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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원하는 교회
미국의 유명한 코메니던 그로흐 막스(Groucho Marx)와 어느 신부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그 신부가 로만 칼라 차림으로 로스앤젤레스의 어느 번잡한 거리를 지나 가다가
그호르 막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실례지만 당신은 그로흐 막스가 아니신가요?"
코메디언은 특유의 몸짓으로 담뱃재를 털면서 눈썹을 움직여 가며 대답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신부님."
"당신이 이 세상에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한 데 대해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신부가 말하자, 코메디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웃음을 빼앗아 가 버린데 대해서 감사드리고 싶군요."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겠지만 따라서 웃기에는 씁쓸한 느낌이 너무 큽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얘기는 신부에 관한얘기가 아닙니다.
이 얘기는 교회의 얘기입니다.
이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이 얼마나 자주 위협적이고, 두려우며,
판결문처럼 엄숙하고, 비인간적이며, 생명력이없는 것으로
잘못 전달되고 있는가를 말해 줍니다.
또한 교회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잘 못 살고 있는가를 반성하게 해 줍니다.
오늘날 교회는 과연 예수님이 원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원하는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가톨릭 교회는 그 교회에 얼마나 가깝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 교회들'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간혹 부딪히는 일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열심한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비판하거나 공격해 오는 경우를 종종 만납니다.
"가톨릭 교회는 '성경'에서 벗어난 '전통'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정통(正統)을 계승하지 못했다.
오히려 교회의 정통성은 성경에 충실한 기독교가 간직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일반 교파들이 대체로 이런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를 숭배하고, '교황'을 신격화(神格化)하며,
제사를 인정하는 등 우상 숭배에 빠져 있다.
고로 사탄의 꼭두각시다."
통일교, 여화의의 증인 등 일부 공격 성향의 교파들이 이런 주장을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
'선행' 또는 '공로'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
고 주장하고 '믿음'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따라서 가톨릭 신자는 반드시 개신교로 개종해야 구원 받을 수 있다."
이는 소위 개신교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의 목소리 입니다.
이런 공세에 대하여 가톨릭 신자들은 맞대응을 자제하는 편입니다.
첫째는 비교적 관대해서 그런 토론에 휘말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아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 즉 명쾌하게 반박할 만큼
교리 무장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근래에 종교간의 대화와 교회 일치 운동 바람이 불면서
일부 의식있는 종교 또는 종파 지도자들 사이에 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들 두 가지 상반된 움직임, 즉 적대적(敵對的)인 '트집'과 우호적(友好的)인
일치 운동(ecumenicalism)사이에 오늘의 주제 '가톨릭 교회'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 주제를 취급하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물음은 분명합니다.
"과연 누가 옳으냐,
가톨릭 교회가 참된 교회냐 ?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참된 교회냐?"
이런 식의 물음을 던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부질없는 싸움만 조장하는 어리석은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게서 원했던 교회는 정녕 어떤 모습이냐?
오늘날 우리 교회가 갈 길은 어떤 길이냐?"
이런 식의 물음을 던져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쇄신을 기약해 주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신부님이 로만 칼라 복장으로 웬 여자와 고속버스를 탑니다.
"저런, 신부가 여자와 놀러 가는 모양이군! 스캔들이라도 생기면 어쩔려구!"
가만히 보니 여자와 여간 친한 사이가 아닙니다.
자리에 앉은 모습도 어쩌면 그렇게 다정스러워 보이는지. 조금 지나서 '여보' 소리도 들립니다.
"이를 어째, 아예 살림을 낸 모양이군!"
천주교 신자라면 한두 번쯤 경험하였을 이런 헤프닝은 가톨릭 사제들을 상징하는
'로만 칼라'를 개신교 목사님들이 입고 다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의장등록법에 의거한 조치가 이루어져서 개신교 목사님들은 못입게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성공회 신부님들은 이 복장을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에피소드 감을 하나 소개했습니다마는,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점은
가톨릭 교회 외에 수많은 그리스도교 종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대충은 알면서도 도대체 얼마나 많은 종파들이 있고
그 계보는 어떻게 갈리는지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따라서 그 궁금증을 먼저 풀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가장 먼저 갈라진 것은 1054년에 와서입니다.
그때 동방교회(정교회)와 서방 교회(가톨릭 교회)로 나뉘었습니다.
