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과 함께 떠난 옛길기행 - 통영별로 13 |
[전주 - 삼례] 33km
보이는 길路에서 보이지 않는 길道 찾기. 새원-치명자산-한벽당-향교-이목대-오목대-한옥마을-경기전-풍남문-객사-숲정이-추천-비비정-삼례역 |
대한이가 소한이네 집에 놀러왔다가 얼어 죽었다더라. 어제는 눈바람으로 살천스럽던 소한이가 오늘은 수북한 눈을 깔아 추운 나라에서 온 대한한테 겨울 맛을 실컷 보라니, 뽀득뽀득 거리는 땅거죽도 쉬리와 모래무지가 돌아올 만치 깨끗해졌다는 둑길도 썩 상큼하다. 셋이 되니 또 좋다. 같은 잠 값에 군식구가 껴도 말이 없고, 밥도 둘만 시키고 머슴밥을 보태면 돈이 굳는다. 여기까지도 갈아탈 버스 삯으로 택시를 타도 그게 그거인데다 붙잡아준 해는 덤이다. 그런 아침에 재깔이는 새털 걸음인지라 전주가 벌써 눈앞이고 ‘치명자산’라고 써 눈길 끄는 보람판이 길마중 한다.
“치명자산란 또 뭐람?” “아빠가 모르면 우리가 어떻게 아냐.” “치명과 자산이라면 목숨과 재산을 바쳤다는 뜻일까?”
다가가니 천주교 성지인데, 그래도 단박에 와 닿질 않다가 치명자致命者에 산이 붙었다는 거니를 채고야 순교자 산이라는 풀이를 한다. 한자말은 늘 어렵다. 안내소에서 따듯한 차를 얻어 마시며 한 보따리 설명을 듣고 나니, 남고산성을 올라볼까 했던 생각은 간데없이 몸은 이미 산길로 들어섰다. 오름은 가파른데다 발등눈에 뒹굴고 자빠지는데, 한 할머니가 우리를 비집고 성큼성큼 발을 옮긴다. 보니 쇠붙이 달린 사갈을 덧신었다. 눈 내린 날 할머니 믿음도 저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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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자산 오름길
| 산턱에 박혔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이 아닐까 싶은 반달꼴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둥근 벽에 때깔 고운 조각무늬를 채워 거룩하기보다 포근하다. 십자가가 걸렸을 자리도 꼬마 예수를 손잡은 요셉과 마리아를 그려 넣었다. 이곳이 한 식구를 기린다는 뜻이리라. 두 끝에는 한 사내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여자가 그려졌다. 이 사내가 유중철柳鍾喆 요한이고 여자는 이순이李順伊 누갈다로 둘은 가시버시다.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에게 세례 받은 유중철은 믿음을 더욱 두텁게 하고자 혼인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그런지 이태 지난 어느 날에 주문모가 한양에 머물다가 같은 뜻을 품고 사는 이순이를 알게 되자 유중철을 떠올려 둘을 맺어준다. 요새야 신부와 수녀가 있지만, 때가 때인지라 혼자 살아감이 당찮기에 겉으로나마 부부로 신앙을 이어가게끔 해서였다. 1797년 10월, 유중철은 한양 이순이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이듬해인 9월에 이순이가 시집인 전주로 내려오면서 함께 살게 된다. 혼인하였으되 잠자리는 하지 않는 이른바 동정부부는 이렇게 태어났으나, 아무래도 한창인 젊은이라 다짐을 깨트릴 뻔했던 고비도 적잖았다고 한다. 어려움과 괴로움을 믿음으로 달래며 오누이처럼 오순도순 살아가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은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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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벽화 |
조선 사람으로 처음 영성체를 받은 이승훈李承薰에게 세례 받은 아버지 유항검柳恒儉은 제대로 틀 잡지 못한 교회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신부 열 사람을 둘 때 뽑힌다. 신부가 된 유항검은 교리를 익히다 화들짝 놀란다. 신부란 그만한 사람한테 임명 받아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신부 일을 해서는 안 될뿐더러 무엇보다 큰 죄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유항검은 이 제도가 매우 그릇됐음을 알려 가성직제도를 없애게끔 한다. 또한, 이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하루빨리 신부를 데려와야 한다며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사람을 보내게 되고, 이로써 주문모가 1794년 끝 무렵에 이 땅을 밟게 된다. 얽힌 일이 한꺼번에 풀리며 기틀을 마련한 교회는 이를 발판으로 도두뛰고자 또 다른 일을 꾀한다. 천주교를 못 들어오게 하던 청나라도 대박大舶, 아주 큰 배를 타고 들어오는 선교사를 보고서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다며 못 본 척 내버려 둔다. 이를 거울삼은 조선 교회도 ‘신부 한 사람으로는 매우 고단하니 반드시 큰 배를 서양에서 오게 해 나라 안에 널리 일으키고자 한다.’라며 또다시 사람을 보낸다. 그러나 이런 바람과 달리 조선은 신유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주교는 종교보다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였지만 한쪽에선 유교를 무너뜨릴 사교라 하여 늘 부대끼던 뜨거운 감자였다. 정조는 사학에 깊게 빠진 젊은 선비가 급작스레 개혁하자 나설까 근심하지만, 유교를 높이면 저절로 사그라질 테니 걱정할 일이 아니라며 북돋지도 억누르지도 않았다. 정치판에서도 엇매끼지 않게 쏠림 없는 저울질로 정사를 돌보던 정조, 그가 죽자 모든 게 달라진다. 아들 순조가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자 섭정하게 된 정순대비는 사교부터 뿌리 뽑는다. 눈엣가시이던 남인도 천주교를 많이 좇았기에 이들을 치는 꼬투리기도 했다. 1801년이 열리자마자 오가작통으로 사학죄인을 샅샅이 뒤져내 줄줄이 목을 친다. 주문모는 제 발로 의금부를 들어가 오랏줄을 받으나 머리가 매달리며 피바람이 끝나지 않았음을 예고했고, 유항검도 주문모를 부르고 배가 오도록 한 일이 모두 자기 짓이라고 털어놓자 역모로 다스려져 의금부로 넘어간다. 그런 가운데 엎친 데 덮치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진다.
제천 배론 땅에 몸 숨겨 숨 고르던 황사영黃嗣永은 시월에 청나라로 떠날 동지사 무리에 교인인 옥천희玉千禧가 끼었음을 알고는 그로 하여금 조선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을 주교한테 낱낱이 알리라며 백서, 비단에 쓴 편지를 건넨다. 편지는 주문모를 비롯하여 누구누구가 죽었다는 입때까지 일과, 청나라 황제를 움직여 조선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서양 배 수백 척과 군대 5, 6만을 보내 힘으로라도 조정을 꺾어달라는 뜻을 담았다. 편지는 홈질한 옥천희 옷 솔기에 깊게 감추었으나 몸 뒤짐으로 들통 난다. 이로 말미암아 얽히고설킨 조선교회는 걷잡을 수 없이 깊은 수렁으로 빠져 서양 힘을 빌려 나라를 뒤엎으려 한 대역부도로 서둘러 국문 받고 9월 11일에 우수수 목이 떨어지고, 지방 사람은 사교로 어지럽힌 그 고장으로 보내 여러 사람 앞에서 본때 보이라는 정순대비 지시로 유항검은 17일에 풍남문에 목이 걸린다. 이윽고 유항검 식구도 하나 둘씩 끌려갔고 배교, 천주교를 버리면 살려주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따르지 않자가 유중철은 10월 9일, 이순이는 12월 28일에 다 피지도 못한 스물둘과 열아홉 나이로 죽음을 맞고, 잇달아 어머니와 동생, 작은집까지 모두 이슬로 떨어진다. 이로써 피붙이는 늙은 할머니와 어린 동생을 빼고는 모조리 죽었고, 살던 집은 풀포기조차 피지 못하게 부수고 파내 못을 만드는 파가저택이 된다.
편편한 성당 지붕을 건너 계단을 오른 산이마에 자그마한 무덤이 있다. 보두네 신부가 1914년에 전동 성당을 짓고는 곧바로 흩어진 유중철 식구 주검을 거두어 모신 곳이다. 무덤 오른쪽엔 동정부부가, 왼쪽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신희, 동생인 문석과 작은어머니 이육희와 사촌인 중성이 잠들어 있다. 이 무덤이 1993년에 열린 적이 있었다. 유항검이 믿음을 저버렸다는 말이 떠돌았기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옥신각신해서다. 파보니 유항검은 있었다. 또한, 작은아버지 유관검도 청나라를 들락거렸다는 죄로 함께 죽었으니 마땅히 묻혔어야 했는데, 주검을 찾지 못한 듯하다. 고등학생 때 어쩌다 갔던 절두산 성당에서 유중철과 이순이를 알고 깜짝 놀랐었다. 부부면서 동정을 지킨다니. 이성에 눈뜨던 사춘기라 더욱 그랬지만, 신앙 앞에 거침없이 목을 내놓았다는 대목에선 머리를 절레절레 내둘러야 했던 그들이 잠든 무덤이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
“몇 학년이었어?” “2학년 겨울방학 때.” “어, 나랑 똑같네.”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든, 그때 내 나이가 된 딸애와 다시 만나는 동정부부다.
