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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성 초산진격의 명성 스크랩 신령전투/6사단(청성부대),7사단(칠성부대)5연대
8-19김선웅아빠,1중대2소대 추천 0 조회 653 09.04.08 12: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령전투(1950.8.30-9.15)

   신령전투는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공세(9월공세)를 취하여 한국군 제8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영천 동측방으로 진출하고 있을 때, 영천 북방의 신령 지역을 방어중이던 한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8사단의 침공을 저지하여 이들의 영천 지역 진출을 막아낸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 제6사단은 신령 북쪽의 조림산과 화산동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북한군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던 중, 10여 대의 전차로 증강된 북한군 제8사단이 공격을 가해 오자 17일 동안의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이들을 격퇴하였으며, 이 교전에서 사단특공대는 새로 지급된 3.5인치 로케트포로 북한군 전차 8대를 파괴하여 전차 중심의 돌파작전을 시도하던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때, 북한군 제8사단은 유엔 공군의 활발한 활동에 제압되어 주로 야간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한국군 제6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 전투로, 북한군 제15사단은 영천 지역에서 고립된 채 각개격파당하는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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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군기 사례

신령지구 지뢰폭발사고

※ 출처 : 육군본부, 교육참고 7-7-6『전장사례연구(3)』,1987

  • 작전일시 : 1950년 8월 25일
  • 작전지역 : 경북 신령
  • 아 군 : 제7사단 제5연대, 제6사단 제2연대 제2대대

1. 사례 (1) : 연대장 보직 신고후 복귀중 지뢰사고

 

  1.1. 1950년 8월중순, 제6사단은 군위(영천북방 50㎞)와 신령(영천북방 15㎞)어간에서 영천을 탈취하기 위하여 최후 발악을 하는 북한 제2군단 주력(제 1 및 8사단)과 대치하여 일진 일퇴의 격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8월 13일부터 가열되기 시작한 전황은 8월 하순에 접어들자 더욱 치열해졌고 전세는 아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안간힘을 다하여 지탱해오던 대대 거점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하자 사단장 김종오 장군은 부득이 예하 연대에 지시하여 방어지역 종심에 계획된 저지진지로의 축자적인 지연전을 실시케 하는 한편, 보전협동에 의한 적의 근접 추격을 저지하기 위한 지뢰지대의 설치를 제1공병단 예하 제9야전공병대대(사단지원)에 지시했다.

  1.2. 적 침공시 아군은 대전차화기는 물론, 단 1발의 대전차지뢰도 보유하고 있지 않아(주 : 부평에 있는 병기대대에 대전차지뢰를 보유하고 있었음) 육탄공격에 의한 극소수의 적 전차 파괴를 제외하고는 그저 적전차에 밀려내려 오기만 했으나, 유엔군의 참전에 따라 전차의 투입과 함께 대전차지뢰의 운용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육군 본부에서는 아직 익숙하지 못한 일선부대들의 지뢰지대 운용에서 오는 안전 문제를 고려하여 훈령 제33호(1950. 8. 14)를 하달 지뢰지대 설치시는 보병, 포병, 공병장교가 합동정찰을 시도하여 그 위치를 선정하고 필히 해당지구 작전부대장의 승인을 받도록 강조하는 한편, 지뢰지대에 대한 표지와 경계병의 배치는 물론, 이 지역을 왕래하는 장병들에 대한 엄정한 야전군기의 확립도 아울러 지시했다.

  1.3. 사단장으로부터 작업지시를 받은 제9야전공병대대는 작전지역내의 연대 및 대대와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신령-이화동간의 무명 도로변 일대에 계획된 대전차지뢰 318발과 대인지뢰 180발 가운데 8월 25일 11:00까지 80%를 매설한 다음 나머지 20%는 전방부대의 철수 완료와 동시에 매설하기로 하고 지뢰지대 양단에 경계병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1.4. 제7연대와 인접하여 사단의 좌전방 방어에 임하고 있던 민부대(개전초 제7사단의 잔류병력으로 구성된 잠정부대)는 8월 20일 제5연대로 개칭된후, 8월 25일부로 제6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날 제5연대장으로부임한 이영규 중령은 사단사령부(신령)에 들려 사단장에게 보직 및 배속신고를 마친 다음, 작명을 수령한후 긴박한 전황의 타개책을 구상하면서 전귀리(신령 서북방 9㎞)에 위치한 연대 본부로 복귀중에 있었다. 연대본부에는 작명수령과 새로 부임한 연대장에 대한 인사차 각 대대장들이 대기중에 있었기 때문에 연대장은 물론, 동승한 작전주임까지도 다소 조급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동일 11:30경, 신령 서북방 10㎞지점 철로변에 좌회전하여 범화동 입구에 이르렀을 무렵, "앞에 총" 자세의 한 초병이 ?차앞을 정면으로 가로 막았다. 절도있는 초병의 거수경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야, 이새끼, 넌 도대체 누구냐?" 카랑카랑한 작전주임의 목소리가 울렸다. 예! 공병대대에서 나온 경계병입니다. "이 안쪽에는 지뢰가 매설되어 있읍니다. 못들어 갑니다"하고 대답하였다.

