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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의 역사)
고대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했던 이 지역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삼국간의 쟁탈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초기에는 고구려지역이었는데 668년(보장왕 27)에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망해 신라의 땅이 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지명을 당나라식으로 고쳐 중원경·청풍·음성 등으로 바꾸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와 995년(성종 14)에 전국을 10도로 구분할 때 중원도로 되었고, 현재의 도 일원과 강원도 일부에 설치한 12주(州) 42현을 관할하였다. 1106년(예종 1)에 관내도·하남도를 병합해 양광충청주도라고 했다가 1171년(명종 1)에 다시 2개 도로 나누었고, 1315년(충숙왕 2)에 다시 합해 양광도라 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처음으로 충청도가 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1395년(태조 4)에 충주에 관찰사를 두어 도를 관할하게 했으며, 1402년(태종 2)에 여흥·안성·양성·양지·음죽을 경기도로 이관하고, 1403년에는 경상도의 옥천·청산·영동·황간·보은을 편입하였다. 그 뒤 1598년(선조 31)에 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옮겼다.
충청도의 명칭은 충공도·공청도·공홍도·충홍도·공충도 등으로 자주 바뀌었다. 이는 주·목의 소속 고을에서 역모나 강상의 윤리를 범한 변이 일어나면 충주·청주·공주·홍주 중 그 고을에 해당하는 머리글자를 빼고 다른 주·목의 머리글자를 넣어 명칭을 고쳤기 때문이다. 또한 행정상의 편의에 따라 충청좌도·충청우도로 나누고 관찰사는 한 사람을 두었다.
근대
1896년에 8도를 13도로 나눌 때 충청좌도를 충청북도로, 충청우도를 충청남도로 해 완전히 구분하였다. 충청북도는 충주에 도청을 두어 17개 군을 관할하게 되었다. 1908년에 도청을 청주로 옮기고 18개 군 199개 면으로 개편하였다.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0개 군 114개 면으로 되었으며, 1931년에 읍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10개 군 2개 읍 104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광복 후 1946년에 청주읍이 부(府)로 승격되었고, 1949년에 옥천면과 증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청주부가 청주시로 개칭되었다.
현대
1956년에는 충주읍이 시로 승격되었고, 음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에 청원군 사주면이 청주시로, 괴산군 상모면이 중원군으로, 경상북도 문경군 농암면 삼송리가 괴산군 청천면으로 편입되었다.1973년에는 보은·진천·금왕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시·군·읍·면의 경계가 많이 조정되었다. 청원군 북이면 초중리가 괴산군 증평읍에, 남이면 행산·산수리가 부용면에, 석곡리가 강서면에 편입되었으며, 옥천군 이원면 우산리가 동이면으로, 안남면 오덕·인포리와 군북면 장계리가 안내면으로, 안내면 용호·모지리가 군북면으로 편입되었다.
또 중원군 이류면 하문리가 괴산군 불정면에, 괴산군 감물면 검승리가 괴산면에, 불정면 문등리가 음성군 소이면에 편입되었으며, 음성군 생극면 도신리 일부가 금왕면으로, 중원군 신니면 광월리 일부가 음성군 음성읍으로, 영동군 영동읍 고자리와 매곡면 돈대리가 상촌면으로, 제천군 덕산면 수곡리가 수산면으로 편입되었다.1979년에 괴산·단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0년에는 제천읍이 시로 승격되고 제천군이 제원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91년에 다시 제천군으로 환원되었다.
또 단양군 매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3개 시 10개 군 10개 읍 93개 면이 되었다.1983년에 청원군의 강서면 일원(22개 이)과 강내면 석소리, 남일면 방서리, 낭성면 산성리가 청주시에, 제원군 금성면 명지·강제·산곡리와 봉양면 천남·왕암·신리가 제천시에 편입되었는데, 이 때 청원군 강서면이 폐지되었다.1991년에는 제원군이 제천군으로 명칭이 변경되는 등 많은 행정구역 변경이 있었다. 1995년에는 도농통폐합으로 충주시와 중원군이 새로운 충주시, 제천시와 제천군이 새로운 제천시로 각각 변경되었다.
1995년 1월 1일에는 충주시·중원군의 통합(충주시로)과 제천시·제천군의 통합(제천시로)이 이루어지고, 청주시 상당구·흥덕구의 설치로 3시·8군·2구·1도출장소·10읍·93면·60동·5면출장소·3지소로 개편되었다.