조선은 1908년에 유항검을 사면, 대역부도를 씻어주며 비로소 천주교를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세지 못할 피 울음이 소금 된 지 그야말로 한 세기만이다. 종교가 때를 잘못 만난 신유박해이자 신유사옥은 이로써 끝을 보지만, 이 땅엔 이미 많은 선교사가 들어왔고 대포를 실은 큰 배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제멋대로 닻을 내리던 때다. 펄펄 뛰던 나라, 당찼던 기운도 티끌만큼 남기지 못해 호랑이 먹잇감이 되려는 때이기도 하다.
또 한 세기가 지난 통영별로에서 만나는 사람이 이들뿐이겠는가, 황사영은 정약용의 배다른 맏형인 약현 사위이고 이승훈은 누이동생 남편이다. 피붙이와 살붙이가 죄다 역적 우두머리니 탈 없길 바랄 손가. 셋째 형 약종은 주문모 일로 이미 죽고, 다른 죄로 장기에서 귀양살이하다 불려온 약용은 약전과 함께 귀양간다. 귀양을 가던 약전과 약용은 흑산도와 강진으로 갈리면서 다시 만날 기약 없는 헤어짐에 눈물로 하룻밤을 지새운 나주 율정삼거리는 삼남대로다. 유항검이 살던 집터인 이서면 초남리도 삼남대로 길처이니, 옛길을 걸으며 결결이 겪어야 하는 아련함이다. (의금부에 있던 황사영 백서는 1894년에 교구장이던 뮈텔Mütel 주교 손에 들어갔고, 1925년에 교황청으로 보내져 교황청 박물관에서 간직하고 있다.)
무덤 왼쪽 비스듬한 비탈머리에 바위가 오뚝하니 서 있다. 이 산 이름이 승암, 중 바위로 불리는 까닭은 저 바위가 중을 닮아서다. 그런데 누군가 사진을 찍어보니 틀림없는 마리아란다. 아닌 게 아니라 가보니 똑 닮았다. 승암산, 따돌린 불교도, 피로 억눌린 천주교도 감싸는 우렁차고 기운 센 산이다. 땅은 이렇듯 안아만 주는데 그 위에서 사는 사람은 가르려고만 한다. 바위를 등져 몸을 돌리니 아픔으로 단단해진 전주 저잣거리가 시원하게 펼쳤고, 새둥주리처럼 틀어 앉은 한벽당도 빨리 오라 나울거린다. 모두가 평화로운데다 후련한 묏바람까지 치올리건만, 어쩐 일인지 먹먹해진 속을 쉽게 펴주질 못한다.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위 중과 마리아가 말한다. ‘다시 보렴, 힘차지 않니? 훨훨 날아갈 듯도 하잖아! 어제는 어제였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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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바위이자 마리아 바위 |
산에서 내려온 걸음도 기찻길로, 길 끄트머리에 시커멓게 입 벌린 굴도 보인다. 슬치 굴길은 지나지 못했지만 통영별로에서 두 번째다. 영남대로는 삼랑진과 밀양사이에 이런 굴이 세 곳 있는데, 모두 여기처럼 짤따랗다. 일본이 나라를 꿀꺽 삼킨 때에 고을 기운을 누르고 산줄기를 끊고자 일삼아 이리로 굴을 냈다고 한다. 곳곳에서 되풀이 듣는 말이다. 기찻길은 새로 놓인 찻길을 따라 뺄 수도 있다. 그러자면 개울을 건널 철교를 놓아야 한다. 어느 쪽이 돈이 덜 들고 공사가 쉬웠을지 인제 와서 따지기도 부질없으나, 마기말로 그랬다면 그들이 물러가자마자 메웠어야 하지 않나. 강산이 여섯 번이 바뀌도록 일본 탓만 되뇌기도 오죽잖다. 깎아지른 낭떠러지에다 용케 발 내린 한벽당도 도도하게 지켜만 보듯이, 다시는 나라 쓰러뜨리지 말자.
어찌 겁은 벼랑 끝에다 낭창거릴 누각을 생각했는지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게 하는 한벽당寒碧堂, 태종 때에 벼슬하다 1404년에 내려온 최담이 올려 월당루라 하였으니 6백 살이 넘는다. 그 뒤로 고치길 거듭하였겠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1897년에 쓴 중수기가 조선으로선 마지막이다. ‘최담에 이어 이윽고 아들 덕지도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벗이 되어 지냈다. 이처럼 때가 되면 물러나야 옳거늘, 많은 사람은 더 높은 자리를 바라며 벼슬을 꿰차고 있다. 어쩌다 물러난다 해도 맛있는 술과 고기를 실컷 먹던 끝이라 담박한 음식을 싫어하고 호화로움을 잊지 못한다. 그러므로 벼슬을 하더라도 마땅한 때에 나아감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을 더 닦아야 하며, 물러남을 편안히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굳은 뜻이 있다.’라며 최익현은 스스로 물러난 최담과 덕지의 마음가짐을 높이 받드니, 요즘 벼슬합네 하는 사람은 한 번쯤 와 봐야겠다. 최익현더러 글을 써 달라 한 열다섯 번째 뒷자손인 최전구, 을사늑약으로 익현이 이른 네 살이라는 나이도 잊은 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기꺼이 함께하다 순창 싸움에서 붙잡혀 대마도로 함께 귀양 간다. 뜻을 펴지 못한 익현은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죽음을 맞고 전구는 살아 풀려나나, 그 뒤로도 광복단을 만들며 죽을 때까지 나라 되찾으려는 정신도 깃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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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다본 한벽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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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글씨 잘 쓰기로 이름났던 창암 이삼만이 이곳을 오르니 부채 장수가 곤히 잠자고 있었다. 짓궂은 창암은 부채마다 글을 써 놓았고 잠을 깬 부채 장수가 화를 내니, 창암은 옅은 웃음을 띠며 나가 팔아보라 했다. 그랬더니 아닌 게 아니라 불티나듯 몽땅 팔려버렸다. 부채 장수가 헤죽거리며 돌아와 고마워 얼마를 내놓겠다고 하자, 창암은 한벽당에 머물던 바람을 가져갔을 뿐이니 부질없는 짓이라며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는 누각에 선 길손을 푼푼하게 한다. 최익현도 올라보면 경치를 다 느낄 테니 따로 말하지 않겠노라 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세상이 이토록 바뀔 줄 꿈엔들 알았겠는가. 그런즉 그때를 보려면 한쪽 눈은 슬그머니 감아야 한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
한벽당 옆 꼬마 누각은 너덧이 둘러앉은 윷판이면 딱 좋은 넓이인데, 쓰임새부터 궁금하게 한다. 아낙네만 오르게 했거나 잔치판이 벌어질 때 찬방으로 썼을지도 모를 이 요월대邀月臺는 몇 살일까. 옛 지도를 보면 아리송하다. 1684년에 관찰사 이사명이 딸림 집 몇을 더해지었다는데, 그래서인지 지도마다 네다섯 채가 보이는가 하면, 크고 작은 누각 둘만 그린 지도도 있다. 이 지도를 본다면 누가 봐도 요즘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한벽당에 딸린 누각이라고 말끔하게 말하진 못하니, 1920년 즈음에 지었다는 얘기가 있어서다. 이때라면 최전구도 살아있었으니 물어보면 되련만 어디 사는지 몰라 언제 적을 따지기는 미뤄야 한다. 그나저나 육이오전쟁에 쓰러져 1986년에 다시 지었다는 요월대, 처음과 달리 바른모로 뒤놓아 앉히며 한벽당과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해 말이 많다. 요월, 달맞이라는 이름과도 맞지 않을뿐더러, 알고 모름을 떠나 비틀기에는 이만한 곳이 없다.
옛길을 찾아 개울을 건넌다. 한벽당에서 내다 볼 때 경치를 죽이던 다리가 걸음을 줄여주니 고맙기는 하다. 옛길은 전북임업시험장 복판으로 사라졌다가 담벼락을 뚫고 나와 골목길로 남천홍교를 건넌다. 홍교라 했으니 무지개 다리였겠으나 요즘은 편편해서인지 그냥 남천교다. 좀 더 따지자면 이 위에 있는 싸전다리로 건넜는지 뚜렷하지 않으나 이름만 보면 이 다리가 맞다.
걸음도 잠깐 멈춘다. 4월 22일, 이순신은 일찍 여산을 떠나 아침에 삼례에서 잠깐 쉬고 저녁나절에 이곳에 닿는다. 잠을 잔 곳이 남문 밖 이의신李義臣 집이라 했는데 어디쯤일까? 남문 쪽으로 더 가야 할지 어치렁거리지만 어디 사는지 알려주는 이 없다. 살아오는 동안 가장 고달팠던 때였으나 그가 앉은 자리에 앉아보고 그가 누운 방에 몸 뉘어 보고프다. 크게 이긴 싸움터는 죄다 몰려가면서 이런 데는 왜 이다지도 관심이 없는지. 그나마 판관 박근이 유둔과 생강 따위를 들고 왔고 부윤도 두텁게 맞아줬다니, 오늘은 조금이나마 외로움 던 밤을 맞겠지.
