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동(一洞)
-일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도 일동이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廣州郡) 성곶면(聲串面) 일리(一里)라 했다가 칙령 제49호에 따라 1906년 9월 24일 안산군(安山郡) 성곶면 일리로 되었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거 1914년 3월 1일 일리가 속한 성곶면이 수원군(水原郡)으로 이관되었고, 곧이어 4월 1일 성곶면이 북방면ㆍ월곡면과 함께 반월면(半月面)으로 통합ㆍ개칭되어 수원군 반월면 일리가 되었다. 그 후 대통령령 제161호에 따라 1949년 8월 14일 화성군(華城郡) 반월면 일리가 되었다. 이어 법률 제3798호에 의거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일동(一洞)이 되었다. 이때 시흥군 수암면 성포2리(옛 점성리)가 일동에 편입되었다. 일동은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성곶면으로 안산군 군내면(郡內面)과 경계를 이루던 곳이다.
• 구룡골[九龍洞]
응단말·기와집말 등을 통칭해 ‘구룡골[九龍洞]’이라 부르고 있는데, 주민들은 ‘구렁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곳은 좌청룡(左靑龍)이 완연한 명당지지(明堂之地)라고 한다. 구룡골은 본래 단성이씨의 세거지이나 조선 말엽에 안동김씨 세도에 밀려 안동김씨의 세장지로 되었다가 신도시개발 때(1979) 안동김씨 묘역은 모두 발굴되어 화장되고 석물과 부장품은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구한말에 수원군수를 지낸 문인화가 김용진 (1882~1968)이 구룡골에 살 때 구룡산인(九龍山人)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 기와집말[瓦村]•웃말
이 마을은 조선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金炳國(1825~1905)의 재실이 있었다고 하여 ‘기와집말’이라 불렀으며, 구룡골에서는 제일 위에 위치해 있다 하여 ‘웃말’이라 칭하기도 했다. 재실은 이곳 뒷산 기슭 평지에 있던 안동김씨 가묘(家廟)를 배경으로 ‘입구(口)’자 모양으로 정남향을 하고 있었으나, 신도시개발계획에 따라 1979년 김병국·김수근 등 안동김씨의 분묘는 화장되었고, 묘비와 재실에 사용된 건축물 등은 현재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석삼말[石三村]
석삼말은 호동초등학교와 수인산업도로 사이에 있던 마을로, 이곳에 큰 돌이 하나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흡사 3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는 형상이었다고 한다. 폐동 때(1977)는 모두 7집이 있었는데 4집은 일동에, 3집은 이동에 속했다. 현재는 도로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아랫말•선촌(船村)•매화동(梅花洞)
일동(구룡골)에서 가장 아래에 있던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배가 이 마을까지 들어왔다 하여 ‘선촌(船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수인선 부설 때 이곳에 역사驛舍(일리역)를 지었다가 안산-금정 전철공사 때 폐사(廢舍)하였다.
아랫말은 어촌(漁村)이라 대성은 없었으며, 호수는 40여 호로 1979년 폐동된 후 택지로 조성되어 1986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현재는 이곳을 일명 ‘매화동’이라 칭하고 매화초등학교가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하여 성태산 당집에서 당제(堂祭)를 지냈다.
• 안골[內谷]
웃말 동쪽 삼태기처럼 오목한 곳에 있다 하여 안골이라 하였다. 단성이씨 누대의 세거지였던 이곳은 조선 말엽 안동김씨 세도에 밀려 김수근ㆍ김병국 등의 묘를 이 마을과 웃말 사이에 썼다. 그러나 신도시개발 때 이들의 묘는 화장되었고, 묘비 등은 현재 온양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0여 호 남짓하던 안골은 1989년에 폐동된 후 현재는 안산대학교가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에 길일을 택하여 성태산 당집에서 당제(堂祭)를 지냈다.
• 응단말
웃말과 아랫말 사이에 산(안산)이 있어 해가 늦게 뜨는 마을이라 하여 ‘응단말’이라 칭했다. 함안이씨 누대의 세거지였던 응단말은 15집이 있었으나 1978년에 폐동된 후 주택지로 조성되어 1986년부터 민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폐동 전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응단말 뒤에 있는 안산 기슭에서 서낭제를 지냈다.
