 전봉준 등 20여 명의 이름이 들어있다.
고부 농민봉기
1. 배경: 쌀 수출로 인한 농민 수탈이 심하였다.
2. 원인: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만석보)--농민에게 수세 수취
3. 경과: 1894년 1월 10일 고부관아 습격--안핵사 이용태의 농민 학살--제1차 전쟁의 원인 제공
* 농민전쟁의 전개: 연대순으로 살펴 볼 것
* 백산창의비
제1차 농민전쟁
1. 원인: 이용태의 만행
2. 경과: 무장에서 봉기(창의대장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김개남)--황토현싸움에 서 관군 격퇴--양호 초토사 홍계훈군 격퇴(황룡촌싸움)
3 결과: 전주성 무혈 입성(농민군의 가장 큰 군사적․정치적 승리)--전국적 봉기
폐정개혁 활동
청․일의 상륙--전주화약(폐정개혁안 실시 약속--지역 집강소 중심 실시)--청일전쟁 발발(일본의 승리)--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제2차 농민전쟁의 원인)
*폐정개혁안: 27개조 개혁안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14개조: 보부상의 폐단 금지, 탐관오리 파면 등
제2차 농민전쟁
1. 원인: 갑오정권은 일본에 농민군 토벌 요구
2. 경과: 1차 2차 공주 싸움,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 패배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 2차 농민전쟁에서 가장 희생이 컸던 우금치 고개에 건립
**민보군: 양반 유생 중심 농민군 습격
3. 의의: 대한제국기 농민항쟁과 1904년 이후 반일의병전쟁으로 계승
** 아시아 3대 농민전쟁: 청의 태평천국혁명, 인도의 세포이농민항쟁, 조선의 1894 농민전쟁
11장 대한제국기 열강의 침탈과 개혁운동
개관 1.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광산채굴권․철도부설권 침탈--의병봉기
2.광무개혁․독립협회활동: 위로부터의 근대적 개혁 추진
3.민중의 반침략․반봉건 투쟁: 독립협회운동, 만민공동회 운동, 동학당․남학당․영학당․활빈당(무장조직)
1. 대한제국의 성립(1897.10~1907)
나라 밖의 정세변화--삼국간섭과 아관파천 뒤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
1) 아관파천 뒤 친러정권 수립
2)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한 반발
ㄱ.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7)
ㄴ. 일본의 대한해협 봉쇄--1898년 러시아와 일본이 ‘로젠-니시협정’을 체결하여 조선에서의 이권을 서로 승인
ㄷ. 미․영․일의 삼국동맹: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주는 대가로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하는 것을 국제적으로 승인
**제1차 영․일동맹(1902년):
제1조: ...대영제국은 주로 청국, 일본은 청국에서 가진 이익에 더하여 한국에서 정치상, 상업상 및 공업상 탁월한 이익을 가지고 있다.
을미의병운동--척사위정사상, 갑오정권과 일제에 대한 항거
1) 배경: 을미사변 후 친일 내각 수립--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실시--양반유생의 봉기(이소응․유인석․이강년 등, 갑오정권의 과거제도 폐지, 신식학교 설치 등은 양반의 기득권 침탈)--아관파천 후 친일정권 붕괴로 을미의병 해산
* 유생 의병장의 활동: 춘천의 이소응, 포천의 최익현, 문경의 이강년, 제천의 유인석
대한제국의 성립
○ 배경: 아관파천(1896) 후 친일파 실각, 친러파 정권 장악(이완용․조병세)--러시아의 침탈에 대한 반대 여론--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 옴--대한제국 선포(연호: 광무, 조선은 완전한 자주국임을 선포)--광무개혁 단행
* 원구단: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곳
* 춘생문사건: 러시아․친러파․미국이 고종을 경복궁에서 미국 공사관으로 옮기려 한 사건--실패
2. 열강의 이권 침탈과 사회 경제적 변화
열강의 이권 침탈(광산․산림 등 지하자원, 교통운수, 통신부분에 집중)
1) 내용
ㄱ. 미국: 운산금광채굴권(조선 최대 금광)
ㄴ. 일본: 경원선․경부선(러일 전쟁 대비)․경인선․경의선 철도 부설권--군사적 목적, 직산금광채굴권
* 열강의 이권침탈
근대적 기업의 등장
1) 종류: 한성은행(1897, 최초의 은행, 1943년에 조흥은행),
3. 대한제국기의 개혁운동
광무개혁--열강에 광산 철도 등 이권 양도, 물가 폭등--민중의 저항--실패--국권상실
1) 방향: 舊本新參과 전제군주권 강화에 역점
* 대한국 국제
제1조: 대한국은 세계 만국의 공인된 바 자주 독립한 제국이니라
제2조: 대한국의 정치는 이전은 오백년 전래하고 이후는 만세 불변할 전제정치이니라
독립협회운동
1) 결성: 1896. 7. 서재필과 개화파와 전․현직 관료들이 결성
2) 활동
ㄱ. 독립문(옛 영은문)․독립관(옛 모화관) 설치
ㄴ. 순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 발간
3) 개혁방향--광무정권에 적극적 참여
ㄱ. 경제적; 지주 중심의 서구식 근대화