이 서방 교회가 다시 루터의 종교 개혁을 통해 갈라져 나가면서 여러 개신교 종파들이 생겼습니다.
개신교 종파는 크게 구분할 때,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등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 종파는 2001년 12월 31일 각 교단에서 제출한 자료를 근거로 한 문화관광부의 통계에 따르면,
예장통합과 예장합동 등 17개 주요 교단에 신자 수는 총 1,228,482명, 교회 수는 38,225곳,
목사 수는 총 60,115명으로 집계됩니다.
교황 수위권 문제로 갈라선(동방 정교회)
정교회는 로마 총대주교좌 곧 교황의 수위권 문제오 필리오케(Filioque: '또한
성자로부터') 논쟁을 계기로 해서 1054년 공식적으로 서방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갈라섰습니다.
필리오케 논쟁은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나왔느냐" 아니면 "또한 성자에게로부터 나왔느냐"를 놓고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 유명한 논쟁입니다.
이 논쟁에서 동방 정교회는 전자(前者)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사실 교리 논쟁은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로마의 총대주교좌와 동방 비잔틴 총대주교 사이에
그리스도교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전개된 정치적인 줄다리기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2억 2천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오늘날 세계 최대의 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로 약 7,000만 명의 신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정교회는 1900년 러시아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오랫동안 간신히 유지해 오던 중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대에 의해 그리스 정교회로 대체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 정교회가 미미하게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생겨난 소위 루터 교회
가톨릭의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수사 신부였던 독일의 루터(1483-1546년)는
가톨릭 교회의 대사(大赦) 남용에 대해 항의하며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가 담긴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게시하면서 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는 베드로 대성전 건립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게 되자
교황 레오 10세가 기부금을 내는 이들에게 전대사(全大赦)를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종교 재판을 통해 관철하는 데 실패하고 교회 내적인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터는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경'을 내세우고 '만인사제론'을 표방하면서 1530년 독립 교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 생활에서 실행(實行)보다는 신앙적. 영성적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례나 성직자 예복 등 상당 부분 가톨릭적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전 세례 루터 교회 신자는 약 6,200만 명으로 장로교, 성공회와 함께 개신교 3대 종파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58년 한국에 전파되어 초기에는 주로 방송과 문서 선교에 힘을 쏟았으며, 1971년 교단을 조직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의 루터 교회는 28개 교회, 컨콜디아사(출판사), 베델성서연구원 등을 운영하며
루터신학대학교에서 교역자를 길러내고 있으나 교세는 아직 약한 편입니다.
헨리 8세의 재혼 문제로 갈려 나간 성공회
1534년 영국 왕 헨리 8세가 재혼 문제로 가톨릭에서 이탈하면서 교황권을 거부하고
영국의 국교(國敎)로서 '성공회'를 세웠습니다.
국왕(國王)이 교회의 최고 통치자가 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단순히 정치적인 이유로 가톨릭 교회에서 갈려 나갔기 때문에 교리, 전례, 성사
등의 면에서 가톨릭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성공회(聖公會)는 '거룩하고(holy) 공번된(catholic)교회'라는 구절을 한자화한 것입니다.
이 이름이 시사하듯이 성공회는 가톨릭 교회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개신교에 속하는 종파입니다.
오늘날 세계 성공회는 160개 국에 약 7,000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1889년 한국에 발을 디딘 이래 성당을 한옥식으로 짓고 한국 문화에 대해 연구를 하는 등
토착화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993년 관구 독립을 이루고 '대한성공회'가 되었으며 현재 전국에 100여 개의 교회, 5만여 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칼뱅의 예정설을 산봉하는 장로교회
장로교회는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 칼뱅(1509-1564년)에 의해 창설되었고,
절대 예정설과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서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합니다.
현재 세계 개혁교회연맹에 106개 국 217개 교단이 가입되어 약 7,500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1885년 전해졌으며, 1907년 독자적인 조직이 구성되었습니다.
해방 후 여러 차례 교단 분열을 거듭하면서 현재 통합, 합동, 기장, 고신 등 100개가 넘는 교단으로 나뉘어 있읍니다.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영국, 스위스, 네덜란드와 함께 세계 5대 개혁교회 중 하나로 꼽힙니다.
성공회 내 복음주의 은동에서 생겨난 감리교회
감리교단은 영국 성공회 출신 사제였던 존 웨슬리(1703-1791년)를 통하여 시작된 복음주의 운동입니다.
