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이경숙의 <노자> 해석
수년 전에 중앙일보에 <노자>에 대해 획기적인 해석을 하는 이경숙이라는 여자가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을 썼는데 그게 말이 된다는 겁니다. 좀 이상한 중앙일보 신문기자가 이 여자를 띄우려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잘 안 됐습니다.
그 후 2년쯤 지나 이씨가 쓴 책이 <완역 이경숙 도덕경 상.하>입니다. 자기 딴에는 공부도 더 했다하고, 정통파인 것처럼 젊잖은 흉내 낸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도 개판이고 거의 100% 틀린 해석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틀린 책이 어떻게 버젓이 출판될 수 있는지 궁금 할겁니다. 별거 아닙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무지해서 그런 겁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보면 말도 안 되는 기독교의 독단과 배타적 교리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도무지 생각을 하지 않고, 확인도 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여자의 문제는 <노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요즘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비해 우리나라의 고대사에 대한 재야의 연구가 활발합니다. <환단고기>라는 책에 “천부경”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여자가 해석한 것을 가지고 논의를 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이 여자 말 듣고 그걸 기초로 이해하고 판단한다? 미친 짓입니다. 저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사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서는 판본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어제 네이버에서 이 여자의 <노자>해설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는 분이 있어서 오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글을 써 놓는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 한 약속이지만 이 글 쓰느라 하룻밤 샜습니다. (2007.4.9. 임시판) (6/15 1차 완성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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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이경숙의 ‘시지불견視之不見’ 해설 비판
이 글은 『노자』14장 첫 구절인 ‘시지불견視之不見’에 대한 이경숙의 해설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씨의 해설은 『완역 이경숙 도덕경』의 뒷 표지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이씨가 자신있게 말하는 부분입니다. 주 내용은 한자의 ‘갈 지之’자의 용법이고, 이씨는 아래 글 중에 “고전 번역에서 중요한 키가 되는 ’지之‘”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중요하다는 ’지之‘자의 용법에 대한 이씨의 말은 대부분 틀린 것입니다. 이거 틀리면 한문 모르는 겁니다. ‘갈 지之’자는『노자』5000여 자 중에서 약 240자를 차지합니다.
아래의 ‘이경숙의 글’이라는 부분은『완역 이경숙 도덕경』「도경」편(상권) 14장의 해설로 186페이지부터입니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락 구별이 없이 쓰여 있어서 보기 편하게 단락을 지은 것 외에는 조작한 것이 없습니다. 이 글에 표시된 번호는 비판을 위해 제가 붙인 것입니다.
참고; 『노자』제14장 첫 부분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시지불견, 명왈이; 청지불문, 명왈희; 박지부득, 명왈미.
이경숙:『완역 이경숙 도덕경』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이라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니 이름하여 희라 하며,
얻지 않고도 잡은 듯이 알 수 있음을 이름하여 미라 한다.
김용옥(도올): 『길과 얻음』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라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희라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미라한다.
최진석(서강대 교수): 백서『노자』해석임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일컬어 미라 하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일컬어 희라 하며,
만져 보지만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일컬어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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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의 글
"첫 구절을 보자.1)‘시지불견視之不見 명왈이名曰夷’다. 노자가 2)등선登仙한 후 2천5백 년 동안 이 문장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한다’로 이해되어왔다. 이 문장만 보면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당연해보인다. 그러나 3)그렇게 읽는 순간 이 장의 내용은 전체 문맥이 연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지리멸렬한 해괴한 내용이 되어버리고 만다. 다음 문장과의 연결이나 논리성은 차치하고라도 이 문장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문장이다.
4)‘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이름을 붙일 대상도 못 되는 ‘없는 존재’다. 보려고 애를 써도 보이지 않는 무엇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5)우리가 믿는 신이라는 것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의 존재를 믿을 만큼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꿈에서 보든, 그 소리를 환청으로 듣든, 환각 속에 듣든, 비몽사몽간에 듣든, 초능력으로 감응을 하든 간에 무엇인가 감지되는 징후가 있기 때문에 믿는다. 정 안 되면 그것을 직접 봤다든가 느껴봤다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믿는 것이다. 귀신이든 창조주든 부처든 그것은 예외가 없다.
6)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인간이 사유한 적은 없다. 그런 것을 가리켜 우리는 가공架空이라 한다. 만약에 도道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도는 가공의 물건이라는 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7)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노자가 관념 속에서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노자가 그렇게 말했을까? 그렇지 않다. 노자의 말을 우리가 똑바로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다.
‘시지불견視之不見’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본다’는 말이다. 문법적인 구조를 생각해보자. 우선 고전의 번역에서 중요한 키가 되는 ‘지之’의 용례와 용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의는 ‘갈 지’로서 영어의 ‘Go’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8)어조사로서 더 많이 쓰이고 있고, 앞뒤에 오는 글자의 품사와 구조에 따라 천변만화 온갖 형태의 접속을 보여주는 한자의 마술사가 이 ‘지之’라는 글자다.
‘A지B’의 구조인 경우 9)‘A’가 명사이고 ‘B’도 명사면 ‘지’는 소유격의 어조사다. 이때 번역은 ‘A의 B’라고 읽으면 된다. ‘군자지도君子之道’는 ‘군자의 도’이고, ‘천지지시天地之始’는 ‘천지의 시작’이며, ‘중묘지문 衆妙之門’은 ‘모든 묘한 것의 문’이다.