ㄴ. 정치적: 입헌군주제와 의회제도--부르조아적 정치개혁
4) 러시아의 내정간섭․이권침탈 후 주도세력의 성격 변화(반러시아)--친미(서재필), 친일(윤치호)세력이 주도, 친정부적 세력은 독립협회 탈퇴
ㄱ. 만민공동회: 광무정권의 비자주적 외교노선 비판, 반러시아 운동--반면 독립협회는 영국․미국․일본의 이권 침탈은 반대하지 않음
ㄴ. 자주국방의 중요성 부인(군대는 동학당․의병 등 반란세력을 진압할 병력만 필요하다고 인식)
5) 결과 및 성격
ㄱ. 결과: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 실시한다는 모함으로 해산
ㄴ. 성격: 부르조아적 개혁운동, 민중세력을 불신하여 자주독립․근대적 개혁에 이르지 못함
* 독립협회의 활동지역
만민공동회 운동(1898년 3월): 독립협회와 일반민이 주관한 정치 토론의 장
1) 참여계층: 전 계층 참여
2) 독립협회와의 차이점: 반러시아 운동에 머물지 않고 영국․미국․일본 등도 경제 침략자로 인식--주요계층은 소상품 생산자나 상인으로 제국주의 자본의 침투에 위협을 받음
4. 민중의 저항
농민들의 투쟁
ㄱ. 제주도 농민항쟁(1898~1901): 프랑스 선교사들의 강압적인 선교활동, 왕실의 사적 수탈, 일본 어선의 침탈 등에 저항
ㄴ. 동학당: 황해도 소백산맥 일대에서 조직적으로 활동, 1894년 농민전쟁에서 살아남은 세력으로 계조직이나 기독교 등의 종교조직을 이용하여 활동
ㄷ. 영학당: 전라북도 흥덕군에서 봉기, 지주와 왕실과 벌어진 토지소유 분쟁에 저항, 동학당과 같음
** 농민무장집단은 후에 활빈당으로 흡수
* 삼의사비: 1901년 이재수의 난에서 활동했던 세 장수를 기리고자 1961년 제주도 대정읍에 건립
활빈당운동: 반봉건․반침략 운동
--단순한 의적활동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변화--대한사민논설 13조목 실천요구(방곡령 실시, 경제이권 침탈 반대)--을사조약 이후 반일 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 대한사민논설 13조목
5. 시급히 방곡령을 실시하고 구민법을 채용할 것
6.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금할 것
8. 금광의 채굴을 금지하고 인민의 방책을 꾀할 것
13. 다른 나라에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12장. 을사조약의 체결과 국권회복운동(1905~1910)
개관 1. 을사조약(1905,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한일합병(1910)
2. 문화계몽운동(국권회복목적)--실력양성운동(교육․언론․출판․종교)--친일사상이 됨
3. 항일의병전쟁--독립군 활동
1.보호조약의 체결과 민족의 분노
러․일전쟁과 일본의 군사적 침탈
1) 일본의 침탈
(1) 한․일의정서(1904): 군사침략상 필요한 곳을 마음대로 사용(한국임시파견대--조선주차군)
(2) 1904년 8월: 제1차 한․일 협약(본격적인 내정간섭)--친일미국인 스티븐슨이 외교고문
* 처형당하는 군용철도 파괴자
을사조약의 체결
1) 가쓰라-테프트 밀약(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이 체결)
ㄱ. 미국의 필리핀 지배 확인
ㄴ. 미국․일본․독일의 동맹관계 확인
ㄷ. 일본의 조선지배 승인
2) 제2차 영․일동맹(1905년 8월 12일): 조선․인도의 상호지배 승인
3) 포츠머스조약: 러․일전쟁 결과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가 일본의 조선지배 승인
4) 을사조약의 체결(1905년 11월): 이완용․이지용․이근택․ 이하영․ 권중현 등을 앞세워 외교권 박탈, 통감정치 실시
* 을사조약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맺지 않을 것을 서로 약속함--외교권 박탈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한국 항제 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통감 정치
‘이날을 목놓아 우노라’--是日也放聲大哭(1905년 11월 18일)
○ 장지연이 황성신문에서 “ 오백년 종사를 타인에게 바치고 이천만 생명을 타인의 노예로 만든 저 개돼지로 둔갑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
* 박은식은 <<대한매일신보>> 사설을 통해 조약 체결의 불법 폭로
2. 통감정치와 민족경제의 몰락(1905~1910년 한일합병 전까지)
통감정치하의 식민지화 정책--식민지 경영비 마련--민족경제의 몰락
ㄱ. 화폐정리사업: 일본화폐만 통용
ㄴ. 재정정리사업: 세금부과 대상 확충--호구조사․토지조사․연초세․주세
*전기회사의 독점을 풍자한 신문만평: 대한 민보
* 공업전습소: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필요한 하급직공을 양성할 목적으로 1908년 설립
3. 문화계몽운동: 일제의 침략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였지만 대중에게 민족의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데 기여, 일제는 1907년 이후 보안법, 신문법, 사립학교령 등으로 탄압
실력양성을 위한 각종 계몽활동--후에는 친일 활동
* 대한매일신보 기자들: 계몽운동에 가장 앞장섰으며 신채호 등 필진이 반일적인 글을 많이 실었다.