1795년 감리 교단으로 성장하여 영국 국교로부터 정식으로 인준을 받았습니다.
이는 현세에서의 완전한 성화를 목적으로 신앙, 개인적 회개, 경건을 표방하고
영국 서부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펼친 복음주의 운동의 결과였습니다.
1881년 창설된 '세계감리교협의회' 에는 전세계 5,000만 명이 넘는 신자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 감리교는 1885년 4월 미국의 아펜젤러에 의해 전파되어, 배재학당과 정동 제일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도 장로교가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된 것과는 달리 단일 교단을 유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구세군, 성결교 등도 웨슬리의 가르침을 따르는 교파들입니다.
이 밖에도 한국에서 큰 교세를 일궈낸 교회들이 없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영국의 J. 스미스(1554-1612년)에 의해 1612년 창설되어 미국 최대의 교파를 이루고 있고,
한국에 1890년 진출하여 현재 산하 100여 개 지회를 두고 있는 '침례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1958년 전도사 조용기와 최자실이 5명의 신도와 함께 천막 교회로 출발하여
2000년 현재 신자 수가 한국 70만 명(일명 순복음교회), 전 세계 5억 명으로
세계적인 신도 수와 규모를 갖추고 있는 오순절 교회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들이 개신교에서 인정하는 교파들이며, 이 밖에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등을 위시한
수많은 사이비(似而非) 교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끝으로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교의 명실상부한 종주(宗主)로서 현재 세계적으로
총 10억 7천만 명(「교회통계연감」, 교황청,2002 참조)의 신자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줄곧 세계 제 1의 교세를 유지해 오다가 2000년을 기점으로 이슬람 교세에 1위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1784년 유학자들에 의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한국 천주교회의 교세는 한국 인구의 약 9%에 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만 참 교회인가?
가톨릭 교회는 스스로 참 교회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신경에서 우리는 하나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
이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일치하는 주교들이 다스리는 가톨릭 교회 안에 존속한다"(교회헌장 8항).
주목할 것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교회'는 오직 로마 가톨릭 교회 '이다(esse)' 라고 선언했던 것을
이 교회헌장에서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존속한다(subsistit in)'고 수정함으로
다른 교회도 교회일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는 점입니다.
타교파에 대한 존중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루어 낸 위대한 업적입니다.
"이 조직-가톨릭 교회-밖에서도 성화와 진리의 요소가 많이 발견되며, 이 요소들은
본래 그리스도의 교회에 고유한 은혜로서 공번된 일치를 촉구하는 것이다"(교회헌장 8항).
그러므로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자신만 참 교회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원했던 모습을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들 안에 참 교회가 존재한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참 교회인가?
참 교회가 되려면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든지 이 중에서 못 갖추거나 부족한 측면이 있다면 채우려고 노랙해야 합니다.
이를 게을리 하면 참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첫째, '일치'(=하나 됨)를 지향하는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은 교회가 '한 분 하느님'과 '한 분의 중재자 나자렛 예수(Ⅰ디모 2,5 참조)' 기인한다는 뜻에서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모든 교파들은 서로 다른 '남'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게서 평화의 줄로 여러분을 묶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그대로 보존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셔서 안겨 주시는 희망도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3-6).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도처에서 드리스도인들이 '여럿'으로 갈라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종파와 가톨릭 안에서의 불일치는 한편으로는 '다양성'과 '풍요'를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파는 서로 다른 문화와 특성을 가진 채 이 일치에로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동하는 다양성은 꽃피우되 그것이 서로 반목하고 견제하는, '일치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부(敎父) 오리게네스의 호소에 귀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다수가 있고, 이교가 있고, 이단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덕이 있는 곳에 일치가 있고 모든 믿는 이들이 한몸, 한마음을 이루는 일치가 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17항).
둘째, '거룩한'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교회는 정말 거룩한가?" 분명한 것은, 하느님 홀로 거룩하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 교회의 설립자요 기초이신 하느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거룩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몸을 바치셨기"(에페 5,25-26) 때문입니다.
교회의 모든 빛이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처럼, 교회의 거룩함도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힘입어 교회는 스스로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교회헌장 12항)'이라 부르고
그 구성원들을 '성도(聖徒)'(사도 9,13)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천상 은혜로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고,
교회 역시 세상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교회가 하는 모든 활동의 목표입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부여된 모 든 성화의 도구들, 즉 하느님의 말씀, 성사, 특별한 은사,
직무와 봉사 등은 이러한 목표를 위해서 쓰입니다.