다음은 10)‘A지B’의 구조에서 ‘A’가 동사이고 ‘B’는 명사인 경우다. 이때는 ‘B를 A한다’가 된다. 앞에 나왔던 ‘처무위지사處無爲之事’는 ‘일을 무위로 처리한다’이다. 삽입된 ‘무위無爲’라는 부사절을 빼면 문장의 골격은 ‘처지사處之事’이다. 즉 ‘일에 처하다’ 또는 ‘일을 대하다’가 되는 것이다.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도 마찬가지다. 삽입된 부사절 11)‘불언不言(말없이)’을 빼면 ‘행지교行之敎’인데, 이것도 ‘행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행한다’이다.
다음은 12)‘A지B’의 구조에서 ‘A’가 동사이고 ‘B’도 동사면 이때는 ‘B하는 것을 A한다’가 된다. 역시 앞에 나왔던 구절을 예로 들면 13)‘막지능수 莫之能守’가 있다. ‘막莫’은 ‘없다’란 동사다. ‘수 守’는 ‘지킨다’는 동사다. ‘능能’이라는 부사를 빼고 보면 ‘막지수莫之守’가 된다. 이 말은 ‘지키는 것을 할 수 없다’이다. ‘이용지혹불영 而用之或不盈’도 마찬가지다. 어조사 ‘이而’와 ‘혹或’을 빼고 문장의 골격만 보면 ‘용지불영’이다. 번역을 하면 ‘쓸려고 하는 데 차 있지 않다’가 된다. 그러나 직역을 하면 ‘차 있지 않은 것을 쓴다’이다. 그러니까 차 있지 않아 쓸 수가 없다는 문장의 의미는 같다.
14)영어든 한문이든 복잡한 구조의 문장을 번역할 때는 수식어나 삽입구 같은 것을 다 덜어내고 주어와 술어만을 남겨 문장의 골격이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용지불영用之不盈’에서 ‘불不’까지 빼고 보면 더욱 명료하다. ‘용지영用之盈’이다. 이 문장을 ‘쓰는데 차 있다’고 읽을 사람은 없다 ‘차 있는 것을 쓴다’고 읽는다. 정리해서 말하면 ‘A지B’의 구조를 가진 문장에서 A가 동사인 경우 B가 무엇이든 간에 이 문장은 ‘A한다’가 골격이 된다.
그런 이치로 15)‘시지불견視之不見’을 보면 ‘지之’의 앞뒤에 있는 ‘시視’와 ‘불견不見’이 모두 동사다. 그래서 이 문장은 ‘불견不見’을 시視한다’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말인 것이다. 결코 ‘불견不見’이 주동사가 아닌 것이다. 이 문장의 주 술어는 바로 ‘시지 視之’이다. ‘본다’고 옮겨야지 ‘보이지 않는다’고 옮기면 정반대 의미의 문장이 되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청지불문 聽之不聞’은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가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이고 ‘박지부득 搏之不得’은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가 아니고 ‘얻지 않고도 잡을 수 있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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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판
1) ‘시지불견視之不見 명왈이名曰夷’는 기왕 띄어쓰기를 했으면 ‘시지불견視之不見, 명왈이名曰夷;’와 같이 방점을 붙여주어야 한다. 방점 표시가 그 사람의 문장 이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2) ‘등선登仙’이라는 말은 신선이 되었다는 말인데, 이씨는 『노자』를 읽는 목표가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한다. 웃기는 말이다.『노자』에 개인의 수양과 관계된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해석될 만한 구절이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일반인(백성)을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니다. 나는『노자』가 기본적으로 당시의 최고 정치적, 군사적 실력자의 리더십과 권력 사용에 대한 책이라고 본다. 그렇다고『노자』가 현재의 우리에게 무관한 것은 아니다. 천하보다는 작지만 가정에서나, 사회 조직의 운영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지금의 논의와는 큰 상관이 없다.
『노자』에 대한 내 의견이 틀린다 해도 ‘우화등선’은 도교(religious Taoism)의 목표는 돼도, 도가(philosophical Taoism)의 목표가 아니다. 노자는 후에 도교에서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는 신으로 추앙되었으나 노자와 거의 관계가 없다. 도교와 도가는 다르다.
3) 이씨의 두뇌 작동은 2000년 이상 노자를 읽은 보통사람들과 다르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도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황당한 자기 논리가 있고, 무반성적인 자기 확신이 있다. 그걸 남에게 전파하고 싶은 사람들이 사이비 교주가 되기 쉽다. 큰 소리로 떠들면 거기에 뭐나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씨는 ‘시지불견視之不見‘에 대한 기존 이해가 ‘전체 문맥이 연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지리멸렬한 해괴한 내용이 된다’고 하지만, 이씨를 뺀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치에 맞게 들린다.
4) ‘보이지 않는 무엇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이씨는 공기가 안 보이니 공기에 대해 생각도 못할 것이다.
5) ‘No one has ever seen God.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복음」; 이씨는 『노자』를 읽고 연구한 사람 뿐 아니라, 신을 보지 않고도 믿는 모든 종교인을 부정한다. 바이블에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고 쓰여 있는 걸 보면 ‘예수를 만났다’ 하는 기독교인들은 딴 것을 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믿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가?
6) 이씨는 자기가 ‘추상적 사고’나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
7) ‘도道’라는 것은 사람들의 이해에 따라 실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추상적 관념일 수도 있다. 관념도 실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관념실재론) 『노자』에서 ‘도道’의 의미는 여러 가지이다. ‘말할 수 없는 도’도 있고(1장 도가도비상도 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말할 수 있는 도’도 있다.(35장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도가 말해진 것은 담담하여 맛이 없다.)
8)‘갈 지之’자는 허사(虛辭)로 많이 쓰인다. 허사는 그 자체로는 문장 내에서 의미가 없으나, 문장을 연결하거나 의미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허사를 제대로 모르면 한문을 모르는 것이다. 이씨는 ‘시지불견’의 ‘지’자가 실사인지 허사인지 구별을 못하는 것이다.
