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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a zippo
산악인들이 주로 애용하는 오스트리아 zippo
챙~ 찰칵!” 경쾌한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은은하게 풍겨오는 오일의 향기, 생과 사의 전쟁터에서 군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이젠 할리데이비슨과 함께 전세계 남성들을 대표하는 명품브랜드로 자리한 “지포 라이터”는 1932년 펜실베니아의 작은 창고에서 George G. Blaisdell 이 보기좋고 사용하기 편한 라이터를 만들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제 방풍라이터의 열고 닫을 수 있는 기능에 경첩을 사용하여 바람막이가 달린 몸체를 연결시켜 오늘날의 지포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지포가 유행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동기는 바로 전쟁이었다. 세계2차 대전과 베트남전을 거치며 험한 지형과 어떠한 기후조건 속에도 꺼지지 않는 지포
최고의 장점은 2차대전 당시 군인들의 필수품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기능적 측면이 아닌 마치 부적과 같은 존재로 자리하게 되었다. 실제로 세계 2차 대전 때 활약한 유명한 종군기자 ‘어니 파일’은 미군 병사들이 지포를 갖고 싶어하는 현상을 가리켜 ‘지포증후군’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또한 ZIPPO라는 단어가 동사화 되어 to zippo는 ‘화염을 방사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지포는 전쟁을 거치며 남성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지포가 오랜 시간동안 전세계 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이유는 탁월한 성능도 있지만 지포를 떠올리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의 이미지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포의 재미있는 일화들도 한몫을 하고 있는데...
클리브랜드 오나이더 호수에서 잡힌 8kg짜리 송어의 위속에서 발견된 지포라이터에 불을 켜보았는데
한번에 불이 붙은 이야기 라던지 1965년 베트남 전에서 미육군 안드레즈 중사가 가슴에 총알을 맞고도 주머니에 넣은 지포로 인해 목숨을 건진 이야기, 그리고 1974년 샌프란시스코 해상에서 추락한 비행기의 파일럿이 지포라이터로 구조신로를 보내 극적으로 구조될 수 있었다는 일화들은 지포를 단순이 라이터의 개념이 아니라 남성이라면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할 상징적 존재로 자리하게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포의 디자인은 초반 약간의 변화를 제외하고는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라이터회사들이 지포라이터의 디자인을 흉내내왔지만 지포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 기술은 절대로 모방할
수 없었던 건지포만이 가지고 있는 ZIPPO Guarantee가 바탕이 되었고 그 한가운데에 영구보증제도 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지포를 구입한 사람의 부주의로 인한 손상에도 아무런 대가없이 수리해 주며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된 경우에도 새로운 라이터로 교환 해주는 지포만의 독특한 장인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지포를 구성하고 있는 돌,심지,지포오일의 지포만의 오랜 노하우로 나오는 완벽한 품질은 지포가 전세계120여개국에서 오랜시간 동안 사랑을 받는 이유이다.
그럼 진짜 지포와 가짜 지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정답은 지포 바닥에 표기되어 있는 고유번호에 있다.
1985년부터는 진품의 확인으로 생산연도와 월을 표기하고 있는데 85년은 로마자 I로 표시하기 시작해서 1986년은 II, 86년은 III 이런 식으로 표기하고 있고 생산된 달은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있다.(1월은 A, 2월은 B, 12월은 L) 예를들어 1994년 5월에 생산된 지포라면 지포로고 오른쪽에 생산연도를 나타내는 X가, 왼쪽에는 월을 나타내는 알파벳E가 새겨지는데. 이러한 표기가 바닥뿐 아니라 라이터 본체를 이루는 인사이드 유니트에도 새겨져 있어야 진짜 지포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지포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꾸준한 장인정신과 쉽게 변하지 않는 디자인에서도 지포만의 정신을 간직하려는 노력이 오늘날 지포를 단순히 라이터의 수준이 아닌 남성을 상징하는 브랜드의 개념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이런 지포는 현재 단순히 라이터 만의 효용만으로 사랑받는 것이 아닌 소장용으로도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지포매니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지포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고 있을 정도로 지포는 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명품브랜드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R.O.K zippo
한 두개씩 모으다보니 이것도 어느정도 수량이 된것 같습니다. 오래전 군에서 제대선물로 아님 부대 선물로 주던 아리랑 지포 라이타 입니다. 아마도 저보다는 연배이신 선배님들은 기억이 아련 하실 겁니다.