교회가 시성(諡聖)을 하고 성인들을 공경하는 것도
세상을 성화시켜야 하는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역설이 되겠으나 스스로 거룩하고 세상을 거룩하게 해야 하는 이 사명 때문에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곧 교회가 자신의 품 안에 죄인들을 품어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품으면서 스스로 물들지 않도록 회개, 정화, 쇄신의 길을 가야 합 니다.
'거룩함'을 잃고 '거룩함'을 흐트러뜨리는 교회는 사이비(似而非) 교회입니다
셋째, '보편적'인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보편적' 곧 '가톨릭(catholic)'이라는 말은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지역, 모든 민족, 모든 이데올로기를 두루 아우를 수 있을 만큼 포용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보편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
'모든 백성'에게 교회를 파견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
'가톨릭'은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지향하고 포용한다는 의미에서 '가톨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는 참으로 온전하고 보편적이며 포괄적인 교회입니다.
우리가 속한 교회를 '가톨릭 교회'라고 부릅니다.
참으로 '가톨릭', 즉 '보편' 교회가 되려먼 그 '보편성'이 두 가지 차원에서 검증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적으로 그 '보편 타당성'이 검증되어야 합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반짝하고는 한 시대도 채 풍미하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영성 풍조들은 시간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2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검증된 교회입니다.
숱한 박해와 위기를 극복하고 의연히 서 있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다음으로 공간적으로 그 보편성이 검증되어야 합니다.
동서양의 쟁쟁한 철학과 종교들에 비견할 때 설득력과 타당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전 세계, 모든 대륙에 10억 7천만 명의 신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보편성'을 인정받았다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가톨릭 교회에는 모든 집단 인종 계급을 포괄하는 신앙과 신앙 공동체가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사도적'인 교회가 참 교회입니다.
'사도적(使徒的)'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는 교회가 '파견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그:apostolos)'는 '파견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파견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 21)고 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파견은 어떤 '사명 수행'을 위해 보냄 받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위임받은 사명이 바로 사도직(使徒職)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사도적'이라는 것은 특별히 파견된 직무가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도적 직무는 교회의 근본 요소에 속합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증거자인 사도들이 파견되면서 위임받은 사명은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적'이라는 것은 '사도로부터 이어 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위에 세워졌고, 그 기초 위에서 살아갑니다(에페 2,20).
교회는 '사도들의 증거와 가르침'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고 들은 것, 그리고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업적과 말씀은 사도들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전체가 사랑하는 스승, 예수님의 반영(反影)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위탁하신 '세례'와 '성찬례'를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도하심에 따라 예수님 구원의 기쁜 소식을 문자로 기록하였습니다.
마침내 사도들은 그들의 파견 직무를 계속 이행하도록 제도(制度)를 설정하였습니다.
사도(使徒)들은 계속 성사를 집전케 하고 교회 안에 온전하고 생생하게 복음을 보존하기 위하여
후계자로서 주교(主敎)들을 두고 그들에게 '교도직'과 '사목직'을 맡겼습니다.
이처럼 두 가지 의미에서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위임(첫째 의미)'은 '교회의 전통을 통하여 모든 시대에 존속(둘째 의미)' 되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어받아 수행하기 때문에 사도적입니다.
네 가지 요건을 얘기했습니다마는 문자적으로만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이 아닌 율법의 정신을 강조하셨듯이 이 네 가지의 문자적인 의미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향하는 정신(精神)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현재 여러 교파들이 서로 누가 옳으니 그르니를 놓고 쓸데없이 힘을 낭비 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처지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타교파에 대해서 '한 교회'의 일원 곧 한 형제 자매라는 의식을 가지려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에 힘입어 거룩하지 않은 이들을 맞아들여 함께 거룩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 좁은 교리와 교파의 담을 허물어뜨리고 우주의 주재요 모든 권리 중의 진리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넓은 안목으로 알아듣고 믿고 전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넷째, 사도적이라는 말뜻을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섭리의 안목에서 이해하고 실행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의 백미, 성인들의 통공★
'교회'에 대한 고백에 이어지는 것이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가톨릭 교회와 신앙의 백미(白眉)입니다.