이씨는 자기 생각으로 허사라 생각되는 한자가 나오면 일단 빼고 실사인 한자 몇 개만 가지고 들여다보거나 명상을 한다. 한자 몇 개가 선불교의 일종의 공안(公案)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데 그 후에는 그 생각을 이리저리 꿰맞춰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적 문장을 만든다.
9)이씨가 말하는 세가지 중 유일하게 맞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한문은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이면 아는 것이다.
10) ‘처무위지사處無爲之事’가 ‘일을 무위로 처리한다’라는 이씨의 번역은 보통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나 ‘무위’는 여기서는 부사절이 아니고 ‘함이 없음’이라는 명사인 것이다. 이것이 '지之'와 연결되어서 형용사화 되어 명사인 ‘사事’를 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위지사無爲之事’는 ‘함이 없는 일’이라는 의미의 명사절이 되어 ‘처處’의 목적어가 되는 것이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함이 없는 일에 처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씨는 ‘함이 없는 일(함)’이라는 역설적 언어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기 맘대로 이 글자도 빼보고 저 글자도 빼보면서 나름 말이 된다고 생각할 때까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경우 보통사람과 다른 특출한 발상이 나오는 것은 다 틀린 것이다. ‘무위無爲’라는 말은 이 한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노자』를 전체적으로 읽어가다 보면 그 의미를 알게 된다. 『노자』책을 몇 십 년 읽어도 끝끝내 모르는 사람도 있다.
11) 이씨는 ‘처지사處之事’니 ‘행지교行之敎’니 하는데 ‘처무위지사’나 ‘행불언지교’에서 가운데 수식어를 빼보고 생각하려면 '지之'자까지 빼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처사處事’가 되어 ‘일을 처리한다’, ‘행교行敎’는 ‘가르침을 행한다’가 되는 것이다.
한문은 ‘주어+동사+목적어’ 순으로 영어와 어순이 같다. ‘처지사處之事’나 ‘행지교行之敎’라는 문장은 본문에서 동사로 쓰이는 ‘처’나 ‘행’이 명사화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보통사람들은 품사의 활용이라고 한다.
12)이 부분이 이씨의 만고 이래의 돌창적인 발상이다. 물론 틀렸다. 이것이 틀린지 아는 내가 한문의 초보 수준이라는 데 이씨의 문제가 있다. 도무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A지B’의 구조에서 ‘A’가 동사이고 ‘B’도 동사면 이때는 ‘B하는 것을 A한다’가 된다.”는 이씨의 말은 독창적이다. 그리고 이씨 말대로 해도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이 거기에 뭔가 있나 기대하면 아무 헛소리나 해도 말이 되는 것 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부분은 심오하다는『노자』중에서도 신비적 색채가 있는 문장이 아닌가? 이것이 사이비 종교가 먹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13) ‘막지능수 莫之能守’라는 말은『노자』9장에 나온다. 원 문장은 ‘금옥만당, 막지능수 金玉滿堂, 莫之能守’이고, 직역하면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쉬운 말이다. “금과 옥이 집 안에 가득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이씨의 번역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는 사고 과정은 이씨의 것이 월등 독창적이고 천재적이다. 그러나 틀렸다. 이씨의 번역에도 ‘그것을’ 이라는 지시대명사가 들어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이것이 ‘막지능수’의 ‘갈 지’자의 뜻이라고 본다. 이씨는 이 ‘지’자를 지시대명사가 아니라 허사로 보는 것이다.
뒤의 ‘지킬 수’자는 물론 동사다. 그러나 ‘막’자는 뒤의 ‘능할 능’이라는 조동사를 수식하는 부정사이다. 이씨가 ‘막莫’을 동사로 만들어 ‘동사 之 동사’ 어쩌고 하는 것은 중학교 한문 문법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문의 어법은 위에서 말한대로 ‘주어+동사+목적어(S+V+O)’의 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시대명사인 ‘갈 지’자가 부정사인 ‘막’ 다음에 나온 데서 이씨가 헷갈리고 이씨의 무식이 드러나는 것이다.
‘막지능수 莫之能守’는 원래 ‘막능수금옥莫能守金玉’이다. 문장에 ‘금옥’이 두 번 나오므로 뒤의 ‘금옥’을 ‘지之’라는 지시대명사가 받은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 ‘막능수지莫能守之’ 여기서 문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문법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을 것이다. “문장에 부정사가 있고 목적어가 지시대명사일 때 그 지시대명사는 부정사 다음에 온다.” 그래서 ‘막지능수莫之能守’가 된 것이다. 이것을 도치법이라 하는 것이다.
물론 ‘막’이라는 부정사가 없으면 ‘지之’자는 동사 뒤에 가서 ‘능수지能守之’가 된다.『노자』37장에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라는 예가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번역이 보통사람들과 비슷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번역이 비슷한 이유가 있다. 우연인 것이다. 이씨가 ‘막’을 동사라고 했지만 ‘없다’라는 부정형으로 이해했기 때문인 것이다.
『노자』70장에 또 이런 예가 있다. ‘부유무지, 시이불아지.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무릇 오로지 알지 못하므로 나를 모르는 것이다.’ 70장의 일부분만 취해서 뜻이 이상하지만 ‘시이불아지’의 경우도 ‘시이부지아’의 ‘아’가 지시대명사이고, 앞에 부정사인 ‘아니 불’자가 있으므로 도치되어 ‘불’자 다음에 온 것이다. 이런 걸 모르는 이씨는 ‘아닐 비非’나 ‘없을 무無’와 같은 부정사인 ‘막莫’이 동사라고 우기면서 ‘동사 之 동사’ 라는 획기적 문법을 발명한 것이다.