시장길 틈으로 풍남문이 어렴풋하다. 제대로라면 저 문을 들어가야 하나 다시 한벽당으로 가닥을 잡는다. 이제 성곽도 없으니 쓸모없어진 문이지만, 그보다는 전주를 둘러보려면 왔다 갔다 바장여야 하는데다 가는 길에 향교가 있어서다. 고을마다 향교가 있었으나 이제 네 번째로 들러보는 전주 향교, 고을답게 넓고 예스러우나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진 못한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는 곳이자 배움터이나 요즘까지 가르치는 곳은 그다지 없다. 그나마 이곳은 어린이 예절학교와 일요학교가 있으나 방학인데도 조용하기만 하다. 향교가 유치원이나 놀이방을 두어 꼬맹이 재잘거림이 떠나지 않고 동재와 서재도 활짝 열어 누구든지 잠재우며 잔디밭에서 고기 구워 하룻밤을 지내게 하면 안 될까. 전통 혼례나 돌잔치면 또 어떠랴. 그러면 점잖지 못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예와 오늘을 가르치는 배움터이자 가까이서 숨 쉬는 문화마당으로 거듭나면 좋겠다. 골목 옆문으로 들어갔다가 정문인 만화루萬花樓로 향교를 나선다. 이 다락문은 한벽당 옆 개울가에 있었으니 이 울어리가 향교 땅이었겠으나, 날로 늘어나는 사람이 누에가 뽕잎 먹듯이 야금야금 살터로 꿰차오자 아예 그들한테 내주고 옮겨 버렸다.
만화루가 있었음 직한 곳은 몇몇 밥집이 차지했는데 죄다 ‘오모가리’라는 글씨를 매달았다. “들어와 먹고 가시오.” 흰서리 가득 앉은 할머니가 손짓하며 들어오라는데, 배는 주전부리로 참참이 때웠기에 아침곁두리로는 너무 부르다. “밥은 됐고요, 오모가리가 뭐요?” 홱 하니 몸을 돌리기에 냉큼 따라갔더니 유리문을 야멸치게 닫아버린다. 그러고는 무어라 실룩이는 입술소리를 들어보니 ‘재수 없다.’다. 이런, 먹는장사면서 너무 강밭다. 소금까지 뿌려댈까 얼른 내뺀다. 기웃대다 끝 집에 들어가 물어보니 민물고기로 어림했던 오모가리는 고장 말인 뚝배기란다. 시래기를 깐 큼지막한 오모가리에 피라미나 쏘가리, 또는 동자개(빠가사리)를 넣고 끓여낸 매운탕. 맛도 좋은지 손님도 시끌벅적하다. 시중드느라 바쁜데도 싹싹하게 대꾸해주는 아주머니 목소리가 풍기는 냄새보다 구수하여 전주에서 먹을거리 하나가 저절로 얹혀진다.
한 바퀴 돌아온 한벽당에서 바라본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덕 왼쪽이 오목대고 오른쪽이 이목대인데, 몇 걸음 오르니 길가에 어인 비각이 있다. 나무 살에 얼굴 묻고 더듬거리니 ‘집현전 직제학 최담 유허비, 1808년 5월’에 세웠다는 빗돌이다. 한벽당은 그리 자랑하면서 알림판 하나 없이 참 쓸쓸히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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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벽루 뒤 최담 유허비각 옛 사진. 비각은 이때보다 뒤로 물러났고 철길은 인도가 되었다. |
이목대梨木臺는 이성계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李安社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어떤 일이었는지 안사가 산성별감이 아끼는 관기를 베어버린다. 성난 산성별감이 수령을 찾아가 앙갚음할 궁리를 하자 이를 낌새챈 안사는 고을을 뜨기로 하는데, 붙이만이 아니라 많은 이웃도 따라나서 170쯤 되는 식구를 이끌고 삼척으로 간다. 벼슬도 없는 스무 살짜리 애송이거늘, 벼슬아치도 함부로 못했다니 남다르긴 달랐나 보다. 또 다른 말로는, 새로 온 산성별감을 맞는 잔치에 춤 솜씨가 뛰어난 관기가 있었다. 별감이 홀딱 반해 차지하려는데, 이 기생은 안사가 아끼던 터라 둘은 한판 붙게 되어 전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한다. 삼척에서 새 삶을 꾸려나가던 안사, 고을 원님이 새로 오는데 어찌하여 전주에서 다툰 그 산성별감이던가. 다시 짐을 꾸려야 했던 안사는 뱃길로 함경도 의주(덕원)로 가는데, 이때도 전주처럼 삼척 사람이 좇았고 의주서도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 큰 무리를 이루자 고려는 의주 병마사로 삼아 어르기도 한다. 1258년, 몽골이 쳐들어오자 동북면 병마사 신집평은 고을 백성을 이끌고 섬으로 들어가 싸우나 지나친 작전으로 호응을 얻지 못했고, 이 틈을 탄 조휘와 탁청이 난을 일으켜 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북쪽을 답삭 들어 몽골로 붙여버린다. 이로써 안사도 몽고 손아귀로 들어간다. 원나라를 세운 몽고, 고을을 다스리던 장수 산길은 날로 커지는 안사가 껄끄러워지자 지방 벼슬인 달로화적(다루가치)을 주어 남경으로 보낸다. 또, 안사가 마지못해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했으며, 산길과도 식구를 아내 삼게 할 만큼 가까웠다고 한다. 어쨌든, 항복이건 밀려갔건 원나라 벼슬을 받았기에 고려를 저버렸음은 틀림없다. 안사는 남경에서 20년 동안 이끌고 온 무리와 여진족까지 다스리다 아들 행리에게 넘긴다.
아버지에 이어 기틀을 넓히던 행리는 원나라가 왜구를 친다 하자 군사를 뽑아 원정대를 돕는다. 이 무렵 충렬왕을 만난 행리는 고려를 등진 잘못을 빌었고 임금도 옛 신하로서 따뜻하게 맞았다고 한다. 원나라 기운이 차츰 기울어지면서 여진과 늘 부대껴야 했던 행리, 여진족이 눈 부릅뜨고 자기를 노리자 경흥대로 끝인 서수라 앞바다에 있는 적도로 달아났다가 뒤쫓아 온 식구와 의주로 되돌아간다. 행리가 죽자 물려받은 아들 춘이 풍질로 일찍 죽고, 뒤를 이은 맏아들 자흥도 두 달 만에 죽으면서 첫 번째 부인 아들과 둘째 부인인 조씨가 자리를 두고 다툼을 한다. 이때 자흥 동생 자춘이 원나라를 찾아가 하소연하였고, 원나라는 조씨가 첫 부인이 아니기에 안 되며, 자흥 아들은 아직 어리니 클 때까지 작은아버지인 자춘이 맡으라며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리를 굳힌 자춘이 끝까지 이어간다. 원나라는 토박이와 뜨내기를 갈라 새 호적을 만들려고 한다. 이는 제 나라 백성만 감싸겠다는 뜻으로, 자춘으로서는 쌓아온 바탕이 밑돌 채 뽑혀나갈 판이었다. 이때는 원나라가 거의 가라앉고 고려도 원나라에서 벗어나려던 참이기에 자춘은 공민왕더러 뜻을 모으자는 속을 비친다. 이에 공민왕도 기껍게 소부윤이라는 벼슬을 내렸고, 이듬해에 밖과 안에서 치고 들어가 손쉽게 원나라를 몰아낸다. 백 년 만에 빼앗긴 땅을 되찾는 데 이바지한 자춘, 스물두 살 된 이성계 아버지다.
황산에서 왜구를 박살내고 돌아가던 이성계는 오목대梧木臺로 살붙이를 불러 잔치를 베푼다. 이때 술에 취한 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다고 한다. 대풍가는 천하를 손아귀에 넣은 유방이 고향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지었다는 노래다. 그런데 성계가 참말로 천하를 얻고자 유방 흉내를 냈을까. 또한, 진짜 맘을 품었다 해도 그 자리엔 황산에서 함께 돌아가던 정몽주도 있었다. 그 앞에서 그리 쉽게 속셈을 드러냈는지도 아리송하다. 더군다나 고려를 저버렸던 집안 아들이라 늘 몸속을 가다듬어야 할 성계, 터럭만 한 꼬투리도 잡히면 안 될 그가 그랬다면 제 발로 설 곳을 문대는 짓이 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조선을 세운 성계를 유방에 빗댄 뒷사람이 귀맛 나게 꾸며냈지 싶다만, 이때 정몽주가 남고산을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나라 걱정하는 시를 지었다고도 하니 가타부타 알 수 없다. 이 뒤로도 왜구와 오랑캐를 무찌르며 장수의 길을 걷던 성계는 여덟 해가 지난 1388년에 고려와 자기 운명에도 금을 긋는 큰 고비를 맞는다.