국채보상운동(1907)
신민회
1) 결성: 1907년 2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단체(회장: 윤치호․부회장: 안창호)
2) 활동
ㄱ. 대성학교; 평양, 민족운동의 간부 양성
ㄴ. 자기(磁器)회사: 평양, 신민회 재원 확보
ㄷ. 태극서관: 출판물 보급, 사업연락 담당
4) 성격변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으로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을 거부하고 독립전쟁론 채택
5) 해체: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체(테라우치총독 암살음모 조작)
4. 항일의병전쟁
평민의병장의 등장과 민중들의 참여
--을사조약 체결 후 의병 투쟁은 각계 각층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평민 출신 신돌석이 강원도, 경북지역, 동해안 일대에서 활약)
전국으로 번지는 의병전쟁--평민, 몰락양반, 가난한 유생들이 주도
호남의병과 ‘남한대토벌’
1) 호남의병--국권회복 강조,
ㄱ. 대중적 기반이 튼튼하고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극심한 지역
ㄴ. 신분차별이 없었다--강력한 의병활동으로 일제의 남한대토벌 작전의 원인 제공
ㄷ. 전남 장성: 기삼연, 고광순,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머슴출신)--호남의병 때문에 일제의 한일병합이 늦어지자 일제는 남한 대토벌 작전--1915년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의 체포로 항일의병전쟁도 막을 내림
*호남지역 의병장들
2) 남한대토벌작전 이후--의병들은 만주 연해주로 이주--독립군 항쟁으로 성격 전환
** 을사조약에서 한일합병까지 5년이 경과한 것은 의병항쟁이 원인
13장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개관 ○ 무단통치기: 1910년대--조선을 식민지 수탈체제로 재편(토지조사사업, 회사령)
○ 3․1운동: 부르조아 민족운동--일제는 무단통치를 후퇴, 문화정치 실시
1. 일제의 무단통치와 식민지체제
통치조직의 개편
:경술국치(한일합병조약, 1910년 8월 29일) 후 조선총독부와 중추원(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친일고관 임명) 설치
헌병경찰제--무단통치의 상징
*범죄즉결례, 경찰범처벌규칙 제정--즉결 처분, 조선사회 전반에 대한 감시와 사찰 시행
식민지 동화정책
1) 계몽운동가 탄압: 안악사건과 105인사건(조선총독암살사건) 조작
2) 언론탄압: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폐간
** 매일신보․경성일보: 식민지 지배 미화, 어용신문
3) 조선교육령 공포(1911): 실업교육에 중점(고등교육 기회 박탈)--일본어, 일본역사 등 교육
* 1910년대 학교교육: 교사들도 경찰관과 같은 제복 착용
2. 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와 농민층의 몰락
토지조사사업(1912~1918)
○ 토지조사령 공포(1912): 식민지 경영비 마련, 신고되지 않은 토지를 총독부 소유화--동양척식주식회사에 매각
회사령과 민족자본의 몰락: 조선은 원료 공급지화(주로 쌀 수출), 일본상품 소비처
○ 회사령: 민족자본 발전 억제, 회사 설립․해산․폐쇄는 총독의 명령에 따름
○ 경제자원의 일본 독점
ㄱ. 삼림령 공포(1911)--삼림 60%를 국유림화
ㄴ. 조선어업령(1911)--황금어장 대부분을 일본 어부가 소유
농민층의 몰락과 이농
ㄱ. 토지조사사업으로 소작농 증가--고리대 사용, 노동자, 화전민, 만주․연해주로 이주
ㄴ. 회사령으로 상인 몰락
ㄷ. 조선인 노동자 수 증가: 광산․부두․공장 노동자화
3. 무단통치하의 민족운동
나라 안의 비밀결사운동
○ 독립군양성 결사
: 대한광복회(1915): 대구와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 친일부호 처단, 1918년 해체
나라 밖에서의 독립운동: 경술국치 후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활동
○ 서간도지역 항일운동: 서간도로 건너간 신민회 회원들이 결성
ㄱ. 유화현 삼원보에서 경학사․부민단 조직
ㄴ. 신흥강습소 설립(뒤의 신흥무관학교): 독립군 간부 양성
*서간도 유화현 삼원보: 경학사, 신흥무관학교 등 기지건설운동이 일어났던 곳
○ 상해에서의 항일운동
ㄱ. 신한청년단: 동제사의 인사들과 이상설․박은식․신규식 등이 조직--1917년 ‘대동단결선언’ 발표(황제의 주권 포기, 국민주권 공화주의 표방)
○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운동
ㄱ. 권업회(1911, 의병운동계열+계몽운동계열): 대한광복군 정부 조직(이상설: 대통령, 이동휘: 부통령)
○미주지역과 기타지역 항일단체
ㄱ. 대한인국민회(1909, 안창호: 회장, 박용만: 부회장, 이승만 등이 중심):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서․북간도와 연해주 독립운동 지원
ㄴ. 조선국민군단(1911, 박용만): 군사훈련 실시
ㄷ. 숭무학교: 멕시코, 독립군 양성
*의병장 채응언(1915): 마지막 의병장
4. 1919년 3․1운동
3․1운동 전야
○ 파리강화회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시(전승국들이 의논하여 패전국의 식민지를 국제 연맹이 위임 통치하자는 내용--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은 해당이 안됨)
○ 2․8 독립선언: 조선청년독립단(동경유학생의 비밀결사)이 YMCA에서 ‘독립선언서’발표, 조선에서는 1919년 1월부터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 대표들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
3․1운동의 시작
○ 민족대표 33인: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낭독 후 자수(미온적 태도)
○ 탑골공원: 학생주도--전국적으로 확산
도시에서 농촌으로, 만세시위의 확대
○ 시위가 점차 조직화 폭력성을 띠고 농민․노동자 대중에게 퍼져 나감
* 3․1운동의 시기별 시위횟수와 투쟁형태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ㄱ. 전 민족적 항일 운동(소수 친일파․친일지주․매판자본가 제외)
ㄴ. 일제의 무단정치 후퇴--문화정치 시행
ㄷ. 전승국 식민지 최초의 반제 민족운동
ㄹ. 민족대표의 소극적 태도(강대국에 지지 호소)
ㅁ.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민주공화제에 입각)
ㅂ. 민족적 계급적 각성과 자각이 촉진되어 민족해방운동의 저변 확대(가장 커다란 의의)
제14장 일제의 문화정치와 민족해방운동의 발전(1920년대, 제1차 세계대전)
개관○3․1운동으로 문화정치: 민족분열책동, 민중에 대한 탄압과 수탈의 기만책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회사령 철폐: 일본자본의 조선 진출, 식민지자본주의의 기초
○민족개량주의(일제와 타협)와 비타협의 민족주의 세력으로 분화(만주 항일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사회주의 사상이 민족해방운동의 이념화--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
○신간회 결성(1927): 세민족주의 세력+사회주의 세력의 민족 협동 전선
1. ‘문화정치’와 민족분열책동
문화정치의 본질-기만책
1)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경찰업무와 군대업무 분리, 경찰관서 5배, 경찰수 4배 증가
2) 조선인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동아일보․조선일보 창간, 기사의 사전검열, 출판물의 허가제.
*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문화정치의 산물, 1920년 3월과 4월에 창간
민족분열책동--민족의 사대성, 당파성 강조
--친일세력 육성(대지주․자본가․나약한 지식인 등 상층계급): 실력양성론 수용, 문화정치에 적극적 동조
2. 산미증식계획과 식민지 자본주의의 이식
산미증식계획: 일본의 부족한 쌀 확보 목적--지주제만을 강화시켰다
* 전북 익산 옥구지역 수리조합 저수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
* 쌀의 생산과 수출․소비량, 319: 조선인의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다.
