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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영
• 충북 충주 출생
• 중앙대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 1994년 『동서문학』 등단
• 저서: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 『맨발의 99만보』외
• 기독시인학교 교장
• 계간 『힐링문화』 주간
[기획 연재·15]
-김신영 시인을 만나다
대담 :김선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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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폭염이 계속되는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방학인데도 유난히 피곤하다. 오후 3시 30분에 발산역 근처의 어느 오래된 레스토랑에서 김신영 시인을 만났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선주 : 선생님, 근간에 좀 소원했는데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선생님의 요즘 근황이 궁금한데요.
김신영 : 네, 이런 자리를 빌려서 또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글쎄요 요즘의 근황이라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약간의 변화들이 있지만 날씨 탓에 무위자연이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폭염 속에 지내고 있습니다. 제게는 근황이랄 것이 없을 듯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이 바뀌고 좋은 일이 겹치는 것이 근황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아직 저는 직장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유랑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근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굳이 근황이라는 위대한 수식어를 붙여서 말씀드릴 수 있는 변화라고 한다면 우선 3번째 시집인 『맨발의 99만보』를 출간한 일련의 일과 ‘기독시인학교’라는 기독시인들을 위한 시창작 교실을 열었다는 것, 그리고 시낭송인을 위한 계간지 『힐링문화』의 창간을 들 수가 있겠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맨발로 걷는 걸음에
뛰어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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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 네. 최근에 여러 일이 겹쳐서 일어났군요. 나름대로 모두 굵직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시인의 삶이 더 돋보이는 시집인 『맨발의 99만보』에 나타난 시인의 삶과 관련하여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이번 시집은 특별히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김신영 : 시집 제목이 『맨발의 99만보』라서 제 삶에 더 관심을 가지셨지요? 실제로 ‘99만보’는 제 삶이 녹아 있는 시집입니다. 등단한 지 23년째가 되었지만 이제야 세 번째 시집을 상재하게 되었어요. 그간 삶의 굴곡이 많기도 했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99만보를 걷게 된 것은 지독한 삶의 욕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걷는 것만이 제 삶을 풍요하게 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다고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시간의 포도청을 걸음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막바지에 석 달 걸음을 계산했더니 99만보가 되더라구요. 저의 그간 인생의 경로를 의미하지요. 이번 시집은 삶과 많이 중첩되어 저의 삶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삶을 위해 그렇게 많이 걸어 본 적이 없었지요. 그때 내 인생의 경로가 99만보를 요구하고 있었나 봅니다. 어떤 통과의례 같은… 저는 거부하지 않고 주저하지도 않고 용감하게 맨발로 걷는 걸음에 뛰어든 셈입니다.
김선주 : 99만보를 걷는 동안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김신영 : 네, 힘들지 않았어요. 물론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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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려 즐거웠습니다. 운동으로 99만보를 지속하는 것과 삶의 욕구에서 비롯된 노동의 의미와는 많이 달랐지요. 군인들이 군대에서 천리행군할 때 군장을 모두 다 하고 의복을 모두 갖추고 떠나듯이 안전복과 안전화 등을 갖추고 장비를 갖추어 걸어야 했는데도 즐거웠어요.
김선주 : 그 삶의 현장이 어디였는지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는지요?
김신영 : 네.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국가기간 산업의 현장이었습니다. 이천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반도체 회사였는데요. 그곳에서 ‘렌탈’이라고 불리는 건설용 전기차를 유도하고 지시하는 신호수를 하였습니다. 갑자기 공사가 시작되더니 사람이 모자란다고 이천의 아주머니들을 모두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커다란 공사였습니다.
김선주 : 99만보라는 걸음에 어떤 철학이 있을 거 같은데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신영 : 삶의 간절한 욕구에서 비롯되었는데 철학이 있을까요. 철학은 없습니다. 그냥 무작정 걸었습니다. 거창한 철학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규정할 사이도 없이 걸어야 했습니다. 어떤 의미를 두지 못하고 걸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걸었고, 거덜 난 살림살이 때문에 걸었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냥 걸었습니다. 그 걸음이 99만보입니다. 뚜벅뚜벅 끊임없이 걸어야 했지요. 매일매일 고단하니까 언제 끝날지 날짜를 헤고 걸음 수를 세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던 시간이지요.