드세진 명나라가 시시콜콜 등쌀 대더니 나중에는 철령 북쪽을 도로 자기 땅으로 삼겠다고 떼쓴다. 고려는 한판 싸움을 치르려 하나 이성계는 생각이 달랐다. 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은데다 이 틈에 왜구가 쳐들어오면 막기 어려울뿐더러, 비에 무기가 풀어지고 돌림병이 걱정되는 한여름에 군대가 움직여선 안 된다며 맞선다.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가 어수선한 이때가 좋다며 밀어붙여 요동정벌은 이루어진다. 팔도도통사가 된 최영은 이성계와 조민수로 5만 군사를 이끌 좌우도통사를 맡겨 싸움터에 보내나, 압록강 어귀 세모벌인 위화도에서 때맞춘 억수장마를 만난 군대는 강을 건너지 못한다. 성계는 일이 이리되었다며 군사를 돌리자고 다시 아뢰어도 나아가라는 다그침뿐이다. 축축한 빗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머물 새, 군대는 느즈러지고 창칼을 버리고 달아나는 군사도 잇따르자 부하를 불러 모아 뜻을 묻고는 드디어 말머리를 돌려 버린다. 개경에 돌아온 성계는 임금을 갈아치우고 최영을 귀양 보내 고려를 거머쥐었고, 네 해 동안 전제 개혁 따위로 얻은 민심을 거름 삼아 1392년, 쉰여덟 나이에 새 나라 조선을 연다.
전주 이씨가 나라를 일으켰으니 그 뿌리인 전주도 같이 받들어져, 남다르지 않던 언덕바지인 이목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로 추존하면서 숨이 붙는다. 실록도 발이산鉢山을 ‘이씨 임금이 나왔다.’라는 ‘발이發李’로 바꿔 적을 만치 떠받든다. 아들 방원은 아버지가 죽자 1410년에 초상화를 모실 경기전慶基殿을 짓고, 영조는 1771년에 시조 이한李翰 위패를 둘 사당인 조경묘肇慶廟를 경기전에 뒤댔다. 이어 고종은 건지산자락에다 1899년 9월부터 두 해 넘게 무덤을 만들어 조경단肇慶壇이라 했다. 이 조경단을 만들 때 나라가 뒤숭숭한데도 묏자리는 엄청나게 꾸며대는 통에 손가락질과 혀를 차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주가라는 지관은 ‘황제로 불린 뒤부터 백 해 동안 왕조가 이어진다.’라는 예언서를 숨겨놓고는 땅속에서 캐냈다고 설레발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저 흐뭇해 어서 끝내라고 재우치는 황제, 삼척도 안사 어버이 무덤을 찾아내 준경묘와 영경묘로 새롭게 꾸민다. 아마도 안사가 삼척에 머물 때 돌아가셨나 보다. 고종은 이도 모자라 기록도 남겨야겠다며 여기저기 빗돌을 두라며 이목대에 ‘穆祖大王舊居遺址목조대왕이 살던 옛 터’, 오목대는 ‘太祖高皇帝駐畢遺址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고 쓴 글씨를 내려 보내 1900년에 세운다. 오목대 빗돌은 예전부터 있었으나 동학 때 없어져 다시 만들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
고종은 왜 이다지도 조상을 찾았을까. 나라 펼친 고장에서 기운을 얻으려는 애절함 때문인지, 나라를 사시랑이 꼴로 만든 죄스러운 몸부림이었는지 뒤죽박죽이건만 한 세기 동안 세월을 맞은 비각은 말없이 휘청거리는 눈길만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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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놓았을 때의 오목교 다리 |
어지러움도 많다. 대臺란 그냥 날등성이다. 이목대는 안사가 살던 자만동이 보이고 오목대는 소풍 오면 좋은 등마루일 뿐인데, 많은 이가 이 비각을 대로 안다. 그런데다 큼직하게 올린 정자마저 오목대라고 이름 붙인 저지레로 헷갈림을 부채질한다. 어제 관촌서 사선대에 운서루가 얹혔음을 몰라 헤맸는데, 우리도 이랬으니 이곳도 틀림없이 저 정자를 오목대로 여길 테다. 더군다나 시멘트 범벅인 꼴이라니.
오목대와 이목대 사이는 왜놈이 기찻길을 핑계로 고을 정기를 한칼에 베어냈다는 곳이다. 요즘은 더 깊게 파낸 골짜기로 자동차가 오가고 위에다 구름다리를 놓았는데, 가녀린 다리 하나 달랑 걸쳐놓고 산자락을 이었다는 둥 생태 다리라는 둥 한다. 아무리 콘크리트 공화국이더라도 정자 기둥은 나무 여야하고 시멘트는 이런데다 쏟아 부으라고 있듯이, 찻길에다 틀을 짜고 흙을 덮으면 고만이지 않나. 다리는 철길 때부터 있었고 뒷날에 찻길을 넓히면서도 엿가락 늘이듯 놓았을 뿐이다. 이래놓고 뭉개고 도려냈다며 입때껏 왜놈만 탓한다면 그런 우리가 욕가마리다. 나라가 서고 쓰러지고 밟힌 육백 년이 하루로 날아와 꽂힌 좁다란 오목대는 여정한 상념을 던지며 한옥마을의 검은 기와를 그무러지게 굽어만 본다.
게다짝을 끌고 서문 밖에 똬리 튼 왜놈, 성곽이 헐리자 누에가 뽕잎 갉듯이 성 안으로 기어들어오며 빗살 뿌리듯 일본 집을 지어댄다. 나라 삼킨 저들이 조선을 심은 줏대 복판에 왜못을 왜각대각 박아 오니 아프고 쓰라려 견디질 못하겠다. 고을 사람이여 일어나라, 우리가 먼저 집터를 차지해 저들이 더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이렇게 맞불 놓아 1930년께부터 들어찬 기와집이 자그마치 칠백 채, 여느 한옥마을과 달리 겨레 얼이 잔뜩 배인 곳이다. 용마루를 자근자근 밟아 가도 처음 들어선 곳이 술 박물관, 대여섯 식구가 오순도순 살았을 한옥을 고쳐 소줏고리 따위와 여러 전통 술을 널어 두었다. 마셔본 술은 기억으로, 맛보지 못한 술은 냄새로 쪽쪽 다셔대 한낮부터 얼큰하여 진짜 취한 듯이 왜죽걸음으로 박물관을 나선다. 이어 전주 최씨 종갓집과 일본식으로 지었다는 신 변호사집을 꼼꼼히 훑어간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처음과 달리 부르터 투정하는 발바닥 때문에 걸음이 축축 처진다. 북적이는 한옥생활체험관도 얼멍덜멍 구경만 하고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떨어지는 낙숫물만 벗 삼다가 찾아간 동학혁명기념관은 문이 굳게 닫혀 남은 김까지 쏙 빼 버린다.
“아빠, 생각보다 심심하다.” “한옥은 살림살이를 들여다봐야 제 맛인데 사람이 사니 어쩌질 못하고.” “다리는 너무 아파.” “넓은데 볼거리는 띄엄띄엄 하고.” “그럼 자전거라도 갖다 놔야 하는 거 아니야?” “아빠도 그 생각인데 자전거 말고 또 무엇이면 좋을까?” “달구지나 말, 많지 뭐.”
한옥마을은 이제 여든 나이라 깊은 맛이 떨어지는데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발품만 팔라니 힘겹다. 탈것을 마련해 주면 좋겠는데, 자전거 따위 말고 전차를 굴려보자는 생각이 불현듯이 인다. 딸랑딸랑 종 울리는 전차에 표를 사 올라타면 들를 곳에 딱딱 내려주고, 멀거나 외떨어진 데는 인력거가 뛰어다닌다. 전봇대 사이사이 시멘트 담벼락이나 자투리 마당은 점방이나 장터를 만들어 군것질거리나 기념품을 팔고 우체국과 우체통도 둬 사라지는 엽서를 부치게 하자. 이렇듯 1930년으로 되돌려 생활 속에서 숨 쉬는 거리로 꾸민다면 볼만한 구경거리가 되지 않을까. 영화를 찍으며 일부러 세트장을 만드는 판인데, 전주는 해마다 국제영화제를 열기에 더욱 맞춤하다. 다음에 왔을 때는 전차를 타볼 수 있을까? 전차는 돈이 많이 들겠기에 뒤로 미룰지언정 인력거라도 타고 돌아보게 하는 배려는 어렵지 않다. 요즘 같기보다는 한옥거리로 탈바꿈하면 마을 참뜻을 되새기는데도 바람직하지 않겠나. 걸으라고만 했던 마을도 계면쩍었는지 경기전을 가려는 나그네에게 조금이라도 길 줄이라며 옆문으로 이끌어 등을 민다.