회사령철폐와 식민지 자본주의의 이식: 일본의 경제 불황 극복이 목적
○ 회사령 철폐(1920년 4월): 주로 일본의 중소자본(면방직․식료품 등) 유입, 대자본(광업 등 전략 물자 생산부분에만 투자)
3. 민족주의운동의 분화와 전개
민족개량주의 운동: 경제적 실력 양성, 사상적 민족성개조, 정치적 자치권 획득--일제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경제적 실력 육성
○ 김성수: 동아일보 계열
○ 이광수: ㄱ. 민족개조론을 최린이 출판하는 잡지 「개벽」에 실음--수양동우회 결성 주장
ㄴ. 1924년 동아일보에 ‘민족적 경륜’기고--독립운동을 자치운동으로 전환 주장
*개벽 잡지 창간호: 1922년 5월호에 민족개조론을 실어 일제지배를 인정
○ 실력양성운동--일제와 타협
ㄱ. 물산장려운동: 국산품 애용 차원--민족산업 생산력이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상인 자본가의 이익만 남겨줌, 친일파들이 참여(박영효, 유성준 등)
ㄴ. 민립대학 설립운동(고등교육기관): 대중교육이 시급하다는 입장에서 비판 받음
임시정부의 외교독립운동
○ 위치선정: 외교활동론이 받아들여져 상해로 결정
○ 수립: 1919년 헌법 공표(공화주의․삼권분립), 11월 임시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
○ 활동
ㄱ. 연통제: 자금과 국내정보 수집, 간도와의 연락 업무 담당
ㄴ. 독립신문 발간
ㄷ. 외교선전활동에 중점: 파리위원부․구미위원부 설치--성과가 없었다
**국민대표회의: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과 독립운동의 방향전환을 위해 1923년 좌․우익이 참여
*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안창호, 김구, 여운형
만주에서의 독립군운동--압록강․두만강 일대 중심
○ 조직
ㄱ. 북간도: 김좌진 북로군정서, 홍범도 대한독립군, 대한정의군정사, 광복단 등
ㄴ. 서간도: 이청천의 서로군정서(정의부), 조맹선․박장호․백삼규 등의 대한독립단
○ 봉오동전투: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혜산진 갑산 공격--일본군대를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격퇴--일본은 마적을 매수해 일본 영사관을 방화하게 해놓고(1920년 혼춘사건) 이를 빌미로 만주 출병
* 대한독립군의 봉오동 전적지
○ 청산리전투: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일본군 연대장 이하 1,200명 사살--일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연해주의 자유시로 이전(자유시참변: 한인부대사이의 지휘권 싸움에 연루되어 수백 명이 죽고 8,9명이 赤軍에 포로)
* 1920년대 해외독립운동
의열단의 테러활동: 1919년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결성
○ 목적: 친일관료․친일파 암살․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식산은행․경찰서 파괴 등의 테러
○ 강령: 1923년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기․폭동으로써 강도 일제의 통치를 타파하고....)을 채택. 실력양성론, 외교독립론, 자치론 비판
*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 활동
ㄱ.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1923)
ㄴ.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폭탄 투척(1926)
○ 활동방향의 변화: 폭력운동에 한계
: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임: 1927년 장개석의 반공․반소 쿠테타로 의열단도 탄압을 받음
4. 사회주의운동의 등장과 민중들의 저항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조선공산당
○ 조선공산당(1925년, 4월 17일 건설)의 활동
* 전조선노농총동맹이 창립(1924년): 전국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지도
1).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6․10만세 시위 준비(1926년 순종 인산일)
2).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신간회 조직
** 12월 테제: 코민테른은 1928년 지식인 중심의 조선공산당 해체, 노동자․농민 중심의 공산당 조직 지시
* 소작쟁의와 노동쟁의 발생건수:330, 소작쟁의가 1930년대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
노동자조직의 결성과 노동운동: 사회주의 영향, 파업투쟁
○ 원산총파업(1929)
ㄱ. 원인: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 있던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 고마다의 조선노동자 구타
농민운동조직의 결성과 활동--1927년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리되면서 활성화
** 전남 무안군 암태도소작쟁의(1923년): 상대로 소작료 인하 투쟁
** 산미증식계획에 반발한 농민운동: 수리조합 반대운동
* 소작쟁의와 노동쟁의 발생건수: 소작쟁의가 1926년 이후 급증
신간회운동:최초의 반일민족통일전선 운동(민족주의+사회주의)
○ 결성: 6․10만세 운동을 계기로 1927년 2월 창립
* 신간회 창립대회 모습: 1927년 2월 15일 YMCA회관에서 결성
ㄱ. 강령: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1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1.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ㄴ. 일제와의 비타협을 원칙(이상재: 회장, 홍명희: 부회장)--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단체
○ 영향: 여성의 통일적 운동단체 근우회 조직에 영향(사회주의+김활란 등 기독교계)
○ 신간회 해소
ㄱ. 원인: 1930년 집행부에 타협적 합법운동 강조하는 인물 참가, 자치론과 제휴 주장
ㄴ. 과정: 1930년 9월 프로핀테른의 ‘9월테제’--신간회를 민족개량주의 단체로 규정
*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3.1운동과 같은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함
제15장 일제의 전시파쇼체제와 항일무장투쟁
개관: ○ 1929년 일본의 경제공황--‘대동아공영’을 표어로 침략전쟁--조선을 병참기지화
○ 1930년대 민중의 항일운동--만주의 동북항일연군, 화북지방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 중경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1. 일제의 전시체제와 식민지수탈 정책
