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개혁주일 추천 설교]세상을 개혁하는 교회
요한계시록 2장 12∼17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중략...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얼마 전, 저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채플에서 설교를 해달라고 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신학생들과 교수님들을 앞에 두고 설교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척 긴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신학교에 일찍 도착했습니다.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기다리면서 사무실 직원들과 서로 소개를 했습니다. “저는 기쁜 소식교회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기쁜소식교회가 어디 있지요?”라고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곡동, 대치동 동네에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 대치동...” 하면서 눈이 커졌습니다. 그 당시에 한창 대치동의 입시학원들이 언론의 질타를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설교 채플 시간에 설교를 하러 온 목사가 대치동 지역에 목회를 한다고 하니까 한 분이 뼈가 있는 말씀을 하더라고요. “대치동도 기쁜 소식을 좀 들어야 돼.” 저는 그 순간 사람들이 서울의 특정 지역에 대해서 좀 미묘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네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지역에 살더라도 이 곳의 풍조를 좇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으로 구별되는 교회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모이는 사람들의 성격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이기 때문에 반영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고 오히려 차별되어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대학촌에 교회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주된 교인층을 구성을 한다고 할 때, 그 교회는 당연히 대학 캠퍼스의 학구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지 않은 것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이유 때문에 교인들이 지적으로 교만하다던가, 성경 말씀보다도 자기의 생각과 철학을 우선시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일 것입니다.
교수님들이 많이 나오는 교회에 어느 젊은 목사님이 부임을 했다고 합니다. 교인들이 지식인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목사님은 설교를 지적으로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수많은 철학자들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 뿌듯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님인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의 사무실에 찾아와서 “목사님, 죄송합니다. 저희에게 철학을 말씀해주시지 말고 성경을 말씀해 주세요. 저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하더라고 합니다.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이 교회 저 교회, 여러 교회를 다녀봤는데 마음에 썩 드는 교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동네에서 가장 뜨겁게 믿는다고 하는 교회, 방언하고 예언하고 귀신을 내쫓는 교회가 가장 저의 믿음에 도움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대학교 분위기와 맞지 않는 교회였지만, 대학의 분위기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성격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독특한 특성은 전도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전도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낳는 것이 아니고 양이 양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특성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끌어드리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첫째는 교인들이 설교시간에 졸지 않아야 되고, 둘째는 다음 주일날 또 와야 되고, 세 번째는 혼자 오지 않고 친구를 데리고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소개하지 않습니까? 야고보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요한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동료 세리들을 전도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을 전도하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한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만으로는 불안전한 전도입니다. 그 사람을 교회에 다닐 수 있도록 정착시켜야 그것이 온전한 전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그 사람이 교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됩니다. 내가 정착할 수 있는 교회여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도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교회이어야 내 주변 사람들도 좋아하는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성격을 한계로 보지말고, 오히려 최대한으로 전도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해서 무조건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을 가지고도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손에 있는 물매 돌 다섯 개로 골리앗과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룩한 목적을 위해 쓰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위치한 지역의 특성과 차별성이 있어야 됩니다. 부자 동네에 있는 교회라고 부자 냄새를 풍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배운 자들의 교회라고 배운 냄새를 풍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 지역의 특성과 차별성이 없다면 그 교회는 사교클럽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거룩한 교회라고는 부를 수 없습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말씀으로 변화된 교회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습니다. 사회학적 특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영적으로 구별된 교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말씀으로 변화되면 가능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받아야 합니까? 변화를 받습니다. 복만 받으려고 하지말고 변화를 받으려고 하십시오.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변화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그릇이 더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기 위해서는 그릇을 준비해야 됩니다. 내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 속에 이루어질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할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으면서도 아무런 은혜나 능력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리 기도해도 그 기도가 응답될 것 같지 않았는데, 변화 받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문을 닫았습니다.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서가 아니고 내가 받을 준비가 안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탓하지 말고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겉으로만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내가 말로만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내가 중심으로부터 변화되는 면이 있는가, 내가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는가, 내 가족들이 친한 친구들이 나를 돌아봤을 때 “너 교회 다니더니 뭔가 변했다.”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칭찬이지만 만일 “너 교회 다닌다고 하는데 하나도 안 변했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참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같은 집에 사는 식구가 “너 달라졌다.”라고 말하면 그건 정말로 달라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멀리 있는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은 속일 수 없습니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은 우리의 사적인 모습, 우리의 숨겨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우리가 속일 수 있지만, 집안 식구들에게는 가면을 쓸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같은 집에 사는 배우자, 부모님, 자녀, 형제가 “야 너 요즘에 달라졌다.” “얼굴빛이 달라졌다, 정말 밝아졌다.” 