14) 여기에 이씨의 한문 해석법의 정수가 있다. 그러나 한문을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 이씨의 방법은 한문을 해석할 때 누구나 쓰는 방법이지만, 이씨의 문제는 뺄 것과 남겨둘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이렇게 말한다.
“노자 당대에는 공인된 문법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자라는 글자 자체가 한 자 한 자에 고유한 뜻이 들어 있는 것이어서 늘어놓는 방식이나 어순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다는 것도 이런 문장이 나오는 이유다. 즉 한자는 소리나는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진 그림 카드들을 늘어놓고 그 뜻을 보는 방식이다. 그래서 늘어놓은 카드의 순서가 조금 바뀌어도 전체적인 뜻을 읽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중요한 것은 늘어져 있는 여러 카드를 가지고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참 뜻을 살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씨는 어순이 뭔지 도치법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노자의 시대에 공인된 문법이 없었다는 말은 맞지만, 어디에나 말이 있는 곳에는 보이지 않는 엄밀한 문법이 있는 것이다.
이씨는 자기가 보는, 일반 서점에서 파는『노자』책이 노자가 쓴 그대로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이씨가 보는 원문이라는 것은 지난 2000년 간 변화했고, 또 후대의 문법으로 바뀌어 진 것이다. 이씨도 백서『노자』가 어쩌니 하고 아는 척을 하는데, 한 번이라도 그 책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있으면 원문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이씨가 얼마나 생각이 없는 사람인지는 다음 글을 봐도 알 수 있다. 이씨는 제 나름이지만 이것저것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 병이다.
“아무리 잘된 번역이라도 원문의 생명을 죽이게 마련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은 번역하면 안 되는 문장이다. 원문을 보고 10년 동안 생각해야 할 문장이지 번역된 한 줄을 읽는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씨가 여기서 말하는 원문이라는 것은 한자로 된 한문이고, 이씨는 한자를 신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문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원문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인 것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한문 자체가 번역된 것인데, 이씨는 ‘아무리 잘된 번역이라도 원문의 생명을 죽이게 마련이다.’라는 말을 정신없이 함부로 쓴다.
15) 이제 결론이다.
한문은 대체로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시지불견視之不見’이 하나의 문장이고 ‘시지視之’도 주어가 없는 문장인 것이다. ‘불견不見’도 당연히 하나의 문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한문을 읽는 데는 주제(topic)와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시지불견視之不見’의 ‘지之’자는 지시대명사다. 그리고 이씨의 말대로 ‘볼 시’자와 ‘볼 견’자는 모두 동사다. 그러나 이 간단한 문장에 동사가 2개나 나와서 이씨는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한자 넉자 중에 자기가 허사로 보는 ‘갈 지’자를 빼면 의미가 같은 ‘볼 시’자와 ‘볼 견’자의 부정어인 ‘불견’ 두 개만 달랑 남는 것이다. 그래서 이씨는 문장의 구조고, 뭐고 없이 ‘視’자와 ‘不見’자가 쓰인 카드 두 장을 머릿속에 만들고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팟’하고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여기에 이씨는 ‘A지B’의 구조에서 ‘A’가 동사이고 ‘B’도 동사면 이때는 ‘B하는 것을 A한다’는 자기의 발명품을 들이대는 것이다. 주어와 동사가 2개씩인 문장을 주어와 동사가 한 개씩인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그 결과 이씨는 ‘시지불견’을 “‘불견不見’을 시視한다’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말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냥 들어보면 이것도 말이 되는 것 같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보다 훨씬 신비적인 내음을 풍긴다. 이씨는 근본적으로 이런 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니다.
‘시지불견視之不見’은 2개의 문장이 연결된 것이고, 연결하는 접속사가 생략된 것이다. 우리말로 길게 풀어보면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보려 해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접속사인 ‘but’으로 연결되는 두 문장이고, 한자로는 ‘말이을 이而’자가 생략된 문장인 것이다.
‘시지이불견視之而不見’ 『노자』에 이렇게 돼있었으면 이씨도 ‘A지B’니 하는 발명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씨 빼고는 보통사람들은 모두 ‘시지불견視之不見’을 ‘시지이불견視之而不見’으로 읽는 것이다. 이것이 수천 년 내려온 문법인 것이다.
이 구절은『노자』에 한 번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노자』35장에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이라고 부정사인 ‘불’자 대신 ‘부족不足’이 쓰인 것만 다를 뿐, 완전히 똑같은 구조와 의미인 문장이 있다. 그런데 이씨는 여기서는 ‘잘 보이지도 않고, 잘 들리지도 않으며’라고 대충 번역하고 해설도 빼먹는다. 해설하기엔 앞뒤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제 문법대로 하면 ‘보기에 부족한 것을 보고, 듣기에 부족한 것을 듣고’라 해야 하지 않는가?
또 이씨는 “노자의『도덕경』에 대한 가장 가치로운 주해서가『장자』라는 책이다.”라 말한다. 그런데 바로 그『장자』「지북유」편에『노자』14장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설격인 글이 있는 것이다.
道不可聞, 聞而非也; 道不可見, 見而非也.
도불가문, 문이비야; 도불가견, 견이비야.
도는 들을 수 없다, 들리면 가짜다. 도는 볼 수 없다, 보이면 가짜다.
유가 문헌인『중용』에도 이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도 ‘시지이불견, 청지이불문 視之而不見, 聽之而不聞’으로 되어 있다. 이 구절은 도가, 유가를 막론하고 당대의 상식인 것이다.