전시체제의 강화
○ 일본의 경제공황: 자본투자와 상품시장 확보 위한 침략 전쟁--‘대동아공영’(1931년 만주침략, 1937년 중일전쟁)
*조선사상범예방구금규칙과 시국검찰에 관한 건: 항일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예방구금제도를 규정한 탄압법령
황국신민화 정책--민족말살정책
○ 황국신민서사: “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황국신민학교(초등학교) 설립
○ 신사참배: 천황족속의 귀신을 모시는 곳인 신사에 참배
○ 조선어 사용금지: 1941년 학교의 조선어 학습시간 완전 폐지
○ 1940년 조선일보․동아일보 등 한글 사용 신문과 잡지 폐간
○ 창씨개명
* 창씨개명과 이광수: 이광수의 창씨개명 결의를 보도한 기사
농공병진정책과 식민지공업화
○ 침략전쟁에 필요한 농공병진책: 병참기지화(군수산업강화)
ㄱ. 농촌진흥운동: 농민수탈․농민통제
*가마니 짜기: 농촌진흥운동 일환
ㄴ. 南綿北洋: 일본인 방직자본가 보호
ㄷ. 공업부문 통제: 식량․의복․병기․탄약 등 군수산업에 집중(1937년 중일전쟁 후 1938년 공업생산액이 농업생산액 보다 많아짐 )
* 규슈탄광의 벽낙서: 강제 징용의 실상
전시수탈과 민중생활
○ 1944년 징병제 실시----20만명 이상이 끌려감
○ 1944년 8월 여자정신대근무령(종군위안부)--10여 만명으로 추산, (345쪽, 학살당한 종군위안부)
○ 자원수탈: 1939년 공출제--생산량의 40~60%를 공출
2. 민족개량주의운동의 확산 친일파의 활동
민족개량주의운동의 확산
1). 최린의 천도교 신파: 조선농민사 조직--농촌개량운동(반면 일제의 억압 수탈이나 지주들의 착취에 대해서는 침묵)
2). 동아일보: 학생 브나로드운동--방학을 이용해 농민상대 문맹퇴치 운동(자력갱생 주장, 이는 일제의 주장과 동일)
친일파의 활동(1937년 중일전쟁 무렵)
ㄱ. 언론: 1938년 일제의 조선지원병 명령--조선일보․동아일보 일제히 환영
ㄴ. 실업: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비행기 등 무기 헌납)
ㄷ. 교육: 덕성여자실업학교장 송금선, 이화여전교장 김활란--침략전쟁 옹호․협력 강연회
ㄹ. 문인: 최남선․이광수․주요한․서정주․모윤숙․노천명--강제 징용 재촉
** 친일단체: 국민정신총동원 연맹, 조선방공협회, 녹기연맹, 조선문인보국회, 대의단, 임전보국단, 애국부인회(금차봉납도: 총독에게 금비녀 상납하는 그림)
3. 나라 안의 민족해방운동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사회주의자들에 의하여 결성(서울 상해파, 엠엘파 등)
○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 울밀대에서 농성하는 여성노동자: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이 울밀대에서 농성
국학운동과 건국동맹
○ 국학운동: 1931년 조선어학회 결성 ** 조선어학회 사건(1942)
○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의 토대
ㄱ. 결성: 1944년 8월 여운형
4. 항일무장투쟁
재만조선인의 항일무장투쟁
○ 만주지역
ㄱ. 이청천의 한국독립군
ㄴ. 양세봉의 조선혁명군
○ 1933년 항일유격대는 만주지역의 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으로 통일
ㄱ. 변천: 1935년 8월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조국광복회 조직
ㄴ. 활동: 국내진공작전--1937년 6월 보천보전투--일제의 유격대토벌(혜산진 사건-조국광복회 회원 739명 검거))
** 민생단: 일제의 스파이 단체
* 항일무장세력의 활동지역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
○ 1932년 김원봉의 의열단․김두봉․이동녕의 한국 독립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이 연합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 결성--1935년 각 당을 해체하고 단일정당인 민족혁명당 조직
○ 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조선혁명자동맹과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이 연맹이 중국관내에서 처음으로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결성(1938)
*조선의용대: 1939년 중국 광서 장족 자치구 계림에서 찍은 조선의용대 창립 모습
○ 조선의용대+김두봉 등이 연합하여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조직 확대 개편(1941)--조선의용대가 독립동맹의 군사력인 조선의용군으로 개명--후에 북한의 인민군으로 편입
중경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 윤봉길의사 의거: 1932년 4월, 상해 홍구공원, 임시정부의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소속
○ 1940년 임시정부는 중경으로 이주: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이 한국독립당으로 합동하고 ‘건국강령’ 발표--조소앙의 ‘삼균주의’ 채택(개인간-사회계급타파,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민주주의 실시 및 경제적 균등)
○ 한국광복군: 임시정부에 의해 1940년 9월 이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중국 중경에서 결성하였으나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았다. 1941년 12월 일본에 정식 선전포고
제4부 현대사회
제16장 해방과 민족의 분단
개관: 1945년 8월 15일 불완전한 해방--11월 모스크바삼상회의 발표로 좌․우 세력으로 분열--1948년 5․10선거로 분단 정부 수립(제주 4․3봉기 발생)
1. 해방과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 결성: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 결성
○ 해체: 9월 6일 건준을 해체하고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으로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선포
* 출감하는 독립운동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
2. 미․소의 한반도 점령과 정치세력의 동향
미군정의 정책: 1945년 9월 8일 군정실시 선포
○ 정책: 우리민족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육성에만 몰두
ㄱ. 행정을 위해 친일관료 등장, 친일경찰을 군정경찰로 충원
* 임정귀국: 임시정부 요인의 개인자격 귀국
각 정치세력의 활동
○ 우익세력
