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시즌 |
출전 | 득점 | 도움 | 공격포인트 | 슈팅 | 파울 | 경고 | 퇴장 | 코너킥 | 오프사이드 | 경기당 득점 | |
정규리그 | 2 | 0 | 0 | 0 | 0 | 1 | 0 | 0 | 0 | 0 | 0.00 |
합계 | 10 | 0 | 1 | 1 | 2 | 8 | 0 | 0 | 1 | 0 | 0.00 |
역대 성적 |
년도 | 리그 | 소속 | 출전 | 득점 | 도움 | 공격포인트 | 슈팅 | 파울 | 경고 | 퇴장 | 코너킥 | 오프사이드 | 경기당 득점 |
2005 | 풀컵 | 수원 | 7 | 0 | 0 | 0 | 2 | 5 | 1 | 0 | 1 | 1 | 0.00 |
2005 | 정규리그 | 수원 | 16 | 0 | 0 | 0 | 2 | 23 | 4 | 0 | 6 | 1 | 0.00 |
2004 | 풀컵 | 수원 | 12 | 0 | 2 | 2 | 1 | 15 | 1 | 0 | 7 | 1 | 0.00 |
2004 | 정규리그 | 수원 | 23 | 1 | 2 | 3 | 4 | 36 | 2 | 0 | 4 | 0 | 0.04 |
2003 | 정규리그 | 수원 | 23 | 0 | 0 | 0 | 1 | 17 | 2 | 0 | 1 | 2 | 0.00 |
2002 | 정규리그 | 수원 | 11 | 0 | 0 | 0 | 1 | 10 | 1 | 0 | 2 | 0 | 0.00 |
Total | 92 | 1 | 4 | 5 | 11 | 106 | 11 | 0 | 21 | 5 | 0.01 |
히딩크 감독은 한국선수들이 열심히는 하지만 가끔 열정이 지나칠 때가 있다고 자주 지적해왔다. 이러한 지적을 가장 많이 듣는 선수 가운데 한 명이 최성용 선수이다.
최성용 선수는 스스로 이천수 선수나 고종수 선수같은 재능은 없지만 어릴 때부터 무조건 열심히 하라고 배웠고 열심히만 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너무 열기에 빠지다 보니 진짜 뭔가 해야 될 때 제 역할을 못하는 것이 자신의 단점 중 하나라고 꼬집기도 한다.
1990년 16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을 시작으로 1993년 세계 청소년(20세 이하)선수권대회, 96년 아틀란타 올림픽대표, 98년 월드컵 대표까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가 대표 명단에서 제외된 적은 없다.
화려하게 드러난 적은 없지만 언제나 강한 투지와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바탕으로 상대 키 플레이어의 발을 꽁꽁 묶는 '전담 마크맨'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쳐왔다. 또한 오른쪽 윙백으로서 순간적인 공격가담에 의한 어시스트도 그가 가진 장기이다.
'비쇼베츠 사단'의 일원이던 96아틀란타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 결승전에서는 당시 일본의 에이스 였던 마에조노 선수를 꽁꽁 묶어 대회 우승을 이끌어냈고, 그는 경기 MVP를 안았다.
올림픽 본선에서는 가나의 득점원 아코노르 선수를 밀착마크해 48년만에 올림픽 본선 첫 승에 기여했고, 2000년 4월 한-일전에서는 아시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였던 나카타 선수를 악착같이 따라 붙어 일본의 볼 배급을 완전히 차단, 이날 승리의 일등 공신이 되기도 했다.
또한 99년 3월 브라질 전을 승리로 이끈 김도훈 선수의 골도 그의 도움이었다. '플레이메이커 킬러'임과 동시에 힘있는 돌파와 결정적인 크로스를 선보이는 그는 언제나 대표팀에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오죽하면 별명이 '폭주기관차'와 '최를로스'이겠는가?
98프랑스월드컵은 그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본선 진출을 확정짓기 전까지는 많은 출장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성실한 훈련자세와 그라운드에서의 열의는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었고 아랍에미레이트와의 원정경기 이후부터 거의 모든 경기에 출장한다.
98프랑스월드컵 본선 세 경기는 그가 평생 선수생활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경기라고 꼽는다. 그 만큼 국제 수준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하고 온 것이다.