1995년 3월 2일에는 충주시 주덕면과 제천시 봉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3시·8군·2구·1도출장소·12읍·91면·60동·5면출장소·3지소로 개편되었다.
1996년 1월 5일에는 청주시 흥덕구 수곡동이 수곡1·2동으로 분동되어 3시·8군·2구·1도출장소·12읍·91면·61동·5면출장소·3지소로 변경되었다.
1998년 2월 1일에는 청주시 상당구 영동·북2·북3·수동이 중앙동으로 문화·북1·남문로2가·서운·남문로1가·서문·남주·석교동이 성안동으로 합동되었다. 1998년 9월 23일에는 단양군 별방, 각기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98년 9월 25일에는 제천시 중앙동과 남천동이 남천동으로, 동현동과 두학동이 동현동으로, 화산1·2동이 화산동으로, 영천1·2동이 영천동으로 합동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충주시 성내동과 충인동이 성내·충인동으로, 교현1동과 안림동이 교현·안림동으로, 단월동과 달천동이 달천동으로 합동되었다. 10월 17일에는 괴산군 청천면 덕평·송면출장소와 청안면 부흥출장소가 폐지되었다.
2000년 1월 1일에는 청원군 북일면이 내수읍으로 승격 및 변경되고 진천군 만승면이 광혜원면으로 변경되었다. 2003년 8월 30일에는 증평출장소가 증평군으로 승격되면서 3시 · 9군 · 2구 · 13읍 · 90면 · 50동으로 개편되었고, 2005년 4월 1일에는 충주시 상모면이 수안보면으로 명칭변경되었다.
(괴산의 역사와 관련된 유적)
1.미륵산성
종 목 사적 제401호
지 정 일 1997.12.16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고성리 산8-37외
시 대 고려시대
화양동 남쪽에 있는 낙영산과 성암부락 동쪽에 있는 도명산 중턱을 둘러싼 성터로 ‘도명산성’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무너져 본래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현재 남아있는 벽은 길이 700m에 높이가 약 2m이다. 성 안에서 신라 토기조각과 고려 전기의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또 건물터를 중심으로 도기조각, 자기조각, 돌로 만든 절구, 숫돌이 발견되었는데, 유물들의 성격으로 보아 고려시대 때 쌓은 성으로 보인다. 이 성은 4가지 공법을 사용하여 쌓은 점이 특징이다. 현재는 중심성과 바깥성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성안의 정상부근 바위에 도명산 마애불이 음각되어 있고 문터, 건물터 8곳, 성 안팎으로 물을 통과시키는 장치인 수문터, 우물터 4곳이 남아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2.우암 송시열 유적
종 목 사적 제417호
지 정 일 1999.12.29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375-3외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성리학 중심지 중 한 곳인 우암 송시열 유적이다.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조선시대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다. 만동묘의 자리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던 곳이다.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과 관련된 암서재, 하마비, 읍궁암, 송시열 무덤 및 신도비 외에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 ‘충효절의’·‘비례부동’이란 글을 새긴 곳이 많이 있다.
송시열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신이 깃든 곳일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한때는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던 곳이다. 민족 정기회복을 위한 교육 장소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곳이다.
3.김기응가옥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36호
지 정 일 1984.01.10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 907-10
시 대 조선시대
낮은 동산을 배경으로 양지바르고 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집으로 칠성고택이라고도 부른다. 안채는 조선 후기(1800년대 초반)에 지은 것이라고 하며 사랑채, 중문채, 대문채 등은 나중에 지은 것들이다.
대문채, 중문채, 사랑채, 행랑채, 안채, 광채,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는 규모가 매우 큰 집이다. 기다란 바깥행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바깥마당이고 그 왼편에 광채가 있다. 광채 위쪽으로 중문간채가 있고 오른쪽에는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헛간채, 오른쪽에 다시 중문이 있어 이곳을 들어서면 안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안채는 ㄷ자형 평면으로 남도식 배치방법을 띠고 있다.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안방, 부엌(찬방 포함)을 두었으며 오른쪽에 건넌방을 놓았다. 안방과 건넌방 앞에 툇마루를 만들었는데 건넌방 앞까지 설치해 통로로 이용한 점이 특이하며, 한쪽 옆면 전체를 부엌으로 크게 만든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사랑채는 ㄱ자 모양으로 안채 쪽에서부터 부엌, 아랫사랑방, 꺾어져 큰사랑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사랑 옆으로는 누마루를 마련하였고 건넌방까지 툇마루를 달았다. 나머지 건물들은 20세기초에 지은 것들로 바깥행랑채는 11칸 크기에 광, 방, 헛간 등이 배치되어 있다. 광채는 6칸으로 양 끝에 온돌을 설치하였다.