ㄱ. 송진우․김성수: 한국민주당(한민당)결성
ㄴ. 이승만: 좌․우익 정치세력을 모으기 위해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후에 좌익 비판
○ 김구 등 임정세력: 한국독립당(한독당) 결성--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
○ 중도세력: 안재홍․김규식 등, 안재홍은 국민당 결성 1946년 중반 좌우합작운동 주도--남한단정반대
* 평남건준위원장: 조만식
소련군의 점령정책과 북조선 분국의 결성
○ 1945년 10월 10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결성(김일성 중심)--1946년 북조선노동당으로 개편(북로당)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와 토지개혁
ㄱ. 결성: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결성(위원장: 김일성)
ㄴ. 정강: 일제 잔재의 청산, 중요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의 실시, 8시간 노동제 등
ㄷ. 활동: 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배--농민의지지, 대중적 권력기반 강화--토지 개혁에 반발한 지주와 농민들은 남하), 남녀평등권에 대한 법률, 8시간 노동 규정
3.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정치적 분열과 대립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반응
○ 모스크바 삼상회의: 1945년 12월 27일 , 미․영․소 외상회의
ㄱ. 결정내용: 미․영․소․중 4개국이 5년 이내의 기한으로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임시정부 수립 미․소공동위원회 설치 운영
ㄴ. 반응--반탁: 김구의 임시정부 계열,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세력
--찬탁: 좌익세력, 1946년 2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을 중심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 협의 대상 문제를 놓고 마찰 결렬
○ 소련: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 단체와는 협의 불가
○ 미국: 소련의 입장 반대, 모든정치 세력과 협의
** 1946년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 주장: 좌익 한독당 등 모두 반대
좌우합작운동의 전개--큰 성과는 없었음,375쪽
○ 전개: 미군정의 지지하에 여운형․김규식․ 안재홍 중심으로 전개
○ 입장: 좌익(민전)--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친일파 처단, 정권을 군정에서 인민위원회로 넘길 것
우익: 신탁통치에 유보적인 입장을 담은 합작 8원칙 제시
9월총파업과 10월봉기(1946)--미군정의 실정에 대한 불만의 폭발
○ 9월총파업
1). 원인: 공업생산감소로 인한 실업자수 증가(전체 실업자수 110만명)
미군정의 쌀 배급제, 미곡공출제 실시
2). 결과: 10월 1일 대구 봉기--11월 진압, 좌익세력은 불법화되어 지하로 숨어들어 남조선 노동당 결성, 우익은 정치적 주도권 장악
4. 단정수립과 민족의 분단
단정수립정책과 반대운동
○ 트루먼독트린: 1947년 3월 대소봉쇄, 냉전시대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유엔은 1947년 11월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 결정(선거 감시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파견)--북한의 반대로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 실시 결정
반대: 김구의 한독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남로당
찬성: 이승만과 한민당 등 우익세력
** 남로당․전평: 1948년 2월 7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하자 단선 단정 반대․미소양국 군대 철수 등 2․7 투쟁
제주 4․3 봉기와 5․10 선거(1948)
○ 제주 4․3 봉기: 미군철수․단선반대․애국자 석방 주장--실패(총선거에서 제외)
* 해방공간의 중요사건(379쪽): 제주4․3사건, 여수․순천 사건, 대구 10월 항쟁, 부산철도노동자 파업
* 김구, 김규식 의 남북연석회의(1948년 4월 19일)
제17장 이승만 정권과 4월 혁명
개관: 6․25 전쟁--이승만 독재체제 강화의 계기, 반공이 국시
3․15 부정선거--4․19 혁명으로 발전
1. 1950년 한국전쟁
전쟁의 배경
ㄱ. 1949년 애치슨성명: 미군철수(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 제외), 중국 소련 분리
ㄴ.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 이승만을 위협하며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주장하는 소장파의원 제거
ㄷ. 김구 암살: 1949년 6월
중공군의 참전과 휴전 협정(1953. 7. 27)--반공주의의 강화
○ 중공군의 참전: 2차 대전 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최초의 전쟁
○ 소련유엔대표 말리크의 제의로 휴전
ㄱ. 참가국: 미국․중국․북한(한국은 작전권이 없어 참여하지 못함)
ㄴ. 휴전선: 미국--접촉선, 북한--3․8 도선(미국의 주장 채택)
ㄷ. 포로문제: 북한--모든 포로 본국 송환, 미국--자유의사에 의하여 결정
**이승만의 전격적인 반공포로 2만 5천 석방(1953년 6월)--1953년 7월 27일 정전협상 체결
*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전쟁의 비도덕성을 상징
2. 이승만 정권의 독재강화
반민특위의 설치와 와해
○ 구성: 1948년 8월 5일 김웅진 의원의 “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반민법) 특별기초위원회”설치에 관한 긴급 동의
○ 활동: 박흥식 김연수 최남선 등 체포
○ 탄압: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적이던 소장파위원 구속, 반민특위 특경대원 연행 해산
*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1949년)
제1조: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
개헌과 독재체제의 강화
○ 이승만 자유당 조직--1952년 발췌개헌안(390쪽,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강제 통과--2대 당선
○ 1954년 사사오입개헌사건--대통령3선금지조항 철폐
3. 농지개혁과 원조경제
원조경제
○ 미국원조이유: 한반도 공산화를 막고 자본주의 경제체제 유지