라틴어로 'communio sanctorum'인데 이는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즉 'sanctorum'을 거룩한 것들(sancta)'의 소유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거룩한 이들(sancti)'의 소유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번역상 후자를 택했습니다마는 첫번째 의미로 알아들을 경우 '거룩한 것들의 나눔'을 의미해서
신앙, 성사, 은사 등을 모든 신자가 공유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사도신경에서처럼 '성인들의 통공'으로 번역될 경우, '성인들'은 성도들,
믿는 이들을 가리키며, '통공'은 서로 친교하고 공로를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리려면 따로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 이는 누구나 성도이며 성인이다★
여기서 성인들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 성도들은 '교회'의 구성원을 말하며, 여기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지상 교회, 연옥 교회, 천국 교회로 구분됩니다.
윤형중 신부의 「상해 천주교 요리」를 보면 지상 교회를 '신전지회'라 일컫고
연옥 교회를 '단련지회'로, 천국 교회를'개선지회'로 부릅니다.
우선, 지상 교회의 옛 표현인 '신전지화(神戰之會)'에 속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집단을 말합니다.
'신전지회'는 '전투하는 교회'라는 뜻으로서 여기서 '전투'란 이 세상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마귀와 세속과 육신에 대적하여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연옥 교회의 다른 표현인 '단련지회(鍛鍊之會)'에 속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소죄(小罪)만 있거나 보속할 잠벌(箴罰)이 남아 있는 이들이 이루는 교회를 말합니다.
이 영혼들은 연옥에 들어가 천당에 갈 때까지 단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끝으로, 천국 교회를 뜻하는 '개선지회(凱旋之會)'에 속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죽을 때 아무 죄도 없고 보속하여야 할 잠벌도 없는 영혼들은 천국에 들어가고 연옥에서 단련을 다 받은 영혼들도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되는데, 개선지회'는 바로 이런 영혼들의 집단을 말합니다.
마귀와 세속, 육신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교회라는 뜻입니다.
신전지회와 단련지회, 개선지회는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이 아니라 동일한 집단이 며
다만 그 상태가 전(戰), 단(鍛), 개(凱)로 다를 뿐입니다.
지상 교회, 연옥 교회, 천국 교회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공로에 힘입어 그리스도께 합치된 이들입니다.
어느 단계에 있건 이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는 이들"(Ⅰ고린 1,2), "그리스도 예수 안의 성도들"(필립 1,1),
"하느님께 선택된 거룩하고 사랑받는 사람들"(골로 3,12) 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한 교회'의 일원입니다.
★통공 덕에 사는 것이다★>
'통공(通功)'이란 단어의 원어는 'communio'입니다.
'친교'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눔'이나 '교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먼저, '통공'을 '친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5,5-8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와 잎새들이 줄기와 연결되어 한 생명으로 사는 것처럼,
여러 성도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한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다.
한 생명체에는 수억의 세포들이 결합되어 한 생명을 이루는 것처럼
세상, 연옥, 천국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은 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친교입니다.
다음으로, '통공'은 말 그대로 공(功)을 통(通)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즉 누군가 다른 성도를 위해서 기도, 선행, 희생 등을 통해서 대신 공을 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지상 교회'의 성도들끼리 서로 육신과 영혼에 필요한 은혜를 받도록 하기 위해 '통공'을 행할 수 있고,
'지상 교회'의 성도가 '연옥 교회'의 성도를 위해 공을 쌓음으로 죄로 인하여 당연히 받아야 할 잠벌을 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달리 말하여 보속은 빚을 갚는 것인데, 이 빚은 당사자가 갚아도 되고 다른 사 람이 대신 갚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의 성도가 자기 보속이나 공로를 다른 성도를 위해 바치면 그것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종합적으로 이 '통공'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겟습니다.
첫째, '천국 교회' 성인들의 전구(轉求)를 통한 통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상에 있는 성인 성녀들을 공경하며 그들의 '전구'를 청하고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은총을 빌어 줌으로써 '지상 교회'와 '천국 교회' 사이에 통공이 이루어 집니다.
둘째, '지상 교회' 성도들이 '연옥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 '선행'을 드리는 통공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속을 다 못하고 떠난 영혼들은 연옥에 들어가 보속이 끝날 때까지 단련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우리의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이며 우리와 함께 지상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는 고통은 바로 우리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습니까?"(1고린 12,26).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동정하게 되고 그들의 형벌이 경감되거나 단축되게 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연(煉)미사를 드리고, 교우들은 그 영혼을 위하여 연도(煉禱)를 드리는 것입니다.