집을 지은 기법이 옛 법식을 잘 따르고 있으며 크고 작은 공간구성의 배열 또한 짜임새 있게 갖추고 있는 양반집으로, 우리나라 전통 상류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4.청천리고가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47호
지 정 일 1984.01.14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6
시 대 조선시대
19세기 후반에 세워진 대규모의 살림집으로 지금은 양로원으로 사용하고 있어 전체적인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원래는 여러 채의 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 사당채 만이 남아있으며, 전체적으로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ㄷ자형이며 앞쪽에 '一'자형의 곳간채가 있어 트인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7칸으로 몸채에 동·서로 3칸씩의 날개가 달렸다. 평면구성은 남도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몸채 서쪽에는 좌우 2칸의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안방과 큰방이 있으며, 대청과 작은방이 배치되어 있다. 안방에서 작은방까지 툇마루가 있으며, 동쪽 3칸 날개 사이에도 툇마루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보기 드문 것으로 이 집의 특징으로 꼽힌다.
사랑채는 몸체가 6칸이며 동·서로 2칸씩 날개가 있다. 평면구성은 몸채의 서쪽부터 앞쪽은 부엌이고 뒷쪽은 골방이며, 그 옆은 위·아래로 안사랑과 윗사랑이 있다. 가운데는 좌우 2칸의 사랑대청이 있으며, 맨 끝에 위·아래로 작은 사랑방이 있다.
사당채는 대개 3칸이지만 이곳은 4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쪽에는 툇마루가 있고 가운데는 대청으로 되어있어 사당으로서는 특수한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다.
5.청안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278
시 대 조선시대
조선초 훌륭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며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청안에 지은 관학기관이다.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숙종 29년(1703)에 사마소가 지어진 것을 보아 향교는 그 이전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건물들은 1979년에서 1981년 사이에 해체·복원한 것이다.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앞에 있고, 제사하는 공간인 대성전은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의 현판은 영조 9년(1733)에 쓰여진 것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운영하였으나,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6.애한정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지 정 일 1978.10.27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괴산읍 검승리 76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의 유학자인 박지겸이 세상을 피해서 지내던 곳이다. 광해군 6년(1614)에 지었으며, 그의 호를 따서 애한정이라 하였다. 현종 14년(1673)에 다시 지었고 숙종 38년(1712)과 44년(1718)에 고쳤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다.
건물 규모는 처음 지었을 당시에는 앞면 3칸·옆면 1칸반의 작은 건물이었던 듯한데, 후에 수리하면서 앞면 6칸·옆면 2칸반 규모로 늘린 것으로 보인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이곳에는 ‘애한정’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광해군 6년(1614)에 박지겸이 지은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를 비롯하여 많은 기록들이 있다.
7.청안동헌(안민헌)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573-5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청안현의 관아 건물로, 태종 5년(1405)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쳤으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을 1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 1915년에도 수리가 있었고, 한때 청안지서로 사용되어 변형이 있었으나 1981년 복원하였다.
앞면 6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의 옆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홑처마에 공포를 짜지 않은 민도리집이다. 낮은 돌 기단 위에 지었는데, 주춧돌은 다듬은 돌과 자연돌을 함께 사용하였고, 둥근 기둥에 일부 네모 기둥을 세우기도 하였다. 앞면 1칸은 툇마루로 개방하고 그 뒤로 왼쪽 3칸은 대청을 두고 오른쪽 2칸은 온돌방, 마지막 1칸은 툇마루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문을 달았다.