그래도 증명이 안 됐다고 생각하면 20세기 중국 고고학계 최대 발견의 하나인 백서『노자』를 보자. 백서『노자』는 1973년 호남성 장사 마왕퇴 한나라 초기 무덤(약 2200년 전)에서 발견된 비단위에 쓰여 진 두 가지『노자』를 말하는 것이고, 이씨가 입에 달고 사는 원문 중에서 노자 시대에 아주 가까운 것이다. 백서『노자』갑본, 을본 두 가지에 모두 현재의 14장의 이 부분이 파손되지 않고 이렇게 남아있다.
‘視之而弗見名之曰微’
‘시지이불견명지왈미’
‘불弗’자는 ‘아니 불不’자 대신 쓰인 것이고, 뒤 문장에는 지시대명사인 ‘지之’자도 들어있다. 더 옛날에 쓰인 글(왕필본보다 500년 전)이 현대에 우리가 주로 보는 왕필본보다 친절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희(希)’자 대신 ‘미(微)’자가 쓰여 있는 점이 왕필본과 다르지만 뜻의 변화는 없다. / 1편 끝 (2007/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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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반기련 회원입니다. 개종의 눈팅 회원이기도 합니다. 오늘 개종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다 보니 제 글이 있군요. 약간 보기 편하게 고친 글을 올립니다.(((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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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이경숙의 ‘시지불견視之不見’ 해설 비판
이 글은 『노자』14장 첫 구절인 ‘시지불견視之不見’에 대한 이경숙의 해설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씨의 해설은 『완역 이경숙 도덕경』의 뒷 표지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이씨가 자신있게 말하는 부분입니다. 주 내용은 한자의 ‘갈 지之’자의 용법이고, 이씨는 아래 글 중에 “고전 번역에서 중요한 키가 되는 ’지之‘”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지之‘자의 용법에 대한 이씨의 말은 대부분 틀린 것입니다.
‘갈 지之’자는『노자』5000여 자 중에서 약 240자를 차지합니다.
다음 본문은『완역 이경숙 도덕경』「도경」편(상권) 14장 186페이지부터입니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락 구별이 없이 쓰여 있어서 보기 편하게 단락을 지은 것 외에는 조작한 것이 없습니다. 이 글에 표시된 번호는 제가 붙인 것입니다. (20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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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구절을 보자.1)‘시지불견視之不見 명왈이名曰夷’다. 노자가 2)등선登仙한 후 2천5백 년 동안 이 문장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이夷라 한다’로 이해되어왔다. 이 문장만 보면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당연해보인다. 그러나 3)그렇게 읽는 순간 이 장의 내용은 전체 문맥이 연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지리멸렬한 해괴한 내용이 되어버리고 만다. 다음 문장과의 연결이나 논리성은 차치하고라도 이 문장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문장이다.
4)‘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이름을 붙일 대상도 못 되는 ‘없는 존재’다. 보려고 애를 써도 보이지 않는 무엇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5)우리가 믿는 신이라는 것도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의 존재를 믿을 만큼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꿈에서 보든, 그 소리를 환청으로 듣든, 환각 속에 듣든, 비몽사몽간에 듣든, 초능력으로 감응을 하든 간에 무엇인가 감지되는 징후가 있기 때문에 믿는다. 정 안 되면 그것을 직접 봤다든가 느껴봤다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믿는 것이다. 귀신이든 창조주든 부처든 그것은 예외가 없다.
6)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인간이 사유한 적은 없다. 그런 것을 가리켜 우리는 가공架空이라 한다. 만약에 도道라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도는 가공의 물건이라는 말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7)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노자가 관념 속에서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노자가 그렇게 말했을까? 그렇지 않다. 노자의 말을 우리가 똑바로 알아듣지 못했을 뿐이다.
‘시지불견視之不見’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본다’는 말이다. 문법적인 구조를 생각해보자. 우선 고전의 번역에서 중요한 키가 되는 ‘지之’의 용례와 용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의는 ‘갈 지’로서 영어의 ‘Go’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8)어조사로서 더 많이 쓰이고 있고, 앞뒤에 오는 글자의 품사와 구조에 따라 천변만화 온갖 형태의 접속을 보여주는 한자의 마술사가 이 ‘지之’라는 글자다.
‘A지B’의 구조인 경우 9)‘A’가 명사이고 ‘B’도 명사면 ‘지’는 소유격의 어조사다. 이때 번역은 ‘A의 B’라고 읽으면 된다. ‘군자지도君子之道’는 ‘군자의 도’이고, ‘천지지시天地之始’는 ‘천지의 시작’이며, ‘중묘지문 衆妙之門’은 ‘모든 묘한 것의 문’이다.
다음은 10)‘A지B’의 구조에서 ‘A’가 동사이고 ‘B’는 명사인 경우다. 이때는 ‘B를 A한다’가 된다. 앞에 나왔던 ‘처무위지사處無爲之事’는 ‘일을 무위로 처리한다’이다. 삽입된 ‘무위無爲’라는 부사절을 빼면 문장의 골격은 ‘처지사處之事’이다. 즉 ‘일에 처하다’ 또는 ‘일을 대하다’가 되는 것이다.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도 마찬가지다. 삽입된 부사절 11)‘불언不言(말없이)’을 빼면 ‘행지교行之敎’인데, 이것도 ‘행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행한다’이다.
다음은 12)‘A지B’의 구조에서 ‘A’가 동사이고 ‘B’도 동사면 이때는 ‘B하는 것을 A한다’가 된다. 역시 앞에 나왔던 구절을 예로 들면 13)‘막지능수 莫之能守’가 있다. ‘막莫’은 ‘없다’란 동사다. ‘수 守’는 ‘지킨다’는 동사다. ‘능能’이라는 부사를 빼고 보면 ‘막지수莫之守’가 된다. 이 말은 ‘지키는 것을 할 수 없다’이다. ‘이용지혹불영 而用之或不盈’도 마찬가지다. 어조사 ‘이而’와 ‘혹或’을 빼고 문장의 골격만 보면 ‘용지불영’이다. 번역을 하면 ‘쓸려고 하는 데 차 있지 않다’가 된다. 그러나 직역을 하면 ‘차 있지 않은 것을 쓴다’이다. 그러니까 차 있지 않아 쓸 수가 없다는 문장의 의미는 같다.