• 주막거리
이익 선생 묘역 남쪽에 있었던 마을로, 이곳은 조선시대 때 인천-수원을 왕래하는 행려자가 많아 주막(酒幕)이 번성했다고 한다. 주막거리에는 경주최씨를 비롯해 여주이씨, 경주김씨 등 16호가 살고 있었으나 1981년에 폐동되어 현재는 택지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는 성호 이익 선생의 묘(경기도기념물 제40호)가 있으며, 그의 8대조인 이계손李繼孫(1423~1484, 병조판서)의 묘는 폐동 후 양평으로 이장되었다. 옛 수암면 성포2리에 속한 마을이나 시승격 후 일동에 편입되었다.
• 점섬•점성(占星)•첨성(瞻星)
이 마을은 조선 성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이계손의 묘를 이익 묘역과 수인산업도로 사이에 쓴 후 그의 셋째아들인 이지시李之時(1455~1505, 제천현감 역임)의 후손들이 묘하에 살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 그 후 여주이씨와 더불어 김해김씨, 밀양박씨 등이 세거해 이상의 3성을 ‘점섬의 3대 성씨’라 불렀다. 이곳은 이익李瀷(1681~1763) 선생이 초야에 묻혀 일생을 학문에만 몰두해 《성호사설》·《곽우록》 등 불후의 작품을 저술한 실학의 요람지이자 선각자의 땅이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郡內面) 첨성리(瞻星里)라 했는데 조선 후기 《호구총수》(1789)와 《기전읍지》(1895)에는 점성리(占星里)로 나타난다. 일제강점기에 시흥군 수암면 성포리에 포함되었고, 해방 후에는 성포2리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시 승격 이후에는 일동에 속하게 되었다.
점성 마을은 성호 선생이 살던 동쪽지역을 탑이 있던 곳이라 하여 ‘탑골[塔洞]’, 남쪽지역은 ‘아랫말’, 서쪽지역은 ‘건넌말’이라 불렀다. 폐동 때(1981년)에는 67호였다가 신도시개발로 택지로 조성되어 1986년부터 민가가 들어섰다. 폐동 전 마을 동남쪽에 있는 도당산都堂山(또는 사청)에서 매년 음력 7월 1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이곳에 있던 이우량李友諒(1532~?, 돈령교위), 이상신李尙信(1564~1610, 예조참판), 이우직李友直(1529~1590, 개성유수), 이우인李友仁(1535~1594, 사재감첨정), 이상홍李尙弘(1559~1596, 응교) 등의 묘는 화장 또는 이장되었다.
• 절골[寺谷]
점섬 아랫말과 화림선원 사이에 있던 마을이 절골이다. 이곳은 일제 초기에 군포시 산본동에 살던 청주한씨 형제가 도당산 절 밑에 처음 세거하면서 취락이 이루어졌는데, 폐동 때(1981)는 1집이 있었다. 신도시개발로 택지로 조성되었으며, 도당산에서 해마다 음력 7월 1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옛 수암면 성포2리에 속한 마을이나 시승격 후 일동에 편입되었다.
• 계향골[桂香洞], 등너머
큰 향나무가 있었다 하여 ‘계향골’이라 불렀고, 점섬 산등성이 너머에 위치해 있으므로 ‘등너머’라 부르기도 하였다. 18세기 문헌인 《섬와잡저》에는 지항(智巷)으로 나온다. 점섬 아랫말과 이동 사이에 있던 계향동은 경주김씨 등 14집이 있었으나 1981년 폐동된 후 택지로 조성되었다. 폐동 전에는 도당산에서 매년 음력 7월 1일에 산신제를 지냈다. 옛 수암면 성포2리에 속한 마을이나 시승격 후 일동에 편입되었다.
• 계향산(桂香山)
화림선원(옛 약수암) 뒷산으로, 은룡산(隱龍山)이라고도 불렸다. 화림선원에서 계향산 약왕사(藥王寺)이라는 초석이 발견되었다. 옛 수암면 성포2리에 속한 지역으로 시승격 후 일동에 편입되었다.
• 성태산(城台山)
청룡사 뒷산으로 1999년 제3대 안산문화원장을 지낸 유천형씨에 의해 삼국시대 산성이 발견되고 2000년 안산문화원과 한양대학교 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발간하였다.