아랫글은 위 zippo라이타의 명판에 세겨진 주인공들의 간략한 비사 입니다. 장비의 주인공들에게도 숨어있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에 나름 장비를 모으는 쏠쏠한 재미로 올려 봤습니다.
가장 멋진 장군 "풍운의 별' 박정인!
1973년 3월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에서 갑작스러운 총성이 적막을 갈랐다. 북측 GP(경계초소)에서 DMZ 표지판 보수작업을 하던 남측 3사단 백골부대원을 향해 기습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이 사격으로 백골부대 장병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박정인(82·예비역 준장) 당시 백골부대 사단장은 즉각 북측에 사격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아군(我軍)에 대응사격 준비를 지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측의 사격 중지 경고에도 총격을 멈추지 않았다.
박 장군은 즉각 사단 포대에 대응사격을 지시했고 105㎜와 155㎜ 곡사포가 적 진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부상병을 구출하기 위한 연막탄도 작렬하며 사방에 화염이 치솟았고, 곳곳에 매설된 지뢰가 불을 뿜으며 폭발했다. DMZ 인근에 있던 적군은 혼비백산해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박 장군은 이날 밤 사단의 모든 차량을 동원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DMZ 남방한계선을 향해 돌진했다. 북한군은 국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되는 줄 알고 전군에 비상동원령을 내렸다. 일주일 뒤 귀순한 북한군 장교에 따르면 당시 북한군 30여명이 우리 군의 보복 사격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하지만 박 장군은 한 달 만에 군복을 벗었다. 상부의 허락 없이 임의로 대응사격을 했다는 이유였다. 박 장군은 사단장 이임식에서 "북진(北進)통일의 성업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단장 직을 떠나게 돼 유감스럽다"며 짧게 소감을 밝혔다. 평생을 바친 군(軍)이었지만, 후회는 없다는 것이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의 한 사무실에서 박 장군을 만났다.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육사 출신인 그의 사무실 한쪽엔 '우리의 적(敵). 부정부패, 친북좌경세력, 적화통일북괴군'이란 글귀가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박 장군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태를 꺼내자 대뜸 "그렇게 두들겨 맞고, 교전규칙 운운하는 것들이 군인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는 하얗게 셌고, 180㎝에 달했던 체구는 굽었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 울렸다.
"부하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는데 대체 군 지휘부는 뭘 했단 말인가! 자주포가 고장 났다는데 군 검열단은 뭘 했단 것인가! 전투기는 뭘 했고, 훈련 중이었던 함대는 함포 사격을 않고 뭘 했나! 지하벙커에서 탁상공론만 하면서 어떻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것인가!"
박 장군은 최근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태 등이 모두 군의 기강 해이에서 비롯됐다며 적절한 대응을 못한 장성들은 이등병으로 강등시켜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박 장군은 "군 지휘부는 상부 눈치만 볼 게 아니라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전 상황 때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며 "요즘 장군 중엔 군인답지 못한 장군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의 연평도 피란민들에 대한 대응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적 도발 시 민간인들의 비상이주대책 수립은 필수"라고 비판했다.
박 장군은 "역사의 교훈을 모르는 민족은 패망하기 마련"이라며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나 월남 패망은 군이 부정부패했고 정신력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막가파' 살인집단인 북한에 대응하려면 역사안보에 대한 교육이 선행돼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첨단 무기가 아니라 투철한 군인정신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뿐이에요."
