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선교사 스크랜턴(Dr, W. B. Scranton)부부
여성교육선교사 스크랜턴의 모친 스크랜턴(Mrs. M. F. Scranton)대부인
Dr, W.B.Scranton / Mrs. M.F.Scranton
의료선교사 스크랜턴(Dr, W. B. Scranton)
1884년 7월에 있었던 고종임금의 선교윤허는 교육과 의료사업에 대한 윤허였지 교회를 세우며 전도하라는 허락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윤허에 따라서 미국 감리교회(북 감리교회)는 교육선교사와 의료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다.
이리하여 敎育 宣敎師로 아펜젤러(Rev, H. G. Appenzeller) 부부가 1885년 4월 5일(그 해의 부활절) 에 인천에 상륙하였고 다음으로 의료선교사로 스크랜턴(Dr, W. B. Scranton)부부 그리고 여성교육선교를 위하여 스크랜턴의사의 모친인 스크랜턴(Mrs. M. F. scranton)대부인이 입국하였다.
이들은 입국하여 먼저 아펜젤러가 1885년 8월 3일 한국에서의 최초의 본격적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세웠고 이해 9월 10일에는 스크랜턴 의사가 정동감리병원을 세웠다.
다음해(1886년) 5월 말에는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스크랜턴 대부인이 세우므로 감리교회의 교육, 의료선교 사업은 비교적 빠르고 순조롭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스크랜턴의 감리교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치료해줌으로서 기독교의 일반 민중 階層에 그 뿌리를 넓게 그리고 빠르게 내릴 수 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병이든지 아침10시에 오시오. 올 때는 빈 약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의사를 만 나시오'
병원 앞에 광고문을 써 붙이고 환자들의 협조를 구했다. 스크랜턴은 좁은 자기 집에서 혼자 1년간 무려 2천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이런 헌신적인 활동으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은 서양사람만 보면 모두 의사인 줄 알고 병을 고쳐달라고 졸았다고 한다.
86년6월에는 병원시설을 당시 최대 규모로 확장했고 이듬해에는 고종이 그의 노고를 치하, '시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서크랜턴의 우리말 이름 시란돈에서 딴 것이다.
88년 여름 '서양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서울 장안을 들끓게 했던 영아소동 때도 이 병원만은 계속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성난 군중도 시병원만은 습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희생적인 감리교회의 교육, 의료선교는 왕실과 민중들의 호의를 받게 되었고 왕실에서 감리교의 이런 선교사업을 인정하고 칭송하는 뜻으로 배재와 이화라는 이름을 감리교학교에 하사하였고 시(施)병원이라는 이름까지 내렸다.
이런 왕실의 호의에 힘입어 이 학교들과 병원에서 예배 및 전도활동이 이루어졌다.
스크랜턴의 모친 스크랜턴(Mrs. M. F. scranton)대부인
아들의 뒤를 이어 서울 주재 외국 공관과 선교사들의 근거지인 정동에 정착한 부인은 먼저 온 아들의 집에 머물며 곧바로 선교사업에 착수한다.
"그해 10월 정동의 초가집 9채와 나대지 6천여평을 매입했다.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위해 무슨 사업을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달 9일 아펜젤러 부인이 애기를 낳았다. 이 애기는 훗 날 이화여전의 교장이 된 앨리스 아펜젤러인데 그날 밤은 어찌나 추웠던지 애기를 자리에 눕히지 못하고 밤새 스크랜턴 부인이 안고 재웠다. 이때 부인은 이렇듯 추운 방에서 고생하는 한국의 어머니들과 애기들을 위해 이 나라 여성을 가르칠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던 것이다" (이화 70년사) 이 땅에 근대여성교육의 싹이 트는 순간이었다.
지금의 이화여고 자리에 있던 이화학당의 첫 기와교사(1866~1897)
유학 특히 주자학의 전래이래 당시 한국여성의 지위란 한마디로 '남성의 향락과 노동의 기구'였다.
법과 봉건적 인습이 재산권은 물론 여성의 인권마저도 완전 무시하던 때였다. 여자가 많이 알면 폐해만 클 뿐이라며 배움의 기회도 박탈, 중류 이하의 여성은 대부분 문맹이었다.
부인은 우선 자기 집에서 부족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려 결심하였으나 당시의 상황에서 학 생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양도깨비'에게 딸을 내준다는 주위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딸자식을 교육시키려는 부모 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끈기있게 노력한 끝에 이듬해 5월31일 드디어 첫 학생이 나타났다. 고급관리의 소 실인 김부인이라는 여인이 왕비의 통역관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제발로 찾아온 것이다. 이 날이 바로 이화학당의 창립일이 된다.