경기전 바깥 담벼락 귀퉁이에 껑충한 다락집 한 채가 먼저 눈길을 끈다. 실록을 지키던 전주 사고 실록각이다.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밖으로는 충청도 충주뿐이었는데, 세종 때 경상도 성주와 이곳에 외사고를 늘려 있을지 모를 재난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임진왜란 같은 큰 난리 앞에서는 물거품이 되어 모두 불타고 이곳 전주만이 남게 된다. 이는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이란 사람이 있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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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사고 |
태인에 살던 두 선비는 왜적이 금산까지 치올랐다는 얘길 듣고는 댓바람으로 달려온다. 그리고는 사고를 지키던 참봉 오희길과 머리 맞댄 끝에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로 한다. 이때 이고 진 실록은 태조부터 명종실록까지 804책으로, 내장산에서 한 해 넘게 숨겨두었다가 무사히 조정에 넘겨준다. 허둥대다 손쓸 겨를 없이 잿더미가 된 다른 사고를 볼 때, 2백 년이라는 기록이 뭉텅 잘려나갔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뒤 해주와 묘향산, 영변으로 옮겨 다니다 왜란이 끝나면서 다시 펴내느라 강화로 온다. 전주 실록을 바탕으로 3부와 교정본 1부를 더해 1606년에 다시 찍어낸 실록, 조정도 난리를 톡톡히 겪었던 터라 이번엔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인 강화 마리산을 비롯해 묘항산과 태백산,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둘 사고를 짓고 가까운 절집 더러 지키게 한다. 시달림이 여기서 끝나진 않는다. 춘추관 실록은 이괄의 난에 얼마가 불탔는가 하면,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일부가 피난살이를 하고 묘향산 실록도 전라도 무주 적상산으로 옮기기로 한다. 그러나 강화 사고는 이어진 병자호란에 또 불타버리고 병인양요 때도 사나운 꼴을 겪어야 했다. 나머지 사고는 탈 없이 조선과 숨을 같이했으나 오대산 실록은 이 땅에 들어온 왜놈에게 한 번 더 수난을 받는다. 왜놈이 빌립네 하는 핑계로 바다를 건너간 실록, 관동대지진 때 불타 거의 못쓰게 하여버리고 1923년에 남았다는 27책만을 돌려받는다. 그러나 뒷날에 47책이 더 있었음이 밝혀져 2006년에야 제자리로 온다. 따져보면 사고 네 곳을 결딴낸 일본과의 길고도 질긴 악연도 마침표를 찍는다. 또한, 육이오전쟁 통에 간 곳 몰랐던 적상산 실록은 북한이 챙겨갔다고 한다. 전주 사고, 맡은 일을 훌륭히 마치고 뒤란으로 물러난 지 수백 년이 지난 1991년에 되살렸기에 때 낀 옛집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김일손처럼 죽음으로 쓰고 이를 지켜낸 옛사람을 기리는 데 모자람은 없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만들고 조선을 ‘기록의 문화’라 일컫게 한 밑거름이었음도 찬찬히 새길 만하다.
경기전慶基殿에 들어선 마당은 낙숫물 소리로 촉촉이 둘러싸였다. 고인 눈물을 앙감질로 건너니 익숙한 눈초리로 굽어보는 이성계가 있다. 어진은 그리기에 따라, 살아있을 때 그리는 도사圖寫와 죽은 뒤에 기억을 더듬어 그리는 추사追寫가 있다. 있던 어진을 베끼면 모사模寫나 이모移模라고 하는데, 이곳도 낡삭은 어진을 1872년에 베낀 초상화다. 그런데 이 어진이 요새 단단히 사달이 났다. 2005년 9월에 새로 여는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아 오랜만에 한양 나들이 간 이성계, 어진을 훑어보니 왼쪽 귀 옆에 50센티미터쯤 찢트렸던 자국이 드러났다. 2000년에 문중에서 제사 올리다 그리되었다는데, 돌보지 못해 줄 수 없다는 문화재청과 달라는 전주가 몇 해째 옥신각신거리고 있다. 어디서 간수 하는 게 좋다고 가타부타 말하기 어려우나, 아무쪼록 하나밖에 없는 어진이니 슬기롭게 풀어야 한다. (태조 어진은 2008년 12월에 전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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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어진 |
어진은 임금마다 얼마나 힘이 있었는지도 엿보게 한다. 태조를 비롯해 태종과 세종, 세조는 살아 있을 때 어진을 그렸다. 누가 봐도 거센 권력을 누렸던 임금이다. 이에 견줘 신하가 드셌던 성종과 중종, 인종은 죽은 뒤에야 모습을 남겼으며 그나마 광해군과 인조, 효종, 현종은 죽어서도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영조는 ‘무수리 아들’이었음에도 쉰 해 넘게 자리를 지키며 10년에 한 번씩 어진을 남겼다고 하고, 아들 정조도 아버지처럼 초상화를 그렸다고 한다. 선조는 남다른 까닭으로 남기지 못했다. 군사를 보내 달라는 조선을 못 미더워한 명나라는 앞뒷일을 알아보라고 보낸 사신더러 선조 초상화도 그려오라 하였으나, 선조는 자기 얼굴이 알려지면 위험해진다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왜놈이 한양까지 치올라오자 도성을 버린 선조, 백성은 믿음을 저버리려는 나라님을 눈물로 붙잡으려 몰려왔으나 이미 떠난 뒤였다. 성난 백성은 경복궁을 부수고 불태우며 화풀이했는데, 선조는 왜놈보다 노여움을 산 백성을 더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어진은 이성계가 가장 많은 26점을 남겼으나 이곳 말고는 모두 사라졌고, 다른 어진도 여러 난리판을 비껴가지 못하고 한둘 없어지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나, 1954년 12월에 육이오전쟁 때 부산으로 옮긴 어진을 간직하던 광에 난 불로 여러 문화재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그랬기에 만 원짜리 종이돈에 그려진 세종도 본디 모습을 모르며, 사진도 있는 고종과 순종을 빼면 어진으로 얼굴을 알아볼 임금은 태조와 영조, 철종뿐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 육백 해나 앞서 살다 간 이성계를 본다는 까닭만으로 북받치는 오늘이지 싶다.
이성계, 다문 입과 갸름한 눈매가 날카로우면서도 헌걸차다. 사람 됨됨이는 어땠을까. 돌아가셨거나 나이 드신 할아버지는 조선을 ‘이씨조선’이라 불렀다. 왜놈이 조선을 낮잡느라 만든 말이라지만, 그 속에는 나라 망친 꾸짖음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이성계까지 언턱거리 삼아 헐게 비틀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우두머리를 도맡았던 성계, 아이들에게 땔나무를 하러 갈 테니 아무 날 아무 때에 빠짐없이 모이라 했으나 한 아이가 늦고 말았다. 성계는 눈 깜짝하지 않고 그 아이를 지게꼬리에 매달아 끔찍하게 죽여 버린다. 이쯤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 해도 할 말 없으나, 이도 나라 잃은 때에 말밥에 얹어진 지청구이지 싶다. 그런 그가 임금일 때는 이보다 견디기 어려운 일도 겪는다. 아들끼리 벌인 피비린내 나는 자리다툼에 아끼던 방번과 방석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이성계. 사위 이제도 죽자 딸 경순공주를 불러 손수 머리카락을 잘라주고는 이 꼴 저 꼴 보지 말고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라고는 자기도 산천 구경을 핑계로 훌쩍 떠나 함흥에 숨어 버린다. 이성계가 충신인 정몽주에 빗선 반역이자 혁명가였지만, 그에게서 자식 농사를 그르치고 하소연할 곳도 없어 쓸쓸했을 아버지를 떠올린다면 방정일까. 어진 뒤로 감추어진 도타움이 아렴풋이 보일 듯도 하다만, 아들 손자까지 이어져 죽고 죽인 자리쌈을 마저 보았다면 또 어땠을까. 나라 세운 걸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궁금한 생각이 더 모질다.
다른 어진을 돌아보노라니 얄궂은 웃음이 새어나온다. 태조가 바라보는 왼쪽에 세종과 정조, 고종이 나란하고 맞은쪽에 영조와 철종, 순종이 있다. 스물일곱 임금 가운데 첫손을 다투는 세 임금과 허울뿐인 철종, 무르녹은 고종, 무늬만 임금인 순종이 한데 섞여서다. 일부러 아니었어도 어진으로 조선 첫머리부터 끝장까지 얄망스레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구경거리가 있으니 위패 따위를 옮기는 가마인 신연神輦이다. 타는 가마만 알았다면 볼만한데다 어지간한 나잇살은 문화재로 삼기에 모자람도 없다. 다만, 뽀얗게 앉은 먼지는 어떻게 좀 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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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담장 넘어 보이는 전동성당 |
경기전 앞 큰 마당으로 나오니 기와 담벼락 너머로 뾰족집 전동성당이 하늘을 다 가지려는 듯이 버젓하게 솟았다. 사진기를 들이미니 좁아터져 안 들어간다고 앙탈 부릴 만치 굽힘도 없다. 또한, 서양 집이면서 조선집인 경기전과 나무랄 데 없는 맵시로 어울린다. 그래 봐야 떠들어온 지 고작 백 년이니 이백 년과 삼백 살을 사귀어도 괜찮았을 성당이다. 옳거니 맞장단질 치듯이 자동차가 떠들썩하니 스쳐가기에 소리를 바라보니 조막만 한 돌로 촘촘히 깐 바닥을 때리는 울음이다. 땅거죽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하뭇하지만 성곽이 흘렀던 곳이기에 차 없는 거리면 더 낙낙하겠다.