장지량 前공군참모총장 “해인사 폭격 거부 처형될 뻔”
“내가 잘했다기보다 우리나라의 운수였던 게지요.”
4일 전쟁기념관 한국군사학회 사무실에서 만난 ‘노병’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우리나라 공군의 산증인인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84)은 1951년 여름, 무더웠던 8월의 이야기를 마치 어젯일처럼 기억해냈다. 5일 출간된 ‘수난의 문화재-이를 지켜낸 인물이야기’(문화재청 역음·눌와)에 나온 장지량 장군의 이야기는 군인 장지량이 아니라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문화유산 지킴이’ 장지량의 소중한 이야기다.
채명신 장군은… 6·25-베트남전 지휘, 영원한 ‘야전 사나이’
채명신 장군은 1926년 11월27일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다. 1945년 광복 직후 그는 평안남도 진남포 교외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기독교 모태신앙을 갖고 있던 갓 스물의 채 총각은 성경공부를 틈틈이 해 교원자격증까지 따 둔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지역으로 진주하면서 항일운동을 하던 그의 부친과 종교가 문제가 됐다. 공산주의자들의 탄압대상으로 지목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지 석달 만인 12월 작고한 부친과 홀로 된 어머니를 두고 결국 월남할 결심을 하게 된다.
몇 차례의 탈출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착한 서울에서 그는 1947년 육군사관학교 5기생으로 입교하게 된다. 48년 졸업 후 52년 미 보병학교 고등군사과정(OAC)에 입소하기 위해 도미하기 전까지 혈기왕성한 중대장으로 송악산 전투, 태백산 게릴라 토벌전에 이어 민족상잔의 6·25전쟁을 온몸으로 치른다. 특히 51년 적 후방에 침투해 게릴라전을 이끌며 백골병단(白骨兵團)이란 무시무시한 부대명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이후 다시 53년 7월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연대장과 참모장을 거치며 채명신은 '전장의 사나이'로 이름을 날린다. 58년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60년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의 파란 속에서도 정치군인으로 변신하지 않은 채 정통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 채명신 장군은 69년까지 약 4년간 베트남의 밀림에서 '따이한'의 위력을 떨쳤다. 1972년 별 셋 중장으로 30년을 미처 못 채운 군문(軍門)인생을 마감한 그는 스웨덴·그리스·브라질 특명전권대사로 82년까지 해외공관을 떠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박 대통령의 견제라고 보는 이도 있다. 신군부가 들어선 후 83년부터는 미국 하버드대와 UC버클리대 연구원으로, 다시 일본 츄오(中央)대와 게이오(慶應)대 연구원으로 뒤늦은 유학 혹은 유랑생활을 보냈다. 2004년부터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총재와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지금까지 역임하고 있다.
김성은 국방부장관
김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일화를 비롯, 해병대 창설과정, 해병대가 5.16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게 된 배경 등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비사를 털어놨다.
회고록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1964년 1월 김 전 장관과 박종규 경호실장, 이원엽 소장(육사5기)을 대동하고 유성에서 꿩을 사냥했다. 사냥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박 전 대통령은 점심 메뉴로 경호실에서 준비한 쇠고기를 구워먹기 위해 무작정 사냥터 인근 다리 밑으로 들어갔다. 소금을 뿌린 쇠고기 구이를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거지 몇 명이 경호실 요원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다가온 것.
박 전 대통령은 "오라고 해라. 함께 먹자"라고 그들을 부른 뒤 음식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
"우리를 보고 거지 친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주변의 말에 박 전 대통령은 "어때. 거지가 지프 타고 다니는 것 보았나?"라며 파안대소했다는 것.
그해 4월 해군사관학교 졸업식 참석차 진해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화투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스톱을 전혀 모르던 김 전 장관은 이후락 당시 비서실장 등의 훈수로 화투판을 휩쓸었다는 것.