  1.5. 연대장이 작전주임에게 지뢰 매설관계를 물어볼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야 이새끼, 누구 차인줄 알고 함부로 세워! 연대장님 이시다. 썩 비켜!"하고 낮으막하긴 했지만 몹시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고는 독촉의 신호로써 운전병의 어깨를 탁 쳤다. "연대장님! 큰일납니다. 큰일납니다."하고 외치는 경계병을 ?차 밤바로서 거의 밀어 제치다시피하고는 차를 달렸다. "아직 이곳까지는 지뢰 매설을 하지 않았는데도 공병중대장이 과잉경계를 하는 모양이구나"하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연대장이 묵묵히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1.6. 연대장이 탑승한 차량이 약 200m를 나아가 커브 길의 모퉁이를 막 돌 무렵, "꽝"하는 폭음과 함께 ?차가 허공에 "붕"뜬후, 산산조각이 되어 주변에 흩어졌다. 발을 동동 굴리고 있던 초병이 폭음소리가 울리자 땅바닥에 풀석 주저 앉으면서 "연대장님! 졸병의 말도 필요할땐 들어셔야지요"하고 땅을 치면서 분통해 했다. 이 사고로 연대장을 포함한 탑승인원 5명이 전원 전사했다.

※ 교훈

  • 육본에서 하달된 훈령이 12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단(당시 중간제대 없음)에서는 이를 시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는 명령에 대한 존엄성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입증하고 있다. 이 전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초의 제지를 무시한 장교들의 제규정 이행에 대한 기본자세이다.
  • 연대장과 작전주임도 평소에는 부하들에게 신성한 보초임무의 강조는 물론, 제규정에 엄정한 이행을 수없이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공병 중대장의 과잉조치라고 가볍게 판단하고는 보초의 신성성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2. 사례 (2) : 철수부대 지뢰사고

  2.1. 8월 25일 밤, 제6사단 예하 제2연대는 사단의 지연작전 계획에 따라 지시된 종심저지진지로 철수중에 있었다. 한편, 제2연대 지역내의 지뢰지대 설치임무를 부여받은 공병중대는 25일 오후까지 이화동 일대에 계획된 지뢰매설을 끝마치고, 전방 보병부대들이 철수시, 안전통로를 따라 후방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경계병 2명을 안전통로 입구에 배치하고 "우군부대를 유도하고 이들의 철수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 철수하라"는 임무를 부여한 다음, 예하전 중대원은 신령에 있는 중대 숙영지로 철수했다.

  2.2. 제2연대의 좌일선 대대인 제2대대는 연대의 철수명령에 따라 8월 26일 미명을 기하여 이화동 서북방의 방어진지(국동산)에서 적과의 접촉을 끊고 철수를 개시했다. 이미 이때에는 대대 철수로상의 곳곳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으나, 이를 전혀 모르는 대대장을 비롯한 대대장병들은 "철수"에서 오는 울분을 억누르고 다음 진지에서는 반드시 산화한 전우들의 원한을 풀어주겠노라고 굳게 다짐하면서 어둠속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2.3. 한편, 공병중대에서 배치해 둔 2명의 경계병은 밤새 보병부대들의 힘빠진 철수광경을 지켜보고는 당장이라도 자기들 앞에 적이 와락 나타날 것만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안절부절 하면서 25일 밤을 보낸다음, 8월 26일 새벽녁에, 약 1개소대 규모의 병력들이 통과하기에 이들이 마지막 부대이겠지 하는 생각에 "아직도 전방에 아군이 있읍니까?하고 후미병사에게 문의 했다. "확실히 모르겠는데……?" 한쪽발을 쩔룩거리면서 힘겹게 뒤 따라가는 병사의 맥빠진 대답이었다. "분명히 이게 마지막 부대다"라고 자기들 나름대로 판단한후 이들 경계병은 막중한 임무를 져버린채, 후방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2.4. 한편 후위중대 바로 앞에서 행군을 계속 지휘하고 있던 대대 지휘부 요원들은 새벽 5시경, 이화동을 통과한후 2명의 경계병이 배치되어 있던 곳을 지나 얼마간을 더 나아갔을 무렵 느닷없이 "꽝"하는 폭음이 울렸다. 모두 깜짝 놀라 좌우로 허둥거리는 순간 몇발의 폭음이 계속됐다. 이리하여 대대장을 포함한 7명이 전사하고 12명의 행방불명자와 20명의 부상자를 내고 말았다.