고려부터 있었다던 읍성은 조선 때에 보태 짓기를 거듭해 성곽 둘레를 5천3백56척으로 마무리 짓고 동서남북에 네 문을 두었다. 그러나 요즘엔 남문인 풍남문 말고는 성곽이고 뭐도 없으며 옛집도 객사 하나만 달랑이다. 문화가 잘 뻗친 고을일수록 옛것은 대수롭지 않게 다루는 데가 많다. 남원도 그렇거니와 예술과 먹을거리로 왁자한 이곳도 마찬가지다. 자랑거리가 워낙 많아 주체궂어 그러겠으나 전주는 이성계를 뽐내지 않나. 그러면서 정작 그가 이룬 자국은 매끈하게 벗긴 알몸으로 맨망스레 물구나무 세웠다. 옛것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잠깐 없어졌을 뿐이다. 그러기에 다시 살리려고 애쓰는 곳이 적잖은데, 호남 으뜸 고을인 전주는 언제까지 모르쇠를 잡으려는지. 집터로 에둘린 풍남문도 심드렁하다.
보물 제308호인 풍남문은 고려 때인 1389년이 처음이라고 알려졌으며, 정유재란 때 무너진 지 한참 지난 1734년에 관찰사 조현명이 되살려 명견루明見樓라 하였다. 그러나 1767년 3월에 큰불이 나 2천 3백쯤 되는 집과 함께 잿더미가 되고, 이듬해에 관찰사 홍락인이 거듭 지어 풍남문豊南門이라하였다. 그 뒤 성곽을 털어낼 때 종각과 포루도 같이 헐렸다가 1978년에서야 제 모습을 찾았다는 성문이다. 그런데 옹성은 제대로인지 아리송하다. 해동지도와 그즈음에 나온 모든 지도는 문마다 옹성이 그려졌으나 그 뒤에 나온 지도는 북문인 공북문만 있고 나머지는 문루만 보인다. 처음엔 있었으나 나중에 없어졌다는 말인데, 풍남문을 찍어 둔 오랜 사진도 없으니 옹성은 늦춰 잡아도 1800년께부터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버젓하게 옹성을 둘러쳐 놓았다. 더군다나 풍남문 다락은 이층으로 된 흔치않은 얼개라 여느 문보다 껑충한데, 뻥 뚫렸을 아랫도리를 옹성이 감싸 몸꼴을 붙죈다. 언제 어떻게 없어졌을까. 무너졌는데 그냥 내버려 두었거나 일부러 없애자고 뜻을 모았는지, 반드시 어떤 까닭이 있을 테다. 이 앞뒤 사정을 옛사람에게 속속들이 물어는 보았을까. 데생각 끝에 얼치기로 되살렸다면 쓸어 버려야 한다. 적어도 옛 지도에 옹성이 사라진 까닭수를 알기까지는 말이다. 다락도 아래층에 기둥 넷을 두 줄로 세우고는 위층까지 곧추 올렸다는 짜임도 드물다는데, 우리네야 봐도 모르니 그저 보듬으며 냄새나 맡아보면 그만이다. 그런데 가뜩이나 언짢아하는 나그네에게 들어설 길도 주질 않는다. 아내와 영남대로를 걸어 닿은 숭례문도 그랬다. 나들어야 할 문을 굳게 잠그고도 모자라 자동차로 둘러친 섬으로 만들어 멀겋게 쳐다보게 했고, 삼남대로인 수원은 성곽에 걸쳐놓은 쇠다리로 장안문에 다가갈 순 있었으나 문으로 나들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늦게나마 숭례문이 활짝 열렸고 장안문도 찻길에다 건널목을 두어 문과 길을 이었다. 그럼에도 풍남문은 아직도 외로 꼰 채 늦잠 자는 게름뱅이로 남겨두었으니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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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성으로 답답하기만 한 풍남문 |
이 여행이 2007년 1월과 2월이었으니 어느덧 이마적인데, 다녀온 지 얼마 안 돼 숭례문이 불타는 끔찍한 일을 지켜봐야 했다. 어떤 이는 사람을 드나들게 해 불났다고도 하지만, 문지기 몇을 두었으면 그뿐이었다. 그랬다면 일자리 얻기가 팍팍한 터수에 일터도 절로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칠 돈이면 몇십 해 품삯도 너끈하다. 여기에 전자 장비를 갖춰 떠받쳤다면, 그토록 덧없이 보냈을까. 벋나간 간수 탓이었다. 그래서 전주도 불날까 봐, 탈날까 봐 하나뿐이기에 돋보여야 할 풍남문을 저리 외톨이로 가두었는지. 사람을 멀리하는 문은 송장이나 진배없다. 남쪽 땅기운을 막고 선 옹성을 툭 터버려 사람 기운으로 넘실거리게 바꿔보자. 일자리도 마련해주면서 말이다.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한 전주읍성 으뜸 문인 풍남문, 채우지 못한 나그네 눈이 구뻐하는데 높다랗게 걸린 ‘호남제일성’이라 쓴 현판도 애매하게 쳐다보며 헛헛해한다.
“콩나물 국밥 잘하는 데가 어디예요?” “저짝, 시장으로 가봐.” “아빠, 전주 왔으니 비빔밥 먹어야 하는 거 아녀?” “전주에서 비빔밥 먹자면 촌사람이라 그래.” “그러면 어때, 우리가 이 동네 사람은 아니잖아?”
전주비빔밥은 쇠머리를 푹 고아 기름은 걸러낸 국물로 밥을 하는데, 뜸들일 때 콩나물을 넣고 지은 밥을 참기름과 버무린다. 고명으로 올릴 숙주, 미나리, 고사리, 도라지는 데치거나 볶아 무치고 청포묵은 굵게 치고 달걀은 알고명으로 나온다. 이때 삶아낸 소머리는 채 썰어 양념장에 무치고 엿 고추장은 종지에 따로 곁들인다고 하였다. 진주도 이곳 못지않게 짜했다. 진주비빔밥은 여러 남새와 고사리, 숙주, 청포 따위를 둘러앉힌 고명에다 육회를 올리고 빨간 고추장으로 고깔 씌우듯 한 때깔이 음식답지 않게 고와 예로부터 화반으로 불렸으며, 정갈함만으로도 입맛을 호릴만하다 하였다. 할아버지쯤 되는 분이 어렸을 적에 맛보았다는 비빔밥인데, 아쉽게도 두 고을 모두 밥을 먹어보질 못해 요즘은 어찌 나오는지 모른다. 진주는 저자에 밥집이 없고 굳이 찾아가야 한다기에 그만두었으나 밥집이 늘비한 전주는 좀 남다르다. 이번 말고도 전주에서 스무 끼니쯤이나 밥상을 받아보았으나 고장 사람은 비빔밥을 사주거나 먹잔 말을 않는다. 어쩌다가 미련이라도 떨라치면 촌사람이라고 타박한다. 이러니 혼자 왔을 때나 먹자 했으나 어느 틈에 나그네도 고을 사람과 한통속이 되었다.
비빔밥은 궁에서 흘러나왔다고 하는가 하면, 바쁜 농사철에 참 내기 번거로운 아낙네가 밥을 푼 옹자배기에 찬거리를 얹어낸 게 처음이라고 한다. 어떻게 생겨났다기보다는 이 밥이 왜 진주를 떠났으며, 전주는 고장 사람마저 따돌리는지가 더 궁금하다. 셋째 딸을 시집보내는 건너 마을 최 진사 집에서 잔치를 벌인다. 동네 아낙이 몰려와 음식을 해주고는 품삯을 갈음해 먹을거리를 바가지에 담아간다. 여기에 고추장 한 숟갈을 푹 떠엎어 식구가 둘러앉아 비벼먹는다. 육이오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는 거지가 먹던 동냥밥도 엇비슷했겠다. 또 진주는 왜적과 맞선 성안에서 잽싸게 먹느라 생겨났다고도 하니, 먹을 때마다 아픈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가난하거나 거지가 먹는 음식으로 떠올려져서가 아닐까. 익은 밥 먹고 선소리하듯이 실컷 비벼보는 어림이지만, 가끔은 밥 하나도 속절없다.
