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브랜튼. 한 음 한 음 절제된 선율로 시적(詩的)이라는 평을 듣는 재즈 연주가. 8년째 매년 계속해 온 <재즈 크리스마스>와 <재즈 발렌타인> 콘서트로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그가 얼마 전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했다. SBS 드라마 <스타일>에서 한국 디자이너의 외국인 남편으로 특별 출연한 것. 그의 실제 아내도 한국인으로, 공연기획사 ‘뮤지컬 파크’의 김향란 대표다. 론 브랜튼은 ‘뮤지컬 파크’ 소속 아티스트여서 두 사람은 기획사 사장과 아티스트 사이이기도 하다.
오는 11월 8일, 두 사람이 함께 준비한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열리는 <재즈 7080>. 론 브랜튼이 1970년대와 80년대, 90년대 초까지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해 온 가요들을 재즈로 편곡해 선보인다. 서울대 근처, 두 사람이 초등학생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갔더니 브랜튼이 커피를 내왔다. “음악 하는 사람이어서인지 입맛이 예민해요. 커피는 압구정동의 한 커피집에서 볶은 원두로만 만들어 마시죠”라며 김향란 대표는 “남편이 요리도 잘한다”고 말한다.
론 브랜튼은 한국의 동요와 가곡, 가요를 재즈로 편곡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 이번 공연에는 조용필의 ‘단발머리’, 김광석의 ‘외사랑’, 김민기의 ‘아침이슬’, 신형원의 ‘개똥벌레’, 김추자의 ‘무인도’, 정훈희의 ‘꽃밭에서’ 등이 연주된다.
“선입견을 가지지 않으려 노래를 듣지 않고 악보만 보면서 곡을 골랐습니다. 가수의 색깔을 입히지 않은, 음악언어로만 노래를 대한 거지요. 가사도 모른 채 악보만 보고도 남편은 무엇에 관한 노래인지,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알아맞히더군요.”
론은 “김광석 노래를 특히 좋아한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는 김광석에게 ‘외사랑’을 작곡해준 한돌 선생을 만나 함께 산에 오르고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한돌 선생은 “김광석에게 주려고 작곡했는데, 끝내 주지 못한 곡들이 있다”면서 론에게 그 곡들을 주겠다고 내밀었다. 론의 정서는 한국의 ‘7080’세대와 다르지 않은 것같아 보였다. 악보만 보고도 그 노래가 나온 때의 한국 역사와 문화, 시대 정서가 읽힌다고 말한다. ‘목포의 눈물’은 특히 “보통의 음악 구조에서 벗어난 독특한 곡이다. 뭔가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읽히는 드라마틱한 노래여서 놀랐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한국 동요에 애착이 많아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동요를 재즈로 편곡해 소프라노 김원정과 함께 앨범을 내기도 했다. ‘낮에 나온 반달’ ‘따오기’ ‘가을밤’ ‘꽃밭에서’ ‘오빠생각’ ‘바닷가에서’ ‘섬집 아기’ ‘구름’ 등 한국인에게 너무 익숙한 동요를 새롭게 해석해 들려주는데, 가슴에 쏴한 여운을 남기는 고적한 선율에 눈물이 날 것 같다. 아이들만의 노래가 아닌, 한국인 밑바닥에 있는 정서가 배어 나오는 노래들이다. 피아노와 드럼, 비브라폰, 베이스, 색소폰, 기타, 플루트 연주에 김원정의 청아한 음성이 얹힌 앨범. 피아노 연주는 그가 직접 맡았다.
“이런 동요는 아마 한국밖에 없을 거예요. 악보를 보고 깜짝 놀랐죠. 이렇게 대단한 음악가들이 아이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었다는 데 감명을 받았습니다. 고통과 억압의 시기에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곡을 통해 전해지는 것 같았어요. 진지하고, 심오하고, 철학적이며 한국인의 삶이 담겨 있는 노래인데, ‘아이 노래’라는 이유로 그냥 밝고 가볍게만 부르더군요. 한 곡 한 곡을 뜯어 보고 새롭게 연주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동요를 재발견했으면 하는 소망에서였죠.”
그는 “홍난파 같은 작곡가는 대단한 음악가인데, 무조건 친일파로 매도당하는 게 안타깝다”고도 말한다.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웬만한 한국인을 넘어선다. 영어로 나온 한국관련 책들을 섭렵해 웬만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는 줄줄 꿰고 있다. “《삼국사기》는 아직 영어로 번역된 책이 없어 못 읽었는데, 무척 아쉽다”고 할 정도다. 아내에게 “아무래도 내가 전생에 신라의 화랑이었던 것 같다”고 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태어나 메릴랜드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워싱턴 DC에서 오랫동안 재즈 연주자로 활동했던 그가 어떻게 서울 낙성대 근처에 터를 잡고 살면서, 한국에 관한 일이라면 한국인보다 더 열을 올리게 되었을까? 그 질문에 론 브랜튼은 “운명(fate)이라 생각한다. 운명 알지요?”라고 말한다. 미국인 론 브랜튼과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김향란이 만난 것은 국제 펜팔을 통해서였다.
