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부턴 투쟁
어쨌든 집을 구했으니, 이제부턴 삶의 현장으로 나가야만 했다. 베를린에서의 생존을 위해서.
어쩌면 나에겐 전쟁터로 나가는 일이기도 했다.
*
비가 온다.
상당히 많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다행이다.
조금 전 내가 한국에 편지를 부칠 겸 어머니께 전화하러 나갔을 때도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일 보고 먹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비가 퍼붓기 시작해 하마터면 흠뻑 젖을 뻔했는데, 그걸 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엔 나가고 싶지도 않다. 집에서 뭔가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어째, 나른하게 졸립다.
어머닌, 오랜만이라 시면서도,
“비싼 전화를 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까지 하셨다.
그래도 '살 집을 구했다'고 알려드리자 퍽 안도하시는 느낌이었다.
거리에서 헤맬 땐, 방을 구하면 모든 일이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방을 구하고 나니, 더 큰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살기 위해 세상과 싸우는 일이다.
내 이곳에서의 삶을 위해, 일거리를 찾고 돈을 벌고 투쟁해야 한다.
비록 종이에 하는 작은 드로잉이지만 그림을 시작했다. 옛날 스페인에서 지낼 때처럼 일기를 쓰듯 하루에 단 한 장의 스케치라도 남겨놓을 생각이긴 한데......
그리고 이젠 정상적인 생활도 시작됐다.
무엇보다도 음식을 거리서 사 먹지 않고 집에서 해먹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그래서 오늘 밤엔 스페인 식 감자 또르띨랴를 해먹었는데, 집주인에게도 한 쪽을 주니 그(요한)도 맛있다며 금방 먹어 치웠다.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다.
오늘, 6월의 마지막 밤이 가면 7월이다.
제발, 제발 7월부터는 좋은 일도 좀 생기길, 믿지 않는 하늘에 기도라도 하고 싶다.
6 . 30
*
집을 구한 뒤, 그동안 미뤄두었던 한국이거나 스페인에 연락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게 돼서,
오늘도 우체국에 들러야만 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발길이 가볍지 만은 않았다.
밝은 마음으로 편지를 쓸 수도 없었지만, 뭔가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현실 문제가 막막했기 때문이다.
우체국에 다녀오는 사이에도 베를린의 하늘은 변덕을 몇 번씩이나 부려 비가 서너 차례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등 사람을 심란하게 했다.
요한이 독일식 김치를 가지고 찌개를 끓였는데, 정말 김치찌개 맛이 났다.
그는 생김새도 그렇지만 깔끔한 성격에 요리도 제법 잘하는 것 같다.
쉬 어두워지지 않는 이곳 여름은 밤 10시가 되어도 환하기 때문에 여차하면 시간을 그냥 흘려버리기 십상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 저녁을 먹은 뒤 바로 앉아서 종이에 작업을 시작했다.
자정이 가깝도록 두 장의 드로잉을 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희열을 느꼈는데, 위기 상황에서의 아슬아슬한 희열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런 위기 상황이 아니었다면 작업이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설사 작업이 된다 해도 지금의 그 느낌과는 다를 것이라고. 그만큼 내가 절박한 상황이라는 뜻이기도 한데,
비록 다음 달 집세도 없는 빈털터리일망정, 작업이 풀려주기만 한다면, 난 어떻게든 견뎌내리라고......
7 . 1
‘여기도 드로잉 하나 붙여야 할 것 같네.' 하면서 나는, 베를린의 우중충한 잿빛 하늘에서 내리는 듯한 구질구질한 비내리는 풍경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내 기억 속의 베를린은 늘 이랬던 것 같아. 그러고 보면 이 그림은 '풍경화'지만 나름 그 상황의 특징을 잘 표현한 것 같고......' 하고 다소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이미지를 붙였다.
#슬픈 현실#
이미 그저께부터 내 전쟁은 시작됐다.
꽤 오래 전부터 망설여왔던 일의 실행에 들어갔던 것인데,
발등에 불은 떨어졌고, 이젠 더 이상 미적거릴 시간도 여유도 없어서였다.
