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중에 포로가 되어 북에서 고초를 겪다가 43년만인 1994년 시월 하순에 탈북을 감행, 남으로 돌아와 나라를 놀라게 한 분이 있었다.
그가 바로 포병관측장교로 참전했던 조창호 소위이다.
그가 탈북했을 때 필자는 한 선교방송기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취재를 하기 위해 국방부의 허가를 받고 아나운서와 함께 국군수도통합병원을 찾아나섰다.
국군수도통합병원은 당시에는 등촌동에 있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넷째 아드님이며 대학의 선배인 주광조(朱光朝) 장로께서 그 방송선교기관의 상급자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주광조 장로께서는 “6․25 전쟁이 나던 무렵에 조창호 소위와 내가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었거든. 아마 기억할 거야!” 했다.
‘이게 웬 떡이냐!’ 했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구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담으면 ‘히트’를 칠 것이 분명했으니까 말이다.
병실에서 조 소위를 만나, 주 장로가 “조 형, 나 모르겠소? 옥인교회에 같이 다니던 광조요!” 하니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주광조 장로는 머쓱해졌고 긴장해서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던 아나운서는 김이 샌 얼굴이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 장로님이 “그러면 최경숙이는 기억납니까?” 했더니 조 소위는 주 장로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경숙이? 어디 있습니까?” 했다.
내가 나섰다.
“조 소위님의 이야기는 많이 보도되었는데 저희는 선교방송에서 왔으니 기독교를 중심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조 소위님은 기독교인 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3년간 교회도 없고, 성경도 없고, 예배도 드릴 수 없는 곳에 계시다가 왔는데 주기도문을 기억하십니까?” 했더니 기억한다고 했다.
“외어보십시오.” 하였더니 떠듬떠듬 외운다.
방안이 숙연해졌다.
“찬송가를 부르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라며 ”예수는 나의 힘이요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 주실 이 주 예수…“ 를 천천히 부른다.
북에 있을 때 이 찬송을 속으로 늘 불렀다고 한다.
문제가 생겼다.
같이 간 아나운서가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인데 조 소위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부터 눈가가 붉어지더니 찬송가가 끝날 무렵에는 그의 눈에 눈물이 비오듯하여 인터뷰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 아나운서를 향해 눈을 한 번 흘기고 내가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그 아나운서는 그 뒤 목사가 되어 지금 그 등촌동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병원을 나오면서 “최경숙이가 누구입니까?” 물어 보었다.
“조창호가 좋아하던 여학생이지. 그런데 경숙이는 나를 좋아했어. 지금 미국에 살고 있다는 것 같은데….”
아까 조창호 소위가 왜 뒤늦게 주 장로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는지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그 방송선교기관을 떠나 수지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조창호 집사가 수지로 이사를 왔다.
북한의 탄광에서 노동을 할 때 폐, 눈, 다리를 상해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는데 의사가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를 했다고 한다.
‘잘 되었다’ 하고서 종종 심방을 하고 식사를 같이 하였다.
대할수록 그의 애국심, 그리고 신앙과 인격, 또 부인 윤신자 집사의 헌신적인 내조에 머리를 깊이 숙이게 되었다.
2006년 초에 교회에서 남선교회대회를 하는데 오시라고 했더니 목에 이상이 생겨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냥 교회 구경 오시라고 했더니 그러겠노라고 했다.
‘이 분을 어떻게 영접할까?’ 생각하다가 ‘그렇지!’ 하며 무릎을 쳤다.
교인 가운데 현상각(玄相珏) 권사가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상각 권사님은 함남 북청 출신의 실향민인데 6․25 전쟁 때 인민군에게 징집되어 포병소위로 참전한 분이다.
“수학을 전공했다고 포병장교를 시키더군요. 소성 하나(소위 계급장) 달고 떼떼(TT-33) 권총 차고 서울까지 왔지요. 인민군이 밀릴 때 고향에 가서 군복 벗고 주저앉아 있는데 국군이 들어왔지. 이번에는 국군에 들어가서 정보하사관 생활을 꽤 오래하다가 제대했어요.”
본인이 밝힌 내력인데 그 뒤에 서예 학원을 운영하면서 지내던 분이다.
해마다 ‘함남대전(咸南大展)’이라는 미술․서예전이 열리는데 서예작품을 빠짐없이 출품하였다.
아호는 여강(如剛)이었다.
현 권사님에게 부탁해서 “예수는 나의 힘이요”(찬송가 93장)를 붓글씨로 써서 표구를 해서 드리기로 했다.
50여 년 전에는 국군 포병소위와 인민군 포병소위로 포탄을 주고 받던 두 분이 이제는 신앙 안에서 포탄 대신 찬송가 가사를 선물을 주고받는 모습이 퍽 의미 있게 여겨졌다.
남선교회대회의 설교는 창훈대교회 원로목사이신 한명수 목사님이 하셨는데 한 목사님은 6․25 전쟁 당시 켈로 유격대원으로 강화 교동도에 근거를 두고 황해도 일대에서 유격전을 하신 분이다.
이 광경을 보고 아주 좋아하시며 또 감격스러워하셨다.
그 광경은 나에게 ‘아, 원수도, 적도, 시간이 지나면, 또 신앙 안에는 저렇게 되는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그해 11월이었다. 윤신자 집사님이 전화를 하셨는데 다급한 음성이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달려가보니 이미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시편 23편을 여러 번 읽어드리고 병원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침상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예수는 나의 힘이요…” 표구도 말없이 주인을 전송하였다.
며칠 뒤에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조문을 갔다가 입술을 달싹이며 시편 23편을 계속 암송하는 가운데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는 말을 들었다.
작년에 현 권사님이 사무실에 유난히 자주 오셨다.
한 번은 성구 소품을 100여 점이나 써 가지고 오셨다. 그 성구 소품들은 그 해 추석에 탈북민을 위한 기도회에서 탈북민들에게 추석 선물로 전달되었다.
몸 담고 있는 사무실의 제호도 여러 서체로 써 오셨다.
‘왜 이러시나?’ 했더니 느닷없이 부음이 들려왔다.
연세도 높고 약한 부분도 있었지만 뜻밖이었다.
경험을 통해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평소와는 다른 행동으로 징후를 보인다고 믿고 있는데 사무실에 자주 오시고 붓글씨를 많이 건네주시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쓴 제호 가운데 하나를 골라 로고(고유체)로 정했다.
천국에 가면 한 분이 “내가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소망 되시니 이 세상을 떠나갈 때 곧 영생 얻으리’라고 늘 찬송을 불렀는데 그대로 되었네요.”하고, 한 분은 “내가 써드린대로 되지 않았어요?”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이 보고 싶다.
[<한국크리스천문학> 51호(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