“1996년부터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보급되었는데, ‘이런 세상도 있는가?’ 너무 신기했어요. 영어도 익힐 겸 유니텔을 통해 해외 펜팔에 가입했죠. 중・고등학교 때도 해외 펜팔을 했었는데, 몇 달씩 걸려 편지가 오가던 그때에 비해 시차 없이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점이 끌렸죠. 처음에 세 사람과 펜팔을 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론이었어요. 이 사람이 그때도 글을 참 잘 썼거든요.”
브로드웨이 뮤지컬 수입 등 삼성에서 문화 콘텐츠관련 일을 하던 향란 씨는 뉴욕에 출장 갈 일이 많았다. 반년 동안 이메일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뉴욕에서 만났고, 얼마 후 결혼을 약속했다. 두 사람 모두 서른이 넘은, 적지 않은 나이였다. 독신으로 살 것 같던 아들이 결혼해서인지 론의 어머니는 향란 씨에게 무척 고마워하며 “내 아들을 잘 부탁해(take good care of my son)”라고 말했다 한다. 론 브랜튼에게 “어떻게 한국 여성과 결혼할 결심을 했느냐?”고 물었다.
“미국 여성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것, 그래서 더욱 그리워했던 것을 향란에게서 찾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건 신뢰(trust)죠. 남녀 간 애정보다 더 중요한 게 신뢰라고 생각해요. 우린 남녀나 부부 이전에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남편이 곡을 쓰고 아내가 노랫말을 붙인 뮤지컬 <타이거>
아내에 대한 신뢰와 사랑은 한국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이어졌다. “어떻게 그렇게 한국을 좋아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먼저 한국 사람이 좋았어요. 아내와 처가 식구들, 그리고 한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먼저 반했지요”라고 그는 대답한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도 1년간 떨어져 지냈다. 한국과 미국 중 어디에서 살지를 모색하는 기간이었다. 1년 후인 1998년, 론이 향란이 있는 한국으로 왔다.
“미국에서 재즈 연주자는 사이드 잡 없이 생활하기 어려워요. 남편도 그래픽 디자인 일을 하고 있었죠. 한국에 오면 음악에만 몰두하게 해 주겠다고 했죠. 경제적으로는 제가 자신 있었으니까요. 저희 어머니가 독립적이어서인지, 어릴 적부터 ‘남자가 돈을 벌어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관념이 별로 없었어요. 대신 제게는 자유가 중요했습니다.”
론이 한국에 오자 회사를 퇴직한 향란은 공연기획사를 차렸고, 론이 활동할 무대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재즈를 즐기는 한국인이 많지 않았고, 재즈 연주가의 주 활동 무대는 클럽이었다. 론은 그러나 담배 연기 자욱한 클럽에서 연주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향란은 콘서트홀에서의 재즈 연주를 적극적으로 기획했다. 아트홀을 빌려 정기적으로 재즈 공연을 열었고, 매년 밸런타인데이와 크리스마스 이브에 <재즈 발렌타인> <재즈 크리스마스> 공연을 했다. 이 공연들은 해마다 좌석 수를 넓혀 가며 전 석이 매진될 정도로 호응을 얻고 있다. 론 브랜튼이 국악, 클래식, 가요 등 다양한 분야의 쟁쟁한 음악가들과 크로스 오버 작업을 할 수 있게 장을 만든 것도 아내 향란이었다.
론과 향란이 요즘 가장 애착을 갖는 일은 뮤지컬 <타이거>의 제작이다. 김향란 대표는 그동안 <오페라의 유령> <사운드 오브 뮤직> <42번가> <미녀와 야수> 등 굵직한 해외 뮤지컬의 라이선스 계약과 프로덕션 코디네이션을 맡아 성공시켰고, 론 브랜튼은 인기 뮤지컬 <김종욱 찾기>의 편곡을 맡아 뮤지컬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우리 콘텐츠로 뮤지컬을 만들고 싶다’는 데 뜻을 같이한 두 사람. <타이거>는 론이 “한국 혼의 상징인 호랑이를 소재로 뮤지컬을 만들자”고 해 시작된 프로젝트다. 론이 곡을 쓰고, 향란이 노랫말을 붙인 부부 합작품으로, 현재 뮤지컬 제작을 위한 투자자를 찾고 있다. 론 브랜튼은 “한국 호랑이를 통해 ‘한국인으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한국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말한다.
사진 : 김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