‘화가’로 먹고 살기 위해서(그게 가능할지는 몰라도), 화랑가의 약도를 보아가며 몇 군데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여기는 의외로 화랑이 아주 조그마한 곳들이 많았는데, 왜 그런지 자신의 존재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겉에서 보기엔 별 표시가 없는 곳도 많았다.
대게 오후 2시부터 문을 열었고,
그 중 한 화랑에 들어가 전시를 둘러보면서 동정을 살피니, 사무실 쪽에 한 사람이 있기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내 작품 자료를 보여주면서 혹시 전시할 가능성이 있는지, 혹시 팔 가능성은 있는지 타진해보기 위해서였는데,
“저, 한국에서 온 화간데요......” 하고 어렵사리 영어로 말을 시작하려는데,
“나, 지금 바쁜데요.” 하면서, ‘다음에 오라’면서 자기는 지금 나가야 한다고 나에게 ‘나가 달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하는 것이었다.
보기 좋게 거절당한 것으로, 그야 말로 ‘문전박대’였던 것이다.
내 작품은 보여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돌아 나와야만 했다.
그게 내가 여기 베를린에서 찾아갔던 첫 번째 화랑에서 벌어졌던 일이고 결과였다.
밖엔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내친김이라 또 다른 화랑을 갔더니 거긴 조각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쪽에서 먼저,
“무슨 용건으로 왔느냐?” 고 묻기에,
“작품을 보러 왔다.”고 주저주저 말을 했는데,
그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듯 여러 가지를 묻기에 결국 내 얘기를 하게 되었고 테라코타 작품 자료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늘, 말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안 들어가느니만 못한 모습으로 그 화랑에서도 나오고 말았는데,
여기 화랑가와의 접촉이 결코 녹록하지 않을 거라는 걸 첫날부터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일기의 맹점이, 좀 치사하거나 이맛살을 찌푸리는, 그리고 자질구레한 일은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는 특색이 있는데, 이럴 때가 참 난감하다. 무슨 일이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으니, 장본인인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제 3자를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입에 담기도 구차한 일이 벌어졌던가 본데......' 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 하면서, 이 부분과 연관되는 드로잉 이미지 하나를 가져왔는데,
'그래, 이 그림의 제목이 '독백'이지. 정 중앙에 장발의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그 사람의 몸은 수많은 펜글씨로(온갖 서러움과 비꼼을 들어야만 하고 견뎌내는 내용) 가득한데, 그 당시의 나는,
'그래, 이런 시도도 신선한 거야! 그림 속에 '그림의 요소'로 글씨를 도입해서 한 부분을 차지하게끔 한 표현 방식이. 근데, 그래봤자, 누가 알아준 것도 아니고, 그 시대엔 이런 게 새롭고 신선했을 게 분명한데, 요즘 세상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일반화된 표현이라......' 하는 다소 씁쓸한 기분으로 갖다 붙이면서는,
'그래도, 양 쪽 옆에서 주인공(나)을 비웃는 서양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간결하면서도 희화적이네!' 하면서 살짝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도 쓴 맛을 보았다.
방금 전에 찾아갔던 화랑을 나오며, 나는 이 세상이 백지가 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왜 살아있어야 하는지, 존재와 의미까지가 흔들리고도 있었다.
그 길로 바로 자주 가는 '동물원(Zoo)역' 근처의 교회엘 갔다.
그리고 그 실내 단상 쪽의 ‘떠 있는 듯한 예수 상’을 스케치했다.
내가 믿지도 않는 예수를 원망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여보세요! ‘예수’라는 분, 당신 같은 존재 때문에(?) 내 마음이 더 아프기도 헷갈리기도 하거든요?' 하면서......
'거기, 베를린 동물원 역 옆에 2차 세계대전인지는 모르지만 폭격을 맞은 교회(빌 헬름)가 있는데, 내가 그 교회에 자주 들렀던 건, 그 안에 인상적인 십자상이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 당시의 나는 그 십자가의 조형성에 관심이 많았는데, 나 역시 십자가를 내 스스로(스타일로) 디자인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래서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내 나름대로의 십자가를 디자인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서울 내 아파트의 어느 한 구석에 테라코타 작품으로 남아 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는, '그렇게 작품만 해놓으면 뭐 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들......' 하면서 다음으로 넘어가야만 했다.