김선주 : 걷는 데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건강은 어떠하셨는지요?
김신영 : 사실 그때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몹시 아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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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근경색이 발생했지요. 가슴을 짓누르는 무엇이 있어 숨쉬기도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죽음의 길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이렇게 답답증을 호소하면서 죽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그렇게 어떤 철학이나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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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상태에서 별빛이 하얗게 유난히 빛나 보였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밤마다 나오는 별이 아름다웠고 풀벌레가 반가웠고 밖에서 나다니는 사람들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더 생각해보면 인생은 날마다 걷는 일상이 지속되고 있지요. 어떤 인생을 막론하고 걷지 않고서는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삶에 따라 걸음 수가 다르지만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통해서 늘 99만보를 걷는 셈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99만보를 걷는 것이지요. 99만보는 고단한 걸음입니다. 또한 그 걸음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미완입니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인생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김선주 : 99만보가 인생길이라고 하셨는데요, 일상에서 만나는 길은 어떤 길이 인상에 남으시는지요?
김신영 : 골목길이나 5일장 같은 시장의 길이 인생길과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어떤 치열함이 살아 있는 길입니다. 미안해서 걸을 때가 있습니다. 그저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미안할 때도 있고, 나는 잘살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가까운 이웃과 부모님, 형제자매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도 그냥 걸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적요를 느끼면서 걸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니르바나’라 한다는데 제가 그쯤 간 걸까요? 맨발로 걷다 보면 보도블록을 지나 흙 위를 걷게 되지요.
그때 내가 누군가에게 미안해서 걷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잘 살아주지 못한 삶에 미안하고, 궁핍상으로 살아온 것 때문에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찌질하게 살고 있는 나에게도 미안했지요. 그런데 오히려 흙이 내 발을 위로해줍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발이 편안해지고 모든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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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맨발로 걷기에 아무것도 보호해주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흙이 내 발을 부드럽게 감싸고 보호해주고 있었지요.
걷는 것은 그런 것 같습니다. 힘들게 걷다 보면 나를 받치고 있는 땅과 보도블록과 이 우주가 저를 받치고서 위로를 해주는 것, 위로뿐 아니라 정신까지 건강하고 맑게 바꾸어주는 힘이 있어요. 그렇게 99만보를 걷고 나니 저는 아주 건강한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김선주 : 네. 그러셨군요. 힘들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건강하게 이끌었다는 것이네요. 특별히 ‘99만보’라는 단어가 와 닿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요?
김신영 : ‘99만보’라는 것은 막다른 골목길 같은 인생을 걷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맞닿아 있는 달동네의 길이지요. 저기에 사람이 사는지 어떤 사람이 사는지 궁금해질 즈음 그 하늘과 맞닿은 골목 끝에서 사람이 내려오고 차가 내려오고 오토바이가 올라갑니다. 어떻게 올라가는지, 날개를 달고 올라가는지 신기할 정도로 높은 달동네인데요. 거기서 달이 올라오지요. 태양도 올라오는 곳입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사는구나. 나의 99만보보다 더 길고 먼 99만보의 동네가 있구나 생각하면 겸손해집니다. 또한 99만보는 미완의 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완성이 아니라 미완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 걸음입니다.
김선주 : 시골의 오일장이 인상에 남는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의미인지요?