※ 교훈

  • 공병 중대장이 관계 대대장에게 지뢰지대 설치에 대한 통보를 하지 않은 것도 큰 실책이거니와 한 사람의 장교를 마땅히 보초와 함게 잔류시켜 두었어야 했다. 보초의 무단이탈은 평소 명령과 규정의 이행에 대한 지휘관의 비 솔선수범적인 행동의 영향으로 보아 무방하다.
  • 비록, 보초만 잔류시키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라 할지라도, 보초의 조기 철수가 전방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우군에게 미칠 결과를 충분히 인식시킴과 동시에 보병의 완전철수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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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및 거부작전

신령지구전투

※ 출처 : 육군본부, 교육참고 7-7-6『전장사례연구(3)』,1987

  • 작전일시 : 1950년 8월 30일 ∼ 9월 6일
  • 작전지역 : 경북 영천 신령
  • 적 군 : 북한군 제8사단
  • 아 군 : 제6사단 공병대대

1. 상황 ※ 9월공세 상황도

  1.1. 북한군 제2군단은 그들의 주공이 지향된 다부동-효령 일대의 돌파계획이 좌절되자, 의흥-신령 축선에 투입된 제8사단에 전차부대를 증원하였다. 이에 고무된 적 제8사단은 신령-하양을 목표로 대대적인 돌파 및 침투 작전을 펼치면서 조림산-화산까지 진출하였다.

  1.2.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면서, 낙동강 전선의 남서부 지역은 미군이 담당하고 있었고 북동부 산악지역은 한국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한국군 제2군단 지역의 중심부를 맡은 제6사단은 영천-안동간 국도와 서울과 경주를 연결하는 남부 철로에 걸쳐 배치되어 있었다. 사단의 전투정면은 전선이 굴곡되어 있어 엄청나게 넓어, 화력과 장애물의 효과적인 운용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다. 당시 공병은 그동안의 대소작전에서의 공병의 실추된 위신을 만화히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려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령지구에서만도 두 차례의 지뢰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1.3. 이 사례는 제6사단 공병대대가 낙동강 전선에서 가장 어려웠던 고비중에서도 보병을 지원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사실을 당시 제6사단 미군사 고문단이었던 데비드-켐펠소령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것이다.

2. 작전경과 ※ 작전상황도

  2.1. 8월 31일∼9월 1일 야간에 한국군 제6사단 공병대대 제1중대는 제2지뢰지대의 연장부(제3지뢰지대)에 90발의 M3대인지뢰를 매설했다. 이들은 지뢰를 역활꼴로 매설했다. 활꼴로 지뢰를 매설하는 것은 북한군이 통상 쓰는 방식이며 소련군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역활꼴로 매설하면 그형태가 주는 효율성의 잇점뿐만 아니라 기만효과도 누릴수 있었다. 왜냐하면 북한군이 이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02:00 작업을 마치고 지뢰매설반을 철수했다. 우리는 이 지뢰지대가 주는 방어효과의 잇점을 사려서 적이 지뢰지대 동쪽으로 빠져들도록 유인했다. 바로 그때 북한군 1개 보병중대가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요덕동 방면으로부터 떼를 지어 똑바로 전진해왔다. 적 중대원 대부분이 지뢰지대 첫번째 지뢰열에 들어섰고 맨처음 인계철선이 절단되자 마자 적군은 비명을 질렀다. 적 공격부대는 공포에 떨어 당황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인계철선을 건드렸다. 모든 일은 5분도 채 안걸렸지만, 그결과는 약100명의 사상자가 생긴 것으로 판단되었다. 적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우리는 지뢰지대의 보강 작업도 못한채 돌아왔다.