연옥 영혼을 도울 수 있는 방법에는 그들을 위해 자주 미사를 드리고, 대사(大赦)를 자주 얻어
그들에게 공을 넘겨주며, 기도와 고행, 자선을 행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셋째, '지상 교회'의 성오들이 서로를 위해 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지상 교회'에서 교우들끼리 서로 통공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기도입니다. 서로를 위해 바쳐 주는 기도가 효력이 있다는 것을 사도 바오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성령이 베푸시는 사랑을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간곡히 기도하여 주십시오"(로마 15,30).
2) 선행입니다. 선행은 마음으로나 입으로 하는 기도보다 더 큰 효력을 갖습니다.
"...황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버립니다.
자선을 행하는 삶은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토비 12,8-9).
선행은 자체로 그 대상에게 효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선행을 바치며 지향을 둔 교우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나,공로 중에 최고의 공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해서 얻어낸 공로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교회로부터 받는 은총입니다.
교회로부터 받는 은총은 미사 성제, 성직자들이 날마다 드리는 성무일도, 일곱 가지 성사, 교회에서 제정한 준성사,
교회 전례, 교회에서 베푸는 대사 등이며,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바른 대로 믿고 바른 대로 행하는 것도 그에 속합니다.
결국, 통공은 은총을 나누는 것입니다.
수도자들이 산 속에서 기도하지만 그 기도는 세상을 위한 기도입니다.
세상과 은총을 나누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황을 위해, 주교를 위해, 사제와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합니다.
신자들의 기도가 합해져서 교회를 거룩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이런 교회의 권고를 따라 기꺼이 정성으로 기도할 줄 아는 신자는 교회에 힘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이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것을 거저 누리게 됩니다.
나의 기도, 공로, 내가 누려야 할 은총을 세상을 위해, 교회를 위해, 연옥 영혼을 위해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보충한다★
미사 경문에 성체를 영하기 직전에 "저희의 죄를 보지 마시고 성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이 대목은 대단히 은혜로운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는 믿는 이 각자의 허물과 한계와 죄를 가지고는 감히 '거룩한 몸'을 영할 수 없으나 '
거룩한 교회'의 믿음과 서로를 위한 '통교'를 통해서 감히 주님을 모실 수 있고,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교회는 실제로 잘못을 범하기 쉬운 죄스러운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죄스러운 교회입니다.
통틀어서 볼 때, 교회의 역사는 참으로 인간적인 역사일 뿐 아니라, 깊은 죄악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 위에 세워진 교회, 성령이 함께하는 교회,
성인들의 통공이 서로를 성화시켜 주고 하나로 묶어 주는 교회이기에 그 교회의 믿음의 총화(總和)는 '거룩하고 은혜롭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보충한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느 성당에서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주교님이 견진성사를 주러 오셨습니다.
한참 개척 중인 성당이었기 때문에 준비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모든 신자가 12시가 넘도록 준비를 했지만 여러 가지로 미비한 것이 많았습니다.
일은 성사를 집전하는 중에 발생했습니다.
견진을 줄 때 주교님이 신자들의 이마에 성유를 발라 줍니다.
일반적으로 성유통에는 예비자 성유, 크리스마 성유, 병자 성유가 구별되어 담겨 있는데
견진성사를 줄 때는 그 가운데 크리스마 성유를 발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보조를 하던 복사가 신학교 출신이고 전례를 잘 아는 청년이라서
그에게 성유통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그가 뚜껑을 열어서 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련하려니 하고 계속 주교님 옆에서 들고 성사 집전을 보좌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의 이마에 기름을 발라 주신 주교님께서 갑자기 기름통을 확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병자 성유'였습니다.
저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교님 역시 이미 지나간 신자들을 다시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망설이시는 듯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나머지 사람들에게만 새 기름을 발라 주셨습니다.
신자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저와 주교님은 미사 내내 그 해프닝의 여운 속에서 헤어나질 못했습니다.
그날은 그렇게 정신 없이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날인가 주교님께 전화 통화로 죄송했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주교님께서도
"그때는 당황했다" 고 하시며 심려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덮어 주셨습니다.
"에클레시아 수플렛!(라: Ecclesia supplet)".
