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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답사 스크랩 일본의 관문 ; 화산섬 큐슈 답사기 (2)
김창집 추천 0 조회 34 11.09.08 19: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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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오카에서 가라쓰시 나고야성까지

사실 우리가 처음 여행을 기획할 때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배편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부산으로 가고 오는 비행기 요금과 배편과의 연결, 그리고 배에서 보내는 시간을 감안하면 왕복할 경우 하루를 그냥 보내버리는 셈이 되기 때문에 직항 비행기가 훨씬 경제적이고 편하다 생각하여 제주→후쿠오카 직행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약된 60석 외에 좌석 확보를 못해 나머지는 부산을 경유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으로 배낭 여행하는 사람들은 월∼금 운행되는 카멜리아호를 이용, 전날 17:00에 출발하여 이튿날 08:40에 도착할 수 있고, 매일 2∼3회 왕복하는 쾌속정 비틀호나 제비호를 이용하여 3시간만에 갈 수 있으나, 배삯이 비싼 편이다.

공항에 내려 입국 수속 후 대합실로 나서자 피켓을 든 관광회사원들이 더러 보였으나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이 없었기 때문에 배가 고파 점심을 해결하려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조그만 식당과 슈퍼가 있었다. 식당은 먹을 만한 것이 없어 슈퍼에 갔는데 도시락이 250엔으로부터 750엔 짜리까지 있어 이를 구입하려는 찰나, 같이 간 가이드 유한숙(32)씨로부터 10분 후 차가 오니, 가다가 휴게소에서 해결하자고 한다. 대형차를 타는 곳은 3층에 있었다. 올라가자마자 버스가 도착하여 먼저 온 분들과 인사를 하고 인원을 파악하는데 한 사람이 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가 보니, 처음 있었던 곳에 얌전히 앉아 있다. 특히 외국에 갔을 때 일행과 떨어지면 그곳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 괜히 일행을 찾느라 이리저리 돌다보면 서로 숨바꼭질하기 알맞다.

버스가 거리로 들어서는데 고가도로가 많다. 일본의 도심지는 땅값이 비싸기 때문에 공간을 경제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그런 것이라 했다. 큐슈의 북부 하카타(博多)에 접한 후쿠오카는 큐슈에서 가장 큰 도시로 큐슈의 수도 역할을 한다. 일찍부터 한반도와 중국, 동남아 각국과 교류해 오던 관문으로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흔히 '하카타'라고 부르며, 많은 관공서나 상점 등도 이 명칭을 사용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혼동하기 쉽다. 도시의 남북을 흐르는 나카가와강 동쪽을 하카타(상인의 도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반면 강의 서쪽은 후쿠오카(무사의 도시)라고 부른다. 1889년 두 도시가 후쿠오카(福岡)로 병합되었는데, 이는 '행복의 언덕'이라는 뜻이란다. 일본에서는 8번째로 큰 도시이며 정치, 문화, 경제 등의 중심지이다.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달린다. 하카다만을 지나고 다시 가라스만에 이르렀는 데도 도로변에 이렇다 할 음식점이나 휴게소가 없다. 먼저 직행으로 온 분들은 이미 점심을 든 뒤여서 나머지 부산으로 온 팀들은 배가 고파 아우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 공항에 나오느라 아침도 부실한 데다가 3시가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한적한 길가에 불고기를 파는 식당이 보여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우동과 불고기 백반 둘 중 하나를 택하고 준비하는 동안 밖으로 나와 보니, 조경이 아기자기하다. 언덕을 이용하여 시원하게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었다. 샘에는 비단잉어를 기르고 잘 다듬은 소나무를 심었다. 빨간 무궁화가 피어 우리를 반기는데, 신기하게도 억새나 띠에만 기생하는 야고가 칸나 뿌리에 피었다.


▲ 나고야성 박물관의 '제주도 특별기획전'

박물관에 도착해 보니, 벌써 특별기획전 개막 행사는 끝나 있었다. 다행히 1호차는 시간에 댈 수 있어서 일부 회원들과 회장인 제주시의회 강영철 의장이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유물을 빌려준 국립제주박물관장 김영원 여사와 전시를 위해 동원되었던 관계자들은 철수하고 있었다. 마침내 조우한 우리들은 주최측의 인사들과 박물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박물관 건물로 들어가는 오른쪽에 제주도 돌하르방이 하나 서 있다. 반가워서 명패를 보니, 돌하르방 제작의 대가 장공익 씨의 작품이다. 현관에는 기획 전시를 알리는 '해양 문화의 교차로 -제주도의 역사와 풍토'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아래로 서귀포 동홍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그림인 제주도를 만든 전설의 여신 '설문대할망'과 이곳 나고야소학교 아이들의 그린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올리는 그림'이 나란히 걸려 있다.