  2.2. 아군 침투반들은 적진 깊숙히 들어가서 많은 부비츄렙을 설치해 놓고 모든 기록을 주도 면밀하게 유지했다. 같은날 대전차지뢰에도 B/T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제1지뢰지대를 제외하고는 대전차지뢰에 대한 B/T 장치를 한 적이 없었다. 정면이 500야드 이상이나 되는 지뢰지대에 우리는 20% 정도의 B/T장치를 설치했다. 그날 저녁(9월 1일∼2일) 추가로 두개의 지뢰지대를 설치했다. 이들중의 하나인 제4지뢰지대는 요덕동 후방에 설치했는데 이것은 우리의 대전차 장애물 계획의 일환으로 설치된 것인데 우리편이 그 지뢰를 폭파시키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했다. 이 지뢰지대는 90야드 이상의 정면에 90발의 대인지뢰에다 인계철선을 연결한 것이다. 다른 지뢰지대는 국도의 도로봉쇄 지점 좌측에 설치되었다. 사단 우측방에 대한 병력 증강이 절실히 요구되었으므로, 도로 봉쇄를 위하여 공병 소대까지도 재배치해야 할 형편이었다.

  2.3. 9월 2일∼3일 야간에 지뢰지대 설치를 계속하여 추가적으로 두개의 지뢰지대 설치작업을 마쳤다. 이들 지뢰지대가 완성되기 바로 전에 사단의 좌익을 담당하던 보병부대가 이들 지뢰지대 후방으로 이동했으며, 그 후에 지뢰매설 목적으로 남겨두었던 간격이 완전히 메워졌다. 전에 이미 설치했었던 지뢰지대에 대한 보강작업을 계속했고 적에게 공격을 받았던 제2지뢰지대까지도 보강작업을 했다. 제2지뢰지대에 그대로 방치된 적의 시체는 추후 이 지점에 공격해올지도 모르는 다른 적들에 대한 경고로서 안성맞춤이 됐다. 일단 아군은 사단정면에 지뢰지대를 설치했고 전선을 재조정 해놓았으므로 아군은 적공격에 대한 방어준비가 된 셈이다.

  2.4. 9월 3일∼4일 야간에 아군은 공병으로 구성된 3개조의 3.5로켓포조를 편성했다. 19:00 중대장은 도로대화구로 이동해서 다른 조의 사격소리를 듣기 이전에는 사격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고, 여기에 제1조(공병 4명)를 남겨놓았다. 도로상의 200야드 북방에 19연대에서 차출한 제2조를 탱크 함정의 북쪽 끝에서 사격소리를 들을 때까지 조용히 있으라는 지시를 하고 남겨 놓았다. 세번째 로켓포조는 중대장이 이끄는 공병 1개 소대와 함께 화수동에 있는 교량까지 갔다. 제4 지뢰지대의 왼쪽으로 돌아서 이동하여 정숙를 유지하고 은폐하여 대기한 다음, 적에게 발각 당하지 않고 적진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화수동의 교량이 이미 미 공군에 의해 파괴되었음을 발견 했으나 적은 교량 북동쪽 50야드 지점에 도섭장을 만들었다. 교량북방의 강에서부터 도섭장까지 급조 지뢰지대를 설치했다. 달빛으로 인해 작업이 수월했으며 멀리서 터지는 포사격으로 인한 섬광이 작업중인 아군의 가시거리를 한층 더 증가시켰다. 로켓포 조는 교량남방에서 200야드 떨어졌고 도로에서는 약 50야드쯤 되는 지점에 진지를 선정했다. 우리의 포사격이 적을 맹타하고 있었음을 들을때 우리가 이 지역으로 오기전에 우리의 이동을 협조해 놓았던 점이 기쁘게 생각되었다.

  2.5. 한 밤중에 우리가 진지를 구축을 마친지 45분 가량되었을때 적 탱크들이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이들은 지뢰 소탕반을 앞세우고 내려왔는데 도로 상단부에서 지뢰를 쉽게 발견하였다. 우리는 적 선발대원이 무릎을 꿇더니 검사도 하지 않고 지뢰를 도로의 노견부 속으로 집어던져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지뢰들은 사전에 B/T장치가 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폭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 공병들이 지뢰를 함부로 다루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은 기습을 받았던게 틀림이 없었다.