김신영 : 방학이나 휴가철이 되면 사람들은 해외로 많이 나갑니다. 그래서 SNS에 해외의 찬연한 사진들을 게시합니다. 그 길은 여행과 관련되어 휴식을 의미하는 걸음이라고 하겠습니다. ‘99만보’는 삶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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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시골의 장바닥을 걷는 것으로 더 진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직도 5일장 7일장이 서는 곳이 많아요. 시골 장터에 가면 여행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깡촌 노인들이 나와 저마다 무엇을 팔다가 날이 저물면 돌아가지요.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지요. 그분들의 걸음은 무겁습니다. 버스에 오를 때에도 모두들 “에구구”를 남발합니다. 손가락은 굽어 있고 얼굴은 잔주름이 그야말로 짜글짜글하게 깊게 패여 있습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그분들의 장날은 어찌 그리 서글픈지요. 그것이 진정한 99만보의 의미가 아닐까요? 쉬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삶을 짊어지고 살아오신 큰 걸음의 99만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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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 걷다가 만나는 것 중에 일상적인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김신영 : 걷다가 보면 해거름에 긴 그림자를 만납니다. 긴 해그림자는 시계처럼 나의 뒤를 밟아 따라 오지요. 터널에 들어가도 금방 나를 찾아서 쫓아옵니다. 때로는 그림자 때문에 외롭지 않아요. 99만보를 걷다 보면 홀로 걷기가 일쑤입니다. 인생처럼요.
김선주 : 선생님, 인생이 걷는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더 구체적으로 의미를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김신영 : 사람이라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걷는 것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지요. 걸음은 시간이고 노동이며 학습입니다. 지난달에는 28일 동안 343,000보를 걸었습니다. 3,290분이 걸렸지요. 하루에 만보를 걸으려면 한 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나의 일상들이 하나하나 의미가 살아나고 절망스럽던 상황이 해결책이 생각납니다. 또 걷다 보면 나의 존재에 대해 더 좋은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 있다는 것과 잘하고 있다고 위로를 하며 잘 될 것이라는 감사를 하게 됩니다. 허밍이 흘러나오죠. 길 끝에 나를 위해 불어오는 바람이 있고 땅이 있고 맑은 공기가 있습니다. 길가의 노란 꽃들은 여기까지 잘 왔다고 반겨주고 있지요.
삶은 시골에서 깊이 있게 만나게 됩니다. 에스컬레이터 같은 편의시설은 전무하고 교통수단이 뜸해서 걷는 것만이 능사입니다. 그러니 늘 걸을 밖에요. 시골의 일상은 걷는 것입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걷고 버스가 오지 않아서 걷고 버스가 없는 곳이라 걷습니다. 시골에서 택시는 언감생심입니다. 서울처럼 요금이 저렴하지 않아요. 서울의 거리 환산요금제와는 다릅니다. 짧은 거리인데도 요금이 마구 올라가서 택시 타기가 겁이 나지요. 어쩌다 택시를 탈 수는 있어도 늘 탈 수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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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 걸으면서 만나는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들을 말씀해 주세요.
김신영 :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보다 사람이 아닌 것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후각이 좀 예민한 편인데요, 예를 들어 비가 오려고 하면 역겨운 하수구 냄새가 코를 어지럽힙니다. 뭐 그 정도는 누구나 만나는 일상이구요.
숲길을 걷다 보면 예쁜 꽃이 만발한 곳에서 여지없이 고양이의 후취를 만납니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물들은 자신의 영역표시를 소변으로 하는데요 그 냄새가 좀 독특하지요. 지독하다고 할까? 견딜 수 없이 강한 자극을 주는 냄새가 납니다. 비가 오기 전보다 비가 온 후에 그 냄새가 더 심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영역이 지워져서 다시 영역표시를 확실하게 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숲길에서 때로는 여러 후취도 섞여 납니다. 그러면 여기는 동물들이 많이 사는구나 서로의 영역 싸움이 치열하겠구나 생각합니다.
때로는 더덕 뿌리의 냄새가 섞여서 거리로 흘러옵니다. 가끔 숲길이 깊어지는 곳에서 나는 선물 같은 냄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거예요. 둘러보니 잡초들이 제초기에 여지없이 베어져 모두 평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잡초들이 나름 군락을 이루어 숲이 있었는데 그 숲이 사라지니 보금자리도 사라진 것이지요. 고양이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선주 : 사람들의 삶에서 99만보는 어떤 의미일까요?