“에게, 그냥 콩나물국이잖아! 건더기도 하나 없고.” “속 푸는 국이라 그래.” “누가 소화가 안 된대?” “아니, 술 마시고 속 아플 때.” “우씨, 그럼 아빠만 제대로 먹는 거네.” 콩나물에 시래기만 조금 넣고 끓인 국밥이니 멀겋다고 투정할 만하다. “아냐, 전주에 오면 아침엔 이거, 점심엔 아까 그 오모가리, 저녁엔 한정식을 먹고 끼니가 남으면 비빔밥을 먹는 게 순서래.” “언제 또 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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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 국밥 |
예로부터 서울 설렁탕이라면 평양엔 어북장국이고 전주는 콩나물국이라 했다. 고을마다 꼽히는 국밥이니 맛도 엇비슷하다 할지 모르나 그렇지마는 안타. 쇠고기꾸미로 고아낸 설렁탕과 말린 명태를 쓰는 어북장국은 밑거리부터 자기 맛을 지닌다. 그런데 전주는 하찮은 콩나물만으로 어깨를 견주었다. 이 대견한 국밥이 자리매김하기는 해장국, 속 푸는데 그만이어서다. 할아버지는 먹을 때도 운치 없는 사람은 제 맛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아침 일찌거니 일어나 쌀쌀한 찬바람에 목을 웅숭크리고 선술집을 찾아간다. 구수한 냄새와 모락모락 김이 쏟아지는 술청 앞에 걸터앉아 틉틉한 탁배기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국에 밥 한술 놓아 훌훌 마시면 산해진미와도 바꿀 수 없이 속이 후련하다. 더구나 안날 밤에 한잔 톡톡히 먹어 속이 쓰린 판이라면 이보다 더 얹혀 먹을 게 없었으며, 탁배기에 국과 밥 한 덩이 값도 어찌나 싼지 술꾼에겐 으뜸 가운데 으뜸이라 했다. 탁배기는 무엇인가. 모주를 탁배기에 담아 주었기에 탁배기국이라 했다. 모주는 약주를 거르고 난 밑술인 막걸리를 말하는데, 요즘은 이 모주가 없어 그냥 콩나물국밥이다. 모주 값을 아끼느라 뺐는지 모르나, 국밥 하나에도 운치를 느끼자던 할아버지처럼 탁배기란 이름은 되찾아야겠다. 콩나물국밥이 어떠했던지 말해주는 사이에 그릇 바닥을 드러낸 아이가 할아버지인 양 환히 말한다.
“아빠, 나도 모주 한잔 줘.”
먹기보다 이야기로 살찐 배를 안고 풍남문으로 되돌아온다. 그저 걷는 여행이라면 둑길을 타면서 걸음을 줄이겠지만, 옛길이니 읍성 복판을 지나야겠고 무엇보다 ‘전주지도’가 잡아끈다. 뚜렷하진 않으나 겸재 정선의 붓끝이라고 알려진 지도다. (2008년에 보물 제1586호가 되었다.) 겸재는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한강 여러 곳을 그린 경교명승첩을 남기며 그림마다 천금물전千金勿傳이란 글을 써두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대도 바꾸지 말라는 다짐을 둔다. 산수화라기보다 군사지도에 버금가니 적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뜻일 만큼 정밀해서다. 동작진과 양화진이 어디였는지도 이 그림만으로 짚어냈으니 그럴만하다. 남고산에 올라 그렸을 전주지도도 읍성 안팎과 여러 관청을 빠짐없이 나타냈는데, 길도 금만 그은 여느 지도와 달리 너비 그대로 그려냈기에 풍남문에서 서문 쪽으로 가는 길은 아직껏 골목으로 남았음을 찾아낼 만치다. 이쯤이면 위성사진도 서럽게 울고 갈 일이니 지도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야 한다.
길켠에는 무기를 만들고 지키던 군기고와 감영인 선화당宣化堂이, 맞은쪽은 전주 관아가 늘어앉은 관청 거리다. 옛사람이라면 벼슬아치와 부대끼느라 주눅에 잔뜩 씌워 지났을 길인데, 요즘도 군기 터엔 경찰서가 들어섰고 감영은 도청이 차지한 적이 있어 예와 비슷해도 옛집은 볼 수 없어 맛적기만 하다. 경찰서 민원실이나마 옛집을 흉내 내고 선화당도 되살려 전라감영으로서도 낯을 세워야겠다.
길을 곧추 오르니 맞아주는 객사가 반가움보다 놀라움을 던진다. 자동차가 복작거리는 한쪽에 버티고 선 자태도 뽐낼만한데다 활짝 열어놓아 사람이 바글댄다.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들고 온 차와 과자부스러기를 놓고 나눠 먹는 연인, 잠깐이나마 등 내려놓고 꿈나라로 간 사람들……. 1471년에 세운 객사가 오늘날도 이처럼 살갑게 어울리는 가운데 머리맡에 매달린 커다란 현판도 활개 펴듯 감싸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이 현판은 1606년에 명나라 황태손이 태어났음을 알리러 온 주지번朱之蕃이 익산에 살던 스승을 뵙고자 전주에 들렀다가 썼다는 글씨다. 흘림글씨로 쓴 ‘풍패지관豊沛之館’은 유방이 태어난 고을과 마을인 ‘패군’과 ‘풍현’에서 한 글자씩 따온 ‘한나라를 이룩한 고장’이라는 뜻이며 이성계를 유방에 빗대 지은 이름이다. 풍남문과 패서문도 같은 뜻이고 이성계가 태어난 함흥 객사도 풍패관이다.
남아있는 객사도 드물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크지 싶은 풍패지관은 두 끝에 날개집도 달렸어 더욱 우람진데, 한쪽 날갯죽지가 어딘지 모르게 기우뚱거린다. 객사는 옛집 가운데 첫손이기에 맨 위쪽에 두었고, 꼭대기에서 고을을 굽어보는 짜임을 갖추느라 그 뒤로는 어떤 집도 들여놓지 않았다. 그래서 풍남문을 들어선 길도 객사 앞에서 막히며 옆으로 퍼지는 우자꼴이다. 왜놈이 들어오자 이 우잣길을 치올려 네거리로 만드는데, 동쪽 날개집이 질러 막는다. 나라가 무너진 판에 옛집 따위가 어찌 버텨내랴. 1912년을 맞이하지 못하고 된서리 맞은 날개집, 1999년에서야 되살아나면서도 한번 뚫린 길을 어쩌지 못해 다섯 칸짜리를 세 칸으로 줄여버린 게 오늘 모습이다. 지난날엔 객사가 으뜸이었으나 이즘엔 길이 그 위에 있다. 아무려면 어떤가. 삼문과 진남루, 매월당과 청연당 같은 딸림 집을 다 보냈기에 허수할 만한데도 홀로 옹골차게 자리 지키는 객사, 이쁘둥이가 따로 없다. (보물 제5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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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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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에 시달림 준 길을 따라 허전허전 오르면 북문이 나오나, 옛길은 객사 왼쪽 가장자리를 돌아나갔다. 그러나 옛사람이 구태여 여기까지 왔을까. 읍성에 들지 않고 성곽을 따랐거나 풍남문을 들어섰다 쳐도 서문으로 빠져나갔으니 북문은 벼슬아치나 나들었을 테다. 아직도 문이 버젓하다면 모를까, 남다른 뜻도 없기에 둑길로 미끄러져 옛사람을 만나러 간다.
남문부터 성곽을 따라 이어졌던 길은 둑과 나란한 찻길로 흩어지거나 집터가 되었고, 아주 짧게 남은 골목을 찾던 무딘 걸음도 일쩝다기에 개울녘으로 내려서니 누런 억새로 감싼 길이 얄나게 한다. 그러나 호강도 잠깐, 개울 길을 따라가다 ‘숲정이 성지’로 꺾어 나와야하는데 없는 푯말로 애먹는다. 물어봐도 숲정이는 들었어도 성지는 모르겠다는 대꾸다. 덕진 못이 건지산과 가련산 기운을 잇느라 둑을 쌓으니 물이 고여 못이 되었듯이, 숲정이도 허한 땅기운을 보듬어 머물도록 일부러 숲을 이뤄 생긴 이름이나, 삶터가 된 요즘이라 딱히 어디라고 짚을 곳도 없는 된판에 성지를 알 턱이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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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옛길이자 골목길 |
진북초등학교 뒤, 그다지 넓지 않은 숲정이 성지는 한가운데 동그란 동산을 미고 빙 둘러 가며 푯돌을 두었다. 돌에는 1791년 신해부터 1801년 신유, 1827년 정해, 1839년 기해박해를 비롯해 6천에서 많게는 1만 명이 죽었다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숨을 거둔 고장 사람 이름을 파놓았다. 이순이와 유중철도 보인다. 이들 말고도 여기가 전라감영 죽음터였기에 목 떨어졌을 세지 못할 넋도 떠돈다. 찾아간 숲정이는 고을을 감싸주던 겉과 죽음이라는 속을 뒤얽은 된맛을 보란다.
다시 둑길로 나와 걸음을 잇노라니 앞에 야트막한 가련산이 보인다. 저 도랫굽이만 지나면 옛길에 가깝게 남았으려니 어림하는 마을 어귀가 나타날 테다. 그러나 바람과 달리 허허벌판이 벌떡 일어나 맞아주며 여기저기 꽂힌 빨간 깃발만 된바람에 나부낀다. 길은 어수선하나마 억세게 붙었으나 저 깃발보다 몇백 곱이나 치솟을 닭장 집이 들어서면 숨을 다하겠지. 그나마 반쪽 뜸마을이 고스란한 골목쟁이를 열어주어 어서 가라 등 떠민다.