  2.6. 적 탱크들이 지뢰지대를 돌파하여 보병부대와 함께 강을 건너 계속 전진해왔다. 나는 몇 대의 탱크가 지나갔는지 모르겠으나 포사격으로 인한 섬광으로 T-34탱크 5대는 셀수 있었다. 20분동안 우리 진지를 통과한 적 탱크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중대장은 공병 2개 분대를 보내어 도로상에 정밀 지뢰지대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모든 지뢰에 B/T 장치를 설치했다. 지뢰매설 분대가 진지로 돌아온 이후, 적 탱크 한대가 도보 부대를 동반하지 않은 채 도로위로 다가오고 있었다. 중대장이 추측하기로는 이것도 처음 탱크들과 같은 패였으나, 뒤에 쳐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탱크는 교량끝까지 와서 정지했다. 승무원 하나가 탱크 밖으로 기어 나올때 우리 바쥬카포조가 50야드까지 다가가서 사격을 가했다. 포탄은 적 탱크 선회탑 바로 뒤에 명중했다. 승무원중 아무도 도망치지 못했으므로 도로를 가로 막은채 탱크가 타기 사작했다. 한국군 병사들은 수분동안 흥분하여 그들의 소총을 발사하여 인근에 있던 적을 제압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신속하게 진지로 철수했다. 곧 남쪽에서 대량의 사격소리를 들었는데 이는 우리의 다른 조들의 적과 조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2.7. 제1조는 적의 맨 처음 탱크가 멈춰야 했던 도로 화구에서 75피이트 정도 상단에 위치에 있었다. 제1조는 정숙을 유지하고 첫번째 적 보·전협동조가 다가오도록 놓아 두었다. 10내지 15명의 적 공병들은 도로를 따라 지뢰를 탐지하기 위해 무릎을 끓고 손으로 더듬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첫번째 B/T장치가 되어있는 지뢰에 도달했을 때 지뢰의 압력판을 만지더니 홱 잡아챘다. 이 폭발로 이들 모두가 다 죽어버렸다.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적 보병들은 노견부를 향해 서둘러 오더니 즉각적으로 대인지뢰에 설치해논 인계철선에 걸려들었더,. 적은 50내지 100명 가량 되었는데 틀림없이 반수는 죽었다. 지금까지 우리 바쥬카포조는 어느조도 사격을 않고 있었다. 적 탱크 5대가 제2조 앞을 지나갔으나 그들은 더 많은 탱크가 오지 않을까 하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마지막임을 알았을 때 마지막 탱크는 그들 사정거리에서 이미 벗어나고 있었다. 로켓포조는 도로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이 도로의 커브를 돌았을 때 5번째 탱크의 뒷면과의 거리는 불과 15내지 20야드 정도였다. 아군 사수가 지뢰폭발 소리를 듣자마자 즉시 그는 적 탱크에 사격을 가했다. 이 탱크는 길을 가로 막은 채 폭파되어 타기 시작했다. 이 로켓포조는 신속히 제방으로 기어 올라 자기진지를 향해 돌아왔다.

  2.8. 순식간에 이 두 행동을 해치웠는데 첫번째 폭발로 탱크는 도로 밖으로 펄쩍 뛰어 30피이트 아래로 굴러 논 바닥에 거꾸로 쳐 박혔다. 제1조는 다른 탱크에 대해 사격을 가할 위치에 있지 않았으므로 아군 진지로 향해 철수를 했다. 야간에 로켓포조들은 그 도로에 나가서 적 탱크 두대를 파괴시켜 버렸다. 한대는 보병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나머지 한대를 놓고 보병과 공병사이에 서로 자기들이 파괴했노라 실랑이를 벌렸다. 이것으로 열띤 논쟁을 벌렸는데, 그 이유는 정부가 탱크 한대를 부수는데 10만원의 상여금을 지급한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T-34 5대를 파괴한 셈이었다. 다음날 아침 소렌슨 중령은 공중 정찰대를 전방에 내보내고 나서 별명이 "모기"라는 아군 폭격기들을 불러 그 지역을 소탕했다. 이 폭격기들은 우리의 탱크함정 속에서 추가적으로 적 탱크 9대가 빠져 있음을 발견했으며 공중폭격으로 9대 모두 파괴시켰다.