일반적인 조선 후기의 동헌 건물에 비하여 격식을 낮추어 지은 검소한 건물이며 조선시대 관아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8.괴산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2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104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괴산향교는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며, 153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587년에 다시 짓고 그 후에 여러 번의 수리를 하였으나 비교적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과 동무·서무, 명륜당과 동재·서재 등이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동무·서무와 함께 제사공간을 이룬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서재와 함께 배움의 공간을 형성한다. 건물들의 규모와 형식이 향교의 일반적 배치형태인 전학후묘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책·노비 등을 지급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9.연풍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지 정 일 1981.12.26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 590
시 대 조선시대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중종 10년(1515)에 지어진 연풍향교는 여러 차례 고쳤으며, 한국전쟁 때 명륜당과 동무·서무가 불에 타 없어졌다. 1978년에 대성전을 고쳤고, 그 다음해 명륜당을 다시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명륜당과 대성전이 있고 그 외에 고직사가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곳이고,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대성전과 명륜당 사이에는 내삼문을 두어 배움의 공간과 제사공간을 구분하고 있어, 향교의 일반적 배치 형태인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책은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0.연풍동헌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지 정 일 1988.09.30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62
시 대 조선시대
동헌은 옛 관청인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을 가리킨다. 연풍동헌은 원래 현종 4년(1663) 현감 성희위가 처음 지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건물은 영조 42년(1766)에 이전 건물이 낡아 당시 현감 이덕부가 남쪽에 새로 지어 풍락헌이라 이름 지은 건물이다. 1920년부터 당시 연풍보통학교 건물로 사용했으며 1972년 현 위치로 옮겨 연풍초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부분에 설치한 공포는 새 날개모양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11.괴산동헌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
지 정 일 1988.09.30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625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초기에 세워진 관청건물로 여러 번 고쳐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시대 이후 관청건물로 쓰이면서 고쳐져 그 원형을 잃었다. 최근까지도 괴산엽연초생산조합의 관사로 쓰였으나 1996년 보수할 때 동헌건물로 복원되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와 비슷한 팔작지붕의 목조건물이다.
12.칠충사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7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문광면 광덕리 산94
시 대 조선시대
순창 조씨 가문 중에서 충신이었던 7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7충신(조신·조종·조복·조반·조덕공·조덕용·조은)을 제향하기 위해 1975년 문중에서 세웠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아래쪽에는 1973년 세운 칠충각이 있다.
13.김시민장군 충민사
종 목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
지 정 일 1976.12.21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
시 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1544∼1592)과 충숙공 김제갑(1525∼1592)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김시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가 되어 사천, 고성, 김해 등지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진주성 싸움에서 3800여명의 병력으로 2만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김제갑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원주로 쳐들어오자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영원산성에 들어가 항쟁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그의 부인 이씨, 아들 김시백과 함께 순절하였다.
선조 때 이분들의 절개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14.청덕사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지 정 일 1990.12.24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 385
시 대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첫째 아들인 진안대군 이방우와 대군의 첫째 아들인 봉령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방우(?∼1393)는 부친이 혁명의 뜻이 있음을 알고 해주에 은거하다 죽고, 사후에 진안대군에 봉해졌다.
순조 31년(1831)에 세운 이 건물의 ‘청덕(淸德)’이라는 이름은 대군이 청빈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붙인 것으로 ‘청덕사’라고 쓴 현판을 솟을삼문에 걸었다. 솟을삼문 둘레로는 담장을 두르고 외삼문 안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건물 구조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15.위정사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2호
지 정 일 1994.01.07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291
시 대 조선시대
위정 김정경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김정경(1345∼1419)은 조선 초기 문신으로 고려말에 벼슬을 하였으나 새 왕조 창업을 지지하고 태조와 태종을 섬겼다. 삼군절도사를 거쳐 이조전서를 역임했고, 1400년 방간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을 도와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고 연성군에 봉해졌다.
숙종 8년(1667)에 세운 이 사당은 앞면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5일과 10월 2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6.연풍향청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3호
지 정 일 1994.06.24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65-1
시 대 조선시대
향청은 조선 전기 지방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인 유향소의 다른 이름이다. 향촌의 풍기를 단속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마을의 관리임원을 추천하고, 조세나 요역의 부과 또는 분배 등에 대한 자문기능을 담당하였다.
연풍향청은 일제시대에는 주재소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1963년부터는 천주교 연풍공소로 쓰고 있다.
17.봉서재
종 목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1호
지 정 일 1998.01.09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76
시 대 조선시대
의성 김씨 문중의 재실로 사용하던 곳이며 서당 구실도 하여 백운서당이라고도 한다. 조선 정조 2년(1778)에 처음 세웠고 1915년에 다시 고쳤다. 건물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재실 앞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대문이 있고 주위는 전통 기법으로 담을 쌓았다.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 사대부집의 우수한 작품으로 짐작되나, 떨어져 나간 부분과 고친 부분이 많아서 전체적인 분위기를 알 수 없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지어진 연대가 조금 앞서며, 사랑채는 19세기 후반 것으로 건축기법이 뛰어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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