14)영어든 한문이든 복잡한 구조의 문장을 번역할 때는 수식어나 삽입구 같은 것을 다 덜어내고 주어와 술어만을 남겨 문장의 골격이 무엇인가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용지불영用之不盈’에서 ‘불不’까지 빼고 보면 더욱 명료하다. ‘용지영用之盈’이다. 이 문장을 ‘쓰는데 차 있다’고 읽을 사람은 없다 ‘차 있는 것을 쓴다’고 읽는다. 정리해서 말하면 ‘A지B’의 구조를 가진 문장에서 A가 동사인 경우 B가 무엇이든 간에 이 문장은 ‘A한다’가 골격이 된다.
그런 이치로 15)‘시지불견視之不見’을 보면 ‘지之’의 앞뒤에 있는 ‘시視’와 ‘불견不見’이 모두 동사다. 그래서 이 문장은 ‘불견不見’을 시視한다’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말인 것이다. 결코 ‘불견不見’이 주동사가 아닌 것이다. 이 문장의 주 술어는 바로 ‘시지 視之’이다. ‘본다’고 옮겨야지 ‘보이지 않는다’고 옮기면 정반대 의미의 문장이 되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청지불문 聽之不聞’은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가 아니라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이고 ‘박지부득 搏之不得’은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가 아니고 ‘얻지 않고도 잡을 수 있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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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지불견視之不見 명왈이名曰夷’는 기왕 띄어쓰기를 했으면 ‘시지불견視之不見, 명왈이名曰夷;’와 같이 방점을 붙여주어야 한다. 방점 표시가 그 사람의 문장 이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2) ‘등선登仙’이라는 말은 신선이 되었다는 말인데, 이씨는 『노자』를 읽는 목표가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한다. 웃기는 말이다.『노자』에 개인의 수양과 관계된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해석될 만한 구절이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는 일반인(백성)을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니다. 나는『노자』가 기본적으로 당시의 최고 정치적, 군사적 실력자의 리더십과 권력 사용에 대한 책이라고 본다. 그렇다고『노자』가 현재의 우리에게 무관한 것은 아니다. 천하보다는 작지만 가정에서나 사회 조직의 운영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지금의 논의와는 큰 상관이 없다.
『노자』에 대한 내 의견이 틀린다 해도 ‘우화등선’은 도교(religious Taoism)의 목표는 돼도, 도가(philosophical Taoism)의 목표가 아니다. 노자는 후에 도교에서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는 신으로 추앙되었으나 노자와 거의 관계가 없다. 도교와 도가는 다르다.
3) 이씨의 두뇌 작동은 2000년 이상 노자를 읽은 보통사람들과 다르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도 논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황당한 자기 논리가 있고, 무반성적인 자기 확신이 있다. 그걸 남에게 전파하고 싶은 사람들이 사이비 교주가 되기 쉽다. 큰 소리로 떠들면 거기에 뭐나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씨는 ‘시지불견視之不見‘에 대한 기존 이해가 ‘전체 문맥이 연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지리멸렬한 해괴한 내용이 된다’고 하지만, 이씨를 뺀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치에 맞게 들린다.
4) ‘보이지 않는 무엇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이씨는 공기가 안 보이니 공기에 대해 생각도 못할 것이다.
5) ‘No one has ever seen God.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요한복음」; 이씨는 노자를 읽고 연구한 사람 뿐 아니라, 신을 보지 않고도 믿는 모든 기독교인을 부정한다. ‘아무도 신을 본 사람은 없다’하니 예수를 만났다 하는 기독교인들은 딴 것을 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믿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가 나오는가?
6) 이씨는 자기가 추상적 사고나 형이상학이라는 말은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른다.
7) ‘도道’라는 것은 사람들의 이해에 따라 실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추상적 관념일 수도 있다. 관념도 실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관념실재론) 『노자』에서 ‘도道’의 의미는 여러 가지이다. ‘말할 수 없는 도’도 있고(1장 도가도비상도 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말할 수 있는 도’도 있다.(35장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도가 말해진 것은 담담하여 맛이 없다.)
8)‘갈 지之’자는 허사(虛辭)로 많이 쓰인다. 허사는 그 자체로는 문장 내에서 의미가 없으나, 문장을 연결하거나 의미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허사를 제대로 모르면 한문을 모르는 것이다. 이씨는 ‘시지불견’의 ‘지’자가 실사인지 허사인지 구별을 못하는 것이다.
이씨는 자기 생각으로 허사라 생각되는 한자가 나오면 일단 빼고 실사(한자) 만 몇 개 가지고 들여다보거나 명상을 한다. 한자 몇 개가 일종의 선불교의 공안(公案)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후에는 그 생각을 이리저리 꿰맞춰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적 문장을 만든다.
9)이씨가 말하는 세가지 중 유일하게 맞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 한문은 초등학교 1학년 수준이면 아는 것이다.