즉 "교회가 보충해 준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교회를 위해 무언가 해 보려 하지만 부족함, 실수, 허물 등의 한계 때문에
생각만큼 되지 않아서 힘들어할 때 이 말처럼 위로가 되는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성도들의 통교가 이루어지는 교회는 교우들끼리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의 성화와 구원에 이바지 합니다.
일치의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공동체에서는 이처럼 '성도들의 통교'를 통해서 나와 너, 가난과 부유,
귀함과 천함, 거룩함과 세속 등을 갈라놓는 모든 장벽들이 허물어지고 모두가 '한마음 한 영혼'(사도 4,32 참조)이 됩니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 성도들의 통교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단어가 '서로(그: allelon)'입니다.
성서학자 로핑크는 수고롭게도 공동체의 '서로'가 얼마나 좋은지를 나타내는 성서 구절을 그의 책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에 한데 모아 놓았습니다.
공동체가 함께 '서로'를 위해 소리 내어 기도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공동번역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 '한마음 한 영혼'인 우리는,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합니다(로마 12,10 참조),
서로 합심합니다(로마 12,16 참조),
서로 받아들입니다(로마 15,7 참조),
서로 충고합니다(로마 15,14 참조),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합니다(로마 16,16 참조),
서로 기다립니다(Ⅰ고린 11,33 참조),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합니다(Ⅰ고린 12,25 참조),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깁니다(갈라 5,13 참조),
서로 남의 집을 져 줍니다(갈라 6,2 참조),
서로 위로합니다(Ⅰ데살 5,11 참조),
서로 도와줍니다(Ⅰ데살 5,11 참조),
서로 화목하게 지냅니다(Ⅰ데살 5,13 참조),
서로 선을 행합니다(Ⅰ데살 5,15 참조),
서로 사랑으로 참아 줍니다(에페 4,2 참조),
서로 친절한 사람이 됩니다(골로 3,12 참조),
서로 순종합니다(에페 5,21 참조),
서로 용서합니다(골로 3,13 참조),
서로 죄를 고백합니다(야고 5,16 참조),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야고 5,16 참조),
서로 진심으로 다정하게 사랑합니다(Ⅰ베드 1,22 참조),
서로 대접합니다(Ⅰ베드 4,9 참조),
서로 겸손으로 대합니다(Ⅰ베드 5,5 참조),
서로 친교를 나눕니다(Ⅰ요한 1,7 참조),
아멘!
♡당신을 위한 희망의 편지♡
당신이 '성인들의 통공'을 입으로만이 아니고, 마음으로, 그리고 행위로 믿기를 바랍니다.
아빠 하느님께서는 자녀들인 우리가 참 교회의 식구가 되어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서로'의 성화와 구원에 이바지 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매우 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당부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이웃의 뜻을 존중하고 그의 이익을 도모하며 믿음을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로마 15,1-2).
사도 바오로는 서로의 믿음을 북돋우는 최고의 방법이 '기도'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에게 자신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기도해 줄 것을 누차 부탁하였습니다.
당신이 이 아름다운 '성인들의 통공' 이라는 은총을 누리고 또 나누기를 바랍니다.
먼저, 당신은 힘이 들 때, 곤경이 너무 클 때, 혼자만 끙뜽대지 말고 믿음의 이웃들에게 기도를 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도인 바오로도 청했습니다.
당신도 망설이지 말고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을 위시하여 성인들께도 청하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웃을 위해 진심과 정성으로 기도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의 부탁을 받지 않아도 알아서 기도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성인들이 이런 기도를 많이 바쳤습니다.
물론 당신은 교회 전체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고민과 뜻을 헤아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신은 이 기도를 간절하게 바치게 됩니다.
특히 미사 때 바치는 신자들의 기도(보편 지향 기도)는 교회 전체가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합심하여 바치는 기도이기에 중요합니다.
이 기도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사제직을 수행하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바치는 기도입니다.
기도 지향은 '성교회'와 '위정자들'과 '고통받는 사람들'과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어떤 특수 목적도 기도 지향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과 영성이 깊어질수록 연옥에서 단련 받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얼마나 필요하고 효력을 지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당신도 당신의 조상이나 당신과 관련된 죽은 영혼들을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성인들의 통공을 충만히 누리는 믿음 생활을 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성인들의 통공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믿음 생활을 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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