하고 이렇게 말한다면, 그건 정말로 여러분 삶 속에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건 결정적으로는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 이름이 천국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하나님만이 보시지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터넷을 검색하듯이 하늘의 생명책에 내 이름이 올라가 있는지를 검색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첫째는 내가 내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않았는데 마음 속에 자연스러운 변화가 일어날 때, 그래서 예전에는 죄를 지어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죄를 지으면 마음이 괴롭고 후회가 되고 그 죄를 벗어버리고 싶고 하나님 앞에 미안한 마음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은 거듭났다는 간접적인 증거입니다. 옛날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거든요. 하나님 앞에 죄송한 마음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늘 미안한 마음이 있고 죄를 지으면 마음이 괴로워요. 그건 죄를 짓는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적어도 그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은 변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마음에 편안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러므로 마음의 평강을 얻기 위해서라도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외국 팝송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Guilty feelings got no rhythm.’ 죄책감에는 리듬이 없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세상의 쾌락이 쾌락이었는데, 이제는 쾌락이 옛날 같지 않고 더 이상 즐거움이 되지 않고 기쁨이 되지 않아요. 여러분, 즐거움과 기쁨은 현저하게 다른 것입니다. “내가 밤새 도박을 했더니 기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밤새 도박을 하니 재밌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밤새 놀았더니 참 기쁘다.” 그건 아닙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땀은 비처럼 쏟아도 마음은 기쁘다.” “내가 힘은 들어도 마음은 기쁘다.” “내가 고난은 당해도 기쁘다.” “슬픔을 당해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 기쁨이 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어느 목회자 세미나를 간 적이 있습니다. 예배 순서 중에 라스베가스 순복음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특송을 했습니다. 저는 ‘라스베가스에도 교회가 있구나.’라고 생소하게 생각이 되더라고요. 그러나 그건 제가 무식하기 때문에 한 생각입니다. 그 목사님의 찬양이 얼마나 뜨겁고 그 교회가 얼마나 뜨거운지, 라스베가스라고 교회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라스베가스이기 때문에 교회가 더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죄인이 많을수록 교회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 고객은 죄인들입니다. 이 세상에 죄인들이 많이 있는 한 교회는 결코 고객이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교회는 버가모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사단의 위(?), 사탄의 왕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옛날에 이 구절을 읽을 때 ‘버가모가 얼마나 악한 도시면 거기에 사탄의 위가 있다고 까지 말하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 주석을 보면 버가모라는 도시가 그 당시에 소아시아에서 황제 숭배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신전을 가리켜서 사탄의 위라고 불었을 것이라고 신학자들이 추측을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 버가모가 다른 도시보다도 더 악하기 때문에 사탄의 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이 세상 모두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탄을 무엇이라고 불러요?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릅니다. 온 세상이 사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버가모 뿐만이 아닙니다. 라스베가스 뿐만이 아닙니다. 세속적이지 않은 동네가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세속적이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버가모와 같은 도시에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곳은 성지와 같이 거룩한 곳이 아니고 버가모와 같이 악하고 죄가 있는 곳에 세우십니다.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
이 사실을 알아야 우리는 교회는 어떤 존재며 교회가 어떻게 교회됨을 유지할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물 위에 떠 있는 방주와도 같습니다. 사방이 물 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참 귀한 곳입니다. 방주가 없으면 이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러므로 이 방주에 물이 스며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이 스며들면 그 방주는 아무런 소용이 없고 가라앉아 버리고 맙니다. 그 말은 교회는 거룩해야 되고 이 세상을 본받아서는 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영적인 싸움,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성은 버가모와 같은 곳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으로 싸움이 없이는 거룩함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 하였도다.” 그러니까 이 버가모 교회는 순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한 분들 많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그 전통이 오래 갑니다. 지금도 북한 동포들 중에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사람은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집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까 괜찮습니까?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살려는 사람은 불이익을 받고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감수해야 됩니다. 이것은 법적인 종교의 자유만 가지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믿음이 있는 처녀가 믿음이 있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남자의 수가 예수를 믿는 여자의 수보다 현저하게 적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잘 믿으려는 여성들이 감수해야 되는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집에 시집을 가게 되면 일평생 신앙의 갈등을 감당해야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지어야 되는 짐입니다.
남자들에게도 짐이 있습니다. 남자들이 직장에서 신앙대로 사는 것, 어렵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고백합니다. “사회생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 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는 뜻이 있습니다만 현실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회식 자리도 가야 되고, 바이어들 접대도 해야 되고, 이런 것도 해야 되고, 저런 것도 해야 됩니다.
제가 잘 아는 형님이 어느 기업체의 부사장으로 있습니다. 예수를 참 잘 믿습니다.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열심히 믿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형님의 고백이 “나는 직장과 가정과 교회 밖에는 없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가는 곳이 직장, 그리고 집, 그리고 교회 밖에는 없다는 거예요. 무슨 취미 생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교 생활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형님의 고백이 “그래서 내가 따돌림을 당하고 외로울 때가 있다.” 여러분, 이것이 신실한 예수를 믿는 남자의 고백이요 현실입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 고난이나 시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사실 신앙의 자유는 요구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이 세상은 버가모와 같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버가모와 같은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십니다. 여기에도 교회를 세우시고 저기에도 교회를 세우시고, 마치 바다에 섬들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사방은 물 천지이지만, 그럼에도 사람이 기댈 수 있는 구원의 반석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버가모에 사단의 위가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