10) ‘처무위지사處無爲之事’가 ‘일을 무위로 처리한다’라는 이씨의 번역은 보통사람과 비슷하다. 그러나 ‘무위’는 여기서는 부사절이 아니고 ‘함이 없음’이라는 명사인 것이다. 이것이 '지之'와 연결되어서 형용사화 되어 명사인 ‘사事’를 수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위지사無爲之事’는 ‘함이 없는 일’이라는 의미의 명사절이 되어 ‘처處’의 목적어가 되는 것이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함이 없는 일에 처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씨는 ‘함이 없는 일’이라는 역설적 언어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기 맘대로 이 글자도 빼보고 저 글자도 빼보면서 나름 말이 된다고 생각할 때까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경우 보통사람과 다른 특출한 발상이 나오는 것은 다 틀린 것이다. ‘무위無爲’라는 말은 이 한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노자』를 전체적으로 읽어가다 보면 그 의미를 알게 된다. 『노자』책을 몇 권 내고도 끝끝내 모르는 사람도 있다.
11) 이씨는 ‘처지사處之事’니 ‘행지교行之敎’니 하는데 ‘처무위지사’나 ‘행불언지교’에서 가운데 수식어를 빼보고 생각하려면 '지之'자까지 빼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처사處事’가 되어 ‘일을 처리한다’, ‘행교行敎’는 ‘가르침을 행한다’가 되는 것이다.
한문은 주어+동사+목적어 순으로 영어와 어순이 같다. ‘처지사處之事’나 ‘행지교行之敎’라는 문장은 본문에서 동사로 쓰이는 ‘처’나 ‘행’이 명사화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보통사람들은 품사의 활용이라고 한다.
12)이 부분이 이씨의 만고 이래의 돌창적인 발상이다. 물론 틀렸다. 이것이 틀린지 아는 내가 한문의 초보 수준이라는 데 이씨의 문제가 있다. 도무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A지B’의 구조에서 ‘A’가 동사이고 ‘B’도 동사면 이때는 ‘B하는 것을 A한다’가 된다.”는 이씨의 말은 독창적이다. 그리고 이씨 말대로 해도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이 거기에 뭔가 있나 기대하면 아무 헛소리나 해도 말이 되는 것 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부분은 심오하다는『노자』중에서도 신비적 색채가 있는 문장이 아닌가? 이것이 사이비 종교가 먹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13) ‘막지능수 莫之能守’라는 말은『노자』9장에 나온다. 원 문장은 ‘금옥만당, 막지능수 金玉滿堂, 莫之能守’이고, 직역하면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쉬운 말이다. “금과 옥이 집 안에 가득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이씨의 번역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는 사고 과정은 이씨의 것이 월등 독창적이고 천재적이다. 그러나 틀렸다. 이씨의 번역에도 ‘그것을’ 이라는 지시대명사가 들어 있는데 보통 사람들은 이것이 ‘막지능수’의 ‘갈 지’자의 뜻이라고 본다. 이씨는 이 ‘지’자를 지시대명사가 아니라 허사로 보는 것이다.
뒤의 ‘지킬 수’자는 물론 동사다. 그러나 ‘막’자는 뒤의 ‘능할 능’이라는 조동사를 수식하는 부정사이다. 이씨가 ‘막莫’을 동사로 만들어 ‘동사 之 동사’ 어쩌고 하는 것은 중학교 한문 문법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문의 어법은 위에서 말한대로 주어+동사+목적어(S+V+O)의 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시대명사인 ‘갈 지’자가 부정사인 ‘막’ 다음에 나온 데서 이씨가 헷갈리고 이씨의 무식이 드러나는 것이다.
‘막지능수 莫之能守’는 원래 ‘막능수금옥莫能守金玉’이다. 문장에 ‘금옥’이 두 번 나오므로 뒤의 ‘금옥’을 ‘지之’라는 지시대명사가 받은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 ‘막능수지莫能守之’ 여기서 문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문법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을 것이다. “문장에 부정사가 있고 목적어가 지시대명사일 때 그 지시대명사는 부정사 다음에 온다.” 그래서 ‘막지능수莫之能守’가 된 것이다. 이것을 도치법이라 하는 것이다.
물론 ‘막’이라는 부정사가 없으면 ‘지之’자는 동사 뒤에 가서 ‘능수지能守之’가 된다.『노자』37장에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화.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라는 예가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번역이 보통사람들과 비슷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번역이 비슷한 이유가 있다. 우연인 것이다. 이씨가 ‘막’을 동사라고 했지만 ‘없다’라는 부정형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노자』70장에 또 이런 예가 있다. ‘부유무지, 시이불아지. 夫唯無知, 是以不我知.’ ‘무릇 오로지 알지 못하므로 나를 모르는 것이다.’ 70장의 일부분만 취해서 뜻이 이상하지만 ‘시이불아지’의 경우도 ‘시이부지아’의 ‘아’가 지시대명사이고, 앞에 부정사인 ‘아니 불’자가 있으므로 도치되어 ‘불’자 다음에 온 것이다. 이런 걸 모르는 이씨는 ‘아닐 비非’나 ‘없을 무無’와 같은 부정사인 ‘막莫’이 동사라고 우기면서 ‘동사 之 동사’ 라는 획기적 문법을 발명한 것이다.
14) 여기에 이씨의 한문 해석법의 정수가 있다. 그러나 한문을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 이씨의 방법은 한문을 해석할 때 누구나 쓰는 방법이지만, 이씨의 문제는 뺄 것과 남겨둘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씨는 이렇게 말한다.
“노자 당대에는 공인된 문법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한자라는 글자 자체가 한 자 한 자에 고유한 뜻이 들어 있는 것이어서 늘어놓는 방식이나 어순에 크게 구애 받지 않는다는 것도 이런 문장이 나오는 이유다. 즉 한자는 소리나는대로 옮겨 적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진 그림 카드들을 늘어놓고 그 뜻을 보는 방식이다. 그래서 늘어놓은 카드의 순서가 조금 바뀌어도 전체적인 뜻을 읽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중요한 것은 늘어져 있는 여러 카드를 가지고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참 뜻을 살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씨는 어순이 뭔지 도치법이 뭔지 모르는 것이다. 노자의 시대에 공인된 문법이 없었다는 말은 맞지만, 어디에나 말이 있는 곳에는 보이지 않는 엄밀한 문법이 있는 것이다.