군 복무를 마친 최성용은 바로 일본행을 선택한다. 비록 아시아이긴 했지만, 한국에서 프로 경력이 전무한 그가 일단 해외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최성용은 99과 2000년 두 시즌 동안 빗셀 고배에서 51경기에 출전한다. 그는 일본에서 무엇보다 프로 선수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배우게 된다.
2001년 1월 빗셀 고베는 구단이 감량 경영을 시작하면서 하석주 선수와 최성용 선수를 방출하게 된다. 당시 하석주 선수는 국내 복귀를 원했고, 포항 스틸러스에 돌아와 국내리그에 안착한다. 그러나 최성용 선수는 아직 자신이 젊다고 생각했고, 더 큰 무대로 나가고 싶은 꿈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는 청운의 꿈을 안고 독일로 떠난다. 독일 프로팀에서 입단 테스트도 받았다. 테스트 결과는 좋았지만, 여러 계약 조건이 맞지 않았다. 한 국가의 대표선수로서 입단 테스트를 받은 것만해도 자존심은 굽힐만큼 굽힌 것이다. 2001년 2월 좀 더 대접을 받으며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는 오스트리아로 라스크린츠팀과 입단계약을 체결한다.
오스트리아가 조금 떨어지는 리그라고 하지만, 유럽리그에서 그의 적응 속도는 무서웠다. 최성용 선수는 단 두경기 만에 데뷔 골을 터뜨린다. 그리고 계속된 경기에 최성용 선수는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오스트리아 무대에서도 인정을 받게 된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더 있는 덩치 큰 유럽 선수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경기를 계속하다보니 최성용 선수는 자신감이 넘쳐있었다.
최성용 선수가 유럽 생활에서 얻은 것은 자신감이었다. 함께 뛰어보니까 유럽 선수들에 비해서 우리 선수들이 밀리는 것은 언어와 전술이해도 정도였다. 우리도 제대로 배우기만 했다면 훨씬 잘 할 텐데....98년의 기억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기는 절대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유럽 아이들은 그 나이 때에 배울 것을 정확히 배우며 성장하는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기는 법만 배웠고, 최성용 자신도 배운 대로 죽도록 열심히만 한 것이었다.
감독과 자연스럽게 의견을 주고받는 자유로운 축구문화 또한 그가 유럽에서 배운 것이었다. 원래 틀 속에 메이기 싫어하던 최성용이 또 한 번 틀을 깬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유럽생활은 길지 못했다. 라스크린츠는 다음 시즌 2부 리그로 떨어질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고,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2부 리그에서 뛴다면 오스트리아에서 두각을 나타내 더 큰 리그로 나간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욕심은 남지만 과감하게 국내로 돌아오기로 한다. 국내 프로축구도 그 동안 많이 변해있었고, 그는 수원 삼성에 입단하기로 결정을 했다. 28살 나이에 신인 아닌 신인으로 한국 프로리그에 데뷔를 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 그는 여러 포지션을 옮기며 시험대에 올랐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오른쪽 측면은 물론 왼쪽 측면, 수비형 미드필더, 심지어는 공격수까지 참 많은 포지션을 소화하며 부상이 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엔트리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컨페더레이션스컵 멕시코 전에서 황선홍 선수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히딩크 감독 초기 '황태자'같은 화려한 수식어는 없었지만 언제나 팀에서 한 몫을 하는 스타팅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이름을 스타팅에서 찾기가 쉽지 않아 졌다. 그의 기량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주변 상황이 조금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히딩크 감독이 좋아하는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가 주로 서는 오른쪽 날개에는 '황태자' 송종국 선수가 버티고 있고, 수비형 미드필더에도 김남일 선수가 무섭게 성장하여 버티고 있다.
하지만 멀티플레이어 송종국 선수가 자리를 옮기거나 스타팅 중 한 명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그 자리는 반드시 그의 몫이 될 것이다. 상대 팀 컬러가 어떠냐에 따라 그는 언제든 주전으로 기용될 준비가 되어있다. 그는 후보로 남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기량을 가지고 있다.
최성용 선수는 대표팀에서 노장도 아니고 '젊은 피'도 아닌 몇 안 되는 중 고참 선수다. 또 하나 그가 대표팀에 반드시 필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비록 2002월드컵에서는 한 게임도 뛰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월드컵 4강 신화'의 일원임은 확실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 좋은 활약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