어젯밤 남의 낚싯대에 미끼를 낀 다음 맑은 강물에 던져 넣었는데, 그러자마자 싱싱한 고기가 낚여오는 꿈을 꾸었다. 한 마리도 아니고 연거푸 두 마리를 낚아 올렸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좋은 일이 생길 줄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도무지 나쁠 것 같지가 않아서, 그런 꿈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던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라고 꾸는 꿈마다 다 맞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그러니까, 평생의 한 번이라도, 아니면 어쩌다 얼떨결에 내 꿈이 맞아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나 좋은 일은커녕 까마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일이 벌어졌는데,
오늘도 화랑가를 돌아다니다, 괜찮아 보이는 화랑을 보고 문을 열었는데,
화랑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화랑 관계자인 듯한 사람은 나를 보고 있었고, 상대방은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뭔가 인기척을 느꼈던지 등을 보이던 사람이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보고는, 고개를 다시 돌리면서 뭐라고 말을 했다.
"누가 왔는데......"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주인인 듯한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니 나를 보았음에도 시선을 그에게 돌리며 나 같은 사람은 아는 체조차 하지 않을 자세였다. 내가 실체가 아닌 무슨 투명인간이거나 그림자인 것처럼. 그러면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야......" 하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설사 들었다 하드래도 독일 말을 이해할 수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나눈(?) 그 짧은 대화를 100%, 아니 200% 다 알아들은 기분이었다.
슬펐다.
앞이 캄캄했고,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모든 일이 그리 쉽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쉽게 남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줄도 몰랐던 나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뒤 미친듯이 종이 그림을 했다. 그리고 제목을 길게 붙였다.
‘누가 왔는데...’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야!’
그렇게 대화체의 제목을 붙인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았다.(아니면 또 있는데 기억을 못하고 있는가.)
아,
남들이 인정을 해주든 말든(화랑가의 비웃음을 받드래도) 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살 가치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글쎄, 지금의 내 삶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시간은 가고 어느덧 자정이 넘고 1시가 되어간다.
잠이 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일을 위해 나는 잠을 자둬야 한다. #
‘제목처럼 '슬픈 이야기'군. 화가의 삶이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참... 슬픈 일도 많아.' 하다간, '물론, 그렇다고 내 인생이 전부 슬픈 일로만 점철된 건 아니고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없지만, 그리고 살아오면서 나도 기쁨과 행복도 얼마든지 느꼈지만, 이 세상에 '이름 없는 화가'로 살아간다는 건, '슬픔'과 따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아......' 하면서 이 부분에 그 흑과 백으로 강렬한 대비를 강조해서 인체의 형상만을 평면적으로 그린 드로잉, ' '누가 왔는데...'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야!' ' 를 첨부했다.
*
어제 오늘, 멍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진종일 비가 내렸다.
그래서, ‘잘 됐다’며 나가지도 않았다.
아침에 요한과 같이 나가 먹거리를 사온 뒤, 나는 내내 방에 꾸부리고 앉아 뭔가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벽에 붙인 종이그림들이 늘어간다.
물론 그림이 늘어가는 것은 기쁘지만, 그림이 늘어나는 것에만 만족할 순 없고,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하고, 새로운 나만의 뭔가를 끄집어내야만 한다.
그림의 질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던 요한이 엽서 두 장을 건네주었다.
이상해서 보니, 엊그제 내가 보냈던 엽서가 되돌아온 것이었다.
이 집으로 온 첫날, 새로 생긴 내 주소를 알린다는 기쁨에 주소 먼저 써놓고 엽서를 쓴 다음에 보니, ‘수취인’란에 내 주소를 써넣은 오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형광펜으로 ‘To:’ 하고 강조해서 쓴 다음 부쳤던 엽선데,
그중 일부는 간 모양이고 일부가 되돌아온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벌써, 답장이 왔다고?' 하는 반가운 심정으로 그 엽서를 받아들었던 건데......