추천을 건너면서 전주 고을을 벗어난다. 완주군 신리에서 이곳까지 15킬로미터니 걷기만 했다면 네 시간쯤일 텐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치명자산까지 올랐더니 해가 주체 못해 대꾼하다. 남은 삼례까지는 9킬로미터 까막길이니 재우쳐야 한다. 옛길도 곧은 찻길에 빨렸고 조촌 초등학교 앞길 자투리뿐이라 휘적휘적 거리면 그만이다. 아무리 그래도 찾아볼 데가 없다는 말이지 속뜻조차 없을쏘냐. 조촌 초등학교 앞에서 국도 26호선을 옮겨 타고 군산으로 내빼는 이 길은 1907년에 7미터 너비로 넓힌 첫 신작로로, 왜놈이 군산으로 싣고 간 쌀을 배 태워 일본으로 보내고자 만든 길이다. 조촌 초등학교 위에 있는 우석 고등학교는 미쓰비시가 쌀을 그러모으려고 차렸던 동산농장 자리다. 재벌만이 아니라 어중이떠중이 죄다 들어와 숱한 농장을 두고 빗질해간다. 마구잡이로 쓸어가는 쌀, 밥은커녕 죽 쑬 쭉정이도 없어 아우성치니 만주에서서 썩정이나 다름없는 값싼 곡물을 들여 푼다. 이도 왜놈 장사치에게 도차지해 팔게 했으니 부르는 게 값이다. 그렇게 앗아간 길, 요즘은 벚꽃이 아름다운 길이라고 왁자하다.
만경강에 닿으니 야금야금 내리던 어둑발이 어느덧 깜깜나라인데, 앞서 온 한 떼거리가 강을 건너지 못해 동동거린다. 통영별로는 여기서 삼남대로로 알려진 해남대로를 만나는데, 이들은 열두 척으로 수백 척을 깨부숴 기적 같은 대첩을 거둔 울돌목부터 해남, 영암, 나주, 장성, 태인, 금구 고을을 거친 490리를 걸어온 길손이다. 강은 겨울이라 있으려니 했던 떼다리도 없고, 신작로 다리도 언제 들어냈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쩌랴, 이들을 이끌고 그냥 큼직한 찻길 다리를 빌리니 강 건너 야트막한 둔덕 위에 자그만 정자만이 희미한 별빛을 되비친다. 원균이 이끌던 수군이 칠천량에서 크게 졌을 때 함께 싸웠던 무관 최영길이 1573년에 지었다는 비비정飛飛亭이다.
손자 최양이 정자를 고치고는 송시열더러 기문을 써 달라 한다. 우암은 모든 무관이 권문에 붙좇느라 뇌물로 알랑거리기를 늙어 죽도록 그치지 않았는데, 정자를 세운 영길은 그러지 않았다며 가만히 추어올리고는 이름 풀이를 해준다.
“비비정이라 한 뜻이 무엇인가?” “할아버지 호인데, 그냥 땅이름이지 싶습니다.” “내 생각은, 신의와 용맹하면 장익덕이고 충효라면 악무목인데 둘 다 이름이 ‘비’지 않나. 그대 집안이 모두 장수일진대 무관으로써 어찌 이들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우암은 ‘비비’가 장비와 악비에서 따왔을 것이라며, 또 그들을 우러른 정자라면 비록 작아도 뜻은 커다라니 모든 무관이 본보기로 삼을만하다 하였다. 이름난 선비도 아닌 평범한 무관이었기에 그만큼 남달랐을 정자였을 텐데, 그렇게 잘 지내오던 정자를 뒷자손이 1901년에 임실로 뜯어가 버렸다. 그 뒤 빈터가 쓸쓸했는지 나중에 고을에서 다시 올리긴 했다만, 어찌 된 일인지 임실 비비정은 마루 한가운데 조그만 방이 있으나 이곳엔 없는 생김이다. 처음 모습이었을 임실과 제자리를 지키는 정자, 어디를 비비정이라 해야 하나. 그나저나 지난번 삼남대로를 지나면서 밤이 깊어 지나쳤는데 이번에도 어둠이 배짱부린다. 내일로 미뤄야 하는 아쉬움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고을 분위기가 사뭇 뒤숭숭하다. 여느 때보다 북적이는 많은 사람도 하나같이 머리띠를 동여맸다. 그러고 보니 내일 동학 2차 봉기, 삼례 집회가 있는 날이다.
고부에서 지핀 불씨가 전주를 무너뜨리면서 활활 타오른 동학혁명, 전봉준은 5월7일에 ‘폐정개혁안’을 내놓고는 거둬들이면 전주성을 내주겠다고 했다. 조선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고, 농민군도 이튿날 흩어져 흙으로 되돌아갔다. 이때 개혁안은 민주공화국인 오늘날에 들여다봐도 허투룬 대목이 하나도 없으니, 그들이 어떤 나라와 어떤 세상을 꿈꾸었는지도 엿볼 개혁안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일어났다. 이런, 그렇다면 오늘 전봉준을 만나기로 했는데 깜빡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막집 사립짝을 제치고 들어서니 봉놋방에 앉아 막걸리를 사발 째 들이켜는 봉준이가 보인다.
“봉준이 와있었네, 늦었어.” “어서 오시오.” 앞에는 댕기 머리 젊은이와 몸피 작은 두 사내가 등진 채 나란히 앉아있다. 다가가니 이순신과 둘째 아들 울이다. “어, 형님은 어쩐 일이야?” “여기 머문다기에 내가 모셔왔소.” “그렇잖아도 사람을 보냈는데.” 이때 봉준이는 마흔이고 순신은 쉰넷이니 형님뻘이다. “울이는 누굴 닮아 그리 걸때가 좋으냐?” “다들 할머님을 빼닮았다고 하데요.” “빈소를 지켜야 할 네가 욕보는구나.” “저야 뭐, 아버님이…….” “아무쪼록 잘 모시 거라.” 그때 늙수그레한 한 사내가 들어와 두리번거린다. “할배는 또 어떻게 알고 왔어?” “인석아 네가 바늘이라며, 그러니 실이 따라다녀야지.” “헤헤, 앉으세요.” “아, 길을 걷는다고 했지요, 다녀온 곳은 어떠합디까?” 봉준이가 근심스레 묻는다. “여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아, 다들 끝장내자는 눈빛이야.” “그렇군요.” “그래도 지난번과 달리 이번엔 힘겨울 거야.” “각오했습니다.” “아냐, 이번엔 왜놈과 싸워야 하잖아.” “무어? 왜놈이라니! 그놈들이 또 쳐들어왔기라도 했단 말이냐?” 가만히 듣고 있던 순신이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른다. “그게 말이야…….” “이 눔아 꿀 먹었느냐? 어서 입을 떼어라!” “왜놈과 청나라가 우리 몰래 짬짜미를 맺었어. 그게 천진조약天津條約인데, 봉준이가 들고일어나자 다급해진 조정이 청나라한테 군대를 보내 달라 했어. 그랬더니 자기네를 부른 거나 마찬가지라며 들어온 거야.” “무어, 무어라고? 그리 쉽게 이 땅에 발 딛게 했더란 말이냐?”
1884년 시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이 청나라가 끼어들며 그르쳐버리자 뒷배를 봐주었던 일본은 청을 견제한다며 2개 대대를 조선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는 두 나라 군대가 맞부딪칠 위험이 커졌다는 핑계를 든 일본은 1885년 4월에 이토 히로부미를 천진으로 보내 이홍장과 조약을 맺는다. 두 나라는 머물던 군대를 넉 달 안에 물려내고, 조선은 스스로 군사를 키우게 하되 어떤 도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 청나라를 조선 땅에서 몰아내려는 허울이다. 앞으로 조선에 변란이나 큰 사건이 있어 군대를 보내게 되면 서로 알리고 일이 끝나면 곧바로 물러난다. 이 세 번째 대목을 억지 빌미삼아 들이친 이악스런 놈들이다.
왜놈은 6월 21일 새벽에 경복궁에 쳐들어와 총을 쏘아대며 부수고 짓밟아 정부를 손아귀에 넣고는, 곧바로 전쟁을 일으켜 눈엣가시인 청나라도 가뿐히 쫓아버린다. 이제 왜놈 앞마당이 된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이니 막다른 분노는 놈들을 몰아내고자 골골샅샅이 일어났고, 가만히 때를 짚어보던 전봉준도 마침내 깃발을 꽂는다. 처음이 안으로부터 나라를 뜯어고칠 개혁이었다면 이번엔 바깥 적, 일본을 거꾸러트려 그 나라를 지키려는 싸움이다. 전봉준, 농투성이가 든 곡괭이에 나라 운명이 달렸다. 그러나 농민군은 듣도 보도 못한 일본군 총소리에 붉은 피를 흩뿌려야 했고, 대포가 터질 때마다 살점을 쏟아내야 한다. 기운 다한 하늘도 도와주지 못해 하염없이 스러져갈 이들. 봉준이도 어떤 싸움이 될지 헤아려 보았겠지만, 어찌 그 끝을 말할 수 있으랴. 더더군다나 순신이 앞에서 나라 먹혔다는 말은 더욱이 할 수가 없다.
옛길에서 만난 옛사람, 우리는 이들을 밟고 온 오늘을 부끄러움 없이 살고는 있는 걸까. 통영별로는 마지막 고을에서 더욱 깜깜해지는 밤을 맞는다.
자유촌 부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