이 때 박 전 대통령이 "김 장관, 고스톱 쳐 본 적 없다면서? 그런데 판마다 다 휩쓸어? 이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맞구먼"이라고 조크해 웃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해병대사령관이었던 김 전 장관의 명령 없이 해병 부대가 움직였던 일화도 소개됐다.
5월 16일 새벽 당시 고길훈 부사령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김포 해병여단 일부 병력이 오늘 새벽, 탱크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6년 전 자신의 부하였던 김동하 예비역 소장의 꼬임으로 당시 김포 해병 여단장 김윤근 준장이 1개 대대 병력과 전차 중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했던 것.
해병대가 사령관의 명령 없이 쿠데타에 참가한 것을 뒤늦게 전해들은 맥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의 승인없이 김포 해병대가 출동해 혁명에 가담했다. 이는 작전지휘권에 대한 명백한 불복종 행위다. 지금 당장 출동해 해병대를 복귀시키라"고 호통을 쳤다.
맥루더는 윤보선 대통령에게도 반란군 진압을 위한 작전권 승인을 요청했지만 제2공화국 출범부터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으로 장 면 씨와 갈등을 빚어온 윤 대통령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로, 당시 혁명정부는 미국 측에 확고한 반공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16층 규모의 반공연맹 총본부(현재의 타워호텔) 건물을 남산에 신축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16개국을 상징해 16층 짜리 건물로 신축했으며 각 층에 참전국의 대표를 상주시킬 계획이었으나 참전국에서 대표를 파견하지 않아 무산됐다고 한다.
'귀신잡는 해병'이란 말이 나오게 된 일화도 공개했다.
해병대의 통영 상륙작전의 전과를 취재하러 온 외신기자들에게 전과를 소개하는 도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여기자 마거릿 히긴스가 "정말 놀랍다. 귀신 잡는 해병이다"라고 보도를 한 것이 계기가 됐다는 것.
임충식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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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포 라이타
저또한 잘쓰고잇는 품목입니다-------한가지더 20세기 코카콜라병 쏘니사의 마이마이 포함3대디자인에속합니다--
추가정보 감사 합니다.
훌리오님 장비이야기는
남자의 물건에 대한 어떤 철학적 의미까지 담겨 있어 ..읽을수록 감사한 마음입니다.
리뷰기사를 어디 잡지사에 기고 하셨을까...
대단한 관찰과 필력이구요...
고맙습니다.
애독자임을 밝히면서
앞으로도 할아버지 서고처럼 귀한 이야기 기대합니다.^^
제가 쓴글과 자료찿은글이 섞여서 좋아 보인겁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 합니다.^^
책한권을 읽는 것처럼 오랫동안 재미있게 읽었네요.
지포라이타..
미쓰때 남친 선물 1순위였었다는..^^
자료모음이지만 잘 봐주셔서 감사 합니다. ㅎ
내가 책을볼수있는시간 no
훌리오님의 소설같은 이야기 yes
항상뒤에서 수고하시는 님에게 박수보냅니다
감사 합니다. ^^*
저도 신랑한테![선물](https://t1.daumcdn.net/daumtop_deco/icon/deco.hanmail.net/contents/emoticon/things_29.gif)
했었는데 어디러 갔는지...잊은지 오래 되었는데,![삼](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17.gif)
옛날 추억이 되살아 나네요...^^*![ㅇㅇ](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58.gif)
훌리오님 글을 일고 보니 새
훌리오님의 다음 편을 또 기데 하면서.....감사 인사도 함께...
소장 하고 계신 라이터만 보아도 명품을 보는 눈이 젊을때 부터 남달랐던것 같습니다...^.~
조만간 다독자 선물 공지 하겠습니다. ㅎ
익!!! 별루 보고싶지않은 분이 계서 통과했는데 다독자 선물에 혹~~~ 해서 한줄 답니다ㅋㅋㅋ.
어렸을때 할아버지 지포로 탱크놀이 많이 했었죠ㅎㅎ
역쉬 싸라 계시군요. 양재물 ㅋㅋ
우선 대상자 돼시게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