김신영 : 글쎄요? 옥탑방 유리창에 무명의 화가가 그려놓은 예술적인 백묵화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한여름, 철계단이 녹아내릴 것 같은 옥탑방에 밖과 구별되는 안쪽 커다란 유리에 그려놓은 백묵화에는 둥지(MoMOCHI)를 형상화하였는데 서울 같은 대도시와 거기에 어울린 아름다운 옥탑방이었습니다. 삶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열악한 환경에서 명작 하나 남기는 것, 녹록지 않은 속에서도 명작인 무언가를 남기려고 노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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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천은 특히 도자기가 발달했지요. 자주 이천의 도자를 만나러 갑니다. 요즘의 트렌드가 읽혀요. 생활도자에서 예술적인 도자에 이르기까지 그것도 도공의 손을 수차례 거치고 99만보의 뜨거운 화기를 지나서 비로소 작품으로 완성되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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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 충주 출생이네요? 고향 ‘충주’와 관련해서 얽힌 사연이나 추억 등을 말씀해 주세요.
김신영 : 아주 어릴 적에 충주의 고향에 부모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충주에서 태어나 성장은 주로 서울에서 했거든요. 완고한 할아버지 덕분에 초등학교 문턱도 못 밟으신 아버지의 한 때문에 저는 아주 어려서 서울로 이사를 왔어요. 할아버지는 대대로 한학자 집안이라 한학을 잘하셨는데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일제의 악랄성과 이중성과 간교함에 치를 떨면서 그런 학문은 가르칠 수 없다고 손수 자식들을 가르치셨어요. 그 덕에 가방꼬리가 짧으신 아버지는 가정을 꾸리느라 안 해 본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런 중에 생각나는 일은 할아버지 댁에 가려고 설날 온 가족이 나섰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에서 출발해 목계나루에 이르렀는데 강이 얼어 버린 거예요. 제가 아마 7살 때쯤인 것 같은데 당시엔 다리가 없어 배를 타고 건너야 했지요. 아주 한참 만에 노잡이가 오셨는데 여러 사람을 태우고 강의 두꺼운 얼음을 깨면서 앞으로 나아갔지요. 끼익끼익 강줄기를 타고 울리던 노젓는 소리가 지금 들려오는 듯합니다. 몹시 추웠어요. 강바람이 의외로 세더라구요. 신경림 시인이 쓴 「목계장터」가 있는 그 나루터입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비석 하나만 세워져 있지요.
김선주 : 웃고 계시지만 왠지 쓸쓸해 보여요. 혹시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김신영 : 세상을 살면서 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나 크고 작은 걱정을 안고 그것을 해결하면서 살아가겠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이런저런 걱정이 있어 어둡고 쓸쓸해 보이는가 봅니다. 저의 표정을 제가 잘 모르잖아요. 저는 밝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선생님께서는 저의 쓸쓸한 면을 보신 겁니다. 글쎄요. 아마도 든든한 버팀목이 주변에 없어 그런 것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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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가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생계형 고민 같은 것 때문에 쓸쓸하지 않을까요? 오랜 시간 삶이 버거웠어요. 그것도 하나의 이유일 거라 생각합니다.
김선주 : 선생님의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이 궁금하네요. 또한, 본격적으로 문학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언제였나요?