이씨는 자기가 보는 서점에서 파는『노자』책이 노자가 쓴 그대로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이씨가 보는 원문이라는 것은 지난 2000년 간 변화했고, 또 후대의 문법으로 바뀌어 진 것이다. 이씨도 백서『노자』가 어쩌니 하고 아는 척을 하는데, 한 번이라도 그 책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있으면 원문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이씨가 얼마나 생각이 없는 사람인지는 다음 글을 봐도 알 수 있다. 이씨는 제 나름이지만 이것저것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 병이다.
“아무리 잘된 번역이라도 원문의 생명을 죽이게 마련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은 번역하면 안 되는 문장이다. 원문을 보고 10년 동안 생각해야 할 문장이지 번역된 한 줄을 읽는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씨가 말하는 원문이라는 것은 한자로 된 한문이고, 이씨는 한자를 신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한문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원문은 산스크리트어인 것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 자체가 번역된 것인데, 이씨는 ‘아무리 잘된 번역이라도 원문의 생명을 죽이게 마련이다.’라는 말을 함부로 쓴다.
15) 이제 결론이다.
한문은 대체로 주어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시지불견視之不見’이 하나의 문장이고 ‘시지視之’도 주어가 없는 문장인 것이다. ‘불견不見’도 당연히 하나의 문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한문을 읽는 데는 주제(topic)와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시지불견視之不見’의 ‘지之’자는 지시대명사다. 그리고 이씨의 말대로 ‘볼 시’자와 ‘볼 견’자는 모두 동사다. 그러나 이 간단한 문장에 동사가 2개나 나와서 이씨는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다. 한자 넉자 중에 자기가 허사로 보는 ‘갈 지’자를 빼면 의미가 같은 ‘볼 시’자와 ‘볼 견’자의 부정어인 ‘불견’ 두 개만 달랑 남는 것이다. 그래서 이씨는 문장의 구조고, 뭐고 없이 ‘視’자와 ‘不見’자가 쓰인 카드 두 장을 머릿속에 만들고 명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 ‘팟’하고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여기에 이씨는 ‘A지B’의 구조에서 ‘A’가 동사이고 ‘B’도 동사면 이때는 ‘B하는 것을 A한다’는 자기의 발명품을 들이대는 것이다. 주어와 동사가 2개씩인 문장을 주어와 동사가 한 개씩인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그 결과 이씨는 ‘시지불견’을 “‘불견不見’을 시視한다’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말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냥 들어보면 이것도 말이 되는 것 같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보다 훨씬 신비적인 내음을 풍긴다. 이씨는 근본적으로 이런 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니다.
‘시지불견視之不見’은 2개의 문장이 연결된 것이고, 연결하는 접속사가 생략된 것이다. 우리말로 길게 풀어보면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아무리 보려 해도,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접속사인 ‘but’으로 연결되는 두 문장이고, 한자로는 ‘말이을 이而’자가 생략된 문장인 것이다.
‘시지이불견視之而不見’ 『노자』에 이렇게 돼있었으면 이씨도 ‘A지B’니 하는 발명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씨 빼고는 보통사람들은 모두 ‘시지불견視之不見’을 ‘시지이불견視之而不見’으로 읽는 것이다. 이것이 수천 년 내려온 문법인 것이다.
이 구절은『노자』에 한 번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노자』35장에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이라고 부정사인 ‘불’자 대신 ‘부족不足’이 쓰인 것만 다를 뿐, 완전히 똑같은 구조와 의미인 문장이 있다. 그런데 이씨는 여기서는 ‘잘 보이지도 않고, 잘 들리지도 않으며’라고 대충 번역하고 해설도 빼먹는다. 해설하기엔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제 문법대로 하면 ‘보기에 부족한 것을 보고, 듣기에 부족한 것을 듣고’라 해야 하지 않는가?
또 이씨는 “노자의『도덕경』에 대한 가장 가치로운 주해서가『장자』라는 책이다.”라 말한다. 그런데 바로 그『장자』「지북유」편에『노자』14장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설격인 글이 있는 것이다. ‘도불가문, 문이비야; 도불가견, 견이비야. 道不可聞, 聞而非也; 道不可見, 見而非也.’ ‘도는 들을 수 없다, 들리면 가짜다. 도는 볼 수 없다, 보이면 가짜다.’
유가 문헌인『중용』에도 이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도 ‘시지이불견視之而不見, 청지이불문 聽之而不聞’으로 되어 있다. 이 구절은 도가, 유가를 막론하고 당대의 상식인 것이다.
그래도 증명이 안 됐다고 생각하면 백서『노자』를 보자. 백서『노자』는 1973년 호남성 장사 마왕퇴에서 발견된 한나라 초기 무덤(약 2200년 전)에서 발견된 두 가지『노자』를 말하는 것이고, 이씨가 입에 달고 사는 원문 중에 노자 시대에 가까운 것이다. 갑본, 을본 『노자』두 가지에 모두 현재의 14장의 이 부분이 파손되지 않고 남아있다.
視之而弗見名之曰微 시지이불견명지왈미
옛날에 쓰인 책이 현대의 우리가 주로 보는 왕필본보다 친절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弗’자는 ‘不’자 대신 쓰인 것이고, 뒷 문장에는 지시대명사인 ‘지之’자도 들어있다.
이 정도 밝혀도 이씨의 말이 맞다고 우긴다면 항복이다. - 1편 끝
첫댓글 좋은 자료 재밋고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