○ 원조 물품: 소비재산업의 원료가 대부분: 삼백공업(섬유, 제당, 제분)이 1950년대 공업 주도--국내의 밀과 면화생산 도태
○ 원조 물품 판매 대금은 미국의 무기 구입 비용으로 지출(代充자금)
○ 결과: 경제사정 해결, 자립적 민족경제 형성에 방해, 경제체제가 미국에 종속
귀속재산의 불하: 1950년대 독점 자본의 성장 계기
○ 실제수혜자: 일제기 회사의 사무직 이상 직원, 회사의 소액주주, 미군정의 관리 등--특혜( 원조물자 독점배당, 세금인하, 금융융자)
4. 4월 혁명
경제위기의 심화와 3․15 부정선거
○ 1957년 무상원조가 아닌 유상차관식 원조--성장률 둔화(2.5%)--기업체 도산--실업률 급증--노동자 저항--1958년 이승만 정권은 신국가보안법,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제에서 임명제, 정부 비판하는 경향신문 등을 폐간
○ 1960년 4대 대통령선거: 3․15부정선거--4할 사전투표, 3인조 5인조 투표--마산시위--서울에서 4월 19일 학생이 주도 세력
반독재 투쟁 (4.19혁명)
○ 4월 19일: 경찰의 난사로 ‘피의 화요일’--초등학생까지 참가--4월 27일 이승만 하야
과도정부와 장면 정권
○ 허정의 과도정부: 6월 15일 내각제 개헌안 통과, 7월 29일 총선으로 민주당 집권(4대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제2공화국)
제18장. 박정희정권과 산업근대화(1960, 1970년대)
개관: 5․16 군사쿠데타
경제개발정책--빈부의 격차
반독재 민주화운동--유신체제 성립
1. 5․16 군사쿠데타와 박정희의 권력강화
5․16 군사쿠데타와 제3공화국의 성립
○ 1961년 5월 16일 쿠데타 발생--1963년 박정희 5대 대통령 당선--제3공화국 군사정부 수립
*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중앙정부부 조직--민주공화당 조직(공화당--4대 의혹사건: 새나라 자동차사건, 빠찡코사건, 증권파동 145배, 워커힐사건))
* 삼분폭리사건: 재벌들이 밀가루, 설탕, 시멘트 값을 몇 십 배 올려 엄청난 이익을 올린 것을 눈감아 주는 대신 정치자금 모금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파병
○ 미국에 의해 한 미 일 삼각안보체제의 구축--한일국교정상화 회담(1965년 6월 22일)
* 굴욕외교반대시위
○ 베트남파병: 한국군장비의 현대화에 필요한 기술과 차관 제공--브라운각서
*월남파병
3선개헌 파동
1967년 박정희 6대 대통령 당선
1969년 삼선개헌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2. 경제개발정책
제 1․2차 경제개발
○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 자립경제의 구축
** 1962년 통화개혁: 화폐단위 10분의 1로 절하, 예금동결--경제활동 위축
○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1971): 산업구조근대화, 자립경제확립촉진
○ 196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가입 추진--외자 도입에 노력
○ 결과: 외국자본에 의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실적
수출주도정책
3. 유신체제와 경제구조의 재편
유신체제의 등장
○ 국외의 상황: 닉슨독트린(1969)--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소련 견제, 긴장완화 정책
○ 국내의 상황: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 불황
ㄱ. 1970-1972: 2만 여명의 미군 철수
ㄴ. 1971: 남북이산가족 찾기 운동
ㄷ. 1972: 남북적십자 회담, 7․4남북공동성명(412쪽, 자주․평화․민족대단결)
10월유신
ㄱ. 1971. 12. 6: 비상사태 선언
ㄴ. 1971. 12. 27: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통과--집회․시위․노동자의 단체행동권 금지, 대통령은 헌법기능 정지 권력 보유
ㄷ. 1972. 10. 17: 비상계엄 선포--국회해산, 정당활동 금지--10월유신 선포
ㄹ. 1972. 11. 21: 유신헌법통과
ㅁ. 1973. 6. 23 선언: 남북한 유엔가입 주장(1민족 2국가 체제), 북한은 1민족 1국가를 지향하는 고려연방제 통일 방안 주장
유신체제의 구조와 억압통치
○ 유신헌법(12. 27--제4공화국)
ㄱ.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선거(임기 6년, 8대 대통령 선거부터)
ㄴ. 중임제한 규정 폐지
ㄷ.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 대통령은 국회해산권, 국회는 대통령 탄핵 불가
ㄹ. 대법관을 대통령이 임명--사법부 행정부에 종속
○ 억압통치
ㄱ. 긴급조치: 국회의 승인 없이 발동, 사법부의 심사대상에서 제외
** 1호: 1974. 1. 8--헌법개정 논의 금지. 비상군법회의 설치
** 9호: 1975--유신헌법 비방 금지,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ㄴ. 국민동원체제: 국민교육헌장, 학도호국단, 새마을운동
8․3조치와 중화학공업의 성장
○ 과정
ㄱ. 1970 수출자유지역설치법 제정(1971년 마산, 1973년 이리 선정): 외국자본 투자 유치
ㄴ. 1972. 8. 3조치: 기업의 대출금을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결정, 이자 1.35%--특혜금융
재벌의 성장과 경제 불황
○ 재벌의 성장--중화학공업의 개발은 대규모의 자본과 설비 필요--현대․ 삼성․럭키․대우
○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중동건설 붐으로 타개
○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세계경제의 침체--한국경제의 불안
4. 민주화운동과 유신체제의 붕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 노동운동: 1970. 11. 13--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 분신(근로기준법의 고수 주장)
○ 농민운동: 정부의 공업화 정책을 뒷받침하려는 저곡가 정책으로 인하여 농촌인구 감소, 1972년 조직된 카톨릭농민회 결성으로 활성, ** 정부의 농촌근대화 운동: 새마을 운동
*1960-1970년대 농가인구의 추세
학생층과 재야세력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
ㄱ. 한일회담 반대 시위(1965)
ㄴ. 3선개헌 반대(1969)
ㄷ. 전국민주청년학생운동연합(민청학련, 1974)--학생운동의 전국적 조직
ㄹ. 김지하의 「5적」발표--사회문제 비판
ㅁ. 언론자유 수호운동: 1971. 4월 동아일보 등 14개 언론기관 중심
ㅂ. 사법파동: 1971. 7--정부의 사법부 간섭에 항의 151명 법관 사표 제출
* 동아일보의 백지광고 1974년 12월: 동아일보의 유신반대에 정부는 광고 해약이라는 보복조치 단행
부마항쟁과 유신체제의 붕괴