  2.9. 적 탱크 잡는 파티는 끝났으나 다른 문제점들이 있었다. 북쪽에서의 압력이 커지자 우익에 병력을 증강해야만 했다. 포로가 된 적 기갑 소대장에 의하면 적은 9월 1일 85대의 탱크가 파괴됐으므로 적도 상당히 피해를 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우리는 현 진지가 적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 낼것이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국도상에 도로대화구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적선으로 된 아군전선을 넘어서 추가적인 지뢰지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또한 우리는 철도 터널 봉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터널 봉쇄계획은 TNT를 준비하는 동안 보류되고 있었다. 터널의 동쪽 끝에 2,350파운드의 TNT장약을 암반위에 설치하여 터널 입구를 완전히 봉쇄해 버릴려고 했다. 서쪽 끝에는 900파운드만 장진했다. 서쪽 끝은 완전히 봉쇄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폭약을 장진했는데 이유는 적을 이쪽 입구로 유인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52개의 부비츄렙을 설치하고 인계철선을 늘여놓았다. 모든 준비는 9월 5일에 완료되었으며 폭파는 다음날 실시할 예정이었다.

  2.10. 9월 5일 적은 한국군 제8사단(아군 우측)정면으로 공격을 가해와서 9월 9일∼10일에는 우리 후방 약 10마일 지점의 영천을 함락시켰다. 19연대가 우리 후방방호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전선을 축소해야만 했다. 우리가 이동을 하면서 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한 것은 바로 지뢰지대 덕분이었다. 우리 자신의 방어대책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적진에 약 10마일 정도 침투하여 화수동까지 가서 지뢰와 부비츄렙을 설치했다.

  2.11. 9월 6일 우리는 터널을 폭파했다. 터널을 폭파한 후 곧 우리는 서쪽입구로 들어가서 부비츄렙 장치를 완성했다. 이때 한국군 제2연대가 철수해오고 있었다. 제2연대 병력이 터널을 지나서 산위로 이동하고 있었을 때 적들은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서 터널을 이용하려고 했다. 적의 선두에 있던 병사가 아군 부비츄렙에 걸려들어 6∼7명이 죽었다. 적 추격부대는 급히 철수해서 거점을 확보한 뒤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후퇴하는 아군병력을 차단하려고 북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적은 남쪽으로부터 제8지뢰지대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10명 내지 15명의 병력의 손실을 보았다. 이들이 와해되어 요덕동 도로를 따라 남으로 783고지를 향해 철수하고 있을때 또 다른 적들이 제2, 3지뢰지대를 통해 증강된 연대규모의 병력으로 의기양양하게 공격을 가해왔다. 이 지뢰지대는 500여발의 대인지뢰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소화기 화력으로 엄호되었다. 소총과 기관총 사격은 적을 저지하지 못했지만 지뢰가 그들을 잠깐동안 통로를 찾으려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자동화기와 지뢰에 의해 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 공격은 잠시후 멎어졌으며 우리 보병들은 적으로부터 어떤 방해도 받지않고 후퇴할 수 있었다.

  2.12. 이 교전 이후 전선을 축소시키면서 우리는 계속 도로대화구를 설치하고 지뢰지대를 증가시켰다. 이후 한국군은 지뢰지대에 대해 대단한 신뢰를 하게 되었으며 특히 지뢰지대가 타 방호 수단을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3. 교훈

    3.1. 장벽이란 적의 이동을 유도, 전환, 제한, 지연 또는 정지시키고 적에게 인원 시간 및 장비의 추가적인 손실을 강요하기 위하여 운용되는 협조된 자연 및 인공 장애물의 결합체이다. 전투시 장벽은 부대의 전투능률을 최대한으로 증가시킬 수 있도록 전후방 전 종심상에서 운용하여야 한다. 특히 방어작전시에는 방어화력의 효과를 증대시키고 적의 이동을 지연 및 제한하여 시간을 획득하며 병력절약과 측후방 경계를 할 수 있도록 운용하여야 한다.

    3.2. 지뢰지대는 단계화하여 설치하며 각 지뢰지대는 다음 지뢰지대의 완성을 위한 시간을 얻도록 계획하고 위치시켜야 한다. 설치의 우선순위는 통상 부대임무 수행의 기여도에 의하여 결정되며 일반적으로 전방에서 후방으로 설치하고 위험한 측방을 방호하거나 적이 가능한 접근로의 차단 또는 중요지형지물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는데 우선적으로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3.3. 이 전례에서는 공병이 설치한 지뢰에 의하여 적이 많은 손실을 봄으로써, 우리는 지뢰지대 설치의 중요성과 그 역할에 대한 신뢰감을 얻을 수 있다.

※ 영향 : 제6사단이 신녕지역에서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저지함으로써 영천지역의 돌파 확장을 방지할 수 있었고, 제19연대 전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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