그러고도 내내 방에 있었는데, 지루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도 지루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요즘, 이따금 내가 있는 곳이 베를린이란 것을 확인하곤 한다.
‘내가 베를린에 있는 것’이 아닌,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이다. 그리곤 여기가 베를린임을 확인한다.
전에 바르셀로나에 있을 때도 그랬었다. 하도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다 보니 내 스스로도 가끔은 내 소재지에 대한 혼돈이 오나 보다.
날씨가 궂다.
여름인데도 사람들은 긴 팔이거나 자켓을 입고 다닌다.
쨍한 빛은 없다. 그리고 비가 자주 내린다.
그러나 나에겐 덥지 않고, 후텁지근한 무더위가 아니어서 좋다.
졸린다.
비록 당장 먹고 살 일이 걱정이긴 해도 잠은 여지없이 쏟아진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인생도 간다.
7 . 4
*
오늘은 비가 왔는데 개고 나니 가을 같다.
저녁을 일찍 먹고 추운 것 같아 이불 위에 누워 있었더니 잠이 들었다. 2 시간여를 비몽사몽(정식으로 잔 것도 아니면서) 잠 속에 빠져 있었다.
세상사는 게 힘들어서겠지만, 나는 잠자리에 들 때가 하루 중에서 제일 행복하다.
어떤 때는, 아예 깨어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오늘 요한과 시 외곽(동베를린)에 있는 ‘부취(Buch)’란 곳에 갔다.
시골 같은 그 곳엔 갤러리가 있었는데,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3년을 공짜로 쓸 수 있는 작업장에 전시까지 열어주는 예술 공간이기도 했다.
나는 그곳의 환경과 이들의 예술을 위한 투자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내 처지가 이러니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물론,
‘나도 이런 곳에서 작업할 수만 있다면......’ 하는 꿈을 아니 꾸지 않았지만,
나 같은 떠돌이는 그런 자격도 없음에, 그저 한숨만 쉬며 돌아오고 말았다.
7 . 5
*
오늘, 일도 없이,
'아, 돈이 많다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에 젖었다.
허기야 돈만 있다면, 내 삶이 확 달라질 거고 이런 상황에서도 느긋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그러니까 내가 지금 돈에 너무 쪼들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놈의 돈.
돈 때문에 내가 겪은 고통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나는 돈의 중요성을 자꾸 망각하고 또 등한시한다.
그건 내 성격이거나, 타고난 특징 같기도 하다.
나는 돈에 대한 애착이 없는 사람인데, 그건 내 주변 사람들이(가족이거나 친구들)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니까.
물론, 돈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것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 같고, 언젠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돈이 붙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황제처럼 살아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옛날에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학교 실기실에,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문구를 써놓곤 하더니(그리 오래 전이지도 않은 멕시코 시절에도 그랬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인생 내내 바람처럼 떠돌고 있는 것 같아,
이제부터는 그냥 ‘황제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억지를 쓴다고 그리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리고 만약 내가 황제가 되어도 세상을 잘 통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는, ‘황제’처럼 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생각이야 자유니까......
7 . 6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고? '황제'처럼 살고 싶다고?' 하면서 나는 실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그런 기록이 있는 걸, 내가 아니라고 잡아 뗄 수도 없잖겠는가 말이다. 그러면서는 또, '허긴, 기록에도 나와 있듯이, 생각으론 뭘 못해? 그리고 황제처럼 산다고, 어디 화려하고 쉽기만 하겠어?' 하다간, '그런데 이 부분도 슬프네. 그저 해본 소리일 뿐이겠지만, 오죽 힘이 들었으면 그런 '터무니 없는 소리'까지 했을까......' 하고 잠시 씁쓸하게 앉아 있다가, '아, 그리고 나는 그런 흔히 말할 수 있는 ‘황제의 삶’은 살아보라 해도 못 살 사람이다. 내 ‘역마살’이 나를 내버려두겠는가 말이다. 어느 날 쥐도 새도 모르게 황제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도 남을 사람인데......' 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