2층 특별전시실에 들어가 눈에 익은 우리 제주도 유물들을 둘러보니, 타국에서 고향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이곳 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에서는 3개년 계획으로 가까운 한국 남부 지역의 역사와 일본열도와의 교류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전람회를 기획, 2000년에는 경상남도, 2001년에는 전라남도, 금년에는 제주도의 유물전을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11월 10일까지 열리는 이번 행사에는 원시 고대부터 중국 대륙과 일본열도와의 교류의 거점이며 독특한 풍속과 전통을 가진 해양 문화라는 데 중점을 두고 제주에서 빌려온 60점을 포함한 200점의 유물과 50점의 사진 패널을 전시하고 있었다.

나고야성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교두보가 되었던 곳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성터에 박물관을 세우고 우리들을 끌어들여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교류전을 갖는 것 자체가 세상이 많이도 달라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분로쿠(文祿)의 역(役)', 정유재란을 '케이쵸(慶長)의 역(役)'이라 부르고, 심지어는 '도자기 전쟁'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고야성 박물관은 "임진왜란의 반성 위에서 이 유적을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와의 오랜 교류사 가운데 이해하며, 그 역사적 위치를 밝힘으로써 앞으로 양쪽의 교류 및 우호의 추진 기점의 될 것을 지향한다."고 했다.


▲ 나고야 성터에서 임진왜란을 생각한다

100여년 동안 계속되어온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앞으로 자신의 정권에 위협적인 요인이 될 각 다이묘(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하고 대륙진출의 꿈을 달성하기 위해 평화스럽기 그지없는 조선에 대하여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오만무례한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당연히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그는 조선과 제일 가까운 이곳 나고야(名護屋) 성에 총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1592년 4월 13일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범케 하였다.

단기간에 우리나라의 평안도, 함경도까지 진격하며 연전연승하자 그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대륙까지 점령하는 영웅이 되는 줄 착각하였다. 그러다가 왜군은 조선 각지의 의병의 봉기와 명나라 군대의 진주, 보급의 곤란,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전의를 잃고 후퇴하여 서울에 집결하였다. 1593년 3월 용산에서 이루어진 명군(明軍)과의 회담 결과에 따라 그 다음달에 전 왜군을 남하시켰다. 그래서 패전을 외교로 보상받고자 한반도 남쪽 해안에 왜성을 만들어 일본군의 일부를 잔류시켜 놓고, 명나라 사신에게 한반도 절반의 할양을 요구하는 등 말도 안 되는 강경한 7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그는 1597년 1월 15일 다시 14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으로 출병시켰는데 그 선발대가 부산에 상륙하였다. 임란 당시 일본군은 약 2개월 사이 한반도 전역을 거의 점령했으나, 웅치, 이치, 금산 전투에서 의병들의 맹렬한 반격으로 일본군이 격퇴 당했기 때문에 전라도 지역만은 점령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요, 만일 호남이 없으면 곧 나라가 없어진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에 전라도민에 대한 앙심을 품게 되었고, 이것이 정유재란 때의 `코베기'라는 천인공노할 참극의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다시 정유재란을 도발한 히데요시는 "전쟁이 이렇게 오래 간 것은 전라도민의 조직적인 반항이 심해서이다. 일본군은 전라도에 진격하여 일시에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싸울 의지가 없는 일본군 선봉부대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여 상륙은 하였지만 전라도에 가기를 꺼려하여 양산 부근의 서생포 왜성과 부산포 왜성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6개월간이나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이에 전의를 의심한 그는 "죽인 조선 사람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보내라. 병사 한 명당 코 한 되씩 책임이다"라고 명령하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현지 사정을 고려하여 병사 1명당 3개의 조선인 코를 베어 오도록 할당하였다. 그래서 교토(京都)에 이총(耳塚)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총은 비총(鼻塚)을 바꿔 표현한 것이라 함.)

히데요시가 죽기까지 7년간에 걸쳤던 왜란은 조선, 명, 일본 3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들은 전쟁 중에 많은 도자기를 약탈하였다. 그러나, 배로 이송 도중 거의 훼손되자 아예 도공을 붙잡아다 가마를 짓고 자기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가까운 아리타에 이삼평(李參平)이 잡혀와서 지금은 그곳이 도자기 단지가 되어 있다. 성터는 모모야마(桃山) 최대라는 성 건물도 없어지고 전국에서 모인 각 다이요오(大名)들의 진영도 모두 폐허가 되어 있었었는데, 입구 오른쪽 구조물에 조그만 불상들을 여럿 세워 놓았다. 나는 성터 끝에 홀로 서서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군사를 보냈다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 없었다.


<사진> 위는 일본열도와 큐슈섬에 위치한 후쿠오카를 나타내는 지도이고, 가운데는 기획전시실에 전시돼 있는 우리 곽지리식 토기들, 아래는 박물관 앞에서 기념 촬영한 것입니다. 맨 오른쪽의 필자. (*본섬에 있는 나고야(名古屋)시와 큐슈섬의 성터 나고야(名護屋)를 혼동하지 말 것. 나고야(名古屋)에는 성이 온전하게 남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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