김신영 :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한글 사랑이 유별났어요. 한글날이 가까워 한글을 설명해주시는데 한글은 어째 그리 훌륭한 글자인지요? 생각해보니 몇 개의 홀소리가 영어에서는 겹치는 소리가 있는데( 예를 들어 b, p 같은 것) 한글은 단독적인 소리들이 잖아요? 그래서 ‘내가 크면 한글이 세계를 지배하게 만들 거야’라고 주먹을 꼭 쥐었던 엉뚱한 생각이 기억납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좀 내성적이라 우울한 시기를 겪었어요.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요. 그래서 얻은 별명이 ‘생각하는 로댕’, ‘김 박사’인데 그대로 된 것도 있네요…
제가 본격적으로 문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연애편지 대필을 하는 데 너무 잘 쓴다고 너도나도 편지지를 내밀었지요. 글짓기는 자신이 있어 참가는 하였는데 상을 못 받았어요. 그래서 선생님들의 이해 수준이 낮아서 그렇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요. 그때 시 몇 작품을 썼는데 친구들이 ‘네가 쓴 것 아니지? 어디서 베꼈어?’라고 말해서 섭섭했어요. 그 이후로 시에 대한 막연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요. 어쩐지 시인이 될 것 같은 생각이랄까요? 시와 운명처럼 만나게 될 것 같은, 시인이 되지 않더라도 시를 쓸 것 같은 거요.
김선주 : 만약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김신영 : 아마도 소설가가 되었을 겁니다. 어떻게든 글을 썼을 겁니다. 등단의 시기가 좀 더 늦어졌을 뿐 여전히 저는 시를 썼을 겁니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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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된다면 출판계통의 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동서문학』에 94년도에 등단할 때의 일화입니다. 2월 말에 원고를 투고했는데 5월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도 안 되었나보다 하고 한탄하고 있었지요. 6월 말쯤에 전화가 온 거예요. 그래서 ‘구독료를 안 냈나?’ 싶어 구독료를 보냈다고 말하려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당선이 되었다는 통보였어요. 알고 보니 발표 시기를 한 분기 늦추었다고 사고(社告) 못 보았느냐고 그러더군요. 3개월이나 늦게 발표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거지요.
김선주 : 오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으로서의 성취동기와 가치관을 말씀해 주세요. 구체적 에피소드와 함께 앞으로의 행로도 말씀해 주세요.
김신영 : 내가 반드시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 시가 내 삶과 가장 가까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애가 시라는 말이 아니라 시를 쓰고 싶은 것이 저의 마음이고 그런 마음이 늘 제 주변에 있었어요. 시를 쓴다면 잘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시인이 되고자 노력하던 일이 생각납니다. 기독교계의 주간지에 1988년도의 마감일 날 우체국에 뛰어가서 부친 3편의 시 중 하나가 당선되면서 그 길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일반 문단에서는 그것을 등단이라고 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꼭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하에 몇 가지를 실천하였습니다. 그 첫째가 그때 25살쯤이었는데 시인이 되기 전에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가 2시 이전에 자지 않겠다. 세 번째가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 업무상 필요한 말만 하고 말을 많이 해서 시의 기를 빼앗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었구요. 네 번째로 음식을 많이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음식은 많이 먹으면 포만감으로 인하여 나의 시 정신에도 깃들어 버릴 포만은 시적이지 않다고 생각해서 배가 고픈 것처럼 시에 결핍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실천하게 되었지요. 스스로 혼자 있기를 즐기는 습성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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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이런 것들을 실천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실천을 위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압구정동에 살았습니다. 직장이 종로5가였구요. 그 빛나는 10여 개월의 시간이 그립습니다. 그 시간의 막바지에 『동서문학』으로 바로 등단이 되었지요.
앞으로의 행로라면 멀리 가서 시를 쓰기보다는 가까운 주변에서 접하는 것을 시로 쓰려고 합니다. 요즘에는 99만보를 걸으면서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궁상의 시학이 제 시의 모습이라 이제 거기서 나와 밝고 맑은 시를 쓰고 싶어요. 그간 혼자서 아성을 쌓고 살았기에 이제는 시인들과 교류도 하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강연도 들으면서 좋은 시를 쓰는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여 좋은 시쓰기 운동이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김선주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 수료.
문학평론가. 건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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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이 이상하게 올라가네요?! pdf파일인데...
교수님을 더 많이 알게 되어 기쁩니다
멋진 울 교수님!
너무 드러나면 안되는데.... 고마워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