한달 뒤에는 조별단이라는 12세가량의 소녀가 극심한 가난을 면해보고자 찾아왔으나 그 어 머니가 다시 데려가려해 스크랜턴 부인은 절대로 학교 밖으로 내보내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주고 별단이를 붙잡아 두었다.
그해 여름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창궐, 서울서만도 하루 수백명이 죽어나갔다. 치료를 나갔 던 스크랜턴 의사가 하루는 어린 딸을 데리고 병으로 신음하던 여인을 정동병원으로 데려왔 다.
이 모녀를 돌보고 그 딸을 공부까지 시키니 이 아이가 이화의 세 번째 학생이다.
1백여년전 정동 한옥의 한 구석방에서 이렇듯 가난하고 초라한 소녀 몇몇을 모아놓고 시작 한 학교가 오늘의 '이화'로 성장했으니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해질 믿음의 씨앗 은 결코 예사가 아니라 하겠다.
이외에도 스크랜턴 부인의 편지를 보면 몇몇 학생 이름이 보이지만 대부분 첫학생 김부인 처럼 몇 달을 못 채우고 나가곤 했다. 그러나 학생은 한둘씩 꾸준히 늘어났고 때로는 파격 적으로 가문이 좋은 학생이 들어오기도 했다.
87년에는 학생 수가 7명이 되었고 민비는 이 학당을 가상히 여겨 '梨花'라는 교명과 이를 새긴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화라는 이름은 정동 일대가 이전부터 배밭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일설 도 있다.
학생이 늘자 97년, 12년간 공부하던 기와집 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 을 짓기 시작, 4년만에 완공한다. 이 메인 홀은 당시로서는 서구식 시설에다 규모도 웅장하 여 장안의 명물이 되었던 모양이다. 1년에 한두번 있을까말까한 부녀자들의 나들이 날인 초 파일이나 단도가 되면 양국관에 대한 호기심으로 수백명의 여인들이 이화학당을 구경오곤 했다(그러나 이 메인 홀은 6·25때 손실되었다).
당시만 해도 서대문이 성벽과 함께 남아있었다(서대문은 도로 확장 명목으로 1915년 일인 들의 손에 헐린다). 성벽은 메인홀 바로 뒤로 있었는데 초기 학생들의 사진을 보면 이 성벽 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학당 학생들은 이 성벽에 올라 바깥세 상을 보며 그들의 꿈을 키웠으리라.
당시의 교과과정은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고 교사에 따라 가능한 과목을 첨가시키 는 형태였다. 성경은 그 자체로도, 그리고 국어 독본으로도 줄곧 채택되었고 생활교육 가사 자수 음악 등을 가르쳤다. 학생들이 만든 수예품 바자회를 통해 학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89 년에는 이경숙이라는 최초의 한국인 교사를 채용, 언문 한문을 가르쳤다.
초창기에는 학제도 미비, 졸업시기도 유동적이었다. 대개 8~9세에 입학, 한 1년 공부하다가 우수한 학생은 외국유학을 알선하고 그 밖에는 출가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결혼식이 곧 졸 업식이었던 셈이다. 이화출신 신부감은 인기도 꽤 좋았다 한다
표면적으로는 교육사업이었으나 이화 교육은 곧 선교였다.
극심한 내외법으로 아펜젤러나 스크랜턴 목사가 할 수 없었던 여성전도를 도맡아 한 이가 스크랜턴 부인이었고, 사실 정동제일교회의 초대 여성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여자 성경선생을 구할 수 없어 교실에 휘장을 치고 남자 매서인을 불러다 성경공부를 시키 기도 했다. 이런 신앙을 바탕으로 여성교육의 불모지를 혁파해나간 이화는 1906년까지 대략 50여명의 신여성을 배출했다. 이중 약 30%가 교육 종교 의료분야에서 활약, 불합리한 제도 와 인습 및 이로 인한 무지 속에서 잠자던 한국 여성들을 역사의 한복판으로 이끌어내는 전 위대 역할을 했다.
1회로 졸업 후 이화에서 가르친 김활란,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최초의 학사 하란사 등이 이화의 초기 역사에 돋보이며, 김룻이 1899년 서대문여학교라는 지학교를 세운이래
아오개여학교 종로소학교 제물포학교 등이 졸업생에 의해 개척되었다.
1910년 설치된 대학과는 29년 이화여고보와 독립하였고, 35년 이화여전이 신촌으로 이전해 정동캠퍼스에는 이화여고보만 남게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수원 오산 이천 등 여러 곳에서 전도, 많은 교회를 개척한 스크랜턴 부인은 1909년 10월8일 별세, 양화진 묘지에 안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