ㄱ.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 32.8%, 공화당 31.7%
ㄴ. 1979. 8: YH사건 발생--김영삼 당 총재직 의원직 박탈
ㄷ. 1979. 10. 16: 부마항쟁 발생
ㄹ. 1979. 10. 26: 박정희 시해사건 발생--유신체제 종말
제19장 국제질서의 재편과 민주통일의 대장정
○ 1996년 9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 경제고도성장: 환경오염, 빈부격차, 지역이기주의 등 사회문제 발생
○ 1987: 6월 민주항쟁--5공화국의 독재 체제 종식
○ 1993: 김영삼 정부의 등장
1. 광주민중향쟁과 신군부의 5․6공화국
‘서울의 봄’
○ 1979. 12. 12쿠데타--신군부 권력 장악(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광주민중항쟁
○ 5․18 광주민중항쟁: 광주와 전남은 경제개발지역에서 소외된 지역, 김대중 탄압이 요인
제 5․6 공화국의 등장
○ 제 5공화국: 1981. 2. 25 대통령선거인단 간선으로 전두환 대통령 선출
1987: 4. 13 호헌 조치--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안 수용
○ 제 6공화국: 노태우 정권(1987. 12. 16 대통령 선거)
1) 북방정책추진: 사회주의권과 수교, 헝가리(1988),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소련(1990), 중국(1992)
2) 1989년 ‘7․7선언’:북한과의 관계개선
30. 1990. 9월: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2. 세계경제체제의 재편과 독점자본의 강화
세계경제의 변화와 우르과이라운드
○ 세계경제의 3극 집중: 미국(북미) EC(유럽) 일본(아시아)
○ 1986. 9: 우르과이라운드--다자간 무역협상 개시를 위한 각료 선언--선진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보호무역주의와 지역주의 강화, 후진국 개방 위해 압박
‘3저호황’과 개방화
3저호황: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1986-1988)--1989년 3저호황이 사라지면서 경제침체--외국인 직접투자 확대, 시장개방(농수산물 수입자유화 전면화)
*UR재협상 쟁취와 국회비준거부와 농정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431쪽): 1994년 2월
3. 사회민주화의 진전과 민중운동의 새 국면
민중운동의 발전과 민주화의 진전--6월 항쟁으로 노동운동 확산
○ 민주노조 건설
ㄱ. 1989: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ㄴ. 1990: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결성
** 1985: 미 문화원 점거 농성-광주민중항쟁의 진압에 대한 미국의 책임 제기
중간층 시민운동의 등장
1980년대 후반의 신사회운동: 도시의 중간층 주민들이 중심이 된 시민운동--1990. 11월 ‘안면도 핵폐기물 처분장 반대운동’--지역 이기주의로 나타날 가능성(사회의 구조적 모순 등한시)
*반핵운동: 1997년 2월 대만이 핵폐기물을 북한으로 수출하겠다고 발표한데 대한 규탄 시위
제20장 북한사회주의 체제의 형성과 변화
개관: 1960년대: 사회주의 건설
1960-1970년대: 대외적으로 자주노선, 국내적으로는 김일성의 유일사상을 체계화, 절대화한 주체사상 등장
1994년 김일성 사망이후: 정치 경제적 난관에 봉착
1. 전후복구사업과 농업협동화 실시
전후복구사업--중공업 우선 발전(김일성)과 경공업․농업의 동시 발전(소련파, 연안파)
농업의 협동화: 1954년 빈농중심으로 중농과 동맹강화, 부농 제한
‘8월 종파사건’
○ 발단: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르시초프가 스탈린 개인 숭배 비판
○ 전개: 연안파․소련파가 개인숭배문제를 여론화하여 반김일성 운동, 집단체제 주장
○ 결과: 1957년 김일성(갑산파)에 대한 반대세력과 비판세력 숙청(연안파․소련파․국내파 무정, 김두봉, 최창익, 443쪽)--1960년대 김일성 유일사상체제 확립
2.경제건설계획과 생산관리 방식
제건설계획--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이 기본 노선
○ 1차 5개년계획(1957-1961): 공업화의 기초마련, 의식주 문제 해결
○ 1차 7개년계획(1961-1967): 북한을 사회주의 공업국가로 만드는데 중점(중공업 발전, 경공업과 농업의 동시 발전, 기술혁신, 국민생활 향상 등)
○ 6개년계획(1971-1976): 3대 기술혁명제시(경노동․중노동, 농업노동․공업노동의 차이를 줄이며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중공업을 우선 발전(유신체제에 대응하기 위해 국방비 지출이 국가예산의 30%차지)
○ 제2차 7개년계획(1978-1984): 경제의 주체화․현대화․과학화를 통해 사회주의 경제토대 강화, 인민생활 안정(경제의 종합적 발전을 목표)
대안의 사업체계
○ 청산리방법: 1960년 2월 김일성이 청산리 협동농장을 현지 지도한 것을 토대--대중노선에 의거 경제관리 방법만이 아니라 당과 국가의 지도체제를 바꾸는 계기
**내용: 상급기관이 하급기관, 상부사람이 하부사람을 도와주고, 항상 현지에 내려가 실정을 파악한 뒤 문제해결의 방법 수립
○ 대안의 사업체제: 1961년 김일성이 대안 전기공장을 현지 지도한 것을 바탕--경제관리에서 청산리 방법과 대중노선을 구체화한 것(첫째 공장당위원회의 집단적 지도체계, 둘째 통일적 집중적인 생산지도체계, 셋째 통일적 중앙집중적 자재공급체계와 후방공급체계)으로서 당 위원회의 집단적 지도를 기초로 정치활동을 앞세워 대중을 동원하고, 상부기관이 하부기관을 도와주는 방법
농업지도체계
: 1960년대 기업적 방법으로 농업협동경영 관리
3. 중소분쟁과 주체사상의 등장
3대혁명운동의 전개: 사상․기술․문화 분야의 혁명
주체사상의 등장
○ 1960년대: 이념적으로 유일사상체계, 정치적으로 유일지도체계 강화
○ 1970년대: 주체사상정립
4.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개혁개방정책
주체사상화 사업과 후계체제의 강화
○ 1980년대 목표: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온 사회의 혁명--대외무역과 수출 인민생활 향상 강조
**혁명 2세대: 만경대 혁명학원 출신으로 김정일 후계체제의 정치적 기반
경제위기와 경제정책
○ 1984년 합영법 제정
○ 3차 7개년 계획(1987~1993): 인민경제의 주체화․현대화․과학화, 그러나 기술혁신이 더욱 강조
○ 1992년 외국인 투자법을 기본으로 합작법, 외국인 기업법 등 제정. 1993년 외국투자기업법과 외국인세금법, 외자관리법 제정
○ 1990년대: 서방의 자본과 기술 도입 노력--‘자유경제무역지대법’(1993, 자유무역지대에 설립된 외국인 투자기업은 관세면제, 국세감면 혜택 등)
개방정책--제한적 개혁․개방을 추구하는 중국과는 우호관계 지속
○ 소련 동유럽 국가들이 남한과 외교관계 수립(배경)
○ 1994년 미국과의 대화로 핵사찰 문제 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